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긷고 빨래하러 날마다 이오덕자유학교를 오르내리며, 이오덕 선생님 빗돌에 눈 쌓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문득, 여러 해 앞서 쓴 글 하나 떠올라 걸쳐 놓습니다. 

 



글이름 : 나한테 이오덕 선생님은


 새벽마다 일찍 잠이 깹니다. 겨울이 지나면서 개구리가 깨어났고 웅크리던 새들도 기운을 찾았습니다. 새벽 네 시 반쯤 되면 창밖은 환하고 새들 우는 소리로 귀가 따갑기까지 합니다.


 아침 햇빛은
 맨 처음 분홍색으로
 어질게 솟아오른 산의 이마를
 물들이고,

 다음엔 나뭇가지 위에서
 밤새도록 별들의 노래를
 꿈속에 수놓던
 새들의 보금자리를 찾아 주고,

 차츰 산기슭에 내려와
 시래기가 매달린 토담집
 찌그러진 방문을
 빨갛게 비추고,

 그 흙내 나는 방 안
 밥상 위에 놓인 된장찌개에서
 모락모락 서려 오르는 김을,
 둘러앉은 식구들의 검붉은 얼굴들을,
 그 가슴속까지
 환히 밝히고,

 그리고, 길가에 굴러 있는 자그만 조약돌
 조약돌마다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아침 햇빛〉(시모음 《까만새》에서)



 아침 햇빛은 공납금을 내지 못해 쩔쩔매던 아이들 머리에도, 시험점수 따는 공부에 떠밀리는 아이들 머리에도, 학교를 떠나거나 학교에서 쫓겨난 ‘문제아이’머리에도 비춥니다. 하지만 새벽별 보고 학교에 가서 저녁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 머리에는 비추지 못하겠군요. 체육시간마저 아깝다 해서 바깥에 내보내지 않고, 오로지 책상 앞에만 묶어 두는 형편이니까요.

 교사가 되는 꿈을 꾼 적 있습니다. ‘내가 학교를 다니며 겪은 일’을 한 아이만이라도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그 젊은 나이에 배우고 익히며 받아들일 여러 가지’를 즐겁게 부대낄 수 있도록 힘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교대에 들어가려면 ‘제도권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시험점수 따기 공부를 시키며 닦달하는 지식’을 나부터 다시 머리속에 넣어야 하더군요. 언젠가 ㅅ교육대학교 도서관을 찾아갔을 때, ‘아무도 빌려가지 않는 책’하고 ‘뻔질나게 빌려가서 닳고 닳은 책’을 보았습니다. 교대에서 ‘아무도 빌려가지 않는 책’은 제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숱하게 ‘선생들이 압수해 갔던 책(시험공부에 걸리적거리니 보지 말라며 빼앗은 책. 하이네 시모음, 소설 《원미동 사람들》도 빼앗긴 책이었어요.)’이며 ‘시험문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뻔질나게 빌려가서 닳고 닳은 책’은 ‘교대에서 학점을 따고 강의를 들을 때 쓰는 교재’입니다. 더러 ‘동네 책대여점에서 빌려 보는 책’들도 ‘닳고 닳은 책’이 되곤 합니다.


.. 오늘날의 교육에는 사랑이란 것이 없어졌다. 겉으로야 무슨 말을 못하며, 보이기야 무슨 모양 어떤 숫자를 못 만들어 내랴. 가르치는 것이 지식의 단편이요, 물질을 얻고 입신하는 수단이고 보면 이런 넋 빠진 교육에서 아이들은 교사를 지식 전달의 기계로 보고, 교사는 아동을 밥벌이의 도구로 여긴다. 교육은 완전히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  《이오덕-삶과 믿음의 교실》(1978) 49쪽


 아직 힘알이 없는 멧개구리 뒤뚱걸음을 보았다가, 곧 깨어날 개구리알이 얼마나 있나 들여다보다가, 새벽부터 부지런히 울어대는 저 작은 새가 박새인지 콩새인지 살펴보다가, 새잎을 틔우려는 나무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 보다가, 오늘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지만 온갖 공해를 내뿜는 사람문명 탓에 먼지띠가 짙게 끼어 뿌옇게 보이는 하늘은 언제쯤 파래질까 생각하다가, 아, 철쭉이 피었네? 산수유는 진작 폈지? 살구꽃이 곧 터질 듯 말 듯이라는데, 복숭아꽃도 피겠구나, 보리순 뜯어 먹고 쑥 뜯어 먹고 민들레와 씀바귀도 캐어 먹으면서 참말 봄이 왔구나 하고 느낍니다.

