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님 책 가운데 내 책꽂이에 꽂힌 책을 살펴본다. 《장길산》이나 《모랫말 아이들》이나 《무기의 그늘》이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들이 보이지만, 이런 책은 일찌감치 끈으로 묶어 구석진 자리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지 오래. 내 책꽂이에 아직도 남아 있는 황석영 님 책은 오직 하나, 1985년에 형성사에서 펴낸 《객지에서 고향으로》.

 묵은 책에 쌓인 먼지를 걸레로 닦아내어 오랜만에 펼쳐든다. 내가 이 책 《객지에서 고향으로》를 만난 때는 1998년이니 열한 해가 지났다. 이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던 그무렵에도 황석영 님을 놓고 여러 말이 많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과 함께 《객지에서 고향으로》는 우리들한테 이야기 한 자락 살며시 건네는 책이라고 느끼며 곰곰이 새겨 읽었다.


.. 구공탄은 연탄공장의 기계가 찍어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깊숙한 땅속에서 캐어져 나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처럼 단순한 사실을 연탄집게로 집어올릴 적에 단 한 번이라도 되새겨 본 사람들은 드물 것이리라. 마치 하늘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다는 도회지의 바쁜 월급장이의 깨달음처럼, 이 뒤늦은 고마움은 어딘가 슬프기까지 한 것이다 ..  (31쪽/1973년)


 나로서는 열한 해 만에 펼치는 책. 그러나 열한 해 앞서 이 책은 판이 끊어져 있었다. 1985년에 처음 나온 책이었으니 1990년대가 저물녘에는 판이 끊어질 만도 하지. 그런데 황석영 님 다른 책은 수없이 다시 찍고 거듭 찍고 새로 나오고 하는 가운데, 오직 이 녀석 《객지에서 고향으로》는 되살아나지 못했다. 왜일까? 왜 이 책은 되살리지 않았을까? 너무 옛날 옛적 이야기라서? 이제는 황석영 님 생각하고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담아서? 스스로 내버리는 책이라서? 이제는 다르게 살아가는 황석영 님 삶이요 문학이며 생각이요 넋이라서?


.. 확실한 것은 그들이 파괴된 환경 속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인가의 희생에 의해서 우리가 많이 누리는 게 있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돌려주어야만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자각하고, 그것을 획득하고, 보편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집단적인 위기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야말로 진정한 근대화이며, 사회적 진보였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73쪽/1973년)


 빛바랜 갱지로 된 책장을 만지작거린다. 빛바랜 옛책에 담긴 이야기는 그야말로 예스런 이야기일는지 모른다. ‘오늘’을 살아가려는 황석영 님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이야기일는지 모른다. ‘지난날’을 살았다는 황석영 님을 내세우는 이야기는 되고, 훈장처럼 가슴에 달아 놓는 이야기는 될 터이나, 바로 이 자리에서 내 이웃하고 소담스레 나눌 이야기는 못 될는지 모른다.

 어쩌면, 황석영 님은 지난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당신 둘레 ‘가난한 이웃’을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구경하기는 했어도, 당신 몸을 내맡겨 당신 둘레 가난한 이웃하고 ‘함께 살아가기’는 안 하지 않았을까. 낮은자리 이웃하고 손을 마주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거나 뜨겁게 얼싸안거나 뒹굴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을까. 어느 만큼 떨어진 자리에서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면서 글만 쓰고 있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금을 긋고 이 너머로는 손뼘 하나만큼도 넘어갈 뜻이 없지 않았을까.

 독재에 무너지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나쁜법에 옥죄이며 제도권교육에 목졸리는 가운데 사회 푸대접과 따돌림에 앓고 있던 사람들하고는 아주 ‘다른 곳’에서 살아가던 황석영 님은 아니었을까. 돈에 밟히고 이름값에 눌리며 힘에 밀려난 사람들하고는 사뭇 ‘다른 나라’에서 지내던 황석영 님은 아니었을까.


.. 힘센 아이가 그네를 독차지하면 저 혼자 실컷 타도록 버려 두고, 그네에서 벗어나서 다른 놀이를 창조해 내자. 그 아이의 힘을 통해 이익을 보려 하지 말자. 제일 힘없는 꼬마를 잊지 말자. 그와 언제나 같이 있자. 그러는 가운데 구슬과 고리는 보배로 변할 것이다 ..  (99쪽/1983년)


 말이란,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모음이 아니다. 글이란, 손으로 끄적이는 기호모음이 아니다. 내 삶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가 말이요, 내 삶에서 샘솟는 외침이 글이다. 돈을 바라면서 할 수 없는 말이요, 이름을 바라면서 쓸 수 없는 글이다. 힘을 얻자고 할 수 없는 말이며, 한자리 차지하자면서 쓸 수 없는 글이다.

 사랑이 스미도록 하는 말이다. 믿음이 깃들도록 하는 글이다. 사랑으로 어루만지는 말이다. 믿음으로 껴안는 글이다. 나한테 있는 모든 힘을 바쳐 사랑스러운 손길을 내미는 말이고, 내가 낼 수 있는 젖먹던 힘을 용을 쓰듯 짜내어 나누는 믿음직한 몸짓이다.


