쓰보이 사카에


 “목숨을 사랑하는 여느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아이를 낳아 키운 어머니이자 교사인 한 사람 삶을 그린 소설 《스물네 개의 눈동자》는 1954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교사가 할 수 있으며 해야 할 일 하나는 “목숨을 사랑하는 여느 사람”으로 가르치면서 이끄는 일이다. 어버이가 할 수 있으며 맡아야 할 몫 하나는 “목숨을 사랑하는 여느 사람”으로 키우면서 돌보는 몫이다.

 목숨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밥을 먹을 수 없다. 목숨을 사랑하지 않는데, 농사를 짓거나 사회·노동·환경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공장을 이끌거나 정치를 하거나 아이를 가르칠 수 없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든, 사람은 “목숨을 사랑하는 여느 사람”이어야 한다. 이 마음밭이 아니라 할 때에는 이름나거나 힘있거나 돈있다 할지라도 덧없다. 이 마음밭일 때에는 가난하든 못생기든 이름없든 언제나 아름다우면서 착하고 참답다.

 아름답게 살아가고픈 꿈을 꾸기에 아름다운 삶을 담아 글을 쓴다. 참다이 어깨동무하고픈 꿈을 꾸었기에 참다이 어깨동무할 삶을 보여주는 글을 쓴다. 착하게 사랑하고픈 꿈을 꾸면서 착하게 사랑할 꿈을 이룰 길을 걸으면서 글을 쓴다. (4344.2.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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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니 리펜슈탈


 레니 리펜슈탈을 옳고 바르게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레니 리펜슈탈을 깎아내리거나 추켜세우지 않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레니 리펜슈탈을 꾸밈없이 바라보며 찬찬히 곱씹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은 레니 리펜슈탈이지 라니 리펜슈탈이나 니레 옹펜슈탈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가를 깨닫는 사람은 그리 안 많습니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가를 깨달은 다음, 내가 하고픈 일에 내 모두를 바치는 사람은 더 적습니다. 내가 하고픈 일에 내 모두를 바치면서 온통 빠져드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어느 과학자는 핵폭탄을 다 만들고, 실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널리 만들어 사고팔도록 하고 나서야 겨우 핵폭탄 만드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가 하고 털어놓습니다. 온통 엉망진창으로 해 놓고 나서 느즈막하게 뉘우치는 사람이라 할 텐데, 이런 사람들은 뜻밖에도, 그동안 저지른 짓을 놓고 이렇게든 저렇게든 화살을 받지 않습니다.

 레니 리펜슈팔이 ‘린 리펜슈팍’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헤아려 봅니다. 여자 아닌 남자로서, 그동안 어떠한 사람(남자)도 이루지 못하던 일을 이룰 뿐 아니라, 어떠한 사람(남자)보다 튼튼한 몸과 힘과 머리와 재주로 새 문화와 삶을 헤쳐 나간다고 한다면, 이이를 바라보거나 마주하거나 사귀려는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곱씹어 봅니다.

 이사도라 던컨은 이사도라 던컨일 뿐입니다.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은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일 뿐입니다. 최승희는 최승희일 뿐이요, 박경리는 박경리일 뿐입니다.

