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생각
― 사진과 사람


 사진은 사람입니다. 찍는 사진은 찍는 사람 얼굴입니다. 보여주는 사진은 보여주는 사람 눈빛입니다. 나누는 사진은 나누는 사람 사랑입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나라밖으로까지 ‘출사’를 다니고, 누군가는 가난하다는 동네로 ‘출사’를 다닙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출사를 하며 찍는 사진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사진으로 찍으려는 사람이 살아가는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스스럼없이 찍는 사진만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 할 수 있고, 취미로 야구를 즐긴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취미는 취미이지, 취미가 사진이거나 야구가 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살아가야 사진이고, 야구로 살아가야 야구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되어야 사진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프로 야구선수가 되어야 야구라는 소리 또한 아닙니다. 내 삶을 사진으로 맞추면서 사진하고 한몸이 될 때에 비로소 사진이라는 소리입니다. 내 삶을 야구와 맞물리면서 야구하고 한마음이 될 때에 바야흐로 야구라는 소리입니다. 아이키우기일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이고, 살림살이를 꾸릴 때에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사진’의 ‘사’ 자도 모르는 주제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진하고 한몸이 되지 않을 때에는 전문 사진쟁이가 되든 취미 사진쟁이가 되든 사진하고 동떨어질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프로이든 아마이든 대단하지 않고, 직업이든 취미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이 사진길을 걷느냐 아니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진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진에는 사진기를 쥐어 살아가는 사람들 말과 넋과 꿈과 삶과 생각과 매무새가 깃들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진 또한 착하게 찍습니다. 사진만 착하게 찍고, 삶은 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과 삶이 다르면서 사진만 착하게 군다면, 겉과 속이 다른 매무새는 어김없이 사진에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여느 사람이 쉬 알아채지 못할 뿐입니다. 거꾸로 사람은 착한데 사진은 안 착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안 착하지만 사람이 착할 수 없습니다. 사진이 착하지 않은 사람은 당신 삶 또한 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쁘장한 모습을 찍는대서 예쁘거나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슬프거나 고단한 삶자락을 찍는대서 밉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사진에 서리는 기운과 넋과 마음과 꿈과 뜻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착함과 나쁨이에요.

 사진은 사람이고 다시 사람이며 또 사람입니다. 내가 살아가려는 길에 걸맞게 내 사진기를 장만하고 내 사진감을 찾으며 내 사진솜씨를 냅니다. 더 낫다는 장비로 틀림없이 더 낫다는 사진을 얻을 수 있겠지만, 더 엉성하다는 장비로도 얼마든지 더 낫다는 사진을 얻을 수 있어요.

 질감이 더 보드라울 때에 더 나은 사진이 아닙니다. 초점이 잘 맞거나 흔들림이 없을 때에 더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밝거나 환하거나 맑은 웃음이 피어나야 아름다운 사진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깃들일 때에 비로소 좋은 사진이고 착한 사진이며 참다운 사진입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 하루를 곱씹습니다. 나 스스로 흐뭇하면서 기쁘게 맞이하는 하루일 때에 내가 즐기는 사진이 어떠한가를 헤아립니다. 나 스스로 괴로우면서 힘겨울 때에 내가 이루는 사진이 어떠한가를 되뇝니다.

 더 하거나 덜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 모습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내 삶 그대로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내 사진입니다.

 사람이고 사진이면서 삶입니다. 오늘 먹은 밥이 오늘 찍는 사진입니다. 오늘 내 살붙이하고 마주하는 모습이 오늘 내가 마주할 사진입니다. 내 아이랑 주고받는 말마디가 내 아이를 바라보며 찍는 내 사진입니다.

 사진기를 쥐기 앞서 내 됨됨이를 다스려야 합니다. 사진기를 장만하기 앞서 내 살림살이를 보듬어야 합니다. 사진기로 바라보기 앞서 내 삶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려는 내 나날인가를 돌이키면서, 내가 손에 쥔 사진기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사랑하려 하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넣는대서 아이가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낸대서 아이가 더 많이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가 머리속에 이런 앎조각이나 저런 앎부스러기를 더 채운대서 더 슬기롭지 않습니다. 아이는 저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어른)를 바라보면서 삶을 배우고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빚으려는 사람들은 사진기를 쥘 때까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모든 발자국과 손길이 그러모여 사진삶으로 이루어집니다.

