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 친일 작품 1 (2008.4.30.)
 ― ‘친일’작품 나왔으니 무덤에서 파내어 다시 죽이자?



 이원수 선생 친일 작품 이야기가 나온 지는 2002년 3월부터이니까 제법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이원수 선생을 놓고 꺼내는 ‘친일부역’은 그다지 알맞아 보이지 않는다. 이원수 선생이 병을 앓아 드러누운 때가 1970년대 끄트머리요, 병실에 드러누워 입으로만 따님한테 겨우 몇 마디 읊조리면서 이야기하는 삶으로 여러 해 보내다가 1981년에 영영 떠나셨다. 세상을 떠나기 앞서 여러 해 동안 밥도 먹지 못하고 고무호스로 영양소를 위로 집어넣으며 겨우 목숨을 이어나가셨다. 살아 있는 동안 수많은 일을 하느라 당신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와 동화 창작뿐 아니라 나라밖 좋은 어린이문학 번역, 그리고 뜻있는 어린이문학가를 키우고 돌보는 일과 어린이문학 단체가 비틀리지 않도록 지키면서 가꾸는 일을 한 이원수 선생이다.

 그렇다. 해방 뒤, 어린이문학 단체 이끄는 일을 맡아 해 오면서, 독재정권에 빌붙는 허수아비와 끄나풀한테 얼마나 시달리던 이원수 선생이었던가. 독재정권 허수아비와 끄나풀은 얼마나 이원수 선생을 쓰러뜨려서 이 나라를 움켜쥐고 뒤흔들려고 했던가.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독재정권에 빌붙는 허수아비들을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얼마나 공격을 받고 힘들게 살아야 했던가. 외로운 기둥이 되어 갖은 바람과 모진 말밥을 견디면서 얼마나 아이들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하셨던가.

 지난 50∼70년대, 독재정권 허수아비와 끄나풀에 맞서서 이 땅 아이들을 지키려고, 또 이 땅 아이들을 사랑하는 힘여린 동료 어린이문학가를 보듬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리고 ‘간첩’으로 몰리고 형사가 뒤를 밟고, 쓰는 글마다 검열에 시달리면서 차가운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이원수 선생은 피땀을 흘리며 고달프고 외로웠어도, 또 모두들 독재자한테 입다물고 있었어도 붓을 들어 이승만을 비판하고 박정희를 비판하는 동시와 동화를 남겼다. 모두들 조용히 입닥치고 있을 때, 꿋꿋하게 붓을 들어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동화를 쓰면서 그 어둡던 세월에 아이들한테 힘과 희망을 실어 주려고 했다. 아파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몸으로 병자리에 누워 있는 1980년 그때에도 광주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당신이 광주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못 써서 안타깝다는 이야기만 하셨다. 곧은 한길에서 비껴나지 않으려고 꼿꼿하게 살아가셨는데, 당신이 살아오던 그동안에 당신이 할 수 있던 가장 걸맞는 ‘죄 씻기’는 무엇이었을까. 당신은 왜 당신 양심은 못 지키면서 당신 후배들과 이 나라 아이들만 지키려 했는가.

 명단 4776명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친일부역을 한 숫자가 이만큼밖에 안 된다고?

 친일인명사전에는 딱 한 사람만 들어가도 괜찮다. 한 사람만 넣든 백 사람을 넣든 만 사람을 넣든, 친일부역 작품 넣기로만 끝내서는 안 된다. 작품을 넘어야 한다. 친일작품을 남겼던 사람들이 보여준 그네들 삶을 함께 말해야 한다. 이들이 해방 뒤 꾸려온 삶을 함께 말해야 한다. 일제식민지 때, 친일을 하지 않고도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은 친일작품이 없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친일작품은 없으나 독재부역에 온마음 바친 사람들은 무엇인가.

 사람들 성격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속으로만 끙끙 앓으면서 사는 이가 있고, 털털하게 털어내는 사람이 있으며, 어려움을 맞불 놓듯이 헤쳐나가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흐름과 사람 성품에서 이원수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죄는 묻고, 잘잘못은 따져야 한다. 그런데 ‘이원수 선생 기리는 사업을 모두 접으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뭐하자는 소리인가? 이원수 선생 같은 분은 마땅히 기념사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해야 한다. 이원수 선생이 살아 있는 동안 이루어낸 훌륭한 발자취는 이 발자취대로 우리들이 이어받고 물려받고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원수 선생이 안타까이 남긴 발자취도 안타까운 발자취대로 곱새기고 되새기고 아로새겨야 하지 않을까. 티끌 한 점도 없을 줄 알았던 이원수 선생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던 아픈 티끌을 간직한 채 온삶을 보내었던 이원수 선생이었음을 헤아리면서, 배울 대목은 배우고 비판할 대목은 비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너, 예전에 이런 잘못을 저지른 적 있으니까, 넌 죽어서도 씻을 수 없는 전과자야!’ 하고 도장을 찍으면서 ‘죽은 주검을 파내어 사형을 시키겠다’는 소리인가.

