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 사진으로 걷는 길
 ― 유럽·미국·일본 아닌 한국에서 사진삶

 


 내가 유럽에서 태어나 사진길을 걸었다면 어떠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마 유럽 여러 나라 사진책을 두루 살피면서 사진삶을 일구었겠지요. 때로는 미국 사진책을 살피고 때로는 일본 사진책도 보기는 할 테지만, 유럽에서 나고 자란 나는 ‘유럽 눈길로 사진을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내가 미국에서 태어나 사진길을 걷는다면 이와 비슷하리라 느낍니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진책을 고루 살피면서 사진삶을 일굴 텐데, 때때로 유럽 사진책을 들추고 가끔 일본 사진책을 살피겠지요. 미국에서 나고 자란 나라면 ‘미국 눈길로 사진을 마주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일본에서 태어나 사진길을 걷는다면 좀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사진책에다가 일본에서 옮겨 펴내는 유럽과 미국 어마어마한 사진책을 잔뜩 볼 테니까요. 일본에서 나고 자란 나일 때에는 ‘일본 눈길로 사진을 받아들이기’ 마련일 터이나, ‘일본과 지구별 눈길을 아울러 갖출’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사진길을 걷습니다. 유럽도 미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입니다. 한국에서는 일본처럼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사진책’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처럼 ‘유럽과 미국 사진책을 어마어마하게 옮겨 펴내는 일’도 없습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책이나 강의를 살피면 으레 ‘유럽과 미국에서 굵직하게 이름을 남기거나 날리는 몇몇 사람들 사진’ 울타리에 갇힙니다. 한결 깊거나 한껏 너른 사진누리를 이야기하거나 다루지 못해요. 그렇다고 한국하고 가까운 일본 사진책을 찬찬히 살피는 문화나 제도나 시설 또한 없습니다.

 

 이래저래 돌아보면 안타깝거나 슬프거나 모자란 모습투성이입니다. 그러나, 나는 주눅들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만큼 이 아픈 모습을 남김없이 느끼며 바라볼 만합니다. 이 아프며 슬픈 모습을 고스란히 받아먹으면서, 내 나름대로 헌책방과 새책방을 뒤져 ‘유럽과 미국과 일본에서 나온 온갖 사진책’을 스스로 장만해서 읽습니다. 도서관에 없는 사진책이니까 나 스스로 내 돈을 그러모아 장만해서 읽습니다. 한국에서 옮겨지는 ‘세계사진역사 다룬 책’에서는 몇몇 사진쟁이 이름만 끝없이 되풀이할 뿐이니, 나 스스로 ‘세계사진역사 다룬 책’에 이름 안 실리는 수많은 사진쟁이들 꿈과 사랑은 어떤 이야기로 나타났을까를 그리며 ‘안 알려졌다고 하는’ 사진책들을 주섬주섬 그러모읍니다.

 

 프랑스로든 영국으로든 독일로든 이탈리아로든 사진을 배우러 떠날 만합니다. 미국으로든 일본으로든 사진을 배우러 갈 만합니다. 사진이 태어난 곳에서 사진을 마음껏 누릴 만합니다. 사진을 빛내는 곳에서 사진을 실컷 맛볼 만합니다.

 

 그리고, 사진이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는 이 나라 한국에서 사진삶을 내 깜냥껏 일굴 만합니다.

 

