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나누는 기쁨 ㉧ 사진책, 사진잡지, 사진작품
 ― 참다운 문화와 착한 예술로 나아갈 사진밭



 모든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잘 팔리는 일이란 없습니다. 모든 책은 태어나는 만큼 숨을 거둡니다. 모든 책은 앞에 나온 책이 숨을 거두며 새롭게 빛을 보지만, 모든 책은 저 스스로 숨을 거두며 뒤에 나올 책한테 자리를 물려줍니다.

 수많은 사진책이 새롭게 나왔고, 오늘날 읽히며, 앞으로 새로 나옵니다. 예전 사진책이라 해서 더 놀랍거나 훌륭하거나 값있지 않습니다. 오늘 새책방에서 잘 팔리거나 제법 팔리는 책이라 해서 이름값 있다든지 알차다든지 사랑할 만하지 않아요. 앞으로 나올 책이 훨씬 훌륭하거나 아름다우리란 법은 없습니다.

 앞에서 사진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어 오늘 꿋꿋하게 사진길을 걷는 사람이 있고, 앞으로 이 길을 꾸준히 이을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서 누군가 사진으로 담아낸 이야기라서 굳이 오늘로서는 다시 안 담을 만하지만, 오늘은 오늘인 만큼 오늘을 사는 사람이 오늘 눈썰미로 새삼스레 담을 만하기도 합니다.

 먼 옛날 모습이 더 아련하거나 더 살가울 수 없습니다. 2010년대에 거슬러 살핀다면 1970년대가 그립다거나 아름답다 여길 사람이 있을 텐데, 이와 마찬가지예요. 2050년대에 살아갈 뒷사람으로서는 2010년대 오늘을 그리워 하거나 아름다이 여길 수 있어요.

 사진이란 어제를 찍는 일이 아닙니다. 사진은 오늘을 찍는 일입니다. 글은 어제 이야기도 쓰고 앞으로 펼칠 이야기도 씁니다. 그림 또한 어제와 앞날을 그립니다. 그런데 그림은 사진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그릴 수 있어요. 다만, 사진은 어제도 앞날도 다루지 못합니다. 사진은 오직 오늘 하루 이날 이곳만 다룰 수 있어요.

 사진은 한계가 많습니다. 사진은 못하거나 못 담을 이야기가 몹시 많습니다. 사진은 반편장이나 외다리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진이란 한계가 많아 재미있습니다. 사진은 한계가 넘치기에 글을 붙여 사진수필을 엮기도 합니다. 사진으로 못하거나 못 다룰 이야기가 많은 탓에, 사진은 이 모자라거나 어수룩한 틀에서 새삼스레 바라보는 오늘 모습이 있고, 그 어느 매체나 예술보다 오늘 이곳을 더 날카롭거나 깊거나 넓게 아우른다든지 헤아린다든지 보듬는다든지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사진이란 사진을 찍은 날짜가 새겨집니다. 만드는 사진이든 찍는 사진이든 ‘사진이 태어난 날짜’는 고치지 못합니다. 셈틀을 만지작거리면서 포토샵으로 어찌저찌하더라도 ‘사진을 건드린 날짜’ 또한 고치지 못해요. 사진은 그야말로 ‘오늘이라는 테두리에 갇히고 오늘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달리 보면 ‘어떠한 매체와 예술도 할 수 없는 오늘 삶 보여주기’를 가장 멋스럽고 아름다이 펼칠 수 있습니다.

 사진책은 오늘을 사진으로 말하는 책입니다. 사진잡지는 오늘을 사진으로 말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그러모으는 잡지입니다. 사진작품은 오늘을 사진으로 말하는 꼭 한 장짜리 이야기입니다.

 사진책에 따라 널리 팔리거나 사랑받는 책이 있으나, 거의 안 팔리거나 사랑스러운 손길 한 번 못 타고 잊히는 책이 있습니다. 사진잡지 가운데 오래도록 꾸준히 펴내는 잡지가 있으나, 몇 해 버티지 못하거나 오래도록 이었으나 이제 그만 목숨이 다해 사라져야 하는 잡지가 있습니다. 사진작품 가운데 매우 비싸다 싶은 값으로 팔리는 작품이 있는 한편 거저 주어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작품마저 있습니다.

 사진이란 오늘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끝과 끝처럼 갈립니다. 사진이란 바로 오늘을 보여주는 거울인 터라 이 끝과 저 끝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이란 그예 오늘을 밝히는 빛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저기까지는 끝없이 벌어졌으나 끝없이 이어집니다.

 여느 책방에는 들어가지 않는 사진책 《시간의 흔적, 동구의 공장들》이 있습니다. 2010년에 나온 이 사진책은 사진쟁이 김보섭 님이 인천 동구에 있는 공장들을 담은 사진을 엮습니다. 이 사진책은 2010년 3월 10일에 나왔는데, 김보섭 님이 2011년에 같은 이름으로 다른 사진책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진쟁이가 인천 동구에 있는 공장을 저 나름대로 다니면서 “내가 본 인천 동구 공장들은 이렇던데?” 하면서 다른 사진책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1980년에 나온 《日本の民家》(A.D.A. EDITA Tokyo)라는 두툼한 사진책이 있습니다. 일본땅 여느 사람 살림집을 다룬 사진책은 1980년에 나온 이 사진책 하나로 끝나지 않을 뿐더러, 이 한 권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1981년이든 1980년 같은 해이든 1990년이든 2010년이든 2030년이든 얼마든지 새로 나올 만할 뿐 아니라 새로 나와야 합니다. 한국땅 서울이라는 도시를 돌아보는 사진책 하나 나왔다면 이 사진책 하나가 ‘서울땅 모든 모습’을 보여준다 할 수 없습니다. 이 사진책 하나를 첫끈으로 하든 첫걸음으로 하든, 수많은 ‘서울땅 모습’ 사진책이 태어나야 합니다.

 사진잡지는 수많은 사진책이 태어나는 흐름에 발맞추어 사진밭 사람들을 살피는 가운데 온갖 이야기를 그러모읍니다. 사진작품은 온갖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더도 덜도 아닌 다문 한 장짜리 사진’으로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사진작품이 마루나 방에 걸릴 수 있다면, 이 한 장짜리 사진작품을 언제나 누구하고라도 오래도록 들여다보면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잡지란 다달이 호수를 채우는 잡지가 아니라, 다달이 다 다른 사람들 수많은 이야기가 어우러지거나 흐드러지는 사진놀이마당입니다. ‘사진 놀이마당’이나 ‘사진놀이 마당’이나 ‘사진 놀이 마당’이 아니라 ‘사진놀이마당’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다든지 어느 한켠으로 치우쳐서는 안 돼요. 잡지이기 때문에 잡지다움을 건사해야 합니다. 잡지인 만큼 잡지스럽게 엮어야 해요. 살롱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한결같이 사랑해야 할 사진잡지입니다. ‘나라를 만든 사람들’ 사진이든 ‘빨갱이 좌파’ 사진이든 골고루 아껴야 할 사진잡지입니다. 풋내기이든 새내기이든 헌내기이든 어르신이든 다 같이 어깨동무할 사진잡지입니다. 나라안 사진쟁이이든 나라밖 사진쟁이든, 또 이주노동자인 사진쟁이이든 너나들이하듯 사귀어야 할 사진잡지예요.