 배우려 하기에 배우지 않습니다. 살려고 하기에 살아냅니다. 가르치려 하기에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살아가려 할 때에 살아갑니다.

 큰소리로 꾸짖는 일은 큰소리로 꾸짖는 일입니다. 사랑도 아니지만, 가르침도 아닙니다. 몽둥이나 회초리를 드는 일도 몽둥이나 회초리를 드는 일이지, 사랑이나 가르침이 되지 않아요. 몸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몸으로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합니다. 한마음 한몸 한삶이어야 합니다. 아이키우기일 때이든 책읽기일 때이든 사랑나누기일 때이든 사진찍기일 때이든, 한결같이 한마음 한몸 한삶이어야 합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는 사진이고, 사진으로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4344.6.1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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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읽기 삶읽기 사람읽기 5
― 아이한테 물려주는 선물



 개구리는 저녁부터 밤새 웁니다. 시골자락에서 창문을 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무논마다 개구리가 왁자하게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개구리는 아침이나 한낮이나 이른저녁에는 울지 않습니다. 개구리 노랫소리는 오직 저무는 저녁부터 밤에 들을 수 있습니다. 겨울이 끝나고 봄 문턱으로 들어서는 철에는 아침이나 낮에도 개구리 소리를 듣습니다. 한창 봄철에도 개구리 소리를 아침이나 낮에 듣곤 합니다. 그러나, 멧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 알을 낳고 다시 쉬는 동안에는 개구리 소리가 한동안 끊어지고, 알을 깬 개구리가 새 목숨을 알리듯 울어댈 한여름에 접어들면 오로지 깊은 저녁과 밤에만 우렁찬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그리 오래된 옛날까지 아니더라도 지난날을 곰곰이 헤아리면, 꽤 커다란 도시라는 곳에도 논과 밭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광역시라는 이름을 붙이며 넓어졌지만, 광역시까지 아니더라도 조그맣게나마 논밭을 품던 도시였습니다.

 어느덧 경제개발이 꽃을 피우고 물질문명이 열매를 맺으면서, 도시에서는 논밭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논밭에서 거두는 곡식이나 푸성귀로는 돈벌이가 형편없기 때문에, 이 논밭을 팔고사면서 아파트를 짓거나 쇼핑센터를 짓습니다. 다른 여러 나라하고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며 값싼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를 사들이려 할 뿐, 이 땅 사람들 스스로 이 땅을 일구어 사랑스러운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만들어서 팔면 되고, 손전화나 셈틀을 만들어서 팔면 된다고 여깁니다. 내 손으로 논밭을 일구어 내 밥과 옷과 집을 지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늘어나지 못하고,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까지 아이들한테 저희 손을 움직여 논밭을 일구거나 저희 밥과 옷과 집을 몸소 마련하도록 이끌거나 돕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가 된다면, 이 아이는 도시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생각할까 헤아려 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도시에 선 집과 건물과 길을 볼 테며, 도시를 둘러싼 자동차 물결과 도시를 감도는 숱한 유행과 소비와 경쟁을 보겠지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가며 사진길을 걷는다면, 아이가 생각하거나 바라보거나 꿈꾸는 길이란 거의 틀에 박힐 수밖에 없겠지요. 아이로서는 둘레 사람들 누구나 찍는 사진이 아니라 무언가 남달라 보이는 사진을 찾아나서려고 할 테지만, 남달라 보이는 사진을 찍는 일이 얼마나 뜻있거나 값있는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남달라 보일 사진에 앞서 사진다운 사진이 무엇이고, 사진을 왜 찍으며,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사진은 두 눈으로 봅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은 사진을 못 봅니다. 눈이 있는 사람만 볼 수 있기에 사진을 일컬어 ‘보여주는 문화나 예술’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더라도 옆에서 소리내어 읽으면 글을 소리로 들으며 ‘글읽기’를 합니다. 춤이나 노래도 매한가지입니다. 앞을 못 보니 그림 또한 볼 수 없겠지요.

