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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봄에 새로운 '사진이야기책'을 내놓을 생각으로 글을 씁니다. 읽어 보시고, 이래저래 도움말 베풀어 주소서. 고마운 도움말 하나를 얻어 책 하나 한결 알뜰히 일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사진책이란
  ― 삶을 밝히는 밑거름, 길을 이끄는 길동무



 ‘사진책’은 국어사전 올림말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맞춤법으로는 ‘사진 책’처럼 띄어서 적어야 바르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진책’을 한 낱말처럼 붙여서 씁니다. 왜냐하면 ‘이야기책’과 ‘그림책’은 일찌감치 한 낱말이었고, 그림을 그려 엮은 책인 ‘그림책’이든 글을 써서 엮은 책인 ‘글책’이든 노래를 지어 엮은 책인 ‘노래책’이든 사진을 찍어 엮은 책인 ‘사진책’이든 한결같이 책이요, 저마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른 결로 이야기를 일구어 담은 책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어 엮은 책이 사진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 한 장 없이 이루어지는 사진책도 있습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사진을 이야기하는’ 책일 때에도 사진책 갈래에 듭니다. 이리하여, 사진이 다문 한 장 깃들었어도 사진책이요, 사진 몇 장 살포시 담았어도 사진책으로 넣습니다.

 문학은 시와 소설과 수필과 희곡으로 나눈다고 합니다. 사진책은 작품모음과 화보와 사진이야기와 사진비평과 사진수필과 사진교재 들로 나눌 수 있고, 이밖에 숱한 갈래를 촘촘히 가를 수 있습니다. 사진책이라 할 때에는 으레 ‘작가가 내놓은 작품모음’ 한 가지만 떠올리곤 하지만, 사진작품을 모은 책만 사진책 갈래에 들지 않습니다. 지자체나 나라마다 지자체나 나라를 안팎으로 알리려고 내놓는 화보라든지, 올림픽이나 월드컵이나 촛불집회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아 엮은 화보라든지 얼마든지 사진책 갈래에 듭니다. 야구단이나 축구단에서 당신 구단에 몸담은 선수들 얼굴이나 경기 모습 들을 담아 내놓는 ‘팬북’이라는 책 또한 사진책 갈래에 듭니다. 학교나 회사가 스무 돌이나 쉰 돌이나 백 돌을 맞이했다면서 기리는 뜻에서 내놓는 ‘이십 년 사·오십 년 사·백 년 사’ 같은 역사책을 사진을 바탕으로 엮었으면 이 또한 남다른 사진책이 됩니다. 또한 졸업사진첩도 사진책이에요. 학교마다 해마다 쏟아내는 졸업사진첩은 한 학교를 다닌 모든 사람들 얼굴이나 몸차림 모습을 보여줄 뿐더러, 학교 안팎 모습을 들여다보도록 돕습니다. 제대로 못 엮은 따분한 졸업사진첩이라 할지라도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가 지나는 동안 새삼스레 지난 한 삶 발자국을 톺아보는 자료가 돼요.

 그림책 갈래에 드는 어린이책 가운데에도 사진책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쓰레기 산에 핀 꽃》(재미북스,2002)이나 《내 이름은 민들레》(소년한길,2007)는 사진으로 이야기를 엮어 마련한 어린이책이자 그림책입니다만, 다른 눈길로 바라보면 사진책 갈래에 듭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어린이책을 사진으로 엮는 일을 퍽 일찍부터 했습니다. 어린이들이 보는 도감이라든지 자연책이라든지 이야기책에 사진을 꽤 많이 써요. 어린이책을 내는 한국 출판사는 이와 같은 일본 ‘사진 어린이책’을 퍽 많이 옮기곤 합니다. 웅진출판사에서 1984년에 우리 말로 옮긴 ‘일본 아카네 쇼보’ 여든네 권짜리 《과학 앨범》은 사진으로 일군 놀라운 과학 전집이에요. 웅진출판사에서 1994년에 우리 말로 옮긴 ‘일본 가이세이사’ 서른네 권짜리 《세계의 어린이》 또한 사진으로 빚은 아주 알찬 인류학 전집입니다.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말하는 분들은 이러한 어린이책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만, 이들 ‘사진으로 일군 일본 어린이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사진 찍는 매무새라든지 넋이라든지 손길을 곰곰이 받아들이거나 배울 만하다고 느껴요.

