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숟가락 7
오자와 마리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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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49



언제나 이곳에서 함께

― 은빛 숟가락 7

 오자와 마리 글·그림

 노미영 옮김

 삼양출판사 펴냄, 2014.12.8.



  해가 바뀌어 여덟 살로 접어든 큰아이가 문득 묻습니다. “아버지, 벼리 이제 여덟 살이야?” “응, 여덟 살이야.” 지난해 이맘때를 떠올립니다. 그러께 이맘때도 떠올립니다. 다섯 살에서 여섯 살로 접어들 무렵에는, ‘여섯 살’이 아니고 ‘다섯 살’이라고 박박 우겼습니다. 여섯 살에서 일곱 살로 접어들 무렵에는 박박 우기지는 않았으나, 살짝 못마땅하다는 느낌이면서도 이내 새로운 숫자를 받아들였습니다.


  여덟 살로 접어든 큰아이한테 숫자읽기나 한글읽기를 따로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큰아이가 궁금해 하면 비로소 살짝 알려줍니다. 요즈막에 시곗바늘에 퍽 눈길을 두기에 굵고 짧은 바늘과 가늘고 긴 바늘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려주고, 두 바늘이 지나가는 숫자판은 똑같지만, 똑같은 숫자판을 다르게 읽는다고 알려줍니다. 다만, 여느 어른들이 으레 말하듯이 “여섯 시 육 분”처럼 알려주지는 않고, “여섯하고 여섯이야.” 하고만 알려줍니다.


  어느덧 큰아이와 여덟 해째 맞이하며 누리는 나날을 돌아보니, 어버이는 참말 아이한테 꼬치꼬치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가르칠 일이 없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내 삶을 슬기롭게 가꾸면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제 삶을 슬기롭게 가꿉니다. 어버이 스스로 내 삶을 엉성하게 팽개치면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아무렇게나 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버이가 제 삶을 팽개치더라도, 아이는 어버이와 달라 아이 나름대로 기운을 내어 새로우면서 즐겁게 삶을 지으려 하기도 합니다.





- “오늘은 ‘형아 유치원’에서 뭐 해?” “그림책 가져왔어. ‘크리스마스 전날 밤’.” (13쪽)

- “나, 나는, 나 있잖아, 정말은 산타 할아버지가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끔 생각했어!” “그럼, 오늘은 산타 할아버지께 편지를 쓰자.” (15∼16쪽)

- ‘세상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지만 나한테는 생일이기도 해서, 차마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할 수는 없어. 다만,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것만이라도 좋으니까 알려줬으면 좋겠어.’ (18쪽)



  일거리가 많은 날에는 아이만 먼저 재운 뒤, 늦도록 일손을 붙잡습니다. 아이들은 저희끼리 먼저 잠들고 싶지 않아, 자꾸 아버지를 부릅니다. 어버이로서 아이를 바라보자니, 아이끼리 재우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일은 일이되 나중에 하자고 생각하면서, 먼저 오늘 이곳에서는 아이와 잠자리를 누리자고 생각합니다. 열이면 열 언제나 아이 쪽으로 움직입니다.


  두 아이 사이에 누워서 이불깃을 여미고 조잘조잘 떠들다가 노래를 부릅니다. 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렇게 아이들 사이에 안겨 노래를 부르는 삶이란 대단히 기쁘며 놀랍구나.


  테이프나 시디나 인터넷으로 노래를 틀면 한 시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이쁘장하거나 듣기 좋다는 어린이노래라 하더라도 기곗소리를 한 시간 넘게 듣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마 웬만한 기곗소리 노래물결은 사람 귀에 썩 내키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내가 입으로 소리를 내어 아이와 함께 노래를 부르면, 한 시간이 아닌 서너 시간 노래를 불러도 따분하거나 힘들지 않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너덧 시간이나 대여섯 시간 기차나 버스를 타야 할 적에, 이 아이들이 기차나 버스에서 따분해 하거나 멀미가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러니까 그저 즐겁게 먼먼 마실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참말 그치지 않고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작은아이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자동차 바퀴나 기차 바퀴 구르는 소리를 딱히 거슬려 하지 않지만, 큰아이는 이런 소리를 꽤 거슬려 합니다. “버스 소리 시끄러워”라든지 “기차 소리 시끄러워” 하고 말하는데, 큰아이가 이런 말을 하면 이런 소리를 한귀로 흘립니다. 못 들은 척해요. 이러면서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소리가 나건 저런 소리가 시끄럽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하고 자꾸 읊으면 우리한테는 ‘시끄러워’만 찾아오더군요. 조잘조잘 떠들거나 놀이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면 우리한테는 이야기와 놀이와 노래가 찾아와요.