 100만 원짜리 사진작품이 있다면 100원짜리 사진작품이 있습니다. 저는 제 사진을 ‘크기에 따라’ 팔기도 하지만, ‘사람에 따라’ 거저 주거나 안 팔기도 합니다. 한 달 살림돈이 빠듯한 가운데 큰돈 들여 사진을 뽑아 사진틀까지 낀 사진작품을 스스럼없이 선물하기도 하지만, 달랑 종이에 뽑았을 뿐이며 그리 크지도 않은 사진작품을 50만 원이나 20만 원 값을 치르지 않고서는 넘겨주지 않기도 합니다. 작은 책에 앙증맞게 들어갈 만하게 사진작품을 여럿 만들어 놓고는 고마운 분한테 책을 선물할 때에 슬쩍 끼워넣기도 합니다. 사진잔치 전단지처럼 쓰려고 뒤쪽에는 안내글을 넣지만 앞쪽은 사진작품만 담아서, 이 종이를 ‘사진잔치 전단지’로 쓰기도 하는 가운데, 이 전단지에 매직으로 제 이름 석 자를 슥슥 적으면 ‘또다른 사진작품’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사진쟁이 ㅇ님을 만났을 때에 ㅇ님께서는 사진책을 당신 돈을 들여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사진책을 내주더라도 ‘당신이 책을 선물할 사람이 많은’ 나머지, 언제나 ‘인세 몫에다 두 권’을 받을지라도 ‘선물해야 할 책이 모자라’니까 출판사에 돈을 주고 사야 한다더군요. 이렇게 책을 돈 주고 사야 하면, 당신 돈을 들여 사진책을 만들 때보다 돈이 더 들기 마련인데 출판사에서는 이런 형편을 보아주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당신 돈을 들여서 사진책을 만든다 말씀합니다. 듣고 보니 딱하지만, 생각해 보니 슬픕니다. 사진을 좋아하거나 사진을 아낀다면, 사진쟁이 ㅇ님이 손수 당신 이름 석 자를 적바림해서 봉투에 담아 선물할 때에, 이 사진책 선물을 받은 분들은 봉투에 책값 얼마를 넣어 사진쟁이 ㅇ님한테 쥐어 주어야 옳기 때문입니다. “아, 참 사진이 좋군요!”라든지 “이야, 사진책 멋진데요?” 하는 주례사 같은 입발린 칭찬은 접어 놓고, “이 사진은 어떻게 찍었나요?” 하고 묻는다든지 “이 사진은 좀 엉성해 보이는군요.” 하면서 사진쟁이 ㅇ님으로서 사진길을 더 알차며 튼튼히 걸어가도록 도움말을 들려주기라도 해야 옳기 때문이에요.

 사진책이 안 팔리는 까닭은, 한국땅에서 비싼 사진장비 갖추려는 사람은 많아도 좋은 사진책 사서 읽으려는 사람이 몹시 적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처음부터 너무 비싼값을 매겼기 때문이라고만 탓할 수 없습니다. 작가나 전문가나 어르신으로 사진을 하는 분들부터 이웃 사진쟁이 사진책을 기꺼이 제값 들여 책방마실을 하면서 사들여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소개하는 신문이나 잡지는 아주 드물기 때문에 새 사진책 소식을 못 들을 수 있겠지요. 더구나 사진잡지가 몇 가지 없을 뿐더러, 사진책 제대로 소개하는 사진잡지는 없다 할 만합니다. 이런 형편이니 사진밭 어르신들 스스로 ‘새 사진책 소식’을 못 듣는다든지, 다른 사진쟁이가 선물해 주는 책을 받고서야 ‘어, 이런 책이 나왔네?’ 하고 생각할 만합니다. 우리네 사진밭 높낮이는 이러하니까, 사진쟁이 어르신들 스스로 이러한 높낮이를 잘 살피면서 ‘사진책 선물을 받았’으면, 책방마실을 해서 선물받은 사진책을 한 권 새로 사 주어야 합니다. 새로 산 책은 사진밭 후배나 조수나 동료한테 다시 선물해 주어야 합니다. 사진책이 제대로 읽히거나 팔리거나 나오도록 하자면, 누구보다 사진밭 어르신들이 사진책 사들이고 읽는 데에 주머니를 털어야 해요. 주머니를 털어 사진책을 사서 읽을 때에 비로소 ‘사진비평’이 태어납니다. 거저로 선물받은 책을 이야기할 때에는 주례사비평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살림이 가난하다면 가난한 가운데 비싼 사진책 하나 애써 사서 읽으면서 ‘이렇게 비싸다 싶은 값을 하는 사진책인지, 허울좋게 비싼값만 붙은 사진책인지’를 낱낱이 돌아보거나 짚으면서 사진비평을 내놓아야 합니다. 사진잡지사는 사진책 내놓은 출판사에서 보내온 보도자료에 따라 짤막히 소개하는 기사를 담으면 안 되고, 출판사한테 사진책 값을 계좌이체로 보내주고 나서, 차분히 곱씹고 헤아리는 가운데 참답고 올바른 사진비평을 잡지에 실어야 합니다.

 사진책이 사진책답게 나오지 못하고 읽히지 못할 때에는 사진잡지도 사진잡지답게 엮기 힘들며 읽히지 못합니다. 사진책이 사진책 노릇을 못하고 사진잡지가 사진잡지 노릇을 못하는 사진밭이라면, 사진작품이 뜬구름잡듯 너무 높은 값에 팔린다든지, 사진작품이 높은 값에 팔려야 좋은 사진이라도 되는 듯 여기는 엉터리 흐름이 퍼지고 맙니다. 사진작품은 사진작품에 걸맞게 값을 치러야 합니다. 사진작품은 예술작품이 아닌 사진작품입니다. 사진작품은 사진작품다이 비평을 받으면서 값을 치러 사고팔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작품은 사진작품으로서 내 집 내 방 내 일터 벽에 즐거이 붙여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비싼값 자랑하는 사진작품이란 덧없습니다. 이름값 내세우는 사진작품이란 부질없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고 따스한 사랑을 나누는 사진작품이어야 참 사진이요 착한 문화요 고운 예술입니다. (4344.1.1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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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나누는 기쁨 ㉦ 사진문화와 사진예술
 ― 좋은 삶에서 길어올리는 사진꽃



 사람들은 사진을 잘 찍고 싶어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얼굴이 예뻐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떠한 일이든 빨리빨리 해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학교를 나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영어를 솜씨있게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 결대로 살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 제 목숨을 보배롭게 여기면서 즐거이 살아가면 넉넉합니다.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면서 저마다 사랑하는 마을에서 저마다 사랑하는 보금자리를 알뜰살뜰 일굴 수 있으면 좋습니다. 누구나 웃음과 눈물이 어우러진 삶자락을 누리면서 어깨동무를 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이 나라에는 사진문화가 없습니다. 사진문화란 사진만 헤아리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진만 헤아리더라도 이 나라에는 사진 또한 없습니다. 더욱이 문화라 할 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삶이 있기에 문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삶이 있을 때에 문화가 비로소 태어납니다.

 전통문화란 여느 자리에서 수수한 사람들이 오순도순 꾸린 삶입니다. 김치이든 된장이든 시래기이든 콩국수이든, 잘나거나 대단한 사람들이 잘난 재주나 대단한 재주로 자랑하던 모습이 아닙니다. 밥이건 집이건 옷이건 노래이건 춤이건, 하늘에서 똑 떨어지거나, 사람들 살림살이나 마을에서 동떨어진 채 퍼지는 문화나 예술이란 없습니다. 그저 여느 삶이고 그예 수수한 사람이 어디에서나 나눈 전통문화입니다.