 영국에서는 어린이책을 만드는 ‘D·K’라고 하는 ‘돌링 킨더스리’사에서 거의 언제나 사진으로만 이야기를 엮어 책을 내놓습니다. 이런 책들도 사진밭 사람들은 제대로 살피지 않는데, 어른이 보는 책에 사진을 넣든 어린이가 읽는 책에 사진을 넣든, 모두 어른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깊이 헤아리며 익혀 가다듬은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습니다. 더욱이, 여느 어른책이라면 ‘사진을 읽을 사람이 스스로 헤아리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할 테지만, 어린이책에 넣는 사진은 ‘이 사진을 읽을 어린이 누구나 꾸밈없이 헤아리고 아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처음부터 알뜰살뜰 찍어서 내놓아야 해요. 훨씬 땀을 들이고 더욱 마음을 기울여야 이루는 ‘어린이책 사진’입니다.

 다음으로, 사진이야기란 노익상 님이 내놓은 《가난한 이의 살림집》(청어람미디어,2010)이나 이용남 님이 내놓은 《어머니의 눈물》(민중의소리,2003)이나 권철 님이 내놓은 《우토로》(민중의소리,2005) 같은 책들입니다. 이러한 사진이야기는 다큐사진이라 할 수 있는 한편, 사람사진이나 삶사진이라 할 만합니다. 다큐사진이라 할 때에는 으레 사진이야기 자리에 깃들고, 모델이나 연예인을 담은 사진일 때에는 화보나 작품모음에 깃듭니다.

 사진비평이란 사진을 말하거나 사진책을 말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다른 어느 사진책보다 이 사진비평이 몹시 적습니다. 사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교수나 전문가가 아닌데,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든 섣불로 사진을 말하지 못합니다.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는 이 사진을 이렇게 보았어요.’ 하고 말해야 하고, ‘나는 이 사진이 이리하여 좋고 저리하여 슬퍼요.’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 하나를 놓고 온갖 이야기가 쏟아지면서 넋과 얼을 나누어야 좋습니다. 이야기를 넉넉하고 꾸준하게 주고받아야 우리네 사진밭이 알차게 자라납니다.

 우리들 살림집을 떠올려 보셔요. 집에서 식구들하고 말을 않는다면 집안이 어떻게 되나요. 집에서 식구들끼리 서로 칭찬을 해야 더 좋다지만, 잘못한 일을 잘못했다고 타이르거나 나무라지 않는다면 어찌 될까요. 마구 어지르거나 짓궂은 짓을 일삼을 때에 아무 소리 안 하거나 모르는 척을 해도 될는지요. 기쁜 일도 이야기하고 슬픈 일도 이야기할 집식구입니다. 사진밭을 일굴 일꾼이라면 ‘이 사진은 참 아름답네요.’라는 말과 함께 ‘이 사진은 참 아쉽군요.’라는 말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고, 이런 말을 나누어 온 발자국을 그러모을 때에 사진비평이 태어납니다.

