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읽기 삶읽기 사람읽기 1
― 대학교 바깥에서 사진 배우기



 저는 대학교 사진학과나 사진과라든지, 고등학교 사진과를 다닌 적이 없기 때문에, 저로서는 이러한 곳을 다니면서 어떠한 사진을 배워 어떠한 삶을 일굴 수 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은 대학교를 다니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대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으로서 사진을 얼마나 즐길 수 있는가 하는 한 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대학교를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었으며, 사진을 전공으로 삼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다섯 학기를 다니고 대학교를 그만두던 때는 1994∼1998년입니다. 사이에 군대살이를 스물여섯 달 했기에 햇수로 치면 조금 깁니다. 저는 대학교를 한 학기 다닌 1994년 여름에 ‘대학교가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대학교에 들어오자며 그토록 푸른 날을 아깝게 내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대학교쯤 된다면 제대로 학문을 파고들면서 내 삶과 이웃 삶을 살뜰히 보듬는 길을 걸어가도록 이끌어 주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라는 데는 고등학교하고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사이사이 강의가 비는 때마다 도서관에 가는 선·후배는 찾아볼 길이 없으며, 도서관에 간달지라도 책을 읽으러 가지 않습니다. 대학생이 도서관에 가는 까닭은 영어 공부를 해야 하고, 보고서 쓰는 숙제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도서관에 갖춘 책부터 그리 안 많기도 한데다가 대학생이 도서관에서 빌린다는 책은 ‘유행하는 소설’에 그칩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대학생이 빌린 다음 돌려주는 책을 책시렁 제자리에 꽂는 일’을 한 해 동안 해 보면서, 대학생이란 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엉터리로 읽고 함부로 다루는가를 깨달았습니다.

 1995년 가을에 군대에 들어가기 앞서 휴학계를 냈지만, 제 마음은 휴학계 아닌 자퇴서를 내고 싶었습니다. 어머니가 말렸기에 휴학계로 그쳤고, 1998년에 군대살이를 마친 뒤에도 어머니가 한 해만 더 다녀 보라 해서 한 해만 더 다닌 뒤에 다시금 휴학계를 냈습니다. 저는 따로 나와 살며 살림돈과 책값은 제가 벌어서 댔으나 비싼 배움값은 아버지한테서 빌려 댔습니다. 자퇴를 하면 그동안 빌린 배움값을 은행에 한꺼번에 갚아야 한대서 휴학계를 냈습니다.

 대학교를 다닐 때에 겪어 보니, 한국땅에서 대학교는 학문이나 문화나 창작이나 꿈을 키워 주지 않습니다. 대학교는 학점과 졸업장을 주는 곳입니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나와서는 문학을 하든 학문을 하든 예술을 하든 정치를 하든 경제를 하든 농사를 하든 할 수 없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기술자가 될 만큼 여러 가지 손재주를 가르쳐 주지도 않습니다. 기술자가 되는 손재주는 학원에서 가르쳐 줍니다. 모든 배움과 재주는 스스로 찾아서 갈고닦아야 합니다. 교재로 쓰는 책을 읽는다 해서 내가 전공으로 삼은 학문을 깊이 파고들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교재 아닌 다른 책으로 무엇이 있는가를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모두 스스로 찾아야 하고 손수 살펴야 하며 몸소 곰삭여야 합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하든 글을 하든 그림을 하든 하자면 ‘졸업장 없으면 받아 주는 데가 없다’시피 하니까 대학교에 안 가면 안 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 강단에도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강사나 교수 일을 하면서 우리들을 가르치려고 애씁니다. 다만, 이분들은 알뜰살뜰 가르치려고 애를 쓰시지만 몇 사람 안 되고, 몇 사람 안 될지라도 참으로 애쓰시는데, 워낙 고등학생 때까지 입시지옥에 시달려 ‘스스로 찾아서 배울 줄 모르는’ 아이들한테 ‘스스로 찾아서 배우기’를 알려주려고 애쓸 뿐이지, 이밖에 다른 어떠한 이야기도 가르쳐 주지는 못합니다. 입시교육에 찌든 때를 벗겨 주는 대학교라고 할까요. 그나마, 이마저도 스스로 더 애써서 내 허물을 벗으려고 하는 사람들만 알아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리하여, 스스로 허물벗기를 하지 못할 사람이라면 대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허물벗기를 못하지만, 대학교를 다녀도 허물벗기를 못합니다. 스스로 허물벗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허물벗기를 하지만,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허물벗기를 합니다.