 지난 2003년 8월 25일에 이오덕 선생님이 이 땅을 떠난 뒤로 세 해째 되었습니다. 선생님 살아 계실 때 딱 한 번 뵌 일은 있지만, 오로지 책으로 배우고 책으로만 스승이었습니다. 함께 어깨를 걸고 다부지게 일할 동무가 보이지 않고, 이런 까마득한 벼랑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 아찔할 때 한결같은 목소리로 만날 수 있던 책 스승이었습니다. 책으로만 만나는 스승이기에 자칫 ‘책에만 묻힐’까 아슬아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정약용도, 박지원도, 홍대용도, 이규보도, 허균도, 김시습도 책으로만 만나는 스승입니다. 이분들은 언제나 ‘당신들이 한 일을 책에 적힌 글월로 읽기’보다 ‘책은 안 읽어도 좋으니, 어느 한 가지라도 얻은 것이 있으면 바로 몸으로 옮기며 네 깜냥대로 받아들이며 부대끼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깨우침·앎·슬기도 책으로 남아 우리한테 다가올 테지요.

 ‘교육자 이오덕’이 우뚝 설 때까지 이분한테 ‘스승이 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책도 많이 읽으셨을 테고, 아이들과 부대끼며 많이 배우고 겪기도 하셨을 테며, 시골학교에서 자연을 언제나 벗삼기도 하셨겠지요. 그러고 보면 저한테 스승인 것은 사람이 남긴 책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태어나도록 한 자연 삶터, 둘레 사람들, 새소리와 바람소리와 파란 하늘이기도 하겠어요.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누구하고도 열린 마음으로 부대낄 수 있다면, 배울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거듭날 수 있겠어요.

 이오덕 선생님은 우리들한테 스승으로 있기보다 말동무로, 살구와 오디를 함께 따먹고 감을 함께 주워먹는 놀이동무로, 자연 삶터에서 땀흘려 제몫을 다하는 일동무로 함께 살아가고 싶으셨구나 싶어요. 그래, 이제는 봄입니다. 이 봄을 봄기운 그대로 마음껏 느끼면서 ‘이오덕 선생님도 듣고 좋아하셨을 새소리’로 새벽을 열고 쑥을 뜯어 찌개를 끓여 아침을 먹습니다. (4339.4.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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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다 쓰고 나서 살피니, 황미나 님이 연재를 다시 한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 글에서 표절과 창작이라는 고갱이를 놓고 해야 할 말을 다 적었기에 글을 손질하거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황미나


 ‘창작’과 ‘표절’과 ‘상상력’은 아주 다른 테두리입니다. 두 가지 다른 누리에서 살아가면서 뜻밖에 거의 똑같아 보이거나 아주 똑같은 창작품이 나올 수 있는 일입니다. 이와 달리 거의 비슷한 누리에서 살아가면서 슬프게 거의 똑같이 보이거나 어떠한 창작품 밑얼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새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똑같을 때에는 도둑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라도 똑같거나 하나라도 비슷할 때에도 도둑질입니다. 흔한 말로 ‘표절’이란 말을 쓰기도 하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베끼기’이거나 ‘훔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똑같지만 ‘훔치기’도 ‘베끼기’도, 또 ‘시늉하기’나 ‘흉내내기’마저 아니곤 합니다. 왜냐하면 ‘배우기’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치기’이기 때문입니다. ‘모시기’라든지 ‘따르기’일 때에도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닮곤 합니다.

 앞선 사람들 땀방울과 슬기와 보람을 밑거름으로 삼아 알뜰히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뜰히 배우는 첫무렵에는 거의 똑같이 따르는 듯 보이지만, 차츰차츰 제 빛깔을 내고 제 무늬를 그리면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어요. 아이가 제 어버이 삶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하나하나 똑같이 따르면서 차츰 배우듯,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가르치며 배우는 매무새가 삶으로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제 어버이를 베꼈다’라든지 ‘제 어버이를 훔쳤다’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 어버이가 걷는 길을 똑같이 따를지라도 ‘도둑질’이라 일컬을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한길을 서로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걸어가니까요.

