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또 그리고 5 - 완결
히가시무라 아키코 지음, 정은서 옮김 / 애니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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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45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리고 또 그린다

― 그리고, 또 그리고 5

 히가시무라 아키코 글·그림

 정은서 옮김

 애니북스 펴냄, 2016.8.10. 8000원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지만, 나한테는 글을 가르친 스승이 없습니다. 딱히 스승으로 꼽을 분이 없지만 나한테 누군가 스승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스승이요 나를 이루는 모든 숲이나 마을이나 바람이 스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학교를 나오지 않는대서 글을 가르친 스승이 없을 만하지는 않을 테지만, 고등학교를 마칠 적까지 입시공부만 했을 뿐, 글쓰기나 책읽기를 가르치거나 이끈 사람은 없어요.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며 연필을 쥐고, 늘 스스로 헤아리며 책을 살폈어요.


  곰곰이 따진다면 학교에서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학교 바깥에서는 누구나 스승이 되었어요. 낳고 기른 어머니가 살림과 삶을 보여주는 스승입니다. 동무가 되어 함께 웃고 울던 이들이 스승입니다. 마을이나 사회를 이루면서 저마다 제몫을 씩씩하게 맡는 이웃들이 스승이에요.



그림이 팔릴 리도 유명해질 리도 없는데 그렇게 고된 길을 평생 걸어갈 사람은 없어요. 선생님은 바보예요. 사람이 너무 물러터졌어요. 언제나 그랬어요. 그때도, 그때도. (10쪽)


만화를 선택했다고 말하면 근사하게 들리겠지만, 화실을 이어받지 않고 도망친 저는 오사카로 돌아온 후, 매일 미친듯이 만화만 그렸습니다. 선생님 걱정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리려는 것처럼 그저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제 선택이 풀리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는 것처럼. (46쪽)



  히가시무라 아키코 님이 이녁 ‘그림 스승’을 기리면서 이녁 발자국을 되새기는 자서전 같은 만화책 《그리고, 또 그리고》(애니북스,2016) 다섯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책 《그리고, 또 그리고》는 모두 다섯 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이 만화책은 일본에서 ‘만화대상 2015’ 대상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첫째 권부터 다섯째 권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 그만 한 상을 받을 만하겠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 만화책을 그린 분은 이녁한테 부끄러울 수 있는 대목도 찬찬히 끄집어내어 털어놓고, 그림을 그리는 길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되새기고, 삶을 이루는 든든한 밑힘이란 무엇인가를 차분하게 펼칩니다. 누구나 만화를 그릴 수 있지만, 아무나 그리지 못하는 만화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만화책 다섯 권으로 찬찬히 들려주어요.



막상 도쿄에 와 보니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일도 재미있고 편집자들과 술 한잔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새로운 인간관계도 많이 형성되어 언제부터인가 니시무라와 소원해졌습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저는 금방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들어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결혼해서 출산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혼했습니다. 이때가 제 인생의 암흑기였습니다. 매일 울고 또 울었고 원고를 그리면서도 울었습니다 … 하지만 그 시절만큼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에 구원받은 적이 없었을 겁니다. (116∼117쪽)



  만화가 아주머니한테 ‘그림 스승’이던 분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술담배를 하지 않았다는 ‘그림 스승’은 그만 폐암에 걸렸다 하고, 만화가 아주머니가 한창 잡지 연재를 많이 받으면서 만화가로 자리를 잡을 무렵 큰병을 앓으며 쓰러졌다는데, ‘도쿄에서 바쁜 만화가로 지내느라’ 아예 잊고 살았다고 해요.


  만화가 아주머니 스스로 털어놓기도 하는데 ‘만화가로 자리를 잡고 널리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해요.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기도 했다지만, 뒤를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고 해요.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려 했고, 바로 이 몸짓 ‘앞으로만 나아가려는 몸짓’은 이녁 ‘그림 스승’한테서 배웠다고 해요.


  언제 어디에서나 “그려라” 하고 한 마디를 터뜨렸다고 하는 ‘그림 스승’이라고 하거든요. 배고프든 배부르든, 몸이 힘들든 안 힘들든, 그림을 많이 그렸든 적게 그렸든, 이런 일이 있든 저런 일이 있든, 아무튼 그림을 그리고 나서 얘기하자고 다그치면서 그림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인간에게는 모라토리엄 기간이 필요없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언제나 가르쳐 주셨는데 말입니다. (60쪽)


슬플 때도, 감기에 걸려도, 열이 날 때도, 화가 날 때도, 짜증스러워도, 제 만화가 재미없다는 말을 들어도, 그림이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앙케트 결과가 나빠도, 단행본이 팔리지 않아도, 지진이 일어나도, 도쿄가 정전으로 컴컴해져도, 만화를 그리고 있으면 언제나 머릿속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119∼120쪽)



  《그리고, 또 그리고》 다섯째 권을 보면 만화가 아주머니가 아무래도 ‘그림 스승’한테서 그림을 배우며 몸에 익힌 재미난 모습이 살짝 나옵니다. 만화가 아주머니는 이녁 만화를 놓고 독자들이 재미없다고 하면, 이런 비평이 인터넷에 올라오면 “폰트가 춤을 춘다”라든지 “명조체가 움직인다”고 말한대요. 이녁 만화책을 나무라는 글이 아니라 ‘폰트’나 ‘명조체’일 뿐이라고 여긴다고 합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독자들이 어떻게 이녁 만화를 읽더라도 다시 그리고 또 그리며 새로 그릴 뿐인걸요. 이번 작품은 독자들이 재미나게 읽어 줄 수 있고, 다음 작품은 독자들이 재미없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아. 어떠하든 앞으로도 또 그리고 거듭 그리며 자꾸 그릴 뿐입니다.