 1994∼1998년에 대학교를 다니면서 내야 하던 배움값은 한 해를 줄잡아 150만입니다. 2010년대에 들어선 오늘날 대학교를 다닐 때에 내야 하는 배움값은 한 해를 줄잡으면 1000만 원입니다. 숫자로 치면 오늘날이 훨씬 비싼 듯하지만, 물건값 오름세를 따지면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똑같습니다.

 제가 대학생 아닌 여느 사회사람으로서 책을 가까이하고 사진을 좋아하는 삶을 일구면서 책과 사진을 배우려 했다면, 한 해 150만 원이란 어마어마하게 큰 돈입니다. 그무렵 저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먹고살았으며, 신문배달 한 달 일삯이 1995년에는 16만 원, 1998년에는 32만 원이었습니다. 신문사지국에서 밥값이랑 잠값을 대주었으니 밥값이랑 잠값을 따지면 꽤나 많이 받는 셈이에요. 이런 살림에서 150만 원이면 알음알음으로 잠자리를 얻어서 자고 밥도 얻어먹는다면 한 해 내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한국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여인숙 작은 방에서 잠을 잔다 해도 석 달 넘게 다닐 수 있어요(1994∼1998년에). 요즈음 2010년대에는 여인숙 작은방을 15000원 받고 시골 여관이면 20000원 받을 테니까 한 해 1000만 원이면 여관만 돌면서도 잠값이 다 나오고 밥도 웬만큼 사다 먹을 수 있습니다. 사진기하고 자전거를 한 대씩 장만해서 한 해 동안 나라안 이 마을 저 마을 돌면서 내가 발딛고 살아가는 터전을 마주할 수 있어요. 나와 함께 한국말을 쓰면서 한국사람으로 지내는 이웃이 어떠한 삶을 일구는가를 마주할 수 있어요. 때때로 어느 마을에서는 일손을 거들면서 여행삯을 보탤 수 있겠지요.

 어떤 지식을 더 갖추었대서 사진을 더 잘 찍지 않는 만큼, 더 두루 다니며 더 깊이 사람을 사귀면서 지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내가 어디에서 누구를 왜 어떻게 언제 사진으로 담으면 좋을까를 시나브로 깨달으리라 생각합니다. 알아야 찍는 사진이 아니라, 살아야 찍는 사진입니다. 만나고 마주하며 부대끼면서 비로소 언제 어디에서 사진기 단추를 눌러야 하는가를 깨달으리라 봅니다.

 다큐사진은 나라밖 인도나 티벳이나 중남미나 아프리카에 있지 않습니다. 패션사진은 서울 강아랫마을이나 스튜디오에 있지 않습니다. 예술사진은 옷 벗긴 모델 아가씨 몸매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진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깃듭니다. 살아도 사람이 살고, 살아도 마을에서 사람이 삽니다. 내 삶을 보고 이웃 삶을 보아야 사진으로 어떤 이야기를 엮으면 좋을까를 알아챕니다. 내 삶을 살피며 동무 삶을 살펴야 사진으로 어떤 삶자락을 담으면 즐거울까를 알아냅니다.

 대학교 바깥에서 사진을 배운다 할 때에는 ‘사진 학문’이 아닌 ‘사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이야기를 샘솟도록 이끄는 물줄기이자 밑바탕’을 배운다는 소리입니다.

 대학교에서 사진을 배우든 대학교 바깥에서 스스로 사진을 익히든, 사진을 찍는 나부터 사람이고, 사진에 찍히는 모든 모습은 사람들 모습이거나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이거나 사람들 꿈꾸거나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자연 풍경을 찍는달지라도 자연 풍경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자연 터전이 가장 스스럼없이 펼쳐진 풍경’입니다. 풀과 나무와 햇볕과 물과 바람이 없이는 사람이 살아가지 못해요. 도시만 있으면 사람은 몽땅 죽습니다. 시골 논밭이랑 사람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끔한 자연 터전이 함께 있어야 사람이 살아갑니다. 공장에서 음료수와 공산품과 식료품을 만들어 낸다 해서 사람이 살 수 있지 않아요. 모든 공장 물건은 자연에서 재료를 얻어서 만듭니다. 자연 풍경 사진이랄지라도 사람 내음과 빛깔과 살결이 묻어나기 마련입니다.