 그런데 그림을 ‘보여주려고 그리는 그림’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픈 무엇이 샘솟기에 그리는 그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려야 하니까 그리는 그림이지, 보여주려고 그리는 그림이란 그림이 아닙니다.

 보여주려고 찍는 사진이란 사진이 아닙니다. ‘보는 사진’이지만 ‘보이는 사진’이 아니고, ‘보는 그림’이지만 ‘보이는 그림’이 아니에요.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 글이고 그림이며 사진입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기에 빛이 나는 글이며 그림이요 사진이에요. 글을 읽으면서 글을 쓴 사람 삶을 읽습니다. 그림을 읽으면서 그림을 그린 사람 삶을 읽습니다. 사진을 읽으면서 사진을 찍은 사람 삶을 읽어요.

 더 놀라운 ‘표현기법’으로는 사진이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더 빼어난 ‘촬영기법’이나 ‘현상기법’으로는 사진이 빛나지 않습니다. 사진이 발돋움하려면 사진을 찍는 사람 삶이 발돋움해야 합니다. 사진이 빛나려면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삶을 빛내야 합니다.

 날마다 아이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생각합니다. 아버지로서 아이한테 물려줄 선물이란 아이가 막 태어난 때부터 한창 자라는 숱한 모습을 아버지가 찍은 사진뿐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여기에 몇 가지 덧붙인다면, 아이가 스스로 읽도록 장만한 책이랑 아버지가 즐겨읽으며서 장만한 책이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쓴 여러 가지 물건과 자취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이한테 누군가 옷가지를 선물해 주었을 때에 옷가지가 담긴 상자가 있고, 이웃 아이한테 받은 놀잇감이 있습니다. 물려입은 옷가지라든지 천기저귀도 있겠지요. 한 번 선물받은 삶을 한껏 사랑하면서 즐기려는 아버지로서는 한 번 선물한 아이 삶을 아이 스스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 한 가지만 사진과 함께 물려줄 수 있습니다. (4344.6.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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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생각
― 사진과 삶



 사진은 사진기를 써서 이룬 열매를 일컫습니다. 그렇지만, 사진기를 써서 이룬 열매를 모두 사진이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틀림없이 사진이라 할 테지만, 속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사진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밥을 하면 다 밥이 되겠지만, 밥을 하다가 그만 간장인 줄 알고 염산을 부었다든지, 된장인 줄 알고 흙을 넣으면 어떻게 될는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밥이라 할 테지만, 이러한 밥은 아무도 먹지 못합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얻을 때마다 방사능이 나옵니다. 이 방사능을 막으려고 원자력발전소는 시멘트를 아주 두껍게 바릅니다. 그러나 시멘트벽을 아무리 두껍게 한들 모든 방사능을 막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원자력발전소는 큰도시에서 무척 떨어진 곳에 마련합니다. 이른바 두메나 시골에 마련합니다. 방사능은 아주 조금만 새더라도 사람과 들판과 물 모두를 죽일 수 있습니다. 방사능에 젖으면 아기를 낳을 때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죽거나 팔다리가 없을 수 있습니다. 흔히 가볍게 쓰는 전기라 하지만, 전기는 흔히 가볍게 쓸 만하지 않습니다. 너무 아슬아슬하게 다루면서 쓰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두메나 시골은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도 괜찮은 곳일까 궁금합니다. 두메사람이나 시골사람은 방사능덩어리를 곁에서 떠안으면서 살아야 할 목숨인지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쓰는 전기를 왜 도시에서 안 만들고 두메나 시골에 발전소를 짓고, 길디긴 전깃줄을 드리워 도시로 가져가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이들은 말 그대로 사진기를 손에 쥐고 사진을 찍습니다. 다만, 사진을 찍으면서 놀이를 즐기려 한다면, 이들은 ‘사진을 찍는다’기보다 ‘놀이를 한다’고 해야 옳습니다. 모델이 되는 사람들이 사진쟁이 앞에서 ‘사진기를 들고 놀’ 때에도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놀이’라 하거나 ‘모델’이라 하겠지요.