  왜냐하면 만화를 그리면서 ‘살아가는 보람’을 누린다고 하는 만화가 아주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만화를 그리면서 ‘육아 스트레스’를 잊고, 만화를 그리면서 ‘어리석게 보낸 지난날’을 잊으며, 만화를 그리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 숨을 쉬는구나’ 하고 느낀다고 해요.



천국에서도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선생님 목소리가 저에게 들리니까 제 목소리도 선생님께 들리겠지요? 그렇지요, 선생님? (134∼135쪽)



  그림이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리고 또 그립니다. 이 그림은 지난 그림과 달리 더욱 마음을 쏟아서 그립니다. 이 그림도 지난 그림처럼 다시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리고 또 그립니다. 자꾸자꾸 그립니다. 용을 써서 그립니다. 온 기운을 쏟아서 그립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그립니다. 틀림없이 일어설 수 있다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그립니다.


  그리고, 그리고 말이지요, 하늘나라에 있는 ‘그림 스승’한테 마음으로 속삭이면서 그립니다. 비록 ‘그림 스승’ 곁자리에서 내빼듯이 도쿄로 떠나면서 만화를 놓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 때문에 마음 깊이 죄책감이 생겼어도 또 그리고 다시 그립니다. 만화를 그리기 때문에 먼저 떠난 스승을 기리는 이야기를 펜으로 엮을 수 있어요. 만화를 그리기 때문에 멀리 있는 사람들하고도 마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어요.


  만화 한 칸에 바람을 담습니다. 만화 한 칸에 빗소리를 담습니다. 만화 한 칸에 웃음하고 눈물을 담습니다. 만화 한 칸에 내 노래를 담고 네 웃음을 담습니다. 이리하여 만화가 아주머니 한 분은 오늘도 새롭게 기운을 내어 책상맡에 달라붙어 밤을 새웁니다. 2016.8.28.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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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종료 일기
오리하라 사치코 지음, 도노랑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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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44



지난 열 해는 참말 있었을까?

― 동거종료 일기

 오리하라 사치코 글·그림

 도노랑 옮김

 AK 코믹스 펴냄, 2016.8.25. 9000원



함께 산 지 10년째 되는 애인에게 차였습니다. (10쪽)



  만화책 《동거종료 일기》(AK 코믹스,2016)는 첫머리를 “애인에게 차였습니다”로 엽니다. 그런데 애인도 “10년째 되는 애인”한테 차였다고 엽니다. 이 만화를 그린 분은 처음에는 ‘성우’가 되려고 시골을 박차고 나와서 서울(도쿄)로 갔고, 알바를 하면서 성우 꿈을 키우다가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어 한집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한집에서 산 지 일곱 해째가 될 무렵 누리사랑방에 ‘동거일기’를 만화로 그려 보았고, 이 ‘동거일기’ 만화가 제법 사랑을 받아서 꾸준히 만화를 그렸다고 해요.


  그런데 이렇게 ‘동거일기’를 세 해째 그리던 어느 날, 남자친구한테 ‘새 애인’이 생겼다면서 그만 둘은 갈라지기로 했다고 합니다.



매번 비슷비슷한 이 일상 블로그도 4년이나 되고 보니, 나조차 잊고 있던 포스팅도 있다. 앞으로 5년 10년, 내 페이스대로 쭉 업데이트할 거라 생각했다. 동거 10년째 되던 해의 그날 전까지는. (45쪽)


드디어 깨달았다. 왜 그때 눈물이 안 났는지. 그때 난 온통 짝꿍 생각만 했을 뿐. 그 같은 시각에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는 미처 생각 못했던 거야. (64쪽)



  《동거종료 일기》를 그린 분은 남자친구하고 갈라서기로 한 뒤에도 ‘동거일기’를 그대로 그리기로 합니다. 아마 안 그릴 수 없었겠지요. 눈부시게 젊은 날 한집에서 서로 쌓았던 기쁨과 즐거움을 담은 만화이거든요. 앞으로는 혼자 벌어서 혼자 살림을 하기도 해야 하니 만화를 안 그릴 수도 없을 노릇이라고도 했는데, 한집이 두집으로 갈리기 앞서 옛 남자친구한테 ‘우리가 갈라서는 이야기’까지 만화로 다 그리겠다고 밝혔답니다. ‘나를 차는’데, 이만 한 것(만화 그리기)쯤은 네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대요.



바보는 나였다. 이별은 싸워서 헤어지는 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80쪽)


예전에 혼자 살 때는 외로움 따윈 느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원래부터 혼자인 것과 둘을 알고 난 뒤의 혼자는 다르다. (94쪽)


얼마 전까지는 필요했지만 지금 현재는 불필요한, 그런 물건이 잔뜩 있었다. 10년치 쓸모없는 물건이 없어지자 방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116쪽)



  한집에서 살아온 열 해라는 나날은 무엇일까요. 옛 남자친구는 왜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릴까요. 마음은 움직이기 마련이니 한집에서 오래 살았어도 쉽게 갈라설 만할는지 모르지요. 한집에서 사는 사람한테서는 느끼지 못하는 즐거움을 다른 곳에서 찾아내어 갈라서자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만화책 《동거종료 일기》를 그린 분은 한집살이를 마친 뒤에도 이녁 만화를 누리사랑방에서 지우지 않습니다. 옛 남자친구가 갈라서자고 밝힌 때부터 겪은 일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습니다. 동거일기를 그리던 무렵에는 이 만화가 앞으로도 두고두고 누릴 즐거운 이야기였다면, ‘동거종료 일기’로 바뀌고 나서는 이 만화가 이제는 새로운 마음으로 훌훌 털고 일어서야겠다는 다짐 같은 말인 셈이리라 느낍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펑 하고 사라졌다. 그 10년의 세월은 실제로 존재했던 걸까? (130쪽)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블로그였지만 3년 조금 넘는 사이 어엿한 궤적이 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하찮은 것들뿐이지만, 그 이전의 7년치까지 합쳐서 전부 10년 간, 하루하루가 이렇게 하찮고도 재미있었다. 분명 내 경험 따윈 특별한 것도 뭣도 아니겠지. 하지만 각자가 할 수 있는 각자만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나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을 그려 나가고자 한다. (139쪽)



