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동시집 차령이 뽀뽀 - 국영문판 바우솔 동시집 1
고은 지음, 이억배 그림, 안선재(안토니 수사) 옮김 / 바우솔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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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6



아이와 어른이 한몸에

― 차령이 뽀뽀

 고은 글

 이억배 그림

 바우솔 펴냄, 2011.12.1.



  아이는 날마다 자랍니다. 어른도 날마다 자랍니다.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는 어느새 기저귀를 떼면서 걷고, 어느새 밤오줌을 가릴 뿐 아니라, 어느새 콩콩콩 맑은 소리를 내면서 달립니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는 옹알옹알거리다가 어버이한테서 말을 물려받아 조잘조잘 노래를 합니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이는 목청껏 외칠 줄 알고, 하루 내내 웃고 떠들어도 지치지 않습니다.


  아이는 언제까지 자랄까요. 아이는 언제까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거나 배울까요.


  나이가 마흔이어도 늙은 어버이한테는 아이입니다. 나이가 예순이어도 늙은 어버이한테는 아이입니다. 나이가 예순이어도 늙은 어버이한테는 아이입니다. 함께 늙는 아이라 할 수 있지만, 함께 사는 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온누리를 함께 바라보고, 이웃과 동무를 함께 마주하며, 꿈과 사랑을 함께 키웁니다.



.. 제비집에 제비 새끼 다섯 마리 / 엄마가 먹이 찾아 / 나가 있을 때 / 찌찌배 찌찌배배 / 실컷 놀아요 / 나하고 찌찌배배 실컷 놀아요 / 그러다가 어느 날 후드둑 날아 / 저만치 빨랫줄에 앉자마자 / 기우뚱 기우뚱 / 나를 불러요 ..  (제비 새끼)



  아이는 곧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아이는 새롭게 아이를 낳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아이는 곧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새로운 아이는 이윽고 새삼스럽게 아이를 낳습니다. 어제까지 아이였어도 오늘은 어른입니다. 오늘은 아이라 하지만 모레에는 어른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이와 어른을 한몸에 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 모습과 어른 모습을 한몸에 담습니다. 어느 때에는 아이스럽고 어느 날에는 어른스럽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는 아이답고 어느 곳에서는 어른답습니다.


  아이스러운 모습이라면 맑거나 밝은 마음결이라 할 만할까요. 어른스러운 모습이라면 믿음직하거나 씩씩한 몸가짐이라 할 만할까요. 아이다운 모습이라면 쉬지 않고 웃고 노래하면서 놀 수 있는 기운이라고 할 만할까요. 어른다운 모습이라면 튼튼하고 야무지게 일하고 살림을 가꾸는 몸차림이라고 할 만할까요.



.. 까치들도 / 여름밤 풍뎅이도 / 우리집 식구 / 겨울밤 추운 달도 / 우리집 식구 ..  (우리집 식구)



  고은 님이 시를 쓰고 이억배 님이 그림을 넣은 《차령이 뽀뽀》(바우솔,2011)를 읽습니다. 고은 님은 포근하게 시를 쓰고, 이억배 님은 푸근하게 그림을 그립니다. 무척 멋스러우면서 사랑스러운 동시집입니다. 오늘날 흔히 나오는 동시집을 보면 좀 우스꽝스럽다고 할 만한 그림을 담기 일쑤입니다. 또는 도시에 있는 학교나 집에서 부대끼는 모습만 그림으로 담기 마련입니다. 동시집 《차령이 뽀뽀》는 아이와 어른이 이 땅에서 함께 사는 벗님이자 이웃이요 동무라는 숨결을 잘 보여주는 그림을 담아서 고은 님 시와 곱게 어우러지는구나 싶습니다.



.. 아가 사랑이란 / 이렇게 함께 걸어가는 거란다 / 멀리 떠나가면 / 보고 싶은 것 / 그것이 사랑이란다 ..  (사랑)



  동시집 《차령이 뽀뽀》는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함께 사는 어버이 눈썰미로 바라보는 ‘새로운 삶과 사랑’을 들려줍니다. 어른문학만 하던 고은 님은 이녁 아이 차령이를 마주하면서 어린이문학을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어느 누구도 하루아침에 어른이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루아침에 어른문학부터 즐기지 않아요.