 2002년 3월에 경남대 박태일 교수가 이원수 선생 친일시 문제를 꺼냈을 때, 이오덕 선생은 “선생의 빛나는 모든 작품뿐 아니라 일제 마지막에 썼다는 그 친일 동시까지도 있는 그대로 죄다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더 큰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선생도 저승에서, 생전에 스스로 깨끗이 보여 주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하여 준 일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작품을 읽게 되는 우리 아이들까지도, 세상의 어른들이 하는 모든 일을 더 깊게 더 넓게 생각하게 되고, 더 참되게 깨닫고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무결한 성인군자처럼 살아간 위인에게서보다도 결함이 있었던 사람, 자기와 비슷한 점이 있었던 사람한테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듯이, 나도 한때 잘못했지만 그것을 뉘우치고 바르게 살면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구나 하고 자신감을 가지게도 될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훌륭하게 남긴 작품은 훌륭한 모습이고, 안타까이 남긴 자취는 안타까운 자취다. 어느 하나는 씻어내거나 없는 듯 꾸밀 수 없고, 어느 하나만 돋보이도록 할 수 없다. 이렇게 해야 살아 있는 가르침이 되지 않겠나.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뜻도 이런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한 사람 삶과 발자취를 깊이 더듬거나 헤아리는 가운데 ‘이런 잘못을 드러내고자 하는 일은 우리 역사를 바로잡아 가르치고자 함’이라 한다면, ‘때려잡기’가 아닌 ‘살아숨쉬는 가르침’이 되도록 슬기로운 길을 함께 찾아야 하리라 본다. 친일인명사전은 인기투표 하는 사전이 아니다. 이름을 깎아내리거나 땅속에 파묻어 버리자는 사전도 아니다. 우리가 참답고 아름다이 살자고 하는 사전이다.

 한 점 티끌이 없을 줄 알았던 사람한테서도 티끌이 있었음을 느끼고 실망하거나 내동댕이치자는 친일인명사전인가? 한 점 티끌을 감싸안으면서 이와 같은 슬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가슴에 새기고 되뇌이자고 하는 친일인명사전인가? 《얘들아 내 얘기를》(웅진출판사,1984)이라는 이원수 선생 수필에 나오는 글을 몇 대목 옮겨 본다.


.. 도둑의 이야기가 났으니 하나만 더 하기로 하자. 어느 겨울의 일이다. 내 집에도 인기척을 듣고 나가 보니, 키가 큰 사나이가 대문을 나가고 있었다. 좀 무서웠다. 그러나 나갔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딸아이가 하는 말이, “아버지, 내 새로 산 장갑 여기 뒀었는데 가져갔어요?” 했다. 식구들이 사방을 두루 살펴보아도 없어진 건 따로 없었다. 그럼 도둑은 기껏 내 딸의 장갑만 집어간 것이다. 큰마음먹고 남의 집에 들어온 도둑으로서는 참으로 보람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별로 가져갈 만한 물건이 없는 것은 내가 부자의 생활을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추운 겨울이다. 이런 때, 장갑은 역시 필요한 물건이다. 몇 푼어치 되지도 않는 장갑만 들고 도망친 그 도둑은 그 장갑을 어떻게 했을까? 그까짓 것 어디 갖다 팔아도 돈이 될 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 도둑은 어쩌면 제 딸아이나, 제 누이동생에게 그 장갑을 주었을 때, 딸이 어쩌면 이렇게 물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이거 샀어?” 그러나 그 장갑은 새것이기는 하지만 몇 번 낀 것이니까 아주 새것은 아니다. 그 딸도 그런 것쯤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아버지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대답하기가 어려워서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딸아이가 만일 내가 보는 자리에 그 장갑을 끼고 나타났다면, ‘얘, 그 장갑 어디서 났니? 그건 우리 거야, 이리 내!’ 하고 말할 생각은 아예 없다. 나는 그 아이의 장갑 낀 손을 덥석 잡고, ‘아가, 너 장갑 좋구나! 엄마가 사 줬니?’ 하고 어루만져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태연히 참고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잘못하면 그 애의 손을 잡고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났다 ..  (이원수-잃어버린 장갑)


.. 나막신 장수는 비가 와야 좋아하고 미투리 장수는 날이 개어야 좋아하는 것같이, 지루한 비라도 다들 싫어할 때도 우산을 파는 아이들은 좋아 날뛰는 광경도 자주 본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8ㆍ15 해방이 되어 모두가 다 좋아했는데 그 중에는 은근히 싫어한 사람도 있었고, 남북통일은 우리 민족 모두가 바라는 것이지만 은근히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  (이원수-태풍 ‘빌리’ 호와 포플러숲의 바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어떠한 낱말도 그 자체로서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 ..  《김우창-궁핍한 시대의 詩人》(민음사,1977) 379쪽

 ‘단어(單語)’가 아닌 ‘낱말’이라고 적으니 반갑지만, “그 자체(自體)로서”와 “고정(固定)된 의미(意味)”라고 적은 대목에서는 서글픕니다. “그 낱말로서”와 “굳어진 뜻”으로 고쳐 줍니다. “갖고 있지는 않다”는 “담고 있지는 않다”로 손보거나 앞말과 이어 “뜻이 굳어져 있지 않다”로 손봅니다.