  문득 돌아보니 나는 곁님하고 열 해를 살아왔고, 큰아이는 아홉 살입니다. 나는 두 아이를 건사하면서 날마다 새로운 살림을 짓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을 바라보노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가를 모를 만큼 바빠요. 《동거종료 일기》를 그린 분은 한집에서 둘이 살기만 했을 뿐 아이를 낳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기에 집안에 새로운 기운이 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두 사람이 한집에 살면서 스스로 새롭게 마음을 가꾸지 않는다면 열 해라는 나날은 어쩌면 늘 엇비슷하거나 똑같은 쳇바퀴가 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따지자면, 갈라서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이가 있어도 갈라섭니다. 오래오래 서로 아끼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이가 없어도 둘이 오붓하면서 애틋하고 온삶을 누립니다. 아이가 집에 있느냐 없느냐로 두 사람 사이가 달라지지는 않겠지요.


  처음에 시골집을 떠날 적에는 성우라는 꿈을 품었고, 서울(도쿄)에서 알바를 하던 무렵 짝꿍을 처음으로 사귀면서 둘이 이루는 살림을 누렸습니다. 이제는 혼자서 만화를 그리며 스무 살이던 때에 처음 도시에 발을 붙이던 나날하고는 다르지만, 어느 모로 보면 비슷하게 새로운 길을 걷습니다.


  《동거종료 일기》는 그야말로 이제 마침표를 찍고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겠지요. 나이만 먹은 서른 살이 아니라, 나이와 함께 ‘둘레를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는 눈’을 새삼스레 가다듬는 서른 살로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만화로 담겠지요. 2016.8.23.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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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귀족 4 세미콜론 코믹스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김동욱 옮김 / 세미콜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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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41



마치 별나라에서 온 만화가 같은

― 백성귀족 4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김동욱 옮김

 세미콜론 펴냄, 2016.7.15. 8000원



  만화책 《백성귀족》을 그린 아라카와 히로무 님은 일본 도쿄에서 삽니다. 처음부터 도쿄에 살던 이녁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일본 훗카이도에서 태어나 어버이 곁에서 시골일을 하며 자랐다고 해요.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도 여러 해 동안 어버이 곁에서 시골일을 함께 하면서 지냈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며 늘 시골바람을 쐬기도 했을 테지만, 봄부터 겨울까지 수많은 시골일을 거들면서 ‘일꾼 한 사람 몫’을 했고, 틈틈이 온갖 시골놀이를 누렸다고 해요.


  만화가 한 사람이 만화로 담는 이야기는 언제나 ‘만화가로 오늘 이곳에 있기 앞서 어릴 적부터 보낸 삶과 살림’이기 마련입니다. 어릴 적부터 늘 보고 듣고 겪고 마주하면서 지낸 삶과 살림이 만화책 한 권으로 녹아들어요.


  누군가는 시골살이를 따분하거나 고되거나 지겹게 여겨서 떠올리기도 싫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시골에서 했던 힘겹거나 벅찬 일도 그무렵이나 요즈음이나 ‘힘겨우면서 재미나던 일’이라든지 ‘벅차면서도 보람차던 일’로 여길 수 있어요. 어릴 적부터 스스로 겪은 삶이 만화책으로 고스란히 다시 태어날 뿐 아니라, 어린 나날을 어떻게 바라보려 하는가에 따라서 만화책에 담을 이야기가 새로워지기도 합니다.



“전 비 오는 날 좋은데요. 물론 맑은 날도 좋고.” “맞다. 밭이 있는 농가 입장에서 보기에는 은혜로운 비겠네요.” “그런 것도 있지만, 비가 오는 날은 밭일을 쉬는 관계로 집에 틀어박혀 만화를 그릴 수 & 읽을 수 있으니까!” (21쪽)


“아라카와 선생님! 화성 개척단을 모집해요! 우리 참가해요!” “싫수!” “왜요! 개척 농민의 자손으로서 피가 끓어오르지 않나요?” “개척 농민의 자손이니까 그렇지!” (29쪽)



  《백성귀족》 넷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앞선 세 권에서도 이와 비슷했는데, 만화를 그리는 아라카와 히로무 님은 ‘시골일이 힘들면서도 즐거웠다’고 생각합니다. 만화책에 붙인 이름 그대로 시골일은 ‘백성이 하는 일’이면서 ‘귀족처럼 누리는 일’이라고 여겨요. 그야말로 온몸과 온마음을 바쳐야 해내는 시골일인데, 이 일을 해내고 나면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쁨을 누린다고 합니다.


  시골(훗카이도)에서 살 적에는 ‘남새를 돈 주고 산 일’이 없이 가장 좋은 것을 늘 거저로 먹었다지만(모두 손수 심어서 거두었을 테니까요), 만화가가 되어 도시(도쿄)에서 살림을 꾸리면서 ‘작고 맛없는 남새를 무척 비싸게 사야 하는 일’을 겪는 동안 크게 놀랐다고 하지요. 게다가 도시에서 매우 비싸게 팔리는 메론조차 시골에서 살 적에서는 ‘너무 흔해서 먹다가 지쳐 소한테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이녁이 시골에서 나고 자라며 도시에서 살림을 꾸리기에 ‘새롭고 재미나게’ 느끼거나 겪으면서 만화로도 새롭고 재미나게 담을 만하구나 하고 느껴요.


