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또 그리고 4
히가시무라 아키코 지음, 정은서 옮김 / 애니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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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51



논으로 둘러싸인 시골집에서 그림을 배워서

― 그리고, 또 그리고 4

 히가시무라 아키코 글·그림

 정은서 옮김

 애니북스 펴냄, 2016.8.10. 8000원



  우리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우리 마음에 꿈이 있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우리 마음에 아무런 꿈이 없다면 그림을 그릴 수 없구나 싶어요. 돈을 벌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맨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는 기쁨을 알았기에 그림을 그리다가 어느새 돈을 버는 그림으로 바뀌었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이녁 마음에도 꿈을 그리는 숨결이 고이 흐르기에 씩씩하게 그림을 그릴 만하지 싶습니다.



“히가시무라 씨, 나 말입니다, 주인공이 평범하게 현재진행형으로 노력하거나 성장하는 만화가 보고 싶어요.” 너무나 타당한 의견이라 반박할 여지가 없습니다. (9쪽)



  히가시무라 아키코 님이 빚은 만화책 《그리고, 또 그리고》(애니북스,2016) 넷째 권을 읽는 동안 이 같은 대목을 가만히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림’하고 다르다는 ‘만화’에 마음이 끌린 이야기라든지, ‘그림’보다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꿈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그림이든 만화이든 펜이나 연필이나 붓을 씁니다. 손에 뭔가를 쥐고서 새로운 이야기를 종이에 빚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종이를 보며 ‘그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어느 종이를 보며 ‘만화’라는 이름을 붙일 뿐이에요.



선생님은 제가 없으면 곤란하실까요? 제자이자 부하이며 심부름꾼으로 나이 차는 크지만 가끔은 믿음직한 파트너. 제비꽃과 민들레를 싣고 시골길을 달리는 경트럭. 제가 그린 만화보다 이게 훨씬 더 순정만화 같습니다. (20∼21쪽)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철야로 원고를 완성해 가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기 때문에, 저는 만화를 그리는 작업이 더욱 좋아졌습니다. (35쪽)



  화가이든 만화가이든 모두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꿈을 그림으로 그립니다. 두 사람이 품는 꿈이란 두 사람이 저마다 살아오며 마음에 아로새긴 삶이요, 이 삶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할 만해요.


  화가이기에 높은 이름이지 않고, 만화가이기에 낮은 이름이지 않아요. 《그리고, 또 그리고》라는 만화책이 나올 수 있도록 히가시무라 아키코 님을 단단히 다그친 스승님은 이녁한테 늘 ‘그리라’는 말을 외쳐 주었고, 여기에 ‘괜찮다’는 말을 붙여 주었어요.


  언제이든 그리고, 무엇이든 그리라 했어요. 언제나 괜찮고, 무엇이든 괜찮다 했지요. 그러니,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으면서 꿈을 그리면 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림도 만화도 빚지 못해요. 글도 노래도 이와 같아요. 내가 나를 사랑할 적에 비로소 쓰고 나누고 펼칩니다.



그림은 시간을 초월하여 형태를 바꾸는 일 없이 그대로 그때 그대로 영원히 남습니다. 고독해도 즐겁지 않아도 커다란 미술관에 걸리지 않아도 돈이 되지 않아도. (42∼43쪽)


사방이 논으로 둘러싸인 일본가옥에서 고교생이 입시용 데생을 배운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내가 다닌 학원에는 저런 선생님이 없었어.”“응? 그야 그렇겠지. 저런 사람이 도쿄의 입시학원에서 가르쳤다간 당장 문제를 일으킬걸?” “하하, 하지만, 나도 저 선생님에게서 배웠다면 5수까지 하진 않았을 거야. 아키코가 부럽다.” (56쪽)



  입시미술을 배우든 정통미술을 배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입시학원을 다니든 어느 뛰어는 스승한테서 배우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내 손에 내 꿈을 그리려는 마음이 흘러야 그림이나 만화가 태어납니다. 내 삶에 내 사랑을 담으려는 생각이 흘러야 그림이나 만화로 나아가요.