.. [황석영] 어떤 형태로든 민중을 신비화하는 것에는 저도 반대합니다. 제가 해남에서 경험한 것이지만, 농민들이 어떤 때는 더 영악하고 현실에 순응적입니다.
[황지우] 우리가 병든 만큼 민중도 병들어 있어요.
[황석영] 그렇지만 민중은 운동의 힘줄입니다.
[황지우] 힘의 저장소로서의 민중에 대한 신뢰를 저도 갖고 있읍니다. 그러나 운동에는 지식인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는 것도 아울러 생각해야 합니다. 《장길산》에서의 김기와 같은 예외적 존재도 있지만, 대체로 선생님의 지식인에 대한 태도는 불신이라기보다는 혐오에 가깝더군요.
[황석영] 제가 지식인을 혐오한다구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저도 지식인의 한 종자인데요. 다만 그들의 기회주의적 포즈가 싫었읍니다 ..  (188쪽)



 그런데 1985년에서 스물네 해를 훌쩍 지난 2009년에 다다른 황석영 님은 우리 앞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시인 황지우 앞에서 “그들의 기회주의적 포즈가 싫었읍니다” 하고 힘주어 말하던 그 황석영 님은 사람들 앞에서 무슨 글을 쓰고 있는가. 황석영 님 옆에는 어떤 사람들이 이웃으로 있는가. 황석영 님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동무로 있는가. 황석영 님 눈에는 어떤 사람들이 이웃으로 보이는가. 황석영 님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동무로 보이는가.

 《객지에서 고향으로》를 다시 펼쳐 읽는 동안, 소설쓰는 황석영 님은 틀림없이 예나 이제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다. 어김없이 예나 이제나 똑같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똑같은 사람이 우리한테 건네는 말마디와 글줄은 똑같지 않다고 느껴진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탓일까. 내가 책을 제대로 못 읽은 탓일까. 책에 담긴 이야기가 거짓말이었을까. 책이란 세월이 지나면 빛이 바래고 슬어 버리는가. 흘러간 책에 담은 이야기는 쓰레기통에 내던져야 하는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이어오면서 우리한테 ‘참된 목숨 하나 고맙게 받으며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거룩한 사람 길’을 찾고 느낄 책이란 이 세상에 없는가.

 한숨 한 번 쉬고 물 한 잔 마시면서 《객지에서 고향으로》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인다. 둘레에서 적잖이 내다 버리기도 하고 불사르기도 한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차마 내다 버리지도 못하겠고 불사르지도 못하겠다. 오히려 더 꽁꽁 붙잡아 두고 간직해야 하지 않느냐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책을 내다 버리거나 불사를 때마다 이런 분들은 더더욱 말바꾸기를 하고 거짓말을 하며 핑계를 둘러댈 테니까. 뜬소리와 뜬생각과 뜬몸짓으로 우리 눈을 홀리고 귀를 어지럽힐 테니까.

 나는 《월간 조선》 1980년대치와 조갑제 님 책과 이문열 님 책, 그리고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 책 옆에 황석영 님 책을 나란히 꽂아야겠다. (4342.5.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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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이라고 하는 소설쓰는 분이 ‘변절’을 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내 보기로는 황석영 님은 ‘변절’을 하지 않았다. ‘변절(變節)’을 말하려 한다면, 이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살필 노릇이다. “절개나 지조를 지키지 않고 바꾼”다고 하는 ‘변절’인데, 황석영 님한테 ‘절개나 지조’는 무엇이었을까. 황석영 님이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자리나 마음밭은 무엇이었을까. 황석영 님은 어떤 매무새로 문학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우리한테 들려주려고 했을까.

 황석영 님을 아끼고 사랑하고 믿는 분이었다면, 마땅히 황석영 님 글이든 책이든 작품이든 무엇이든 살피면서 이분 매무새와 넋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이분 매무새와 넋을 고이 살펴 왔다면, 황석영 님은 ‘변절’이 아닌 ‘당신 삶결’ 그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황석영 님이 이명박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어깨동무를 한다 하여 슬퍼하지 않는다. 안타깝다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늙은’ 황석영 님은 ‘어린’ 황석영이나 ‘젊은’ 황석영 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일는지 모른다. 스스로 ‘가난한’ 마음자리를 잃고 ‘돈많고 이름높고 힘있는’ 마음자리로 갈아탔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갈아타는 사람들은 당신들이 어리거나 젊을 때에도 ‘돈-이름-힘’에 어느 만큼 눈독을 들이고 있지 않았겠는가. 이들이 처음부터 ‘돈-이름-힘’에 매이지 않으면서 홀가분한 넋과 얼로 자유와 사랑과 평화와 평등과 통일을 외쳤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 갈아타기를 했다기보다는, ‘가난한’ 마음밭을 조용히 일구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고 해야 옳지 싶다. ‘가난한’ 마음밭이 얼마나 내 삶과 이웃 삶을 너그럽고 즐겁게 북돋우는지를 깨닫지 못했다고 해야 맞지 싶다. ‘가난한’ 마음밭으로 살아가는 당신 삶은 당신한테뿐 아니라 우리 모두한테 기쁨과 보람을 나누는 일음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야 알맞지 싶다.