  그러고 보면 어릴 적 흔히 즐기던 소꿉놀이도 ‘어른이 되어 만화가로 만화를 그릴 적’에 무척 재미나면서 새롭게 그릴 만합니다. 냇가나 도랑에서 물고기를 낚거나 가재를 잡는 일도 얼마든지 새롭게 그릴 만한 이야깃감이 됩니다. 연탄공장 옆에서 살며 탄가루를 맡아야 하는 삶도, 기찻길 옆에서 살며 기차 소리에 새벽이나 밤마다 잠을 못 이루던 삶도, ‘어른이 되어 만화가로 만화를 그릴 적’에는 무척 다르면서도 새롭거나 재미나게, 때로는 슬프면서 아프게 그릴 수 있어요.



“지구의 두 배 가격에 사겠습니다.” “팔죠!” “잠깐! 저건 지구에 보낼 식량이라고요!” “하지만 지구보다 비싸게 사 준다잖아!” (34쪽)


“지구 식으로 길러 봐도 될까요?” “좋으실 대로!” “땅이 아까우니까 한 곳에 꽉꽉 몰아넣고 키워야지! 스트레스로 딴 애들 손발 물어뜯으면 안 되니까 미리 절단! 그러고 보니 간이 맛있다던가. 좋았어, 푸아그라화!” (35∼36쪽)



  《백성귀족》을 그린 분은 ‘시골살이 이야기’를 즐겁게 잘 빚습니다. 《은수저》라는 만화책도 이와 같은데, 시골에서 겪는 시골살림은 얼마든지 멋진 이야깃감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나 경제 문제만 다루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문화나 예술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남녀 사이에 툭탁거리는 사랑놀이를 그려야 하지 않습니다. 수수하거나 투박한 살림도 얼마든지 멋지면서 재미난 이야기로 새롭게 태어날 만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결대로 이야기가 태어나거든요.


  《백성귀족》 넷째 권에서는 ‘화성으로 삶터를 옮겨서 개척농민이 되어야 한다면?’이라는 얼거리로도 재미난 생각날개를 펼칩니다. 지구별 시골에서 개척농민으로 살던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화성에서 개척농민으로서 새롭게 땅을 일구면서 산다면 어떤 살림이 될 만한가 하는 이야기를 배꼽을 잡을 만큼 익살스럽게 그립니다.


  ‘지구사람한테는 아무렇지 않은’ 집짐승 기르기가 ‘화성사람한테는 너무도 무시무시한’ 모습이 될 수 있다지요. 화성에서 화성사람이 ‘개척농민이 거둔 곡식과 열매’를 지구사람이 내는 값보다 더 돈을 치러서 사겠다고 하면 지구에 곡식과 열매를 안 보내고 그냥 화성에 팔겠다지요.



이듬해 또 호박이 난다. → 먹는다. → 싼다. → 또 난다. “소가 호박을 키우고 있어!” “이것이 목장 내 순환 농법! 뭐, 그래도 이 호박, 퇴비를 듬뿍 먹고 자란 거라 맛있다고 들었어요.” “안 드세요?” “맛있다고 들었어요!” (41쪽)


“현대 낙농은 펑펑 먹이고 펑펑 짜내는 방식이라 소의 육체적인 피폐화도 심해요. 거의 쓰고 버리는 상황에 가깝죠.” “얼마 만에 못쓰게 되나요?” “요즘은 초대형 낙농가를 기준으로 평균 1.6회 출산 정도라고 들은 적이 있어요.” (52∼53쪽)



  마치 별나라에서 온 만화 같은 《백성귀족》은 익살스러운 이야기만 그리지 않습니다. 익살스러운 이야기 사이사이에 ‘오늘날 농업’이 어떤 모습인가 하고 넌지시 보여줍니다. 자립이나 자급자족하고 멀어진 오늘날 사회에서 농업은 어떤 길을 걷는가 하는 대목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익살스러운 만화가답게 ‘할머니가 끓인 맛있는 호박국’이 왜 맛있었는가를 이야기로 풀어내되, 이 맛있는 호박을 나이가 제법 들 무렵부터는 차츰 멀리했지만 그래도 맛있다고 하는 대목을 아기자기하게 엮습니다. 하기는 그렇지요. 쓰레기가 없는 시골에서는 똥오줌이 모두 흙으로 돌아가서 훌륭한 거름이 되고, 이 훌륭한 거름으로 맛난 곡식하고 열매를 얻어요. 돌고 돌면서 깨끗한 시골살림이 되며, 깨끗한 시골살림에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살림을 누려요.


  우리 밭에서 난 옥수수를 아이들하고 함께 따서 먹습니다. 우리 밭에서 거둔 매실로 담근 효소를 아이들이 스스로 물을 타서 시원하게 마십니다. 우리 밭에서 자라는 까마중을 아이들이 신나게 훑고, 우리 밭에서 그동안 맛나게 누리던 솔(부추)이 바야흐로 흰꽃을 터뜨리니 날마다 솔꽃을 반가이 바라봅니다. 손도 몸도 흙투성이가 되어 일할 적에는 땀을 옴팡지게 흘리지만, 해님과 바람과 빗물을 듬뿍 맞아들여 알차게 맺은 열매는 언제나 활짝 터뜨리는 웃음꽃으로 누립니다. 2016.8.12.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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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린네 21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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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42



바다를 보고 싶던 나무가 바다를 못 보니

― 경계의 린네 21

 타카하시 루미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6.6.25. 4500원



  나무는 오백 해도 살고 천 해도 살며 삼천 해도 삽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나무가 오백 해쯤 산다면 숲에 있는 수많은 짐승들이 쓰는 ‘온갖 말’을 두루 알아들을 만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리고 ‘사람이 쓰는 말’도 알아들을 만할 수 있겠다고요.


