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소리 3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467



내가 부르는 소리

― 순백의 소리 3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이상은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3.6.25.



  설날을 앞두고 시골에서는 마을마다 ‘큰 청소’가 한창입니다. 그동안 시골을 떠나 살던 사람들이 시골에 계신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절을 하러 오기 때문입니다. 도시사람은 시골에 모처럼 찾아와도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줄 못 느낄 테고, 풀이 얼마나 자랐는지, 또 고샅이 어떠한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니, 이런 모습을 아예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동차로만 움직일 뿐이니까요. 무엇보다 도시에는 풀도 꽃도 나무도 둘레에 없습니다. 자동차가 오가기에 알맞도록 아스팔트 찻길이 있을 뿐입니다. 나무를 심는다 하더라도 시늉일 뿐이고, 그나마 시늉으로 심은 나무조차 제대로 바라보거나 쓰다듬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그래도 시골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설을 앞두고 풀을 뽑습니다. 아니, 설 앞이니 풀을 뽑지는 않고 밭두렁과 논두렁을 태웁니다. 온통 불잔치입니다. 이곳에서도 불을 피우고 저곳에서도 불을 피웁니다. 불을 피우는 김에 이런저런 쓰레기도 함께 태웁니다. 나중에 설이 지나고 보면, 설을 맞이해서 도시에서 가지고 온 선물꾸러미에 있던 플라스틱과 종이도 함께 태워요.


  마을에서는 곳곳에 불을 지르느라 부산하고, 면소재지에서는 마을방송으로 ‘논둑과 밭둑을 함부로 태우지 말라’고 알리느라 부산합니다. 면소재지 공무원은 마을을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그저 면사무소 책상맡에서 녹음테이프로 방송을 할 뿐입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집은 온통 새하얀 연기에 둘러싸입니다. 마당에 서도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고, 창문을 꼭꼭 닫아도 연기 냄새가 스며듭니다.




- “간판? 연주자를 그런 기준으로 보십니꺼?” “보지. 나는 일반론으로 하는 말이야.” (27쪽)

- “사와무라 마츠고로, 네 할아버지 맞지? 그 연주는 신기였어. 그런데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아는 것은 일부 연주자와 그 지방 사람들뿐. 평생 가난에 찌들었지?” “할배는, 그래도 행복했어예!” “난 말이야! 그 재능을! 그 보배를! 후세를 위해 남기지 않은 게 안타까워 죽겠다고! 마츠고로는, 보물을 혼자 끌어안고 죽어 버렸어!” (28∼29쪽)



  낮이 지나면서 비가 옵니다. 겨울비입니다. 겨울비는 마을마다 지핀 불을 잠재웁니다. 곳곳으로 퍼지던 연기는 비를 맞으면서 사그라듭니다. 이제 조금 숨을 쉴 만합니다. 겨울을 떠나 보내려는 비가 오면서 시골자락은 한결 샛노란 빛이 되고, 겨우내 시든 누런 풀잎은 곧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이 될 테지요.


  뒤꼍에 서서 비를 맞으며 겨울눈을 바라봅니다. 우리 집 복숭아나무와 매화나무에 돋는 겨울눈을 쓰다듬습니다. 앞으로 한 달 뒤면 움이 틀까요. 아니면 보름 뒤에 움이 틀까요. 포근하게 부는 바람과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은 들과 숲과 마을에서 자라는 나무가 새롭게 깨어나도록 북돋웁니다. 나는 아이들과 이 고운 바람과 기쁜 햇볕을 맞이하면서 웃고 노래합니다.




- “다른 사람이 쓰는 게 더, 내가 쓰면 샤미센이 불쌍할 것 같아서.” “불쌍해? 샤미센의 마음을 니가 아나?” (38쪽)

- “샤미센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잖아?” “응?” “사와무라가 가르쳐 주면 좋겠는데, 라고 다른 애들도 생각할 거야.” “그치만도 나는 누가 갈키 주나?” “뭐? 사와무라도 누군가한테서 배우고 싶었어?” (39∼40쪽)



  라가와 마리모 님이 빚은 만화책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3) 셋째 권을 읽습니다. 샤미센을 켜는 아이들이 나오는 《순백의 소리》인데, 셋째 권에서는 ‘샤미센을 켠 적이 없는 동무’한테 샤미센을 가르쳐야 하는 아이가 나오고,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소리를 어떻게 삭혀야 할는지 헤매는 아이가 나옵니다.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하고 똑같이 낼 수 있는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한테서 소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새롭게 들려줄 수 있는 소리란 무엇일까요.