 사진수필은 사진이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하고 어울려 태어나는 문학책입니다. 사진은 사진 그대로 넉넉히 문학이지만, 다른 문학하고 어우러 놓으면서 남달리 일구는 책이에요. 그런데 사진은 사진 그대로 문학임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따로 글줄이나 그림을 살포시 얹는 까닭은 사진 한 장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이 아닌데, 사진수필을 어여삐 엮지 못하곤 합니다. 《골목 안 풍경》을 내놓은 김기찬 님이 돌아가신 뒤, 김기찬 님 사진에 글을 덧다는 틀로 해서 나오는 책이 꽤 많습니다. 이를테면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이가서,2006)나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샘터사,2005)인데, 모양새는 퍽 그럴싸하다 싶으면서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러한 책들은 글은 글대로 옹글지 못하거나 사진을 사진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아귀가 안 맞기 때문입니다. 글이 모자라거나 사진이 어수룩하기에 아귀가 안 맞을 일이란 없습니다. 이 사진수필에서는 무엇보다 사진이 한복판을 차지하는데, 사진을 옳게 읽지 않고 ‘추억’이나 ‘애틋한 그리움’을 떠오르도록 이끌려는 생각으로만 끼워맞추기를 하고 말아, 정작 ‘사진을 찍은 사람이 나타내려 하던 넋이나 얼’하고 동떨어집니다. 김기찬 님 골목 사진 한켠에는 틀림없이 ‘추억’이나 ‘애틋한 그리움’이 있기도 하지만, 김기찬 님 골목 사진은 오로지 추억으로 담은 사진이 아니에요. 이곳에 이 사람들이 오늘 하루도 어여삐 살아가는 자락과 무늬와 결과 내음과 빛깔을 곱다시 맺어 놓은 열매가 《골목 안 풍경》이에요.

 마지막으로 사진교재인데, 케네스 코브레 님이 엮은 《포토저널리즘》(청어람미디어,2005)이나 필립 퍼키스 님이 내놓은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눈빛,2005) 같은 책입니다. 임응식 님이 엮은 《사진사상》(해뜸,1986) 같은 책 또한 사진교재로 넣을 수 있습니다. 《사진사상》은 나라밖 손꼽히는 사진쟁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진에 담은 넋을 풀이하는데, 사진을 처음 만나거나 사진을 바야흐로 익히려 하는 새내기한테 길잡이처럼 베푸는 책이기 때문에 다른 갈래보다 사진교재 갈래에 넣을 때에 잘 어울립니다.

 사진책 갈래를 더 잘게 나눈다면 이밖에 숱한 갈래를 더 나눌 수 있습니다. ‘보도사진책’을 나눌 수 있고, ‘상업사진책(모델사진)’이라든지 ‘동인지’라든지 ‘사진잡지’라든지 ‘여행사진책’이라든지 ‘연감’이나 ‘도감’을 들어 볼 수 있어요.

 아직 사진책 갈래를 나눈 사람이 딱히 없을 뿐더러, 알맞게 나누었다 싶은 이야기를 찾아보기란 어렵습니다. 저는 저대로 제가 좋아하는 사진책을 한 권 두 권 장만하여 갈무리하는 동안 ‘사진책을 이렇게 나누어 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다른 분들대로 저마다 좋아하는 사진책을 하나둘 마련하여 그러모으는 가운데 ‘내 나름대로 이렇게 나누어 보자’ 하면서 나누면 됩니다. 도서관 분류법대로 나누어야 하는 사진책은 아니요, 남들이 하는 대로 그예 따르기만 할 내 삶이 아니니까요.

 사진책을 얼추 천 권쯤 건사했다 싶을 무렵부터 이 사진책들을 책꽂이에 차근차근 나누어 꽂아 보셔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진쟁이가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진쟁이’ 이름을 따로 한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가 꾸리는 사진책 도서관에서는 좀 성기기는 하지만 ‘임응식’이나 ‘전민조’나 ‘김기찬’이나 ‘구와바라 시세이’나 ‘세바스타앙 살가도’ 같은 갈래를 따로 나눕니다. ‘로베르 드와노’나 ‘안셀 아담스’ 같은 갈래도 마련해 놓습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 작품모음을 차곡차곡 그러모으다 보면, 이분이 어떠한 사진길을 걸었고, 사진밭을 어떻게 일구며, 사진눈길이 어떠한가를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좋은 모습을 익히는 가운데 슬픈 모습을 느낍니다. 훌륭한 손길을 살피는 가운데 씁쓸한 뒷모습을 읽습니다. 사진책이 이천 권을 넘고 삼천 권을 넘어서며 자꾸자꾸 늘어나는 동안 ‘한 번 읽은 사진책’을 열 번 백 번 즈믄 번 다시 넘깁니다. 이때에는 되풀이해서 보는 동안 새삼스레 맞아들이거나 비로소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있어요.