 꽃이 피기 어려운 춥고 메마른 겨울이라 하더라도 곧 새봄이 찾아오리라 믿으며 튼튼한 겉옷을 입고 따순 날씨 기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 새눈처럼, 나는 내 슬기를 빚고 내 넋을 가다듬으면서 스스로 꽃이 되도록 힘쓸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사진꽃으로 피어날 사진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내가 유럽이나 미국이나 일본에서 태어나 사진길을 걸었어도, ‘더없이 좋은 사진누리’에서 ‘사랑 가득 담긴 새로운 사진꽃’을 헤아릴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서도 ‘스스로 사진꽃이 되자’ 하는 다짐을 못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좋은 터전이란 없고, 더 빛나는 뜻은 없습니다. 오늘 하루를 아낄 수 있는 사랑이라면 넉넉합니다. 오늘 하루를 누릴 수 있는 사랑이라면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이란 더 값진 장비로 빚는 예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진이란 값싼 장비이든 값진 장비이든, 내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손에 쥔 사진기 하나로 바로 오늘 이곳을 즐거이 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 어여쁜 아이들이 웃습니다. 찰칵, 사진 한 장 찍습니다. 내 고운 옆지기가 뜨개질을 합니다. 찰칵, 사진 두 장 찍습니다.

 

 ‘세계사진역사 한켠’에 우리 집 어여쁜 아이들 사진이 굳이 담겨야 하지 않습니다. ‘한국사진예술 한구석’에 내 고운 옆지기 사진이 꼭 실려야 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삶을 담는 사진일 때에 좋습니다. 내가 누리는 삶을 나누는 사진일 때에 빛납니다. 사진은 빛을 담는 사랑입니다. 사진은 그림자를 빛내는 삶입니다. (4345.2.2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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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2-27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사진을 찍으려면 먼저 아름다운 마음이어야 하는 것. 당연한 건데 새삼 느낍니다. ^^

숲노래 2012-02-27 20:28   좋아요 0 | URL
가장 쉽고 마땅한 생각이지만,
가장 쉽고 마땅해서
으레 잊는 듯해요..
 


ㄷ. 사진으로 걷는 길
 ― 사진을 만든 사람

 


 사진을 만든 사람은 역사에 이름이 남습니다. 이이는 프랑스에서 특허권을 냈고, 이 특허권은 프랑스 정부에서 사들인 다음, 누구나 이 ‘새로운 재주’를 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글은 누가 맨 처음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림은 누가 맨 처음 만들었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글이나 그림도 어떤 특허가 있었을까 모르겠습니다만, 돌로 된 벽이나 나무판이나 종이에 아로새겨 오래도록 남도록 하던 글이나 그림은 누가 맨 처음 만들었을까 궁금합니다.

 

 사진은 사진기라 하는 연장이 있어야 찍습니다. 글은 연필이라 하는 연장이 있어야 씁니다. 그림은 붓이라 하는 연장이 있어야 그립니다. 사진기랑 연필이랑 붓이랑 연장 쓰임새가 다르다 여길 수 있을 테지만, 저마다 연장을 써서 무언가 새로 빚는다는 대목에서는 모두 같습니다. 연장이 없이는 글도 그림도 사진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연필로 빚는 글은 ‘문학’이라는 자리를 마련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붓으로 빚는 그림은 ‘회화’라는 자리를 마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진기로 빚는 사진은 어떤 자리를 마련해 온갖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맨 처음 사진기가 태어났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진을 찍는 연장은 값이 그리 싸지 않습니다. 품이 제법 듭니다. 사진기는 1/100초이든 1/1000초이든 붙잡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붙잡은 모습을 종이에 앉히기까지 훨씬 긴 겨를과 많은 품을 들여야 합니다. 종이에 적바림하면 태어나는 글이나 종이에 그리면 나타나는 그림하고는 적잖이 다릅니다.

 

 한겨레 살아가는 이 나라를 생각해 봅니다. 한반도라 하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한반도를 넘어 만주나 일본이나 러시아나 중앙아시아로 나아가 살아가는 사람한테 사진이란 어떤 삶이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돌이켜 봅니다. 여느 터전에서 여느 살림을 꾸리던 여느 사람들은 사진을 얼마나 즐기거나 누렸을까 곱씹어 봅니다. 여느 터전 여느 살림 여느 사람들은 사진뿐 아니라, 글이나 그림은 얼마나 즐기거나 누렸을까 헤아려 봅니다.