 짚신, 소쿠리, 삽짝, 온돌, 이엉, 질그릇, 멧돌이란 전통문화이면서 생활문화라고도 하지만, 이런저런 이름이란 부질없이 ‘삶’ 한 가지입니다. 삶이었고 삶이며 삶으로 이어가기에 ‘전통’입니다. 따로 ‘전통’이라는 앞머리를 붙일 까닭이 없이 삶이요, 삶이기에 학자들은 전통이라든지 문화라든지 예술이라든지 이름을 거듭 붙입니다. 도자기를 굽든 그림을 그리든 장구를 치든 굿을 하든 무어를 하든 인간문화재나 예술이나 문화이기 앞서 노상 삶입니다. 언제나 삶인 가운데 더욱 알뜰히 즐긴 이야기입니다.

 사진문화가 있다 한다면 사진이 삶으로 녹아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진예술이 있다 한다면 사진이 삶으로 꽃피운다는 소리입니다.

 나랑 너랑 우리,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수수한 터전에서 조촐하게 어우러지면서 즐기는 삶인 사진일 때에 사진문화이면서 사진예술입니다. 이른바 ‘순수문화’나 ‘순수예술’이란 없습니다. ‘순수삶’부터 없기 때문입니다.

 ‘순수식사’란 없습니다. ‘순수육아’라든지 ‘순수살림’이라든지 ‘순수직장인’ 또한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해서 되는 삶이란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해서 되는 삶이란 기계와 같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해도 되는 삶이란 사람이 사람다이 꾸리는 삶이 아닙니다.

 집 바깥에서 돈만 벌어들이면 되는 아버지 노릇이나 어머니 구실이 아닙니다. 집 안쪽에서 식구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도란도란 생각과 꿈을 나누어야 비로소 어버이 노릇이요 딸아들 구실입니다. 밥하는 사람 따로 밥먹는 사람 따로일 때에는 집살림이 엉터리입니다. 함께 밥을 차리고 함께 밥상을 치우며 함께 마루에 둘러앉아야 합니다. 한 집안 식구가 다 같이 돌보는 아이입니다. 한 집안 식구가 모두 사랑하며 보살필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입니다.

 사람은 부속품이나 톱니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은 늘 사람입니다. 공장에서 어느 한 가지 일만 해도 된다거나, 회사에서 무슨 한 자리만 지키면 된달지라도, 사람은 사람입니다. 말을 하고 귀로 들으며 몸을 움직이는 가운데 따사롭거나 너그러운 마음결을 고이 건사하는 살아숨쉬는 목숨인 사람입니다. 누군가한테 아버지나 어머니요, 누군가한테 딸이나 아들인 고운 한 사람입니다.

 오늘 이 나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곱거나 착하거나 참다운 사람답게 대접받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쁜 한 사람으로 사랑받기보다는,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명함으로 다루어집니다. 경제개발을 이루어야 하는 톱니바퀴로 여겨집니다. 사람이 부속품처럼 나뒹구는 이 나라에서는 사진이란 어쩔 수 없이 부속품 구실을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홀가분하면서 아름다울 때에는 사진이란 한결같이 홀가분하면서 아름답습니다. 돈벌 생각만 하거나 돈벌 일만 하는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듯, 사진문화만 생각하거나 사진예술만 살필 때에는 문화도 예술도 못 될 뿐더러 사진부터 되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만 한대서 사진이 되지 않을 뿐더러 사진문화가 되지 못하고, 사진읽기(비평)만 한대서 사진이야기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진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집살림 꾸리는 돈은 돈대로 벌면서 집식구랑 살가이 어울리는 가운데 내 삶 그대로 사진을 하면 됩니다. 먹고살기 팍팍해서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는 젖혀 놓은 채 돈벌이만 한다면, ‘사진을 찍어서 돈벌이를 한다’고는 하더라도 ‘돈벌이를 할 뿐’이지 ‘사진을 찍는다’고 말할 수 없어요. 오늘날 신문·잡지사 사진기자가 수두룩하게 많기는 많으나, 돈벌이를 하는 사진기자만 있지 사진을 하는 사진기자는 몹시 드뭅니다. 스튜디오이든 사진관을 차린 이들 또한 돈벌이로 사진기를 매만지지, 삶을 헤아리며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매우 적어요.

 내 아이를 사랑하며 즐거이 돌보는 가운데 담는 사진 한 장이랑, 사진관에 찾아가서 예쁘장한 옷을 입히고 예쁘장하게 웃으라 하면서 찍는 사진 한 장이랑, 서로 견줄 수 없습니다. 서로 견줄 만한 값이 아닙니다. 무언가 뜻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델을 앞에 세워 놓고 사진기를 드는 사진 한 장이랑, 스스로 알차거나 다부지거나 씩씩하거나 즐거이 삶을 일구는 사람을 살가이 사귀면서 스스럼없이 사진기를 쥐는 사진 한 장이랑, 둘을 나란히 놓을 수 없습니다. 둘은 나란히 놓을 높낮이가 안 됩니다.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을 살피려 한다면, ‘좋은 사진문화’나 ‘아리따운 사진예술’이 꽃피우는 나라나 겨레가 어떠한 모습인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즐기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에 따라, 이 사진쟁이 한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마을)에서 어떠한 보금자리를 일구며 삶을 즐기는가에 따라, 사진은 문화도 되고 예술도 됩니다. 좋은 삶에서 좋은 사진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진’만 따로 있지 않습니다. ‘좋은 문화’나 ‘좋은 예술’만 덩그러니 태어나거나 샘솟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틀만 좋을 수 없습니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해야 좋은 삶이 아닙니다. 좋음이란 다 다름입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꽃을 피워 다 다른 열매를 맺고 다 다른 맛을 즐길 때에 좋음입니다. 호박꽃은 호박을 맺고 오이꽃은 오이를 맺으며 수세미꽃은 수세미를 맺습니다. 호박은 호박이어서 좋고 오이는 오이여서 좋으며 수세미는 수세미여서 좋습니다.

 잘 찍는 사진 한 장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길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잘 찍자며 가르치거나 배울 학사과정이나 강의란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즐거우면서 좋은 사진을 당신 삶으로, 내 삶으로, 우리 삶으로 받아안으며 펼칩니다.

 잘 찍어 선보이는 사진이 없듯, 잘 찍어야 할 사진이 없습니다. 저는 제 아이랑 짝꿍을 굳이 잘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제 아이는 제 아이답게 찍으면 되고, 제 짝꿍은 제 짝꿍대로 찍으면 됩니다. 제가 살아가는 대로 제 아이를 바라보며 제 아이 삶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제가 일구는 살림살이대로 제 짝꿍을 마주하며 제 짝꿍 한삶을 사진으로 옮깁니다.

 내 됨됨이에 따라 내 삶이 달라지고, 달라지는 내 삶에 따라 사진 또한 달라집니다. 내가 먼저 고운 됨됨이가 되어 아름답게 살아가는 가운데 사진을 해야, 눈물을 흘릴 만큼 좋은 사진을 얻습니다. 나 스스로 착한 마음가짐으로 아리땁게 살아가는 가운데 사진을 즐겨야, 웃음꽃 흐드러질 만큼 기쁜 사진을 얻습니다.