 사진을 비평하는 분이나 그냥저냥 사진이 좋아서 들여다보는 분이나 엇비슷하게 잘못을 저지른다 할 만한데, 다들 사진 한 장을 너무 얼핏 스쳐 읽기만 합니다. 나중에 다시 들여다보지 않기까지 합니다.

 참말 좋은 사진이라면 오래도록 자꾸 들여다보아야 하고, 더없이 훌륭한 사진이라면 예배당 다니는 분들이 ‘똑같은 기도글’을 아침·낮·저녁으로 끝없이 되풀이할 뿐더러 달달 외우며 살아가지만 거룩한 뜻이 날마다 새롭다고 말씀하시듯, 똑같은 사진을 들여다보는 내 마음이 언제나 새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때마다 새삼스러우며 놀라운 선물을 받을 수 있어야 해요.

 새롭지 못하거나 선물을 얻지 못한다면, 아직 내 눈이 영글지 못한 탓이거나 내가 좋아한다는 사진이 제대로 영글지 못한 탓입니다. 두 가지 모두일 수 있고요.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구나 자라는 사람입니다. 열다섯 살에도 자라고, 스물다섯 살에도 자라며 쉰다섯 살이나 일흔다섯 살에도 자랍니다. 제가 ‘내 책을 그러모아 내 살림돈으로 연 도서관’에 전민조 님이라든지 구와바라 시세이 님 같은 분들 갈래를 따로 마련한 까닭은, 이분들 사진을 들여다보면 나이 스물이나 서른에만 온힘 바쳐 사진밭에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이 마흔이나 쉰에도 한결같았고, 나이 예순이나 일흔에도 한결같습니다. 흔한 말로 ‘어르신 대접’을 받을 만하다 싶어도 스스로 어르신 대접을 손사래칩니다. 당신들이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노상 사진기를 단단히 움켜쥐어 ‘현장을 누벼야’ 하고, ‘사진 한 장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로 일하는 사진쟁이만 이렇게 나이 예순이나 일흔에도 나이 열이나 스물이나 서른과 같은 마음결이어야 하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즐기는 우리들 또한, 내 나이가 열다섯이든 서른다섯이든 쉰다섯이든 언제나 싱그러우며 푸른 넋을 건사하면서 아름다운 삶길을 걸어야지 싶어요. 이러면서 사진책 하나 가슴에 안는다면, 이 고운 사진책은 내 삶을 곱게 일구는 밑거름이 되거나 길동무가 되어 줍니다. (4343.1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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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숩게 껴안을 내 이웃과 벗과 살붙이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2] 《북한동포의 일생》(국제문화사,1987)


 사진책은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책으로 엮인 사진을 따스히 돌아보거나 사진이 묶인 책을 포근히 보듬을 고운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따사로이 감싸며 책은 책대로 넉넉히 헤아릴 맑은 사람을 바랍니다.

 아이는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사랑을 담아 따스히 돌보거나 어깨동무할 고마운 어버이를 기다립니다. 믿음을 실어 넉넉히 껴안거나 손잡고 놀 동무를 바랍니다.

 따순 손길은 따순 삶에서 비롯합니다. 입으로 벙긋벙긋한다고 따뜻할 수 있는 삶이나 손길이 아닙니다. 몸으로 부대끼며 따뜻할 삶입니다. 머리에 앎조각을 넣는다고 따스함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가슴에 애틋함을 품어야 비로소 따스한 넋을 북돋웁니다.

 우리 집 아이가 제 아버지하고 더 놀고 싶어 우산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아버지는 바삐 길을 나서야 하는데, 이모저모 짐을 챙긴 다음 집을 나설 무렵 우산을 함께 챙기려 하니 우산을 붙잡고 씨익씨익 웃습니다. 도시처럼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 시골인 까닭에,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를 타려면 버스 타는 데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조금 실랑이를 하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싶어 아이가 우산을 갖고 놀라고 해야겠다 생각하며 부랴부랴 집을 나섭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우산을 갖고 더 놀지 않고 나가 버리니 엉엉 웁니다. 엉엉 울며 우산 가져가라고 제법 멀리까지 좇아 나옵니다.