  논으로 둘러싸인 시골에서, 또 가까이에 바다가 있는 시골에서, 또 조금만 나가도 멧골이 펼쳐지는 시골에서, 이러한 터전에서 그림을 배운 몸이요 마음이기에 만화를 그릴 적에도 다른 사람들은 담아내지 못하는 이야기가 흐를 만합니다. 꼭 시골내기이기에 남달리 만화를 그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알게 모르게 몸이랑 마음에 스며드는 싱그러운 바람이 있다는 뜻이에요. 비록 히가시무라 아키코 님은 이 대목을 오랫동안 미처 못 느꼈다고 하더라도, 도쿄 입시학원에서 다섯 해 동안 재수를 하며 입시미술을 배운 이녁 남자친구는 바로 알아채고 부럽다고 말하지요.


  저절로 스미고 시나브로 흐르는 손길을 말이지요. 어느새 삶이 되고 어느덧 살림으로 번지는 눈길하고 마음길을 말입니다. 히가시무라 아키코 님은 시골에서 나지 않았거나 그 스승님이 안 계셨다면 만화가로 살 수 없었을는지 몰라요. 또는 만화가가 되었어도 이러한 이야기를 빚을 수 없었을 테고요. 2016.10.8.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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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BAR) 레몬하트 30
후루야 미쓰토시 지음, 이기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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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49



맛난 술보다 맛깔스러운 삶을 좋아해

― 바 레몬하트 30

 후루야 미츠토시 글·그림

 이기선 옮김

 AK 코믹스 펴냄, 2016.9.25. 5000원



  만화책 《바 레몬하트》(AK 코믹스)는 ‘레몬하트’라는 술집(bar)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레몬하트’는 영어로 ‘Lemon Hart’로 적으며, 1804년에 처음 태어난 술이라고 해요. 이 술은 ‘비피터 진(Beefeater gin)’이라고 합니다. 술집 ‘레몬하트’는 1804년에 태어난 어느 술을 기리거나 좋아하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겠지요.



“그건 비싸죠?” “그렇죠.” “싸고 엄청 맛있는 건 없어요?” “그건 또 무슨 염치없는 주문이래요?” “없어요? 있어요?” “와인이라 해도 기호품이니까요. 모두의 입맛에 맞추기는 어려워요.” (7쪽)



  어느덧 서른째 권까지 나온 《바 레몬하트》를 보면, 술집 한 곳을 단골로 두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이 술집으로 찾아와서 마음앓이를 풀어내거나 슬픔을 털어놓거나 기쁨을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대단하거나 잘난 사람이 아닐는지 모르나 술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음을 열며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나와요.


  서른째 권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어릴 적 동창이 나오고, 아들한테 분재를 남기고 숨을 거둔 아버지가 나오며, 회사에서 일을 너무 못한다고 여겨 스스로 사표를 내고 떠나려는 젊은이가 나옵니다. 왈가닥이지만 마음이 여린 아주머니가 나오고, 사람들한테 거의 잊혀진 옛 영화감독이 나오며, 오랜 스승과 제자 사이를 이루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모두 일찍 여의고 라면집을 씩씩하게 이끄는 언니 동생 두 사람이 나오고, 길고양이 한 마리를 아끼는 여러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쁘다.”“그래.” “둘이 차분히 얘길 나눠 보는 건 어때? 그럼 그 반지처럼 다시 반짝반짝 빛날 것 같은데.” (16쪽)


“오히려 미치코가 골라 줘서 얼마나 기쁜데요! 이렇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콤한 술을 골라 줬잖아요!” (66쪽)