 사진을 하는 내가 아니라, 참답고 착하며 곱게 살아가는 사람인 나로서 사진을 맞아들일 노릇입니다. 사진문화를 말하는 내가 아니요, 사진문화를 북돋우는 내가 아니라,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랑 따숩게 껴안을 줄 아는 예쁜 사람인 나로서 사진을 곰삭일 노릇입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고 옆지기를 사랑하며 멧골자락 조그마한 집에서 시골 도서관을 꾸리며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제가 하는 사진이라면 제 삶에 따라 하는 사진입니다. 제가 좋아하거나 바라보는 사진이라면 제 삶자리에서 바라보며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내가 대통령이라면’이나 ‘나한테 돈 10억이 들어온다면’처럼 덧없는 꿈을 꿀 일이란 없습니다. 나로서는 ‘딸아이 아빠로서’ 오늘 하루를 생각하고, ‘집살림 일구는 남편으로서’ 오늘 하루를 헤아리며, ‘시골마을 사람으로서’ 오늘 하루를 되뇝니다. ‘작가’라든지 ‘비평가’로 살필 사진이 아닙니다. 한 사람으로서 돌아보고, 사랑스러운 한 사람으로서 되돌아보며, 사랑받는 한 사람으로서 뒤돌아보는 삶인 가운데 사진입니다.

 이 나라에 내 삶을 내 삶대로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즐기는 사람들이 조금 더 늘거나 조금 더 자리를 잡거나 조금 더 신나게 사진잔치를 마련하거나 사진책을 내놓을 때에, 아주 보드랍고 따사로이 사진문화가 꽃을 피고 사진예술이 무럭무럭 봄바람 꽃내음을 실어나릅니다. (4344.1.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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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쟁이 책읽기
 ― ‘사진책 읽는 즐거움’을 찾는 길



 시를 쓰는 민영 님이 1991년에 내놓은 산문책 《내 젊은 날의 사랑은》(나루)을 읽다 보면, “시야말로 처음 쓸 때의 경건한 마음을 일평생 잊어버리지 않고 한 자 한 자 공들여서 써야 하는 예술입니다. 자기만 알고 남은 모르는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서 독자를 우롱하는 시를 써서도 안 됩니다. 또 시에는 복제품이 없습니다. 예술 중에는 더러 하나의 주제로 창작된 것을 똑같이 만들어 전시해도 되는 것이 있으나, 시는 언제나 새롭게 쓰여져야 합니다. 이 말 저 말을 적당이 꿰어맞춰서 쓰는 일은 용서되지 않습니다(158쪽).” 같은 대목을 마주합니다. 다시없이 옳은 말이요, 그지없이 알맞은 말이며, 더없이 좋은 말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우주소년 아톰》(학산문화사,2001) 7권을 보면, 아톰이 살려 준 ‘홈스판’이라는 사람이 “나를 로봇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부르시오. 그러나 나는 로봇이 된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요. 그것은 로봇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오. 그것은 수술을 받기 전 아톰에게서 배웠소. 인간처럼 욕심도 없고 잘난 척도 하지 않고 그저 올바른 일만 하는 로봇들(107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로봇 아톰은 무슨 일이나 척척 해내는데, 세 가지는 못합니다. 첫째, 거짓말을 못하고, 둘째, 나쁜 일을 못하며, 셋째,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로봇 아톰은 멀디먼 앞날 사람누리에서 사람들이 모조리 잊거나 잃거나 놓는 세 가지인 ‘착함’과 ‘참다움’과 ‘아름다움’을 알뜰히 건사하는 목숨붙이인 셈입니다.

 어린이문학과 교육운동과 우리 말글 바로쓰기를 해 온 이오덕 님이 1984년에 내놓은 책 하나가 《삶을 가꾸는 어린이문학》(고인돌,2010)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어린이문학을 비평하는 책인데다 스물예닐곱 해나 묵은 글이지만, 이 책을 지난날부터 옛판으로 열 번 넘게 읽고 새판으로 거듭 읽으면서 언제나 새롭다고 느낍니다. “주제가 없거나 모호한 작품은 감동이 있을 수 없다. 감동이 없으면 죽은 작품이다. 다음에 주제가 있더라도 그것이 어린이 사회의 절실한 문제를 잡은 것이 아니고 어른들이 한결같이 강요하는 틀에 박힌 교훈을 얘기한 것이라면 이것 또한 작가에게 문학정신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밖에 없다(207쪽).”라든지 “어린이문학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밑뿌리로 되어 있어야 하는 문학이다.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귀여움에 빠져 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깊이 이해하여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 주고, 그들이 사람답게 자라나도록 하려는 정신이 곧 어린이 사랑이다(209쪽).”라든지 “많은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가장 뚜렷한 잘못은 아마도 짐승의 모습, 짐승의 생태를 그릇되게 나타내는 일일 것이다. 참으로 많은 작가들이 의인화를 쓰거나 바로 짐승을 살핀 얘기를 쓰면서 너무나 그 짐승을 모르고 있다. 모르는 것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관찰과 연구에 게으르고 성의가 없이 함부로 쓰고 있는 듯한 것이다(213쪽).”라든지 “소설이든 동화든 문장을 알기 쉽고 올바르게 써야 한다는 것은 문학 수련의 첫걸음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동화작가들이 문장을 이상야릇하게 꾸며 쓰는 취미에 젖어 있다(218쪽).”라든지, 가만가만 읽어 보면, 꼭 어린이문학만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어린이문학’이나 ‘동화’라는 낱말을 ‘사진’으로 바꿀 때에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할 말이 없는 사진은 감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동이 없는 사진은 죽은 사진입니다. 주제가 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뼛속 깊은 이야기를 잡지 않고 차갑거나 메마르거나 돈을 밝히는 틀에 박힌 이야기를 다루는 사진쟁이한테는 ‘사진넋’이 없다고 할밖에 없습니다. 사진은 사람을 사랑하는 넋이 밑뿌리로 되어야 하는 예술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깊이 살피며 어깨동무할 줄 아는 가운데 서로 고운 벗이 되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막상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짐승 한살이와 터전을 너무 모릅니다. 모르는 일보다 더 걱정스러운 대목은 알려 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사진부터 찍는 일입니다. 사진이든 어떤 예술이든 알기 쉽고 올바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숱한 사진쟁이는 사진을 이상야릇하게 꾸며 찍는 버릇에서 허덕입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 수필책 《나의 빨간 수첩에서》(자유문학사,1988)를 읽다 보면, 병 때문에 몸이 여린 미우라 아야코 님을 보살핀 시어머님 얘기가 나옵니다. 당신 시어머님은 당신한테 “얘야, 연약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란다(67쪽).” 하고 말씀했답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 어머님은 아주 마땅한 삶을 마땅히 살아가며 미우라 아야코 님한테 사랑을 나누었고, 미우라 아야코 님은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이 사랑을 다른 이웃한테 두루 나누었습니다. 여린 사람을 아끼며 사랑하는 매무새란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믿는 이만 보여줄 매무새가 아닙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는 모든 예술쟁이와 문화쟁이들이 골고루 갖출 매무새이기도 합니다. 아니, 문화쟁이나 사진쟁이라는 이름에 앞서 사람이라면, 옹근 한 사람이라면, 씩씩하며 튼튼한 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밑바탕으로 다스릴 몸가짐이에요.