 레니 리펜슈탈은 하느님도 성모도 아닌 자그마한 한 사람이며, 여자입니다. 곧은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여자이고자 하던 레니 리펜슈탈이지만, 이러한 삶결을 바라보는 사람은 당신 스스로 얼마나 아름답고 작은 한 사람이며, 남자이거나 여자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수잔 손탁은 레니 리펜슈탈을 말할 수 없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조차 하지 않으면서 불바늘로 쿡쿡 쑤시는 글을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글이란 따스한 사랑으로 아리땁게 어루만지는 이야기이지, 불바늘 괴롭히기가 아닙니다. 수잔 손탁은 사랑을 찾아 글을 써야 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잃거나 내다 버린 사랑을 되찾거나 아낄 수 있도록 북돋우는 글을 써야 했습니다. 어쩌면, 수잔 손탁부터 스스로 사랑을 잃거나 내다 버렸을는지 모르는데, 사랑 없는 눈으로는 사람과 삶을 읽을 수 없으며, 사람과 삶을 읽는 사랑을 보듬지 않고서야 사진도 책도 작품도 문화도 예술도 과학도 철학도 교육도 역사도 사회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을 읽으면 레니 리펜슈탈이 살았던 한때를 읽는 셈입니다. 레니 리펜슈탈을 읽으면 레니 리펜슈탈을 둘러싼 사람들을 읽는 셈입니다. 레니 리펜슈탈 둘레에는 착한 사람이 몇쯤 있었을까요. 레니 리펜슈탈 가까이에는 참다운 사람이 얼마쯤 있었을까요. 레니 리펜슈탈을 바라보는 이 가운데에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누가 있었을까요.

 레니 리펜슈탈은 당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받고 삶을 선물받으며 당신 스스로 꿋꿋하게 걸어갈 길을 씩씩하게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튼튼하게 한 발 두 발내디뎠습니다. (4344.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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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와 책읽기


 호들갑을 떨 까닭이란 없습니다. 두려워 한다든지 걱정할 까닭 또한 없습니다. 아쉽다고 여기거나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내 아이가 살아갑니다. 나한테 아이가 없으면 이웃에 아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 얼거리는 톱니바퀴와 같아, 톱니로 다루어지는 우리들이 떨어져 나가면 금세 다른 톱니를 갈아끼웁니다. 어느 회사이든 나 하나 없다고 회사가 멈춘다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를 갈음할 새로운 일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를 갈음할 사람이 많다 해서 내가 일을 못한다거나, 내 몫으로 들어온 사람이 일을 못할 까닭이란 없어요.

 시골집에서 논밭을 애써 일구는 동안 논밭은 정갈하게 다듬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골집 사람들이 하나둘 흙으로 돌아가거나 도시로 흘러들면, 정갈하던 논밭에는 갖은 풀이 돋고 나무가 우거집니다. 한 해만 지나도 묵정밭과 같고, 오래지 않아 여느 풀밭 모양새가 됩니다. 나중에 누군가 땅을 사랑할 농사꾼이 이곳으로 찾아온다면 묵정밭은 정갈한 밭으로 탈바꿈하겠지요.

 큰별이 진다고들 이야기합니다. 큰 어른이 숨을 거두었다고들 말합니다. 큰사람이 맡던 몫을 누가 맡을는지 모르겠다고들 합니다.

 큰별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별이든 작은별이든 똑같은 별입니다. 큰별이 졌으면 어디에선가 새로운 큰별이 뜹니다. 작은별이 졌을 때에도 어디에선가 작은별이 새롭게 떠요. 큰 어른이 숨을 거두었으면, 누군가 큰 어른이 되겠지요. 어쩌면 내가 큰별이 될 수 있고, 큰 어른 노릇을 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알뜰히 꾸리면 넉넉합니다. 내 살림을 내 깜냥껏 일구고, 내 이웃은 내 사랑으로 보듬으면 즐겁습니다.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삼 깨닫고, 잠자리에 들어 홀로 생각하다가 다시금 깨닫습니다. 곰곰이 돌이키자니, 이 땅에서 ‘천재’라 일컬을 만한 글쟁이나 예술쟁이가 참말 있었나 알쏭달쏭합니다. 아마, 천재 글쟁이나 천재 예술쟁이란 한 사람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