 장사에는 동무장사가 있습니다. 서로서로 한뜻 한마음이 되어 장사를 함께할 때에 동무장사입니다. 둘이는 한 가게에서 함께 일할 수 있고, 다른 가게를 차리며 나란히 일할 수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중국땅을 벗어나 온누리 어디를 가더라도 중국사람거리를 이룹니다. 서로 ‘중국 밥집’을 차린달지라도 값을 더 싸게 해서 판다든지 무얼 한다든지 하며 피 튀기며 다투지 않습니다. 제 살 깎아먹기를 하지 않아요. 한국사람도 미국이나 일본에 가서 ‘한국사람거리’를 만들곤 합니다. 그렇지만 중국사람거리처럼 북적거리거나 아름답거나 살가이 어우러지지 못합니다. 한국땅에서도 똑같습니다. 순대골목이니 냉면골목이니 하지만, 가게마다 다 다른 빛깔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서로 값을 낮춘다든지 부피를 늘린다든지 할 뿐입니다.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하는 한국사람들한테는 참다이 창작이나 상상력이라는 문화가 삶으로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내 삶을 일구도록 배우지 못하는 배움터요 마을이며 집입니다. 제도권학교이고 제도권사회이며 제도권문화인 가운데 제도권예술 테두리에서 허덕입니다. 어느 집이건 이웃이나 동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내 이웃이나 동무를 마구 밟고 올라서서 1등이 되라고만 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이름값은 더 높이 얻으며 힘은 더 세져야 한다고 들볶거나 등떠밉니다.

 연극이든 영화이든 문학이든 ‘재연’이라고 있습니다. 우러르는 작품에 바친다는 뜻과 넋으로 ‘밑바탕이 되는 어느 창작품’에 있는 이야기를 되살리거나 새롭게 바꾸면서 바치는 작품입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아톰 만화를 우라사와 나오키가 님이 ‘새로운 로봇 만화’로 다시 그리는 일이라든지, 최규석 씨가 김수정 님 둘리 만화 ‘비꼬아 다시 그리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다시 그리기’를 하든 ‘비꼬아 그리기’를 하든, 새롭게 그리려는 사람들 자유이며 창조이며 상상력이라 할 만합니다. 누구나 다시 그릴 수 있고 비꼬아 그릴 수 있어요. 딱히 의무가 없는 권리요, 문화이며 예술이라 합니다. 구태여 ‘첫 창작품을 일군 사람’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첫 창작품을 일군 사람이 보기에는 내 작품을 바탕으로 다시 그리거나 비꼬아 그릴 때에 반가이 여길 수 있으나 못마땅히 여길 수 있어요. 자그마한 대목 하나를 따오는 일 하나 때문에 몹시 거슬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훔치기나 베끼기란 ‘아주 자그마한 대목 하나’ 때문에 훔치거나 베끼기 때문입니다. 줄거리를 훔치거나 이야기를 훔치지 못합니다(때로는 이런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마저 있어 사람들을 놀래킵니다만). 주인공 노릇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큰 고빗사위를 훔치거나 베끼지는 않아요(때때로 이런 짓까지 일삼는 사람이 있어 사람들 뒷통수를 칩니다만).

 독자 자리에 선 사람은 이런 창작도 보고 저런 창작도 볼 수 있습니다. 둘을 견주며 어느 쪽이 한결 낫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 창작을 내놓은 사람은 사람들이 이러거나 말거나 제 길을 조용히 걸을 수 있어요. 아무렇거나 내 삶을 알차고 사랑스레 꾸리면 ‘온누리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보아 주지 못할지라도 참속을 헤아리며 보듬는 사람’이 다문 하나라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가르치기와 배우기는 서로한테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됩니다.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면서 새로운 길을 틉니다. 제자는 스승한테서 배우며 새로운 눈을 뜹니다. 지식과 정보로 사귀거나 만나는 사이라면 스승과 제자가 아닙니다. 슬기와 깜냥을 북돋울 때에 비로소 스승과 제자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일 때에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내가 너를 따르든, 네가 나를 좇아가든 즐겁습니다. 고마워요. 그러나 베끼거나 훔치는 사이일 때에는 노상 괴롭습니다. 미우며 슬픕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도둑맞은 사람은 1원짜리 쇠돈을 앗기든 1000원짜리 종이돈을 털리든 똑같이 생채기를 받습니다. 1억 원이나 도둑맞아야 생채기를 받지 않아요. 팔다리가 잘릴 때에만 아프지 않습니다. 손톱 둘레에 거스러기가 생겨도 아파요. 파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어도 아파요. 살짝 꼬집어도 아픕니다. ‘흔하고 널린 설정이니 표절이 아니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일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다 하지만 ‘이는 도무지 표절이 아니에요’ 하는 말이 나옵니다.