 ┌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
 │→ 하나로 붙박힌 뜻을
 │→ 하나로 굳어버린 뜻을
 │→ 한 가지 뜻만을
 │→ 한 가지 뜻으로 굳어져
 └ …


 세상 모든 분들이 훌륭한 이론과 논리만 펼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훌륭한 이론과 논리를 펼치는 분들이 모두 자기가 펼치는 이론과 논리대로 몸을 움직이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말만 하지는 말아 주셔요. 훌륭해 보이는 말만 들려주지는 말아 주셔요. 말하는 분부터 손쉽게 몸으로 옮겨내지 못할 말은 섣불리 펼치지 말아 주셔요. 말하는 분께서 가슴속 깊이 곰삭여서 받아들인 이야기까지 아니라면 되도록 삼가 주셔요.

 세상 모든 말은 움직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말은 없습니다. 따로 보기를 들고 싶지 않습니다만, ‘computer’가 언제부터 우리가 익히 쓰는 ‘컴퓨터’ 뜻이었을까요. ‘car’가 언제부터 우리가 즐겨쓰는 ‘자동차’ 뜻이었을까요.

 요즈음은 ‘다리’라는 말도 거의 안 쓰입니다. 한강에 수두룩히 놓인 저 다리뿐 아니라 부산에 놓인 다리, 또 인천시에서 빚까지 뒤집어쓰면서 지으려고 하는 어마어마한 다리도 ‘다리’인데, 이 다리가 짧으면 ‘橋梁’이라고 적고, 길면 ‘大橋’라고 적더군요. 우리 말 ‘다리’가 쓰이는 자리는 ‘돌다리’나 ‘출렁다리’쯤입니다. 그나마 ‘출렁다리’조차 쓰기 싫다며 ‘懸垂橋’를 쓰는 우리 나라 공무원입니다.

 우리는 왜 ‘긴다리’와 ‘짧은다리’라는 말을 빚어내지 않을까요. 우리는 왜 ‘큰다리’와 ‘작은다리’라는 말을 지어내지 못할까요. 우리 말로 가리키면 어설픈가요. 우리 말로 나타내면 모자란가요. 우리 말로 이름을 붙이면 알맞지 않은가요. 우리 말로 이야기하면 ‘form’이 안 나는지요.

 책을 이야기하는 신문자리에 ‘북’도 아닌 ‘book’을 쓰는 일, 나라살림이나 집살림을 이야기하는 신문자리에 ‘경제’나 ‘이코노미’도 아닌 ‘money’를 쓰는 일은 워낙 오래된 일입니다. 아예 이대로 굳어버린 듯합니다. 운동경기 핸드볼에서는 퍽 옛날부터 ‘도움주기’라고 써 왔으나, 농구나 축구에서 ‘도움주기’라고 쓰면 마치 ‘북녘사람들처럼 말하는 셈’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핸드볼 경기를 하는 사람은 뭐지요.

 배구 경기가 ‘프로’가 아닌 ‘아마’였을 때는, 경기를 알려주는 방송 사회자나 경기 소식을 담는 신문기자 모두 ‘가로막기’만을 말했으나, 이제는 ‘블로킹(blocking)’이라고만 말합니다. 또한, ‘아마’배구였을 때에는 없던 기록이 새로 생기면서, 지난날에는 ‘건져올렸습니다’ 하던 말을 ‘디그(dig)’라는 말로만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가로막기’를 살려놓지 못하고 ‘블로킹’만 북돋우는가요. 왜 우리는 ‘건져올림’은 내팽개치고 ‘디그’만 끌어당길까요.

 ┌ 어떠한 낱말도 한 가지 말뜻으로만 붙박히지 않는다
 ├ 어떠한 낱말도 한 가지 뜻에만 매여 있지 않는다
 └ 어떠한 낱말도 한 가지 뜻으로만 쓰일 수 없다