  사람이 백 해를 훨씬 뛰어넘어서 삼백 해나 오백 해나 천 해를 산다고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이만 한 해를 살아낼 수 있으면 몸이나 마음이나 머리에 ‘더 많은 지식’을 쌓을 테고, ‘더 많은 말’을 익힐 테지요. 다른 외국말뿐 아니라 ‘나무가 들려주는 말’도 어렵잖이 익힐 만하리라 느껴요.



“악령이 아니다. 나는 수령 200년 된 나무의 정령. 나는 산에서 태어나 200년을 산에서 살았기에 산 속밖에 몰랐다. 그런데 어느덧 인간의 말을 알아듣게 되어, 이 세상에 바다라는 것이 있음을 알았지.” (37쪽)


“원래 나 혼자 살던 집이라 가족도 없고, 정원도 잡초투성이네요. 그렇게 예뻤는데.” (65쪽)



  타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책 《경계의 린네》(학산문화사) 스물한째 권을 읽습니다. 사람들이 멧자락에 판 굴길(터널)에 갇힌 문어 이야기가 나오고, 숲에서 사람한테 베여 기둥으로 바뀐 나무가 바다를 보고 싶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모로 보면 못 믿을 이야기라 할 테지만, 어느 모로 보면 그럴 만한 이야기입니다. 참말로 우리가 생각을 넓게 하고 마음을 활짝 열면 이 같은 대목을 읽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같은 성질을 가진 혼.”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라면, 즉 짝사랑! 빨간 국수가닥을 ‘잡을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과, 사카키 아야메의 강한 영능력이 이상한 화학반응을 일으켜 국수가 폭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92∼93쪽)



  숲에서만 살며 숲만 보던 나무가 바다를 보고 싶은데, 막상 기둥이 되어 집 바깥을 내다볼 수 없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나무로서 무척 고달프고 슬플 테지요. 작은 새나 벌레나 짐승도 이와 비슷하리라 느껴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목숨붙이는 ‘아쉬움’이나 ‘서운함’이나 ‘슬픔’이나 ‘아픔’을 느끼리라 봅니다. 나도 이러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웃과 동무 누구나 이러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아쉬움을 풀지 못하니 앙금이 쌓입니다. 서운함을 풀지 못하니 응어리가 집니다. 앙금도 응어리도 풀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가슴에 아무것도 맺히지 않으면서 홀가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볍고 산뜻하며 즐거울 때에 비로소 꿈을 이루고 사랑을 이루거든요.



“미안해서 어쩌지? 나만 이렇게 행복해지고.” “그래서 내 성불은?” “이제 국수는 폭주하지 않을 거예요.” “자, 젓가락을. 그리고 빨간 국수는 못 잡았다는 아쉬움보다, 잡고 싶었다, 잡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 봐요. 그럼 틀림없이 잘 될 거예요.” (95쪽)



  꿈을 이루는 사람과 못 이루는 사람을 헤아려 봅니다. 다른 사람을 말하기보다 내 모습을 돌아봅니다. 내가 언제 꿈을 이루는지, 또 내가 언제 꿈을 못 이루는지 생각합니다. 나 스스로 홀가분하면서 즐거운 마음일 적에는 늘 신나게 꿈을 이룹니다. 나 스스로 홀가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즐겁지도 않은 마음을 적에는 늘 고단한 나날이 이어지면서 꿈하고는 동떨어집니다.


  스스로 새롭게 아침을 열며 살림을 꾸려야 사랑이 샘솟습니다. 스스로 새롭지 못한 하루라면 사랑이 흐르지 못합니다. 언제나 바로 내가 내 삶을 짓고, 참말로 늘 나 스스로 내 살림을 가꿉니다. 만화책 《경계의 린네》는 이 같은 대목을 무척 쉬우면서 부드럽고 재미나게 잘 짚으면서 보여주는구나 싶습니다. 2016.8.10.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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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즐겁게 식히는 만화책 20

― 내가 여름에 즐긴 사랑스러운 이야기



  유월로 접어들며 찾아온 여름은 칠월에 하늘을 찔렀고 팔월로 접어들면서 천천히 수그러듭니다. 칠월에는 저녁 여덟 시까지도 밝았으나 팔월로 접어드니 저녁 일곱 시 반 즈음이면 어느새 어둑살이 내려요. 다만 이렇게 어둑살이 날마다 조금씩 빨리 찾아와도 늦여름인 팔월도 한낮이면 매우 뜨끈뜨끈합니다. 이 여름에 저희 집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베푼 만화책 스무 가지 이야기를 풀어놓아 봅니다.















1

전당포 시노부의 보석상자 1∼2

 니노미야 토모코 글·그림, 대원씨아이 펴냄

전당포에서 일하는 시노부는 보석을 살피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아직 고등학생입니다. 시노부는 아주 어릴 적부터 보석을 집안에서 수없이 보며 자랐기에 ‘보석 값어치’를 떠나서 보석마다 사람들한테 어떤 기운을 주고받으면서 어떤 이야기를 아로새겼나 하는 대목을 읽을 줄 압니다. 보석에 얽힌 마음을 느낌으로 읽을 줄 아는 시노부를 둘러싼 재미나면서 남다른 이야기가 흐릅니다.