  아마 할아버지도 처음에 혼자서 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할아버지도 처음에 ‘어린이’였을 적에는 이녁 할아버지나 둘레 다른 사람한테서 소리를 물려받았으리라 생각해요. 온갖 소리를 받아들이면서 마음으로 담고, 온갖 소리를 하나하나 녹여서 ‘내 소리’로 누리는 동안, ‘새로운 내 소리’ 하나가 태어났으리라 생각해요.




- “한 가지 걱정이 있는데, 니는 처음부터 잘 치는 사람만 봐 오지 않았나. 우선은 초보자를 상대로, 썽내지 말그라.” (59쪽)

- “내 주위엔 그 정도는 당연히 켜는 사람밖에 없었다. 소리도 제대로 못 내는 사람이 대회까지 얼마나 늘지 내 우예 아노? 대회 때, 나는 느그들 수준에 맞춰 줄 생각 없다.” (61∼62쪽)



  내가 부르는 소리는 내가 사는 소리입니다. 내가 부를 소리는 내가 살아갈 소리입니다. 내가 부른 소리는 내가 살아온 소리입니다. 나는 언제나 내 삶에 따라 내 소리를 빚습니다. 내 소리는 오롯이 내 삶이면서 내 꿈이요 내 길입니다. 내 소리는 옹글게 내 사랑이면서 내 빛이며 내 손짓입니다.


  더 나은 소리가 없고 덜떨어지는 소리가 없습니다. 대회에 나가서 1등이 되어야 훌륭한 소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다운 소리를 찾을 때에 나 스스로 즐겁습니다. 나다운 소리를 찾으려고 저마다 새롭게 배워서 새롭게 거듭나려고 애써요.




- ‘이때 나는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나 있었다. 자기 자신의 무엇에 짜증이 나느냐고 그걸 알면 이렇게 짜증나지도 않지!’ (96∼97쪽)

-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소리가 되고 싶다!’ (105쪽)

- “다들 나한테는 관심 없다. 내 뒤에 버티고 있는 할배의 ‘소리’를 듣고 싶은 것뿐이지.” (128쪽)



  빗소리를 듣습니다. 이제 겨울빗소리는 끝납니다. 이월이 무르익다가 삼월로 접어들면, 이때부터는 봄빗소리입니다. 겨울비와 봄비는 다르고, 가을비와 여름비는 달라요. 겨울볕과 봄볕은 다르며, 겨울노래와 봄노래는 다르지요.


  똑같은 날이 없으니 똑같은 소리도 없습니다. 똑같은 하루가 없으니 똑같은 노래도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으니 똑같은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는 늘 모두 다른 꿈을 가슴에 품고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다른 삶을 짓습니다. 만화책 《순백의 소리》에 나오는 아이들이 웃고 노래합니다.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이 겨울빗소리를 가만히 귀여겨들으면서 내 하루를 웃고 노래합니다. 4348.2.15.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수께끼 난자몬자 6
이토 시즈카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466



어떤 어른이 되려는가

― 수수께끼 난자몬자 6

 이토 시즈카 글·그림

 이지혜 옮김

 삼양출판사 펴냄, 2015.1.10.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못 하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 사귀는 일조차 제대로 못 하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있어도 제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까요. 다가서려 하거나 말을 걸려고조차 하지 않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자전거를 못 탄다고 스스로 자꾸 생각하니 자전거를 끝내 못 탑니다. 자전거를 배우다가 넘어지면 어떤가요?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하면서 자전거를 배웁니다. 아기는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익힙니다. 아기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거나 얼굴이 깨지기를 두려워 한다면, 아기는 끝내 못 걷습니다. 어버이가 아기한테 할 일은, 아기가 두려움이 없이 씩씩하게 서도록 웃으면서 두 팔을 벌려 맞이하는 일입니다.



- “대체 난 뭘 하고 있었을까. 후우타가 없어졌다는 것만 생각하고, 아버지가 어떤지 전혀 눈치 못 챘어.” (13쪽)

- “당신이 없는 10년을 홀로 보내고, 난 당신보다 나이를 먹었지.” “좋은 10년이었수?” “그렇구먼. 나쁘지 않았어.” (27쪽)