  술과 술집 이야기가 넌지시 흐르는 만화책 《바 레몬하트》입니다만, 술하고 얽힌 이야기를 살짝 곁들이면서 ‘수수한 사람들이 수수하고 엮고 맺으며 푸는 이야기’를 도드라지게 들려준다고 할 만해요. ‘맛 좋은 술’ 이야기보다는 ‘맛깔스러운 삶’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만화라고 할까요. 맛난 술도 좋지만, 맛난 술이 좋은 까닭은 맛깔스러운 살림을 짓는 애틋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대목을 차분히 다루는 만화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러고 보면 술이나 밥이나 여행이나 책도 모두 매한가지로구나 싶어요. 더 좋은 술이나 밥이나 여행이나 책보다는, 서로서로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좋게 느끼는 술이나 밥이나 여행이나 책이 되지 싶어요. 혼자 즐겨도 둘이나 여럿이 즐겨도, 서로 아끼고 보듬는 따사로운 사랑이 흐를 적에 맛나면서 좋은 술이 되겠지요.



“잘도 기억하는군. 첫 장면에서 겨우 1초, 그것도 화면 한 구석에 비쳤을 뿐인데.” “잊을 수 없는 1초입니다.” (119쪽)



  《바 레몬하트》 서른째 권 이야기 가운데 스승하고 제자가 나오는 대목을 보면, 꽤 오랜 옛날 젊은 교사는 어린 학생한테 ‘학교와 공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너무 일찍 그만두기’보다는 ‘차츰 무르익으면서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맛’이 있다면서 달래는 말을 들려줍니다. 이 말을 듣고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다시 기운을 내어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기로 다짐한 학생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 교사 일을 해요.


  그리고 이녁은 교사가 된 뒤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를 따스히 다잡아 주는 일을 합니다. 마치 예전에 이녁이 학생이던 무렵 이녁을 붙잡아 주고 따스히 안아 준 스승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스승과 제자 사이로 얽힌 세 사람이 ‘바 레몬하트’에 함께 찾아와서 가장 어린 제자가 스무 살을 맞이한 날에 기쁨을 나누는 술 한 잔을 나누어요.



“어떠니? 맛있어?” “맛있을 리가 있겠어요? 엄청 맛없어요!” “그렇겠지. 그런데 어른이 되면 이게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어진단 말씀. 그러니까 조금만 더 같이 공부해 보자.” (140∼141쪽)



  어른이 되면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맛나게 즐긴다는 술 한 잔을 생각해 봅니다. ‘바 레몬하트’ 가게지기가 손님한테 들려준 “모두의 입맛에 맞추기는 어려워요”라고 하는 말도 되새겨 봅니다. 누군가한테는 ‘값싸며 맛난 술’이 있을 테고, 누군가한테는 ‘비싸며 맛없는 술’이 있을는지 몰라요. 나한테 맛난 술이 너한테는 맛이 없는 술일 수 있어요. 어제는 맛난 술이었으나 오늘은 도무지 맛이 없는 술이 될 수 있어요.


  때에 따라서 맛이 달라져요. 자리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지요. 또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서 맛이 달라져요. 기쁜 날 더 기쁘게 즐기고, 슬픈 날 더 슬프게 누려요. 값지기에 좋은 술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이 좋은 술로 바꾸어 주어요. 값비싸기에 맛난 술이 아니라, 웃음짓는 마음이 맛난 술로 바꾸어 주고요.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맛이고, 마음에 따라 새롭게 바뀌는 삶이에요. 2016.9.30.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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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사와 리쿠 - 상
호시 요리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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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43



빈틈없고 잘난 어버이 곁에서 거짓 눈물

― 아이사와 리쿠 상

 호시 요리코 글·그림

 이봄 펴냄, 2015.10.19. 9500원



  《오늘의 네코무라 씨》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이 만화책을 그린 호시 요리코 님은 하루에 한 칸씩 그려서 만화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어요. 그림결을 살피면 ‘잘 그렸다’나 ‘못 그렸다’를 넘어서 ‘만화라고 하는 그림 얼거리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요.


