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원


 개구진 계집아이는 언제나 있다. 그렇지만 개구진 계집아이는 늘 사람 대접을 못 받았다. 오늘날은 여자 권리가 많이 나아졌다고 하니까, 개구진 계집아이도 사람 대접을 받을까. 개구지기는 사내아이나 계집아이나 짓궂기 마찬가지일 테니까, 요놈들 철 좀 들으라 말해야 옳을까.

 나는 이향원 님 만화를 즐기던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세모’라는 토박이말 이름이 붙는 착하며 몸이 조금 느린 아이를 먼저 떠올린다. 이와 함께 세모 곁에서 늘 힘이 되는 말괄량이이자 개구쟁이요 힘세고 살림도 잘하며 씩씩한 계집아이를 떠올린다. 세모랑 개구진 계집아이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한동아리이다. 두 아이가 있기에 이향원 님 만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개구진 계집아이를 만화로 그리는 사람은 늘 있다. 그러나 개구진 계집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우면서 믿음직한가를 알뜰히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다. 앞장서서 공을 차고 앞장서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앞장서서 짐을 나른다. 노상 모든 일에서 스스럼없이 나선다.

 그런데, 개구진 계집아이는 제 이름을 날리려고 앞장서지 않는다. 나는 우리 집 책시렁에 얌전히 꽂힌 이향원 님 만화책을 들추어 넘겨야 비로소 개구진 계집아이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난다. 조용하며 얌전한 사내아이 이름은 만화책을 넘기지 않아도 ‘세모’라고 떠오른다. 왜 그럴까. 덜렁대며 억세며 나대는 아이 이름은 왜 떠오르지 않을까. 어쩌면 개구진 계집아이는 늘 저가 아닌 제 둘레 다른 아이를 돋보이도록 이끌며 슬그머니 뒤로 제 모습과 이름을 숨기면서 기뻐하기 때문은 아닐까. 저 스스로 잘나려고 나대는 개구진 계집아이가 아니라, 저 스스로 힘여리고 착하기만 한 얌전둥이를 도와주려고 힘쓰기 때문에, 나중에는 살며시 발을 빼지 않을까.

 말괄량이 삐삐 영화를 보면, 삐삐는 ‘책읽기 좋아하는 토미’한테 조그맣고 예쁜 책을 슬쩍 선물해 준다. 삐삐한테서 하모니카를 선물받은 아니카는 언제나 하모니카를 갖고 다니면서 틈틈이 하모니카 노래를 부른다. 풀줄기를 나팔처럼 불던 삐삐를 본 토미와 아니카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삐삐한테 ‘나팔(트럼펫)’을 선물해 준다. 토미와 아니카는 고작 여덟아홉 살 나이인데에도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손뜨개’한 옷가지를 선물하고, 아홉 살 삐삐 또한 제 사랑스러운 말한테 손뜨개 목도리를 선물한다. 여느 때 보면, 삐삐와 함께 살아가는 원숭이 닐슨 씨는 삐삐가 손뜨개로 짠 옷을 입는다.

 한국 만화쟁이 이향원 님이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문득 생각하자니, 이제 내 나이는 내가 코흘리개였을 때 이향원 님 만화를 좋아하던 ‘그무렵 이향원 님이 우리한테 만화를 그려 주던 그 나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까, 이향원 할아버지가 되었으며, 조금 일찍 숨을 거두었다 할 만하지만, 흙으로 돌아갈 나이가 되었기에 고요히 흙사람이 된 셈이다.

 숨을 거둔 만화쟁이 한 사람이 한창 여러 가지 만화를 그려서 내놓던 무렵은 당신 나이가 가장 펄떡펄떡 살아숨쉬던 나이였고, 나는 이제 내가 코흘리개 때 보던 만화를 그린 분이 펄떡펄떡 살아숨쉬던 나이를 살아간다.

 나는 언제쯤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갈까. 내가 쓰는 글은 코흘리개 어린이가 읽도록 하는 글은 아니니까, 내가 흙으로 돌아간대서 내 글을 읽던 사람들이 한창 젊거나 바지런히 일할 나이가 되지는 않으리라.