  우리는 어떤 어른이든 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어른이 될 수 있고, 바보스러운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을 아름답게 가꾸어서 아름다운 일을 하면, 우리는 늘 아름답지요. 생각을 하나도 안 가꾸면서 하나도 안 아름다운 일을 하면, 우리는 그만 바보스러운 어른이 됩니다. 어느 쪽이 되든 우리는 늘 우리 스스로 삶을 짓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나 스스로 제대로 바라보면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놀이로 기쁘게 웃으려 하는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말 한 마디를 할 적에도 어떤 낱말을 고르고 어떤 말투로 하려는지 찬찬히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삶을 생각하고, 모든 뿌리를 생각하며, 모든 숨결을 생각해야, 비로소 나다운 길을 걸어가면서 슬기롭고 아름다운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 “네가 이 마을의 규율울 어긴 것이 문제라고 하는 거다. 네가 멋대로 판단하고, 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 일을.” “아니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곁에 있어 줬던 거 난 아주 잘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후회 안 한다구요!” “이 꼬맹이가! 쵸시 님께 말대답하지 마라!” “뭐가 쵸시 님이야! 마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둥 그럴듯한 말만 지껄이는데, 그냥 독재주의자에 배배 꼬인 영감이잖아!” (50∼52쪽)






  이토 시즈카 님이 빚은 만화책 《수수께끼 난자몬자》(삼양출판사,2015) 여섯째 권을 읽습니다. 난자몬자 이야기는 이제 여섯째 권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수수께끼가 깃든 나무가 있는 조그마한 섬에서 살아가는 길고 짧은 이야기를 찬찬히 마무리를 지어요.


  이 만화책을 이끄는 아이들은 열다섯 살 나이에 서른 살 어른을 꿈꿉니다.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되어 살려는지 가만히 꿈을 짓습니다. 아름다운 어른이 될는지, 바보스러운 어른이 될는지 스스로 생각하면서 길을 찾으려 합니다.


  이 아이들은 ‘굳은 틀’로 생각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바보스러운 허물’을 뒤집어쓸 생각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언제나 새로우면서 환한 눈길이 되고 싶습니다. 이 아이들은 늘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게 어깨동무하는 삶을 바랍니다.



- “너희가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는다고 저 애들한테 아무 도움도 안 되잖니! 이럴 때일수록 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억지로라도 기운을 내란 말이다!” (87쪽)

- “이 마을의 숲은, 너희를 살리고 받아들였어. 그러니까 우리도 그걸 따라야지. 왜냐하면 이 섬의 숲은, 우리를 지키고 길러 준 ……” (95쪽)





  열다섯 살 아이들뿐 아니라 더 어린 아이도 ‘학교를 다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갑자기 ‘손가락 길이’만큼 몸이 줄어들었거든요. ‘손가락 사람’이 된 아이들을 받아들여서 가르칠 만한 학교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스스로 삶을 짓고, 스스로 생각을 가꾸며, 스스로 사랑을 펼칩니다.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마련해서 누립니다. 이웃과 사이좋게 어울리는 길을 스스로 생각해 내어 이룹니다.


  남이 알려주기에 배우지 않아요. 스스로 길을 찾아서 배우지요. 남이 보여주니까 따르지 않아요. 아침마다 스스로 생각을 열고, 날마다 스스로 빙글빙글 웃음꽃을 피웁니다.



- “15년 후. 우린 30살이겠다.” “아, 아저씨네!” “우린 15년 후에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116쪽)



  새로운 마음인 사람은 서른 살이건 예순 살이건 젊습니다. 젊은 사람은 늘 푸른 마음입니다. 새롭지 않은 마음인 사람은 열다섯 살이건 열 살이건 안 젊습니다. 애늙은이라 할 만하고, 철이 안 들지요. 새롭지 않은 마음일 때에는 그저 늙습니다. 새로운 마음일 때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새롭지 않은 마음일 때에는 두려움만 많아서, 도무지 한 발짝도 떼지 못해요.


  어른이 되려는 사람은 늘 새로운 길을 걷습니다. 새로운 길을 새로운 노래를 부르면서 걷습니다. 새로운 길을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꿈을 지으면서 걸어요. 이 새로운 길에는 새와 풀벌레와 개구리가 함께 노래를 합니다. 이 새로운 길에는 꽃과 나무와 풀이 함께 춤을 춥니다. 4348.2.13.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5-02-13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너무 콕콕 쑤셔서 아파서 ㅎㅎㅎ
눈 돌리고 싶어지기도 한답니다.
아는 거죠. 엄살 부리고 싶구나...하고.

숲노래 2015-02-13 21:00   좋아요 1 | URL
즐거운 곳에 눈을 돌리면 됩니다~

[그장소] 2015-02-13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게 배운것은 잘 잊히지 않아요.
시간도 그만큼 들고 잃는 것 역시 있어도
헛되지 않다는 걸...이제는 조금 압니다.