  이야기를 지어서 이웃하고 나누려 하기에 날마다 한 칸씩 그릴 수 있었을 테고, 날마다 한 걸음을 걷듯이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루기에 어느새 낱권책으로 하나씩 나올 수 있어요. 주간잡지나 월간잡지에 실리는 만화라면 으레 빠듯하게 쪽수를 채우기 마련이지만, 하루에 한 칸씩 수수하게 그린다면 더도 덜도 아닌 우리 삶을 차분하면서 넉넉하게 펼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속은 고요하고 차가운데 눈물은 왜 이토록 따뜻할까. (5쪽)


아기는 울면서 큰다던데 나도 아기 때는 울음이 자연스럽게 나왔을까. (9쪽)


나는 상처 따위 받지 않았어. 단지 엄마가 바라던 일을 했을 뿐인데. 엄마란 참 성가신 존재야. 상처받는다는 것은 어떤 걸까. 슬픔이랑 같은 건가? 사람들은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걸까. (22∼23쪽)



  두 권으로 이루어진 만화책 《아이사와 리쿠》(이봄,2015)를 읽습니다. 이 만화책도 호시 요리코 님이 ‘하루에 한 칸씩’만 그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만화는 날마다 여러 칸씩 그렸을는지 몰라요. 연필로 부드럽게 그리는 이야기에는 도드라지지도 감추어지지도 않는 사람들 모습이 흐릅니다. 튀고 싶지 않으나 숨고 싶지도 않은 풋풋한 열네 살 아이 숨결이 흐릅니다.


  줄거리를 살짝 살피자면, 만화책 주인공 ‘아이사와 리쿠’는 열네 살 중학생이고, ‘잘난 아버지’를 두었으며, ‘빈틈없는 어머니’도 두었어요. 리쿠네 잘난 아버지는 너무 잘난 나머지 아무렇지 않게 바람도 잘 피우고, 리쿠네 빈틈없는 어머니는 너무 빈틈없는 나머지 언제나 빈틈없는 도시락에 집안일에 살림에 똑똑 부러집니다. 겉보기로는 아무 말썽이 없을 듯한 리쿠네 집이지만, 겉보기로만 ‘잘나고 빈틈없다’ 싶을 뿐, 속으로는 조금도 멀쩡하지 않아요. 이런 집안에서 열네 살 리쿠는 ‘거짓 눈물’을 흘리고 속마음을 늘 감추는 나날이 됩니다.



“근데 네 도시락 뭔가 이상해.” “엄마 요리, 완벽하거든.” “그러게. 지나치게 완벽하다는 거지. 그런 걸 매일이라니, 이상하잖아. 역시 넌 이상해.” (66쪽)


“하지만 사모님은 역시 완벽해. 멋진 남편과 귀여운 따님, 풍요로운 삶. 모두의 선망 아닐까.” “모두의 선망.” (85쪽)



  나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태어나 아이로 자랐습니다. 한쪽에서 보자면 어버이요, 다른 한쪽에서 보자면 아이입니다. 이리하여 만화책 《아이사와 리쿠》를 두 갈래 눈길로 바라보기로 합니다. 먼저 어버이 눈길로 바라봅니다. 나는 썩 ‘빈틈없는’ 어버이가 아닙니다. 아니, 나는 참 ‘빈틈있는’, 제대로 말하자면 ‘빈틈많은’ 어버이라고 생각합니다. 빈틈이 많은 밥을 차리고, 빈틈이 많은 살림을 꾸리며, 빈틈이 많은 하루를 보냅니다. 이러면서 그리 잘나지도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두 어버이를 떠올리면서 ‘나는 어떤 아이일까?’ 하고 생각해 보면, 이때에도 나는 빈틈이 많은 아이로구나 싶습니다. 허술하거나 모자란 아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나는 제때 달삯이 나오는 번듯한 일터를 그만둔 지 어느새 열 몇 해가 지났고, 도시 아닌 깊은 시골에서 삽니다. 우리 어버이가 보기에 ‘나라는 아이’는 사회 한복판에 서지 않고 바깥 꼬랑지에서 맴도는 모습으로 여길 수 있다고 느낍니다.