- “그나저나 두 사람은 언제나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을 먹더군요.” “이거요? 형이 만들어 주는 거예요.” (25쪽)

- “배고프지? 밥 먹을까? 오므라이스야.” “오므라이스?” “응. 리츠가 너만 할 때에 무척 좋아하던 음식이란다. 넌?” “좋아해요!” (121쪽)

- “하지만 말이다. 어른이 되는 건 기쁘지만, 곤란할 때에 아무것도 의논하지 않는 건 쓸쓸해.” “떳떳하지 못해서 얘기하지 못했어요.” “바보구나.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야.” (125∼126쪽)



  오자와 마리 님이 빚은 만화책 《은빛 숟가락》(삼양출판사,2014) 일곱째 권을 읽습니다. 일본에서는 열째 권이 진작에 나왔으니, 번역이 퍽 더딥니다. 일본말로 된 책을 ‘일본 아마존’에서 살까 하다가 그만두었는데, 일본에서 나온 여덟째 권 겉그림이나 아홉째 권 겉그림을 보면,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흐를는지 헤아릴 만합니다.


  그러니까, 만화책 《은빛 숟가락》에 나올 이야기는 앞이 모두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서 어떤 사랑을 길어올리는가 하는 대목이 또렷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나올 이야기가 알 만하니, 이 만화책은 안 보아도 될 만할까요? 흔한 말로 ‘뻔한 줄거리’라 할 만하니, 이 만화책은 대수롭지 않을까요?


  《은빛 숟가락》을 천천히 두 차례 읽고 나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짓는 사랑은 어느 하루도 뻔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아끼는 마음이나, 아이가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은 뻔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밥을 지어서 먹이는 마음이나, 아이가 어버이와 함께 밥을 즐기고 싶은 마음은 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는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치와 경제와 스포츠와 문학과 예술은 뻔합니다. 교육과 학문과 철학과 종교는 뻔합니다. 전쟁무기를 건사하는 군부대 이야기라든지, 대통령이나 정치꾼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사람이 기자를 불러모아 읊는 이야기는 모두 뻔합니다. 신문에 나오고 방송에 나오는 이야기는 참말 뻔합니다.





- ‘기쁜 듯이 돕는 루카와 내 어린 시절이 겹쳐졌다.’ (127쪽)

- ‘형제끼리 둘러앉은 식탁은 활기차고 북적였으며 즐거웠다. 돌아갈 때는 이미, 집을 뛰쳐나왔을 때의 기분 따위는 잊어버렸다.’ (155쪽)

- “나, 아빠랑 엄마가 매일 밤 심각하게 얘기하시기에 신경 쓰여서 몰래 엿들었더니 아빠가 진 빚 갚는 얘기였어. 진심으로 안 듣는 게 좋았다고 생각했지.” (156쪽)



  아이들 사이에 누워서 노래를 부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듭니다. 이제껏 여덟 해를 이렇게 삽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리라 생각합니다. 자다가 문득 잠에서 깰 때에는 아이들이 이불을 걷어찬 때입니다. 두 아이가 훨씬 어릴 적에는 기저귀를 갈거나 밤오줌을 누이려고 삼십 분마다 잠에서 깼습니다. 두 아이 모두 밤오줌을 잘 가려 주니 밤마다 한시름을 덜되, 요새는 이불깃 여미느라 부산합니다.


  아이들은 자다가 잠꼬대를 하더라도 바로 옆에 어버이가 있는 줄 알기에 다시 깊이 잠듭니다. 꿈에서 무슨 놀이를 하다가 놀라더라도 바로 옆에 어버이가 가슴을 토닥이면 다시 새근새근 꿈나라로 돌아갑니다.


  어제 낮에 큰아이를 씻길 적에 큰아이가 아버지한테 묻습니다. “아버지도 어릴 적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씻겨 주었어? 몇 살 적에 씻겨 주었어?” 머지않아 큰아이는 혼자 씻을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큰아이는 이제 혼자 씻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버이 손길을 받지 않더라도 혼자 씻고 싶으니 늘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이러한 생각대로 몸이 무럭무럭 튼튼하게 자랍니다. 큰아이가 혼자 씻을 수 있을 때라면, 아마 큰아이가 도마질도 하고 다른 부엌일도 야무지게 거들 수 있을 때가 되리라 느낍니다. 큰아이가 혼자 두발자전거를 탈 무렵 혼자 씻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큰아이가 혼자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를 다녀올 수 있다면, 아마 그즈음 혼자 씻을는지 모릅니다.





- “무슨 사정인데요?” “그만둬.” “뭐?” “오빠를 낳아 준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마.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아. 오빠 부모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 왜냐면 나한테 오빠는 앞으로도 쭉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변함없이 오빠인걸.” (177∼178쪽)

-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식탁 풍경이었다. 형이 핏줄이 이어지든 이어지지 않았든, 그런 일이 있든 없든, 밥은 맛있고 딸기는 새콤달콤하고, 역시 가족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83쪽)



  언제나 이곳에서 함께 사는 곁님입니다. 두 어버이는 서로 곁님이고, 아이와 어버이도 서로 곁님입니다. 우리 집을 둘러싼 나무도 곁님이고, 작은 들풀과 들꽃도 곁님입니다. 우리 집 처마에서 겨울나기를 하는 참새와 딱새도 곁님이요, 구름과 냇물과 바람도 곁님입니다.


