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읽기
― 무지개빛과 그림자빛

 


  우리 집 어여쁜 아이를 날마다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어떤 뚜렷한 그림을 그리며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어여삐 자라나는 모습을 하루하루 적바림하겠다는 뜻으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아이들 어여쁜 모습을 사진책 하나로 꾸며 주고 싶어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마주하는 이 아이 빛깔이 참 좋다고 느껴 절로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나는 날마다 우리 아이들 새롭게 마주하며 새롭게 사진으로 옮기면서 내 ‘사진 손길’을 나날이 새롭게 가다듬습니다.


  엊그제 저녁, 아마 일곱 시 즈음인데,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 멧등성이 너머로 사라집니다. 그래도 마을은 훤합니다. 네 식구 즐겁게 천천히 마실을 나옵니다. 찔레꽃 내음을 맡고 찔레꽃 몇 닢 따먹을 생각으로 마실을 나옵니다. 해가 넘어간 뒤라 사진기로 아이들 모습을 담을 때에 셔터값이 매우 낮습니다. 감도를 400으로 맞추어도 셔터값 1/15초 나오기 빠듯합니다. 이윽고 감도를 800으로 높이지만 셔터값은 1/8초가 됩니다. 그래도 찔레꽃 내음과 빛깔을 생각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갓난쟁이를 품에 안고 손떨림 없이 사진을 찍습니다.


  늦저녁 찔레꽃 사진을 찍다가 생각합니다. 첫째 아이가 갓난쟁이였을 적, 나는 첫째 아이를 안고 업고 하면서 인천 골목동네를 여러 시간 누볐습니다. 그때에도 아이를 한손으로 안고 다른 한손으로 사진기 쥐어 사진을 찍었어요. 나는 일찍부터 ‘한손 사진찍기’를 가다듬은 셈이었을까요. 더 거슬러 헤아립니다. 옆지기를 만나기 훨씬 앞서, 나 혼자 살림을 꾸리던 풋풋한 신문배달 젊은이였을 적, 한손으로 짐자전거를 몰고 다른 한손으로 바구니 신문을 한 장씩 꺼내어 허벅지에 탁탁 튕기어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은 다음 ‘자전거로 골목을 달리는 채’ 신문 한 장 휙 대문 위쪽 빈틈으로 던져 넣어 골목집 문간에 사뿐히 놓이도록 했습니다. 나는 이무렵부터 ‘한손 아이 안고 한손 사진기 들어 찍기’를 갈고닦은 셈이었을까요.


  무지개빛 사진으로 찍다가 까망하양 두 가지 빛깔인 그림자 사진으로 찍습니다. 퍽 오랜만에 그림자 사진을 찍는다고 느낍니다. 새삼스럽고 남다르다 느낍니다.


  그리고, 문득 떠올립니다. 다른 분들이 어떤 낱말을 쓰든 나는 그닥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학자나 전문가나 비평가께서 어떤 낱말로 사진 이야기를 펼치든 나는 딱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씁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시골마을에서 네 식구 조용히 살아가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 삶을 내가 사랑할 만한 작은 사진기로 날마다 즐거이 아로새깁니다. 이리하여, 나는 내 나름대로 ‘사진말’을 갈무리합니다.


  나는 ‘칼라’ 사진이라고 말하기보다 ‘무지개(빛)’ 사진이라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칼라(color)’ 또는 ‘컬러’는 영어라 할 수 없습니다. 워낙 널리 쓰는 낱말입니다. ‘color’는 한국말 아닌 외국말이지만, 이 낱말을 외국말로 느끼거나 여기는 젊은이나 어린이는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나는 우리 집 아이들한테 ‘컬러’이든 ‘칼라’이든 따로 가르치거나 들려주고 싶지 않아요. 우리 집 아이들이 나중에 영어를 배우며 이 낱말을 익히거나 들으면 모르되, 어버이인 나부터 아이들 앞에서 이 낱말을 읊고 싶지 않아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니, 굳이 곰곰이 생각하지 않아도 환하게 떠오릅니다. 나는 “무지개 사진을 찍겠어!” 하고.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든,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든, 숲과 들판을 사진으로 담든,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든, 내 눈으로는 ‘무지개처럼 고운 빛깔’을 봅니다. 이리하여, 나는 으레 ‘무지개(빛)’ 사진을 찍어요.