“리쿠야, 고모할머님이 뭐라셔?” “몰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쁜 분은 아니셔. 잠깐이잖아.” “자기는 싫어한 주제에.” “싫어하거나 한 적 없어. 누가 듣겠다.” “나를 새랑 같이 쫓아내는 거잖아.” “쫓아낸다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엄마도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지만, 그렇게는 안 되는 거 이해하잖아. 응? 리쿠야!” “전혀 이해 못하겠어. 그래도 어차피 보낼 거잖아.” “맞아.” (123∼124쪽)



  어버이로서 빈틈없거나 잘난 모습일 적에 아이들이 즐거울까요? 아이로서 빈틈없거나 잘난 모습일 적에 어버이들이 기쁠까요? 어쩌면 빈틈없거나 잘난 모습을 바라는 어버이와 아이가 있겠지요. 그리고 수많은 어버이와 아이는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고 아프면서 천천히 자라요. 뛰놀다가 넘어지고,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깨고, 자전거를 달리다가 미끄러지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다가 길에 흘리고, 뭐 이런저런 모습에서 허술합니다.


  겉보기로 치자면, 숫자로 따지자면, 이름값으로 보자면,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고 미끄러지는 삶이나 살림은 바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겉보기나 숫자를 바라보지 않고 웃음이나 노래를 헤아릴 수 있다면, 살아가는 즐거움이나 사는 보람이나 살림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아홉 살 아이가 빈틈없이 피아노를 쳐대지 않아도 참으로 예뻐요. 여섯 살 아이가 빈틈없이 글씨를 쓰지 못하거나 그림을 그리지 못해도 더없이 사랑스러워요.



간사이 사투리에 물들면 어떡하지. 아니야, 분명 괜찮을 거야. 내가 이곳에 남은 이유는 이제, 엄마에 대한 증오, 그뿐. (150쪽)


왜 이곳 사람들은 가치 기준이 ‘재미있다’거나 ‘재미없다’일까. 일반인들이 왜 개그맨 흉내를 내는 걸까. 그런 우스꽝스런 행동을 하고도 부끄럽지도 않은 걸까. (178쪽)



  만화책 《아이사와 리쿠》에 나오는 아이는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갑니다. 어머니한테서도 아버지한테서도 ‘제대로 눈길을 받’고 싶기에 ‘익숙한 보금자리’를 버리려 합니다. 마음을 툭 터놓는 사랑을 받고 싶은 열네 살 아이는 시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친척들이 있는 곳에서 시골말(사투리)을 들으면서 ‘도시에 있는 두 어버이’가 저를 다시 도시로 데려가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려고 합니다. 다만 이렇게 하되 두 어버이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열네 살 아이가 제 어버이한테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까닭은 ‘말로 해도 알아들으려 하지 않는 두 어버이’가 ‘말이 아닌 마음으로 부디 열네 살 아이 속내를 바라보아’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속내를, 속마음을, 속사랑을 빈틈없이 읽지 못하더라도 좋으니, 부디 마음을 열고 읽는 길에 한 걸음을 내딛어 주기를 바라지요. 겉치레를 이제 벗어던지고 홀가분하게 웃고 노래하는 수수한 사랑을 ‘우리 보금자리’에서도 넉넉하고 즐겁게 누릴 수 있기를 바라요.


  나는 어버이로서 아이로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어버이로서 바라거나 아이로서 바라는 한 가지는 언제나 사랑입니다. 더 많은 돈이나 더 커다란 집이나 더 잘난 이름이 아닙니다. 즐겁게 웃음짓는 사랑으로 우리 보금자리를 가꾸고, 기쁘게 노래하는 사랑으로 우리 살림살이를 짓자고 생각해요. 만화책 《아이사와 리쿠》에 나오는 열네 살 푸름이가 바라는 자그마한 꿈을 이녁 어버이가 온마음으로 마주하며 읽을 날은 언제쯤이 되려나요. 2016.9.2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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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수의 정원 3
사노 미오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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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647