 가끔 ‘출사’를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찍는 사진이 아니라, 늘 내가 부대끼는 자리에서 사귀는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찍을 수 있게끔 내 매무새를 다스리는 사진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한국사진을 돌아보면, 다큐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또 무슨무슨 이름을 내거는 사진이든 ‘출사 사진’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사진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처음부터 ‘출사 사진 배우기’ 아닌 ‘살아가는 내 하루를 사랑하는 사진 배우기’를 즐거이 꾸렸던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 아니랴 싶습니다. (4344.2.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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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한 줄로 읽는 사진 1
 : 문두근 님 시 〈판잣집에서 오키드꽃 피운다〉



.. 우리 대한민국 / 외국의 누가 다녀갈 때 / 빌딩이 서고 / 고층 아파트촌이 생긴다 / 그곳에 살던 철거민들 / 생활을 잃고 / 투사가 된다 // 오늘도 / 타일랜드 사람들은 / 세계의 모든 사람들 보든 말든 / 세계의 모든 사람들 웃든 말든 / 메남강에 붙어 / 판잣집 난간에 / 오키드꽃 피운다 ..  (판잣집에서 오키드꽃 피운다)


 시쓰는 문두근 님이 쓴 《아, 우리 비행기는 무사하다》(혜화당,1993)를 읽으며 무척 좋았습니다. 이 나라에 이러한 시도 있었구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판잣집에서 오키드꽃 피운다〉를 읽다가 글월 한 줄 두 줄에 내 눈길을 오래오래 박았습니다.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봅니다. 한국 사진쟁이들은 나라밖으로 나가서 태국이든 인도이든 티벳이든 베트남에서든 ‘가난한 사람들 모습’을 마음껏 사진으로 담습니다. 이렇게 담은 사진으로 ‘가난한 나라 사람들’ 헐벗은 모습을 선보인다든지 가난하면서도 웃음꽃 잃지 않는 모습을 알려준다든지 합니다. 때때로 한국땅 가난한 사람들 터전을 찾아가서 이런 사진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내 삶터를 꾸밈없이 들여다보며 담지는 않습니다. 사진으로든 그림으로든 글로든 내 삶터를 스스럼없이 밝히지는 않습니다.

 래미안 아파트에서 살며 래미안 이름 석 자 도드라지게 보이는 글자를 사진으로 아리땁게 찍어서 나누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자이 아파트에서 살며 자이 이름 두 자 돋보이도록 사진으로 어여삐 찍어서 사진잔치 여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눈오고 비오며 바람불고 안개낀 날마다 다 달리 보일 ‘아파트 높은 벽 글씨’ 하나 새삼스레 돌아보며 사진으로 나누는 사람은 못 봅니다. 그러나, 나라 안팎 가난한 사람들 집터를 속속들이 들추듯 들여다보면서 사진으로 찍어서 선보이는 사람은 참으로 많습니다.

 문두근 님 시가 아니더라도, 태국사람은 태국사람으로서 태국땅에서 잘 살아갑니다. 바깥에서 구경온 손님들이 사진을 신나게 찍든 말든 당신들 스스로 좋아하며 알맞게 일구는 삶입니다. 눈치를 볼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즐길 삶입니다.

 이 나라에도 눈치를 볼 삶이 아닌 하루하루 즐길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 동네나 마을이 곳곳에 소담스레 남았습니다. 다만, 이 소담스럽고 보배스러우며 대단한 동네나 마을 가운데 ‘재개발 대상’이 아닌 곳 없을 뿐입니다. 마을사람 스스로 오붓하게 잘 살아가는데, 문화를 하느니 예술을 하느니 하는 이들이 벽에다 페인트로 죽죽 그림을 그려 놓습니다.

