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연금술사 18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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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52



너는 왜 ‘무엇’이 되려고 하니?

― 강철의 연금술사 18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08.4.25.



  아침에 대문 앞과 마당 둘레 풀을 낫으로 베는데, 오른무릎이 꽤 욱씬거립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만큼 아프지는 않습니다. 천천히 낫질을 하고, 어느 만큼 풀을 베고서 큰아이를 불러 밥그릇 하나 가져 달라고 합니다. 잘 익은 까마중을 밥그릇에 훑습니다. 까마중풀을 남기고 웬만한 풀은 모두 벱니다. 이렇게 베어 주어도 풀은 잘 자랍니다. 그동안 이곳에 드리운 풀씨가 아주 많을 테니 곧 새로운 풀이 돋을 테지요. 까마중풀을 남기고 풀을 베니 아이들한테 까마중 열매가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제 두 아이는 이십 분 남짓 까마중을 둘러싸고 새까만 열매를 훑느라 바쁩니다.



“너, 킴블리를 너무 믿지 마.” “어? 왜? 신사답고 좋은 사람이던데? 우리 아빠 엄마한테도 호의적이었고.” “신사답다니, 저 녀석이 이슈발에서 무슨 짓을…….” (12쪽)


“이해하고 떠받쳐 주는 사람이란 결국 함께 싸웠던 전우들 중에서 나오는 거구나.” (29쪽)



  아라카와 히로무 님 만화책 《강철의 연금술사》(학산문화사,2008) 열여덟째 권을 읽습니다. 권마다 새로운 삶과 시람이 나오고, 새롭게 부딪히는 일과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이도 어른도 꾸준하게 자라고, 한결 튼튼하거나 씩씩한 마음이 됩니다.


  참말 그래요. 아이만 자라지 않습니다. 어른도 자랍니다. 왜 어른도 자라는가 하면, 어른도 아이와 똑같이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기 때문에 새롭게 배우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른도 더욱 날렵하고 다부진 몸짓이 되고, 아이도 더욱 기운차며 단단한 몸놀림이 됩니다.



“무의미한 협박은 삼가 주시요? 지금 여기서 나를 죽여 봤자 그쪽에는 아무 이점도 없을 텐데요?” “잘 알고 있군요. 이 일을 입밖에 내면 어떻게 될지 알죠? 당신 동료나 머스탱 대령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을 그림자로부터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53쪽)


“설마 사람을 죽일 각오도 없이 군의 개가 된 것은 아니겠죠?” “죽이지 않을 각오로 들어왔어!” (58쪽)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사람 아닌 ‘무엇’을 꿈꿀 때에 삶이 즐거울까요?


  죽지 않는 삶을 꿈꿀 만할까요? 나 혼자 안 죽고 다른 사람은 모두 죽어도 되는 삶을 꿈꿀 만할까요? 너와 내가 모두 아름답게 삶을 짓는 꿈을 꿀 수 있을까요? 미움도 슬픔도 아닌 기쁨과 즐거움으로 누구하고든 넉넉히 어깨동무하는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앙갚음이나 되갚음이 아니라 사랑을 가슴속에서 끌어내어 따사로이 손을 맞잡는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윈리, 미안해. 우리 사정 때문에 돌아가신 아저씨, 아주머니를 이용하게 돼서.” “괜찮아. 지금은 살아 있는 너희들이 더 중요해.” (71쪽)


“착각하지 말아요. 옳지 않은 일을 용서하는 건 아니니까.” (126쪽)



  참다운 사랑일 때에 사랑입니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려면 참다운 숨결이 흘러야 합니다. 참다운 삶일 때에 삶입니다. 삶을 삶이라고 하려면 참다운 넋으로 흘러야 합니다. 참다운 사람일 때에 사람입니다. 겉모습만 사람이 아니라 속마음으로 오롯이 너그럽고 따사로운 마음일 때에 사람입니다.


  누군가는 모험과 전투 장면을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책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전쟁과 평화가 엇갈리는 사회를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책에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슬기롭게 삶을 사랑하려는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하고 땀방울을 이 만화책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올려다보면 파란색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흑백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이렇게 인정을 베풀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144쪽)


“그러고 보니, 현자의 돌에 대해 더 이상 나에게 안 물어 보던데, 그래도 되니?” “그건,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171쪽)



  사람으로 태어난 아이는 사람으로 자랄 때에 아름답습니다. 사람인 아기를 낳은 어버이는 아이를 사람으로 돌보며 키울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살인기계와 같은 군인으로 키워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살인기계하고 비슷한 입시지옥 병정으로 길들여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는 아이다운 삶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이는 초등학생 때에만 또래동무를 사귄 뒤, 중학생 때부터는 온통 입시경쟁자한테 둘러싸인 입시지옥에서 허덕여야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회를 보면 ‘또래동무’라는 허울을 붙인 채 아이들이 서로서로 미워하거나 시샘하면서 다투기만 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아이들을 모질게 괴롭히니까요. ‘현자의 돌’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 목숨을 빼앗아 제 배를 채우려고 하는 짓이랑, 입시지옥에서 ‘우리 아이만 서울권 일류대에 뽑히도록 닦달하는 짓’은 그저 똑같을 뿐입니다. 함께 사는 길을 생각하고 찾을 때에 비로소 함께 사는 길이 열립니다. 함께 사는 길을 생각하지 않고 찾지 않는다면, 함께 사는 길은 앞으로 조금도 열리지 않습니다. 4348.9.14.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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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프랑세즈 - 유월의 폭풍
이렌 네미로프스키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에마뉘엘 모아노 그림 / 이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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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51