  어릴 적부터 동시와 동화를 읽으면서 마음을 살찌우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되면, 어른문학도 기쁘게 누립니다. 어릴 적부터 어버이한테서 사랑스럽고 꿈이 가득한 이야기밥을 받아먹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어, 어른문학과 어른 인문책을 넓고 깊게 살핍니다.



.. 차령이는 혼자서 가수인가 봐 / 학교 숙제하면서 노래를 해요 / 노래하면서 숙제를 해요 / 그러다가 부를 노래 없으면 / 노래 지어서 / 내 마음 숲 속에 나비 한 마리 / 그렇게 노래 지어서 / 숙제 끝내고 노래를 해요 ..  (차령이는 가수)



  고은 님은 꼭 고은 님 자리에서 이녁 아이 차령이를 바라봅니다. 고은 님은 어머니 눈썰미로 이녁 아이를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아이와 함께 지내는 하루에 맞추어 동시를 씁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사랑과 웃음을 동시로 고이 담습니다.


  고은 님네 차령이는 몇 살쯤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고은 님네 차령이가 자라는 흐름에 맞추어 고은 님은 동시뿐 아니라 청소년시도 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그리고, 지구별 모든 어린이와 푸름이를 헤아리면서 시 한 줄로 노래와 이야기밥과 웃음꽃을 일구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 눈 위에 / 새 발자국 / 너 혼자구나 / 한 줄 더 기다랗게 / 만들어 줄게 ..  (새 발자국)



  우리 아이를 바라보면서 이웃 아이를 바라봅니다. 우리 아이 기저귀를 갈면서 이웃 아이가 자라는 결을 헤아립니다. 우리 아이가 밤오줌을 가리도록 보살피면서 이웃 아이가 씩씩하게 뛰노는 삶터를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가 날마다 뛰놀면서 노래하는 하루를 같이 누리면서, 이웃 모든 아이가 언제나 맑게 웃으면서 어깨동무할 수 있는 길을 슬기롭게 찾습니다.


  차령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눈에 찍힌 새 발자국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요. 차령이와 함께 다른 아이들도 제비집을 올려다보고, 언제나 스스로 노래를 지어서 기쁘게 흥얼거릴 수 있기를 빌어요. 차령이도 다른 아이들도 어버이한테 뽀뽀를 하고 숲짐승과 나무와 꽃을 두루 사랑하는 마음을 가꿀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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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알통
서홍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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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6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 어머니 알통

 서홍관 글

 문학동네 펴냄, 2010.3.30.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안고 밤오줌을 누입니다. 네 살 작은아이가 엊저녁에 퍽 일찍 곯아떨어졌습니다. 낮잠을 거르고 신나게 뛰놀다가 저녁밥조차 못 먹고 곯아떨어졌습니다. 배고픔과 졸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졸음이 먼저라면서 잠듭니다. 이러다 보니 밤에 쉬를 누러 혼자 일어나지 못하겠구나 싶어서, 잠든 지 여섯 시간쯤 지난 뒤 잠자리에서 크게 몸을 뒤척일 때에 귓속말로 살짝 “보라야, 쉬하러 가자. 쉬.” 하고 속삭인 뒤 살포시 안습니다.


  잠든 아이를 그냥 안으면 깜짝 놀라서 으앙 하고 웁니다. 잘 자다가 움직여야 하니까요. 잠든 아이를 안을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귀에 대고 소근소근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는 어버이가 들려주는 말을 듣고 느긋하게 몸을 맡깁니다.



.. 입관을 하는데 / 어머니는 뼈만 남은 몸으로 말없이 누워 계시고 / 관에 못질을 하기 전에 나는 어머니 얼굴을 감싸쥐었다 / 차가워진 어머니의 볼을 내 손으로 따스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  (어머니, 하관하던 날)



  밤오줌을 누이고 나서 다시 아이를 안으면, 아이는 으레 한손으로 내 어깨나 등 언저리를 톡톡 칩니다. 고개를 다시 가누어 폭 기댑니다. 자면서도 할 짓은 다 합니다. 아니, 어쩌면, 밤오줌을 누여 주어 고맙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한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다른 한손으로는 오줌그릇을 비웁니다. 큰아이가 밤오줌을 누러 나오면 오줌그릇이 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줌그릇을 비우면서 하늘바라기를 합니다. 별이 얼마나 돋았는지 헤아리고, 구름이 어느 만큼 있는지 살핍니다. 별빛과 달빛과 구름을 모두 보면서 이튿날 날씨와 바람을 몸으로 가누어 봅니다.