 아이들을 가리켜 영재라느니 무어라느니 떠들썩하지만, 아이들은 영재나 천재라서 무엇을 아주 잘하지 않습니다. 모차르트가 몇 살 때에 노래를 지었든, 이름난 테니스 선수가 몇 살 적부터 테니스를 배웠든, 이들을 놓고 천재라고는 일컬을 수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동무가 어김없이 있습니다. 참말 똑똑할 뿐더러 잘생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동무가 천재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데에서는 뜻과 마음이 하나라서 옆지기랑 함께 살아가는지 모르겠는데,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며 걸레질하는 살림꾼 어머니’와 같은 천재는 다시없다고 여겼습니다. 어쩌면, 날마다 먹고 또 먹어도 질리거나 물리지 않을 밥을 날마다 뚝딱뚝딱 세 끼니나 차릴 수 있을까 놀라웠습니다. 날마다 새옷을 헌옷으로 만들며 빨랫감을 잔뜩 쌓아 놓는데 어떻게 날마다 새로 입을 옷이 뚝딱뚝딱 태어나는지 대단했습니다. 살림꾼 어머니를 키운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살림꾼 어머니를 키운 어머니를 키웠을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으레 ‘남자 쪽 어버이’를 좇으면서 족보를 만든다느니 뿌리를 찾는다느니 합니다. 어느 쪽으로든 뿌리야 있겠지요. 어느 쪽 뿌리이든 살아숨쉬는 사람길일 테지요. 남자 쪽 어버이는 이름이 남아 영의정을 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벼슬을 하느니 학문을 하느니 하고 적힙니다. 여자 쪽 어버이는 아무런 이야기 하나 안 적힙니다. 그렇지만 여자 쪽 어버이가 살아온 결은 살림꾼 어머니들 손과 몸과 땀과 마음에 알알이 아로새겨지며 오늘날로 이어 왔습니다.

 여자가 집일을 도맡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여자 쪽 어버이가 살림꾼 일을 도맡으면서 일군 삶자락이 그지없이 ‘천재’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천재’로구나 싶을 뿐입니다. 여자 쪽 어버이 가운데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천재로 여기지 않았고, 천재로 여기는 사람이 없었으며, 천재로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그예 삶입니다.

 간장 고추장 된장 담기란 곧 예술입니다. 나물 김치 절임이란 바로 문화입니다. 밥 쌀 나락 모두 자연입니다. 똥지게 낫 호미 한결같이 삶입니다.

 글 잘 쓰고 춤 잘 추며 노래 잘 하는 여느 예술쟁이들은 거의 ‘기술자’처럼 흐릅니다. 오늘날 사진 잘 찍고 그림 잘 그리며 연극 잘 한다는 숱한 예술쟁이들은 으레 ‘전문가’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합니다.

 맛난 요리를 잘해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요리책을 쓸 만큼 무언가 남달리 밥을 차려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림꾼이면 될 삶입니다.

 똑똑하대서 더 잘 쓰는 책이거나 더 잘 읽는 책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대로 쓰는 책이며 살아가는 대로 읽는 책입니다. 내 삶을 담는 책인 만큼, 나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아름다울 책을 일굽니다. 내 삶으로 읽는 책이기에, 나 스스로 착하게 살아가면서 착하게 스며들 책을 받아들입니다.

 다 큰 어른들이 어린이 그림결을 흉내내어 꼼지락꼼지락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참으로 딱합니다. 다 큰 어른들은 다 큰 어른들 그림을 즐기면서 그려야지요.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어린이 삶을 즐기면서 그림을 그리면 될 뿐입니다. 《로빙화》에 나오는 고아명이든 고차매이든 천재가 아닙니다. 시골 농사꾼 아이로서 제 삶과 삶터를 사랑하는 마음씨를 착하게 돌보면서 그림 또한 사랑한 아이입니다. 반 고흐가 천재 그림쟁이였겠습니까. 당신 반 고흐 삶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동안 그림에 온 넋을 바친 어른 하나일 뿐입니다.