  엊그제 모처럼 까망과 하양이 어우러지는 사진을 찍으며 새롭게 생각합니다. ‘무지개(빛)’ 사진과 나란히 서는 ‘까망하양’ 사진이라 말할 수 있는데, ‘까망하양’이란 ‘그림자(빛)’라 할 만하구나 싶어요. 햇볕을 받건 형광등을 받건, 사람이든 제비이든 박쥐이든 옷장이든 치마이든 모두 ‘똑같은 빛깔 그림자’입니다. 이른바 ‘흑백(黑白)’이라 일컫는 사진은 ‘그림자빛’을 찍는 셈이라 할 만해요.


  그림자빛은 까망이거나 하양이지 않습니다. 같은 까망이라도 그림자 자리마다 짙기가 다릅니다. 어느 곳은 더 짙고 어느 곳은 더 옅습니다. 같은 하양이라도 그림자 자리마다 더 밝거나 더 어둡습니다.


  깊은 밤 아직 잠들지 않은 아이가 그림책 읽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며시 무지개빛 사진을 찍습니다. 환한 낮 개구지게 뛰놀다가 글씨 쓰기를 익히려고 방바닥에 엎드린 아이가 연필을 놀리는 모습을 말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슬며시 그림자빛 사진을 찍습니다. 참 좋은 하루를 날마다 기쁘게 누립니다. 사진은 나한테 늘 고마우면서 예쁜 삶벗입니다. (4345.5.24.나무.ㅎㄲㅅㄱ)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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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빛 사랑―최종규, 헌책방 이야기 사진잔치 열여섯, 2012.5.

 


찾아오는 길 www.gegd.co.kr/map.html
때 : 2012년 5월 3일∼5월 31일
곳 : 김형윤편집회사 1층, 헌책방 〈지나간 시간〉

 


  모든 책에는 저마다 다 다른 빛을 담습니다. 스스로 가장 사랑하는 보금자리에서 살아가며 이루는 이야기가 한 줄기 빛이 되어 책 한 권으로 스며듭니다. 갓 나온 책을 살피면, 이제 막 이웃들 앞에 선보이면서 즐겁게 나누고픈 고운 사랑을 따사롭게 담은 빛이 환합니다. 새책방 책꽂이를 거쳐 헌책방 책시렁으로 옮긴 책을 돌아보면, 오래도록 이웃들하고 주고받던 고운 사랑이 보드랍게 무르익은 빛이 그윽합니다.


  새책이기에 더 빛나지 않습니다. 헌책이기에 더 어둡지 않습니다. 책이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한 자락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에 따라 책 하나가 나한테 아름답게 스며들 수 있습니다. 빛나게 스며드는 책이라 한다면, 두고두고 즐겁게 물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환하게 녹아드는 책이라 한다면, 오래오래 기쁘게 돌이킬 수 있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어느 책은 더할 나위 없이 많은 사람한테서 사랑을 받습니다. 어느 책은 몇 안 되는 사람한테서 사랑을 받습니다. 백만 사람한테서 사랑받던 책이 있고, 열 사람한테서 사랑받은 책이 있습니다. 어느 책이 더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어느 책이 더 값지다고 따지지 못합니다. 그저 나 스스로 내 삶을 알뜰살뜰 꾸리는 길에서 좋은 길동무나 이슬떨이로 삼을 만했다면 고마우며 반가운 책입니다.