 사진길을 걷는 저는 이런 책을 읽고 저런 책을 읽으며 그런 책을 읽습니다. 따로 어느 갈래 책을 더 좋아하거나 즐겨서 찾거나 찬찬히 살피지 않습니다. 제 마음을 움직이는 책, 제 가슴을 적시는 책, 제 삶을 북돋우는 책, 제 사랑을 쓰다듬는 책, 제 믿음을 살찌우는 책, 제 손길을 맞잡는 책을 좋아합니다. 만화책도 좋고 그림책도 좋습니다. 사진책은 마땅히 좋으며 어린이책과 청소년책과 어른책 두루 좋습니다. 소설책이나 시집이나 산문책도 좋아요. 환경책도 좋아하고 인문책이나 역사책도 즐겨 읽습니다. 과학책이나 철학책이라 해서 마다 할 까닭이 없습니다. 연변조선족 문학책이나 재일조선인 문학책도 즐깁니다. 책마을 일꾼이 쓴 ‘책을 말하는 책’도 좋아하며, 쉰 해나 백 해쯤 묵은 오래된 책도 좋아합니다. 잡지책도 곧잘 뒤적이고, 헌책방에서 《뿌리깊은 나무》를 두 호수 빼놓고 모두 찾아내어 읽었습니다. 그동안 제 도서관에 갖추려고 그러모은 사전붙이만 천 권이 넘고, 우리 말글을 다룬 책은 훨씬 많이 읽었습니다. 우리 말글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열매와 꽃봉우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 말을 할 수 없거든요. 사진찍기를 하든 사진읽기를 하든, 이리하여 사진이 어떠하다고 이러쿵저러쿵 읊조리는 사진말을 하든, ‘말하는 삶’이 되자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나누는 한국말 얼거리와 속살을 옳고 바르며 참다이 짚으며 헤아려야 합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란 밑앎이지만, 이보다 우리 말투와 우리 말결과 우리 말느낌과 우리 낱말과 우리 상말과 우리 말빛을 차근차근 톺아봅니다. 여성학을 다룬 책이라든지 인류학이나 문화를 다룬 책이라든지 노래나 뜨개를 다룬 책도 가만히 읽습니다. 종이접기 책도 기쁘게 장만하여 읽습니다만, 아직 종이접기는 참 어수룩합니다. 교육책도 꾸준히 읽는 가운데, 요사이는 《아기가 온다》(하늘출판사,1995)라는 책을 틈틈이 읽습니다. 저는 사진쟁이이기 앞서 옆지기한테 남편이요, 딸아이한테 아빠입니다. 집에서는 살림꾼 노릇을 해야 하며, 둘째를 집에서 낳아야 하는 만큼 《아기가 온다》라든지 《티베트 의학의 지혜》 같은 책은 줄거리를 꿸 만큼 꼼꼼히 읽습니다. 실러 키칭거 님이 쓴 《아기가 온다》를 읽으면 “임신은 단순히 출산만을 기다리는 기간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가치관을 키우며, 그것으로 자기들의 아기에게 어떤 세계를 만들어 줄 것인가, 하고 계획하는 기간입니다(40쪽).”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진은 그저 작품을 만드는 예술이 아닙니다. 나와 나한테 찍히는 사람들 삶을 헤아리는 가운데 살가이 북돋우면서, 서로서로 새로운 누리를 즐거이 일구는 이야기꽃입니다. 아이를 함께 낳고 같이 보살피면서 아이사랑뿐 아니라 삶사랑과 사진사랑을 배웁니다.

 송명규 님이 쓴 환경책 《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를 읽으며 “요즈음의 내 기분은 거의 그날의 날씨에 좌우된다. 밝은 햇살을 받으며 출근하는 날에는 베란다에 남아서 봄의 따사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선인장 생각에 하루가 즐겁다. 그러나 뿌연 황사가 모처럼의 햇빛을 가로채면 나는 봄을 약탈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조그마한 자극에도 숨겨져 있던 공격적인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피해자가 된다(142∼143쪽).” 같은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사진을 찍어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을 이루는 분들은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고, 더 큰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흙을 밟거나 흙을 아는 사진쟁이는 아주 드뭅니다. 흙을 밟거나 흙을 안달지라도 흙하고 멀리 떨어진 채 보내는 나날이 훨씬 깁니다. 아니,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자가용 아닌 자전거나 두 다리나 시골버스를 즐기는 사진쟁이가 다문 한두 사람이라도 있나 궁금합니다. 밥벌이에 쫓기고 돈벌이에 매이면서 정작 ‘내 사진’을 못할 뿐 아니라 ‘사진’조차 못하는 가운데 ‘사진찍기’에만 너무 바쁜 사람들뿐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새로운 모습을 담아야 사진이라 할 테지만, 새로운 모습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직 아무도 안 찍은 모습이 새로운 모습이려나요. 아직 아무도 안 찍었을 때에도 틀림없이 새로운 모습일 테지만, 아직 아무도 안 다룬 주제라 해서 가장 뛰어나거나 훌륭할 다큐사진 주제가 되지 않을 뿐더러, 멋지거나 놀라울 광고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흔히 찍으며 어디서나 쉽게 마주하는 모습을 담으면서 되레 아름다운 다큐사진을 일군다든지 사랑스러운 광고사진을 얻곤 합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 스스로 새롭게 살아가는 매무새일 때에 날마다 새롭다 싶은 사진을 즐깁니다. 나 스스로 새 넋과 새 말로 새 삶을 돌보지 못한다면, 새 사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책을 읽습니다. 사진책도 읽고 여느 책도 읽는 가운데, ‘사람책’을 함께 읽어요.

 사람책이란 ‘삶책’입니다. 삶책이란 곧 삶이며 사람이고 사랑입니다. 삶을 읽을 수 있으면 삶책과 사람책과 사진책과 책 또한 즐거이 읽습니다. 사람을 읽을 때에도 매한가지요, 사랑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읽기에서는 삶과 사람과 사랑이요, 찍기에서도 삶과 사람과 사랑입니다. 글을 쓰거나 살림을 꾸리거나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하거나 사진을 하거나, 누구이든 무엇보다 이 세 가지 ‘삶·사람·사랑’을 따사로우며 넉넉히 보듬을 줄 알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삶·사람·사랑 세 가지를 곱게 여미고픈 꿈을 꾸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사진을 읽는 사람 모두 ‘사진쟁이’답게 책다운 책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비손합니다. 비손을 올립니다. 비손을 바치며 사진이랑 책이랑 삶이랑 사랑이랑 사람이랑 사진책이랑 어찌저찌 예쁘게 어깨동무하는가 하고 이야기 한 자락 적바림해 봅니다. (4344.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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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나누는 기쁨 ㉥ 사진기와 사진장비
 ― 사진길 못 찾는 사람한테 찾아드는 장비병



 돈이 있으면 ‘더 좋은’ 사진기하고 사진장비를 갖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돈이 있으면 돈을 더 치러 ‘사진을 한결 잘 찍을 만한’ 기계를 갖출 테지요. 다만, 돈이 없을 때에는 내가 갖고프거나 쓰고픈 장비를 장만하려고 돈을 모으면 됩니다. 하루아침에 떡하니 살 생각은 접고, 두고두고 목돈을 마련하여 장만할 노릇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야 하루아침에 한 번에 장만할 일이지, 돈이 없거나 적은 사람은 차곡차곡 모아서 장만해야지요.