 손쉬운 달걀부침에도 ‘요리법’이 있고, 뜨개질이든 바느질이든 영어로 일컫는 ‘레시피’가 있습니다. 이 요리법에는 모두 저작권이 있어요. 다만, 저작권이 있는 사람이 굳이 저작권을 내세우지 않으니 누구나 거리낌없이 나누며 씁니다. 종이학을 접든 종이배를 접든 한결같이 저작권이 있어요. 그렇지만 첫 창작자가 이러한 저작권을 누리려 하지 않으니 누구나 ‘거저로 마음껏’ 쓰면서 새로운 종이접기 길을 틉니다.

 문학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만화이든 …… 문화와 예술은 법정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고, 법정에 옳고 그림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법으로 따진다면야 저작권법이 있으니 첫 창작자는 제 권리를 지킬 수 있어요. 돈으로 갚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문화와 예술을 하는 사람한테 돈이란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름값이란 무슨 보람이 있나요. 게다가 법정소송을 하면 제아무리 짧아도 한두 해는 걸리고, 2심이나 3심을 간다면 자그마치 열 해나 써야 해요. 창작을 하는 사람한테는 한 달만 제 일을 못해도 괴로워 죽을 판인데, 법정소송에 가면서 제 일을 못하면 그야말로 죽음보다 더 아프며 힘든 노릇입니다. 표절, 곧 도둑질로 받은 생채기를 법정소송으로 옮기려 하지 않는 까닭은 ‘작품은 잃었어도, 그러니까 내 창작과 상상력은 빼앗겼어도 내 시간을 잃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앞으로 다른 작품을 내놓으며 내 새로운 창조와 상상력을 일구고 싶기 때문이에요.

 요즈음 불거지는 말밥을 살피면 더없이 슬픕니다. 한국땅 눈높이는 아주 낮기 때문입니다. 황미나 님이 지나치게 받아들였다고 여길 수 있고, 연속극 작가가 옳을는지 모릅니다. 황미나 님은 ‘어느 연속극이 내 만화에서 밑생각을 훔쳤다’고 따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황미나 님은 더는 만화그리기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일을 놓고 숱한 말이 오가지만, 황미나 님이 받은 생채기를 짚는 말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아마, 황미나 님이 받은 생채기뿐 아니라, 다른 이 밑생각과 창조와 상상력을 훔친 사람 마음이 얼마나 메마르거나 팍팍할 뿐 아니라 가엾거나 딱한가까지 짚을 수 있는 사람 또한 거의 없는지 모릅니다.

 황미나 님이 ㅂ이라는 작품을 더는 안 그리기로 한 일은 아주 잘했다고 느낍니다. 굳이 아쉬워할 일은 없으니까요. 황미나 님은 당신이 새내기 만화쟁이였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샘물처럼 시원하게 솟아나는 끝없는 창조와 상상력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하는 만화를 그린 분이에요. 가끔 긴머리 싹뚝 잘라 주지, 하는 마음으로 짧은머리 다시금 기르면 됩니다.

 아무쪼록,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믿음직함이 고루 어우러지면서 따사롭고 너그러운 새 만화를 즐거이 그리시면 좋겠습니다. 나무는 가지 한둘이 뚝 부러져도 이듬해에 새 가지를 씩씩하게 다시 냅니다. 리영희 님이든 이오덕 님이든 수십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으셨을 텐데, 당신들이 쓴 글은 모두 ‘창작’이었지, 어느 글 한 조각조차 ‘베끼기’라든지 ‘훔치기’라든지 어설픈 글이 태어난 적이란 없습니다. (4343.1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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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영희 님


 리영희 님이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놀라지는 않는다. 올 일이 왔다고 생각한다. 문득 궁금해서 몇 군데 누리신문으로 들어가 보니 첫 쪽에 큼지막하게 ‘궂긴 이야기’를 적바림해 준다. 그렇구나, 이렇게 숨을 거두고 나서야 첫 쪽에 큼지막하게 실어 주는구나. 살아 있는 동안 당신 말씀을 조금 더 귀담아 들어 주면서 첫 쪽에 큼지막하게 실어 줄 수는 없었겠구나. 여느 때마다 덧없는 정치다툼이나 부질없는 경제성장 숫자를 잔뜩 싣던 신문들이기 때문에, 여느 때에 우리들 마음밭을 곱게 일구는 데에 밑거름이 될 이야기는 싣기 어려울는지 모른다. 아무렴.