  밤이 깊으면서 별빛은 더욱 밝고, 밤이 깊으니 아이들 숨소리는 한결 고릅니다. 하루는 기쁘게 저문 뒤, 다시금 기쁘게 찾아옵니다. 날이 밝으면 온갖 작은 새들이 우리 집 마당에서 재잘거리듯이 큰아이가 먼저 깨고 작은아이가 곧바로 깰 테지요. 두 아이는 ‘오늘은 무엇을 하며 놀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열 테지요. 언제나 이곳에서 함께. 4347.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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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여우 3
오치아이 사요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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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44



이녁은 무엇을 섬기는가요

― 은여우 3

 오치아이 사요리 글·그림

 강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4.8.30.



  바람 부는 저녁에 달빛을 받으며 뒤꼍에 서는데, 어디에선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걸린 비닐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냅니다. 풀잎이 바람 따라 춤추는 소리가 아니라, 새가 겨울밤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비닐이 나뭇가지에 걸려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쓸쓸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골에서는 비닐노래가 골골샅샅을 울립니다. 밭자락마다 비닐을 깔면서 남새를 거두려 하기 때문입니다. 배추를 얻으려고, 양파를 얻으려고, 파를 얻으려고, 고추를 얻으려고, 토마토를 얻으려고, 이것을 얻고 저것을 얻으려고 온통 비닐입니다.


  시골지기 가운데 비닐을 걱정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퍽 드뭅니다. 땅에 파묻어도 좀처럼 안 썩는 비닐이 나뭇가지에 걸려 그악스러운 모습이 되어도 걱정하지 않고, 비닐쓰레기를 태우면 흙도 죽는데 이를 걱정하지 않으며, 해마다 비닐값으로 제법 많다 싶은 돈을 써야 하지만 이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몰면서 기름을 걱정하지 않는 도시사람처럼, 온갖 곳에 비닐을 씌우면서 비닐을 걱정하지 않는 시골사람입니다.





- “이제 알겠지? 지금까지 벌어진 소동은 저 녀석들 소행이야. 어쩔 수 없지 이곳에는 보이는 인간이 없으니까.” (42쪽)

- “장난이 원인이 되어 다툼이 벌어지고, 자신을 귀신으로 오인해 무서워하고, 어쨌거나 신의 사자인데. 하루도 본인이 그런 입장이 되면 싫겠자?” (58쪽)



  땅을 섬기는 사람은 땅을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땅을 섬기기에 땅을 가꿉니다. 냇물을 섬기는 사람은 냇물을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냇물을 섬기기에 냇물을 가꿉니다. 숲을 섬기는 사람은 숲을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숲을 섬기기에 숲을 가꿉니다.


  오늘날에는 땅이 사라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흙으로 된 땅을 밟고 서야 사람답지만, 흙땅에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대리석을 덮고 말아, 그만 땅이 사라지고 땅을 잊거나 잃습니다. 땅이 사라지니, 냇물도 사라져서, 대통령 한 사람과 공무원 여러 사람에다가 개발업자 이렁저렁 뭉쳐서 온 나라 물줄기를 망가뜨렸다고 할 텐데, 이들 말고도 이 나라 아주 많은 사람들이 땅을 안 밟고 산 탓에 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터라,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수돗물이 아닌 냇물이나 우물물을 마시면서 산다면, 나라에서 냇물에 시멘트를 들이붓는 짓을 일삼을 적에 어떻게 할까요? 모두 들고 일어나서 막아야지요. 그렇지만, 막상 4대강사업을 막으려고 들고 일어난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먹고사느라 바빠 회사나 공장에 나가야 합니다. 냇물을 마시지 않기에, 냇물을 망가뜨린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얼마나 망가뜨리는 줄 깨닫지 못합니다.


  손수 땅을 일구어 밥을 얻지 않기 때문에, 밀양이든 청도이든 이 나라 골골샅샅 어디이든 송전탑을 때려박거나 핵발전소를 짓는 일이 잇달아도, 이러한 막짓을 막으려고 함께 일어서서 어깨동무를 하지 못해요. 땅이 무엇인지 모르니, 그저 남 일이 될 뿐입니다.