 흔히들, 이향원 님을 두고 야구 만화라든지 강아지 만화를 즐겨 그렸다고들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틀리지 않으리라. 이향원 님 만화감은 야구나 강아지가 많았으니까. 그렇지만 나한테 이향원 님 만화는 가난한 살림집에서도 개구지며 씩씩하게 살아가며 바지만 입는 계집아이 하나와 착하디착하고 조용한 ‘세모’라는 사내아이가 이루며 빛내는 수수하며 해맑은 고운 삶이야기이다. (4344.2.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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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1-02-26 08:37   좋아요 0 | URL
말괄량이 이름은 '꼭지'였다. 어느 분 블로그를 보다가 알았다. 마음이 좀 그래서 책꽂이에서 책을 뒤적이지 않았는데, '세모'와 '꼭지'라, 참 잘 어울린다...
 



 Ansel Adams


 안젤 아담스라 해야 할는지 안셀 아담스라 해야 할는지 알쏭달쏭한 미국땅 사진쟁이 사진책을 하나 장만한다. 지난해 12월에 이 사진책을 처음 마주하고선 이내 장만하고 싶었으나 그때에는 다른 사진책들 장만하느라 벌써 27만 원을 쓴 나머지, 이 사진책까지 장만할 수 없었다. 다음에 서울마실 할 때에 지나가면서 사자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달 가까이 좀처럼 서울마실을 할 수 없었고, 사이에 살짝 서울을 거쳐 지나가기는 했으나 나라밖 사진책을 새책으로 많이 갖추어 놓고 파는 이곳까지 찾아오지는 못한다. 설마 팔리지는 않았을까. 바깥에 내보이는 책 하나만 남았을 텐데, 이 책이 팔리면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텐데.

 어제 드디어 홍대전철역 안쪽 골목에 자리한 책방 앞을 지나간다. 합정역부터 신촌역까지 책으로 무거운 가방이랑 빨래한 아이 옷가지를 잔뜩 짊어지고 땀 뻘뻘 흘리며 걸어서 찾아간다. 안젤 아담스는 팔리지 않았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여러 해째 안 팔리지는 않았을까. 60리터짜리 내 베낭에조차 안 들어가는 커다란 판크기로 된 꽤 묵직해서 작은 아령 하나 같은 사진책인데, 값이 고작 7만 원. 책방 일꾼한테 묻는다. “와, 이 책은 되게 싸네요.” “네, 이 책은 꽤 싸게 들어왔던 책이에요.” 다른 사진책 값을 가눈다면 이 사진책은 십오만 원쯤은 될 듯했는데, 참 값싸게 샀다. 고작 칠만 원밖에 안 하는 안셀 아담스였는데, 왜 사진쟁이들은 홍대 앞을 그토록 뻔질나게 드나들거나 오간다 하면서 이 녀석을 알아보지 않았을까.

 나는 안젤 아담스 사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걷는 사진길하고는 많이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찍는 사진감이 다를 뿐, 사진감을 사진으로 담아내려는 땀이나 품이나 넋이나 뜻이나 꿈이나 씨는 다를 수 없다. 사람과 삶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사진을 할 수 없다. 사람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사진에 다가설 수 없다. 사랑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늘 헤아리며 고이 껴안지 않고서야 사진을 껴안을 수 없다. 사진은 삶이고, 사진은 사랑이며, 사진은 사람이다. 안젤 아담스는 너른 자연을 많이 찍은 사진쟁이이지만, 너른 자연만 사진으로 찍지 않았다. 사람도 꽤 많이 찍었다. 안젤 아담스가 찍은 자연은 사람 얼굴이고, 안젤 아담스가 찍은 사람은 자연이다.