 리영희 님 같은 어른이 돌아가셨으니 ‘우리 삶자락 앞날을 밝힐 빛’이 사라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뒷사람은 리영희 님이 잘한 대목을 톺아보고 아쉬운 대목을 보듬으며 더욱 맑고 밝게 빛나면 됩니다. 아니, 애써 더욱 맑고 밝게 빛날 까닭이 없어요. 저마다 살아가는 자리에서 제 마음그릇에 걸맞게 즐거이 살아가면 아름답습니다. 리영희 님은 리영희라는 마음그릇으로 살아갔고, 우리들은 우리들 다 다른 이름과 삶을 담는 마음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소설쓰던 박완서 님을 돌아보면서 똑같이 느낍니다. 박완서 님이 흙으로 돌아갔대서 큰별이 졌다고는 조금도 느끼지 않습니다. 박완서 님은 박완서 님 삶대로 문학을 했을 뿐, ‘큰별이 되도록’ 문학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박완서 님이 짚지 못한 삶은 수두룩하게 많고, 박완서 님 스스로 살피지 못하거나 헤아리지 않은 사람들 삶이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수수한 여느 어머니들 삶을 다루지 못했대서 아쉬운 문학이 아니고, 수수한 여느 살림꾼 어머니들 삶을 다루어야 비로소 참문학이 아닙니다.

 기술자로 꾸릴 내 삶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될 내 꿈이 아닙니다. ‘프로페셔널’이나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그저, 나로서는 내 삶을 내 힘으로 단단히 움켜쥐며 당차게 다스리는 착하며 참답고 고운 ‘살림꾼’으로 씩씩하게 살아갈 때에 조용히 빛납니다. 나와 내 살붙이가 알아보며 느낄 만한 빛줄기를 얌전히 내뿜으면서 서로 활짝 웃습니다. 기술자가 되려고 책을 읽는 사람은 딱할 뿐 아니라, 스스로 기술자조차 되지 못합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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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혼인을 했어도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어머니’가 되지 못합니다. 혼인을 했으나 아이를 낳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버지’가 되지 못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매한가지입니다. 당신 아이가 아이를 낳아야 비로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됩니다.

 아이를 하나 낳아 기르고, 곧 둘째를 낳아 기를 어버이로 살아가면서 생각합니다. 아이 아버지로서 내가 좋아하는 글이란, 아이 아버지답게 내가 쓰는 글이란, 언제나 어린이를 살피는 글입니다. 어린이를 생각하지 않고 지식을 생각하며 쓰는 글은 예전부터 쓰기 싫었고 쓰지 않았으며 읽고 싶지도 않습니다.

 흔히 인문책은 지식책인 줄 잘못 알지만, 인문책은 지식을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지식을 다루면 지식책일 뿐입니다. 지식책이란 ‘기술서’입니다.

 인문책이란 삶을 다루는 책입니다. ‘삶책’을 한자말로 옮기니 ‘인문(人文)책’이 됩니다. 우리는 삶을 다루는 책인 인문책을 읽어야 하고, 앞으로는 ‘인문책’이라는 이름은 내려놓고 ‘삶책’이라는 이름을 옳고 바르며 쉽고 살가이 말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제 이름을 제대로 말하면서 제 삶을 제대로 꾸려야 비로소 내 삶이며 내 책이고 내 글인 가운데 내 꿈입니다.

 어린 날부터 책을 읽을 때면 ‘어린이를 사랑하는 넋’을 담은 이야기가 깃든 책을 좋아했습니다. 동화책이든 만화책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넋을 담지 않은 책은 재미있지 않았어요. 그리 당기지 않고, 손을 뻗기 어렵습니다. 《마징가 제트》 같은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는, 어린 날에도 그리 재미있지 않았을 뿐더러, 어른이 되어 다시 보아도 따분합니다. 《우주소년 아톰》 같은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는, 어린 날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넘겨도 눈물을 흘립니다. 똑같은 ‘로봇’ 만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로봇이 벌이는 싸움박질과 로봇을 앞세워 싸움박질을 하는 못난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다른 하나는 로봇에 깃들이는 사랑과 로봇뿐 아니라 뭇목숨을 아끼는 사랑스러운 넋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머니가 쓰는 글처럼 살가우면서 따스한 글은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막상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머니들 가운데 글을 쓰는 분은 몹시 드뭅니다. 더구나, 애 어머니가 쓰는 글을 책으로 묶는 일은 훨씬 드물 뿐 아니라, 책으로 내야겠다고 찾아나서는 사람조차 드뭅니다. 아니, 애 어머니는 누구한테 내보이려고 글을 쓰지 않아요.