 내남없이 ‘세상에 둘도 없는 구라쟁이(이야기꾼)’라고 하는 황석영 님인 줄 안다. 당신으로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무엇인가를 할 때에 우리 나라를 아름다이 일으키거나 추스르거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아무렴. 이렇게 손잡는 일이란 잘못이 아니다. 손을 잡건 발을 잡건 옳게 일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누구하고 손을 잡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손을 잡느냐이며, 손을 잡고 무엇을 어떤 모습으로 하느냐라고 느낀다. 그렇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손을 맞잡은 다음 ‘이명박 뜻대로’ 한다면, 또는 ‘황석영 이름값-돈값-힘값을 더 높이려는 뜻대로’ 한다면, 황석영이라고 하는 분은 아주 ‘개밥’일 뿐일 테지. 저 스스로 제 삶에 임자가 못 되고 ‘손님’이 되어 버린 불쌍한 떠돌이일 테지. 입은 살았되 몸뚱이가 오롯이 살아 있지 못한 한낱 ‘돼지꿈’일 테지. (4342.5.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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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동네 찾아온 동화작가 황선미
 ― 어린이문학은 ­‘사람’을 깊이 다루는 이야기



 작가를 만나려면 책을 읽으면 됩니다. 글 작가이든 사진 작가이든 그림 작가이든, 그이가 펼쳐서 보여주는 이야기는 책에 알알이 담기니, 책을 읽으면 작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쓴 책에 앞서 작가를 만날 수 있다면, 또 작가가 쓴 책을 읽고 나서 작가를 만날 수 있다면, 책과 삶과 사람을 새삼스럽게 돌아보게도 됩니다. 책은 책대로, 삶은 삶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좀더 그윽하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2008년 12월 12일 금요일 낮 네 시, 어린이문학을 하는 황선미 님이 인천 배다리 골목길에 있는 〈시 다락방〉에 찾아왔습니다. 요즈음은 어린이문학뿐 아니라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창작을 가르치기도 하는 터라 몹시 바쁘지만, 어려운 틈을 내어 사람들(어린이 독자와 어른 독자)과 이야기 한 자락을 나누었습니다.

 황선미 님이 그동안 낸 작품을 들면, 《앵초의 노란 집》(베틀북,1998), 《여름나무》(두산동아,1998), 《내 푸른 자전거》(두산동아,1999), 《샘마을 몽당깨비》(창비,1999), 《나쁜 어린이 표》(웅진주니어,1999), 《목걸이 열쇠》(시공주니어,2000), 《마당을 나온 암탉》(사계절,2000), 《까치 우는 아침》(웅진주니어,2000), 《초대받은 아이들》(웅진주니어,2001), 《늘푸른 나의 아버지》(두산동아,2001), 《소리없는 아이들》(두산동아,2001), 《들키고 싶은 비밀》(창비,2001), 《약초 할아버지와 골짜기 친구들 1ㆍ2》(사계절,2002), 《꼭 한 가지 소원》(낮은산,2002), 《빈 집에 온 손님》(아이세움,2002), 《과수원을 점령하라》(사계절,2003), 《일기 감추는 날》(웅진주니어,2003), 《막다른 골목집 친구》(두산동아,2003), 《넌 누구야?》(사계절,2004), 《트럭 속 파란눈이》(시공주니어,2005), 《푸른 개 장발》(웅진주니어,2005), 《동화 창작의 즐거움》(사계절,2006), 《처음 가진 열쇠》(웅진주니어,2006), 《나온의 숨어 있는 방》(창비,2006), 《울타리를 넘어서》(베틀북,2007), 《주문에 걸린 마을》(주니어랜덤,2008), 이렇게 창작 스물여섯 권에다가 동화창작을 돌아보는 이론책 한 권이 있습니다.

 책이름으로도 느낄 수 있고, 책을 몸소 펼쳐서 읽은 분들은 남달리 느끼실 텐데, 황선미 님 어린이문학은 사탕발림 어린이문학이지 않았습니다. 구경하는 어린이문학이 아니요, 어린이를 귀엽게만 바라보는 갇힌 눈 문학도 아니었습니다. 아이를 이야기감 삼아서 팔아먹는 문학 또한 아니며, 교육과 사회 부조리를 까밝히는 문학 또한 아니었습니다.

 당신 스스로 좋아서 걷는 어린이문학입니다. 당신 스스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서 아이들하고 어깨동무하고서 주고받을 이야기로 엮어 내는 어린이문학입니다. 튼튼하게 이 땅을 딛고 있는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느덧 어린이문학가라는 이름으로 두 자리수(열 해)에 걸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당신 몸을 튼튼하고 아름답게 추스를 수 있다면, 열 해를 넘어 스무 해를 애쓸 수 있고 스무 해를 애쓴다면 쉰 권에 가까운 어린이문학을 남기게 됩니다. 더 애써 서른 해나 마흔 해까지 어린이문학 한길을 걷는다면, 어쩌면 백 권에 이르는 어린이문학을 선보일 수 있습니다.