 누군가 ‘아이가 엉엉 우는 모습’만을 크게 잡아당겨 사진 한 장 찍었다면 이 사진만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아이랑 아빠가 우산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놓으면 이 사진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무엇을 살피거나 헤아릴는지 궁금합니다. 치고박는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 어느 한쪽이 때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는데 정작 때린 쪽은 딱 한 번 때렸을 뿐이고 숱하게 얻어맞아 나자빠졌다면, 이 사진을 보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품을는지 궁금합니다.

 북녘사람은 남녘사람하고 견주어 무척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모든 북녘사람이 가난하거나 힘겹게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남녘사람은 북녘사람하고 대면 참 넉넉하며 즐겁게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모든 남녘사람이 넉넉하거나 즐겁게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관계기관에서 사진을 얻어’서 엮었다고 하는 사진책 《북한동포의 일생》은 1987년 9월에 나옵니다. 1987년 9월이라면 무척 어수선하다 싶은 때라 할 수 있지만, 다른 눈길로 바라보면 비로소 군사독재 울타리를 벗어내는 때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한테는 기득권과 정권이 아슬아슬한 때이며, 누군가한테는 숨통을 트며 꽁꽁 닫힌 입을 조금이나마 열 수 있는 때입니다.

 ‘관계기관 사진으로만 엮은’ 《북한동포의 일생》은 책이름 그대로 북녘사람이 보내는 한삶을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사진책에 실린 사진으로 북녘사람을 바라보면 하나같이 불쌍하고 딱하며 안쓰럽습니다. 모두들 안타까우며 슬프고 고달픕니다.

 책을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그래요, 북녘사람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간다는데, 북녘사람 삶이 이렇다면 우리들 남녘사람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북녘사람 터전이 이토록 쪼들린다면 우리들 남녘사람은 어떡해야 하나요.

 남녘과 북녘이 손을 맞잡고 모든 총칼과 탱크와 전투기와 군함을 녹여 호미와 낫과 쟁기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군인들이 쳐 놓은 쇠가시울타리와 지뢰밭을 허물어 논밭으로 바꾸며, 오순도순 지낼 조촐한 살림터와 마을을 일굴 수는 없는가요.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공장이나 더 빨리 달릴 찻길과 기찻밀 말고, 스스로 조용하며 아름다이 살아갈 예쁜 마을을 온누리 곳곳에 마련할 수는 없을는지요.

 사진을 찍는 이라 한다면, 내 사진 한 장에 꽃씨 하나와 같은 마음을 심어 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이라 한다면, 내 그림 한 장에 열매 하나와 같은 가슴을 나누어 놓으면 무척 기쁘겠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이라 한다면, 내 글 한 줄에 구름 하나와 같은 넋을 실어 본다면 아주 예쁘겠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깎아내리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여 어깨동무할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로 거듭나면 반갑겠습니다. 서로 총칼을 겨누며 해코지하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은 털고, 나란히 어깨를 겯고 씩씩하며 튼튼하게 놀이와 일을 즐기는 이웃과 동무로 사귈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글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림에는 기운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찌우는 기운이 있습니다. 사진에는 꿈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아가도록 하는 꿈이 있습니다. (4343.9.15.물.ㅎㄲㅅㄱ)


― 북한동포의 일생 (관계기관 자료제공,국제문화사,1987.9.25./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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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이야기 원고를 지난달에 하나 마무리지은 다음 한 달 남짓 사진책 이야기 쓰기를 쉬었다. 이 원고를 책으로 내줄 곳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제 잘 쉬었으니 세 번째 원고를 써야겠지. 세 번째 원고를 쓰기 앞서, 검색이 안 되는 사진책 이야기를 걸쳐야겠다.)