 

  헌책방 마실을 즐기면서 찍은 사진들을 그러모아 “책빛 사랑”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책사랑’도 ‘빛사랑’도 아닌 ‘책빛 사랑’입니다. 책으로 스며드는 빛을 사랑합니다. 책을 바라보는 빛을 사랑합니다. 책을 일구던 빛을 사랑합니다. 책을 읽는 빛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책을 읽습니다. 새책방에 가건 도서관에 가건 헌책방에 가건 대여점에 가건 책을 읽습니다. 내 집 책꽂이에서 꺼낸 책이건 동무네 집 책꽂이에서 빌린 책이건 그예 책을 읽습니다. 나는 헌책을 읽거나 새책을 읽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책을 읽습니다. 1950년에 나온 책도 책이고, 2010년에 나온 책도 책입니다. 1850년에 나온 책이든 1990년에 나온 책이든 ‘나온 해’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책 하나를 읽으며 내 가슴이 어여삐 빛날 수 있으면 흐뭇합니다. 나로서는 ‘새책’도 ‘헌책’도, 또 ‘비싼 책’도 ‘값싼 책’도 읽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내가 좋게 느끼는 책’을 읽습니다. 나로서는 ‘내가 사랑할 책’을 읽습니다.

 

  책 하나로 이루어진 빛을 느낄 수 있기를 꿈꿉니다. 책 하나로 이루어진 빛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땅 조그마한 책마을에 조그마한 씨앗 하나로 태어나려는 아리따운 책터에 ‘사랑씨’와 ‘꿈씨’와 ‘믿음씨’가 찬찬히 얼크러지면서 ‘삶을 빛내는 씨앗’ 하나 싱그럽게 맺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ㅎㄲㅅㄱ)

 


* 최종규
1975년에 인천 도화1동에서 태어남. 전남 고흥 동백마을 시골집에서 네 식구가 살아가며,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를 꾸림.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 《사진책과 함께 살기》,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뿌리깊은 글쓰기》,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책 홀림길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사랑하는 글쓰기》, 《생각하는 글쓰기》, 《헌책방에서 보낸 1년》, 《모든 책은 헌책이다》 같은 책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 경기 파주 책잔치 하는 동안에

   나들이 하실 수 있는 분은 마실해 주셔요.

 

.. 저희 식구는 5월 3일부터 5월 5일까지

   파주에서 지낼 생각입니다.

 

.. 5월 5일 14시에는, 모이는 사람이 제법 되면

   "헌책방과 책과 삶"이라는 주제로 '사진잔치 강연'을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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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5-0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남에서 파주까지 마실오시는군요.따남은 커서 괜찮겠지만 아드님은 아직 어린데 먼길을 가면 좀 힘들겠네요.된장님은 차가 없으신것 같으신데 설마 두 아이를 데리고 버스타고 기차타고 올라오시려면 좀 힘드실것 같습니당^^;;;

숲노래 2012-05-03 06:31   좋아요 0 | URL
모두 힘든 나들이입니다 @.@
에구...
 

사진 생각
― 사진과 책

 


  사진으로 엮은 책을 읽습니다. 사진이 아름답기에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나서 고요히 덮습니다. 한동안 다시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시 들여다보면서 마음이 뭉클합니다. 이윽고 고요히 덮고는 한동안 다시 잊고, 또 나중에 새삼스레 들여다보면서 가슴을 촉촉히 적십니다.

  글로 엮은 책에 곁들인 사진을 읽습니다. 글과 사이좋게 어울리는 사진은 아름답습니다. 글하고 동떨어진 채 멋스럽게만 보이는 사진은 밋밋합니다. 사진은 사진일 뿐인데 왜 사진을 사진답게 살리지 못하는가 싶어 슬픕니다. 글은 글일 뿐인데 왜 사진을 덧붙이려 하는가 싶어 안타깝습니다.


  사진에 붙인 말을 읽습니다. 사진을 북돋우는 말 한 마디는 놀랍도록 빛납니다. 사진에 군더더기로 붙인 말은 지겹습니다. 어느 글은 사진 하나를 더 빛내는 사랑이지만, 어느 글은 사진 하나를 치레하는 껍데기로 그칩니다.


  사진책은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사진책은 사진을 이야기하는 글로 엮은 책입니다. 사진책은 사진을 느끼며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맞아들이도록 이끄는 책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 옆에 자질구레하게 덧말을 붙이지 않습니다. 오직 그림으로 받아들이는 가슴이 되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켜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 또한 오직 사진만 덩그러니 보여줄 뿐, 이런 군말 저런 덧말은 바라지 말라고 입을 앙 다문 채 옆에 서서 조용히 바라봅니다.