 거짓말 같아요. 아니, 우리 말만 울타리 밖인 듯해요. 우리 말만 쏙 빼야 하는가 봐요. (지식인들이 입이 닳도록 외치고 있는 말로 하자면) ‘한글처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글’ 한 가지만큼은 “한 가지 낱말이 한 가지 뜻으로만 매인 채 다른 뜻으로는 쓰일 수 없다”는 ‘이론’이나 ‘논리’로는 살피면 안 되는가 봐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잣대’라는 말을 키우지 않고 ‘무게’라는 말을 북돋우지 않고 ‘생각’이라는 말을 살찌우지 않으며 ‘믿음’이라는 말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사랑’이라는 말조차 다독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말쓰임새를 넓히지 않습니다. 그저 ‘담론(談論)’뿐이에요. ‘대화’요 ‘토론’이요 ‘토의’요 ‘논의’뿐이에요. ‘담론’ 한 가지로도 모자란지 ‘거대 담론’이라는 말까지 꺼내요. 우리 동네, 그러니까 인천시 공무원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분께서는 우리한테 ‘디스커션’을 하자고 말씀을 하더군요. 잠깐 벙쪘으나,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문화잔치를 한다고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데, 저 혼자만 ‘잔치’를 이야기하고, 다른 모두는 ‘축제(祝祭)’와 ‘축전(祝典)’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나마, ‘비엔날레(이biennale)’라고 하지 않으니 나은 편인가요. ‘생일파티’를 한다는 자리에서 “‘생일잔치’를 하는가 보지요?” 하고 넌지시 한 마디 건네니 조용해집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예 주둥아리 꾹 다물고 살아야 하는가요.

 저는 동네에서 도서관을 조그맣게 열어서 꾸리고 있습니다. 그냥 ‘도서관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거나 ‘도서관지기’라고 말하는데, ‘관’에서 나오신 분들은 한결같이 ‘도서관장’이라고 말해서 듣기에 거북합니다. 기자 분들도 ‘도서관장’이라는 말을 꺼내니 떨떠름합니다. 왜 ‘지기’는 안 쓰고 ‘長’이라는 말만 써야 할까요.

 해마다 달력을 보내주는 분한테, ‘새해 달력을 만드실 때에는 부디 요일을 한글로라도 적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여쭙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일월화수……’는 한 글자도 안 들어가고 ‘s m t w ……’만 들어간 달력을 받습니다. 게다가 ‘1월 2월 3월 ……’도 없어요. 알파벳으로 쏼라쏼라 새겨져 있습니다. 나라밖 사람한테 선물할 달력이 아니라 나라안 사람, 그러니까 우리들 한국말을 하며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볼 달력인데, 정작 ‘한국’ 달력에는 명절 이름조차 한자로 적기 일쑤입니다. 한글을 찾아보기 어려워진 달력입니다. 달력을 보면서 영어 공부를 하고 한자 공부를 하라는 소리인가요.

 ┌ 어떠한 낱말도 새로운 뜻이 담기는 법이다
 ├ 어떠한 낱말도 새롭게 쓰이기 마련이다
 └ 어떠한 낱말도 새로운 뜻으로 쓰이게 된다


 모르겠습니다. 아니 믿지 못하겠습니다. 우리 나라 국어사전을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 지식인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신문과 잡지를 모르겠고, 책과 논문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어디로 걸어가려고 하는 걸음인지, 어디로 나아가려고 하는 움직임인지, 무엇을 하려는 매무새인지, 누구와 함께 살고픈 어깨동무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도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와 살고 싶다고요? 가난한 이를 돕고 싶다고요? 어려운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겠다고요? 어려운 겨레한테 사랑을 나누겠다고요?

 참말 가난이 무엇이고 어려움이 무엇인지 머리로만 아는 테두리를 넘어서 몸으로 부대껴 보고서야 하시는 말씀인지요. 참말 가난한 삶이 무엇이고 가난이라는 굴레가 왜 되풀이되고 가난이라는 틀거리가 어떻게 짜여지는가를 뿌리깊이 파헤쳐서 알아내면서 거드는 손길인지요. 모르기에 여쭙습니다. 믿지 못하겠기에 믿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4341.4.26.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학생은 ‘이명박’을 좋아해?
 ― 서울교대 학생들 설문받기를 보면서


 〈1〉 삶과 헌책방 문화


 지난 10월 첫머리에 서울교대학보를 엮는 기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책과 도서관과 헌책방과 우리 말과 삶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를 조곤조곤 들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10월 29일치(397호) 서울교대학보에 헌책방 문화 이야기가 한쪽을 거의 통틀어서 실립니다.


.. 요즘 학생들, 학교신문 참 안 보죠? 토론도 하고 얘기도 나누고 주고받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제대로 안 이루어지면 읽기가 힘들어요. 그렇게 안 읽다 보면 네 해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중요한 걸 놓치고 말지요. 그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매체가 있는데 자기 스스로 놓치고 있어요. 저도 예전에는 책을 읽을 때, 안 좋아하는 책은 안 봤지만 지금은 안 좋아하는 책들도 더듬어 봐요. 내가 안 좋아한다고 해서 나한테 도움이 되는 얘기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책읽기는 자기 삶을 바꾸는 일이거든요. 책읽기는 책에 담긴 줄거리를 자기만 뽑아먹는 게 아니에요. 그 책을 쓴 사람하고 그 쓴 원고를 책으로 묶은 사람하고 묶여져 나온 책을 파는 책방사람들하고 팔린 책이 다시 버려진 다음에 주워모으는 사람, 그 주워모은 책을 다시 되파는 사람, 이 모두와 같이 이루어져요. 이게 ‘헌책방 문화’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문화예요 .. <학보에 실린 제 말>