- “후우, 후쿠. 원숭이가 오지 않아도 그건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란다.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이야. 신을 대신해 이 땅에서 사는 자를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 사람이 늘어나면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기겠지만, 너희는 그저 웃고 있으면 돼. 즐거워야 승리의 신이 내려오는 법. 우리는 이기는 신원이니까. 너희가 웃지 않으면 아무도 이기게 해 줄 수가 없단다. 그러니까, 너희는 늘 즐겁게 지내거라! 게다가 절과 묘지도 함께 있고, 너희는 오래오래 살 테니까. 인간의 몫, 원숭이의 몫, 그리고 이 할아비의 몫까지, 이곳에서 쭉 앞으로의 세상을 지켜봐 다오.” (64∼65쪽)



  오치아이 사요리 님이 빚은 만화책 《은여우》(대원씨아이,2014) 셋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듯이 일본에서도 ‘다른 님’이나 ‘다른 숨결’을 섬기거나 아끼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크게 줄었습니다. 땅을 섬기거나 냇물을 섬기거나 숲을 섬기는 사람이 일본이든 한국이든 매우 적습니다. 아이들은 학교교육에 매달리면서 입시지옥으로 휩쓸리고, 어른들은 날마다 돈을 버느라 허덕입니다. 삶을 가꾸는 길에서 자꾸 멀어지고, 삶을 사랑하는 길하고는 자꾸 등돌립니다. 하늘에 하늘님이 있고 땅에 땅님이 있으며 숲에 숲님이 있는 줄 헤아리지 않아요. 내 마음속에 하느님이 있는 줄 알아차리지 않고, 내 이웃과 동무도 나와 똑같이 아름다운 숨결인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 “저는,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검도를 이용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충분해요.” “딱히 상관없잖아! 검도가 두 번째라면, 첫 번째를 소중히 하고, 두 번째도 소중히 하면, 좋아하는 일은 전부 하면 되잖아! 까짓 거 욕심 한번 부려 봐!” (99∼100쪽)

- “너도 참 대단하다. 해마다 똑같으니까 그냥 컴퓨터로 출력하면 될 텐데.” “네? 그래도 돼요?” “으음. 확실히. 그러면 편하긴 하겠지만, 신주의 축사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신께 소원을 말씀드리는 일이니까, 역시 정성껏 손으로 써야 신께 제대로 전달이 되겠지.” (142∼143쪽)



  꽃을 섬기는 사람은 꽃내음을 맡으면서 꽃넋이 됩니다. 풀을 섬기는 사람은 풀내음을 맡으면서 풀넋이 됩니다. 나무를 섬기는 사람은 나무내음을 맡으면서 나무넋이 됩니다.


  돈을 섬길 적에는 돈내음을 맡고, 책을 섬길 적에는 책내음을 맡습니다. 땅을 섬기기에 땅내음을 맡으며, 전쟁무기를 섬기기에 총내음이나 포탄내음을 맡습니다.


  어떤 내음을 맡으면서 어떤 넋이 될는지, 저마다 스스로 고릅니다. 어떤 내음을 맡으면서 어떤 길을 걸을는지, 저마다 스스로 찾습니다. 나를 아끼면서 이웃을 함께 아낄 수 있고, 나를 내팽개치면서 이웃도 괴롭힐 수 있습니다.




- “신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단지 너희가 사는 세계에서는 그렇게 믿을 뿐이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중요해. 믿는다면 있는 거고, 그럼 그걸로 충분하잖아. 다만 우리가 보이는 만큼, 너희는 다른 사람들보다 믿기가 더 수월할지도 모르지.” “그렇구나! 하지만 정말 신기해. 옛날에 하던 마츠리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그건 결국 모두가 이어왔기 때문이잖아.” (181쪽)



  예부터 바람이 불면 꽃잎이 날렸습니다. 예부터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춤을 추었습니다. 예부터 바람이 불면 새는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았습니다. 예부터 바람이 불면 배는 돛을 펼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예부터 바람이 불면 아이들은 연을 들고 들로 나와서 연을 날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람이 부는 날에 무엇을 할까요. 오늘 우리는 바람을 맞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요. 오늘 우리는 이 바람을 아이와 함께 어떻게 맞이하는가요. 대한 추위를 이레 즈음 앞두고 바람결이 달라집니다. 아직 봄은 더 있어야 찾아올 테지만, 한겨울 바람이 살포시 달라졌습니다. 4348.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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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발자취 5 - 시간여행 카스가연구소
요시즈키 쿠미치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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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450



너한테 다가서는 길

― 너와 나의 발자취 5

 요시즈키 쿠미치 글·그림

 정은서 옮김

 서울문화사 펴냄, 2014.12.28.



  이 길을 따라서 천천히 가면 지구별을 한 바퀴 돌 수 있을까요. 이 길을 따라서 가면 막다른 골목이 나올까요. 이 길 끝에는 바다나 냇물이 저쪽으로 건너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을까요.


  마당을 빙글빙글 돕니다. 낮에는 구름을 올려다보면서 마당을 돌고, 밤에는 별을 올려다보면서 마당을 돕니다. 구름을 올려다볼 적에는 파랗게 눈부신 낮빛이 내 몸으로 스미고, 별을 올려다볼 적에는 하얗게 부서지는 밤빛이 내 마음으로 젖어듭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함께 사는 나무와 풀과 벌레와 새는 낮밤으로 구름빛과 별빛을 늘 나란히 받으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같은 바람을 마시고, 같은 볕을 쬐며, 같은 달빛을 받습니다.