2

그리고, 또 그리고 1∼3

 히가시무라 아키코 글·그림, 애니북스 펴냄

마흔 살을 훌쩍 넘은 ‘아줌마 만화가’인 히가시무라 아키코 님이 어떻게 만화가로 살아갈 수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되짚으면서 그린 자서전 같은 만화책입니다. 처음에는 만화가 마냥 좋았고, 나중에는 대학입시 때문에 시골마을 그림학원을 다녔는데, 바로 이 시골마을 그림학원에서 그림을 가르쳐 준 분이 있었기에 미대에도 다니고 만화가라는 꿈을 새롭게 되새길 수 있었다고 해요. 만화책 줄거리는 이와 같은데 히가시무라 아키코 님 나름대로 익살스러운 붓끝이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지면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이러면서 ‘우스우면서 눈물겨운’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3

은빛 숟가락 1∼10

 오자와 마리 글·그림, 삼양출판사 펴냄

사랑으로 짓는 밥 한 그릇은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짓는가 하는 줄거리를 들려주는 만화책입니다. 더 맛나거나 멋진 밥이 아니라, 오순도순 어우러지는 한식구를 사랑으로 살찌우는 밥 한 그릇을 다루는 만화책이에요. 이러한 줄거리를 다루되, 이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 삶을 비추면서 ‘어버이가 낳은 사랑’하고 ‘어른으로 기르는 사랑’이 저마다 어떻게 다르면서 저마다 어떻게 곱게 빛나는가 하는 대목을 넌지시 짚습니다. 따사로운 숨결로 짓는 살림을 바라는 분이라면 오자와 마리 님이 빚는 ‘착하면서 고운’ 만화를 좋아하리라 생각합니다.















4

코우다이 가 사람들 1∼3

 모리모토 코즈에코 글·그림, 삼양출판사 펴냄

다른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어떤 삶이 될까요? 우리가 서로서로 어떤 마음인가를 읽을 수 있으면 어떤 하루가 될까요? 서로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 ‘마음을 숨기는 일’이란 없겠지요. 마음을 숨길 수 없으니 거짓말을 못 할 테고요. 그런데 막상 우리는 서로서로 마음을 못 읽기 일쑤예요. 가까이 지내는 사이인데에도 마음을 모르기까지 해요. 마음을 꽁꽁 닫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랑으로 따사로이 다가서려고 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모리모토 코즈에코 님은 이녁이 빚는 익살스러운 이야기로 ‘마음을 읽는 사람들’이 ‘마음읽기’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또 이 ‘마음읽기’ 때문에 기쁨을 배우기도 한다는 줄거리를 잘 다룹니다.















5

와카코와 술 1∼5

 신큐 치에 글·그림,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펴냄

혼자 사는 아가씨가 혼자서 술집에 찾아가서 혼자서 술하고 안주를 즐기는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책입니다. 여럿이 함께 누리는 맛이나 밥이나 술도 틀림없이 좋을 테지만, 혼자서 호젓하게 누리는 맛이나 밥이나 술도 틀림없이 좋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까요. 하루 일을 마치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기 앞서 고단함이든 짜증이든 싫음이든 즐거움이든 모든 느낌을 훌훌 털어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술마실을 누리는 이야기는 퍽 상냥하면서도 홀가분해 보입니다.














6

푸르게 물드는 눈 1∼2

 우니타 유미 글·그림, 애니북스 펴냄

말이 다르면 마음도 다를까요? 《토끼 드롭스》에서는 나이가 다르면 마음도 다른가 하는 대목을 다룬 우니타 유미 님은 《푸르게 물드는 눈》이라는 만화책에서는 ‘말’이 다르면 서로 어떤 마음이 되는가를 건드립니다. 일본으로 온 중국 유학생이 일본 시골 아가씨(시골에서 도쿄로 유학 온)하고 사랑에 빠집니다. 중국 유학생은 일본말을 익히느라 애먹는데 ‘일본 시골말’을 처음 들은 뒤 그 시골말은 꼭 ‘외국말’이라고 느낍니다. 애써 ‘표준 일본말’을 배우는데 ‘시골 일본말’도 배워야 하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이러한 말을 넘는 ‘서로 아끼는 마음을 담는 말’을 차근차근 헤아리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7

천재 유교수의 생활 1∼34 (애장판 1∼17)

 야마시타 카즈미 글·그림, 학산문화사 펴냄

만화가 야마기타 카즈미 님이 수십 해에 걸쳐서 꾸준히 그리는 《천재 유교수의 생활》은 이녁이 어릴 적부터 지켜본 ‘교수 아버지’를 바탕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늘 ‘배움’을 즐거워 한 아버지처럼 ‘유택 교수’라는 만화책 주인공도 언제나 ‘배움’을 즐겁게 여깁니다. 새로 배우려 하고, 배우는 자리에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아요. 모든 자리 모든 때 모든 사람한테서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을 새롭게 키우는 길을 걷는 모습은 오늘날 사회 흐름이나 문명이란 무엇인가 하고 되묻도록 이끄는 길잡이가 되기도 합니다.















8

꼬마 애벌레 말캉이 1∼2

 황경택 글·그림, 소나무 펴냄

알에서 갓 깨어난 나방 애벌레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온누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하고 생각하면서 이야기가 흐르는 만화책입니다. 첫째 권에서는 꼬마 애벌레가 저를 둘러싼 너른 사회(숲)를 하나씩 배우는 이야기가 흐르고, 둘째 권에서는 꼬마 애벌레가 어른 나방으로 거듭나려는 길을 다루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애벌레 몸과 마음에 어떤 숨결이 흐르는가를 살며시 보여주고, 애벌레뿐 아니라 지구별 모든 목숨붙이 몸과 마음은 어떤 넋과 사랑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조용히 밝히려 합니다.