 멋스러이 보이는 사진을 노리는 분들이 퍽 많습니다. 사람들이 멋스러이 바라보기를 바랄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도 멋스러이 느끼고픈 사진을 노린다 할 만합니다. 이분들 또한 겉으로 보기에는 ‘사진찍기’를 한다 여길 텐데, 속으로 본다면 ‘멋부리기’를 하는 셈입니다. 멋부리기는 멋부리기이지 사진찍기는 아니에요. 사진찍기는 멋부리기가 아니라 사진찍기입니다.

 사진을 찍어 그러모은 다음 사진잔치를 마련하는 분이 많습니다. 저도 사진잔치를 스무 차례 가까이 했습니다. 사진잔치를 마련할 때에는 그동안 내가 걸어온 사진길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앞으로 걸어갈 사진길을 새롭게 살펴보려는 뜻입니다. 땀흘려 찍은 사진을 이웃한테 선보이면서 내 이웃이 내 사진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맑아지거나 흐뭇해지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 이웃이 내 사진을 바라보며 좋아해 주거나 사랑해 주기를 빌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사진으로 내 삶을 좋아하거나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내 밥그릇을 비우면서 끼니를 때울 때에 내 몸을 북돋우고 내 삶을 이을 마음이지, 내가 내 밥그릇을 비우면서 내 이웃이 배가 부르리라 여길 수 없어요. 내 사진잔치는 오로지 내 사진길을 밝히거나 채우는 잔치마당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잔치를 마련하면서 ‘내가 맞아들여 나를 북돋우는’ 뜻이 아니라 ‘남한테 내보여 남한테 평가(값매김)를 받으려’ 하는 이가 꽤 많습니다. 전시관마다 수많은 사진잔치를 꾸준히 잇고, 신문과 잡지와 방송마다 새로운 사진잔치를 알립니다. 사진잔치는 왜 알리고 어떻게 알리며 누구하고 나누는 자리일까요.

 사진은 삶입니다. 사진은 바로 내 삶입니다. 내가 찍는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삶입니다.

 내 삶이 겉치레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거들먹거리거나 자랑하려는 매무새라 한다면 내 사진 또한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그럴듯하게 보여주거나 멋스러이 보여주려는 매무새가 되고 맙니다.

 내 삶이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에 맞추어졌다면, 내 사진 또한 돈을 벌 만한 사진찍기로 기울어집니다. 내 삶이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듯이 ‘역사에 남을 사진 한 장’을 꾀하는 데에 맞추어졌으면, 내 사진 또한 이름값을 높이거나 얻거나 누리는 데로 치우칩니다.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살며, 살아가는 대로 바라보고, 바라보는 대로 살다가, 사진기를 쥐어 사진 한 장 찍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하고 왜 어떻게 살림을 꾸리는 한 사람일까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는 사랑을 바라는 사람인지 돈값을 꾀하는 사람인지를 가만히 되뇝니다. 나는 꿈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나는 착하게 살고픈 사람인지, 나는 어여쁜 살림살이를 아끼고픈 사람인지 찬찬히 곱씹습니다.

 멋부리는 삶은 그럴듯하겠지만, 따사로운 삶은 아름답습니다. 이름있는 삶은 빛나겠지만, 너그러운 삶은 참답습니다. 사진 한 장, 그림 한 점, 글 한 줄, 만화 한 쪽, 노래 한 가락, 춤 한 사위, 어느 곳에서나 예쁜 넋이 어리는 예쁜 삶이 고마우면서 반갑습니다. (4344.6.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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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주는 이 없어도 사진을 찍는다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22] 이인자, 《받아주는 이 없어도》(경기대학교출판국,1988)



 “과연 장애인들의 침묵의 언어를 대변할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하는 의구심(65쪽)” 때문에 오래도록 망설였지만 조그마한 책으로 묶어 살며시 태어났던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경기대학교출판국,1988)가 있습니다. 아주 조용히 나왔다가 더없이 조용히 스러진 사진책인 만큼, 이 사진책을 알아본 사람을 찾아보기란 어려울 뿐더러, 이 사진책을 놓고 사진이야기를 펼치는 사람 또한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인자 님은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사진학과 교수 또한 아닙니다. 사진평론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신문사 사진기자도 아니에요. 그저 장애인 권리와 삶을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나라 비장애인이라 하는 사람들하고는 아주 멀리 떨어진 채 살아야 하는 장애인은 어떤 웃음과 눈물로 하루하룰 일구는가를 보여주어 함께하고픈 마음을 담은 사람일 뿐입니다.