아무도 군대에 끌려가야 하지 않아

― 스위트 프랑세즈, 유월의 폭풍

 이렌 네미로프스키 글

 에마뉘엘 모아노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이숲 펴냄, 2015.9.10. 15000원



  1903년에 키예프에서 태어난 뒤, 1917년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삶터를 옮긴 이렌 네미로프스키라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독일이 두 번째로 전쟁을 일으켜서 프랑스를 차지한 뒤에는 프랑스에서 책을 펴내는 길이 모두 막혔다고 하는데, 전쟁이 삶과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리는가 하는 이야기를 소설로 쓰다가 프랑스 헌병한테 붙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고, 수용소에서 한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분 곁님도 수용소로 끌려가서 죽었는데, 어린 두 딸은 살아남았고, 두 딸 가운데 동생이 1996년에 죽자, 맏이은 드니스는 어머니가 수용소로 끌려가기 앞서 아버지가 저한테 맡기면서 꼭 건사하라고 했던 가방을 처음으로 열었다고 해요.


  어머니 가방에서 나온 것은 5부작으로 쓰려고 했던 소설 가운데 2부였고, ‘할머니 나이로 늙은 어린 맏딸’은 어머니가 미처 마무리짓지 못하고 남긴 소설 원고를 정리해서 책으로 내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스위트 프랑세즈, 유월의 폭풍》(이숲,2015)은 바로 이렌 네미로프스키 님이 남긴 소설을 바탕으로 엮은 만화책입니다.



“엄마! 전쟁 중인데 아직 거리에 오가는 남자들은 뭐죠? 16세부터 60세 사이 남자는 모두 전쟁터로 가야 하잖아요!” “그런 건 어른들한테 맡기고 넌 가서 손이나 씻고 오렴. 곧 저녁 먹을 거야.” (19쪽)


“아빠, 저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여기에 함께 있을래요! 뜻있는 동지들을 만나면 저항군을 조직할 수도 있어요! 할 수 있다고요!” “너무 늦은 것 같구나.” “에? 뭐예요? 전쟁에 진 거예요?” (23쪽)



  나는 군대라는 곳에 1995년부터 1997년 사이에 있었습니다. 강원도 양구 깊은 멧골짝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냈습니다. 그무렵 육군 보병으로 무엇을 느꼈는가 하면, 소대장이나 중대장이나 하사관을 비롯한 간부를 비롯해서 대대장이든 연대장이든 하는 사람들은 우리 ‘육군 보병’을 ‘총알받이’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합니다. 나라에서 세운 군사작전에서 육군 보병은 ‘총알받이’입니다. 전방이나 최전방에 수십만 젊은이가 바글바글 몰려야 하는 까닭도 남녘이나 북녘 모두 젊은 사내를 총알받이로 써서 ‘웃사람’은 3분이라도 틈을 내어 뒤로 내빼려는 뜻이거든요.


  언제나 3분만 버티면 된다고 하지만, 3분 동안 어떻게 버틸까요? 남녘이든 북녘이든 저마다 온갖 미사일을 끝없이 쏘아댈 텐데요. 그저 남북이 모두 잿더미가 되면서 젊은 사내 수십만이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전쟁이란 그렇지요. 젊은 사내는 그저 잿더미에 갇혀서 주검도 못 건지도록 하고, 웃사람은 전쟁공로를 거머쥐면서 더 많은 돈과 이름을 얻도록 할 뿐입니다. 평화를 바라는 전쟁이란 없고, 평화를 지키려는 전쟁이란 없습니다.




“가브리엘! 다행히 방을 구했는데, 대체 왜 그래요?” “다행? 저런 쥐구멍이 다행이야? 빈대에다 하수구 냄새 진동하는 끔찍한 다락방이야!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코르트 가브리엘이야! 나보고 저런 방에 있으라고?” (51쪽)


‘왜 죽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까. 저들은 전쟁이나 죽음하곤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지만, 똑똑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몰라.’ (70∼71쪽)



  만화책 《스위트 프랑세즈, 유월의 폭풍》을 보면, 첫 대목에서 어머니한테 ‘열여섯 살∼예순 살’ 사내 가운데 전쟁터에 안 간 사람이 왜 이리 많으냐 하고 묻는 열여덟 살 아이가 나옵니다. 이 아이도 스스로 잘 모릅니다. 저도 열여덟 살이니까 군대에 가야 하지만, 아버지 권력으로 군대에서 아예 안 부릅니다. 이 아이네 집안에서 일하는 집사며 요리사며 시중꾼이며, 게다가 ‘아버지’조차 전쟁터에 갈 마음이 아예 없습니다.