9

네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1∼2

 나치 미사코 글·그림,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펴냄

고양이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어느 아가씨가 ‘집고양이’하고 ‘들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찾아가서 ‘고양이 마음’을 읽은 뒤에 왜 고양이가 어떤 몸짓이나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하고 알려주는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입니다. 일본에서는 이를 애니멀 레이키라고도 하는데, 입이 아닌 마음으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마음을 읽기에 서로 더 아낄 수 있고, 마음을 읽으려 하면서 서로 더 기쁘게 어울릴 수 있는 살림을 부드러이 보여줍니다.















10

토성 맨션 1∼7

 이와오카 히사에 글·그림, 세미콜론 펴냄

지구가 온통 쓰레기밭으로 바뀐 뒤 이 지구를 떠나야 한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에스에프만화라고도 할 수 있는 《토성 맨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레기별 지구를 떠나야 하면서 대기권 바깥에 새로 지은 ‘맨션’에 계급이 갈려요. 지구가 쓰레기별이 된 까닭을 곰곰이 따지자면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도우면서 평화로운 살림을 가꾸지 못한 탓일 텐데, 지구 바깥에서도 계층을 갈라서 지낸다니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지요. 이런 지구 대기권 바깥누리에서 ‘창문닦이 아이’가 ‘똑같이 창문닦이였던 아버지가 그만 사고로 지구로 떨어져 죽은 일’을 늘 마음속으로 그리다가 ‘아버지가 떨어진 지구’로 ‘하층 계급 사람들이 만든 우주선’을 타고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루어요.
















11

경계의 린네 1∼21

 타카하시 루미코 글·그림, 학산문화사 펴냄

《란마》와 《이누야샤》 같은 만화를 그리고도 기운이 넘쳐서 새롭게 《린네》를 그리는 타카하시 루미코 님입니다. 이녁이 그리는 만화에는 늘 푸름이가 나옵니다. 때로는 스무 살 남짓 젊은이가 주인공이기도 하고,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주인공인 단편만화도 그리지만, 오랜 나날에 걸쳐서 꾸준히 그리는 만화에서는 열예닐곱 살 푸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지요. 이 아이들은 ‘어른이 사회로 지은 굴레’에서 이 굴레에 고스란히 갇히는 몸짓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슬기롭게 열려고 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경계의 린네》에서는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늘 넘나드는 린네라는 ‘가난뱅이 사신’ 일을 하는 삶과 살림을 익살스러우면서도 살갑고 포근하게 어루만지는 손길로 재미있게 보여줍니다.















12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 1∼5

 히구라시 키노코 글·그림, 대원씨아이 펴냄

한집에서 함께 사는 두 사람은 그저 ‘먹고 자는 사이’일까요, 참으로 ‘함께 사는 사이’일까요? 그냥 먹고 자는 사이일 적에는 서로서로 얼마나 마음을 모르고 제멋대로 굴려 했는가를 보여주고, 차츰 함께 사는 사이로 발돋움하면서 비로소 서로 어떻게 마음을 열어서 하루를 어떤 살림으로 지을 적에 함께 웃고 노래할 만한가를 따사로이 비추어 보입니다. 이른바 ‘동거’에서 ‘혼인’으로 나아가는 두 짝꿍 이야기요, ‘아이 없는 나날’을 살다가 ‘왜 아이를 낳고픈 마음이 드는가’를 사랑스레 잘 짚어서 보여주는 만화책입니다.















13

솔로 이야기 1∼3

 타니카와 후미코 글·그림, 대원씨아이 펴냄

혼자 지내거나 홀로 사는 아가씨가 왜 혼자 지내거나 왜 홀로 사는가를 보여주는데, 저마다 아픈 이야기를 가슴에 품기도 하지만, 아프면서도 기뻤던 이야기를 가슴에 품기도 하고, 즐거우면서 놀라웠던 이야기를 가슴에 품기도 한다는 대목을 살갑게 잘 보여줍니다. 혼자라서 외롭지 않고, ‘외롭기 때문에 외롭다’고 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만화예요. 사람들한테 둘러싸이거나 나를 아끼려는 사람이 있기에 안 외로운 삶이 아니라, 스스로 씩씩하고 즐겁게 일어서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기에 외롭고 마는구나 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어요. 그래서 ‘혼자인 길’을 스스럼없이 골라서 나아가는 아가씨들 이야기가 살뜰히 흐릅니다.















14

젤리장수 다로 1∼5

 김민희 글·그림, 마녀의책장 펴냄

익살과 뒤집기로 ‘전쟁터 한복판에서 젤리를 파는 아이’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책입니다. 젤리를 팔아서 금덩이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사막을 가로지르려 하면서 겪는 일, 인어와 사람 사이에 얽힌 일, 돈과 사람 사이에 맺힌 일, 앞으로 나아가려는 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갈리는 일 들을 무겁지 않게 다루는 만화책입니다. 군인이 칼을 내리고 젤리를 손에 쥘 수 있다면, 군인이 싸움을 그치고 서로 돕는 어깨동무를 할 수 있다면, 그때에 이 땅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5

백성귀족 1∼4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세미콜론 펴냄

훗카이도 시골에서 소를 키우고 밭을 일구는 어버이 곁에서 시골일을 하며 자란 만화가 아주머니가 어릴 적 일을 되새기면서 ‘백성이자 귀족’이던 시골살림 이야기를 무척 웃기면서도 차분하게 들려주는 만화책입니다. 일이 고되기에 백성으로 지내는 시골살림인데, 이러면서도 먹고 자고 누리고 얻는 모든 것은 귀족과 같다고 할 만하기에 ‘백성귀족’이 된다고 합니다. 아라카와 히로무 님은 이런 시골살림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생각날개를 펼쳐서 《백성귀족》을 읽는 사람들한테 웃음뿐 아니라 ‘생각을 여는 기쁨’도 함께 베풀어 줍니다.