 구구단을 금세 외우는 아이가 있으나 한 달이 걸려도 못 외우거나 한두 해가 지나서 비로소 외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길눈이 밝은 사람이 있고 길눈이 어두운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진기 다루는 솜씨가 빼어나야 사진찍기를 할 수 있지 않고, 사진 작품 읽는 눈매가 날카롭거나 글재주가 뛰어나야 사진읽기를 할 수 있지 않아요. 다 다른 사람은 다 다른 삶결에 맞추어 사진기를 장만하고, 사진을 찍으며,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한다는 분들 가운데 ‘장비병’에 걸린 이가 꽤 많습니다. 참 슬픕니다. 왜 장비병에 걸려야 하나요. 무엇하러 장비병을 앓으며 어리석은 짓을 하는가요.

 저는 장비병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돈이 많거나 넉넉하지 않습니다. 맨 처음 사진기를 쥐던 1998년 여름에는 후배한테서 미놀타 엑스700을 빌려서 썼습니다. 신문사지국에서 먹고자며 대학교를 한창 다니던 때였는데, 이무렵 신문사지국에 도둑이 들어 후배한테서 빌린 사진기를 잃었습니다. 어떡해야 할지 몰라 숨통이 조이다가, 우체국에서 30만 원을 빌었습니다. 한 달 십육만 원 벌이에 구만육천 얼마를 우체국적금으로 부었기에 이만 한 돈을 빌었어요. 헌 물건 파는 가게로 가서 미놀타 엑스700보다 한 단계 낮은 엑스300을 십삼만 원에 샀습니다. 엑스700을 살 돈이 안 되었고 살림돈이 모자랐습니다. 두 해쯤 걸려 돈을 푼푼이 모아 엑스300을 팔고 엑스700을 겨우 되사면서 후배한테 돌려주고, 대학교를 그만둔 다음 출판사에 일자리를 얻어 한 달 육십이만 원을 받으면서 우체국 빚을 갚고 캐논 에이 1번을 새로 장만합니다.

 요사이는 수동사진기로 니콘 에프엠3에이 기종을 씁니다. 이 사진기는 고마운 사진벗이 빌려주었습니다. 열 차례째 사진기를 잃어 더는 되사지 못하겠다 싶을 때에 고맙게 빌려주었어요. 사진기가 제 손에 없거나, 가까스로 쓰던 사진기는 목숨을 다해 못 쓰고 말 무렵, 이제 사진은 더 못 찍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은 장비병에 걸린다지만, 마땅하거나 변변한 사진기 하나 얻어 쓰기 벅찬 살림으로는 어떠한 녀석이라도 좋으니 사진기만 있어도 좋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렇지만, 살림이 가난하다 해서 아무 사진기라도 좋다는 마음은 아닙니다. 어떠한 사진기를 내 손으로 쥐어 사진을 찍든, 사진기마다 다 달리 갖춘 기능을 잘 살려서 내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필름 한 장에 앉히면 좋은 사진을 즐길 수 있다고 느꼈어요. 사람들이 장비병에 걸리는 까닭이라면, 스스로 좋은 사진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요, 스스로 좋은 사진을 사랑하기보다는 남 앞에서 그럴듯하게 내보이려는 잘난 사진을 바라기 때문이라 하겠어요.

 자동사진기면 어떻고 한 번 쓰고 버리는 사진기면 어떻겠어요. 우리들은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즐겁습니다. ‘사진을 찍어’ 나와 내 이웃하고 오붓하게 나눌 좋은 이야기를 빚으면 넉넉합니다.

 돈이 있어 더 좋아 보인다는 장비를 갖추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내 사진이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힘쓰는 모습이니 반가우며 흐뭇합니다. 돈이 있을 때에는 거리낌없이 한결 낫다 싶은 장비를 갖출 노릇입니다. 돈이 적거나 없으니 내 살림에 걸맞게 장비를 갖출 일입니다. 이렇게 한 다음, 저마다 다 다른 자리와 살림과 터전에 알맞춤하게 사진을 즐기면 돼요.

 아파트에서 살아가면 아파트숲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가난해서 달동네에서 살아가면 달동네 터전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아파트숲을 찍는다고 볼썽사나운 사진이 되지 않아요. 골목동네 가난한 사람들 모습을 찍어야 비로소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들 복닥이는 삶을 담으면 됩니다. 내가 일하는 터전에서 일동무들하고 어깨동무하는 모습을 찍으면 돼요. 내 아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담고, 내 짝꿍 믿음직한 매무새를 찍으면 됩니다. 애써 비정규직 일터나 공사판을 찾아가야 뭔가 내놓을 만한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자가용을 타고 돌아다니든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든 두 다리로 걷든, 집과 일터 사이를 오가는 동안 신나게 사진을 일구면 됩니다. 어떤 이는 택시기사로 일하며 ‘택시 창문 밖으로 보이는 모습’을 찍어 사진이야기를 빚었습니다. 자전거마실을 하는 이야기를 사진이야기로 다시 태어나도록 할 수 있겠지요. 걷는 동안 바라본 삶터를 사진이야기로 길어올릴 수 있고요.

 사진기가 사진을 이루지 않습니다. 사진장비로 사진을 꽃피우지 않습니다. 사진 갈래에 따라 어떠한 사진기를 써야 하거나 어떠한 사진장비가 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진기와 사진장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기이든 사진장비이든 때와 곳에 따라 쓸모와 값어치가 다르지, 이 사진기들과 사진장비들을 모든 사진쟁이가 똑같이 갖추어야 하지 않아요. 북극에서 북극곰을 찍는 사람하고 달동네에서 동네이웃을 찍는 사람하고 똑같은 장비를 쓸까요. 광고에 넣을 밥그릇과 시계를 찍는 사람하고 딸아이가 집에서 조용히 책 읽는 모습을 찍는 사람하고 똑같은 사진기를 써야 할까요. 아직 ‘손전화로 담은 사진으로 사진책 마련한 사람’은 거의 없지 않나 싶은데, 화소수가 떨어지는 손전화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야기 아리따운 사진’을 빚는다면, 놀라우며 훌륭하고 멋진 사진책이 태어납니다. 안셀 아담스 님이 대형사진기를 썼다 해서 모든 이가 대형사진기를 쓴다고 안셀 아담스 님처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아요. 안셀 아담스 님한테는 대형사진기로 바라보는 눈길이 당신 사진을 일구는 데에 가장 걸맞았을 뿐입니다.

 소설만 문학이 아닙니다. 수필만 문학이지 않고, 시나 희곡만 문학이지 않아요. 일기나 편지만 문학이 되란 법이 없어요. 동화도 문학이고 비평도 문학입니다. 노래도 춤도 연극도 영화도 문학이 될 수 있고, 모두 한결같은 문학입니다. 문학이며 문화요, 문화면서 삶이에요. 소설 가운데에도 짧은소설이 있고 참말 아주 짤막한 소설이 있으며, 긴소설이 있고 더없이 길디긴 소설이 있어요. 추리소설이 있고 사랑소설이 있으며 역사소설이 있습니다. 소설마다 소설을 쓰는 결이 다르며, 소설을 길어올리는 붓이 다릅니다.