 아이를 낳았어도 다른 사람 손에 맡긴 채 글을 쓰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꽤 많습니다. 이분들 또한 아이를 낳아 키우며 글을 쓰는 어버이라 할 만하지만, 그다지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못미덥습니다. 이모저모를 떠나, 이런 어버이들 글은 참 따분합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로서는, 아이하고 복닥이는 하루하루로 고되면서 즐거울 뿐, 애써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고마우면서 하루하루 잊고 새롭게 하루하루 맞이하는 나날입니다. 글까지 쓰도록 넉넉한 말미가 아니요, 그림이나 사진을 할 만큼 한갓진 겨를이 없습니다.

 어린이 삶을 헤아리기 때문에 더욱 포근하면서 보드랍습니다. 어린이 삶을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딱딱하거나 거칩니다. 어린이 입맛을 살피며 밥을 하듯, 어린이 눈높이를 살피며 글을 씁니다. 어린이 살결과 몸을 돌아보며 옷을 입히듯, 어린이 살결과 몸을 돌아보는 매무새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린이 눈썰미에 맞게 손을 잡고 마실을 다니듯, 어린이 눈썰미에 맞는 자리에서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이랑 복닥이며 함께 살아가야 바야흐로 어머니나 아버지입니다. 그래, 어머니들은 글도 잘 안 써 버릇 할밖에 없도록 집살림에 바쁘며, 책을 읽을 만큼 느긋하거나 호젓하지 않아요. 책을 쓰는 사람들은 ‘어머니가 읽을 만하’게 책을 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어머니가 즐겁게 짬을 내어 읽을 수 있는 책이어야 비로소 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여깁니다. (4344.1.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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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해문


 해마다 12월이 다가오면 새해에 쓸 책상달력을 사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합니다. 해마다 쓰는 책상달력은 해마다 바뀝니다. 열사 달력이라는 녀석도 써 보았고, 전교조 달력도 써 보았으며, 이철수 판화달력이라든지, 우체국에서 거저로 주는 달력이라든가, 눈빛출판사에서 내놓는 사진 달력도 써 보았습니다. 올해에는 알라딘 책방에서 선물로 보낸 달력 하나하고 편해문 님이 사진을 담은 ‘아이들 달력’을 씁니다. 편해문 님이 만든 ‘아이들 달력’은 “북녘 수해 지역 어린이 긴급 지원 기금 마련”을 할 생각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라밖 어린이들 맑고 밝게 노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열두 장짜리로 만든 ‘아이들 달력’은 하나 값이 만 원. 지난해에도 만 원에 책상달력 하나 샀고, 지지난해에도, 지지지난해에도 어김없이 만 원을 치르며 책상달력을 샀습니다. 해마다 버스값이며 찻삯이며 책값이며 물건값이며 과자값이며 술값이며 …… 오르지 않는 값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책상달력 값은 좀처럼 안 오르는군요. 그러나 이듬해나 이 다음해에는 만이천 원이나 만오천 원이 될는지 모르지요.

