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쟁이 책읽기
― ‘사진책 읽는 즐거움’을 찾는 길
시를 쓰는 민영 님이 1991년에 내놓은 산문책 《내 젊은 날의 사랑은》(나루)을 읽다 보면, “시야말로 처음 쓸 때의 경건한 마음을 일평생 잊어버리지 않고 한 자 한 자 공들여서 써야 하는 예술입니다. 자기만 알고 남은 모르는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서 독자를 우롱하는 시를 써서도 안 됩니다. 또 시에는 복제품이 없습니다. 예술 중에는 더러 하나의 주제로 창작된 것을 똑같이 만들어 전시해도 되는 것이 있으나, 시는 언제나 새롭게 쓰여져야 합니다. 이 말 저 말을 적당이 꿰어맞춰서 쓰는 일은 용서되지 않습니다(158쪽).” 같은 대목을 마주합니다. 다시없이 옳은 말이요, 그지없이 알맞은 말이며, 더없이 좋은 말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우주소년 아톰》(학산문화사,2001) 7권을 보면, 아톰이 살려 준 ‘홈스판’이라는 사람이 “나를 로봇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부르시오. 그러나 나는 로봇이 된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요. 그것은 로봇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오. 그것은 수술을 받기 전 아톰에게서 배웠소. 인간처럼 욕심도 없고 잘난 척도 하지 않고 그저 올바른 일만 하는 로봇들(107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로봇 아톰은 무슨 일이나 척척 해내는데, 세 가지는 못합니다. 첫째, 거짓말을 못하고, 둘째, 나쁜 일을 못하며, 셋째,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로봇 아톰은 멀디먼 앞날 사람누리에서 사람들이 모조리 잊거나 잃거나 놓는 세 가지인 ‘착함’과 ‘참다움’과 ‘아름다움’을 알뜰히 건사하는 목숨붙이인 셈입니다.
어린이문학과 교육운동과 우리 말글 바로쓰기를 해 온 이오덕 님이 1984년에 내놓은 책 하나가 《삶을 가꾸는 어린이문학》(고인돌,2010)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어린이문학을 비평하는 책인데다 스물예닐곱 해나 묵은 글이지만, 이 책을 지난날부터 옛판으로 열 번 넘게 읽고 새판으로 거듭 읽으면서 언제나 새롭다고 느낍니다. “주제가 없거나 모호한 작품은 감동이 있을 수 없다. 감동이 없으면 죽은 작품이다. 다음에 주제가 있더라도 그것이 어린이 사회의 절실한 문제를 잡은 것이 아니고 어른들이 한결같이 강요하는 틀에 박힌 교훈을 얘기한 것이라면 이것 또한 작가에게 문학정신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밖에 없다(207쪽).”라든지 “어린이문학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밑뿌리로 되어 있어야 하는 문학이다.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귀여움에 빠져 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깊이 이해하여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 주고, 그들이 사람답게 자라나도록 하려는 정신이 곧 어린이 사랑이다(209쪽).”라든지 “많은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가장 뚜렷한 잘못은 아마도 짐승의 모습, 짐승의 생태를 그릇되게 나타내는 일일 것이다. 참으로 많은 작가들이 의인화를 쓰거나 바로 짐승을 살핀 얘기를 쓰면서 너무나 그 짐승을 모르고 있다. 모르는 것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관찰과 연구에 게으르고 성의가 없이 함부로 쓰고 있는 듯한 것이다(213쪽).”라든지 “소설이든 동화든 문장을 알기 쉽고 올바르게 써야 한다는 것은 문학 수련의 첫걸음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동화작가들이 문장을 이상야릇하게 꾸며 쓰는 취미에 젖어 있다(218쪽).”라든지, 가만가만 읽어 보면, 꼭 어린이문학만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어린이문학’이나 ‘동화’라는 낱말을 ‘사진’으로 바꿀 때에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할 말이 없는 사진은 감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동이 없는 사진은 죽은 사진입니다. 주제가 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뼛속 깊은 이야기를 잡지 않고 차갑거나 메마르거나 돈을 밝히는 틀에 박힌 이야기를 다루는 사진쟁이한테는 ‘사진넋’이 없다고 할밖에 없습니다. 