 똑같이 ‘장애인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도 이름난 사진쟁이가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한결 돋보이거나 널리 알려지리라 생각합니다. 다큐사진을 찍는 누군가 장애인 권리와 삶을 사진감으로 삼는다 하면 사진책으로 묶겠다 하는 출판사가 여럿 나올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장애인 권리와 삶을 사진으로 담으면 사진평론을 하는 사람도 눈여겨볼 테며, 신문사나 방송사에서도 이러한 사진책을 널리 알리겠지요. 이인자 님이 1988년에 《받아주는 이 없어도》를 내놓을 때에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 강사 노릇하고 경기대학교 응용미술과 조교수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교수라 할 수 없던 강사였던 이인자 님이 거의 비매품과 같은 사진책을 대학교 출판국에서 내놓았으니, 이러한 사진책을 경기대학교 바깥에서 알아주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 되면서, 경기대학교 안쪽에서조차 알아주기는 힘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는 이인자 님 사진과 장애인이 쓴 글을 나란히 엮습니다. 사진책에 실린 글 〈나누고 싶어요〉를 읽습니다. 첫머리에 “나의 사랑 나누고 / 싶어도 / 받아 주는 이 없네 // 나의 다정한 속삭임 나누고 / 싶어도 / 아무도 듣는 이 없네(명혜중학교 정윤수).” 하는 노래가 나옵니다. 비장애인은 장애인하고 사랑을 나누지 않습니다. 비장애인은 장애인하고 사랑을 나눌 마음이 없습니다. 비장애인은 비장애인끼리 어울리고, 장애인은 장애인끼리 어울리고 맙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끼리 어울리며, 돈있거나 이름있는 사람은 돈있거나 이름있는 사람끼리 어울립니다. 저마다 고운 목숨 선물로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저마다 선 자리가 너무 다를 뿐 아니라, 울타리가 참 높습니다. 모두들 착하고 예쁘게 살아가면 즐거울 텐데, 서로를 살가운 벗이나 살붙이로 느끼지 못합니다.

 《받아주는 이 없어도》라는 작은 사진책이 나왔기 때문에 이 사진책에 실리며 조금은 더 읽힐 수 있는 장애인 글 〈어머니〉를 읽습니다. 첫머리에 “어머니! / 당신이 나를 낳으실 때 / 발에 신길 내 작은 신발 / 살 돈을 그 어디엔가 / 마련해 두셨겠지요. / 그러나 내 발은 신발 냄새 / 맡을 수 없어 개미 발 하나 / 다치게 하지 않았읍니다. / 그 공로로 내 발은 개미한테 / 감사패를 받을지 모릅니다(지체부자유자 나항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진을 찍은 이인자 님은 장애인들하고 함께 어울리거나 지내면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길을 마주칩니다. 생각해 보면, 장애인 권리를 외치는 일이란 남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애인 삶을 사랑해 달라는 목소리란 남다른 움직임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지구별을 생각하고, 서로 어깨동무하는 삶터를 살피면 됩니다. 좋은 동무로 지내고, 맑은 벗으로 사귀면 됩니다. 좋은 동무로 지내니까 틈틈이 찾아가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맑은 벗으로 사귀니까 꾸준히 편지를 부치면서 서로 어떻게 지내는가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라면상자를 선물하거나 쌀푸대를 건넨대서 장애인을 돕는 일이 아니에요. 지하철 나들목에 승강기를 마련한대서 장애인 권리가 지켜지지 않아요. 처음부터 지하철 아닌 ‘땅 위 전철’을 놓아야 하고, 처음부터 ‘장애인뿐 아니라 아기 밴 어머니나 늙은 할아버지’ 누구나 걱정없이 느긋하게 타고다닐 전철길이 있어야 합니다. 건널목에서 높은 소리로 울리도록 하는 장치가 없어도, 자가용을 모는 이들은 건널목에서 빠르기를 줄여 차분히 기다리며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통법규를 떠나, 자가용을 모는 이들은 골목길에서 빠르기를 줄여 어린이나 어른이나 느긋하게 골목삶을 일구도록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번 다음 사회시설에 척 하니 내놓는 일이 착한 일이 아닙니다. 돈을 척 하니 내놓지 않아도 돼요. 신동엽 시인이 ‘막걸리병 자전거 꽁무니에 꽂고 시인을 찾아가는 어느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시로 쓰면서 꿈을 꾸었듯이, 막걸리병 하나 들고 쭐래쭐래 걸어서 찾아가 만날 벗님으로 지낼 수 있으면 됩니다. 함께 살아가는 벗이요, 지구별 고운 목숨이며, 착하며 여린 이웃입니다.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는 틀림없이 사진책입니다. 사진 갈래로 나눈다면 다큐사진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다큐사진에 넣지 않아도 되는 사진이요, 애서 사진비평이나 사진평론을 받지 않아도 즐거우면서 아름다운 사진책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책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받아주지 않는 슬픈 한국땅 모습을 살며시 보여주는 구실을 하지만, 비장애인을 꾸짖는다거나 나무란다거나 타이르지 않으니까요. 이인자 님한테 사랑스러우면서 살가운 장애인 벗님 이야기를 사진으로 가만히 담아 보여줄 뿐이니까요.