 사랑으로 이루는 삶과 사진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8] 김동규, 《김동규 사진집》(서울시립대학교,2001)



 낮에 인천에 볼일이 있어 식구들이 함께 다녀올까 했지만, 푹푹 찌는 무더운 날씨에 세 식구가 함께 먼길을 움직이자니 썩 좋지 않을 수 있어 멀리는 가지 않고, 가까운 이웃마을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느티나무가 우람하게 자라 퍽 많은 사람들한테 그늘을 베풀어 주는 버스역으로 가서 읍내 버스를 기다립니다. 토요일 아침이어서인지 마을 어르신들이나 마을 안쪽에 깃든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제법 모여 있습니다. 어른 두 사람 버스삯은 2100원이고, 광벌에서 음성 읍내로 가는 데에는 이 마을 저 마을을 거쳐 10분입니다. 버스로는 고작 10분이니, 우리한테 자가용이 있어 자가용으로 이 길을 달렸다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겠지요. 하기는, 자전거를 타고 읍내를 다녀올 때에 고개 넘어 다니는 데에 20분 즈음 걸립니다. 가장 빠르기로는 자가용이지만, 시골버스를 기다리며 타도 괜찮고, 자전거를 타고 낑낑거리며 고개를 넘어 오가도 좋습니다. 무엇보다, 자가용으로 달리면 너무 빨리 씽씽 지나치며 마을을 제대로 살필 수 없습니다. 시골버스는 천천히 달리니 그럭저럭 마을 구경도 해 보는데, 자전거를 달리며 마을을 살필 때만큼 차근차근 돌아볼 수 없습니다. 가장 좋기로는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 오가는 길입니다. 퍽 힘들기는 할 테지만 아이가 어느 만큼 커서 엄마나 아빠한테 안기거나 업히지 않고 다닐 수 있을 때에는 한 시간 남짓 걸어 읍내로 마실을 다녀와도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읍내 마실을 하며 목에는 사진기를 걸어 놓습니다. 읍내 사람들한테는 늘 같은 모습일 터이고, 저 또한 이 마을을 여러 해 오가며 들여다보고 있자니 여러 해째 늘 같은 모습이라 굳이 사진으로 담을 만한 모습이 없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째 늘 같은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서울 같은 큰도시처럼 미친 듯한 막개발 바람이 이런 시골 읍내까지 불지는 않는다지만, 시골에도 개발 바람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 집하고 가까운 다른 읍내인 무극으로 가 보면, 이곳도 꽤 깊은 시골 읍내임에도 새로 올라선 아파트가 마을에 수두룩하고, 일산이나 분당만큼은 아니지만 무척 넓은 자리에 꽤 높은 아파트를 새로 짓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참 무섭도록 무시무시하게 아파트 공사가 시골 읍내까지 파고들어요. 서울 강남하고 고속도로로 이으면 퍽 가깝고 땅값 싸며 공기와 물이 좋으니, 충청북도 시골자리까지 서울에서 돈 좀 있다는 이들 아파트 투기가 퍼지는구나 싶어요.

 이리하여 음성 읍내 곳곳을 두 다리로 누비며 사진을 찍습니다. 인천에서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듯 음성 읍내에서도 읍내 골목을 오가며 사진 한 장 두 장 담아 봅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뻔하다’고 여길 만한 시골 살림집들 모습을, 또는 읍내 살림집들 모습을 사진으로 차곡차곡 갈무리하는 사람은 이 나라에 거의 아무도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일본으로 여행을 가거나 프랑스로 나들이를 가거나 스페인으로 순례를 가는 이들은 이들 나라 여느 살림집 모습을 사진으로 신나게 찍으면서 ‘이야, 참, 아름답구나!’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정작 이 나라 시골 곳곳에 깃든 작으며 곱고 어여쁜 살림집을 바라볼 때에는 ‘에이, 참, 꾀죄죄하구나!’ 하고 여기며 ‘이런 낡은 집 얼른 안 헐고 뭐 한담!’ 하고 느끼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나라 여행꾼을 비롯한 숱한 사람들은 이 나라 여느 살림집이 여느 마을마다 어연번듯하게 뿌리내리며 고운 숨결 나누고 있음을 못 느끼거나 안 바라보고 있구나 싶습니다.