  이밖에 은행장이나 미술관장이나 예술가나 부자는 저마다 ‘뭔가 줄을 대었는’지 소집영장을 아예 안 받습니다. 그리고 귀중품을 자가용에 가득 싣고 ‘여느 사람들은 모르는 일곱 정보’를 일찍 건네받은 다음 피난길에 올라요.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아마 한국에서도 이 만화책과 똑같은 얼거리대로 흐르리라 느낍니다. ‘멋모르는 착하고 앳된 젊은 사내’만 ‘나라를 지킨다는 거룩한 뜻’에 불타올라서 총을 쥐려 하겠지요. 그러고는 며칠 만에 총알받이로 죽어 버리겠지요. 돈과 이름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할까요? 미리 고급정보를 손에 쥐었을 테니 언제 어디로 피난길을 떠나면 되는 줄 압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젊은 사내’한테 군인이 되라는 선전을 목청 높이 외칠 테고, ‘사회 양극화’는 더 깊게 벌어지리라 느낍니다.



마을 사람들은 피난민들을 동정했지만, 내심 자신들 처지가 그렇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57쪽)


“알린은 피죽도 못 먹었는데, 그놈들이 음식 바구니를 들고 시시덕거리는 꼴을 보니 눈이 확 뒤집히더라고!” “정중하게 부탁할 수도 있잖아. 안 그래, 오르탕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저런 사람들은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아. 개처럼 굶어죽게 내버려뒀을 거야.” (91쪽)




  나는 한국 군대에서 육군 보병으로 있으면서, 백예순다섯 사람에 이르는 한 내무반 사람들 가운데 ‘부잣집 사람’이나 ‘이름 있는 집안 사람’이나 ‘힘이나 뒷줄 있는 사람’을 아무도 못 보았습니다.


  나는 강원도 양구 깊은 멧골짝에 있는 군대에서 총알받이로 스물여섯 달을 지내는 동안, 시골 농사꾼이던 젊은이, 공장 노동자이던 젊은이, 안경 수공업자인 젊은이, 조폭이나 건달로 놀다가 끌려온 젊은이, 학교 성적이 그리 좋지 않던 고만고만한 대학생, 학교 성적이 괜찮으나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대학생, 열아홉 살에 혼인도 안 했으면서 벌써 두 아이를 여자친구가 낳게 하고 끌려온 젊은이, …… 들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바탕을 이루지만 제대로 두드러진 적이 없고 드러나 보인 적이 없으며 알려진 적조차 없는 ‘수수한 한겨레 이웃’하고만 지냈습니다.


  부산에서 조폭이었다는 아이나 봉화에서 주먹깨나 썼다는 아이도 육군 보병이 되어 줄맞춰 세우면 똑같은 총알받이입니다. 나이도 어린 하사관한테 반말과 막말을 마구 들으면서, 이를테면 ‘네가 그렇게 주먹을 잘 쓰면 나 좀 때려 봐?’ 같은 이죽거림을 으레 들으며 바보가 되어야 하는 곳이 군대입니다.



그렇다! 모두 여기 있었다. 전직 장관인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부터 거물 실업가, 출판인, 신문 편집장, 상원의원, 극작가에 이르기까지. 한곳에 모여 있는 유명 인사들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모두 한배에 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전보다도 훨씬 잘 지내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자 코르트는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들은 자기네 세상이 절대 사라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신전심으로 서로 확인해 주었다. 이들 지배 계층은 무너진 과거 체제의 잔해 위에 세워질 새로운 체제 역시 단숨에 장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81쪽)




  만화책 《스위트 프랑세즈, 유월의 폭풍》은 소설책을 바탕으로 합니다. 소설책을 쓴 분은 ‘독일 점령군’이 아닌 ‘프랑스 과도 정부’한테서 모든 활동을 못 하도록 가로막혔고, 바로 ‘프랑스 헌병’이 이분을 붙잡아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우리가 아는 참모습은 무엇일까요? 점령군은 무엇이고, 지배자는 누구일까요?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한테 식민지가 되어야 하던 때에도 ‘한국을 아낀 일본사람’은 틀림없이 있었고, ‘한국을 저버린 한국사람’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모두들 말하지요. 제 한몸 살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제 한몸 살아야 하니까 다른 사람은 죽거나 말거나 쳐다보지 않는다고.


  전쟁이란 이렇습니다. 전쟁이란 사람됨을 모두 망가뜨립니다. 착한 사람을 바보로 망가뜨리는 전쟁입니다. 고운 사람이 다치게 하거나 그예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전쟁입니다.



독일군이 침공하자 그는 예비역 장교로 다시 군에 입대했다. 그의 병력은 거의 전부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살아남을 기회가 있었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비록 패전 장교였지만, 부인과 귀여운 딸들이 기다리는 저택으로 돌아와 편히 지낼 수 있었다. (192쪽)



  우리는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모습을 참모습으로 알면서 살까요? 왜 집권자는 평화를 가꾸는 데에는 돈을 아주 조금만 쓰고, 전쟁무기와 군대를 거느리는데에는 아낌없이 펑펑 쓸까요? 게다가 우리는 집권자가 전쟁무기와 군대에 돈을 펑펑 쓰는 일에 왜 찬성표를 던지고 마는가요? 한국 사회에 평화가 없는 까닭은 ‘북한 탓’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엄청난 전쟁무기와 군대를 끌어안고서 스스로 ‘총알받이 구실’에 길든 탓은 아닐까요?