16

플레이 플레이 소녀 1∼2

 요시즈키 쿠미치 그림, 하시모토 히로시·와타나베 켄사쿠 글, 서울문화사 펴냄

응원단으로 뛰는 고등학교 아이들 이야기를 그립니다. 응원단이 되려는 아이들은 처음에는 동아리 활동 가운데 하나로, 또는 다른 생각을 품고서 이 일을 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응원단(을 비롯하여 동아리 활동이든 무엇이든)으로 누군가를 북돋우는 몸짓이란, 바로 아이들 스스로 저부터 북돋울 때에 할 수 있다고 깨달아요. 스스로 씩씩하지 못할 적에는 남을 응원하지 못하고, 스스로 즐겁지 못할 적에도 남을 응원하지 못해요. 쭈뼛쭈뼛 얌전하기만 하던 아이들이 스스로 굴레를 털고 일어서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17

토리빵 1∼7

 토리노 란코 글·그림, AK커뮤니케이션즈 펴냄

뒤엣권 번역이 좀처럼 나오지 못해 아쉬운 만화책입니다만, 《토리빵》은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즐겁게 곁에 두면서 마음을 쉴 만한 이야기를 얻도록 해 주는 만화책이라고 느낍니다. 어머니하고 둘이 조용히 살면서 집 둘레에 늘 수많은 새들이 모여들도록 하면서 ‘새와 숲과 하늘과 들과 철과 날씨’를 두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하루를 만화로 더없이 아름답게 담았구나 하고 느끼면서 이 만화책을 으레 되읽곤 합니다. 새가 보여주는 살짝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재미있고, 새가 보여주는 좀 멍청하거나 바보스러운 모습도 재미있는데, 가만히 보면 사람도 이처럼 우스꽝스럽거나 멍청하거나 바보스러운 짓을 일삼기도 해요. 그리고 수많은 새가 보여주는 즐겁고 아늑한 모습처럼 사람도 즐겁고 아늑한 살림을 짓기도 합니다.










18

아이사와 리쿠 상∼하

 호시 요리코 글·그림, 이봄 펴냄

아쉽거나 모자랄 것이 없다 싶은 살림살이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곁에 있지만, 늘 아쉽거나 모자라구나 하고 느끼는 아이사와 리쿠라는 중학생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도쿄에서 지내며 늘 이 아쉬움과 모자람 때문에 문득 눈물을 지어요. 저절로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아, 이때에는 눈물을 흘려 주어야겠구나’ 싶어서 짓는 눈물입니다. 그런데 아이 어머니는 아이한테 사랑을 나누어 주지 않고 ‘딴 것’을 나누어 줍니다. 아이 아버지도 그리 다르지 않아요. 두 사람은 어른이지만 어른스럽지 못하고, 어버이라면서 어버이답지 않아요. 돈 걱정 옷 걱정 밥 걱정을 안 하면 아이들은 아무 걱정이 없이 자랄 만할까요? 아이들이 늘 가장 크게 바라는 한 가지는 ‘사랑 걱정’인 줄 어른이나 어버이는 왜 자꾸 놓칠까요?









19

불새 1∼16 + 외전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 학산문화사 펴냄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만화라고 하는 틀을 단단히 닦았다고 일컫는 ‘만화 하느님’인 데즈카 오사무 님이 온힘을 들여서 그리려고 했으나 마지막 이야기를 그리지 못하고 끝난 《불새》는 본편이 열여섯 권이고, 외전이 한 권 더 있습니다. 만화책 《불새》는 기나긴 시간과 머나먼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이야기를 펼쳐요. 수천 해나 수만 해를 가볍게 건너뛰고, 이곳과 저곳도 홀가분히 가로지르지요. 삶과 죽음, 여기와 너머, 너와 나, 하나와 모두, 여러 가지 실타래를 마음으로 살피면서 이야기를 짓습니다. 마음을 차분히 쉬거나 달래려고 하는 때에 《불새》를 읽을 수 있다면, 우리가 저마다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짓는 삶을 얼마나 새롭게 바라보면서 가꾸려 할 때에 스스로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느끼도록 북돋아 주리라 봅니다.















20

히스토리에 1∼9

 이와아키 히토시 글·그림, 서울문화사 펴냄

역사란 무엇이고, 역사는 누가 쓰며, 역사는 어떤 눈길로 나타나서 책으로 엮일까요?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누구 이야기이며, 우리한테 역사를 가르치려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 지은 어떤 삶을 보여주려고 할까요? 《기생수》를 그리기도 했던 이와아키 히토시 님은 역사를 만화로 담으면서 ‘그들이 말하는 그것’이 아니라 ‘그들 곁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둘러싼 이것’을 넌지시 밝혀 보려고 합니다. ‘책으로 기록된 역사’ 뒤쪽에 어떤 이야기가 더 도사리는가 하는 이야기를 만화책으로 생각날개를 펼쳐서 한결 깊으면서도 넓게 다루는구나 싶어요.


 + + +


  만화책 스무 가지는 여름을 잊거나 식히기에 좋을 수 있지만, 만화책 스무 가지로도 여름을 못 잊거나 못 식힐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만화책 스무 가지로도 여름에 너무 덥다면, 책을 덮고 골짜기나 바다나 냇물로 달려가야지 싶어요. 즐겁게 파란 바람을 쐬고, 기쁘게 파란 하늘을 마시면서 이 여름에 무럭무럭 자라는 나락을 지켜보고, 이 여름에 알이 굵는 옥수수를 따서 맛나게 쪄서 먹으면 어느새 더위는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2016.8.5.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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