.. 중학교 친구한테서 / 전화가 왔다. //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 영안실을 못 잡았다고, / 너희 병원 영안실은 비어 있느냐고 ..  (영안실)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자랍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날마다 새롭게 자랍니다. 아이는 어버이와 함께 큽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고 꿈을 물려받으면서 새롭게 큽니다.


  아이와 함께 먹을 밥을 짓는 어버이는 밥솜씨가 찬찬히 늡니다. 어버이와 함께 밥을 먹는 아이는 수저질이 찬찬히 나아집니다. 아이와 함께 살림을 꾸리는 어버이는 일 매무새가 차츰 늡니다. 어버이 곁에서 살림을 지켜보는 아이는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큽니다.


  아이 앞에서 할 만한 일을 하자고 다짐하는 어버이입니다. 어버이 곁에서 일을 배우고 놀이를 즐기는 아이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돕고 가르치고 배우고 기대면서 하루하루 삽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좋아하면서 삶을 짓습니다.



.. 남산타워에 올라가서 / 벨기에 방향표시와 국기를 보면서 기뻐하는 앤느가 / 벨기에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던가. / 동대문시장에서 / 고운 녹색 한복 한 벌 사서 맞춰입고는 / 빙글빙글 돌면서 얼마나 좋아하던지 ..  (앤느)



  서홍관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어머니 알통》(문학동네,2010)을 읽습니다. 아버지가 이 시집을 읽으니 일곱 살 큰아이가 문득 이 책을 들여다보면서 책이름 다섯 글자를 읽습니다. 빙그레 웃습니다. “어머니 알통? 어머니 알통이 뭐야?” 큰아이는 무언가 재미난 이야기가 있으리라 여기면서 조그마한 시집이 궁금합니다. 아버지한테서 조그마한 시집을 건네받은 아이는 시집을 조금 읽다가 어딘가 어려운지 내려놓습니다. 그렇지만 책겉에 적힌 다섯 글자를 네 살 동생한테 가르칩니다. 동생더러 책겉을 보라고 부르면서 한 글자씩 차근차근 짚으면서 읽어 줍니다.



.. 누런 밀밭과 / 키 큰 포플러들이 / 바람 따라 길게 뻗은 시골길. // 버스를 잘못 내려 / 갑자기 걷게 된 / 서양의 작은 마을. / 방울새가 나를 안내한다 ..  (방울새가 없는 풍경)



  어머니 알통은 아이가 물려받습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아이는 씩씩하고 튼튼한 알통을 키워 새롭게 아이를 낳습니다. 새롭게 낳은 아이가 자라면서 알통을 물려받습니다. 새롭게 자라 어른이 된 아이는 다시 새로운 어른이 되고, 새로운 어른이 된 아이는 새삼스럽도록 새롭게 아이를 낳습니다.


  어머니 알통이란 어머니 사랑입니다. 어머니 사랑이란 어머니 삶입니다. 어머니 삶이란 어머니 노래입니다. 어머니 노래란 어머니 숨결입니다.



.. 고문과 학살과 일인독재의 시대가 / 태평성대였다고 / 박정희 기념관을 만들겠다고 /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니 // 일기장 구석에 이십구 년째 숨어 있던 표어들을 꺼내어 / 광화문 네거리에 / 플래카드로 다시 걸어놓아야겠네. // 국회를 대통령이 맘대로 해산하고 / 국회의원 삼분의 일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 이게 싫다고 말하면 / 고문하고 구타하고, 감옥에 처넣던 시절이 / 그렇게 좋았더냐고 ..  (10월 유신)



  서홍관 님은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을 조곤조곤 노래합니다. 슬프며 바보스러운 사회 얼거리를 안타까이 바라보기도 합니다. 시집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바보스럽고 슬픈 독재자를 바라보는 서홍관 님 눈길은, 어쩌면, 이 또한, 어머니 사랑과 같지 않을까 하고.