 

 사진은 사진기를 장만해야 즐기거나 누린다 할 텐데, 그림이라 해서 누구나 쉬 즐기거나 누리지 않습니다. 글이라 해서 아무나 쉬 즐기거나 누리지 않아요. 지난날 한겨레 거의 모든 사람은 흙을 일구어 살림을 돌보았는데, 이들 가운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 사람조차 매우 드물거나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는 사람뿐 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못 남겼다는 사람까지 샅샅이 훑더라도 ‘한겨레 거의 모두를 이루던 흙일꾼’ 가운데 글 문화나 그림 문화를 즐기거나 누린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1950년대에는 어떻다 할 만할까요. 1970년대와 2000년대는 또 어떻다 할 만할까요. 2010년대에는 시골 여느 흙일꾼이 글 문화를 누린다 할 만할까요. 2020년대나 2050년대에는 도시 공장 일꾼이 그림 문화를 누린다 할 수 있을까요.

 

 글도 그림도 사진도 여느 터전 여느 살림 여느 사람한테는 너무 머나먼 이야기라 할는지 모릅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여느 터전하고 동떨어지거나 여느 살림하고 등지거나 여느 사람하고는 아득히 먼 이야기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제 사진은 여느 터전 여느 살림 여느 사람까지 그리 어렵지 않게 누리거나 즐깁니다. 아이들하고 복닥이는 나날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사람은 드물어도, 아이들 복닥이는 모습을 사진으로 몇 장 담아 벽에 붙이거나 손전화로 담는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아이들하고 어우러지는 나날 이야기를 시나 수필로 써서 벽에 붙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사랑스러운 짝꿍을 곱게 그림으로 담아 벽에 붙이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연필만 있으면 글을 쓰고 붓만 있으면 그림을 그린다지만, 막상 글이랑 그림은 여느 자리 여느 삶하고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는지 모릅니다. 작은 손전화로도 사진을 찍어 언제라도 돌아볼 수 있는 오늘날, 외려 사진이야말로 여느 자리 여느 삶하고 가장 가까이 어깨동무한다 할 만합니다.

 

 사진을 맨 처음 만든 사람은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 문화나 예술이나 삶 이런저런 대목을 살피지 않습니다. 새로운 길로 사진을 열면서, 이 사진으로 장사를 했습니다. ‘영업 사진관’이 생겼어요. 글을 쓰며 돈벌이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글도 그림도 돈벌이하고 동떨어진 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영업 문학관’이나 ‘영업 미술관’이란 없어요. 오직 ‘사진찍기’만 대놓고 돈을 법니다.

 

 곰곰이 살피면, 글은 책이나 신문으로 묶으며 돈을 법니다. 그림은 작품으로 돈을 법니다. 글과 그림이라 해서 돈벌이를 안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진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돈을 버는 모습이 다를 뿐입니다. 글을 쓰더라도 돈을 벌지 못하면 먹고살지 못해요. 그림을 그리더라도 돈을 벌지 않으면 그림그리기를 더는 하지 못해요. 돈이 없으면 연필과 종이를 장만하지 못합니다. 돈이 없으면 붓과 물감을 장만하지 못합니다. 돈이 있어야 사진기이든 필름이든 메모리카드이든 장만한다지만, 돈이 있지 않고서야 글도 그림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한겨레 발자취와 삶을 돌아볼 때에, 여느 자리 여느 살림 여느 사람이 글이든 그림이든 즐거이 누리지 못한 까닭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이 있었어도 지배계급은 한문으로 살아가며 권력을 누렸습니다. 여느 자리 여느 살림 여느 사람이 누구나 쉽게 글을 쓰도록 문을 열지 않았어요. 더욱이, 그림그리기는 여느 자리 여느 살림 여느 사람은 아예 건드리지 못하도록 꽁꽁 닫아 걸었습니다.

 

 사진을 처음 만든 사람은 돈을 버는 길을 찾으려 했다지만, 이 돈벌이는 누구한테나 열린 문이었습니다. 많든 적든 돈 얼마를 치르면 누구나 즐기거나 누릴 수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글이랑 그림은 돈을 얼마를 치르더라도 계급과 권력이라는 높직한 울타리를 세우고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꽁꽁 틀어막았습니다.