숲노래 2015-02-14 09:27   좋아요 1 | URL
아프다고 해도 그 한때뿐이고
오래도록 즐거운 숨결로 거듭나도록 이끄는
고마운 일이라고 느껴요..
 
아르슬란 전기 1 - 만화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다나카 요시키 원작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464



바보스러운 칼부림 이야기

― 아르슬란 전기 1

 다나카 요시키 글

 아라카와 히로무 그림

 김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11.25.



  싸움은 언제나 다른 싸움으로 이어집니다. 작은 하나를 놓고 다투는 아이는 이내 다른 것을 놓고도 으레 다툽니다. 작은 다툼은 큰 다툼이 되고, 언제나 다투는 하루로 나아갑니다.


  사랑은 언제나 새로운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작은 하나를 놓고 나누는 사랑은 이내 새로운 사랑이 싹트도록 이끕니다. 작은 사랑은 큰 사랑이 되고, 언제나 사랑하는 하루로 빛납니다.


  이리하여, 싸움은 늘 다른 싸움을 찾기 마련입니다. 이쪽에서 싸움이 끝날 듯하면, 다른 쪽에서 싸움을 할 빌미나 구실을 찾지요. 싸움을 붙잡으면 싸움이 끝나지 않고, 지겹도록 이어지는 싸움에 지칠 무렵이면 어느새 힘을 잃고 죽음길로 접어듭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늘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이곳에서 나누는 사랑은 천천히 저곳으로 퍼집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랑이 자꾸 샘솟습니다. 이리하여 자그마한 사랑 씨앗 한 톨은 온누리를 그득그득 따뜻하게 채워서 다 함께 아름다운 이야기꽃으로 피어납니다.



- “허허허! 이 정도는 기술이라고도 할 수 없사옵니다! 그저 검의 기본동작일 뿐. 다만 그 기본을 단련하지 않고선 기술도 위력을 잃는 법. 기본을 갈고닦으시옵소서.” (11쪽)

- “하하하! 자네를 얕잡아보는 게 아닌가, 카슈바드?” “무슨 말씀을. 저를 얕잡아보는 게 아니라 이 녀석들이 전하를 진심으로 흠모해서입니다. 짐승이나 새는 상대하는 인물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 전하의 마음이 견실함을 이 녀석들도 잘 아는 게지요.” (17쪽)






  싸움처럼 바보스러운 짓은 없습니다. 서로 구렁텅이로 나아가는 짓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으레 싸움에 휩싸입니다. 가만히 보면, 학교는 늘 싸움터입니다. 숫자를 놓고 싸우는 곳이 학교예요. 시험점수로 싸우고, 내신등급으로 싸우며, 더 높은 학교 이름값으로 싸웁니다.


  오늘날 사회를 놓고 본다면, 학교는 아이들한테 아무것도 안 가르치거나 못 가르칩니다. 아이들을 싸움터로 내모는 지식과 숫자는 보여주되, 삶을 가르치지 못하고 사랑을 가르치지 않아요.


  숫자싸움과 등수싸움과 성적싸움만 하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경제싸움과 정치싸움과 문화싸움은 하겠지요. 사랑을 배운 적이 없으니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사랑을 가르치는 어른을 만나지 못했으니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도 사랑을 물려줄 줄 모릅니다.



- “이알다바오트 신께 충성을 다하고 이교도의 씨를 말려야 해!” “왜 그렇게까지 이교도를 증오하나?” “우리의 이알다바오트 신은 인간을 평등하게 대하셔! 하지만 너희는 어떻지? 사람 밑에 사람을 두는 이 노예 제도는 뭐지? 이알다바오트 신은 그러한 일을 용서하지 않으셔! 인간은 모두 평등해! 따라서 우리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너희 이교도들은 차별하고 죽여도 돼!” ‘앞뒤가 안 맞잖아!’ (35∼37쪽)




  다나카 요시키 님이 쓴 글에 아라카와 히로무 님이 만화라는 옷을 입힌 《아르슬란 전기》(학산문화사,2014) 첫째 권을 읽습니다. 책겉을 보면 퍽 조그마한 글씨로 ‘열다섯 살’이 안 되면 볼 수 없는 책이라고 적힙니다.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책을 펼치니, 열다섯 살이 안 된 아이가 보기에는 걸맞지 않다 싶도록 ‘죽이고 죽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중동을 무대로 삼은 ‘전쟁 대서사시’라고도 하는 “아르슬란 전기”라 하는데, ‘서사시(敍事詩)’는 “역사적 사실이나 신화, 전설, 영웅의 사적 따위를 서사적 형태로 쓴 시”라고 합니다. 그러면 ‘서사(敍事)’는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뒤적이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 영웅과 얽힌 이야기를 꾸미지 않고 그대로 적은 시’가 ‘전쟁 서사시’인 셈입니다. 《아르슬란 전기》라 한다면, ‘아르슬란’이라는 사람과 얽혀서 싸움터에서 누가 영웅으로 남아서 이야기를 남겼느냐 하는 대목을 밝힌다고 할 테지요.