 세 시간 남짓 읍내를 돌고 읍내 중국집에서 바깥밥을 사먹고 나서 우리 산골마을 집으로 돌아옵니다. 저녁에 큰길가에 있는 보리밥집 쪽으로 찾아온 서울 손님이 있어 얼굴이라도 보려고 갔더니, 예전에 이 산골마을에서 살 때에 이웃하며 지내던 상준 씨네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엄마 품에 안긴 갓난쟁이가 어느새 큰 아이로 자랐습니다. 이제 스물넉 달째 맞이하는 우리 딸아이는 “언니!” 하고 부르며 달려들고, 옆에서 함께 노는 상준 씨네 셋째한테는 “오빠!” 하고 부르며 달려듭니다.

 상준 씨네 작은 아이 둘이랑 살짝 떨어져 혼자 놀던 상준 씨네 큰 아이는 우리 아이 엄마가 고무줄로 별 모양 만들기를 하니 가까이 다가와 요모조모 물으며 배웁니다. 시골마을 네 아이가 시골 밥집 마당가에서 복닥이며 놉니다. 살짝 나온 마실이라 빈몸으로 나올까 하다가 사진기를 챙겼는데, 네 아이 복닥이는 모습을 무척 재미나게 담을 수 있습니다. 사진기 안 챙겼으면 속으로 얼마나 답답해 했을까요. 네 아이가 물놀이를 하고 고무줄놀이를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너희 넷이 앞으로 열 해나 스무 해나 서른 해 뒤에 오늘 찍은 사진으로 조금은 남다른 지난 삶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 생각한다기보다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내내 이런 느낌이 몽글몽글 샘솟습니다.

 아침부터 낮잠 거의 없이 놀던 아이는 해가 떨어지고 어두워지니 몹시 힘들어 하며 이내 곯아떨어질 듯하지만, 이러면서도 엄마한테 달라붙어 떼를 씁니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이 닦고 투정 좀 부리다가 새근새근 잠듭니다. 잠든 두 식구를 조용히 바라보는 아이 아빠는 아침부터 다시금 꺼내어 들추고 있는 묵은 사진책 하나를 곰곰이 되새깁니다. 시중 책방에 나온 적이 없을 뿐더러, 시중 헌책방에서조차 만날 길이 거의 없는 사진책 가운데 하나인 《김동규 사진집 1954∼1976, 1998》을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을 내놓은 김동규 님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건축공학과 교수로 일하다가 2001년 4월에 정년퇴임을 합니다. 김동규 교수는 여느 교수들이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을 내는 흐름하고는 다르게 ‘정년퇴임 기념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칭찬하는 글’을 잔뜩 받아 살짝살짝 우쭐거리는 논문집이 아닌, 당신 스스로 당신 한길을 걸어오는 동안 당신 삶과 넋을 크게 건드리거나 움직인 사진을 알뜰히 모아 책 하나로 여미어 내놓았습니다.

 사진학과에 있던 교수가 정년퇴임을 한다 하더라도 이런 사진책을 내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니, 제법 드문 일입니다. 사진학과 학생들이 졸업 사진책을 내는 일은 있으나, 사진학과 학생들 졸업 사진책은 아직 학생들 스스로 ‘사진하는 마음’이 제대로 영글지 않은 가운데 어느 만큼 뽐내는 느낌이 짙어 썩 달갑거나 내키지 않곤 합니다. 스스로 무르익거나 스스로 고개숙일 줄 아는 가운데 아름다이 일구어 온 사진삶을 담은 ‘사진학과 대학생 졸업 사진책’은 이 나라에서는 좀처럼 나오기 어렵습니다.

 사진삶이라고 해서 반드시 마흔 해를 찍었다든지 쉰 해를 찍었다든지 해야 무르익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꼭 열 해만 찍었든 이제 다섯 해째 찍었든 겨우 두 해를 찍었든, 나 스스로 걸어온 사진길을 나 스스로 당차고 씩씩하고 즐겁게 갈무리했다면, 이만 한 깊이와 너비로 무르익혀서 사진책 하나로 그러모으면 됩니다.