 


꽃 한 송이가 나한테 건네는 말
― 귀수의 정원 3
 사노 미오코 글·그림
 정효진 옮김
 서울문화사 펴냄, 2013.7.30. 8500원

 


  사노 미오코 님 만화책 《귀수의 정원》(서울문화사,2013) 셋째 권을 천천히 읽습니다. 2013년에 셋째 권이 나온 뒤 2016년이 지나도록 아직 넷째 권이 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귀수’와 ‘정원’을 말하는 만화책인데, 이 만화책은 줄거리나 이야기를 빠르게 읽을 만하지 않기도 하지만, 천천히 되새겨 볼 만하기도 하다고 느낍니다.


  만화책에서 다루는 ‘귀수’는 그저 ‘귀수’가 아니라 ‘사람들이 여느 때에 여느 눈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다른 숨결’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다른 차원에 있는 존재’라 할 수 있어요. 어느 모로 보면 사람들이 사는 여느 터전은 ‘가장 낮은 차원’일 수 있어요. 먹고 마시고 노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미움과 다툼과 시샘과 짜증이 얼크러지면서 권력과 전쟁과 명예 같은 것이 드날리는 사회는 그리 아름답지 못해요. 이와 달리 아무런 미움도 다툼도 시샘도 짜증도 없이, 다시 말해서 권력도 전쟁도 명예도 없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흐르기만 하는 데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자랄 수 있습니다.


“어머니?” “왜 그러니? 죽은 어미는 더욱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이냐?” “아, 아뇨. 왠지 인상이 무척.” “사람에게는 여러 얼굴이 있단다. 이 어미는 알고 있었다. 네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보는 성질, 견귀라는 것을.” (25∼26쪽)

 

“나오는 항상 네 그림을 족자로 만들어 버렸지만, 난 늘 옷으로 만들어 입고 싶다는 공상을 하곤 했단다.” “옷이라고요?” “몸에 걸치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네 그림은 멋지니까. 앞으로도 그림에 힘써야 한다, 카후.” (30쪽)


  만화책 《귀수의 정원》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 ‘사람 아닌 다른 숨결이 사는 곳’을 만난 뒤, ‘사람’과 ‘사람 아닌 숨결’이 서로 마음으로 이어지면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언뜻 보면 흔한 사랑만화일 수 있고, 가만히 되새기면 ‘사람이 이루는 사회’를 새롭게 돌아보도록 북돋우는 철학만화라든지 ‘삶을 건드리는 만화’가 될 수 있어요.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저런 감수성 없는 자들에게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신위를 모신 선반에 먼지 쌓이는 것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 (43쪽)

 

“별일이군. 꽃을 꺾어 들어오다니.” “백일홍이 ‘한 가지 꺾어 가셔요’라고 했어.” “이럴 수가. 후손 님은 인간계에 있을 때도 꽃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건가.” “꽃뿐만이 아냐. 최근에는 벌레랑 나비 종류까지 내게 말을 걸어.” “호오.” “하루에 그 생명이 다하고 마는 하루살이는 ‘설령 만나지 못하더라도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라고 위로해 주지.” (46∼47쪽)


  만화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깁니다. 만화책을 덮고도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고요. ‘귀신을 보는 눈’이나 ‘도깨비를 보는 눈’이나 ‘다른 신비스러운 숨결을 보는 눈’이나 ‘외계인을 보는 눈’이나 ‘유에프오를 보는 눈’이나 ‘숨은 넋을 보는 눈’이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꿈이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보고, 여느 삶자리에서 꿈을 어느 만큼 마음에 품는가 하고도 생각해 봅니다. 이 만화책에도 나오기는 한데, 꽤 많은 사람들은 오늘 스스로 디딘 삶터에서 ‘꿈꾸기’보다는 ‘사회에 젖은 채’ 살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새롭게 꿈을 꾸기보다는 더 나은 일자리를 찾는 데에 마음을 쏟기 마련이기도 해요.