사진은 사람을 사랑하는 넋이 밑뿌리로 되어야 하는 예술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깊이 살피며 어깨동무할 줄 아는 가운데 서로 고운 벗이 되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막상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짐승 한살이와 터전을 너무 모릅니다. 모르는 일보다 더 걱정스러운 대목은 알려 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사진부터 찍는 일입니다. 사진이든 어떤 예술이든 알기 쉽고 올바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숱한 사진쟁이는 사진을 이상야릇하게 꾸며 찍는 버릇에서 허덕입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 수필책 《나의 빨간 수첩에서》(자유문학사,1988)를 읽다 보면, 병 때문에 몸이 여린 미우라 아야코 님을 보살핀 시어머님 얘기가 나옵니다. 당신 시어머님은 당신한테 “얘야, 연약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란다(67쪽).” 하고 말씀했답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 어머님은 아주 마땅한 삶을 마땅히 살아가며 미우라 아야코 님한테 사랑을 나누었고, 미우라 아야코 님은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이 사랑을 다른 이웃한테 두루 나누었습니다. 여린 사람을 아끼며 사랑하는 매무새란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믿는 이만 보여줄 매무새가 아닙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는 모든 예술쟁이와 문화쟁이들이 골고루 갖출 매무새이기도 합니다. 아니, 문화쟁이나 사진쟁이라는 이름에 앞서 사람이라면, 옹근 한 사람이라면, 씩씩하며 튼튼한 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밑바탕으로 다스릴 몸가짐이에요.
사진길을 걷는 저는 이런 책을 읽고 저런 책을 읽으며 그런 책을 읽습니다. 따로 어느 갈래 책을 더 좋아하거나 즐겨서 찾거나 찬찬히 살피지 않습니다. 제 마음을 움직이는 책, 제 가슴을 적시는 책, 제 삶을 북돋우는 책, 제 사랑을 쓰다듬는 책, 제 믿음을 살찌우는 책, 제 손길을 맞잡는 책을 좋아합니다. 만화책도 좋고 그림책도 좋습니다. 사진책은 마땅히 좋으며 어린이책과 청소년책과 어른책 두루 좋습니다. 소설책이나 시집이나 산문책도 좋아요. 환경책도 좋아하고 인문책이나 역사책도 즐겨 읽습니다. 과학책이나 철학책이라 해서 마다 할 까닭이 없습니다. 연변조선족 문학책이나 재일조선인 문학책도 즐깁니다. 책마을 일꾼이 쓴 ‘책을 말하는 책’도 좋아하며, 쉰 해나 백 해쯤 묵은 오래된 책도 좋아합니다. 잡지책도 곧잘 뒤적이고, 헌책방에서 《뿌리깊은 나무》를 두 호수 빼놓고 모두 찾아내어 읽었습니다. 그동안 제 도서관에 갖추려고 그러모은 사전붙이만 천 권이 넘고, 우리 말글을 다룬 책은 훨씬 많이 읽었습니다. 우리 말글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열매와 꽃봉우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 말을 할 수 없거든요. 사진찍기를 하든 사진읽기를 하든, 이리하여 사진이 어떠하다고 이러쿵저러쿵 읊조리는 사진말을 하든, ‘말하는 삶’이 되자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나누는 한국말 얼거리와 속살을 옳고 바르며 참다이 짚으며 헤아려야 합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란 밑앎이지만, 이보다 우리 말투와 우리 말결과 우리 말느낌과 우리 낱말과 우리 상말과 우리 말빛을 차근차근 톺아봅니다. 여성학을 다룬 책이라든지 인류학이나 문화를 다룬 책이라든지 노래나 뜨개를 다룬 책도 가만히 읽습니다. 종이접기 책도 기쁘게 장만하여 읽습니다만, 아직 종이접기는 참 어수룩합니다. 교육책도 꾸준히 읽는 가운데, 요사이는 《아기가 온다》(하늘출판사,1995)라는 책을 틈틈이 읽습니다. 저는 사진쟁이이기 앞서 옆지기한테 남편이요, 딸아이한테 아빠입니다. 집에서는 살림꾼 노릇을 해야 하며, 둘째를 집에서 낳아야 하는 만큼 《아기가 온다》라든지 《티베트 의학의 지혜》 같은 책은 줄거리를 꿸 만큼 꼼꼼히 읽습니다. 실러 키칭거 님이 쓴 《아기가 온다》를 읽으면 “임신은 단순히 출산만을 기다리는 기간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가치관을 키우며, 그것으로 자기들의 아기에게 어떤 세계를 만들어 줄 것인가, 하고 계획하는 기간입니다(40쪽).”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진은 그저 작품을 만드는 예술이 아닙니다. 나와 나한테 찍히는 사람들 삶을 헤아리는 가운데 살가이 북돋우면서, 서로서로 새로운 누리를 즐거이 일구는 이야기꽃입니다. 아이를 함께 낳고 같이 보살피면서 아이사랑뿐 아니라 삶사랑과 사진사랑을 배웁니다.