  그림을 구태여 책 하나로 그러모아서 엮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림 한 장이 깊은 책이고 너른 이야기밭입니다. 사진을 굳이 책 하나로 갈무리해서 엮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고즈넉한 책이며 아리따운 이야기밭입니다. 글 한 줄 또한 따로 책 하나로 꾸려 내야 하지 않아요. 글 한 줄이 애틋한 책이요 사랑스러운 이야기밭입니다.


  사진을 책으로 묶는 까닭은 사진 한 장만 갈무리하면 ‘이 사진 한 장 태어난 때에 이 사진 한 장을 바라볼 수 있던 사람’ 말고는 더 사진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별에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헤아리면서 책으로 묶습니다. 먼 뒷날 새로운 삶을 일굴 아이들한테 ‘사진 하나로 빚은 빛 한 줄기’를 물려주고 싶어서 사진책을 엮습니다.


  온통 사진으로 채운 사진책이 싱그럽습니다. 사진 한 장 없이 글로 사진을 이야기하는 사진책이 해맑습니다. 사진이랑 글이 알맞게 얼크러지는 사진책이 향긋합니다. 숱한 사진들로 잘 엮은 사진책 하나는 푸른 넋을 일깨웁니다. 수수한 글발로 잘 묶은 사진책 하나는 고운 빛을 나눠 줍니다.  사진과 글이 오순도순 어깨동무하는 사진책 하나는 따스한 사랑으로 스며듭니다.


  지구별 사람들은 글책으로 삶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구별 사람들은 그림책으로 삶이야기 여는 길을 열었습니다. 지구별 사람들은 만화책으로 삶이야기 북돋우는 누리를 마련했습니다. 이제, 지구별 사람들은 사진책으로 삶이야기 일구는 기쁜 웃음과 눈물을 새로 보듬습니다.


  좋은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과 시원한 냇물과 기름진 흙에서 씩씩하고 우람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제 온몸을 바쳐 태어난 종이에 사진과 글이 알알이 맺히며 책 하나 새로 선보입니다.
 (4345.3.3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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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생각
― 사진과 사회

 


  신문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는 그릇 가운데 하나입니다. 맨 처음, 신문은 글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제 신문은 ‘사진 없는 신문’으로 나오리라고는 여길 수 없습니다. 이 나라 모든 신문은 어느덧 ‘사진 있는 신문’이 되었고, ‘사진을 보여주는 신문’으로 아주 바뀌기까지 합니다.


  사진 없이 글만 있는 신문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진 한 장 안 넣고 글만 넣은 신문을 사람들이 얼마나 즐거이 읽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바야흐로 사진이 없다면 신문이 아니라고 여길 만합니다. 학교나 학급에서 조그맣게 꾸리는 신문조차 사진을 넣습니다.


  사진이 쓸모 많기에 사진을 넣는다 할 만하겠지요. 그렇지만, 신문에 사진을 굳이 넣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사진을 넣어야 비로소 ‘신문글’을 잘 읽도록 돕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문에서 사진을 써야 한다면 ‘신문글 읽기를 돕는 사진’이 아닌 ‘신문사진으로서 읽을 사진’이어야 걸맞으리라 느낍니다. 곧, 이제 신문은 ‘신문글’과 ‘신문사진’과 ‘신문그림’으로 엮어야 한다고 느껴요.


  신문에 싣는 글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입니다. 이와 함께, 신문에 싣는 사진은 ‘따로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이 되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보여주기에 따로 신문에 깃들 만합니다. 대통령 얼굴이라든지 정치꾼 얼굴을 보여주는 노릇이라면 신문사진 노릇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진은 없어도 되는 사진이며, 처음부터 안 찍어도 될 사진입니다. 운동경기 소식을 들려줄 때에도 그래요. 야구선수이든 체조선수이든 농구선수이든, 이런 사람들 얼굴이나 몸매를 보여줄 까닭이 따로 없어요. 오직 ‘이 사진 하나로 새롭게 보여주거나 나눌 이야기’가 있을 때에 사진을 실어야 걸맞아요.