 나라밖으로 옮겨지는 우리 문학이 드물지만, 황선미 님은 두 가지 책, 《마당을 나온 암탉》과 《나쁜 어린이 표》가 일본말로 옮겨졌습니다. 《나쁜 어린이 표》는 100쇄를 넘게 찍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린이문학을 어른문학과 견주어 몇 수 낮은 문학으로 여기는 잘못된 눈길과 흐름이 있는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광장》뿐 아니라 《나쁜 어린이 표》도 ‘100쇄 문학’입니다. 훨씬 짧은 동안에 훨씬 많은 사람(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읽혔으며, 훨씬 기나긴 앞날에 걸쳐 훨씬 널리 사랑받으며 알찬 열매를 나누어 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황선미 님이 어린이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바라본 우리 삶터와 사람 이야기 몇 마디를 옮겨적어 봅니다. 어린이문학은 ‘사람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다루는’ 이야기열매임을 다시금 곱씹습니다.


1. “우리는 서사를 잊어버렸다 일상의 세세한 부분을 스케치하면서 … 가벼움 … 가벼움 … 가벼움 … (어린이문학상 응모작으로 들어온 작품을 읽다 보면) 왜 이렇게 재미없고 불쾌하기까지 할까 … 소설이 가진 문학성을 생각하지 않고, 이만하면 괜찮아 괜찮아 하는 ……. 동화도 서사이고, 서사는 이야기이거든요. 언제부턴가 우리는 가벼운 일상에 매몰되면서, 아이들 일상만 좇아가고 있구나 … 왜 이렇게, 훌륭한 (어른문학) 시를 쓰시는 그분들이 (동시나 동화를 쓰시면서) 지치게 하는지 … 제대로 이루어지지 앟기 때문에, 훨씬 더 가벼워지는 모양이 보이기도 해요.”

2. “가장 우려되는 것은 문장력이 되지 않는 것 …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 또 관심이 있어서 아카데미고 강좌고 들으면서도 감각이 없는 것 … 비문은 태도의 문제는 아니에요. 연습의 부족, 공부가 안 되어서일 수 있는데, 가장 큰 건 비속어의 남용이에요. 예를 들면 1인칭 시점이 많아요. 쓰기가 쉽기도 할 테지만 어린이 눈길로 본다는 생각에서 1인칭 시점을 많이 쓰는데 구어체와 진술은 다르잖아요. 그런데 신인작가들이 ‘저새끼, 학교 뺑뺑이 치고’라든지 ‘나는 언젠가 담탱이와 맞짱을 뜨겠다’는 문장을 … 사회를 보여주는 단초가 된다고 해도, 이런 사람을 (등단작가나 당선작가로) 뽑아 주면 우리가 자책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 이것은 선배들 책임이겠지요. 먼저 나온 책들에서 이렇게 썼고, 이렇게 쓴 책이 잘 팔리니까요. 그러나 그보다 먼저 아이들 입맛에만 맞추려는 신인작가들 태도가 …….”

3. “정말 재미있는 것은 대만이나 일본이나, 아이들한테 잔소리하고 학원 많이 보내고 들볶고 그러는 게 거의 비슷해요. 때로는 미국 같기도 하고 … 그러면 우리다움은 뭘까? 대만하고 비슷하거나 일본하거나 비슷하거나 미국 같기도 한 모습 말고 우리다움은 뭘까? … 나도 글쓰는 사람으로서도 나다움이 뭐고 우리다움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볼로냐 가서 부스를 보면, 일본 부스는 옆에 국기를 안 달아도 그림을 보면 일본 것이라고 알 수 있어요. 그러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그림을 보았을 대 ‘야, 이건 한국 거야’ 할 수 있을까는 모르겠어요 … 문장만 보더라도, ‘야, 이건 한국 거야’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문학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

4. “유행처럼 번졌던 거는 언젠가는 없어지겠지요. 아동문학이 가진 보편과 상징은 살 거예요. 그런데 … 저는 그래요. 시 잘 쓰는 분이 소설도 잘 쓰고 동화도 잘 쓰지 않을까 … 문학하는 마음은 다 같으리라 생각하니까요. 가능하면,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들이 아동문학을 같이하면 좋겠어요 … 제가 아는 분들이 제일 좋아하는 작품에 현덕 동화가 많아요. 시대를 뛰어넘고 뛰어난 것이 있습니다. 아직 안 읽어 보셨다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분이 여기(인천) 분이었군요.”