  어머니한테는 안 아픈 손가락이 없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면 열 손가락이 모두 아픕니다. 바보스럽고 우악스럽던 독재자조차 ‘누군가한테는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아니, 바보스럽고 우악스러운 독재자로 끔찍한 나날을 보낸 그이도 어릴 적에 어머니 사랑을 받아 태어났고, 어머니 사랑으로 젖을 물었으며, 어머니 사랑으로 밥을 먹었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어릴 적에 어머니한테서 받은 사랑’을 새록새록 되새긴다면 바보짓을 할 수 없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어릴 적에 어머니가 물려준 사랑’을 한결같이 되돌아본다면 바보짓이 아니라 사랑노래를 부르면서 살아갑니다. 4347.11.3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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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11-30 08:31   좋아요 0 | URL
어머니 알통이란 제목도 예쁘고 조각보의 고운 빛같은 표지도 예쁘네요~
거기다 함께살기님의 느낌글을 살포시 읽으니 미처 읽기도 전에 즐겁습니다.^^
감사히 담아갑니다~~

숲노래 2014-11-30 09:56   좋아요 0 | URL
이 시집을 사 놓고 몇 해째 잊고 지냈더군요 ^^;;
며칠 앞서 집안 책꽂이를 치우다가
비로소 알아보고는
바지런히 읽었습니다 ^^;;

예쁜 마음이 찬찬히 흐르는 노래예요
 
흰 저고리 검정 치마 - 황명걸 시집
황명걸 지음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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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1



예쁜 사람들

― 흰 저고리 검정 치마

 황명걸 글

 민음사 펴냄, 2004.11.29.



  제법 굵은 빗줄기가 퍼붓는 가을 낮에 마을 어귀에 서서 군내버스를 기다립니다. 두 아이는 빗속이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비 내리는 가을날 나들이인 터라 새롭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따라 오지 않는 군내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틀림없이 들어와야 하는 때에 버스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불러 읍내로 나가기로 하는데, 다섯 군데에 전화를 건 끝에 겨우 한 대 부를 수 있습니다.


  군내버스를 타지 못했으니 찻삯이 더 들기도 하지만, 늘 부르는 택시가 아닌 처음 부르는 택시를 탄 터라, 여느 때보다 찻삯이 더 듭니다. 택시삯을 치르고 내리면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다른 택시보다 1/3을 더 받은 오늘 탄 택시를 모는 아재는, 이만큼 삯을 받으면 돈을 얼마나 더 모을 만할까요. 오늘 탄 이 택시처럼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택시를 모는 아재는, 이녁 일삯을 다달이 어느 만큼 모을 만할까요.



.. 모처럼 서울 인사동에 출타 나왔다가 시골 수릉리 집으로 돌아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하고 여류 최영미가 내뱉은 〈지하도에서〉의 촌철살인적 경구의 적절함에 감탄하면서, 우리 산하의 사계를 간판그림처럼 곱게 그린 구리 어느 아파트를 지나면서는, 어지러웠던 머리가 한결 개운해진다 ..  (歸路辭說)



  고흥 읍내에 튀김닭 파는 집이 꽤 많습니다. 우리 식구는 고흥 읍내 모든 닭집에 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저곳 가 보기는 했는데, 썩 마음에 들어 다시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데는 얼마 앞서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깊은 두멧시골에도 튀김닭을 파는 집이 있어서 아이들과 어쩌다 한 번 갈 수 있구나 싶어 ‘고맙다’고 여겼습니다. 맛으로도 값으로도 이냥저냥 당기지 않았어요. 면소재지에는 튀김닭집이 한 군데 있고, 그곳에서는 우리 마을까지 날라다 주기는 하지만, 어딘가 알 수 없이 매워 아이들이 먹지 못하고, 제대로 튀기지 않아 핏물이 돌기 일쑤이면서, 값까지 비싸서 더는 그곳에서 시키지 않습니다.