 서울교대라는 곳을 2000년 봄인가 여름에 한 번 가 본 적 있습니다. 그때 그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서 어떤 책이 꽂혔고 어떤 책을 학생들이 즐겨 빌리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학보 기자님한테 ‘요즘 서울교대 도서관은 어떻습니까?’ 하고 여쭈어 봅니다. 찬찬히 이야기를 들어 보는데, 2000년 그때하고 거의 달라진 낌새는 없고, 외려 나빠졌을지 모르겠구나 싶습니다. 여덟 해라는 시간이 흘렀다면 그만큼 새로 나오는 좋은 책(교육 밭뿐 아니라 여러 갈래를 두루 헤아려)이 그만큼 쌓였을 텐데, 그만큼 쌓였을 좋은 책을 갖추자면 학교도서관은 크기를 넓혀야 합니다. 또한, 새로 나오는 책뿐 아니라 판이 끊어져 사라진 자료와 책도 모아야 하니, 학교도서관은 해마다 조금씩 살림을 키워야 해요. 그렇다면, 서울교대 학생들은 어디에서 책을 읽을까요? 아니, 책을 읽기나 할까요?


.. 수십 년 동안 제대로 된 독자를 만나지 못해서 읽히지 못한 책이 있어요. 헌책방에 가면 내가 첫 번째 독자가 되는 그런 책이 꽤 있어요. 그런 책들도 있기 때문에 헌책방은 새책방 구실도 하고 있어요. 그러면 도서관에서 책을 버리면 이 책이 어디로 갈까요? 헌책방으로 가겠지요. 아마 수천만 수억 권이 될 겁니다. 여러 공공단체에서 자료로 갖고 있는 책들이 있어요. 자료를 새로 사야 하는데 우리 나라는 자료실을 잘 안 넓히거든요. 그 넘치는 책들을 버릴 수밖에 없어요. 빌려가지 않는 순위와 오래된 것, 그게 버리는 기준이 돼요. 안 빌려보는 책이라고 해서 그 책이 버려져야 하는 책은 아니잖아요. 이를테면 백과사전이나 국어사전은 사서 보거나 도서관에 가서 보고 말지, 빌려가서 집에서 보지 않을 테네 대여율은 0이겠지요. 그 무거운 책을 어떻게 빌려가겠습니까. 그러면 그 책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헌책방밖에 없어요. 그런 대목에서 헌책방은 새책방 구실도 하고 도서관 구실도 하고 있어요 ..


 서울교대학보를 엮는 기자님은 ‘학교를 마친 뒤 교사로 일하지는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교대를 나오고 교사가 되지 않겠다니? 아주 뜻밖인 생각이라, 그러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여쭈니, 아직 갈피를 잡지 않아서 찾아보고 있답니다.

 그렇지요. 교대를 나오는 바로 그때부터 교사가 되어야 하지 않고, 또한 교대를 나온다고 모두 교사가 되어야 하지 않아요. 길찾기는 지금 곧바로 할 수 있으나, 시간을 두고 두루두루 우리 세상을 부대끼고 구석구석 삶터를 두 발로 밟아 나가면서 몸으로 느껴 차근차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면서 하나같이 100점만 맞아야 하지 않듯이, 90점도 좋고 70점도 좋고 30점도 좋고 0점도 좋듯이, 우리 삶에 100점이란 어디에 있겠습니까.


.. 헌책방 문화라고 따로 규격이 있지 않고, 헌책방을 여는 그 동네에 어떤 문화가 이루어져 있는 가운데 그 둘레에서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따라 문화가 달라져요. 동네사람들이 동네 새책방에서 사는 책이 동네 헌책방으로 들어가게 되거든요. 학생들한테 어떤 헌책방을 따로 추천할 수는 없고, 무엇보다도 먼저 가까운 헌책방에 가면 좋아요. 집이나 학교에서 가까운 곳으로. 동네 헌책방은 자기가 태어난 곳이잖아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를 느낀 다음에야 동네 헌책방에 있는 책을 느낄 수 있고, 다른 헌책방에 가서도 비로소 느낄 수 있어요. 그 다음은 스스로 다 찾을 수 있어요. 처음에는 한두 시간쯤 헌책방에 머물며 책을 살피셔요. 눈이 가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그렇게 책을 만지고 차례를 살피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헌책방 문화에 빠져 있을 겁니다 ..