  오직 사진 하나로 이야기를 밝혀야 합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사진으로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며 ‘어떠한 이야기가 담겼구나’ 하고 읽으며 알아챌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글에 덩그러니 곁달리는 사진으로는 이 나라를 밝히지 못합니다. 글에 슬그머니 덧붙는 사진으로는 온누리 삶자락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글 한 줄이 사회를 바꾼다든지, 사진 한 장이 사회를 바꾸지는 않아요. 다만, 사회를 바꾸는 힘을 북돋우거나 부추기는 노릇을 할 수 있는데, 글 한 줄이나 사진 한 장이 사회를 바꾸는 힘을 북돋우거나 부추긴다 할 때에는 저마다 외따로 가장 깊고 가장 너르며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믿음직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 하는 오늘날이요, 누구라도 글을 쓴다 하는 요즈음입니다. 학자나 지식인이나 권력 계급만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먼 옛날 봉건 계급 사회 때처럼, 돈이나 이름이나 권력을 거머쥔 사람 아니고서는 붓을 쥘 수조차 없는 나날이 아닙니다. 어린이도 글을 쓸 수 있어요. 어린이도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학교 문턱을 안 밟아 보았어도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큰도시 아닌 두메 시골마을 할아버지도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이름난 예술쟁이만 사진을 찍으란 법이 없고, 손꼽히는 사진쟁이만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름나거나 손꼽히거나 대단하다거나 놀랍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빚는 사진이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사진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사회를 바꾸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는 않다는 소리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터에서 내 이야기를 옳게 깨닫고 곧게 담으며 즐거이 나눌 수 있다면, 바로 이렇게 담아 나누려는 사진 하나가 사회를 바꾸도록 이끄는 힘을 보여줘요.


  멋스러이 보이도록 찍는대서 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멋스러이 보인다면 그저 멋스러이 보일 뿐입니다. 놀랍게 보이도록 찍기에 사진이라는 이름이 알맞지 않습니다. 놀랍게 보이도록 하면 그냥 놀랍게 보일 뿐입니다.


  어떠한 글이든 스스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합니다. 스스로 즐겁게 누리는 삶이요, 스스로 즐겁게 나누는 사랑이면서, 스스로 즐겁게 빛내는 이야기일 때에, 비로소 글 스스로 문학이라는 자리에 함께 놓여요.


  사진은 사회를 비추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회를 담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회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글이 사회를 비추지 않으며, 글이 사회를 담지 않고, 글은 사회를 보여주지 않듯, 사진이든 그림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영화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으로 일구는 이야기가 사회를 비춥니다. 글로 엮는 이야기가 사회를 담습니다. 그림으로 빚는 이야기가 사회를 보여줘요.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이러한 갈래마다 어떻게 갈무리해서 어떻게 일구는가에 따라, 이들 이야기로 사회를 비추거나 담거나 보여줘요. 잘 찍은 사진이기에 사회를 비추겠습니까. 잘 쓴 글이기에 사회를 담겠습니까. 잘 그린 그림이기에 사회를 보여주겠습니까. 이야기를 일구며 사회를 비춥니다. 이야기를 엮으며 사회를 담습니다. 이야기를 빚으며 사회를 보여줘요.


  이리하여, 이야기를 가리거나 숨기면서 사회를 가리거나 숨기려 들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누르거나 짓밟으면서 사회 한켠을 누르거나 짓밟아 그늘이나 어둠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이야기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즐겁게 나눌 글도 그림도 사진도 태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이야기를 꽃피우지 못하게끔 제도권으로 꽁꽁 싸매고 입시지옥으로 꽉 틀어쥔 사회에서는 글도 그림도 사진도 주눅들거나 그만 시들고 맙니다.
 (4345.3.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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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 남기는 아련한 이야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545] 구룡성 탐험대(九龍城 探驗隊), 《大圖解 九龍城》(岩波書店,1997)

 


  《大圖解 九龍城》(岩波書店,1997)이라는 책을 보면서 홍콩에 있었다던 구룡성이라는 곳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햇볕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 집이 한둘이 아닌 수십 수백 수천이 된다면, 이러한 집에서 수십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에 이르는 사람이 바글거리며 살아간다면, 이러한 삶터에서는 똥오줌을 어떻게 내보내고 물은 어떻게 끌어들이며 전기는 어떻게 얻어 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이라면 내내 집안에 있어야 할 텐데, 햇볕을 쬐지 못하고 어두운 방에서 전깃불에만 기대어 약을 먹으며 몸을 살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반지하나 지하에 깃든 집이 있는 한국인데, 홍콩 구룡성은 반지하나 지하가 아니더라도 햇볕은커녕 바람 한 점조차 마실 수 없는 데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사람은 살아갔고, 아이를 낳았으며, 사랑을 빚었어요.