 우리는 무슨 사진을 하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무슨 모습을 바라보는 사진쟁이인가요. 우리는 어떻게 사진을 찍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무슨 모습을 사랑스레 바라보는 사진쟁이인가요. 우리는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껴안는 삶으로 마주서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모슨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어 사진으로 엮을 줄 아는 사진쟁이인가요.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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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사진을 찍습니까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5] 공병우, 《백도》



 집에서 아이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든, 좋아하는 헌책방을 찾아가서 책을 살피며 사진을 찍든, 제가 나고 자란 터전인 인천 골목동네에서 마실을 하며 사진을 즐기든, 늘 되새기거나 생각합니다. 첫재, “어디에서 무슨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까.”를 되새깁니다. 둘재,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사진이나 글로 엮습니까.”를 생각합니다.

 사진찍기 아닌 살림하기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오늘 하루 이 시골집에서 우리 옆지기하고 아이랑 어떠한 삶을 일구는가를 되새깁니다. 우리 살붙이를 저부터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껴안으려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오늘 하루 제가 쥐어드는 이 책을 줄거리로 살피려 하느냐, 가슴으로 받아안으려 하느냐를 되새깁니다. 꼭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이 책보다 아이와 옆지기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보면서 꼬옥 껴안으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땅에서 사진책은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한국땅 숱한 사진쟁이한테 사진을 찍히는 사람들 또한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마구 찍어대는 손길이 아니라, 따순 이웃으로 찾아와 너른 품을 내미는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이런저런 작품이나 요런그런 상품을 빚는 사진찍기가 아닌, 이웃으로서 밥 한 끼니 같이 먹는다든지 막걸리잔 부딪힌다든지 하는 삶나누기를 기다립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공병우 사진책’을 드문드문 만납니다. 공병우 님은 당신 일터인 ‘공안과’에 사진부를 두었고, 사진부에는 당신이 사진마실을 다닐 때에 곁에서 심부름을 해 주던 젊은이가 함께 있었구나 싶습니다.


- 우리가 탄 배는 통통 울리면서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절경은 순식간에 형형색색으로 변하였다. 연속 나타나는 절경의 모습을 광각, 표준, 망원, 줌 렌즈들이 달린 4대의 카메라로 번갈아 바쁘게 찍었다. 필름을 갈아끼워 주는 조수는 더욱 바빴었다. 이런 경우는 250장박이 필름과 와인다나, 모터드라이버가 달린 카메라를 사용한다면, 한층 더 좋은 앵글을 잡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백도》에 실은 이야기)》


 공병우 님(1906∼1995) 같은 분한테는 심부름꾼이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이는 나이대로 많이 자셨고, 기운은 기운대로 많이 떨어졌으며, 보고픈 모습과 담고픈 모습이 아주 많으니, 당신 스스로 필름을 갈아끼운다든지 이런저런 장비를 홀로 챙겨 들 수 없습니다. 씩씩하고 튼튼하며 손빠른 심부름꾼 젊은이가 꼭 곁에 있어야 해요.

 얼마 앞서 사진찍는 윤주영 님을 뵈었습니다. 윤주영 님은 1928년에 태어났습니다. 2011년 나이로 여든셋입니다. 당신은 걸음조차 제대로 걷기 힘듭니다. 곁에서 어깨를 잡아 주는 젊은이가 한 사람 있으며, 당신을 자동차에 싣고 움직여 주는 운전수가 한 사람 있습니다. 짧은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지는 자리에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제가 여든셋 나이까지 살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무렵까지 사진길을 사랑한다면 저 또한 틀림없이 곁에서 제 어깨를 붙잡아 줄 젊은이가 있어야 할는지 모르겠구나 싶습니다.

 먼 앞날을 곰곰이 짚으니, 제 곁에서 제 잔일을 해 주어야 할 사람한테 참 고마우며 미안합니다. 그러나 잔일을 거드는 이는 잔일을 거들면서 꾸리는 삶이 있고, 이렇게 꾸리는 삶에 따라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홀로 마음껏 어디이든 나다니면서 사진마실을 할 때에도 틀림없이 이 나름대로 삶을 꾸리고 배우면서 사진을 얻겠지요. 내 사진기는 쥘 겨를 없이 누군가가 쥐어야 할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바지런히 필름을 갈아끼운다든지 세발이를 세운다든지 한다면, 이 일만으로도 진땀 구슬땀 빼야 할 테지요.