 헌책방을 사진으로 찍거나 골목길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생각한다. 헌책방 둘레나 골목길 언저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함께 담아야 헌책방 사진이 더 빛나거나 골목길 사진이 더 어여쁘지 않다. 사람을 따로 더 담아야 할 사진이 아니라, 사람내음과 사람소리와 사람결을 담아야 할 사진이다. 손길을 담지 못하면서 손만 찍는다 해서 제대로 찍은 사진이 아니다. 활짝 웃거나 슬피 우는 얼굴을 찍었대서 이 한 장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말할 수 없다. 사진이 삶이요 사람이며 사랑이라 말하는 까닭은 사진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이루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글과 그림과 노래와 춤과 연극과 영화도 매한가지이다. 모두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를 다루는 틀이 저마다 다르기에 글이 되고 그림이 되며 노래나 춤이 된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다. 사진은 그림이나 예술이 아니다. 사진은 그예 사진이다. 안젤 아담스는 예술사진이 아니라 사진이다. 안젤 아담스는 풍경사진이나 자연사진이 아니라 사진이다. 사진하는 마음을 안젤 아담스한테서 읽거나 느껴야 한다. 사진하는 삶과 사진하는 사랑을 안젤 아담스한테서 깨달아야 한다. 나는 안젤 아담스 사진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안젤 아담스 사진책이 보이면 돈이 얼마가 들든 아랑곳하지 않고 주머니를 턴다. 주머니를 털어서 안젤 아담스 사진책을 사야 한다.

 유진 스미스 사진책도 사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찾아내지 못한다. 그립다. 돈이 있다 해서 살 수 있는 사진책이 아니니까, 참말 그립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몹시 비싼 판으로든 뜻밖에 아주 값싼 판으로든, 유진 스미스도 안젤 아담스처럼 나한테 스며들 날을 맞이하겠지. (4344.2.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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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책읽기


 좋은 사람을 마주하면 좋은 사람이 나누어 주는 좋은 삶과 넋과 말을 받아들이면서 즐겁습니다. 나쁜 사람을 마주하면 나쁜 사람이 풍기는 나쁜 삶과 넋과 말을 맞아들이면서 괴롭습니다.

 살아가면서 늘 좋을 수만 없으니 나쁜 일도 겪겠지요. 그러나 좋고 나쁜 일이 되풀이되는 삶이라기보다, 좋은 사람을 마주하는 동안 나부터 좋은 삶을 일굴 때에 나와 내 둘레 사람들한테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가를 헤아립니다. 나쁜 사람을 마주해야 하는 동안 나부터 나쁜 짓을 하면서 살아갈 때에 나부터 얼마나 나쁜 냄새를 풍길 뿐 아니라 내 둘레 사람한테도 얼마나 괴로우며 고달플까를 떠올립니다.

 좋다 하는 책이 아닌 나 스스로 좋다고 느끼는 책을 읽을 때에는 내 삶을 좋은 쪽으로 일굽니다. 나쁘다 하는 책이 아닌 나 스스로 나쁘다고 느끼는 책을 쥐어야 할 때에는 내 삶이 나쁜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단단히 다스리거나 추스릅니다. (4344.2.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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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무라 이헤이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책 두 권을 장만했다. 인터넷책방에서 한다는 해외배송이라는 틀에 따라 주문해서 석 주쯤 걸려 받아본다. 여권이 집구석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돈없는 내 삶에서, 누군가 여권을 다시 만들어 주며 바깥마실값을 베풀어 주지 않는다면 일본이건 중국이건 나들이를 할 수 없다. 나라밖 마실을 할 수 없는 내 삶이란, 나라밖 책방을 쏘다니며 나라안에 들어오지 않는 애틋한 책을 장만할 수 없다는 소리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나라안 헌책방을 바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누군가 애써 장만한 다음 고마이 내놓아 준 나라밖 책을 반가이 맞아들이는 일 한 가지이다.

 인터넷책방에서 나라밖 사진책을 장만하자면 돈이 꽤 든다. 그렇지만 비행기삯이며 여러 날 드는 품이며 무거운 책을 들고 지고 나르는 품이며 헤아린다면 하나도 안 비싼 값이라고 느낀다. 더구나, 꿈에 그리던 책을 돈 몇 푼에 내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쓰다듬을 수 있기까지 하니, 그지없는 보배가 아닌가 싶다.