  왜 우리 세금은 새만금을 메우는 데에 바쳐야 했을까요? 왜 우리 세금은 독재자가 엄청난 돈을 빼돌리는 데에 빼앗겨야 했을까요? 왜 우리 세금은 핵발전소와 송전탑을 짓는 데에 쓰여야 할까요? 왜 우리 세금은 사대강이나 제주해군기지 같은 곳에 퍼부어야 할까요?


  ‘프랑스 이웃’ 손에 붙들려서 죽음길로 가야 한 ‘프랑스 작가’ 한 사람이 남긴 이야기는 이 대목을 우리가 스스로 묻고 스스로 풀어내기를 바라지 싶습니다. 왜 우리는 스스로 전쟁무기와 군대를 꽉 끌어안고서 ‘입으로만 평화’를 외칠까요? 4348.9.7.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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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여우 9
오치아이 사요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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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50



우리 마을 ‘지킴이’는 모두 어디 갔을까?

― 은여우 9

 오치아이 사요리 글·그림

 강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5.7.31. 5000원



  우리 집에는 아이들이 있어서 시끌시끌합니다. 큰아이와 작은아이 둘이 있는 보금자리는 두 아이가 내는 노래가 가득 흐르면서 북적입니다. 아이들은 얌전하게 놀지 않습니다. 아니, 아이들은 조용히 놀지 않습니다. 언제나 마루를 쿵쿵 울리면서 뛰고 마음껏 소리를 지르면서 놉니다. 마당에서도 마루에서도 고샅에서도 그야말로 온몸으로 외치고 노래하면서 놀아요.


  그러고 보면, 마을마다 아이들이 넘치던 지난날에는 아이들이 노는 소리로도 언제나 시끌시끌했습니다. 도시도 시골도 똑같아요. 아이들은 도시에서도 골목을 가득 메우면서 놀고, 시골에서도 들이나 숲이나 냇가나 고샅을 가득 메우면서 놉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골목이나 마당에서 일합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어른들은 흥얼흥얼 일노래를 부르면서 빙그레 웃음을 지어요.



‘예전에는 긴타로밖에 없어서 조용했는데! 지금은 하루도 있고, 많이 시끌벅적해졌지. 긴타로는 조용한 게 좋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 전보다 덜 쓸쓸해 보이는 것 같아. 훨씬 더 전에는 어땠을까?’ (22쪽)


“나는 깨달았어. ‘본산은 모두의 것이지 내 신사가 아니다. 그리고 산의 바깥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지금의 인간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 이대로 산과 하나가 되어 버려도 괜찮은 걸까’ 하고 말이야. 나는 본산을 떠나 내 신사를 찾으면서, 세상을 두루두루 돌아보기로 했어.” (28쪽)



  오치아이 사요리 님이 빚은 만화책 《은여우》(대원씨아이,2015) 아홉째 권을 읽으며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조용한 삶터는 조용한 대로 아름답습니다. 시끌벅적한 삶터는 시끌벅적한 대로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뛰노는 모습이 성가시거나 싫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어른이 된 사람’은 누구나 아기 적이나 아이 적에 신나게 뒹굴거나 뛰놀았기 마련입니다. 무서운 어버이가 매섭게 다그친 탓에 제대로 뛰놀지 못한 사람도 있을 텐데, 어버이가 따스하고 보드랍게 어루만지면서 돌보면, 어떤 아이라도 신나게 뒹굴거나 뛰놀아요. 아이는 모름지기 실컷 뛰고 달리고 뒹굴고 날면서 온몸이 튼튼하게 자라니까요.


  그러고 보면, 시골은 아이들이 없어서 조용합니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없으니 시골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그런데, 도시에서도 사람 목소리로 와글거리지 않기 일쑤예요. 도시 아이들은 뛰놀 빈터가 없거나 학원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는 아이들이 많아도 빈터마다 자동차가 차지합니다. 자동차가 빈터에 서지 않더라도 찻길을 싱싱 달리는 자동차가 워낙 많아서 아슬아슬합니다. 연을 날릴 만한 빈터는커녕, 딱지를 치거나 팽이를 돌릴 만한 빈터조차 찾기 어려워요.



‘조용한 신사도, 즐거운 신사도, 나는 좋아. 정말로, 신의 사자가 보여서 행복해.’ (38∼39쪽)


“우리 가게를 이어가는 게 꿈이니까, 일부러 멀리 돌아갈 필요 없잖아.” (69쪽)



  만화책 《은여우》는 ‘일본 신사’를 물려받은 두 아이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끕니다. ‘일본 신사’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시달린 ‘신사 참배’가 떠오릅니다. 제국주의 권력은 이웃나라를 총칼로 쳐들어가면서 ‘일본 문화와 역사와 사회와 종교’를 억지로 심으려고 했습니다. 한국 곳곳에 일본 신사가 섰고, 퍽 오랫동안 한국 어린이와 어른은 신사에 가서 억지로 절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제국주의 권력은 일본에서도 모든 일본사람이 신사에 가서 절을 하도록 시켰을 테지요. 일본에서도 ‘신사 참배’를 안 하다가 따돌림받거나 시달린 사람이 꽤 많겠지요.