 우리들이 사는 곳은 지구라는 별이고, 아시아라는 땅덩이이고,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이며, 한겨레라는 피붙이이고, 무슨 시고 도고 하여 나뉘어진 곳에서 어느 동네나 어느 마을 어느 집입니다. 나와 함께 내 이웃이 있고, 내 이웃들한테도 다른 이웃이 있습니다. 모두 하나하나 이어져 있어요. 책읽기라고 한다면, 나부터 해서 내 식구며 동무며 이웃을 느끼고, 내 식구와 동무와 이웃한테 또다른 이웃이 되고 동무가 되고 식구가 되는 사람도 함께 느끼는 길잇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일본 간다 헌책방거리만 이야기하면서 우리네 헌책방 문화를 북돋울 수 없습니다. 미국이 어떻고 유럽이 어떻고 떠벌이면서 우리 삶터나 사회나 교육이나 문화나 정치를 가꿀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형편이 어떠한지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어야, 시나브로 가꿀 수 있어요.



 〈2〉 이명박을 좋아하는 서울교대 학생들



 엊그제, 서울교대학교 11월 26일치(398호)가 도서관으로 왔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제17대 대통령선거, 당신의 선택은?〉이라는 기획기사가 보입니다.  11월 19일과 20일, 이틀에 걸쳐 350 사람한테 설문받기를 한 결과를 싣습니다. 설문받기를 한 사람들 가운데 84.8%는 이번 대통령선거에 선거를 하겠다고 대답을 하는 한편, 자기가 밀어주고 싶은 후보를 다음처럼 밝힙니다.


 ┌ 없다 : 37.5
 ├ 이명박 : 28
 ├ 문국현 / 이회창 : 11.6
 ├ 정동영 7.2
 ├ 권영길 3.2
 ├ 이인제 0.8
 └ 그밖에(박근혜) 1.7


 다음 설문으로, “대통령 후보를 볼 때 중점을 두는 것”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 정책 : 42.4
 ├ 청렴성(도덕성) : 19.2
 ├ 업적 : 10.2
 ├ 정치 성향 : 13.5
 ├ 추진력 : 12.1
 └ 그밖에(인간성) : 2.5


 이렇게 나옵니다. 다섯 번째로 물은 말은 “자기가 밀어주는 후보를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느냐?”입니다.


 ┌ 하나도 모른다 : 11.5
 ├ 모른다 : 24.5
 ├ 보통이다 : 42.1
 ├ 알고 있다 : 18.5
 └ 아주 잘 안다 : 3




 설문받기에서 자기가 대답하는 “보통이다”는 얼마나 알고 있다는 뜻일까요. 안다는 뜻일까요 모른다는 뜻일까요.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식을 조금 들었다는 뜻일까요. 조금 번거로울 수 있으나, 설문받기를 하면서, 자기가 밀어주는 후보가 내놓은 공약을 ‘시험 문제’처럼 내면서 제대로 아는가 모르는가를 따져 보면 어떨까 싶어요. 이렇게 한다면, ‘진짜로 아는지 어설피 아는지 잘못 아는지 하나도 모르는지’가 뚜렷이 드러날 테니까요.

 학생들이 밝힌 ‘자기 깜냥’을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모른다’가 “36%”이고, ‘안다’는 “21.5%”입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내가 밀어주는 대통령 후보에서 가장 무게를 두어 살피는 대목’은 “정책(42.4%)”이라고 합니다. 정작 그 후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해 왔고 어떤 정책을 내놓고 있는지 모르면서, 그 후보가 얼마나 “깨끗한지(청렴-도덕)”, 그리고 “무슨 업적이 있는”지, “추진력은 얼마나 올바르고 알맞게” 보여주는지를 알 수 있을까요.

 마지막 물음으로 “학생들 자기 정치 성향이 어떠한가?”를 묻습니다.


 ┌ 진보 : 3.7
 ├ 중도개혁 : 22.4
 ├ 중도 : 44.3
 ├ 중도보수 : 21
 └ 보수 : 8


 이 설문받기를 놓고,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김용신 교수는, “학생들이 지지하는 후보들을 보면 진보 진형이라 할 수 있는 정동영 후보와 문국현 후보의 지지도는 합쳐도 18%를 상회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는 우리 대학 학생들의 정치적 성향이 중도보다는 중도보수 성향에 가까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개혁’이며 무엇이 ‘중도’이고 무엇이 ‘보수’일까요. 학생들은 자기 정치 성향이 어떠하다고 느끼기에 ‘진보-중도-보수’라는 말을 쓸까요.