- “너는 얼굴도 예쁘니까, 웃으면서 꽃을 기르면 아마 다들 널 좋아할 거야.” (13쪽)

- ‘사랑했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애가 탔기 때문에 망설이고, 좋아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네 행복을 빌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사키, 너의 대답. 네가 9년에 걸쳐서 만든, 널 대변해 주는 이 광경. 이 광경을 본 덕분에, 난 이제야 겨우 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27쪽)





  너한테 다가서는 길은 내 마음을 여는 길입니다. 나한테 다가오는 길은 네가 마음을 여는 길입니다. 서로 만나려면 서로 마음을 엽니다. 서로 사귀려면 서로 마음을 덥힙니다. 내 마음에 네가 들어올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열고, 내 품에 네가 포근히 안기도록 내 마음을 덥혀요.


  꽃길을 걸으면서 꽃내음을 맡습니다. 내가 가는 길도 네가 오는 길도 언제나 꽃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숲길을 걸으면서 숲빛을 먹습니다. 내가 가는 길도 네가 오는 길도 노상 숲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있기에 즐거운 지구별이고, 같이 살기에 아름다운 지구마을이라고 느낍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이든 아르헨티나라는 나라이든, 캐나다라는 나라이든, 칠레라는 나라이든 모두 즐거우며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이 별에서 같은 숨을 쉬면서 같은 꿈을 꿉니다.



- ‘난 결국, 사람에게 완전히 절망할 수조차 없었어. 언니, 미안해. 애써서 잃어버린 도시와 같이 연구소를 건립했지만, 나에게는 무리였어. 하지만, 우유부단한 나치고는 혼자서 많이 노력했지? 조금은 칭찬해 줄 거지? 언니.’ (40∼41쪽)

- “기뻤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미소가 이렇게나, 이렇게나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줄은.” “‘이유’ 같은 건 없어. 인간의 행복은 무조건적으로 기쁜 거야!” (88쪽)





  요시즈키 쿠미치 님이 빚은 만화 《너와 나의 발자취》(서울문화사,2014) 다섯째 권을 읽습니다. 시간이 서로 엇갈리면서 두 번 다시 못 만날 수밖에 없던 두 사람이, ‘엇갈린 시간을 겹치게 하는’ 시간장치를 만들어서 만납니다. 과학이라는 힘을 빌어서 만나는데, 과학이라는 힘을 쓰려면, 기술이 발돋움해야 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써야 합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뼈대 가운데 맨 위쪽에 있는 머리를 써서, 온힘을 기울이면, 비로소 과학이 힘을 냅니다. 그러니까, 뇌를 많이 쓸 만큼 힘을 낼 때에 과학이 발돋움하는데, 뇌를 모두 쓸 수 있다면 따로 과학이라는 힘을 빌지 않더라도 만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뇌를 모두 쓸 때에는 사람들 누구나 입이 아닌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테니까요. 눈을 감고 입을 닫아도 마음으로 서로 만나고 사귀면서, 아무리 멀리 떨어진 데에서도 기쁘게 이야기꽃을 펼칠 수 있을 테니까요.




-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얼마든지 있는걸! 저렇게 사람을 비웃는 놈보다 난 널 믿어!” (120쪽)

- “내가 너 같은 태양처럼 멋진 사람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우연도 기적도 아닌 여동생이 그 장소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야.” (173쪽)



  웃음은 과학으로 재지 못합니다. 웃음이 왜 기쁨을 불러일으키는지 과학으로 밝히지 못합니다. 노래는 과학으로 따지지 못합니다. 노래가 왜 즐거움을 북돋우는지 과학으로 캐내지 못합니다.


  시 한 줄이나 춤 한 자락을 과학으로 짓지 못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가락이 시로 태어납니다. 마음에서 일으킨 사랑스러운 숨결이 춤으로 거듭납니다.


  너한테 다가서는 길은 이런 까닭이나 저런 핑계가 아닙니다. 티없이 맑은 마음으로 너한테 다가섭니다. 나한테 다가오는 길은 이런 구실이나 저런 실마리가 아닙니다. 가없이 밝은 사랑으로 나한테 다가옵니다. 서로 아름답게 만나고, 서로 기쁘게 사랑하고 싶어서, 마음을 가꾸어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4348.1.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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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여자회 방황 2
츠바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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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48



서툴게 헤매는 아이들

― 제7여자회 방황 2

 츠바나 글·그림

 박계현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3.7.30.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 똑같은 바람이 부는 날은 없습니다. 드세다 싶도록 바람이 부는 날에도 똑같이 드센 바람이 부는 때는 없습니다. 쉬지 않고 몰아치는 찬바람이 있지만, 한참 불다가 한동안 조용한 찬바람이 있고, 햇볕 한 줌 없이 몰아치는 찬바람이 있으며, 구름 한 점 없이 매서운 찬바람이 있습니다. 모든 찬바람이 잠들어 고요한 날이 있고, 매우 푹해서 마치 봄과 같은 날이 있어요.