 

 오늘날 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글은 못 쓰겠더라’ 하고 말하거나 ‘나는 그림은 못 그리는걸’ 하고 말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꼭 계급과 권력 때문은 아니지만,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는 울타리가 좀 높기는 높습니다. ‘등단’이나 ‘출판’이나 ‘언론’이나 ‘대학교’라는 울타리가 참 많습니다. 사진 갈래라고 이런 울타리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만, 사진학교를 다니지 않거나 사진강의를 듣지 않은 사람 누구라도 1회용 사진기이든 값진 사진기이든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사진을 즐기거나 누리면서 마음껏 나눌 수 있어요.

 

 곧, 사진과 사진기라는 새 길을 처음 만든 사람은 어쨌든 ‘돈’이라는 테두리에서 처음 만들었습니다. 이제, 사진을 누구나 마음껏 즐기는 이 자리에서는 저마다 ‘내 마음’을 어떻게 기울이는가에 따라 새 삶을 이룰 만합니다. 어떠한 장비를 갖추더라도 내가 바라보는 삶을 내 눈길로 곱게 담을 수 있습니다. 애써 작품으로 꾸미거나 잔치마당을 마련해야 하지 않습니다. 따로 사진책을 안 묶어도 됩니다. 즐기는 삶처럼 즐기는 사진이면 넉넉합니다. 누리는 삶만큼 누리는 사진이면 흐뭇합니다.

 

 더 헤아릴 수 있으면, 글이랑 그림도 이와 같아요. 즐기는 삶대로 즐기는 글쓰기이면 돼요. 누리는 삶결을 살려 누리는 그림그리기로 나아가면 돼요.

 

 그리고, 연필이든 붓이든 사진기이든 없어도 홀가분합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내 글을 씁니다. 내 가슴속에 곱게 글을 씁니다. 내 사랑을 실어 내 가슴 깊이 그림을 그립니다. 내 꿈을 담아 내 가슴 한 자리에 사진을 찍어요. 살가운 내 살붙이들 이야기를 마음밭에 아로새깁니다. 고마운 내 이웃과 동무 이야기를 마음밭에 씨앗으로 심습니다. 나는 내 슬기를 빛내어 내 사진을 늘 새로 빚으며 누립니다. (4345.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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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 사람들 고운 삶을 고운 사진으로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23] 한금선,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안목,2009)

 


 여느 책방에서는 팔지 않는 사진책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안목,2009)를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사진위주 류가헌’에서 장만합니다. ‘류가헌’은 2011년 12월 한 달 동안 ‘사진책잔치(포토북페어)’를 열어요. 작지도 크지도 않게 알맞춤한 사진쉼터 류가헌에서 씩씩하게 꾸리는 사진책잔치는 어여쁩니다. 이 사진책잔치에 마실하는 길에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를 만났습니다. 반갑게 펼치고 기쁘게 장만합니다.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는 이 사진책 내놓은 안목 출판사 누리집(http://anmoc.com)에서 살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인터넷 아닌 책방에서 손으로 만지작거린 다음 장만하고 싶어 책이 나온 지 이태 만에 비로소 구경하면서 책장을 넘깁니다.

 

 흑백사진으로 이루어진 꽃무늬 몸빼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모습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는, 책끝에 붙은 만나보기 글을 읽습니다. 권은정 님이 한금선 님을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 가운데 “한참 전에는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요즘은 사진이 따뜻하다고 해요. 더러는 같은 사진을 두고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하하(141쪽).”라는 대목을 찬찬히 곱씹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지난날 한금선 님 사진은 ‘사람들이 슬프게 여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찍었’기에 지난날 한금선 님 사진을 읽을 때에 ‘슬프구나’ 하고 느낄 만할 수 있어요. 2009년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에서는 사람들이 슬프게 여기기를 바라지 않는 사진이었으니까, 곧 ‘사람들이 내 살가우며 가까운 이웃이요 동무요 한식구라고 여기며 받아들이기를 바라면서 찍었’기에 2009년 이 사진책은 ‘따뜻하다’고 느낄 만하구나 싶어요.