 〈3〉 책 안 읽는 유권자와 대통령후보


 그제부터였나, 제가 사는 동네에도 대통령후보 걸개천이 내걸렸습니다. 하지만 이 동네에 살면서 대통령후보들이 내놓고 있는 정책이나 공약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신문을 펴고 텔레비전을 켜도 후보들 정책검증이나 공약 꼼꼼한 풀이가 담기지 않습니다. 무슨무슨 의혹, 무슨무슨 통합, 무슨무슨 지지율, 무슨무슨 방송토론 문제, …… 알맹이를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제가 조금 바지런히 움직여서 대통령후보들 인터넷방에 하나하나 들어가 구석구석 헤집으면서 공약과 정책을 살필 수 있겠지요. 그래, 저는 이렇게 해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분들은 어쩌지요? 집에 컴퓨터 없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인터넷은커녕 자판 두들기기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어쩌지요? 움직이기 힘든 어르신들을 부축해서 투표하러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투표하러 가기 앞서 후보들 정책과 공약을 차근차근 들려주면서 스스로 헤아리도록 이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서울교대 학생들 또한(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새 대통령이 풀어야 할 숙제’ 1번으로 ‘경제 정책’을 꼽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경제란 무엇인가?’를 밝혀 말하지 않습니다. 연봉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자리 얻으면 경제가 살까요? 경기부양책을 쓰면 경제가 살까요? 아파트 많이 짓고 여름ㆍ겨울 올림픽, 월드컵, 엑스포, 아시안게임, 문화축제 들을 끊임없이 끌여들여서 새 건물 짓고 홍보활동 펴면 나라살림이 나아질까요? 무엇보다도, 우리한테는 “얼마쯤 되는 돈이 있어야 먹고살 만할 뿐 아니라 즐겁게 살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 살림은 ‘어느 만큼이 되어야 한다’는 금긋기부터 하고 나서 ‘경제를 살리든’ 무엇을 하든 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한 사람이 살아가기에 넉넉한 집 평수가 얼마쯤인지부터 금긋기를 해 놓고 나서 아파트 재개발을 하든 옛동네 간직하기를 하든 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더 많은 돈, 더 많은 옷, 더 큰 집, 더 비싼 밥과 술, 더 크고 빠른 차, 더 좋은 전화기와 사진기에 몸이 달아 있느라 아이들을 학원에 줄줄이 보내고 있으니 살림살이 구멍나고, 이 아이들을 대학교에다가 유학도 보내느라 그동안 쓴 돈이 엄청나게 많으니, 더욱 높고 큰 회사에 취직시키려고들 하고, 걱정없는 쇠밥그릇 일자리를 얻게 하고 싶어서 고시공부를 시키고 있지 않은지요.

 자기 삶을 가꿀 수 있도록,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한 번 주어진 자기 목숨을 고이 여기면서 추슬러 나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참된 가르침과 배움은 어디로 밀려나 있을까요. 책 한 권 읽지 않고 있는, 아니 자기 마음밭을 살찌울 책 하나 손수 책방 나들이를 하며 애써 고른 뒤 온몸으로 곰삭이며 읽어내고 있지 않는 우리들 유권자이기에, 대통령 후보로 나오는 사람들도 마음밭 일구는 책 하나 가슴에 안으면서 이 나라 사람들을 살뜰히 굽어살피지 못하는 입에 발린 ‘서민’ 소리와 구름보다 높이 붕뜬 정책들과 살갗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들만 쏟아내고 있지 않은지요.

 “책이 모든 것”이 아니라, “책은 우리 삶”으로 느끼는 가슴이 없기에, 자기가 걸어갈 길이 ‘돈-이름-힘’이 아닌 ‘사랑-믿음-나눔’이 되고 있지 못하기에, 헛발린 이야기와 소식들이 넘쳐나기만 하고, 이 넘쳐나는 물결에 휩쓸리며 정치에 등돌리고 투표에 손놓고 자기가 하는 일마저도 자기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려주는 일이 아니라, 한낱 돈뭉치만 쥐어들려는 데로 흘려가 버리지는 않는지.

 머지않아 초등학교 교사가 될 서울교대 학생들은, 앞으로 자기가 가르칠 이 나라 아이들한테 ‘너희들이 가장 무게를 두어 생각할 대목은 이런 거야’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가르칠까 궁금합니다. (4340.12.1.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을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없다만
 ― 대통령 후보가 쏟아내는 말을 새겨듣는 귀를



 책을 보면서 참으로 여러 가지를 느끼지만, 참말로 여러 가지를 못 느끼기도 합니다. 백 번 듣느니 한 번 가는 편이 낫다는 금강산 구경이듯, 백 번 읽고 생각하느니 한 번 해 보느니만 못한 책읽기입니다. 그래서 책 한 권 읽지 않았어도 올바르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요. 머리에는 지식을 집어넣지 않았으나 몸으로는 ‘그것이 지식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즐겁게 늘 하며 살거든요.