  돈을 더 벌 수 있고, 신분이나 계급이 높아지기를 바랄 수 있어요. 이러한 바람은 나쁠 일이 없어요. 좋은 경험이요 재미난 경험이 되어요. 다만 경험만으로는 꿈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바라는 일’을 넘어서 ‘이루자고 다짐을 하면서 나아가는 길에 뿌리는 씨앗’이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어떤 일을 해내는 데에서 그치는 삶이 아니라, 한 가지 꿈을 즐겁게 품으면서 날마다 여느 자리에서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살림이 될 때에 삶다운 삶이지 싶습니다. 이것을 해내거나 저것을 해내려는 몸짓이 아니라, 내 몸에 깃든 마음을 사랑할 수 있는 숨결이 되어야지 싶어요.


“이 세상에 쓸모없는 감정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피어나는 대로. 바라보면 지고, 바라보면 지고, 당신은 바람처럼 살면 그만입니다.” (60∼61쪽)

 

“솜씨는 아직 미숙하지만, 자네에겐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진실된 마음이 있어. 그렇다고 거기 앉아 있는 분도 고개를 끄덕이는군.” “네?” “난 견귀가 아니라서 말야. 모습은 뵐 수 없지만, 기척은 느낄 수 있다네.” (99쪽)


  예순 살을 살거나 예순한 살을 살거나 대수롭지 않고, 쉰아홉 살을 살거나 예순 살을 살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온마음에 가득한 사랑을 느끼면서 따사롭고 넉넉할 때에 즐거운 삶이라고 떠올리겠지요. 백 해나 천 해를 살더라도 마음 한켠에 아무런 사랑을 싣지 못한다면 따사로움이나 넉넉함하고는 너무 동떨어지고 말아 즐거움이란 그만 싹 잊고 말 테고요.


  그러니 참다운 즐거움을 누리려는 착한 마음이라면 귀신이나 도깨비를 볼 수 있을 테고, 귀신이나 도깨비를 보면서 놀라지 않으리라 느껴요. 참다운 즐거움을 누리려는 착한 마음이라면 귀신이나 도깨비하고 말을 섞을 뿐 아니라, 풀하고 꽃하고 나무하고도 말을 섞겠지요. 구름이나 바람하고도 말을 섞을 테고요.


‘두 번 다시 인간계에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시게츠에게 작별의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 채, 귀수의 정원에 오고 말았군.’ (146쪽)

 

“뜻대로 이루기 힘든 인간계는 수련도장이나 다름없어, 국화 공주. 인간은 마음의 천창이 닫혀 있는 까닭에 지상이 전부라고 생각해.” “이런. 천창이? 이럴 수가. 그럼 별과 별자리의 진짜 모습도 인간에겐 안 보이나 보군.” “특이하게도 카후는 천창이 반 정도 열린 남자였지.” (155쪽)


  꽃 한 송이가 나한테 건네는 말을 듣습니다. 바람 한 줄기가 나한테 들려주는 노래를 듣습니다. 햇살 한 줌이 나한테 베푸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흙 한 줌이 나한테 속삭이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연필 한 자루에 묻어난 숲노래를 되새기고, 아이들이 내 손을 잡으면서 빙긋 짓는 웃음에 서리는 따사로운 넋을 헤아립니다.


  하늘나라는 여기이고 땅나라도 여기라고 생각해요. 꿈나라는 여기이고 사랑나라도 여기라고 생각해요. 웃음나라는 여기이고 춤나라도 여기라고 생각해요.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가 스스로 짓고, 내가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에 내가 스스로 짓지 못하는 살림이 된다고 느낍니다. 2016.9.1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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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슬란 전기 5 - 만화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다나카 요시키 원작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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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46



싸움터에서 만난 사람

― 아르슬란 전기 5

 타나카 요시키 글

 아라카와 히로무 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6.8.25. 5500원



  《아르슬란 전기》 다섯째 권을 읽다가 생각합니다. 죽이고 죽는 사람들이 잔뜩 나오는 만화책인데, 참말로 많은 사내들이 싸움터에 끌려가거나 스스로 나아갔어요. 온나라 사내를 싸움터에 끌고 갔다면, 이들 사내 뒤에는 숱한 가시내가 ‘군인이 입는 옷’이라든지 ‘군인이 먹는 밥’을 지었을 테지요. 또 어마어마한 종(노예)이 ‘군인이 쓸 전쟁무기’를 만들었을 테고요.