  이제 사라진 구룡성이라는데, 홍콩사람은 이곳 발자취를 적바림했을까요. 중국사람은 이곳 삶터를 얼마나 아로새겼을까요. 홍콩도 중국도 아닌 일본에서 구룡성을 찾아간 사람들이 내놓은 책 《大圖解 九龍城》는 참 놀랍고 대단합니다. 아무래도 일본사람은 홍콩 구룡성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일을 안타깝다고 여겨, 이렇게 커다란 책 하나로 남기려 했겠지요. 좋다거나 멋지다거나 하는 삶터가 아닌, 어찌 되었든 사람이 살아가던 터전이라는 대목에서, 이 홍콩 구룡성을 찬찬히 뜯어 살피면서, 사람이 스스로 이룬 터전을 곰곰이 돌아보려고 했겠지요.

 

 


  한국땅 인천에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있습니다. 인천 동구 송림1동과 송현1·2동 한켠에 있던 달동네 작은 집들을 싹 밀어붙인 주택공사에서 높직한 아파트를 올려세우면서, 예전 이 마을 자취가 어떠했는가를 몇 가지 남겨 지은 박물관입니다. 박물관에 남은 집 모양은 거의 ‘모형’입니다. 달동네 집들에서 뜯거나 남긴 간판이라든지 문살이라든지 조금 있기는 하지만, 거의 모형으로 새로 지었습니다. 인천에서 살던 지난날 이곳 박물관을 드나들며 곰곰이 헤아려 보았습니다. 박물관이라 한다면, 박물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달동네 살림집’ 몇 곳을 고스란히 남겨, 이 달동네 살림집을 드나들면서 돌아보도록 해야 비로소 박물관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하고. 벽도 지붕도 보일러도 부엌도 방도 온통 고스란히 남긴 골목집 몇 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그래도 박물관을 세웠으니 고맙다 여겨야 할는지 모르나, 남기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터가 아니라 모형을 따로 만들어 보여주는 터로 그친다면, 박물관을 짓는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요. 돌이키면, 박물관까지 짓는다 한다면, 예전 달동네 살림집과 마을 이야기를 찬찬히 아로새기는 책이라도 하나 있어야 옳습니다. 예전 달동네 사람들 모습을 담고, 달동네 살림집 모습을 담으며, 달동네 마을 한해살이를 찬찬히 보여주는 사진책과 글책과 그림책이 있어야 마땅해요. 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책을 갖추어 사람들한테 선보여야 옳습니다.

 

 


  다시금 《大圖解 九龍城》을 들춥니다. 《大圖解 九龍城》은 구룡성에 깃든 집을 모조리 훑었을까 궁금한데, 훑을 수 있는 만큼 샅샅이 훑으며 집 하나하나 어떠한 모양새요 살림새였는가를 그림으로 나란히 보여줍니다. 사진으로 보여줄 대목은 이곳저곳 사진으로 하나하나 담아서 보여주고, 그림으로 보여줄 대목은 ‘통 그림’을 써서 종이 두 쪽씩 펼치도록 하면서 보여줍니다.


  홍콩 구룡성에서 살던 사람들은 가난해서 이곳에서 살아야 했을까요. 이곳저곳에서 밀리고 쫓기며 구룡성으로 흘러들었을까요. 인천에 아직 곳곳에 많은 달동네처럼, 서울에 아직 곳곳에 남은 달동네처럼,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에 있을 달동네처럼, 이런 까닭 저런 까닭이 있어 사람들은 달동네로 천천히 스며들 테지요. 작은 집 작은 방을 얻어 조그마한 살림을 꾸릴 테지요. 목숨이 달린 동안 다시금 기운을 차려 살아가고자, 이 한 곳으로 시나브로 모여들 테지요.