  제국주의 권력이 총칼을 앞세울 적에는 언제나 제 나라부터 윽박질러서 길들입니다. 이윽고 이웃나라로 총부리를 돌리면서 ‘거짓 충성’에 사람들이 휩쓸리도록 내몹니다. ‘일본 신사’는 바로 사람들이 ‘거짓 충성’에 휩쓸리도록 북돋운 구실을 톡톡히 맡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일본 신사를 물려받는 아이들이 나오는 만화책이 한국말로 나옵니다. 한국하고 일본 사이에 앙금이 모두 풀렸기 때문이라기보다, 권력에 빌붙는 이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이 권력에 빌붙고, 수수하게 삶을 짓는 이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수수하게 삶을 지어요. 이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먼 옛날부터 제 고장(고향마을)에서 조용하게 삶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일군 어버이’를 사랑합니다. 종교나 강요로 말하는 ‘일본 신사’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과 같은 숨결을 헤아리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괜찮여, 괜찮여, 둘 다 잘못 없당께!” “그려, 그려, 모처럼 만났는디.” “착하구먼. 둘 다 참말로 착혀.” “오늘은 좋은 날이여. 이렇게 좋은 아이를 둘이나 만났응께.” “참말로 좋은 날이여.” (161쪽)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될까요? 어째서 궁사님은 신이나 신의 사자가 보이지 않는데도 믿으실 수 있죠?” “글쎄요,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과 없는 건 다르니까요.” (173쪽)



  곰곰이 돌아보면, 한국에서는 서낭당이 거의 모두 무너졌습니다. 예부터 한국에서도 마을마다 ‘마을 지킴이’가 있고, 집집마다 ‘집 지킴이’가 있어요. 그런데, 이 모든 지킴이는 싸그리 무너지거나 내쫓기거나 사라져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모질게 짓밟히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한국전쟁을 거치고 새마을운동 바람이 휩쓸면서 그야말로 몽땅 무너졌다고 할 만합니다.


  만화책 《은여우》에서 ‘수백 해에 걸쳐서 작은 절집(신사)을 지켜 주는 은여우’가 나온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크고작은 고장에 크고작은 마을마다 두고두고 우리 고장이랑 마을을 돌보던 지킴이가 있고 도깨비가 있을 테지요.


  우리는 어떤 지킴이를 섬기면서 이웃을 어떤 마음으로 아꼈을까요?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마음속으로 품으면서 이웃을 어떤 사랑으로 보살폈을까요?



“그건 그것대로 그때마다 배워 나가면 되는겨. 남은 인생도 아직 길잖여. 우리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 편잉께.” (177쪽)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끌시끌하게 노는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어버이는 이 아이들한테 따사로운 지킴이 구실을 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를 마음으로 따르고, 어버이는 아이들을 마음으로 아낍니다. 우리가 사는 조촐한 시골집에는 수많은 풀벌레가 하루 내내 노래하고, 온갖 멧새가 꾸준히 찾아듭니다. 철 따라 드나들던 많은 새들은 이제 찬바람이 썰렁하니까 자취를 감춥니다. 나락이 천천히 익고, 들바람 결이 바뀝니다.


  우리 마을 지킴이는 어디에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집을 지키고 곳간을 지키며 뒷간을 지키고 문간을 지키며 부엌이랑 밭자락을 지키던 넋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서낭당은 사라져야 했어도, 우리 마을을 지키는 숨결은 사라지지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깊은 밤에도 밝은 낮에도, 우리가 이곳에서 즐겁고 씩씩하게 살림을 가꿀 수 있도록 지켜보면서 흐뭇하게 웃으리라 느낍니다. 늦여름에 그야말로 느즈막하게 깨어난 나비들이 우리 집 호박꽃이며 고들빼기꽃이며 모시꽃이며 부추꽃이며 쇠무릎꽃이며 바삐 드나듭니다. 나비 한 마디도 따사로운 지킴이일 테지요? 나도 이 작은 나비를 따사로이 바라보는 지킴이로 이곳에 있습니다. 4348.8.3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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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분의 일 1
타카토시 나카무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49



우리가 함께 하면서 즐거운 하루

― 십일분의일 (1/11) 1

 나카무라 타카토시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3.9.25. 4800원



  한집을 이루는 사람은 혼자일 수 있고 여럿일 수 있습니다. 한집에 한 사람만 있더라도, 한마을을 이루자면 ‘여러 한집’이 모여야 합니다. 그러니, 한마을을 이루려면 여러 사람이 골고루 어우러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도 있고 저러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한별을 이루는 이 지구에는 여러 나라와 겨레가 있습니다. 같은 나라이면서 여러 가지 말을 쓰기도 하고, 여러 겨레가 모인 나라에서 한 가지 말을 쓰기도 합니다. 삶과 말이 같을 적에는 겨레요, 삶과 말이 다르더라도 한마을을 슬기롭게 이루려 하면 나라입니다.