5. “아동문학은 우리 삶에서 깊이 박혀 있는 무엇인가 있는 … 작품 하나가 바로 시다, 하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 많아요. 그런데 정말 우리 작가들 중에는 아동작가를 하려면 정말정말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강의를 할 때 저는 아놀드 로벨 작품을 늘 드는데, 간결하고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오래 남고 … 글이 안 써질 때마다 들춰봐요 … 저의 교과서이기 때문에 저는 이 책을 참고하고 다른 분들은 다른 책을 참고할 텐데 … 언제쯤이면 불필요한 것들을 놓아 버리고 할 수 있는지 … 〈눈물차〉나 〈개구리와 두꺼비가 함께〉를 읽어 보라고 하고 싶어요 … 짧고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 … 어른들은 걱정이에요. 이 보통내기 아닌 책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고 … 그러나 우리는 한 번 읽어서 싹 받아들이는 책이 없어요. 조금씩 나이에 따라 받아들이는 거지 … 그것이 다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간들에 대해, 죽 꿰어서 쉽고 간결하게 하는데, 책을 덮고 나면 ‘이게 뭐야?’가 안 되고, ‘그거면 됐지.’가 돼요. 동화는, 머리는 시에 두고 다리는 소설에 두어야 하지 않느냐고 … 이걸 어떻게 (어른들한테는 안 주고) 아이들한테만 줄 수 있느냐고, 그림책도 우리한테 큰 울림을 주는 그림책은 그냥 그림책이 아니에요 …….”

6. “아동문학을 보는 편견이, 아동문학은 아이한테 교훈적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변하지 않는 편견인데, 동화가 아이들한테 교육을 하려고 나와서 그러기도 할 테지만, 거기서 자유롭지 못한 게, 그놈의 계몽성과 교육성에서 도망가려고 하는데, 대다수 독자가 어린이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유용성을 찾게 돼요 … 그러면서도 삐삐처럼 틀을 넘어서 보고 싶은 생각을 하고 … 계몽성을 밀어내면서도 같이 가고, 그러면서 창의성으로 가려는 요상한 태도가 같이 있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의 억눌린 욕망으로 가고 싶어요. 억눌린 걸 열어 주고 싶고 … 그래서 요즘 아동문학이 학원과 공부 이야기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자꾸 되풀이되는 거 같아요. 그런데 보여줄 때 재미있고 개성 있으면 좋을 텐데 천편일률적이고 아주 절망스런 상태에서 끝내 버리고 있어요. 반성되는 게, 텔레비전 뉴스 속에는 더 절절하고 엄청난 일이 많은데, 그런 데에 동화가 못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동화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게 세상에 있는데, 아이들은 엄청난 피해자라고 보여주는 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보여주기가 다가 아닌데. 요즘 아동문학이 르포가 아닌데 …….”

7. “안델센, 삐삐, 피터팬이 나온 곳을 가 보고픈 소망이 있어요. 그런데 다 다른 나라예요. 다 찾아가려면 돈도 시간도 많이 들어요 … 저는 편집자 한 명과 정말로 갈 수 있었어요 … 그런데 저한테 이렇게 큰 공부가 되었어요. 그리고 우리도 우리 동화 발자취를 찾을 수 있는 거가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 유럽 동화마을을 찾아간 뒤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까 감감한 거예요. 우리 거가 없는 거예요. 우리한테 남겨지는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그런 작가들 알려면 그냥 책 읽으라고 하면 되는 거지 … 우리는 아동문학에서는 ‘유형의 것(작가 자취)’이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 베아트릭스 포터가 살던 곳처럼 남아 있는 곳이 없어요. 베아트릭스 포터는 남은 식구가 없어서 자기 책을 팔아서 들어온 인세로 땅을 조금씩 샀대요. 그리고 죽으면서 유언을 쓰는데 그 땅을 지켜 달라고 썼대요. 그리고 내셔널트러스트에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그 땅을 지켜 달라고 했대요 … 개발이라는 논리 앞에 무너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8. “지방에 강연 가면 그곳 공무원들이 한참 동안 인구가 몇이고 개발이 어떻고 하고 이야기를 들려줘요. 그러면 그분한테 ‘동화작가는 얼마나 있어요?’ 하고 물으면, HOT가 태어났고 하는 얘기를 해요. 동화작가는 한 사람도 없어요 … 그 시간에 그곳에 있어야 할 것을 남기는 것 … 우리는 그대로 둘 뿐이지 나중 사람이 값어치를 평가하겠지요 …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을 결국 못 벗어나거든요. 어린 시절에 누구를 만났고 어디에서 놀았고 어떻게 컸고 하는 게 어른이 되어도 그 척도가 되는데,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면 이제 어린이가 아니라고 하면서 어른 흉내를 내는데 … 스테디셀러가 되는 어린이책을 보면 어린이만 다루지 않아요. 상당히 깊은 ‘사람’을 다루잖아요. 아이와 함께 고전을 읽으면 왜 고전이 고전인 줄을 알아요. 고등학교 2학년인 우리 아들한테 〈왕자와 거지〉 완역본을 읽혔더니 아이가 잘 읽었다면서 이 사람이 쓴 다른 작품은 없냐고 묻더라고요. 놀랐어요. 고전이란 그래요 … 아이들은 고전을 읽고 자기를 생각하여 나타내는 데에 대단히 달라요 … 고전은 읽는 시간을 일부러 투자해서 가져야 해요 … 시대를 넘어 연령을 넘어 민족을 초월하는 강한 게 있구나, 우리 나라 책을 더 많이 읽혀야 한다고도 하는 편견을 넘어, 사람의 삶을 다양하게 생각하고 보는 고전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이들만 아니고, 우리 어른들도 읽어야 해요 …….”