 

 한금선 님은 잇달아 “시설 안에 있는 이들이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우리 모두에게 그 정서를 경험하게 해 주고 싶은 거지요. 그분들에게는 한 공간의 주인공이 되는 시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지난한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채워 왔던 그분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 드리려고 해요(142∼14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말 이 이야기 그대로 한금선 님은 ‘남다르지 않은 사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남다르지 않은 사람들 남다르지 않은 삶을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남다르지 않기에 남다르게 바라볼 까닭이 없는 사람들 수수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옮깁니다.  꾸밈없이 마주하고 즐거웁게 어우러질 좋은 사람들 꿈을 사진으로 빚어요.

 

 사진책을 덮습니다. 며칠 뒤 사진책을 다시 펼칩니다. 또 사진책을 덮습니다. 이러고 며칠 뒤 사진책을 거듭 펼칩니다. 보름 남짓 이러기를 되풀이합니다. 아이가 먹을 밥을 차리고, 아이가 입을 옷가지를 빨래하며, 아이와 드러누워 잠잘 집안을 쓸고닦습니다. 두 손에 물기 마를 겨를이 없다고 늘 느끼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고운 사람들 고운 삶을 고운 사진으로 담는다고. 사랑스러운 사람들 사랑스러운 삶을 사랑스러운 글로 엮는다고. 좋아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삶을 좋아하는 그림으로 선보인다고.

 

 사진기를 쥐며 어떤 사진이야기 하나 빚으려는 분들 누구나 이 생각을 예쁘게 건사하면 반갑겠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좋아하는 사진을 찍어야 해요. 가난하거나 불쌍하거나 슬픈 사람을 애써 만나며 가난하거나 불쌍하거나 슬픈 이야기를 보여주려 할 까닭이 없어요. 사랑할 사람을 사귀면서 사랑할 이야기를 글·그림·사진·춤·노래·연극으로 빚으면 즐거워요.

 

 함께 말을 섞고픈 사람들을 만나고 말을 섞으면서 사진을 찍으면 돼요. 같이 밥을 먹고 나란히 밤별을 올려다보고픈 이와 얼크러지면서 사진을 찍으면 돼요.

 

 사진은 고발하지 않아도 돼요. 고발하고프다면 고발사진을 찍으면 되겠지요. 기사로 내보내고 싶으면 보도사진을 찍으면 되고요. 내 사진이 고발사진이라면 고발사진 느낌을 물씬 살리면 됩니다. 내 사진은 보도사진이라 할 때에는 그야말로 신문이나 잡지에 번쩍 하고 실려 번쩍 하고 놀래키도록 보도사진을 찍으면 돼요.

 

 시골집에서 두 아이랑 옆지기하고 살아가는 나는 고발사진을 찍을 일이 없고 보도사진을 찍을 까닭 또한 없습니다. 나는 네 식구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언제나 즐거이 사진꿈으로 북돋우면 넉넉해요. 나는 사진기를 손에 쥐면서 사진꿈에 젖어요.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면서 사진빛을 누려요. 즐거이 찍은 사진을 다달이 한 차례쯤 종이에 뽑아 음성에서 살아가는 내 어버이와 일산에서 지내는 옆지기 어버이한테 편지를 적어 띄우면서 사진길을 걷습니다. 내 사진을 가장 좋아할 사람은 누구보다 우리 아이요 옆지기이며 어버이예요. 그래서 나는 내 사진삶을 ‘이야기사진’으로 일구어요. ‘사랑사진’으로 빚고 ‘시골사진’이랑 ‘살림사진’으로 여깁니다.