  지난달에 ‘닭집 선물권’을 석 장 얻었습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찾아온 손님한테 취재를 받았고, 취재 이야기가 잡지에 실린 뒤, 취재를 받아 주어 고맙다는 뜻으로 ‘닭집 선물권’을 우리한테 보내 주었습니다. 백화점 선물권도 아니고 구두 선물권도 아니고 ‘닭집 선물권’이라니, 참 재미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닭집이 고흥 같은 시골에도 있나 궁금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살피니 읍내에 한 군데 있습니다.


  와, 고흥도 있을 곳은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언제 그 닭집에 갈 날을 손꼽았으며, 열흘 앞서 한 번 찾아가서 선물권을 씁니다. 이날 찾아가서 ‘고흥에 터를 잡아 지낸 지 처음’으로 ‘다시 찾아가서 맛나게 먹을 만한 닭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톡 쏘는 쐬주 한 잔에 / 감칠맛 나는 과메기 한 점을 / 생미역에 둘둘 말아 안주 삼는 / 이 한때의 살맛 ..  (과메기)



  가을비 퍼붓는 날에 바가지 택시삯을 물고 읍내 튀김닭집에 가서 느긋하게 앉아 저녁을 먹습니다. 두 아이는 배불리 먹고 더 못 먹습니다. 곁님도 넉넉히 먹습니다. 나는 이렁저렁 즐겁게 먹습니다. 이제껏 읍내 다른 가게에서는 두 마리를 시켜야 비로소 아이들이 배불리 먹는데, 이곳에서는 한 마리를 시켜도 배불리 먹습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가게마다 무엇이 다를까요. 가게를 꾸리는 일꾼마다 무엇이 다를까요.



.. 흰 저고리 검정 치마 / 너무 아름다워 흠갈라 ..  (흰 저고리 검정 치마)



  황명걸 님 시집 《흰 저고리 검정 치마》(민음사,2004)를 진작 읽었습니다. 시집을 워낙 드물게 내신 할배(이제는 할배이지요)라,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틈틈이 다시 읽었습니다.


  황명걸 님이 열 해 앞서 2004년에 선보인 세 권째 시집에 붙은 이름을 읽으면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열 해 앞서도 빙그레 웃었고, 열 해가 지난 오늘도 빙그레 웃습니다. 나는 이 시집을 ‘이름만 읽으’면서도 황명걸 님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가 하는 대목을 환하게 알아차렸습니다. 겉그림과 책 꾸밈새도 시집 이름을 잘 드러내고, 시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잘 살렸습니다. 멋진 시집입니다.



.. 일제 시대 내가 어릴 적 / 작은 장난감 일본도를 가지고 싶어했던 나에게는 / 일 천황 군모 위의 장식 깃털이 꼭 억새를 닮아 멋있어 보였던 / 부끄러운 기억이 있네 ..  (억새)



  예쁜 아이들은 언제나 예쁩니다. 예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예쁜 어른이 됩니다. 예쁜 어른은 예쁜 아이를 낳습니다. 예쁜 어른은 예쁜 아이를 낳아 예쁜 말을 물려줍니다. 예쁜 어른은 어떤 일을 하든 예쁜 마음으로 예쁜 손길을 펼칩니다.


  그러면, 그러면 말이지요, 안 예쁜 어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 가운데 안 예쁜 아기가 있을까요? 아장아장 걷고 옹알이를 하는 아기 가운데 안 예쁜 아기가 있을까요?


  무시무시한 독재와 전쟁과 폭력 따위를 일으킨 이들도 갓 태어났을 적에는 아주 예뻤으리라 생각합니다. 안 예쁠 수 없습니다. 핵무기를 만들고 핵발전소를 세우는 이들조차 갓난쟁이였을 적에는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웠을까요. 지구를 쥐락펴락 갖고 논다는 재벌 우두머리도 두어 살 꼬맹이였을 적에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웠을까요.



.. 내 안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있다 / 내 안에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있다 / 이빨을 드러내는 일촉즉발의 대치, 독사의 눈같이 싸늘한 반목 / 겨 묻은 개 똥 묻은 개 얼려 뒹구는 이전투구 / 남북의 팽팽한 긴장, 여야의 치사한 대결이 / 내 안에 있다. 시뻘겋게 살아 있다 ..  (내 안의 사라예보)



  우리는 모두 예쁜 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다 함께 예쁜 이웃입니다. 이 책도 예쁘고 저 책도 예쁩니다. 이 신문도 예쁘고 저 신문도 예쁩니다.