 다들 리영희 님을 놓고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고 읊는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리영희 님은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실천하는’ 사람이다. 리영희 님은 글을 쓸 때에 허투루 쓰는 법 없이, ‘글 한 줄 쓰느라 책 다섯 권을 읽는다’고 했으니 참다운 지식인이다.

 그러면, 이렇게 말을 앞세우지 않고 몸으로 살아내면서 글 한 줄 쓰느라 책 다섯 권을 읽는 매무새는 어떤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인가.

 아무도 따를 수 없는 하느님 같은 사람 모습인가.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보여주는 모습인가. ‘지식인’이라면 밑바탕으로 갖출 모습인가.

 리영희 님은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리영희 님은 당신 아들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매무새로 글을 쓰고 말을 나누었기 때문에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리영희 님이 쓴 책을 읽을 때면, 리영희 님이 온삶을 바쳐 알알이 영근 알뜰한 넋을 아로새길 수 있었기에 당신은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아버지가 당신 아들을 어떻게 헤아리면서 사랑하는가를 돌아볼 노릇이다. 아버지다운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매무새일는지 살필 노릇이다.

 히유. 아이야, 날이 차다만 자전거 타고 살짝 마실을 다녀오자. 찬바람 좀 잔뜩 쐬어야겠다. (4343.12.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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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나기 무네요시 다시읽기


 여러 해 만에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다시 읽는다. 이번에는 《조선을 생각한다》(학고재,1996)를 다시 읽기로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 넋을 가장 잘 간추렸다고 하는 책이지만, 정작 이 책은 출판사에서 더 찍지 않는다. 더 안 팔리니까 더 찍기 어려울 테지.

 지난 2007년에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지식산업사,2007)이라는 책이 나온 적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을 찬찬히 읽으려 하지 않고 ‘죽은 자료’를 들추어 내는 한편 ‘집안 발자국’을 살피기까지 하는 책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이런 책은 굳이 읽고프지 않다. 내가 옳게 살아가며 옳게 바라본다면,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책을 읽으면서 얼마든지 이이 삶과 넋과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바른지 그른지 착한지 궂은지 고운지 미운지를 깨닫는다. 나 스스로 옳게 살아가지 않거나 옳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따끔하거나 찬찬하다 싶은 비평이든 논설이든 비판을 읽는달지라도 제대로 삭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가 읽을 글이란 ‘어느 한 사람이 온마음을 쏟아 내놓은 첫마음’ 담은 글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한 사람이 쓴 모든 글을 두루 읽을 수 있는 가운데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 같은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다면 더 널리 헤아리거나 돌아볼 수 있기도 하겠지. 그러나, 정작 《조선을 생각한다》라든지 《공예문화》라든지 《다도와 일본의 미》 같은 책을 찾아볼 수 없다면 우리로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살피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아쉽다면 《조선을 생각한다》는 더 찾아 읽을 수 없으나 《다도와 일본의 미》(1996)는 아직 찾아 읽을 수 있다. 《미의 법문》(2005)이나 《수집 이야기》(2008)도 찾아 읽을 수 있다. 《조선과 그 예술》(2006)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나온 책도 하나 있다. 2006년에 신구문화사에서 다시 찍은 《조선과 그 예술》이 앞으로 언제까지 새책방 책시렁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우리 삶과 문화와 발자취를 곰곰이 되새기고자 마음쓰는 이라면 헌책방마실을 꾸준히 하면서 야나기 무네요시 님 예전 책이든 다른 좋은 책이든 넉넉히 찾아서 읽으리라 본다. 내가 읽을 책은 ‘산 야나기’이지 ‘죽은 야나기’가 아니니까.