 어린이 놀이노래를 살피고 어린이 놀이삶을 헤아리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책을 묶는 편해문 님입니다. 지난해 우리 집 첫째 아이 사름벼리가 두 돌을 맞이했을 때, 나무로 깎고 빚은 ‘고래 수레’를 하나 선물로 보내 주었습니다. 편해문 님 딸아이도 이런 나무 놀잇감을 갖고 놀겠거니 헤아리면서 몹시 고마웠습니다. 우리 식구가 아직 인천에 있을 때 인천으로 마실을 하셨기에 함께 만나서 아이도 끼어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편해문 님 딸아이를 떠올리듯 우리 아이를 헤아려 주었어요. 편해문 님도 아이가 참 말을 안 들으며 말썽을 부릴 때에 아이 볼기짝을 때리기도 했다는데, 이제는 아이를 때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어느새 ‘아빠가 때리는 볼기질’쯤에는 익숙해져서 하나도 안 아픈 듯 예전과 똑같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면, 아이가 말썽을 부린다고 회초리질이든 매질이든 한다 해서 나아지거나 달라질 일이란 없습니다. 아이가 어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기도 한다지만, 아이로서는 까닭이 있어 말썽을 부립니다. 이를테면 졸린데 잠들지 못하니까 말썽을 부립니다. 엄마나 아빠가 저랑 안 놀고 다른 일만 하니까 저 좀 보아 달라면서 말썽을 부립니다. 배가 고파서 말썽을 부립니다. 심심하니까 말썽을 부립니다. 아이가 몰라서 잘못을 저지르든 알아서 잘못을 저지르든 어느 말썽이든, 밑뿌리를 캐어 보면 어른 탓 아닌 말썽이 없어요.

 말썽을 저지른 아이를 타이르면서 아이와 말을 섞습니다. 먼저, 아빠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아이도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차례가 바뀔 때도 있어요. 아이가 너무 모진 말썽을 부렸을 때에는. 물이나 국을 엎는다든지 유리잔이나 그릇을 깨뜨렸을 때에는. 흐르는 물과 깨진 조각을 얼른 치워야 하니, 아이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말라 하거나(유리조각 치울 때), 얼른 걸레 가져오라고 시킵니다(물 쏟았을 때).

 자주 만나거나 오래오래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던 사이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편해문 님이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던 때에 어린이 놀이노래를 살피며 어린이 놀이삶을 살피던 매무새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어린이 놀이노래랑 어린이 놀이삶을 살피던 매무새는 얼마나 다를까 궁금합니다. 아마, 한결같을 수 있고, 조금은 새롭게 태어났을 수 있겠지요. 한결같다 하더라도 남달리 거듭나는 매무새일 수 있으며, 새롭게 태어났다지만 한결같은 줏대와 뿌리를 고이 이을 수 있어요.

 지난 2009년 7월에는 《소꿉》이라는 사진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편해문 님이 인천마실을 했을 때 여쭈니, 살림이 쪼들려 사진기를 팔았다고 했는데, 2011년 ‘어린이 달력’을 들추니 2010년에 인도에서 찍은 어린이 사진이 있습니다. 살림돈이 넉넉하지는 않다지만, 어찌저찌 여행삯이랑 사진기값을 마련했나 봅니다. 아무렴, 그래야지요. 술도 안 하고 고기도 안 먹으며, 안동 시골집에서 나무를 베어 장작을 패며 불을 땐다고 하는 살림인데, 푼푼이 그러모아 사진기 한 대쯤은 거느려야지요. 자랑하려는 사진찍기가 아니라, 어린이 놀이랑 어린이 삶을 사랑스러우며 살가이 담는 고운 손길을 보여주는 예쁜 사진을 나누어 주어야지요. 올 2011년 7월쯤 맞이할 때에, 《소꿉》에 이어 “고무줄”이나 “술래잡기” 같은 이름으로 둘째 사진책을 내놓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비손을 합니다. (4344.1.23.해.ㅎㄲㅅㄱ)
 

 

 

 

 

 

 

 

 

(다른 사람 아이를 업어 주기란, 또 다른 사람한테 아이가 업히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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