 사진은 숱한 갈래로 나눕니다. 숱한 갈래 숱한 사진이니, 아주 마땅히 숱한 사진기와 사진장비로 갖가지 사진을 꽃피웁니다. 저마다 다른 갈래 사진을 하니까 저마다 다른 갈래 장비를 쓰는데, 아직 내가 걸어갈 사진길이 어디인지 모르거나 갈팡질팡하는 나머지 장비병에 걸리지 않았나 돌아볼 노릇이에요. 내가 무엇을 사진으로 담을는지 잘 모른다면 누구나 장비병에 허덕이고 말아요.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찾고, 내가 즐길 사진을 깨달으며, 내 이웃과 동무랑 살붙이하고 기쁘게 나눌 사진을 붙잡는다면 고맙겠습니다. 사진기는 사진이 아니라 사진기입니다. 사진은 사진기가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사랑’으로 이룹니다. (4344.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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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1-0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사진가는 보통 두부류로 나뉘죠.장비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말이죠.대다수 사진가들은 보통 장비를 사랑합니다.그래서 플레그쉽이라는 각 회사의 카메라들이 아마츄어 사진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거 겠지요.사실 필림 카메라의 경우 니콘의 F시리즈나 캐논의 EOS-1 미놀타의 알파 9같은 경우는 물론 성능도 성능이자만 프로들이 극한의 상황속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내구성을 강화시킨 제품이다 보니 가격이 비싼것이지 그걸로 찍는다고 좋은 사진이 나오는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견물 생심이라고 많은 이들이 최고급 카메라와 렌즈와 목을 매단다고 생각됩니다.
가끔 목에 플레그쉽 카메라와 무겁고 비싼 렌즈를 가지고 아이들을 찍는 아빠 사진사를 보는데 그 무게를 주체못해 힘들어 하는것을 종종 보는데 가벼운 똑딱이 디카 하나 들고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찍는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된장님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숲노래 2011-01-05 15:58   좋아요 0 | URL
나중에라도 깨달아 주면 좋지요. 무거운 사진기가 더 예쁜 사진이 나오도록 하지 않는걸요. '화각'을 잘 살리면서, 아이가 예쁜 모습을 잘 잡아채면 좋은 사진이 되는데~
 



 사진 나누는 기쁨 ㉤ 사진이 걸어가는 길
 ― 깍두기와 사진


 사진을 찍거나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글과 그림을 즐겨읽으라 이야기합니다. 글을 쓰거나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사진과 그림을 즐겨보도록 이야기합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글과 사진을 즐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좋은 글은 좋은 그림이랑 사진하고 이어집니다. 좋은 사진을 마주하는 넋은 좋은 그림과 글을 만나며 한결 깊거나 넓어집니다.

 윤오영 님이 쓴 《수필문학입문》(관동출판사,1975)이라는 묵은 책을 읽다 보면 〈깍두기說〉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책이나 이 글을 찾아 읽기란 쉽지 않은 만큼, 수필쓰던 윤오영 님이 ‘수필을 쓰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힌 대목에서 왜 깍두기를 빌었는가를 옮겨 봅니다. 윤오영 님한테는 ‘깍두기와 수필’이지만, 사진을 하는 우리한테는 ‘깍두기와 사진’입니다. 퍽 묵은 글이라 어려운 한문 투가 곳곳에 있지만, 좋은 글을 읽을 때에는 옥편이나 국어사전을 곁에 놓고 읽으면 한결 훌륭합니다.


.. 아마 다른 부인들은 산진해미 희귀하고 값진 재료를 구하기에 애쓰고 주방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무·파·마늘은 거들떠보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갖은 양념 갖은 고명을 쓰기에 애쓰고, 소금·고추가루는 거들떠보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재료는 가까운 데 있고 허름한 데 있었다. 옛날 음식 본을 뜨고 혹은 중국사관이나 왜관 음식을 곁들여 규격을 맞추고 법도 있는 음식을 만들기에 애썼으나 하나도 새로운 것은 없었을 것이다. 더우기 궁중에 올릴 음식을 그런 막되게 썰은 규범에 없는 음식을 만들려 들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무를 썰면 곱게 채를 치거나 나박김치 본으로 납짝납짝 예쁘게 썰거나 장아찌 본으로 걀죽걀죽하게 썰지, 그렇게 꺽둑꺽둑 썰 수는 없다. 기름·깨소곰·후추가루 식으로 고추가루도 적당히 치는 것이지 그렇게 싯뻘겋게 막 버무리는 것을 보면 질색을 했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깍두기는 무법이요 창의적인 대담한 파격이다. 그러나 한국 음식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면 이 대담한 새 음식은 탄생될 수 없다. 실상은 모든 솜씨가 융합돼 있는 것이다. 이른바 무법 중의 유법이다. 무를 꺽둑 막 써는 것은 곰국 건지 썰던 솜씨요, 무를 날로 먹도록 한 것은 생채 먹던 솜씨요, 고추가루를 벌겋게 버무린 것은 어리굴젓 담그던 솜씨요, 발효시켜서 익혀 먹도록 한 것은 김치 담그던 솜씨가 아니겠는가. 다 재래에 있어 온 법이다. 요는 이것이 따로따로 나지 않고 완전동화되어 충분히 익어야 하고, 싱싱하고 얼근한 맛이 구미를 돋구도록 염담을 잘 맞추어야 한다 ..  (222∼223쪽)


 좋은 밥이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맛난 밥이란 이름난 밥집에 있지 않습니다. 좋은 밥은 바로 내 어버이가 마련해 주는 밥이며, 나 스스로 내 살붙이한테 차려 주는 밥입니다. 맛난 밥 또한 내 할매와 할배가 차려 주는 밥이요, 내가 내 할매와 할배한테 차려 드리는 밥입니다.

 좋은 사진은 틀림없이 나라밖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좋은 사진은 어김없이 나라안에도 있습니다.

 머나먼 아프리카나 중남미 가난한 사람들을 찍어도 다큐사진입니다. 인도에 가든 네팔에 가든 티벳에 가든 이곳 자연하고 벗삼은 사람들을 담아도 다큐사진입니다. 그리고, 한국땅 비정규직 일꾼이라든지 여느 알바 푸름이라든지 농사꾼이라든지 한 달 일삯 100만 원이 안 되는 여느 일꾼들 삶을 담아도 다큐사진입니다. 더구나 가난한 사람만 찍어야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윤주영 님은 《50인》(방일영문화재단,2008)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으며 ‘우리 시대를 이끌어 온 사람들’이라는 덧이름을 달았는데, 이 사진책 《50인》 또한 알뜰살뜰 다큐사진이 됩니다.

 더 가난한 사람을 찾아다닌다든지, 더 꾀죄죄하거나 더 볼품없거나 더 슬퍼 보이는 모습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나서야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아름다움과 기쁨과 슬픔과 웃음과 눈물과 고단함을 골고루 돌아보는 가운데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살포시 담을 때에 비로소 다큐사진이면서 ‘사진’입니다. 가난한 살림이든 가멸찬 살림이든 똑같은 사람 살림임을 깨달아, 사진쟁이 스스로 이들하고 살가이 이웃으로 사귀며 같이 웃고 같이 우는 가운데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맞잡은 손으로 빚어야 바야흐로 다큐사진이자 삶사진이요 ‘사진’이에요.