  겨울 한복판에 서면서 볕과 바람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이 겨울은 날마다 어떤 이야기가 나한테 찾아오는지 헤아립니다. 바람이 불건 바람이 자건 마당에서 씩씩하게 노는 아이들을 헤아립니다. 둘이 씩씩하게 잘 놀다가 큰 고양이 한 마리를 보고는 놀라는 아이들을 헤아립니다. 찬바람을 먹으면서도 야무지게 꽃송이를 터뜨리는 동백나무를 헤아립니다. 동백나무 곁에서 함께 꽃을 피우는 들풀을 헤아립니다.




- “아, 역시 수업이란 건 따분한 거구나 하고 새삼.” “아, 그래?” “난 모르겠는데.” “하긴, 나도 모두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느낌을 즐기고 싶으니까, 따분한 것도 즐겨야지!” (16쪽)

- “다원우주 버튼인가?” “그게 뭔데?” “간단히 말하자면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버튼이다. 나에게는 필요 없다. 마치코가 써도 좋다.” “뭐? 써도 좋다고 해도, 하긴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그보다 나는 좀더 자고 싶어. 30분은 더 잘 수 있고.” (29쪽)



  아이들이 새로 태어나서 자랍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새로운 삶을 바랍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거의 모든 어버이는 아이한테 새로운 삶을 물려주거나 보여주기보다는, 아주 손쉽게 유치원과 보육원과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이내 학원을 찾아서 아이를 맡깁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어버이 손에서 자라거나 배우지 않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어버이 손에서 말을 물려받지 않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어버이 손에서 삶을 익히거나 얻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어 주는 어버이는 있되, 어버이 스스로 살아온 이야기를 오순도순 들려주는 어버이는 드뭅니다. 자가용을 장만해서 아이를 태우고 다니는 어버이는 있되, 마당이나 밭이나 숲을 마련해서 아이와 함께 푸른 들숨을 마시는 어버이는 드뭅니다. 문제집과 참고서를 아이한테 안기는 어버이는 있되, 아이와 함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삶을 생각하려는 어버이는 드뭅니다.





- “세계의 패턴은 몇 종류나 있다. 현시점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존재했겠지.” “과거에? 그럼 어딘가에서 죽었다는 거야? 그렇구나. 보통 죽으면 없어지는 겆. 없어진다는 건 좀 신기한 일이구나. 왠지.” (40쪽)

- “자, 다들 주목. 집안 사정 때문에 시미즈와는 오늘부터 약 7년간 이별하게 되었어요. 사회 시간에도 배웠겠지만, 얼마 전에 요코하마에 새로 생긴 냉동수면소에서 시미즈는 7년 동안 잠자기로 했단다.” (49쪽)



  츠바나 님 만화책 《제7여자회 방황》(대원씨아이,2013) 둘째 권을 읽습니다. 둘째 권에서도 책이름에 걸맞게 ‘헤매는’ 아이들이 참말 헤매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헤맨다고 할 만한지 잘 모를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들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 입시지옥에 허덕이는 아이들한테서 삶을 찾기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입시지옥이 아니면 취업교육만 받는 아이들한테서 사랑을 느끼기란 어렵기 때문입니다.




- “어라, 나 무슨 이상한 말 했나?” “카네 양에게는 7년 전이지만 시미즈에게 있어서는 어제 헤어지고 오늘 보는 거니까 여러 가지로 복잡할 거야.” (57쪽)

- “이런 사생활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걸 알면 난 이제 못 살아!” “괜찮아요. 여기에서의 기억은 꿈꾼 것처럼 떠올리려고 할수록 점점 사라져 가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야!” “괜찬ㄶ아요. 아무도 안 봐 주는 것이 쓸쓸한 겁니다. 당신이 남몰래 노력할 때도 우리는 분명히 보고 있으니까요.” (73쪽)



  아이들은 무엇을 알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꿈꿀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누릴까요?


  더 짧은 치마를 입어야 멋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앞머리를 더 길면 멋있을는지 궁금합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을 더 잘 알면 즐거울는지 궁금합니다. 시험문제를 하나 더 맞으면 기쁠는지 궁금합니다.


  학교에서 성교육은 하지만, 사랑교육은 안 합니다. 피임법을 가르치거나 콘돔을 주는 학교는 있을 테지만, 아기를 낳아서 어떻게 돌보고 사랑하여 아름답게 키우는가 하는 이야기를 가르치는 학교는 없다고 느낍니다. 아이를 낳으면 유치원에 넣고, 학원에 보내며, 학교에서 의무교육을 받도록 해서 공무원이나 회사원이나 공장 일꾼이 되도록 하라는 생각만 쳇바퀴처럼 물려받는 아이들이 된다고 느낍니다.