 2000년 즈음인가 헌책방에서 겨우 한 권 고맙게 만났던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책을 드디어 새로 장만하면서 이래저래 더 알아보니, 예전에 나온 책을 사자면 영어이든 일본말이든 더 잘해야 할 텐데, 나로서는 참 까다롭다. 우리 나라 인터넷책방에는 내가 바라는 책이 목록으로 뜨지는 않는다. 시골 읍내 책방에서 이런 책을 주문하거나 받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라밖 책을 주문해서 받자면 서울에 있는 책방으로 찾아가서 이야기해야 한다. 가볍게, 또는 가뜬하게, 또는 홀가분하게, 또는 살며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서 사람들이 따사로우며 넉넉하게 어우러지는 삶자락을 사진으로 엮은 기무라 이헤이 님 같은 분들 사진책이라면, 품과 땀과 돈을 많이 들이면서 차곡차곡 장만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리 따뜻하지 못한 손길로 껍데기만 번쩍번쩍 꾸민 숱한 나라안 사진책이 으레 5만 원이니 7만 원이니 10만 원이니 하는 판에, 일본돈으로 1만 엔 하는 사진책 하나를 한국에서 장만하며 치러야 하는 돈이란 조금도 비싸지 않다. 그러나, 돈이 아니라 책을 찾기 어려우니 걱정이다.

 저녁나절, 졸음에 겨운 아이를 아버지 무릎에 앉히며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책 하나를 펼친다. 아이한테 사진읽는 눈을 길러 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예 들여다보면 따뜻해지는 사진이니까 아이하고도 함께 보고 싶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사진을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이 사진은 어떠하고 저 사진은 어떠하다고 이야기한다.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을 풀이하고, 이렇게 알뜰히 찍은 사진은 구석구석 볼 만한 대목이 많으며 이야기가 넘친다고 도란도란 속삭인다. 아이는 “응, 응.” 하면서 제 아버지 말을 귀담아듣는다.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은 흑백으로 이루어진다. 빛깔사진도 찍었을까? 기무라 이헤이 님 빛깔사진은 어떤 느낌 어떤 맛 어떤 삶일까? 그러고 보니,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책을 넘기면서 당신 사진이 ‘흑백사진인지 아닌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사진’이라고만 생각했고, 사진책을 보면서 ‘사진인가 아닌가’조차 헤아리지 않았다. 흑백사진 아닌 사진이요, 사진 아닌 삶이며, 나라밖 일본사람들 삶이라기보다 그저 어디에서나 마주하는 살가운 사람들 수수한 매무새라고 여겼다.

 그렇다. 일부러 흑백사진으로 찍어야 할 까닭이 없다. 애써 빛깔사진으로 담아야 할 까닭도 없다. 그냥 사진이면 된다. 그런데 굳이 사진이라는 틀로 담아야 할 까닭 또한 없다. 글이면 어떠하고 그림이면 어떠하며 사진이면 어떠한가. 반드시 사진이기 때문에 더 잘 담아낼 수 있지는 않다. 사진은 그예 사진일 뿐인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결을 껴안거나 얼싸안거나 부둥켜안는 너른 품일 때에 사진은 그예 사진이 된다. 그예 사진이 되는 사진이란 곧바로 삶이며, 이러한 삶에는 사람들 하루하루가 곱게 아로새겨진다. 머나먼 옛날이라 할 만한 1930년대에 찍은 사진이든 좀 가까운 옛날이라 할 만한 1970년대 사진이든 다르지 않다.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2010년대 사진이라 해서 값어치가 덜하지 않다. 1930년대이든 2010년대이든 똑같은 사람들이 나고 죽고 젊다가 늙으면서 얼크러지는 한살이일 뿐이다.

 사진이란 문화가 아니다. 사진이란 예술이 아니다. 사진이란 사진이다. 사진이 사진이 되는 자리란, 사진을 하는 사람이 사진을 내 삶으로 예쁘게 돌볼 때이다. 내 삶으로 예쁘게 사진을 돌보는 사람들은 누구하고 이웃을 하면서 어떠한 사람들 어떤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든 더없이 포근하면서 웃음꽃이 절로 피어난다.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든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한결같이 사랑스럽다.