“축구는 이제, 취미 삼아 할 거야.” “하지만 너만큼 실력 좋은 사람이 축구를 안 하는 건 아까운데.” “국가대표가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긴 한데, 이미 결심했어.” (18쪽)

“난 축구를 계속할 수 있었어. 그건, 축구가,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야.” (32쪽)



  혼자서 무대에 오르는 운동경기가 있고, 여럿이 무대에서 뛰는 운동경기가 있습니다. 혼자서 무대에 오른다 하더라도 이 한 사람을 돕거나 돌보는 사람은 여럿입니다. 여럿이 무대에서 뛰는 운동경기라면 그야말로 여러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나카무라 타카토시 님이 빚은 만화책 《십일분의일(1/11)》(학산문화사,2013) 첫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은 ‘축구’라는 운동경기를 놓고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혼자서 잘 한다고 잘 할 수 있는 운동경기가 아닌, 여럿이 함께 도우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운동경기를 보여줍니다. 한두 사람이 솜씨를 뽐낼 때에 놀라운 성적을 거둘는지 모르나, 모든 사람이 한몸과 한마음이 되어 움직일 적에 비로소 ‘이 운동경기를 하는 보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나도 비슷한 처지였던지라 젊었을 땐 둘이서 정말 고생했어. 아빠는 ‘호강시켜 주지 못 해 미안하다’고 늘 내게 말했지. 그렇게 아빠는, 대학에 가지 않은 것, 고교 시절 달리기만 했던 걸 내내 후회했어. 그래서 최소한 내 아이들에게만은 나 같은 고생은 시키고 싶지 않다, 그게 아빠가 서클 따위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야.” (79∼80쪽)



  우리가 함께 하면서 즐거운 하루입니다. 우리가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빙그레 웃는 하루입니다. 우리가 같이 노래하면서 어깨동무하는 하루입니다.


  네 힘이 모자라면 내가 힘을 쓰면 됩니다. 내 힘이 모자라면 네가 힘을 쓰면 돼요. 둘 다 힘이 모자라면 이웃이나 동무를 부릅니다. 둘 다 힘이 넘치면 이웃이나 동무를 도우러 가요.


  물이 흐르듯이 삶이 흐릅니다. 물결처럼 기쁜 노래를 부르면서 삶을 가꿉니다. 물처럼 맑은 눈망울로 바라봅니다. 온누리를 적시는 빗물처럼 서로서로 마음을 촉촉히 적시는 고운 숨결이 됩니다.



“골도 어시스트도 아니야. 얼핏, 이 달리기는 그저 쓸데없는 짓으로 보일지 몰라. 하지만, 그렇게, 쓸데없을지도 모르는 걸 온힘을 다해 해야, 비로소 재미있는 축구로 이어지는 거야.” (87∼88쪽)

‘늘 혼자서 카메라에 빠져 있던 그녀를, 반 아이들은 괴짜 취급했지만, 그런 주변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왠지 무척이나 상쾌해 보였다.’ (117쪽)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자, 그렇게, 새로운 결심을 가슴에 품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내 몸은 변하기 시작했다.’ (122쪽)



  만화책 《십일분의일(1/11)》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품을 때에 비로소 새롭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스스로 새롭지 않겠다는 마음이 될 때에 참말 새로움이 하나도 없는 하루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보스럽게 산다면 그저 바보일 테지요. 그러나, 바보스럽게 산다고 해서 나쁘지 않습니다. 바보스러움을 온몸으로 겪을 뿐입니다. 슬기롭게 살 적에는 슬기로운 빛이 널리 퍼집니다. 나부터 슬기로우면서 둘레에 밝은 웃음을 베풀고, 내 둘레에서 슬기로우면서 나한테까지 밝은 웃음이 퍼집니다.


  조금 늦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조금 일찍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일찌감치 바보스레 살다가 뒤늦게 바보스러움을 떨칠 수 있어요. 차근차근 한길을 걸으면서 바보스러움을 씻은 뒤에, 빙그레 웃음꽃을 피울 수 있어요.



“결국 판단은, 네 몫이야. 네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해라.” (81쪽)

“진심으로 변하려 한다면, 사람은 변할 수 있어요.” (152쪽)

‘지금, 이제야 겨우 딱 한 걸음 다가갔다. 그 시절 내가 그토록 꿈꿨던, 겉모습만이 아닌, 반짝반짝 빛나는 나 자신에게.’ (163쪽)



  내 길은 내가 걸어갑니다. 내 밥은 내가 먹습니다. 내 말은 내가 합니다. 내 노래는 내가 부릅니다. 내 웃음은 내가 짓습니다. 내 빨래는 내가 합니다. 참말 모두 내 몫을 나 스스로 즐겁게 맡습니다. 내 꿈은 내가 이루고, 내 사랑은 내가 길어올려요.


  너도 나도 얼마든지 반짝반짝 빛나는 숨결입니다. 나도 너도 언제나 고요히 피어나면서 눈부시게 일어서는 나무와 같습니다. 열한 사람이 함께 운동장에서 뛰는 축구처럼, 나는 열한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로는 운동장에서 뛰지 못하고 뒷자리에 앉아서 지켜보는 사람일 수 있어요. 때로는 뒷자리에도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 앉아서 쳐다보는 사람일 수 있어요.


  어느 자리에 앉든 다 재미있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내 몫은 즐거이 맡을 수 있습니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달릴 수 있고, 물주전자를 떠올 수 있으며, 목청껏 기운을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서로 아끼는 마음일 적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스러운 벗님입니다. 4348.8.2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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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숟가락 8
오자와 마리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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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37



‘엄마도 이 집 아이라면’ 좋을 텐데

― 은빛 숟가락 8

 오자와 마리 글·그림

 삼양출판사 펴냄, 2015.6.2.