 수수하거나 투박한 데에서 태어난 깍두기이듯, 흔하고 너른 데에서 비롯한 김치이며, 날마다 아주 마땅하다는 듯이 먹는 쌀밥입니다. 물 한 방울 없이는 사람이든 어떠한 목숨이든 살아가지 못합니다. 따로 마시는 물이 아니더라도 모든 먹을거리에는 물기가 배었습니다. 물기 없는 먹을거리로는 어떠한 목숨도 숨결을 잇지 못합니다. 참으로 아름답다 하면서 오래도록 사랑받는 밥이나 밥거리란 바로 밥과 김치와 깍두기 같은 데에서 비롯합니다. 참으로 아름답다 하면서 두고두고 사랑받는 사진이나 사진거리란 바로 ‘밥 같은 사진’과 ‘물 같은 사진’과 ‘깍두기 같은 사진’에서 비롯합니다.

 그러나, 불고기도 사진입니다. 염통구이도 사진입니다. 김밥이나 케익이나 도넛이나 핫도그도 사진입니다. 잡채나 탕수육도 사진일 테지요.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 스스로 어떠한 사진길을 걷는지 옳게 살펴야 합니다.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내가 즐기는 사진이 내가 즐기는 삶하고 얼마나 잇닿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지난날 궁중에서도 “옛날 음식 본을 뜨고 혹은 중국사관이나 왜관 음식을 곁들여 규격을 맞추고 법도 있는 음식을 만들기에 애썼”다고 하듯이, 오늘날 사진밭에서도 ‘전통 기법’이라든지 ‘서유럽과 미국 기법’이라든지 ‘일본 기법’을 배우거나 따르거나 좇는 흐름이 짙습니다. 사진밭뿐 아니라 그림밭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문화나 예술을 하는 분들도 매한가지입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내 문화와 내 예술을 꽃피우거나 갈고닦는 이는 매우 드물거나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더욱이,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삶터인 골목동네나 시골마을에서 문화와 예술을 일으키는 쟁이란 훨씬 적습니다. 대학교 시간강사나 교수 자리조차 바라지 않으며 조용히 사진길을 걷는 이는 얼마나 되려나요. 뚜벅뚜벅 걷는 사진길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뿐사뿐 걷는 사진길을 아끼는 사람은, 톡톡 튀듯 신나게 걷는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쉬엄쉬엄 걷는 사진길을 씩씩하게 보듬는 사람은, 다른 이 눈치 아닌 내 삶을 들여다보며 사진길을 다스리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요.

 앤 셸린 제이거라는 이가 엮은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미진사,2008)라는 알차며 훌륭한 사진책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진책은 책이름으로 우리들한테 묻습니다. 사진은 찍어서 이룹니까? 사진은 만들어서 이룹니까? 사진은 어떻게 이룹니까?

 이 책을 읽고 나서 깨우칠 분이 있을 테고, 이 책을 읽어도 못 깨우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는 사진은 어떻게 이루는가를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듯 오락가락하는 이야기로 헷갈리게도 하지만, 정작 풀이는 다른 데에서 합니다. 사진은 찍지도 않고 만들지도 않는다고 아주 고요히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살아내면서 이룬다고 넌지시 들려줍니다.

 사진길은 사진을 찍으며 걸을 수 없습니다. 사진을 만들며 사진길을 걸을 수도 없습니다. 사진이란 나 스스로 일구는 내 삶길에 따라 태어납니다.

 일본사람 ‘다케타쓰 미노루(竹田津 實)’ 님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훗카이도 동물의사’로만 알려졌으나,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들짐승 사진을 찍는 놀라운 사람’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아직 한국에는 ‘토몬 켄’ 님 사진책이나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책 하나 제대로 나온 적조차 없고 옳게 알려지지도 못했으니, 다케타쓰 미노루 님 ‘들짐승 사진책’이 찬찬히 옮겨지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예쁘장하게 꾸민 이야기책만 겨우 나올 뿐입니다. 이는 ‘호시노 미치오’ 님 북극곰 사진을 생각해도 똑같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은 사진쟁이이지만 막상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책이 나오지는 않아요. 호시노 미치오 님 이야기책만 옮길 뿐입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이야기책을 옮겨 주니 고맙다 해야 할 테지만, 사진하는 사람으로 보자면 ‘사진책으로 사진을 만나지 못하고 이야기책으로 이야기만 만나는’ 일은 슬픕니다. 아쉬움을 달래며 이야기책을 만나는 동안 이분들이 어떠한 사진길을 걸었는가 하고 어림하거나 헤아리거나 꿈을 꾸어 보고, 이렇게 생각날개를 펼치면서 ‘글을 읽으며 사진을 읽는다’를 이루기도 합니다만, 사진쟁이로서 빚은 열매인 사진책을 못 보는 일은 서운해요. 겨우겨우 헌책방에서 몇 가지 사진책을 만나면서 쓸쓸함을 씻는데, 다케타쓰 미노루 님 사진책 《キタキツネ : 北邊の原野を驅ける》(平凡社,1974)를 마주쳤을 때에는 몹시 놀랐습니다. 다케타쓰 미노루 님이 1974년에 내놓은 북극여우 사진책 여우 모습이 1997년에 한국에서 나온 이름난 어린이책에서 보던 여우 모습하고 털끝 하나까지 같았거든요.

 사진은 내가 보는 대로 내 사진기 단추를 누르며 태어납니다. 사진이라 할 만하든 아니든 어떻든 사진이라는 물건은 쉽게 끊임없이 숱하게 태어납니다. 애써 찍은 사진이 물건으로 머무는지 작품으로 거듭나는지 이야기로 빛나는지는 사진길을 걷는 사람 매무새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진은 보는 대로 찍습니다. 사진을 찍고자 무엇을 보자면 무엇이 어떠한 님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어떠한 님인지를 알자면 지식쌓기도 해야겠으나,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로 함께 살아야 합니다. 내 남자친구 키랑 몸무게랑 취미랑 직업을 안다 해서 내 남자친구를 ‘안다’고 할 수 없어요. 마음을 알고 마음을 읽으며 마음을 나누어야 시나브로 ‘남자친구 알아 가는 길’에 첫발을 디딥니다. 마음알기를 하자면 ‘함께 살아가’거나 ‘함께 살듯 어울려’야 합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글과 그림을 나란히 좋아하고, 만화도 몹시 좋아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더 좋아할 수 없고, 어느 하나만 더 좋아하지 않습니다. 고루고루 즐길밖에 없고, 고루고루 즐길 만큼 모두 반가우며 기쁩니다.

 밥만 잘한대서 살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빨래를 잘한다고 살림을 잘 꾸리지 않습니다. 가계부를 잘 쓰거나 살림돈을 아낀다면 살림을 잘한다 말할 만한가요. 아이를 잘 돌보거나 보살핀다고 살림을 잘하는 셈이겠습니까. 비질이나 걸레질을 잘하는 사람은 어떠할는지요. 살림살이란 이 모두와 다른 숱한 여러 가지를 골고루 사랑하면서 잘할 때에 살림살이라 이름을 붙입니다. 사진찍기란 사진기질을 잘하는 일 하나로는 이루지 못합니다. 기계나 장비를 잘 건사한다고 사진을 하는 셈이 아닙니다. 취재원이나 사진거리를 잘 알아본다고 사진을 하지 않아요. 온몸 바쳐 현장에 뛰어든다고 사진을 힘껏 잘한다 말하지 않습니다. 사진학과를 나오거나 유학길을 떠났다 해서 사진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진삶을 골고루 슬기롭고 사랑스레 껴안을 때에 사진길 첫발을 디딘 셈입니다. (4344.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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