  고흥 읍내에 있는 우체국에 가면, 몇 가지 주간잡지를 여러 권 놓습니다. 가져가서 보고픈 사람은 가져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주간잡지는 한두 달이 가도 안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사람들이 잘 안 가져갑니다. 나도 이 주간잡지를 안 가져갑니다. ㅈㅈㄷ에서 내는 주간잡지가 아니지만, 이른바 ‘진보’ 쪽에 선다고 하는 이들이 엮는 주간잡지이지만, 읍내 우체국에 들러서 소포를 부친 뒤 살짝 숨을 돌리면서 이 주간잡지를 손에 쥐어 차례를 보고 몸글을 죽 살피는데, 시골사람한테 눈길을 끌 만한 이야기는 한 꼭지도 없습니다.


  시골사람한테 ‘시사’나 ‘논쟁’이나 ‘초점’이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시골사람한테는 ‘땅을 가꾸는 이야기’나 ‘들을 돌보는 이야기’나 ‘숲을 사랑하는 이야기’나 ‘풀을 먹는 이야기’쯤 되어야 눈길이 갈 만합니다. 그런데, 신문이든 잡지이든 방송이든 책이든, 이런 이야기를 거의 안 다뤄요.


  대통령 아무개를 나무라는 이야기를 열 쪽 스무 쪽 채운들 나라가 달라질까요? 어처구니없는 짓이 늘 터지는 한국 사회이기에 어처구니없는 일을 열 쪽이든 스무 쪽이든 다룰밖에 없기도 할 테지만, 백 쪽 남짓 엮는 잡지 가운데 한두 쪽쯤은 ‘삶을 밝히고 삶을 손수 가꾸며 삶을 기쁨으로 짓는 이야기’를 실을 만하지 않느냐 싶어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야 비로소 주간잡지이든 일간신문이든 시골에서 읽히거나 팔릴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 하지만 악수하고 싶어라 / 저들의 손 뜨겁게 잡고서 / 저들의 생생한 기를 받고 싶어라 ..  (손에 관하여)



  흰 저고리가 이쁩니다. 검정 치마가 이쁩니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사람은 그지없이 이쁩니다. 한겨레 옷이기에 이쁘다기보다, 이쁘니까 이쁩니다.


  가시내는 치마저고리를 입으며 이쁩니다. 사내는 바지저고리를 입으며 이쁩니다. 그리고, 가시내도 바지와 저고리를 입을 수 있고, 사내고 치마와 저고리를 입을 수 있습니다. 옷차림이야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쁜 생각으로 이쁜 손길을 뻗어 이쁜 삶을 일구면 언제나 이쁩니다.


  읍내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적에는 군내버스를 탑니다. 네 살 작은아이는 군내버스에 잠들고, 마을 어귀에서 군내버스를 내린 뒤 한손으로 우산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 잠든 아이를 가슴에 품어 집으로 걸어서 오는데, 집에 닿으니 작은아이가 눈을 번쩍 뜹니다.


  큰아이도 이랬고 작은아이도 이렇습니다. 아마, 나도 어릴 적에 이랬을 테지요. 아이들도 나도 모두 이쁜 사람입니다. 4347.11.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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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 에고, 짜다 동시야 놀자 7
함민복 지음, 염혜원 그림 / 비룡소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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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5



너는 무엇을 읽어서 알아채니?

― 바닷물 에고 짜다

 함민복 글

 염혜원 그림

 비룡소 펴냄, 2009.5.22.