 우리 나라에 ‘도제 기사’ 틀이 아직 있는지 이제 사라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날에는 이름깨나 힘깨나 돈깨나 있는 사진쟁이들이 도제를 거느리면서 젊은 풋내기 사진쟁이를 때리기도 하고 함부로 부려먹는데다가 돈은 안 챙겨 주고 사진기 단추는 만지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뒹굴면서 겨우 홀로서서 사진길을 걸을 때에 ‘나는 이렇게 도제는 안 한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내가 받은 대로 나도 한다’고 되뇌는 사람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폭력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군대가 워낙 사람 죽이는 솜씨를 길들이는 곳이기도 한데다가 주먹다짐이 되물림되는데, 얻어맞은 사람으로서는 마음풀이를 할 곳이 똑같은 새내기 병사한테 손찌검하는 데밖에 없습니다. 또는 사회로 돌아와서 여자나 어린이한테 폭력을 휘두릅니다.

 마음이 깊거나 너르거나 따스한 사람은 슬픈 곳에서 구르더라도 깊거나 너르거나 따스한 삶을 이으면서 깊거나 너르거나 따스한 사진을 이룹니다. 마음이 얕거나 좁거나 차가운 사람은 좋은 곳에서 어울리더라도 얕거나 좁거나 차가운 사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 지난 (1980년) 9월 15일에 나는 임석제 님을 모시고, 서울을 떠나서 여수에서 1박 하고, 16일에 배로 거문도에 도착하여 1박 하고, 17일에 똑딱선으로 약 2시간만에 백도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섬을 돌면서 4시간 동안 백도의 사진을 찍었다. 그날 거문도로 돌아와서 다시 1박 하고, 이튿날 아침에 떠나, 도합 4박 5일의 왕복여행을 끝냈다. (《백도》에 실은 이야기)》


 공병우 님 사진책 《백도》를 봅니다. 제가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살핀 《백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지개빛 사진으로 된 얇은 책자입니다. 다른 하나는 까망하양 사진으로 된 얇은 책자인데 무지개빛 사진보다는 조금 도톰합니다. 두 가지 《백도》는 사진책이라기보다 ‘사진 안내책자’라 할 수 있으나, 제가 보기로는 두 가지 모두 사진책입니다. 작으면서 얇은 사진책입니다.

 사진책이란 100쪽이든 200쪽이든 300쪽이든 부피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진책은 500쪽짜리 1000쪽짜리로 이루어질 수 있고, 어느 사진책은 8쪽이나 12쪽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쪽수로 따지는 사진책이 아니라, 담은 사진에 서린 삶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었는가로 살필 사진책입니다. 누구하고 나누려 하는 사진이요 사진책인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떠한 넋과 얼로 사진기를 쥐었느냐를 보여줄 사진책입니다. 어떠한 삶을 사랑하고 꾸리면서 사람들과 마주했는가를 나타낼 사진책입니다. 내 하루 삶은 어떠했고, 내 하루 삶을 보내는 동안 사귄 사람들 이야기를 드러낼 사진책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골목은 골목으로 보아야 합니다. 헌책방은 헌책방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이는 아이로 보아야 합니다. 시골은 시골로 보고, 도시는 도시로 보아야 합니다. 서울은 서울로 보아야 비로소 서울 사진책입니다. 백도는 백도로 볼 때에 바야흐로 백도 사진책입니다. (4344.1.27.나무.ㅎㄲㅅㄱ)


― 백도 (공병우 글·사진,돈화문 공안과 사진부,198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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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일구는 삶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7] 데이비드 플라우덴(David Plowden), 《The Iron Road》(Four Winds Press,1978)