  홍콩 구룡성 사람들한테도 사진기는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홍콩 구룡성 사람들은 스스로 어떤 사진을 구룡성에서 찍었을까 궁금합니다. ‘구룡성 탐험대’는 구룡성이 사라지기 앞서 이곳 발자취를 아로새기려는 사진을 찍었는데, 홍콩 구룡성 사람들은 제 보금자리였던 이곳에서 어떤 꿈 어떤 사랑 어떤 삶 어떤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았을까 궁금합니다.

 

 


  생일잔치 때에 사진을 찍었을까요. 아기가 태어났을 때에 사진을 찍었을까요.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을까요. 사랑스러운 옆지기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을까요.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을까요. 어떤 모습 어떤 삶자락 어떤 눈물 어떤 웃음 어떤 하루를 사진으로 찍었을까요.


  사진으로 한 장 찍으며 아로새기는 오늘 하루가 됩니다. 사진으로 한 장 남기며 가만히 돌아보는 어제 하루가 됩니다. 사진으로 한 장 옮기며 이듬날 새롭게 살아낼 기운을 북돋우는 하루가 됩니다.


  사진으로는 무엇을 할 만할까요. 살림집을 옮기는 날, 짐차에 꾸역꾸역 짐을 다 싣고 나서 덩그러니 텅 빈 방이나 집을 둘러보다가는 사진 한 장 찍는다면, 이러한 사진으로는 무엇을 할 만할까요. 무엇을 돌이킬 만할까요. 무엇을 되새길 만할까요.


  백 마디 말이나 천 마디 글보다 사진 한 장으로 더 깊거나 더 넓거나 더 아련하거나 더 애틋한 이야기를 빚을 만한가요. 깨끗함도 지저분함도 아닌, 그예 덩그러니 텅 빈 모습을 사진으로 옮기면서 무엇을 느낄 만한가요.

 


  오늘날 한국 곳곳에 높직하게 아파트가 올라선 데마다, 조금 아련한 옛날을 되새기면, 어느 곳이든 달동네 살림집이 줄줄이 있었거나 논밭이 있었거나 멧등성이가 있었습니다. 높직한 아파트가 올라서기 앞서 예전 삶자락을 누군가 사진으로 담았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예전 삶자락을 누군가 사진으로 담았다면, 왜 사진으로 담았을까요. 나중에 이 사진을 어디엔가 팔 수 있으니까? 나중에 이 사진으로 옛이야기를 아스라이 떠올릴 수 있으니까? 이곳 예전 모습을 나는 안다고 자랑할 수 있으니까? 사진 한 장조차 남기지 않으면 너무 쓸쓸하니까?


  값져 보이는 사진기를 갖춘 사람들이 언젠가 골목동네를 휘 쏘다니면서 ‘이곳은 곧 재개발로 사라진대. 사진으로 찍어 놔야 해.’ 하고 흘리던 말을 얼결에 곁을 스쳐 지나가다 들은 적 있습니다. 사라지는 삶터라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면, 사라지는 사랑도 사진으로 남기고, 사라지는 삶도 사진으로 남길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오늘 즐겁게 살아가는 나날을 사진으로 담고 싶습니다. 나로서는, 오늘 사랑스레 어깨동무하는 이웃이랑 동무를 내 좋은 살붙이하고 얼크러지며 사진으로 담고 싶습니다. 나로서는, 오늘 고맙게 누리는 내 좋은 보금자리를 기쁘게 사진으로 담고 싶습니다.


  《大圖解 九龍城》을 덮습니다. 이 사진책은 틀림없이 놀랍고 대단합니다. 다만, 내 가슴을 촉촉히 적실 만큼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지는 않습니다. 아마 누군가 구룡성에 깃들며 누린 사랑스러운 삶을 떠올리면서 ‘아름다우며 사랑스럽던 구룡성 이야기’를 사진으로 갈무리한 발자국을 언젠가 조용히 내놓을 날이 있겠지요. “大圖解 九龍城”이 아닌 “보금자리 구룡성”이나 “구룡성 이야기”나 “구룡성”이라는 이름이 붙는 사진책을 기다립니다. (4345.3.2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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