- “전하께 큰 폐를 끼쳤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상관없네. 그대는 옳은 소리를 한 것 아닌가?” “예. 칼란 장군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78쪽)

- “칼란! 왜 이러는가?” “까닭이 있거든. 슬프고 가엾은 왕자여. 너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만,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124쪽)




  만화책 《아르슬란 전기》 첫째 권을 보면, 어느 날 싸움에서 이쪽과 저쪽 모두 몇 만에 이르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었다고 합니다. 한쪽은 12만 7천에 이르는 사람이 죽고, 다른 한쪽은 5만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요.


  이날 죽은 사람은 왜 죽어야 했을까요. 이날 죽은 사람은 총알받이, 아니 칼받이나 창받이가 되어서 어떤 삶을 마감했을까요. 몇 만에 이르는 사람은 이제껏 무엇을 보람으로 여기면서 살다가, 하루아침에 칼이나 창을 맞아서 이슬처럼 사라져야 했을까요?


  전쟁을 일으키는 우두머리는 흔히 말하지요. 저쪽 나라에서 우리 비위를 거슬린다든지, 저쪽 나라는 못된 짓을 일삼으니 군대를 몰아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해요. 저쪽 나라에서는 이쪽 나라를 보면서 거짓스럽거나 바보스러운 짓을 일삼는다고 말하고, 이쪽 나라가 하는 멍청한 짓은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 다스려야 한다고 말해요.


  이쪽이나 저쪽은 서로 아끼거나 믿는 슬기로운 길을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서로 죽이고 죽으면서 피를 흘리려 합니다. 함께 땅을 기름지게 일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서로 힘을 모아 아름다운 숲과 마을이 되도록 하지 않습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겁고 아늑한 삶이 되도록 가꾸지 않습니다.



- 파르스 력 320년 10월 16일. 이날 아트로파테네 평원에서 기병 5만 3000명과 보병 7만 4000명이 전사하여 파르스는 국군 총 병력의 반을 잃었다. 승자가 된 루시타니아 군도 기병과 보병을 합쳐 5만 이상을 잃었다. (167∼168쪽)

- “그때의 비명이 아직도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네. 이교도라고 해서 갓난아기를 죽인 자들에게 신은 축복을 내려 주시려 할까?” (170쪽)




  ‘전쟁 영웅’ 이야기를 그리는 책을 볼 때면 으레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죽이고 죽는 이야기’를 좋아할까요? 스스로 싸움터에서 총이나 칼이나 창에 맞지 않았으니,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까요? 팔다리가 잘려 보아야 이런 이야기를 도리질을 할 수 있을까요?


  이웃나라와 어깨동무를 할 생각은 왜 안 하거나 못 할까요? 전쟁무기를 만들거나 군대를 거느리려고 하는 일이 아닌, 삶을 가꾸고 사랑하는 데에 슬기와 힘과 겨를을 모으려고 하는 마음은 왜 못 품을까요?


  죽이려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려 하면서 끝내 스스로 죽는 길로 갑니다. 총이나 칼을 드는 사람은 스스로 총이나 칼에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날에는 다른 사람을 총이나 칼로 억누를는지 모르나, 나이가 들어 몸에서 힘이 빠지면 다른 사람이 휘두르는 총이나 칼에 맞아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느 때에 사랑으로 이웃을 보살피거나 아낀 사람은, 나중에 늙어도 이웃이 따사로운 사랑으로 아끼거나 보살펴 주기 마련입니다. 사랑을 심었으니 사랑이 돌아오지요. 전쟁과 미움을 심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전쟁과 미움을 돌려받습니다. 전쟁에는 아군과 적군이 없습니다. 전쟁에서는 모두 바보스러운 칼부림만 있습니다. 4348.2.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능력자 오다기리 쿄코의 거짓말 6
카이타니 시노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60



‘초능력’이 있으면 무엇을 하겠니

― 영능력자 오다기리 쿄코의 거짓말 6

 카이타니 시노부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2.3.25.