  오늘날에는 직업군인이 있고, ‘군사시설이나 군수물자를 만드는 직업인’이 있습니다. 전쟁은 생산이 아닌 파괴입니다만, 바로 이 파괴라고 하는 데에 어마어마한 돈과 품과 겨를을 쏟아붓습니다.


  역사를 바라보면서 ‘전쟁 때문에 과학기술이 발돋움했다’고도 말합니다만, 전쟁이 아니어도 사람들은 슬기와 힘을 모아서 얼마든지 과학이든 문화이든 사회이든 발돋움할 수 있도록 했으리라 느껴요. 오히려 전쟁 때문에 독재나 권위나 권력이 더 단단해지는 셈이리라 느껴요.



“감히 아버지를 죽였겠다! 술고래에 일자무식에 색만 밝히는 불한당 같은 아버지였지만 내 생명을 준 부모다! 조트 족장 헤이르타슈의 딸 알프리드! 아버지의 원수는 내가 갚겠다!” (30∼31쪽)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갸륵한 소녀에게 담보를 잡겠다고?” “일면식도 없는 사이니, 거래는 안전이 제일이지.” “되게 야박하네! 평생 여자도 없겠다!” (43쪽)


“기왕 살려 줬으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냐! 여기서 날 팽개쳤다가 내가 그 은가면하고 재수 없이 마주쳐 죽기라도 하면 평생 후회할걸?” (50쪽)



  만화책 《아르슬란 전기》는 만화가 아라카와 히로무 님이 알맞게 살을 붙이고 재미를 더하면서 ‘사람이 만나고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새롭게 가꾸려 합니다. 싸움터에서 꼭 한 번 만나 서로 칼을 부딪다가 스러지는 사람이 있고, 싸움터에서 뜻밖에 만나 오래도록 동무가 되는 사람이 있어요. 서로 노림수가 있어서 속이거나 속는 사람이 있고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삼아서 휘두르려는 사람이 있고, 둘레에 누가 있거나 말거나 헤아리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몇 년 전에 나르사스 님께 들었어요. 어른이 되면 저도 거기 가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역사며 전설을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요.” “엘람이 조사한 역사나 전설을 내게도 가르쳐 주겠느냐?”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162쪽)



  나라를 다스릴 만한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아무래도 마음 깊이 사랑이 흐를 만한 사람이어야겠지요. 나 스스로 사랑하고, 가까운 이웃을 사랑하며, 먼 둘레 사람 누구나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일 때에 비로소 한 나라 임금(또는 대통령)이 될 만하겠지요.


  그런데 임금(또는 대통령)만 사랑으로 가득해야 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를 이루는 여느 사람들 누구나 사랑으로 가득해야지요. 임금만 슬기롭거나 사랑스럽대서 한 나라가 아름답지 못해요. 임금은 슬기롭고 사랑스러운데 사람들은 어리석거나 바보스러워서 싸움질만 한다면, 슬기롭거나 사랑스러운 임금은 그만 쿠테타에 스러지겠지요. 거꾸로 사람들은 슬기롭고 사랑스러운데 임금은 어리석거나 바보스러워서 싸움질만 하려 든다면, 이때에도 나라는 어수선하거나 어지러울 테고요.


  《아르슬란 전기》에 나오는 ‘전하’ 같은 사람, 또 ‘나르사스’나 ‘다륜’ 같은 사람, 이런 이들은 오늘날 우리 정치나 사회나 문화에 있을는지 없을는지 문득 생각해 봅니다. 2016.9.3.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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