- “방금 전 이누야마도 만약 정말로 바이러스였다면, 나을 수 있는 거야? 여기에서도 ‘죽는다’는 게 있어?” “괜찮다니까?” “근거는?” “왠지 그냥.” “역시 왠지 그냥이구나. 젊은 사람들은 왠지 그냥 살아갈 수 있으니까.” (114∼115쪽)

- “까야아아앗, 살아 있었어? CG?” “CG 아니야? 진짜로 죽을 뻔했다고! 의문의 원시인 집단의 여왕으로 추대받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어느 틈에 초절기계문명의 전면전쟁에 휘말리기도 하고! 죽을 뻔했다고!” “뭐엇? 그게 뭐야? 세상을 빨리 돌려서 멸망까지 체험했다는 거야?” “그래!” “치사해!” “시끄러워! 나라면 혼자 도망치지 않았다고!” (154쪽)



  새롭게 꿈꿀 수 있어야 삶이 삶답습니다. 날마다 새롭다고 느낄 수 있어야 삶이 삶다워서 즐겁습니다. 날마다 새롭지 않다면 삶이 삶답지 않고, 날마다 새롭게 꿈을 키우고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지겹거나 따분할 뿐입니다.


  지겹거나 따분한 삶이기에 텔레비전을 보고 문학을 읽으며 스포츠에 빠져듭니다. 스스로 삶을 지을 줄 모르기에 새로운 아침에도 지겹거나 따분하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삶을 지을 줄 모르기에 의무교육에 몸을 맡기고, 스스로 삶을 지을 줄 모르기에 회사에 다니거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벌 생각밖에 못 합니다.


  돈을 벌어야 삶을 누리지 않습니다. 삶을 지어야 하루를 누립니다. 돈을 벌어서 밥을 사다 먹을 수 있어야 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지으면서 아이와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만화책 《제7여자회 방랑》에 흐르는 어설프면서 쓸쓸한 ‘헤매는’ 서툰 놀이에 묻어나는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깁니다. 4348.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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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무 2
김혜린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8년 10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47



겨울은 얼마나 추운가

― 비천무 2

 김혜린 글·그림

 대원사 펴냄, 1997.1.15.



  겨울은 어떤 철일까요. 겨울은 추운 철일까요. 겨울이 춥다면 왜 추울까요.


  겨울은 해가 짧고 저녁과 밤이 긴 철입니다. 해가 짧으니 바람은 한결 차고, 바람이 한결 차다 보니 하늘에서 비가 아닌 눈이 내립니다. 눈이 내리면서 땅이 얼어붙으면 풀은 좀처럼 돋기 어렵고, 나무는 겨울잠을 자면서 겨울눈을 맺습니다. 이동안 사람들은 불을 지펴서 몸을 녹이거나 옷을 두툼하게 껴입습니다. 숲짐승은 털이 더욱 길고 촘촘하게 돋으면서 겨울을 견디려고 애쓰거나, 아예 조용히 겨울잠을 잡니다.


  겨울에도 할 일이 많다면 따뜻하게 지내도록 몸을 돌봅니다. 겨울에 따로 할 일이 없다면 느긋하게 잠을 자거나 쉽니다.


  사람은 봄에도 아기를 낳으나 겨울에도 아기를 낳고, 봄에 아기를 낳는다 하더라도 겨울에도 똥오줌을 받아 기저귀를 빱니다. 사람은 여름에도 밥을 먹고 겨울에도 밥을 먹으니, 밥을 먹고 난 그릇을 부시려고 물을 씁니다. 집을 치우거나 쓸거나 닦으며, 아기가 이불이 오줌을 누거나 똥을 지리면 한겨울에도 이불빨래를 합니다.




- ‘만나면 할 말이 너무너무 많을 것 같았는데.’ (27쪽)

- “에루수만큼 물이 맑은 강도 없을 텐데. 산매만큼 말리꽃이 많이 피는 데도 없을 거야. 거기만큼 마음껏 그리운 땅은 없어. 우습지 않아, 진하? 우리가 원한 건 아주 조그만 것뿐인데.” (38쪽)



  여름에는 홑옷 차림으로 뛰놀면서 땀을 내는 아이들은, 겨울에는 겹옷 차림으로 뛰놀면서 땀을 냅니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면 여름에는 다른 홑옷으로 갈아입지만, 겨울에는 겉옷을 한 꺼풀 벗고 두 꺼풀 벗습니다.