  카이타니 시노부 님 만화책 《영능력자 오다기리 쿄코의 거짓말》(학산문화사,2012) 여섯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사람들한테 초능력이나 영능력이 터져나오면,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요? 초능력이나 영능력을 언제 어디에서나 쓸 수 있으면,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까?요 하늘을 훨훨 날면서 ‘나쁜 놈’을 죽이거나 없앨까요? 그러면 ‘나쁜 놈’이 모두 사라진 뒤에는? 나쁜 놈이 모두 사라진 뒤에는 무엇을 할는지요? 나쁜 놈을 모두 없앤 뒤에도 전쟁무기나 군대가 있어야 할까요? 다시 나쁜 놈이 나타날 수 있으니까 전쟁무기나 군대는 그대로 두어야 할까요? 초능력이나 영능력이 있어야 지구별에 평화를 심을 수 있는가요? 초능력이나 영능력이 없으면 지구별에 아무런 평화가 못 깃들까요?



- “착각하지 말아요. 당신을 나무라려는 건 아니니까. 왜 그저께 시어터 PPP 분장실에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20쪽)

- “까놓고 말해서 그깟 노트 몇 권 도둑맞았다고 주춤할 정도라면 켄타의 실력이 고작 그 정도였다는 뜻이잖아! 그럴 거면 코미디언이고 뭐고 때려치워!” (42쪽)




  나한테 초능력이나 영능력이 터져나와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든지 ‘괴로운 동무’를 살리려 한다는 생각은 ‘영웅’이 되려는 마음이라고 느낍니다. 초능력이나 영능력이 터져나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돈이 많아야 어려운 이웃을 돕지 않아요. 저마다 만 원씩 도울 수 있고, 저마다 천 원씩 도울 수 있어요. 만 원씩 천 사람이 도우면 천만 원이고, 천 원씩 만 사람이 도와도 천만 원입니다. 나 혼자서 어려운 이웃 한 사람한테 천만 원을 대뜸 도울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밥을 한 숟가락씩 덜어 한 그릇을 이룹니다. 내 밥그릇을 통째로 동무한테 줄 수 있을 테지만, 여러 동무가 한 숟가락씩 덜어서 새로운 한 그릇을 빚을 수 있어요.


  우리 삶은 우리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이루어집니다. 영웅이나 우두머리가 있어야 하는 삶이 아니라, 서로 이웃과 동무가 되어서 아름답게 사랑을 하기에 즐거운 삶입니다.



- “사라이시 씨는 훔친 속옷을 고양이 집에 두고 갔을 뿐이야. 나는 기숙사 사람들에게 ‘도둑맞은 속옷을 찾았다’고 했을 뿐이고, 그리고 기숙사 식구들은 그걸 보고 ‘범인은 고양이였다’고 멋대로 믿은 것뿐이지. 거짓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속옷 도둑에 대한 불안도 모두의 마음에서 깨끗이 사라진 거야. 안 그래?” (97쪽)

- “이런 배지를 달게 하는데, 너희들 기분은 어때?” “물론 가능하면 없는 게 좋지만, 그래도 우리가 무슨 말을 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132쪽)





  만화책 《영능력자 오다기리 쿄코의 거짓말》에 나오는 오다기리 쿄코는 영능력을 쓸는지 모르고 안 쓸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 만화책에 나오는 오다기리 쿄코는 혼자서 모든 일을 풀거나 맺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제 수수께끼를 풀고 맺으면서 스스로 삶을 짓도록 한손을 거듭니다. 영웅처럼 짠 하고 나타나서 실타래를 풀지 않아요. 왜 그러한가 하면, 영웅놀이는 영웅 혼자만 재미있고, 다른 사람은 들러리가 되거든요.


  하느님 혼자서 지구별을 살리지 않습니다. 모든 하느님이 다 함께 슬기와 힘을 모아서 지구별을 살립니다. 하느님은 우리 가슴속에 있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슬기와 힘을 모을 때에 지구별을 살립니다. 나 혼자서 못 살리고, 너 혼자서 못 살립니다. 함께 생각하고, 함께 꿈꾸며, 함께 사랑할 때에 비로소 지구별이 찬찬히 살아나요.



- “쿄코 씨, 이 학교는 지옥이에요. 학생 전원에게 성적순으로 등급을 매기고, 마치 그걸로 인간의 모든 가치가 결정되는 양 세뇌하죠.” (160쪽)

- “시청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소라야마 씨는 UFO 연구가지만, 본업은 우주물리학자예요. 이분은 외계인을 만나고 싶은 일념으로 과학을 연구했고, 그 결과 발표한 구조역학 이론은 현재 우주 스테이션에서 응용되고 있죠.” (213쪽)





  사회는 사람들을 굴레에 가두려 합니다. 정치는 사람들을 쳇바퀴에 가두려 합니다. 경제는 사람들을 수렁에 가두려 합니다. 교육은 사람들을 무덤에 가두려 합니다. 종교는 사람들을 지옥에 가두려 합니다. 문학과 예술은 사람들을 가시밭길에 가두려 합니다. 인문학은 사람들을 바보놀음에 가두려 합니다.