  아침에 두 아이를 데리고 마당 한쪽에서 능금씨를 심습니다. 마침 어제오늘 비가 와서 흙이 촉촉하게 젖었기에 손가락으로 땅을 쏘옥 눌러서 넉 톨을 심습니다. 능금씨에서 싹이 틀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 집 마당 한쪽에서 씨앗에서 자라는 나무가 있기를 꿈꿉니다. 어린나무를 장만해서 키우는 나무도 사랑스럽고, 새가 눈 똥으로 자라는 나무도 사랑스러우며, 예전부터 이 시골집에서 자라는 나무도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집을 둘러싼 여러 사랑스러운 나무에 ‘씨앗 한 톨로 키운 나무’가 있으면 더욱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해요.



“요 매화나무가 리츠 오빠 나무고, 요 단풍나무가 시라베 오빠 거, 가장 왼쪽에 있는 레몬나무가 내가 태어났을 때 심은 거야. 루카한테는 올리브가 어울린다고 엄마랑 얘기했거든.” “올리브가 뭐야?” “이 모종나무 이름.” (16∼17쪽)


‘문득 바라보니, 루카가 어리광부리고 싶어하는 것 같기에, 엄마랑 둘이 샌드위치처럼 양쪽에서 꼭 안아 줬다.’ (37∼38쪽)



  오자와 마리 님 만화책 《은빛 숟가락》(삼양출판사,2015) 여덟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책 《은빛 숟가락》은 ‘집에서 사랑으로 지어서 먹는 밥’ 이야기를 다룹니다. 대단한 밥차림이라 하기 어려울 수 있고, 누구나 지어서 먹을 만한 밥차림이라 할 수 있는데, 한집 사람들이 저마다 손을 거들어 이것을 함께 하고 저것을 같이 하면서 짓는 밥차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집 사람들이 누리는 한솥밥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맛집 이야기라든지, 요리 대회 이야기라든지, 요리 솜씨를 겨루는 이야기라든지, 술안주를 찾는 이야기가 만화로 꽤 많이 나오는데, 《은빛 숟가락》에서 다루는 ‘집밥’은 여러모로 사뭇 다릅니다. 밥 한 그릇이 마음을 달래는 이야기를 다루되, 온누리 모든 살림집에서 저마다 사랑을 담아서 짓는 밥 한 그릇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흐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다루어요.



‘처음엔 밥 먹기 전에 ‘잘 먹겠습니다’ 하는 거랑, 밥 먹고 나서 ‘잘 먹었습니다’ 인사하는 걸 까먹기도 했어. 나중에 배고파질 때를 위해 잔뜩 남겼다가 혼나기도 하고, 다음 식사가 언제가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많이 먹어서 배 아파지기도 했지만, 이제 괜찮아. 형네 집에서는 매일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밥 먹는 시간이 꼭 있거든.’ (22쪽)


‘엄마는 제대로 밥 먹고 있을까? 엄마가 일을 쉬는 날, 늦게 일어나서 보울 가득 샐러드만 먹거나, 크리스마스 무렵엔 이틀 연달아 케이크만 먹던 날도 있었는데. 카나데 누나가 그런 건 영양이 치우쳐서 안 된대. 엄마도 이 집 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29∼30쪽)



  《은빛 숟가락》 일곱째 권에서 ‘루카’라는 아이는 ‘어머니 집’을 떠납니다. 이 만화책을 이끄는 주인공 사내인 ‘리츠’라는 젊은이는 ‘그동안 기른 어머니’ 말고 ‘저를 낳은 어머니’가 있는 줄 고등학생 적에 처음으로 알았고, 고등학교를 마친 뒤 ‘저를 낳은 어머니’를 찾아가기로 했는데, ‘저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사랑을 조금도 못 받는 채 밥도 으레 굶는 ‘동생 루카’를 만나요.


  마음이 여리면서 착한 리츠라는 젊은이는 척 보기에도 제 동생인 줄 알겠는 아이한테서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날마다 손수 도시락을 싸서 ‘다른 집’에서 ‘저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사랑을 못 받는 동생한테 가져다 줍니다. 도시락을 가져가는 길에 언제나 그림책도 챙겨서 책을 읽어 주고 여러 가지 놀이를 함께 해요.


  이러던 어느 날 리츠라는 젊은이는 ‘저를 낳은 어머니’하고 이야기를 하기로 합니다. ‘루카라는 아이를 리츠라는 젊은이한테 맡겨’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면서 루카라는 아이는 리츠가 사는 집으로 옮기고, 루카라는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때에 제 끼니를 먹는 삶’을 누려요.