  아이들을 가만히 보면, 그리고 어른인 내가 지난날에 한창 뛰놀던 나날을 그리면, 아이들은 여름이나 겨울을 가려서 놀지 않습니다. 더운 철에는 더운 철대로 놀이를 찾고, 추운 철에는 추운 철대로 놀이를 찾습니다. 더울 적에는 시원한 놀이를 헤아리고, 추운 철에는 따뜻한 놀이를 헤아리는데, 아무리 춥다 하더라도 몸을 움직여 땀을 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해가 짧은 겨울이라고 해서 놀지 않는 아이는 없습니다. 해가 짧아 밤이 긴 겨울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신나게 뛰노는 아이입니다. 철 따라 다른 바람과 햇살을 느끼면서 즐겁게 바람을 마십니다. 철마다 새로운 바람과 햇살을 맞아들이면서 기쁘게 하루를 짓습니다.





- “나처럼 못 배운 놈이 어떻게 시인이 돼?” “아냐! 시인이야.” (40쪽)

- “다 한통속이야! 뭘 안다고, 무슨 권리가 있다고 죽이고 살려요? 속죄해야 할 사람은 아버지면서, 아버지면서! 아버지가 호북 유가를 망쳤잖아요? 누구도 내게서 저 사람 못 뺏아가…….” (51쪽)



  김혜린 님이 빚은 만화책 《비천무》(대원사,1997) 둘째 권을 읽습니다. 첫째 권에 이어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흐릅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애틋하면서 안타까운 이야기가 흐릅니다.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 ‘만나면 할 말이 너무너무 많을 것 같았는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나고 보니 막상 무엇을 해야 할는지 모르고, 무슨 말을 속삭여야 할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마음으로 깊이 그리던 두 사람은 오직 한 가지를 할 뿐입니다. 사랑을 하지요. 서로 아끼고 돌보지요. 서로 북돋우고 보살피지요. 서로 쓰다듬고 어루만지지요.




- “이긴 자가 원하는 걸 가진다고? 그건 강자가 모든 걸 차지해도 된다는 소리와 뭐가 다르냐? 네가, 네가 밤새도록 토한 얘기들은 다 뭐냐? 마음만은 자유라고 한 건 누구였어? 왜, 왜 내 세계를 아는 척 배부른 투정을 부린 거냐!” (57∼58쪽)

- “변명한다고 나무래려면 하세요. 개죽음! 미친 짐승! 더 이상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기억 한 장도 없는 내 부모! 내 가문! 수없이 죽어 갔다는 원혼들을 위해 무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생지옥은 언제나 생지옥! 나를 몰아넣은 자들은 다음 세월이 와도 여전히 웃을 텐데, 뭐가 정이고 뭐가 사입니까? 제일 더러운 죄인이 대체 누굽니까?” (82∼83쪽)



  차가운 바람이 불어도 두 사람 사이를 가르지 못합니다. 뜨거운 볕이 불처럼 내리쪼여도 두 사람 사이를 떼지 못합니다. 어떤 권력이나 돈도 두 사람 사이를 쪼개지 못합니다. 수많은 군인이 총칼을 휘두르면서 윽박질러도 두 사람 마음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목숨을 빼앗는다고 해서 사랑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목숨을 빼앗으려 하더라도 사랑을 빼앗지 못합니다. 목숨을 빼앗고, 다시 빼앗고, 또 빼앗아도, 사람이 지은 사랑은 어느 누구도 털끝 하나조차 다치게 하지 못합니다. 만화책 《비천무》에 흐르는 사랑은 아프고 슬퍼 보이면서도 곱고 튼튼합니다.




- “죽일 필요까지 없잖소!” “이 마을이 쑥밭이 돼도 좋단 얘긴가?” (141쪽)

- ‘아냐, 아냐! 아냐! 난 당신을 배반하지 않았어! 그때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가 없었어! 내가 뭘 어떡할 수 있었다는 거야? 당신이 무얼 알아?’ (223쪽)



  하늘을 가르면서 춤을 춥니다. 하늘을 노래하면서 춤을 춥니다. 하늘을 꿈꾸면서 춤을 춥니다. 차갑지만 포근하게 볕이 내리쬐는 겨울날, 하늘을 두 팔 벌려 안으면서 춤을 춥니다.


  내 춤은 나를 사랑하는 춤입니다. 내 춤은 너를 그리는 춤입니다. 내 춤은 이 땅을 사랑하는 춤입니다. 내 춤은 너와 함께 이 땅에서 하루를 짓는 춤입니다.


  이 겨울에도 제비꽃은 볕바른 자리에서 살짝 고개를 내밉니다. 이 겨울에도 유채꽃은 바람 따라 씨앗을 날리면서 논둑과 밭둑에서 씩씩하게 고개를 내밉니다. 이 겨울에도 토끼풀꽃과 괭이밥꽃이 살짝살짝 고개를 내밀면서 햇볕을 쬡니다. 이 겨울에도 야무지게 흰눈을 맞으면서 동백꽃이 붉게 타오릅니다. 4348.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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