  우리가 저마다 갈 길은 ‘내 삶’입니다. 너와 나를 견주어서 ‘유행’을 따르거나 ‘시사상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삶을 스스로 사랑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졸업장을 왜 따야 하나요. 왜 도시에 있는 큰 회사에 들어가야 하나요. 나는 내 삶을 지어야 합니다. 졸업장을 따든 도시에 있는 큰 회사에 들어가든, 이 길이 바로 ‘내 삶길’이라면 즐겁게 갈 노릇이고, 내 삶길이 아닌 돈길이나 이름길이라 한다면 씩씩하게 떨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을 짓는 사람은 언제나 초능력과 영능력을 씁니다. 삶을 짓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초능력과 영능력을 못 씁니다. 손가락으로 에너지 물결을 내뿜어 높은 건물을 무너뜨려야 초능력이 아닙니다. 어버이가 끓여서 아이한테 내미는 따스한 국 한 그릇이 바로 초능력입니다. 4348.2.11.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성귀족 1 세미콜론 코믹스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김동욱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463



추워도 하늘을 보렴

― 백성귀족 1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김동욱 옮김

 세미콜론 펴냄, 2011.3.25.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스스로 춥다고 생각하니 춥습니다. 스스로 덥다고 생각하니 덥습니다. 춥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추위가 찾아오고, 덥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더위가 찾아옵니다. 우리 삶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면서 흐릅니다.


  어젯밤 경기도 고양시 일산 한켠을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나는 우리 시골에 있을 때뿐 아니라, 도시로 마실을 나올 적에도 별을 보면서 살겠어’ 하고 생각하면서 걷는데, 이때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퍽 많다 싶은 별을 봅니다. 서울이나 부산뿐 아니라 커다란 도시는 밤에도 불빛이 많아 별빛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하늘은 얼마나 매캐한가요. 도시에서 새파란 하늘을 보기란 아주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도 별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고, 별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면, 도시에서도 시골 못지않게 별잔치를 누릴 만합니다. 도시에서도 새파란 하늘을 낮에 실컷 누릴 만합니다.


  이리하여, 나는 어젯밤에 일산이라고 하는 번쩍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별잔치를 누립니다. 다만, 이 별잔치를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는 다른 사람은 안 보입니다. 모두 추위에 웅크리면서 고개를 푹 파묻거나 땅바닥만 바라봅니다.



- “현재 우리 일본의 식량자급율은 불과 40%! 자국민의 절반도 채 먹여살리지 못하는 이 나라에 과연 미래가 있단 말인가? 아니, 없다! 한편 그러한 와중에서도 일본의 식량 창고, 훗카이도 지방에는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원하기 위해 매일같이 흙을 뒤집어쓰며 땀흘려 일하는 한 명의 만화가가 있었다! 그 이름 하여 농민, 아라카와 히로무!” (3쪽)



  도시에서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으레 ‘자가용 장만하기’를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려면 자가용이 있으면 무척 수월합니다. 나는 자가용을 장만하지 않았으나, 이웃들이 자가용을 장만하는 일을 얼마든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있으면 아이한테 딸리는 살림이 얼마나 많은데요. 스스로 마당쇠(천하장사가 아닌 마당쇠)가 되려 하면, 아이한테 딸리는 살림을 얼마든지 가방에 챙겨서 들고 다닐 만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 스스로 마당쇠가 되려는 어버이는 퍽 드물어요. 아무튼, 아이를 낳아 돌보려 할 적에 자가용이 있으면 무척 수월하니 자가용을 장만할 생각을 키우는데, 도시는 좁기 때문에 자가용이 있어도 자가용을 세울 자리를 찾기가 무척 고단합니다. 도시를 누비는 자동차가 많은 만큼, 이 많은 자동차가 ‘굴러서 돌아다니지 않을 때’에 조용히 쉬거나 잠들 자리를 찾는 일은 아주 빠듯해요. 그러니까, 아이를 태우고 여러 살림을 실을 자가용과 주차장은 생각합니다. 이 다음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생각하지 못하느냐 하면, 아이가 자라는 동안 ‘아이가 마음껏 뛰놀 곳’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 아이처럼 이웃에도 아이가 있을 테니, 모든 아이가 실컷 뛰놀면서 ‘자동차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골목이나 빈터나 놀이터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 “도회지에 나오니 여러 가지로 기겁을 할 노릇이라니까. 감자 가격 보고 깜짝 놀랐어.” “시골에서는 얼마나 하길래?” “감자는 공짜. 우리 집에서는.” “뭐?” “감자도, 무도, 호박도, 산마도, 양배추도, 돈 주고 사먹어 본 역사가 없다고! 모든 야채는 다 물물교환으로 손에 넣는단 말이야!” (11∼12쪽)