 사진책 《김동규 사진집 1954∼1976, 1998》 끄트머리에 김동규 교수님 쪽글이 몇 달립니다. 이 쪽글 가운데 퍽 오래된 이야기 하나 눈에 뜨입니다. “‘이 眞寫 자네와 나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보내는 것이네.’ 이것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한 교우가 나에게 준 중학교 수험용 사진의 뒷면에 연필로 적어 넣은 글이다. ‘眞寫’라고 앞뒤를 바꾸어 써 주었기 때문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후에 대학의 전공인 건축에도 관련이 되어 사진을 만져 보게 되면서 ‘眞寫’가 과연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眞’이 앞서야 한다면 ‘寫’는 저 뒤로 밀려가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영어로는 ‘포토그래피’라고 했으니 빛의 그림이라는 말이 된다. 물론 빛으로 비추면 진실이 드러나겠지만 명백한 진실 말고도 暗默의 진실도 있을 것이니, 사진이란 우리 말이 더욱 그럴듯하다. 또 한편 생각해 보면, 사진은 진실만이 아니고 거짓을 거짓 그대로 거짓없이 묘사하는 것이라고 할 때 포토그래피라는 서양말이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다(1988.1.신동아 수필).” 1936년에 태어난 김동규 님이니, 국민학교를 마칠 때라면 1950년 무렵이었겠군요. 이때에 증명사진 한 장은 얼마나 비싸고 드문 사진이었을까요. 오늘날하고는 견줄 수 없는 값과 뜻이 있는 작은 사진 하나였겠지요. 이제 막 중학생이 되려 했다는 동무는 사진 한 장을 선물로 건네며 ‘진사’라는 말을 썼는데, 한자로 말놀이를 했다는 느낌이 아닌, 사진 하나에 삶 하나를 깃들이려는 살가운 마음결을 나누려 했다는 느낌입니다. 날이 갈수록 ‘사진’이라 말하는 사람은 드물고 ‘포토’라 말할 뿐 아니라, ‘사진기’라 말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카메라’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기계이니 ‘사진기’이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니 ‘사진가’입니다만, 다들 영어로 멋부리듯 ‘카메라’요 ‘포토그래퍼’요 뭐요 하고 떠들기에 바쁩니다. 이러는 가운데 ‘카메라’를 읊는 이들 스스로 ‘카메라’가 무슨 뜻이 있는 물건인지 살피지 않으며, ‘포토그래퍼’라 내세우는 이들 스스로 ‘포토그래퍼’가 어떠한 값어치를 나누는 사람인지 돌아보지 않습니다.

 정년퇴임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더없이 조용하게 마련해서 내놓은 《김동규 사진집 1954∼1976, 1998》에 실린 사진을 새삼스레 되넘깁니다. 풀집이 있는 수원 화성 길거리,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올리는 1970년대 서울 시내, 떠들썩한 관광상품으로 굴러떨어지기 앞서 호젓하며 수수한 중국인거리, 1950년대 여느 살림집 안팎 모습이 알뜰살뜰 담겨 있습니다.

 어느 사진 하나 티내는 모습이 없습니다. 어느 사진 하나 뽐내는 느낌이 없습니다. 어느 사진 하나 꾸미는 겉치레가 없습니다. 어느 사진 하나 콧대 높은 얼굴이 아닙니다. 살며시 웃음을 띠며 들여다볼 만한 사진입니다. 소담스러운 기록물이라서 뜻깊은 사진이 아닌, 바로 우리들 여느 사람 누구나 보내온 삶자락을 사진쟁이 스스로 이 땅에서 당신들과 똑같이 이웃으로 지내는 가운데 즐기고 마주하고 어깨동무했다고 하는 삶자락으로 옮겨냈기에 사랑스러운 사진입니다.

 서울시립대학교 건축공학과에서 김동규 교수님한테서 학문을 배운 이들은 이 정년퇴임 사진책을 들추면서 건축공학이라는 학문과 직업에 무엇을 담고 무엇을 나누며 무엇을 즐겨야 하는가를 한 가지쯤이나마 느끼거나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4343.8.1.해.ㅎㄲㅅㄱ)


― 김동규 사진집 1954∼1976, 1998 (김동규,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2001/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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