  아침에 일어나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해가 어디에서 뜨고, 해를 둘러싸는 구름은 하늘을 어떻게 덮는지 바라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어느 만큼 알아차립니다. 해는 지구에서 아주 먼 곳에 있고, 구름은 지구별 둘레에 찰싹 붙은 줄 알아요. 그러나 우리 눈은 구름과 해가 그리 멀지 않은 듯 바라보며, 구름이 마치 해를 가린다거나, 해가 구름 사이에 숨는다고 여깁니다.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눈이라면 해가 구름에 가리는 일이란 없는 줄 알아채거나 읽으리라 느껴요.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눈이라면 해가 어떻게 타오르는가를 알아채거나 읽으리라 느껴요. 더욱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눈이라면 우리가 두 발을 디딘 이 지구별이 어떠한 얼거리인지 알아채거나 읽으리라 느껴요.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까요? 우리는 무엇을 알아채면서 살까요? 우리는 무엇을 읽으면서 살까요?



.. 뻘은 말랑말랑해 / 발자국이 다 남아 / 어디 갔다 왔는지 / 누구와 놀았는지 / 거짓말할 수 없어 ..  (소라 일기장)



  가을이 되어 잎이 집니다. 가을이 되어 새로운 잎이 돋습니다. 겨우내 앙상한 몸으로 지내는 나무는 늦가을까지 모든 잎을 떨굽니다. 겨우내 푸른 몸으로 지내는 나무는 늦가을까지 새로운 잎을 틔웁니다.


  나무를 알려면 나무를 보아야 합니다. 나무를 제대로 알려면 나무한테 다가가서 나뭇줄기를 만지고 나뭇가지를 쓰다듬어야 합니다. 나무를 똑똑히 알려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 내내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어루만져야 합니다. 나무를 슬기롭게 알려면 날마다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잎과 꽃과 열매를 고루 살펴야 합니다. 나무를 사랑스레 알려면 나무씨앗을 받아서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심어서 아이한테 물려주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나무를 잘 아는 사람이 퍽 드뭅니다. 나무장사를 하는 이는 꽤 있지만, 나무를 알아서 나무를 사고팔지 않습니다. 나무를 좋아한다는 사람도 나무를 잘 알면서 마당이나 텃밭에 건사하지 않습니다.


  나무를 그리는 사람, 그러니까 화가는 나무를 얼마나 잘 알거나 지켜보면서 그림을 그릴까요? 나무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나무를 얼마나 아끼거나 사랑하면서 사진을 찍을까요? 나무 이야기를 글로 쓰는 사람은 나무와 얼마나 이웃과 동무로 지내면서 글을 쓸까요?



.. 맨발로 뻘에 한번 들어가 봐 / 말랑말랑한 뻘이 간질간질 /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며 / 금방 발에 딱 맞는 / 신발 한 켤레가 된다 ..  (지구 신발)



  동이 틉니다. 마을마다 닭 우는 소리가 퍼집니다. 아직 시골마을에는 닭을 치는 집이 있습니다. 개가 짖는 소리와 경운기 움직이는 소리가 함께 퍼집니다. 멧새가 이 나무에 앉다가 저 나무로 옮기면서 지저귀는 소리가 나란히 퍼집니다. 겨울 추위를 앞두고도 새는 이곳에서 씩씩하게 삽니다. 참말 새들은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아주 씩씩합니다. 시골에서는 농약바람을 이기면서 씩씩합니다. 도시에서는 자동차물결을 견디면서 씩씩합니다. 새한테는 백화점이나 할인마트가 없지만, 여름에도 겨울에도 먹이를 찾아 힘차게 삶을 꾸립니다. 새는 농약과 시멘트 때문에 먹이가 해마다 줄어들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새끼를 낳아 알뜰살뜰 돌보고 아끼면서 삶을 가꿉니다.



.. 물고기들은 / 물고기들은 // 비가 온다고 말하지 않고 / 동그라미가 온다고 하지 않을까 // 봄동그라미 / 소나기동그라미 ..  (비)



  함민복 님이 쓴 동시를 모은 《바닷물 에고 짜다》(비룡소,2009)를 읽습니다. 이 동시집에는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가 나오고, 바다 둘레에서 먹이를 찾는 여러 목숨이 나옵니다. 바다에서 만날 수 있는 이웃이 이 동시집에 나옵니다. 이를테면, “집게야 / 너는 집이 있어 좋겠구나 // 꼭 / 그렇지도 않아요 // 우린 외식도 못하고 / 외박도 못해요(집게).” 같은 동시처럼, 바다살이를 하는 이웃을 바라보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그리고, “똥 싼 물 먹고 / 똥 싼 물에서 놀고 / 똥 싼 물에서 자고 / 똥 싼 물에서 산다고 // 흉보지 말아요 // 왜냐고요? // 사람들은 우리를 / 맛있다고 잡아먹잖아요(볼락의 변명)” 같은 이야기가 가만히 흐릅니다.