- “어라? 할아버지 뭐 하세요?” “갈비뼈가 부러져서 잠시 쉬고 있었지. 나무에서 떨어져서 말이다. 아마 두 대는 나갔을 걸. 하하하하하.” “아, 네.” (47쪽)



  아라카와 히로무 님이 빚은 만화책 《백성귀족》(세미콜론,2011) 첫째 권을 읽습니다. 훗카이도에서 나고 자라면서 소치기처럼 살았다는 아라카와 히로무 님은 이녁이 걸어온 삶길을 만화책에 고스란히 담곤 합니다. 다른 이야기도 즐겁게 그리지만, 아라카와 히로무 님이 스스로 다닌 농업고등학교 이야기를 신나게 만화로 그릴 뿐 아니라, 《백성귀족》처럼 시골에서 너른 땅을 돌보면서 겪고 누린 하루를 만화로 재미나게 그립니다.


  책이름 그대로 백성이면서 귀족이라 할 만한 시골살이입니다. 왜냐하면, 온갖 일을 다 해낼 줄 알아서 ‘백성’이고, 가장 아름답고 정갈하면서 좋은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귀족’입니다.



- “지금 훗카이도가 독립하면 일본의 자급율은 어떻게 되는데요?” “20% 정도가 아닐까?” “우리는 다 굶어죽으라고?” “죽기 싫으면 밭을 일궈! 가축을 키워! 아니면 훗카이도로 이주해서 농업에 투신하던가!” (63쪽)

- “자기 집에서 먹는 야채는 무농약에 유기비료를 듬뿍 쓰고, 출하용(소비자용)은 화학비료랑 농약을 듬뿍 쓰지롱!” “짜샤!” “우리 집은 안 그래! 도대체가 말이야, 소비자가 문제라니까. ‘벌레 먹은 건 싫어’라느니, ‘모양이 똑바르지 않은 건 싫어’라느니, 그런 소릴 하니까 농약을 쓸 수밖에 없잖아. 그런 주제에 농약 잔뜩 들어간 수입품은 꾸역꾸역 잘도 먹고 있으니,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우와, 이 인간, 책임을 죄다 소비자한테 떠넘기고 있네!” (104∼105쪽)



  한국은 식량자급율이 일본보다 훨씬 낮습니다. 그러나 이를 깨닫거나 생각하는 도시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한겨울에도 딸기와 배를 먹을 수 있는 도시입니다. 한여름에도 고구마와 배추를 먹을 수 있는 도시입니다. 어딘가 걸맞지 않은 줄 모를 뿐 아니라, 생각조차 못하는 도시입니다.


  그러면, 도시에서는 무엇을 생각할까요? 도시에는 문화와 예술이 있고, 출판사와 만화책이 있습니다만, 또 도시에는 박물관에다가 전시관에다가 커다란 도서관에다가 온갖 문화시설이 있습니다. 청와대라든지 국회의사당 따위도 도시에 있고, 대학교라든지 온갖 회사가 도시에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런 것들은 시골이 없어도 버틸 수 있을까요?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이 없어도 문화나 예술이나 역사나 학문이나 정치나 경제가 설 수 있을까요? 시골마을 둘레에 너르고 깊으면서 푸른 숲이 있지 않아도 도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시골과 숲이 함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시골과 숲이 아주 넓고 아름다우면서 깨끗하게 있어야 도시가 튼튼하게 섭니다. 시골과 숲이 아주 멋지면서 사랑스럽고 참다울 적에 도시에서 씩씩하게 문화와 문명과 예술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는 마릅니다. 뿌리가 없으면 잎도 꽃도 피지 않습니다. 뿌리가 없으면 씨앗은커녕 열매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도 별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도시에서도 별잔치와 미리내와 무지개를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도시에서도 뭉게구름과 소낙비가 있어야 하고, 도시에서도 흰구름과 도랑물과 반딧불이가 춤추어야 합니다. 삶이 있을 때에 사랑이 자라고, 사랑이 있을 때에 사람이 착합니다. 4348.2.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