 사진찍기를 한창 내 삶으로 곰삭이면서 앞으로 내가 걸을 사진길을 곰곰이 돌아보던 때, 헌책방에서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책 하나 만난 일은 나로서는 대단한 선물이었다. 아마, 내가 헌책방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고등학생 때에 맞아들이지 않았다면 이러한 선물을 받을 수 없었겠지. 어쩌면, 내가 고등학생 때에 나한테 헌책방 속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준 헌책방 일꾼이 남몰래 나한테 뿌려 놓은 책씨가 열 해쯤 지나서 싹을 튼 셈이라 할 만하고, 이 책씨가 무럭무럭 자라 이제서야 줄기를 올린 셈인지 모른다. 앞으로 또 열 해쯤 지나면 이 책씨는 잎을 틔우는 튼튼한 들풀 한 가지가 될 수 있을까.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은 들풀과 같은, 아니 꼭 들풀이라 할 만한 사진이다. (4344.2.1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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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 님과 진보집권플랜


 김규항 님이 〈한겨레〉라는 신문에 “좀더 양식 있게”라는 글을 실었단다. 이 글에서 오연호 님과 조국 님이 낸 책이름 《진보집권플랜》을 걸고 넘어진다. 걸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책이름이니 마땅히 걸고 넘어져야 한다. 나는 이런 엉터리 이름은 아예 걸고 넘어질 값이나 뜻이나 보람이 없다고 느꼈다. 누리신문 〈오마이뉴스〉는 처음부터 진보신문도 좌파신문도 개혁신문도 민주신문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보수신문이나 우파신문이나 수구신문이나 짝퉁신문이나 상업신문도 아니다. 그냥 ‘서울 지식인 신문’쯤이라고 하면 될까. 김규항 님은 오연호 님이나 조국 님을 일컬어 ‘개혁적인 중산층 엘리트’라고 하지만, ‘개혁적’과 ‘엘리트’라는 낱말은 걸맞지 않다. ‘중산층’ 하나는 걸맞는다고 느낀다. 이명박 정권을 나무라고 노무현 정권을 추켜세운대서 개혁이지 않다. 무엇을 나무라고 무엇을 추켜세우는가를 돌아보면서 개혁이 참다운 개혁인가 아닌가를 살펴야 한다. 어떤 삶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삶바라기’가 참으로 개혁다운가 아닌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모든 부질없는 말놀이는 다들 ‘서울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느낀다. 서울에 몰려들어 서울에서 오글오글 권력다툼 이름다툼 돈다툼을 하니까 불거지는구나 싶다.

 가만히 보면 ‘진보 집권’이든 ‘개혁 집권’이든 ‘민주 집권’이든 걸맞지 않다. ‘서울 집권’일 뿐이다. 서울에서 서울시장이나 서울에서 정치하는 사람들 몸짓 발짓 손짓에 따라 춤을 춘다. 큰 틀에서 볼 수 있다면, 조선일보이든 한겨레이든 중앙일보이든 경향신문이든 온통 ‘서울신문’이다. 매일경제이든 파이낸셜뉴스이든 오로지 ‘서울신문’이다. 서울에서 정치하고 장사하며 문화하고 철학하는 사람들 이야기만 다루는 신문들이다.

 기자와 지식인과 교수와 운동가와 시민단체가 ‘서울 아닌 한국땅’에서 ‘서울사람 아닌 지역사람’으로서 살아간다면, 진보집권플랜처럼 껍데기만 잘 씌운 빈수레 이야기는 나올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책을 옳게 못 읽는 사람 또한 없으리라 생각한다.

 김규항 님은 서울 또는 서울 둘레에서 살아가지만 서울바라기가 아니다. 이리하여, 진보집권플랜 같은 이름과 책과 속살을 이럭저럭 옳게 짚거나 읽는다. 서울 또는 서울 둘레에서 안 살더라도 서울바라기와 같은 삶매무새라면 진보집권플랜이 뒤집어쓴 껍데기를 알아채지 못한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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