  제때에 제 끼니를 처음으로 먹으면서 밥상맡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처음으로 배우는 루카라는 아이는 마음속으로 혼자서 생각합니다. ‘엄마도 이 집 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루카의 책가방 멘 모습을 보면 분명 데려가고 싶어질 거야. 그리고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또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겠지. 그러니까 당분간은 안 만나도 돼. 가끔 너한테서 이렇게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아.” (55∼56쪽)


‘하지만 만일 지금 그 애가 상처받은 상태라면 뭔가 하고 싶어.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드레일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축 처져 있을 때에, 그 애가 손을 내밀어 준 것처럼.’ (68∼69쪽)



  아이는 아이입니다. 어른도 아이입니다. 몸뚱이와 키는 크더라도 어른도 아이와 똑같이 아이입니다. 아이도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고, 어른도 사랑을 받으면서 삽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는 제대로 철들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어른도 제대로 슬기롭지 못해요.


  사랑이 흐르기에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씩씩하고 멋진 아이로 철이 듭니다. 사랑이 샘솟기에 어른은 기운차게 일하고 살림을 가꾸는 동안 아름답고 슬기로운 사람으로 우뚝 섭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먹는 밥 한 그릇은 ‘그냥 밥 한 그릇’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기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밥 한 그릇입니다. 한집에서 함께 나누는 밥 한 그릇은 ‘그냥 끼니 한 번’이 아니라 따사로운 마음이 오가면서 맑게 웃음잔치를 이루는 밥 한 그릇입니다.



“아까, 널 기다리면서 깨달았어. 가방 안에 늘 이 상자가 있었듯이, 내 마음속엔 네가 있었다는 것. 이제 상자 귀퉁이가 닳았고, 내용물도 전혀 대단한 게 아니지만, 늦어서 미안해. 생일 선물이야.” (94∼95쪽)



  밥상에 반찬을 많이 올려야 넉넉하지 않습니다. 값진 먹을거리를 늘 밥상에 올려야 즐겁지 않습니다. 어떤 반찬을 올리든 한솥밥을 오순도순 먹을 수 있을 때에 넉넉한 한 끼니입니다. 어떤 먹을거리를 나누든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먹을 수 있을 때에 즐겁습니다.


  동무를 부르고 이웃을 부릅니다. 멀리 떨어져 사는 살붙이를 부릅니다. 차린 것은 얼마 없어도 밥상맡에 나란히 둘러앉습니다. 서로 마음으로 사귀는 아름다운 넋이기에 즐겁게 밥 한 그릇을 비웁니다.



“그거 말인데, 뭐, 이런저런 말을 하는 놈도 있겠지. 너 때문에 주전에서 누락되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 하지만, 작은 내 동생을 보면서, 있을 자리라는 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거라고 절실히 느꼈어.” (144∼145쪽)



  씨앗을 심어서 열매를 얻기까지 긴 나날이 듭니다. 남새 씨앗을 심어도 석 달을 기다리기 마련입니다. 나무 씨앗을 심으면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합니다. 나는 ‘씨앗으로 키운 예쁜 배나무’를 만난 일을 늘 마음으로 되새깁니다. 대여섯 해쯤 앞서 골목집 한쪽에 마련한 마당에서 잘 자란 배나무를 본 적 있는데, 이 배나무를 돌본 할아버지는 ‘놀러온 아들이 준 배가 맛있어서 씨앗을 남겨서 심어 보았는데, 이렇게 잘 자라서 이제 이 배나무에서 배를 얻어.’ 하고 말씀했습니다. 배씨 한 톨을 배나무로 키우기까지 얼마나 긴 나날을 얼마나 따순 손길로 어루만지셨을까요.


  사람도 씨앗 한 톨에서 새로운 숨결로 자랍니다. 모든 짐승과 벌레도 알(씨앗)에서 깨어나서 새로운 목숨으로 삶을 짓습니다. 풀과 나무도 언제나 씨앗 한 톨에서 새롭게 자랍니다. 몸에도 씨앗이 깃들고, 마음에도 씨앗이 깃듭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아주 작은 씨앗에서 비롯하는데, 이 작은 씨앗은 가없이 너르며 깊은 바람이 되어 따스한 사랑으로 거듭납니다.



“우리 집에 와. 좁은 정원이지만 무리해서 농구대를 설치했거든.”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해 주는 거예요?” “네가 농구를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그렇지. 그리고 또 하나는 나를 위해서야.” (138∼139쪽)



  밥을 다 지어서 밥상에 차릴 즈음 아이들을 부릅니다. 자, 수저는 너희가 놓아 주렴. 두 아이는 저마다 수저를 놓습니다. 어머니 수저와 아버지 수저도 아이들이 놓아 줍니다. 아직 아이들은 스스로 밥을 지을 줄 모르니 어버이가 도맡아서 짓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야무지게 자라서 손수 밥을 지을 무렵에는 내가 수저를 놓을 수 있겠지요. 밥을 먹자고 부를 수 있어서 기쁜 하루입니다. 밥상맡에서 수저 놀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밥 한 술 뜰 수 있어서 즐거운 삶입니다. 4348.8.2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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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8-25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즐겨보는 만화입니다~^^
가족을 배려하는 마음이 읽혀서 좋습니다.

숲노래 2015-08-25 21:26   좋아요 0 | URL
오자와 마리 님 만화를 보시는군요 @.@

일본에서는 십 몇 권까지 벌써 나왔는데
한국은 번역이 너무 늦어요 ㅠ.ㅜ
9권이나 10권은...
또 이분 다른 작품은 언제쯤 번역이 될는지
참 까마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