 책이나 글을 쓰는 사람을 그이가 써낸 책과 글로만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만나 보고 겪어 보고 부대끼고 일을 함께 해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나든 겪든 부대끼든 일을 함께 하든 그 사람이 지닌 온갖 모습 가운데 몇 가지만 느끼거나 알 수 있지, 모든 모습을 다 알거나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남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예부터 내려오지요.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남 이야기’는 그 사람이 지닌 온갖 모습 가운데 몇 줌 안 되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걸림돌이 있지요. 우리는 글을 쓰거나 책을 낸 사람을 모두 다 만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나라밖 사람도 몹시 많지요. 이런 사람들은 어쩌지요? 그네들이 남겼다고 하는 책 한두 권, 또는 글 몇 조각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임을 헤아려야 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모진 고문을 받고 억눌려 있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픈 말을 다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이가 고문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먹고살 형편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모릅니다. 추운 곳에서 벌벌 떨면서 겨우 글 한 줄 썼는지, 배불리 먹고 놀면서 대충 몇 글자 휘갈겼는지, 남한테 들은 이야기를 마치 자기가 보고 듣고 겪은 듯 써제겼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을 몸소 만나고 부대끼는 가운데 그 사람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을 몸소 만나고 부대끼면서 그이를 더 잘 안다고 한다면, 그이를 만나 보지 않고도 잘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될 수 있어야 참다운 앎이라고 봅니다. 만나 보고 나서 ‘아, 이랬구나’ 한다면, 그이를 만나지 않고 글이나 책만 보았을 때에는 ‘잘못 알거나 비뚤어지게 생각하거나 어떤 굽거나 치우친 생각으로 그이를 바라보았다’는 이야기지요. 더구나 ‘글이나 책을 보니 참 형편없는 사람이군’ 하고 생각해 버리면서, 그 사람을 몸소 만나려고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 사람’은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자기를 엉뚱하게 바라보고, 잘못 아는 한편, 비틀어진 이야기로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한테 시달릴 수 있습니다. 또, 우리 현실을 보면 이런 잘못되고 비틀리고 엉뚱한 말이 대단히 많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차분하게, 느긋하게 숨 좀 돌려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즐기려고 태어났습니다. 즐겁게 살아가며 즐거움을 손수 맛보고, 이웃하는 이들한테도 즐거움을 선사하고 나누면서 서로 오순도순 살아가려고 태어났습니다. 책 한 권 읽든 글 한 줄 읽든 옳고 그름을 제대로 가리면서 자신이 참답게 살아갈 길을 헤아리면 참으로 좋겠지요. 자기가 오늘 손에 쥐고 읽는 책을 펴낸 사람 됨됨이가 이러하느냐 저러하느냐를 따지기 앞서, 그이가 온삶을 바쳐서 일구어 낸 책 하나에 어떤 알맹이가 담겼는지, 어떤 줄거리가 살아숨쉬는지 느낄 수 있으면 더욱 좋고요.

 그러니 우리들은 꽤나 힘써야 합니다. 마음을 찬찬히 기울여 주어야 합니다. 눈길을 넓히고 눈높이를 알맞게 맞추어 주어야 합니다. 비록 몸소 만날 수 없이 멀리 떨어진 사람이라 해도,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수 있도록 글을 곰곰히 되새기고 곱씹으면서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 글이든, 자기가 느끼기에 얻을 만하고 배울 만한 구석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개가 속임수를 쓰는지 뒤에 덮어놓거나 가리거나 숨기는 무엇이 있는가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만나도 참모습을 모르게 되기 일쑤입니다. 수많은 책을 냈어도 자기 참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고요. 어떤 속셈과 이익에 따라서 글장난을 치는지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글을 쓰건 책을 내건, 그이들 삶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뭇사람뿐 아니라 그이 스스로한테도 더없이 아름답고 즐거운지도 헤아려 볼 수 있으면 한결 좋습니다.

 글만 읽어서, 책만 보면서 어떤 사람을 제대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 수 없다’고 해서 ‘제대로 알려고 애쓰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느슨하게 풀어 놓아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제대로 알기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애쓰며 살잖아요. 제대로 받아들이기 벅찰 수 있기에 늘 곁에 놓고 되씹고 곱씹잖아요. 몸소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깊이 살피며 힘껏 돌아보아야 좋습니다. 글로만 보든 몸소 얼굴 마주하며 만나게 되든, 어느 때나 한결같이 마주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기 잣대를 세우고, 둘레에서 퍼뜨리는 질낮은 허튼소리나 헛소문에 휘둘리지 않아야 좋습니다. 귀는 열되 파리나 모기가 꾀어서는 안 되며, 입을 열되 가래나 침을 마구 뱉아서는 안 됩니다.

 새 대통령 뽑는 날을 한 달쯤 앞두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숱한 말이 쏟아지고 있고, 숱한 사건과 소식이 넘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말잔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든지, 아예 귀를 틀어막든지, 자기가 보고픈 모습만 보려고 한다면, 새 대통령이 뽑히고 나서 또 다섯 해 동안 지긋지긋하게 이맛살 찌푸리며 살아야 할 뿐 아니라, 갖은 나쁜법이 되살아난다든지 국가보안법이 다시 또아리를 튼다든지 한미자유무역협정보다 끔찍한 일들이 터져나온다든지 하는 소용돌이에 끊임없이 휘둘릴 수 있습니다. (4338.11.12.흙/4340.11.29.고쳐씀.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