 

 사진책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를 생각합니다. 한금선 님이 붙인 이름처럼 “꽃무늬 몸뻬”가 “막막한 평화”로 마무리됩니다. 아, 이 사진책 ‘남다르지 않은 사람들 남다르지 않은 이야기’는 “꽃무늬 몸뻬” “어여쁜 하루”가 아닌 “막막한 평화”로 마무리할밖에 없군요.

 

 이 사회가 이렇게 이끌기 때문일까요. 우리 스스로 이처럼 바라보기 때문인가요.

 

 사진책과 사진이야기에 붙는 이름이 “꽃무늬 몸뻬”이기만 했다면, “꽃무늬 몸뻬” “꽃내음 밥상”이었으면, 꽃무늬가 꽃송이 꽃누리 꽃내음 꽃열매 꽃빛 꽃꿈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으면, 참 아리따웠으리라 생각합니다. (4344.12.21.물.ㅎㄲㅅㄱ)


―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 (한금선 사진,안목 펴냄,200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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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금선 님 다른 사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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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사진으로 걷는 길
 ― 사진문화와 사진예술에 앞서

 


 더 많이 더 자주 돌아다니는 사람이 더 남다르거나 더 돋보이는 사진을 낳는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온누리 수많은 나라를 골고루 돌아다녔기에 온누리 구석구석 잘 알거나 읽거나 생각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사진이고 삶은 삶이거든요. 사진은 문화가 아닌 사진입니다. 사진은 예술이 아닌 사진입니다. 문화는 문화이지 사진이 아닙니다. 예술 또한 예술이지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이나 사진삶이란 따로 없습니다. 사진으로 즐기는 문화일 때에 사진문화이고, 사진으로 빚는 예술일 때에 사진예술이며, 사진으로 일구는 삶일 때에 사진삶이에요. 그러나, 사진을 찍으면서 이것은 문화요 저것은 예술이요 그것은 삶이라 나누지 못합니다. 문화로 누리면서 사진을 함께할 때에 사진문화이고, 예술을 즐기면서 사진을 꽃피울 때에 사진예술이며, 삶을 사랑하면서 사진을 사랑할 때에 사진삶이에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 앞을 보는 사람보다 ‘못난 사진’이 나오지 않으나, 더 ‘잘난 사진’이 나오지 않아요. 그저 ‘사진이 태어납’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는대서 ‘이름난 사진’이나 ‘거룩한 사진’이나 ‘훌륭한 사진’이 나오지 않아요. 그저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우리 집 네 살 아이가 아버지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도 ‘사진을 찍는’ 일입니다. 예술도 문화도 삶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가 사진놀이를 신나게 즐긴다면, 아이로서는 좋은 사진삶이 돼요. 이 사진삶은 앞으로 사진문화로 달라질 수 있고, 사진예술로 가지를 뻗을 수 있어요.

 

 이렇게 찍어도 좋은 사진입니다. 저렇게 찍어도 즐거운 사진이 돼요. 이렇게 찍으란 법이 없는 사진이듯, 더 많이 더 자주 돌아다닌대서 더 나은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저렇게 써야 아름다운 문학이 되지 않듯이, 조그마한 집에서 아이들하고 복닥이는 나날을 담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 해서 어설프거나 어수룩하거나 어줍잖은 글·그림·사진일 수 없어요.

 

 마음을 열어야 사진눈을 엽니다. 생각을 키워야 사진빛을 키웁니다. 사랑을 나누어야 사진사랑을 나눕니다.

 

 사진으로 가는 길은 사진이 문화인가 예술인가를 따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진으로 가는 길이 즐거울 수 있도록 애쓰는 자리입니다. 사진으로 가는 길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마음을 쏟는 자리입니다.