 《마더 존스 자서전》(평민사,1978)이라든지 《미국노동운동비사》(인간,1981)라든지 《정글》(동녘,1991)이라든지, 요즈막에 새로 나온 《제1권력》(프로메테우스출판사,2010) 같은 책을 읽은 사진쟁이는 이 나라에 얼마쯤 될까요. 사진쟁이이든 아니든 이 책들을 읽은 사람이라면 《The Iron Road》처럼 ‘철길 삶자락’을 훌륭히 담아낸 사진책을 보면서 뜻밖에 가슴이 뭉클뭉클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The Iron Road》는 틀림없이 잘 찍고 잘 담았으며 잘 엮은 사진책입니다만 철길이란 그냥 철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미국에서든 유럽에서든 철길을 놓을 때에는 예부터 이제까지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손을 맞잡고 서로서로 더 크고 센 권력을 누리려는 속셈을 꽃피웁니다. 참말로 여느 사람들 삶자리를 북돋운다든지 시골마을 사람들한테 발이 되어 준다든지 하려는 철길이란 없습니다. 더 많은 자원을 더 빨리 실어 옮겨 더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려고 놓는 철길일 뿐입니다. 이 나라 고속철도를 보아도 서울과 부산을 빨리 잇자는 생각일 뿐이지, 서울과 부산 사이에 있는 수많은 시골마을을 이으려는 생각이 아닙니다. 더욱이, 서울과 부산 사이에 숱하게 있는 시골마을을 이어 주던 ‘느린 철길’은 거의 모두 사라졌고, 남은 철길마저 머잖아 없애 버릴 판입니다. 서울에 지하철이 잘 뻗어 있다지만, 돈벌이 잘 되는 일터가 많은 곳으로 뻗는 전철길이요, 서울 둘레 전철들은 오로지 서울로 사람(노동자·소비자)을 빨리 보내도록 하는 데에만 맞춰집니다. 일산과 인천을 오가거나 인천과 수원을 오가거나 수원과 구리를 오가거나 구리와 의정부를 오가거나 의정부와 일산을 오가는 전철은 예나 이제나 놓을 생각이 없는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입니다.

 우리 삶터 밑자락과 밑바탕을 들여다보면 슬프고 씁쓸한 일투성이입니다. 철길을 보아도 슬프고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제도권 교육을 보아도 씁쓸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 대접을 보아도 슬프며 쇠밥그릇 아닌 착하고 참된 공무원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씁쓸합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이 목숨 하나 붙잡고 사는 까닭에 섣불리 고개를 떨구지 못합니다. 둘레를 살펴보느니 슬프고 아픈 일이 그득그득이라지만, 이러한 가운데 기쁘며 고운 일을 내 두 손으로 일구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기쁘며 고운 일을 남들이 먼저 스스로 잘 깨달아 펼치기를 바라기 앞서, 나 스스로 내 깜냥껏 깨닫고 찾아낸 기쁘며 고운 일을 나부터 힘차며 즐거이 꾸리면 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철길이 어떻게 놓였고, 철도 노동자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떠올린다면, 《The Iron Road》 같은 사진책은 더없이 부질없습니다. 그러나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어떻게 여느 사람을 부려먹거나 들볶는다 할지라도, 철도 노동자인 사람들을 살가이 보듬을 수 있거나 이들하고 이웃하며 지내는 사람들이랑 오순도순 알콩달콩 지낸다면 아름다운 노릇이리라 생각합니다. 농사짓는 사람을 막대접 한달지라도 내 손으로 키운 푸성귀를 내 이웃과 동무한테 기쁘게 나누어 줄 수 있고, 철도 노동자를 죄 비정규직으로 내몰거나 일삯을 제대로 챙겨 주지 않는달지라도 내 가난한 살림살이를 쪼개고 나누며 내 둘레 더 어렵고 버거운 동무와 이웃하고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다 함께 넉넉하고 따스한 일이요, 우리들이 섬길 믿음은 서로서로 아름다우며 씩씩한 믿음이며, 우리들이 나눌 사랑은 모두들 즐거우며 빛나는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무언가 노리거나 꾀하기 앞서, 꾸밈없이 넉넉하고 따스하게 사진을 찍습니다. 무엇을 이루겠다고 바라기 앞서,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자리 그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무슨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밥그릇 다툼에 앞서, 콩 한 알 나누는 사랑을 고이 실어 알뜰살뜰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는 다큐멘터리만 사진이지 않습니다. 모델이나 옷 벗은 아가씨를 찍어야만 예술 사진이 아닙니다. 산 들 냇물 바람 바다 들짐승을 찍어야 풍경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포토샵이니 셈틀이니 디지털파일이니 만지작거리거나 인화·현상을 남달리 해 본다고 현대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도록 하자면 이야기를 담아야 합니다. 사진에 담는 이야기가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되도록 하자면 내 삶과 내 이웃 삶이 맑고 밝으며 곱고 착한 삶이 될 수 있게끔 우리 모두 땀흘려야 합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게끔 힘쓰고자 사랑을 바치고 믿음을 쏟으며 내 이야기 알알이 가꾸는 가운데 내 이야기 나눌 삶터를 따스하고 넉넉하게 일구면, 우리가 사진기를 들 때에는 사진으로 빛을 뿌립니다. 볼펜을 들고 있으면 글로 빛줄기를 선사합니다. 붓을 들고 있으면 그림으로 빛살을 나누고, 악기를 들고 있다면 노래로 빛무늬를 이루며, 맨몸이라면 춤으로 빛접은 무지개를 피어올립니다.