(4341.12.1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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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로 살아가는 고등학교 적 국어 선생님
 ― 열일곱 해 동안 품어 온 물음 하나

 


 1991년 8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던 저는 갑작스런 조회가 생겼다면서 전교생을 운동장에 부를 때 투덜거리면서 나갑니다. 그무렵, 월요일 아침에 한 번, 토요일 아침에 또 한 번, 온 학교 학생이 죄 운동장에 모여서서 군대사열을 하듯 아침모임(조회)을 해야 했습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고되고 지겹고 힘들기도 한 아침모임인데(겨울에는 잠바를 입고 나와도, 와이셔츠 안에 옷 한 벌을 끼어 입어도 복장불량이라면서 불러내어 두들겨패고 그랬습니다), 그런 아침모임을 불쑥 한다니까 입이 부루퉁 튀어나오지 않을 동무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난데없는 아침모임은 장학사가 오니 청소를 하라느니 하는 아침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곧 모의고사를 보는데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대는 아침모임도 아니었습니다. 시험성적 잘 나오는 몇몇 아이들 올려세워서 자랑해 주는 아침모임 또한 아니었습니다. 늙수그레한 국어교사 한 사람이 ‘이제 교사 일은 그만두고, 소설쓰기에만 온삶을 바치겠다’고 해서 마련해 주는 ‘퇴임식’이었습니다.


.. “10년 전 이런 한을 맺고 고향 인천에 왔는데 난 장편을 쓸 것이다. 너희들은 학력고사 공부를 해라. 너희들의 시험이 끝날 무렵 나도 결과를 받을 것이다. 우리 같이 한번 모든 걸 걸어 보자!” 제자들한테 그렇게 말하고 매일 저녁 교실 뒷자리에서 장편을 쓰기 시작했다. 정말 처절하게 썼다. 함께 니나노 집에서 술도 먹고 파친코에서 월급봉투도 다 날리기도 하며 어울리던 동료 선생들이 내가 장편을 쓴다며 피골이 상접한 채로 자기 일에만 매달리니까 냉대를 했다. 나를 몹시 신뢰했던 교감 선생님도 한두 번은 봐주었는데, 나중에는 “야, 이원규! 집에 가서 써.” 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소설을 쓰기 위해선 결국 그런 걸 이겨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 자리에서 “교감 선생님, 절 내쫓으세요. 징계위원회 여세요.”했고, 동료 선생들에게도 “날 죽여라.” 하고 말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 나하고 야근에 걸리는 선생들은 아주 싫어했다. 내가 소설을 쓴답시고 순회지도를 안 하니까 혼자 힘들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렇게 말하며 계속 밀고 나갔다. 교실 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다. 그때 내 반 아이들은 지금 나이 마흔이 넘어 같이 늙어 가는데 참으로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담임이 매일 뒷좌석에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설에 매달려 있으니 담배 피우러 나가지도 못하고 농땡이도 못치고 모든 걸 체념하고 공부나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대학 가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그래서인지 57명 중 43명이 4년제 대학에 갔다 ..  (인터넷 누리집 〈소설가 이원규와 푸른 날개〉에 올려진 글 : 나의 등단 시절 http://cafe.daum.net/novelistleelove〉)


 처음엔 뭔 짓을 하느라 부산을 떠는가 싶었지만, 난데없는 아침모임 집합보다 더 난데없는 ‘퇴임식’이었기에 눈이 동그래집니다. 게다가, 몸이 아파서 그만두지도 않고, 다른 일이 있어서 그만두는 일도 아닌, ‘소설을 써야겠으니 그만두겠다’는 퇴임식이라니.

 지금은 교장선생이 된 또다른 국어교사 한 사람이 사회를 보면서, 떠나가는 국어교사를 소개하고, “이러저러하니까, 잘 들어 보도록!” 하면서 말을 마치니, 곧 떠나갈 국어교사인, 이원규 님이 길지도 짧지도 않게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한테는 소설쓰기가 너희들 가르치는 일보다 더 큰 일이고, 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면서 이 일을 그만두니, 우리들도 자기가 어떤 뜻을 하나 품으면 그 일을 제때 할 수 있도록 놓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선 열여섯 고등학교 일학년 학생 머리에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궁금함은 풀어 주지 못합니다. ‘요즘(1991년) 세상에 소설만 써서 어떻게 먹고살 생각인지, 당신 마나님이 바깥에서 돈벌러 다녀야 하지는 않은지, 이 좁다란 인천바닥에서 소설을 쓴다고 해 봐야 누가 알아주고 누가 책을 사 주고 누가 거들떠보아 주기나 하는지’ 들을.