 《조선을 생각한다》는 2000년에 읽었으니 열 해 만에 다시 펼친다. 열 해 뒤에 책을 다시 펼치니 가슴으로 새롭게 와닿는 대목이 있다. 아니, 열 해에 걸쳐 내 삶은 굵든 짧든 구비구비 헤치며 흘렀으니, 이만큼 새롭게 볼 눈길을 길렀다 할 만하리라. 이를테면, “조선에 대해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상이 조금도 현명하지 않고 깊이도 없고 또한 따뜻함도 없다는 것을 알고(14쪽)” 같은 대목을 새롭게 읽는다. 나로서는 이 글월에서 “따뜻함도 없다”라는 대목이 눈에 걸린다. 잇달아, “이웃과의 사귐은 오직 사랑이 맺어 주는 것이다. 군정이나 압박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15쪽)”를 읽으며 가만히 되짚는다. 참말 사랑 아니고 무엇을 하겠는가. 참말 따뜻함 없이 무슨 일을 하거나 무슨 글을 쓰겠는가. 따뜻한 사랑을 담아 쓰는 글이 아니라면 나부터 이런 글을 되읽기 싫다. 내가 쓴 내 글을 나부터 기쁘게 되읽을 만해야 내 글을 사람들 앞에 내놓는다. 아니, 나는 내가 쓴 글을 나 스스로 한 해 뒤이든 열 해 뒤이든 되읽으며 내 삶을 일구고 싶지, 누구한테 내보이거나 선보일 생각으로 글조각만 붙잡을 마음이 없다. 내가 쓰고픈 글은 따뜻한 사랑을 담는 글이요, 내가 읽고픈 책은 따뜻한 사랑을 담은 책이다.

 “고분을 파헤쳐 옛 예술품을 모은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통해 조선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15쪽)” 같은 대목을 차분히 곱씹는다. 이는 지식인을 이르는 대목이다. 지식인들은 수많은 책을 읽어 지식을 쌓지만, 이 지식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 줄을 헤아리지 않기 일쑤이다. 수많은 논문이 있고 또다른 책이 쏟아지지만, 정작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에는 눈길을 안 두기 일쑤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다는 다큐멘터리 사진쟁이는 가난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들하고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나. 몸으로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는 지식인은 얼마나 될까. 환경운동을 말하면서 내 몸 깊이, 아니 내 삶으로 환경사랑 자연사랑을 잇는 일꾼은 얼마나 있다 할 만한가. 지식과 구호와 논문과 논설로 4대강사업하고 다부지게 맞선다 하는 분들은, 당신 삶을 얼마나 ‘4대강사업을 몰아낼 만한 눈높이’로 가꾼다 할는지 궁금하다. 목소리만 내어서는 아무 일을 하지 못한다. 목소리는 내지 않더라도 몸으로 살아내고 마음으로 삭일 수 있어야 한다. 농사짓는 사람들 마음이 되어야 하고, 아이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 마음이 되어야 하며, 아이를 품에 안고 살가이 보듬는 어버이 마음이 되어야 한다.

 “승리하는 것은 그들의 아름다움이지 우리의 칼이 아니다(17쪽)”나 “칼의 힘은 결코 현명한 힘을 낳지 않는다(18쪽)” 같은 대목은 잘 읽어야 한다. 뭐랄까, 제대로 읽어야지.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일본 군벌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만 놓고 슬퍼 하거나 아파 하지 않는다. 불쌍한 사람은 식민지 조선사람뿐 아니라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인과 권력자이기까지 하다. 아니, 식민지 조선사람보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인과 권력자가 훨씬 불쌍하다. 얼마나 덧없고 부질없으며 값없는 삶을 보내는 군인과 권력자인가. “사람들은 일본의 사상을 심으려고 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살리려고는 하지 않았다(20쪽)”고 하듯, 일본 권력자와 한국 권력자는 일제강점기에 더 큰 잇속을 챙기려 했을 뿐이다. 이리하여 참으로 크나큰 잇속을 챙긴 두 나라 권력자이다. 일본 권력자만 잇속을 챙기지 않는다. 한국에도 똑같은 권력자가 있다. 그런데, 이런 권력자가 있든 저런 권력자가 있든 밑바닥에서 짓눌리는 사람들은 내 삶을 버리지 않는다. 지식인들은 갖은 일본말과 중국말과 미국말을 주워섬기는데, 이 나라에서 이 나라 말과 글을 지키거나 건사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바로 여느 사람, 수수한 사람, 가난한 사람, 지식 없는 사람 들이다. 이 나라 지식인들은 아직까지도 ‘일본 제국주의 물이 짙게 밴 일본 한자말과 일본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쓴다. 게다가, 당신들 지식인 스스로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에 젖어들어 있는 줄 못 깨닫기까지 한다. 일제강점기를 꾸짖으면서 정작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 말투와 낱말로 이야기를 한다면, 이 얼마나 슬프고 딱한 노릇인가.