송명규 님이 쓴 환경책 《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를 읽으며 “요즈음의 내 기분은 거의 그날의 날씨에 좌우된다. 밝은 햇살을 받으며 출근하는 날에는 베란다에 남아서 봄의 따사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선인장 생각에 하루가 즐겁다. 그러나 뿌연 황사가 모처럼의 햇빛을 가로채면 나는 봄을 약탈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조그마한 자극에도 숨겨져 있던 공격적인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피해자가 된다(142∼143쪽).” 같은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사진을 찍어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을 이루는 분들은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고, 더 큰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흙을 밟거나 흙을 아는 사진쟁이는 아주 드뭅니다. 흙을 밟거나 흙을 안달지라도 흙하고 멀리 떨어진 채 보내는 나날이 훨씬 깁니다. 아니,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자가용 아닌 자전거나 두 다리나 시골버스를 즐기는 사진쟁이가 다문 한두 사람이라도 있나 궁금합니다. 밥벌이에 쫓기고 돈벌이에 매이면서 정작 ‘내 사진’을 못할 뿐 아니라 ‘사진’조차 못하는 가운데 ‘사진찍기’에만 너무 바쁜 사람들뿐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새로운 모습을 담아야 사진이라 할 테지만, 새로운 모습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직 아무도 안 찍은 모습이 새로운 모습이려나요. 아직 아무도 안 찍었을 때에도 틀림없이 새로운 모습일 테지만, 아직 아무도 안 다룬 주제라 해서 가장 뛰어나거나 훌륭할 다큐사진 주제가 되지 않을 뿐더러, 멋지거나 놀라울 광고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흔히 찍으며 어디서나 쉽게 마주하는 모습을 담으면서 되레 아름다운 다큐사진을 일군다든지 사랑스러운 광고사진을 얻곤 합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 스스로 새롭게 살아가는 매무새일 때에 날마다 새롭다 싶은 사진을 즐깁니다. 나 스스로 새 넋과 새 말로 새 삶을 돌보지 못한다면, 새 사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책을 읽습니다. 사진책도 읽고 여느 책도 읽는 가운데, ‘사람책’을 함께 읽어요.
사람책이란 ‘삶책’입니다. 삶책이란 곧 삶이며 사람이고 사랑입니다. 삶을 읽을 수 있으면 삶책과 사람책과 사진책과 책 또한 즐거이 읽습니다. 사람을 읽을 때에도 매한가지요, 사랑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읽기에서는 삶과 사람과 사랑이요, 찍기에서도 삶과 사람과 사랑입니다. 글을 쓰거나 살림을 꾸리거나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하거나 사진을 하거나, 누구이든 무엇보다 이 세 가지 ‘삶·사람·사랑’을 따사로우며 넉넉히 보듬을 줄 알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삶·사람·사랑 세 가지를 곱게 여미고픈 꿈을 꾸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사진을 읽는 사람 모두 ‘사진쟁이’답게 책다운 책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비손합니다. 비손을 올립니다. 비손을 바치며 사진이랑 책이랑 삶이랑 사랑이랑 사람이랑 사진책이랑 어찌저찌 예쁘게 어깨동무하는가 하고 이야기 한 자락 적바림해 봅니다. (4344.1.8.흙.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