.. 당선작 〈훈장과 굴레〉는 아들 이름으로 당선공고가 났고 연재를 시작할 때는 내 이름으로 나갔다. 4백만 원짜리 파티였다던가. 서울의 최고급 호텔에서 열린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식에서 우리 부부는 무대 위에 앉았다. 당시 현대문학사 편집장이던 감태준 선생이 내 학교 교장 선생님을 대학의 은사이신 미당 서정주 선생님과 김동리ㆍ김춘수ㆍ조병화 선생님 등 문단 원로들 사이에 앉혔다. 그분이 누군가를 아시고 미당 선생님이 한  말씀 하셨다. “저녀석이 내 제자인데 참으로 큰일을 했습니다. 우리 대학의 영광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다른 원로 선생님들도 부탁을 했다. 교장선생님은 기분이 좋아서 다음날 직원조회 때 말씀하셨다. “이원규 선생을 새 학기에 도서관장으로 발령하겠습니다. 불만들 없으시지요?” 두 해 동안 주당 수업 14시간인 도서관장 자리로 가서 나는 생애에서 가장 좋은  단편 십여 편을 썼다. 20여 년이 흘렀지만 그 뒤 다시는 그 날 같은 행복한 몸 떨림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내가 재작년과 작년에 써낸 책들이다. 소설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평전을 쓰며 지내는 오늘 그 시절의 처절한 글쓰기의 열정과 고난, 그리고 그 날의 몸 떨림이 그리워진다. 내가 여섯 번 최종심에서 떨어질 때 우리 모교에는 소설가 선생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직계후배이자 제자인 학생들에게 언제나 더 잘해 주고 싶다 ..  (인터넷 누리집 〈소설가 이원규와 푸른 날개〉에 올려진 글 : 나의 등단 시절)


 국어교사 이원규 님이 그만둔 학교는 인천 인항고등학교. 처음 학교를 세울 때 ‘나중에 교장 시켜 준다’는 말을 듣고 들어왔다고 하는 이원규 님은, 1회 졸업생인 우리 형한테 국어를 가르쳤습니다. 2회 졸업생인 사촌형도 이원규 님한테 국어를 배웠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4회 졸업생인 저는 이원규 님이 아닌 다른 분한테 국어를 배웠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소설 쓰는 국어 선생이 한 사람 있지.” 새로 생긴 학교에 1회로 들어간 형이, 4회로 들어가는 동생인 저한테 해 주던 말. “그렇지만, 소설 쓴다며 나가고 난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데 뭐.”

 그 뒤, 드문드문 인천 지역 일간신문에 나오는 이원규 님 기사를 보고, 서울에서 나오는 중앙일간지에도 짤막하게 나오는 이원규 님 새책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마다 ‘용케 굶어죽지 않으시고 소설 잘 쓰고 있으시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문학책깨나 읽는다’는 대학교 동무나 선후배들한테 ‘소설을 쓰는 이원규 님 압니까?’ 하고 물으면 어느 누구도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고향이 인천인 동무나 후배들 또한 아무도 모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교지편집부 후배들한테, “야, 우리 학교에는 소설가 국어 선생님이 한 분 계셨어.” 하고 말하면, “네, 진짜요? 지금 뭐하세요? 우리도 그런 분한테 배워 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 인천과 황해를 배경으로 잡은 것은 내 고향에 대한 애정도 컸지만 이곳이 외세 침탈의 문호였고 분단이 고착되던 절망의 시기에 민중의 의지가 번번이 꺾이고만 비운의 장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곳을 현대사의 한 의미 깊은 공간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책임을 참으로 오랜 시간 가져왔던 것이다. 오늘도 칙칙한 색으로 말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황해의 파도에는 슬프고 어두운 과거가 묻혀 있고 이 소설에서 다룬 사건들은 그런 한스런 현대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 ..  (소설 《황해》(1992) 글쓴이 말)





 그리고 2005년, 소설을 쓰던 국어교사 이원규 님은 《약산 김원봉》(실천문학사)을 내놓고 이듬해에 《김산 평전》(실천문학사)을 내놓습니다. 소설이라면 소설로 다시 빚은 이야기이고, 소설이 아닌 평전이면 소설쟁이가 바라본 역사를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이 두 가지 책이 나올 때, 《약산 김원봉》과 《김산 평전》을 쓴 그 ‘이원규’가 내가 아는 이원규가 맞는가 하고 헷갈렸습니다. ‘이원규’라는 이름으로 문학을 하는 분이 여럿 있고, 같은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도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이원규 님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자리에 서 있었고, 국어교사를 그만두고 열 몇 해에 걸쳐서 한길로 파고든 역사소설이 밑거름이 되어 약산이 새로 태어났고 김산이 거듭 태어났습니다. ‘그래, 비로소 국어 선생님이 이렇게 소설쟁이라는 이름을 훨씬 굵직하게 받는구나. 그러나 평전은 소설이 아닌데, 우리 국어 선생님은 소설가라는 이름보다 평전 작가라는 소리를 더 자주 들어 버리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약산과 김산에 이어서 죽산 이야기도 써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둘레에서 곧잘 들으시는 듯합니다. 약산과 김산은 곧은 뜻을 품고 독립과 혁명을 바란 이라면, 죽산은 당신한테도 고향인 인천에서 뿌리를 내리며 독립과 혁명을 꿈꾸던 스승이요 선배이니까요.

 “작가니까 이렇게 살지요.”