 다큐멘터리라는 갈래가 따로 나오기 앞서, 사진이란 모두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상업이나 만듦이나 예술을 생각하며 갈라 놓기 앞서, 사진이란 모두 내 살붙이 밥벌이가 되는 일이요 내 삶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며 내 꿈을 이루는 예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사진이 사진이 되지 못하는 가운데, 다큐멘터리도 상업도 만듦도 예술도 되지 못합니다. 덧없이 조각나고 하릴없이 용두질을 합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헤아리는 사진쟁이는 좀처럼 태어나지 못하고,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가까스로 헤아렸어도 삶을 일구는 살림꾼이나 일꾼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한국땅에서는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말하거나 사진을 엮어 책을 만들거나, 모두들 우물에 갇힌 개구리 모양입니다. (2010.7.2.)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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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림하는 하루를 사진으로 담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5] 《타부 치요시오:田渕義雄-森暮らしの家》(小學館,2002)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는 한 갈래가 아닙니다. 사진찍기 한길이란 한 가닥이 아닙니다. 보도사진이 되든 상업사진이 되든 예술사진이 되든, 사진은 한 가지 모습으로만 나아가지 않습니다.

 사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으레 ‘세상을 바꾼 사진’을 말합니다. 사진은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다만, 사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할 때에 ‘깜짝 놀랄 만한 사진’으로 세상을 바꾸지 않아요. 하나도 깜짝 놀랄 만하지 않을 뿐더러, 더없이 수수한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여느 사람 여느 삶 여느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루이스 W.하인 님 사진이든 도로시아 랭 님 사진이든 ‘여느 사람 여느 삶 여느 모습’입니다. 무언가 대단하거나 남다르거나 돋보이거나 빼어난 사람들 빼어난 삶 빼어난 모습이 아니에요. 아주 어린 아이들을 공장에서 부려먹던 일이 ‘흔했을’ 뿐더러, 가난한 집에서는 누구나 으레 이렇게 일을 했기에 이처럼 ‘수수한 여느 모습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이민자이든 이주노동자이든 이름나거나 잘생기거나 어찌어찌한 사람이 아니라 ‘수수한 여느 사람’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나중에 이름값을 얻은 ‘루이스 W.하인’이요 ‘도로시아 랭’입니다만, 이들 사진쟁이는 ‘수수한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담기 앞서까지 참으로 수수한 여느 사진쟁이였습니다. 수수한 여느 사진쟁이가 수수한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세상을 바꾸는 사진이 있다 한다면 이렇게 세상을 바꾼다’고 하겠어요.

 《森暮らしの家》라는 책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森暮らしの家》라는 책은 딱히 사진책 갈래에 넣을 만하지 않을 수 있으나, 차분히 돌아보면 사진책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사람 타부 치요시오 님이 당신 삶을 사진으로 보여주니까 사진책입니다. 숲속에서 나무로 집을 짓고 자연과 하나되어 보내는 삶을 이렁저렁 글로도 담지만, 무엇보다 사진으로 담아 보여줍니다.