 지식에 앞서 삶이고, 지식이 아닌 사랑이어야 한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꾸준히 읽고 되읽어 왔다. 내가 읽는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중국사람 노신 님하고 한동아리이다. 연변땅 김학철 님하고도 한동아리이다. 남녘땅 리영희 님이라든지 일본땅 오다 마코토 님하고도 한짝이라고 느낀다. 남녘에서는 일찍이 1976년에 송건호 님이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한민족과 그 예술》(탐구당)이라는 이름으로 옮긴 적이 있다. 이때 옮긴이 말에 송건호 님은 “일본에는 아직도 옛날의 식민주의적 잔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우리를 업신여기거나 재진출을 꾀하는 층이 있음에 비추어, 그들에게 저자세로 영합하는 친일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한편 일본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두 나라의 참된 우호를 위해서는 실로 우리 민족을 이해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는 양심적 인사들이 많다는 점에서, 일본을 무조건 증오하고 배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일본의 대한 태도에 있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환영하고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분명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적었다. 일본에서 살아가며 옳은 삶 옳은 넋 옳은 말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한국에서 살아가며 슬픈 삶 그릇된 넋 못난 말로 미움을 쏟아붓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식민지 조선 무렵 일본사람’ 야나기 무네요시가 아니라 ‘참삶을 사랑하고 아낀’ 야나기 무네요시를 읽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금전이나 정치로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맞닿을 수 없다(23쪽)” 같은 말을 1919년에 일본사람이 읊은 대목을 못마땅해 할는지 모르겠다. 아마, 무척 못마땅하다고 느낄 만하다. 그렇다면 이무렵 한국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읊었는가. 뒷날 시인 신동엽 님은 〈껍데기는 가라〉 같은 시를 읊기도 했는데,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라는 대목이나 “이웃 간에 영원한 평화를 구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깨끗이 하고 동정으로 따뜻하게 하는 길밖에 없다(22∼23쪽)”라는 대목이나 서로 한 흐름이고 한 넋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조선사람을 생각한다〉라는 글이 요미우리신문에 실렸다 해서 말썽거리가 많다는 사람이 많기도 한데, 1970∼80년대에 글 하나 써서 내놓으려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 싣지, 어느 신문에 실었을까. 동아투위니 무어니 하고 이야기하는데, 조선일보이든 동아일보이든 이무렵에 어떤 글투로 어떤 이야기를 신문에 담았는가. 더군다나 요즈음 한겨레신문 기사를 돌아보건대, 나로서는 한겨레신문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2200년이나 2500년쯤에 살아갈 뒷사람들한테는 한겨레신문이 진보 목소리를 지켜 주는 매체라 여길는지 모르나, 2010년을 살아가는 내 눈썰미로는 한겨레신문은 진보 목소리를 앞세워 장사를 한다고 느낀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매체는 보수라든지 안보라든지 경제 목소리를 내세워 장사를 한다고 여긴다. ‘진보 목소리’가 아니라 ‘진보’라 한다면, 한겨레신문에는 주식시세표나 방송편성표나 골프 기사나 재벌회사 광고 따위는 실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국민주 신문이라 한다면 광고 하나 없는 신문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지, 더 많은 몹쓸 광고를 실으며 신문사 살림을 꾸리는 일이란 얼마나 두동진 모습인가. 〈조선사람을 생각한다〉라는 글이 어느 신문이나 매체에 실렸든 하나도 돌아볼 만한 값어치가 없는 대목이다. 이 글이 어떠한 글인가를 읽어야 한다. 이 글이 무슨 뜻과 넋을 실었는가 헤아려야 한다.

 삶을 읽는 책이어야지 지식을 갈무리하는 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삶을 사랑하는 글이어야지, 지식을 우러르는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올 3월에 읽은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유미리 산문,2000)를 엊그제 다시 끄집어 내어 읽다 보니, “진상을 폭로해 버릴까 싶기도 하지만, 진상 따윈 들을 귀가 없을 것이다(40쪽)” 같은 대목이 있다. 피식 웃음이 나면서 서글퍼 눈물이 난다. 왜 우리한테는 들을 귀가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읽는 눈이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아로새기는 가슴이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부둥켜안는 몸이 없을까. 유미리 님은 거듭 이야기한다. “여성은 어디서든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눈썹, 복사뼈, 엉덩이 사이에서도.” 하고.