 2008년 10월 18일 낮 네 시. 인천 배다리 헌책방골목 한켠에 있는 〈시 다락방〉에서 인천작가회의가 ‘우리 시대 작가와의 만남’ 자리를 열었습니다. 열한 번째를 맞이한 이 자리에는 소설 쓰는 이원규 님이 이야기꽃을 피웠고, 두 시간이 넘는 이야기꽃을 마무리하고 밥과 막걸리를 드는 자리에서 넌지시 여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교사 자리를 그만두고 소설만 쓰겠다고 뛰쳐나갈 수 있었는지’를, ‘그렇게 뛰쳐나갈 때 당신 마나님은 선선히 받아들이셨는지’를, ‘그렇게 뛰쳐나오고 먹고사는 일과 아이들 가르치고 기르는 일은 잘할 수 있었는지’를.

 “(교사) 현직에 남아 있는 것보다 잘했어요.”

 열일곱 해 만에 다시 만나는 어제까지, 제 마음속에는 이 물음 한 가지, ‘교사로 있으면서도 소설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뜻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그처럼 박차고 나올 수 있었는가’ 하는 궁금함이 있었습니다. 지난날이든 오늘날이든 고등학교라는 곳은 대학교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자리라, 국어교사라 한들, 시험 문제에 나올 지식만 가르쳐야지, 참다운 국어, 곧 참된 우리 말과 참된 우리 문학을 가르칠 만한 자리가 못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두동짐, 엇갈림, 어긋남 때문에 외려 고등학교 국어교사 자리는, 우리 말과 문학을 엉터리로 엉뚱하게 잘못 받아들여서 우리 말과 문학을 멀리하고 말지 모르는 아이들한테 참 가르침을 베풀거나 나누면서 곱새기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입시문제 때문에 말과 문학을 이렇게밖에 알려줄 수 없지만, 너희가 느끼고 가슴으로 껴안아야 할 말과 문학은 이런 교과서 지식이나 시험문제가 아니다’ 하고서.

 “지금 나이(예순둘)에는 그렇게 못하겠지만, 그때(교사 퇴직 할 때가)는 마흔다섯이었는데, 내 자신(삶)을 걸 수 있었지.”

 막걸리잔이 돌고, 둘레에 앉은 문학 하는 어르신들은 문학창작과 평전쓰기와 역사소설과 여러 가지 말씀들을 묻고 듣고 여쭙고 받고 합니다. 이러는 동안 저는 오로지 하나, 문학한다는 마음 하나로 살아가는 매무새란 무엇인지를 더 느끼고 싶고 듣고 싶고 알고 싶어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집에서 저를 기다리는 아기 칭얼거림을 한 귀로 느끼느라 한쪽 다리는 얼른 집으로 가야겠다면서 들썩이는데, 한 귀는 “종규야, 문학을 ……” 하면서 자리에 붙잡아 놓는 소설 쓰는 옛 국어교사 아저씨 이야기를 들으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가운데.





 “…… 그때(교사를 그만두고 소설만 쓰던 1990년대에) 소설만 쓰면서도 원고료나 인세는 지금보다 잘 들어왔어요. 그리고 대한생명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편당 30만 원으로 40회짜리 강의 자리를 만들어 주어서(1991∼1992년), (대한생명 보험) 아줌마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했어요. 그래서 강의 솜씨가 많이 늘었지. 힘들었는데 끝까지 마쳤어. 그리고 사보에다 글을 썼고.”

 “마누라 야쿠르트 배달 안 시키고 소설 잘 썼어요.”

 “(무엇을 쓰든) 작가는 도전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에요.”
(4341.10.19.해.ㅎㄲㅅㄱ)


***
판이 끊어져서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만, 소설꾼 이원규 님이 엮어낸 작품으로는 : 《훈장과 굴레》, 《침묵의 섬》, 《깊고 긴 골짜기》, 《천사의 날개》, 《펠리컨의 날개》, 《황해》,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독립전쟁이 사라진다》, 《저기 용감한 조선 군인들이 있었소》,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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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작가란 사람들은 왜


 우리 딸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몇 가지 글로 써서 띄워 놓았더니, ‘독특하게 키우는 육아 이야기를 취재하고 싶다’는 연락이 몇 군데에서 옵니다. 제 글을 읽었으면 틀림없이 ‘세이레가 되기까지 아기 사진은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다’고 적은 대목도 보았을 터인데, 사진기도 아닌 촬영기를 들이밀려고 하는 마음을 어떻게 품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아찔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방송 타는 일을 대단한 자랑으로 알 뿐더러, 방송을 타 보려고 너나없이 나서는 판입니다만, 저 같은 사람은 그깟 방송에 나간들 어떠하고 안 나간들 어떠하랴 하고 생각합니다. 방송국 사람들이 어느 한 사람을 속깊이 제대로 취재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서 조금도 믿지 못하고 있는 판이고요.

 전화번호는 어떻게들 용하게 알아내는지 놀랍습니다.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그 마음씀과 손놀림만큼이라도, 아니 그 반이나 반만큼이라도, 자기들이 취재를 하고 싶은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이며 어떤 삶이며 어떤 매무새인지를 곱씹어 볼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4341.9.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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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소 2008-09-03 15:57   좋아요 0 | URL
인천 배다리 못간지 몇 해 훌쩍~...^^ 96년인가 그랬을겁니다 아마도 님께서 혼자 만들어 놓으신 책자를 만난게..아벨서점에서요 늘 건강하세요~ 맘몸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