 

 즐거운 문화이면서 사진입니다. 아름다운 예술이면서 사진입니다. 사랑스러운 삶이면서 사진이에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가난한 사람들 머나먼 나라에서 찾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패션사진은 예쁘장한 모델들 예쁘장한 옷을 입히는 스튜디어오에서 만들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예술사진이라면서 아직 아무도 안 찍었다 싶은 모습을 애써 꾸며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비평이라면서 수많은 대학논문처럼 딱딱한 한자말과 영어를 잔뜩 채우면서 도무지 한국말인지 한글인지 알쏭달쏭한 글을 짜깁기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좋은 삶을 아끼면서 좋은 사진을 아끼면 넉넉합니다. 고마운 사람을 사귀면서 나 스스로 고마운 이웃으로 삶을 북돋우면 됩니다. 맑은 바람과 밝은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씩씩하게 자라듯, 맑은 눈길과 밝은 손길로 내 사진기를 돌볼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4344.12.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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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 보는 삶
 ― 사진을 찍어랏


 

 춤추고 노래하며 하모니카를 부는 네 살 딸아이가 작은 사진기를 들고 아버지한테 달려옵니다. 아버지가 쓰는 ‘큰’ 사진기로 찍지 말고, 아이가 쓰는 ‘작은’ 사진기로 찍어 달라 합니다. 아버지가 쓰는 큰 사진기에는 동영상찍기가 없고 아이가 쓰는 작은 사진기에는 동영상찍기가 있습니다. 아이는 작은 사진기로 동영상을 담아 달라고 바랍니다.

 

 “벼리야, 사진을 안 찍어도 되잖아. 그냥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면 돼.” 그러나 아이는 애써 제 모습을 찍어 달라 바랍니다.

 

 새벽 한 시 오십오 분. 잘 자던 아이가 낑낑댑니다. 쉬 마려워 낑낑댑니다. 옆에서 어머니가 아이보고 일어나라 합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부릅니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 스스로 일어나서 쉬를 누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버릇처럼 잠을 깨고 일어나고 맙니다. 아이가 되든 옆지기가 되든, 깊은 밤이건 한낮이건 곁에서 무얼 거들라며 부르면 달려가 버릇합니다.

 

 아이는 쉬를 누고 자리에 눕습니다. 이불을 여밉니다. 아버지는 다시 눕지 않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셈틀을 켭니다. 오늘 하루 찍은 사진을 갈무리합니다. 어제 찍은 사진은 어제 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이틀치 사진이 이백팔십 장이 넘습니다. 어디 멀리 나다니지 않고 집에서 네 식구 복닥이는 삶을 담은 사진입니다. 세 식구일 때에도 세 사람 삶을 사진으로 날마다 백 장 즈음 담았고, 네 식구일 때에도 네 사람 삶을 사진으로 나날이 백 장 남짓 담습니다. 엊저녁에는 딸아이가 춤과 노래와 하모니카를 실컷 보여주는 바람에 사진을 더 많이 찍었습니다.

 

 아이가 춤추고 노래하며 하모니카 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봅니다. 참 밝고 귀엽습니다. 참 웃기고 재미납니다. 이 아이가 아버지보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달려오는 일을 번거롭게 여긴 적은 없습니다. 너무 많이 찍을 수는 없고, 애써 모두 찍을 수 없으니, 때때로 손사래를 칩니다. 그런데, 아이를 찍은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좀 달리 생각합니다. 아니, 이렇게 즐거이 노는 아이라 한다면 더 찍을 수 있지 않나. 아이가 무대를 스스로 만들어 놀 때에는 따사로이 바라보면서 찍고, 아이를 업거나 아이 손을 잡으며 놀 때에는 사진기를 들 수 없으니 서로 따사롭게 바라보며 마음으로 아이 삶을 담으면 돼요.

 

 아버지가 “이제 그만 찍자, 그만 찍어.” 하고 손사래를 치니, 아이는 한손으로 하모니카를 불면서 한손으로 사진기를 들이밉니다. 그래, 내가 어떻게 너한테 이기겠니. 왼손으로는 작은 사진기를 들고 동영상을 켭니다. 오른손으로는 큰 사진기를 들고 단추를 누릅니다. 작은 사진기 동영상에는 오른손으로 단추를 누르며 내는 소리 ‘찰칵’이 함께 담깁니다. (4344.12.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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