 어쩌면, 다큐사진은 목소리를 외치는 사진일 수 있고, 달리 보면 다큐사진은 목소리를 외치지 않는 사진일 수 있습니다. 어떠한 목소리를 외치면서 온누리 얄궂거나 슬프거나 어두운 구석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다큐사진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목소리를 외치지 않으면서 그예 따스하며 넉넉히 살아가는 사람들 꿈과 보람을 조용히 보여주는 사진일 수 있어요.

 아픈 사람을 보여주어야 다큐사진이 아닙니다. 슬픈 사람을 사귀어야 다큐사진이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을 찾아다녀야 다큐사진이 아니에요. 힘겨운 사람을 널리 알려야 다큐사진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보여줄 때에 다큐사진입니다. 믿음을 나눌 때에 다큐사진이에요. 따스한 손길과 넉넉한 가슴으로 어깨동무할 때에 다큐사진입니다. 굳센 손으로 흙을 만지면서 함께 땀흘려 일하는 벗일 때에 다큐사진입니다.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는 말 그대로 받아주는 이 없어도 서로서로 예쁘게 어울리면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진을 찍은 이인자 님은 알아주는 이 없어도 즐거이 사진을 찍고 기쁘게 동무를 사귑니다.


― 받아주는 이 없어도 (이인자 사진·장애인 글,경기대학교출판국 펴냄,1988.10.15.)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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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삶
― 첫째 아이 사진과 둘째 아이 사진



 2008년 8월 16일에 첫째 아이를 낳았습니다. 2011년 5월 21일에 둘째 아이를 낳았습니다. 첫째 아이를 낳던 날부터 둘째 아이를 낳던 날까지 집에서 살붙이 사진을 어떻게 찍었는가를 돌아봅니다. 날마다 서른 장쯤 줄기차게 찍었습니다. 한 달이면 구백 장쯤 되는 셈이고, 열두 달 한 해가 되면 만 장을 웃돕니다. 두 돌이면 이만 장이 되며, 석 돌이면 삼만 장을 웃돌아요.

 둘째를 낳고도 사진찍기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조금 다릅니다. 둘째 아이 사진은 첫째 아이 때만큼 바지런히 찍지 못합니다.

 둘째한테는 사랑이 시들거나 줄었기에 사진을 덜 찍지 않습니다. 첫째를 훨씬 귀엽게 바라보고 싶기에 둘째 사진을 덜 찍지 않아요.

 몸이 받치지 못하니 둘째 아이 사진을 덜 찍고 맙니다. 첫째 아이한테 마음을 쓰고 둘째 아이한테 몸을 쓰니 사진기를 쥘 겨를이 아주 줄어듭니다. 빨래거리만 하더라도 곱배기로 늘고, 밥을 하거나 집일을 하거나 집살림 돌보는 데에도 곱배기로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이동안 사진기를 쥐기란 몹시 벅찹니다.