 그래, 야나기 무네요시 님, ‘유종열’ 님은 어머니 같은 눈길과 손길로 글을 썼고 사람을 사귀었다. 어떤 이들은 야나기 무네요시 님을 정치나 군사나 종교나 문화 따위에 써먹으려고 휘두르기도 했겠지. 어머니한테서 돈을 울궈낸다든지 시골집 논밭을 팔아 대학교를 다닌다든지 하는 딸아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머니는 제 뼈와 살과 피를 아이한테 내어주는데다가 젖까지 먹인다.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도록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며 옷을 입힌다. 잘 자라며 자장노래까지 부른다.

 사람들이 어머니 넋을 읽거나 어머니 사랑을 깨닫거나 어머니 슬기를 알아챈다면, 야나기 무네요시 님을 새로우면서 옳게 삭일 수 있으리라 믿어 본다. 믿어 보련다. 믿고 싶다. 한 해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12월을 맞이하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람과 사랑을 헤아리고 싶었는데, 자꾸만 슬프며 아픈 삶과 사람과 사랑만 되뇌고 마는구나. (4343.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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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톰(토비오)과 이주노동자와 재일조선인과


 〈우주소년 아톰〉 만화영화를 본다. 아이와 함께 네 번째 이야기를 본다. 아톰은 로봇이고, 둘레에는 모두 사람이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 아톰을 깔보거나 얕잡거나 따돌리거나 푸대접한다. 생각해 보니, 첫째나 둘째나 셋째 이야기에서도 아톰을 비롯한 수많은 로봇은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으로 다루어진다. 더구나, 궂고 지저분하며 힘든 일은 온통 로봇한테 떠맡긴다. 청소를 하건 집일을 하건 로봇이 하지, 사람이 하지 않는다. 놀이터에서 사고를 친 아이들을 아톰이 살려내는데, 이때에 아이들을 살린다며 찾아오는 일꾼은 ‘119 구조대원’ 같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고, 이 로봇은 자기장에 휩싸여 금세 잿더미가 되어 버린다.

 사람은 로봇을 부리며 탱자탱자 놀듯 살아간다. 머리에는 온갖 지식을 집어넣고 몸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단추 하나만 눌러도 모든 일이 다 된다. 로봇은 사람 일을 모조리 해 줄 뿐 아니라,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심심하지 않게 노리개가 되거나 놀이꾼이 되어 주기까지 한다.

 아톰은 제 아빠를 잃고 새로운 어버이를 만난다. 새 어버이는 아톰을 학교에 넣는다. 아톰은 로봇으로 태어나기 앞서 ‘토비오’라는 어린이였는데, 어린이 ‘토비어’는 그만 사고로 죽는다. 로봇으로 다시 태어난 아이인 ‘토비오’인데, 이 아이가 제 나이에 걸맞게 초등학교 3학년에 들어가지만, 학교에서도 꽤 많은 아이들은 아톰을 따돌리거나 괴롭힌다. 마치, 일본에서 이주노동자하고 재일조선인이 따돌림을 받거나 푸대접을 받듯이.

 그렇구나. 아톰을 비롯한 수많은 로봇은 이주노동자와 똑같이 다루어진다.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을 다루듯 아톰을 다룬다면, 한국에서는 돈이 없거나 이름이 없거나 힘이 없는 사람들을 아톰을 비롯한 로봇처럼 다루는구나 싶다. 사람들이 보이는 못난 모습 때문에 아톰이 슬퍼 하면서 눈을 내리깔 때마다 함께 슬프다. 아톰하고 한 배에서 태어난 ‘아트라스’가 사람들을 몹시 싫어하면서 스스로 ‘지구별 사람을 깡그리 쓰러뜨리어 세계 정복’을 하겠다는 꿈을 품을밖에 없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아톰은 로봇도 사람도 똑같이 사랑스러우며 평화로이 살아갈 수 있을 아름다운 나날을 꿈꾼다. 나는 데즈카 오사무 님 슬프면서 착한 만화가 좋다. (4343.11.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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