 언뜻 보기에 숲속에서 전기를 안 쓰고 자연에서 얻는 푸성귀랑 나무랑 햇볕이랑 물로 꾸리는 삶이란, 오늘날 도시물질문명 사회에서는 톡톡 튄다든지 꿈만 같다든지 엉뚱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별 모든 사람은 숲사람이었고 들사람이었으며 멧사람이자 바닷사람이었습니다. 도시사람이기 앞서 누구나 시골사람이던 우리들이에요. 《森暮らしの家》라는 사진책은 숲에서 숲을 사랑하고 아끼면서 보내는 나날이란 ‘잘난 삶’이 아니라 ‘여느 삶’이요, 대단하거나 거룩하거나 훌륭하다는 이름이 아니라, ‘수수한 삶’이면서 이름을 붙이지 않기에 즐거운 나날임을 가만가만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살림하는 하루를 사진으로 담은 책”이 《森暮らしの家》라 해도 좋습니다. 숲에서 살림하는 하루이니까, ‘숲살림 사진책’이라 할 수 있겠지요.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집을 어떻게 짓고 집을 어떻게 가꾸며 하루하루 살림을 어떻게 꾸리면서 즐거움을 맛보는가를 보여주는 사진책이라 하겠어요.

 숲에서 사는 사람으로서는 숲삶을 담는 책입니다. 바닷가에서 살아간다면 바다삶을 담으면 되고, 골목동네에서 가난하게 살거나 조촐하게 산다면 그예 골목삶을 담으면 돼요.

 아이를 돌보며 내내 집에 붙어서 보내야 하는 삶이라 한다면, 나 스스로 내 집살림을 사진으로 담으면 됩니다. ‘살림하는 내 하루’라 해서 보잘것없거나 하잘것없지 않습니다. 여느 수수한 삶이기 때문에 초라하거나 볼썽사나울 까닭이 없습니다. 살림하는 내 하루이기에 나 스스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살림을 일구는 내 삶인 만큼 나 스스로 얼마든지 사진에 담을 값과 뜻과 멋과 맛이 있어요.

 예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살림살이는 예쁘게 담으면 됩니다. 어지러이 늘어놓는 사람들 살림살이는 어지러이 늘어놓은 대로 담으면 돼요.

 인문지리학이나 문화인류학을 하는 전문가나 학자들은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살피어 이야기를 담거나 사진을 찍거나 글을 씁니다. 사건과 사고를 다룬다는 보도사진이란 ‘일어난 일을 고스란히 담는 일’입니다. 아흔 살 할머니가 쪽방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갈 때에 이 모습만 담아야 보도사진이 되거나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중산층이라 할 만한 네 식구들 여느 수수한 모습을 가만히 담아 놓아도 얼마든지 보도사진이나 다큐사진이 됩니다.

 기록사진과 앨범사진은 종이 하나만큼 다르지만, 두 사진은 한몸입니다. 쓰임새에 따라 달리 자리잡을 뿐이나, 기념사진이든 예술사진이든 한동아리입니다. 우리 집에서 우리 식구들 담는 사진이 되든, 이웃집 가난한 살림살이를 담는 사진이 되든, 똑같은 보도사진이자 예술사진이 되면서 다큐사진이든 기념사진이든 됩니다. 이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이랑 이 사진을 쓰려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다뿐,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나누는 마음은 마찬가지예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거나 봉사를 하러 가거나 취재를 하러 갈 때에도 얼마든지 놀랍거나 대단한 사진을 얻습니다. 아니, 멀리 사진마실을 갈수록 놀랍거나 대단한 사진을 얻습니다. 내 둘레나 내 가까이에서 사진삶을 꾸린다면 하나도 놀랍지 않고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사진을 얻습니다. 아니, 얻는다기보다 즐기지요. 내 둘레랑 내 가까이에서는 아주 흔하며 너른 수수한 사진을 즐깁니다. 그런데, 사진이란 바로 흔한 삶이 아닐까요. 사진이란 곧 수수한 모습이 아닌가요. 사진이란 무엇보다 너른 이야기가 아닐는지요. (4344.1.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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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1-20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숲살림 사진책이라.

약간 유행처럼 해외블로거들 사이에서 아침식사 사진 찍은 책들이 나왔더랬습니다.
사진, 그리고 그 사진이 담고 있는 시간과 시간의 흐름이 다 어우러져 인상적인 사진책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숲노래 2011-01-20 08:37   좋아요 0 | URL
스스로 즐겁게 살아가며 사진을 즐기고,
스스로 재미나게 살아가며 글을 쓰면,
책이란 참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