 더 곱씹어 봅니다. 우리 집에 아이가 오기 앞서는 옆지기 삶자락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이러다가 첫째 아이한테 천천히 넓어지고, 이제 둘째 아이한테까지 찬찬히 이어집니다. 옆지기하고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도시에서 사진감을 얻어 헌책방과 골목길과 자전거를 즐겨찍었습니다. 첫째 아이를 낳고 두 돌이 될 무렵 시골로 살림을 옮기며 ‘도시에서 얻어 즐기던 사진감’을 더는 즐기지 못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도시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을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시골에서는 ‘시골에서 얻어 즐길 사진감’이 있어요. 숲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풀이 있습니다. 시골살림이 있고 텃밭이 있으며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가 있어요. 도시에서 지내며 ‘헌책방 살림살이 자취를 아침 낮 저녁 밤, 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살폈다면, 시골에서는 ‘푸나무 한살이 자취를 새벽 아침 낮 저녁 밤, 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또는 달과 날’에 따라 살핍니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아이가 집에서 노는 사진을 비롯해서 함께 골목마실이나 헌책방마실을 하던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이밖에 달리 도드라지거나 눈여겨볼 만큼 새삼스러운 사진을 빚지 못합니다. 멧골자락으로 살림을 옮긴 뒤로는,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에서 노는 사진을 비롯해서 가끔가끔 도시로 골목마실이나 헌책방마실을 다닐 때에 몇 가지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도 하는데, 여기에 ‘마실을 다니며 오가는 길에 느끼는 모습’을 함께 사진으로 담습니다. 그리고, 시골집에서는 숲길을 거닌다든지 논두렁에서 쑥을 뜯는다든지 텃밭에서 호미를 들고 일한다든지 하는 모습을 차곡차곡 담습니다.

 더 나은 사진이나 덜 떨어지는 사진은 없습니다. 두 어버이가 낳아 두 어버이가 함께 돌보며 살아가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담는 사진이란, 두 어버이가 아이와 마주하는 사랑이 빚는 열매입니다. 더 예뻐 보이도록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더 잘나 보이도록 찍는다든지, 가장 빛나 보이도록 찍지 않아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양새 그대로 찍습니다. 오늘은 오늘대로 찍으면서 마주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두 돌 아이한테는 두 돌 아이 사진을 찍습니다. 서른 달 아이한테는 서른 달 아이 사진을 찍고, 서른두 달 열흘 아이한테는 서른두 달 열흘 아이 사진을 찍어요.

 갓 태어난 둘째를 바라보는 자리에서도 똑같습니다. 이제 막 갓 태어났으니, 갓 태어난 살결을 고스란히 옮기는 사진입니다. 온누리에서 가장 빛나는 아이가 아니라, 우리 집에서 우리 살붙이로 사랑스러운 아이로 마주하면서 담는 사진이에요.

 다만, 참 바쁩니다. 눈코 뜰 사이가 없을 뿐더러, 밤이라 해서 느긋하게 발 뻗고 잘 수 없습니다. 밤새 아기 칭얼거림을 맞아들여야 하고, 아기 기저귀를 갈며, 첫째 밤오줌 가리기를 하자며 덥석 안아서 오줌그릇에 앉혔다가 다시 잠자리에 눕히기를 해야 합니다. 등허리를 반듯하게 펼 날이란 없으며, 손에서 물기 마를 겨를이란 없습니다. 그래도, 첫째를 낳아 살아가던 때처럼 밥을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모르지는 않아요. 밥은 어김없이 입으로 먹고, 숨은 코로 쉽니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지 못하는 나날이지만, 이렇게 헐떡이는 대로 때때로 사진기를 손에 쥐어 첫째랑 둘째가 저마다 이 작은 시골집에서 어우러지는 나날을 한 장 두 장 갈무리합니다.

 너무 바빠서 잊어버리는 하루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지쳐서 잃어버리는 오늘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고단해서 눈을 질끈 감는 삶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무거워 억눌리는 꿈이 되고 싶지 않아요. 사랑하는 옆지기와 아이하고 오순도순 지내는 웃음과 눈물을 하나하나 사진이라는 틀에 담고 싶습니다. (4344.5.2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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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1-05-2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째가 태어났었군요.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행복하게 잘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숲노래 2011-05-27 19:2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둘 모두 사랑스레 잘 살아가는 좋은 길동무가 되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