  《바닷물 에고 짜다》는 함민복 님이 아이들한테 들려주려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바다에서 살거나 바다 둘레에서 먹이를 얻는 여러 목숨과 얽혀 재미나게 ‘말놀이’를 펼칩니다.


  그런데, 동시집 《바닷물 에고 짜다》는 함민복 님이 함민복 님 삶을 아이들한테 보여주려는 책이 됩니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외식이나 외박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함민복 님이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함민복 님이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집이 있어 좋겠구나” 같은 생각도 함민복 님 생각입니다.


  집게는 집을 달고 다니는 모습이라 해서 이러한 이름을 사람들이 붙입니다만, 집게가 참말 ‘집’을 달고 다니는지 아닌지 알 길이 없습니다. 집게한테는 ‘집’이 아니라 ‘갑옷’일 수 있고 ‘옷’이나 ‘방패’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집게는 ‘집’에서 밥을 차려 먹지 않습니다. 집게는 언제나 ‘바깥’에서 이곳저곳 다니며 먹이를 얻습니다.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는 바다에서 똥을 누겠지요. 물고기라 해서 똥을 ‘싸’지 않습니다. ‘똥 싸다’는 똥오줌을 아직 못 가리는 아기가 바지에 똥을 누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물고기이든 새이든 모두 ‘똥 누다’로 말해야 올바릅니다. 화들짝 놀라서 얼른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면서 똥을 뽀직 누는 새라면, 이때에는 ‘똥 싸다’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나저나, 사람은 어디에 똥을 눌까요? 요즈음 도시사람은 모두 변기에 똥을 누고, 변기에 눈 똥은 냇물로 흘러가고 바다로 스며듭니다. 오늘날 도시사람이 눈 똥은 거름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오늘날 도시사람이 눈 똥은 냇물과 바닷물을 더럽힙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눈 똥으로 더러워지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아 사람이 먹지요. 바다에서 물고기가 눈 똥은 ‘바다에서 사는 작은 목숨’들이 즐겁게 받아먹습니다. 또는 바다밑으로 가라앉아서 ‘바다밑 새로운 흙’이 됩니다.


  더 헤아린다면, 사람은 스스로 눈 똥으로 흙을 살찌워 밥을 얻습니다. 사람이야말로 똥을 먹으면서 산다고 할 만합니다.


  동시집 《바닷물 에고 짜다》는 아이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기자기하게 예쁜 그림을 잔뜩 넣은 이 동시집은 아이들한테 어떤 꿈과 사랑을 보여주는 책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바다에 사는 이웃을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마주하거나 바라보도록 이끌 만한 책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함민복 님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알아채거나 배우셨나요. 함민복 님이 바다를 바라보면서 알아채거나 배운 것 가운데 어떤 이야기를 이 땅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은가요. 4347.11.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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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이름 한 글자 창비아동문고 139
김은영 지음 / 창비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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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4



똥 누며 보는 나무

― 빼앗긴 이름 한 글자

 김은영 글

 남궁산 그림

 창비 펴냄, 1994.12.15.



  시골집에서 똥을 누러 갈 적에는 늘 나무를 봅니다. 뒷간 문을 열면 마당에 선 후박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후박나무 가지 사이로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볼 수 있고,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구름을 볼 수 있습니다.


  박새나 참새 같은 작은 새가 찾아와서 노래합니다. 직박구리나 까마귀처럼 커다란 새가 찾아와서 노래합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나비가 팔랑거리면서 춤사위를 보여줍니다. 오늘은 십일월 이십일일인데, 갓 깨어난 나비 한 마리가 예쁘게 춤을 추면서 우리 집 마당에서 날아다닙니다. 어쩜 이 겨울 문턱에 깨어나느냐 싶지만, 이 겨울 문턱에도 들을 가만히 살피면, 봄까지꽃이랑 별꽃이랑 코딱지나물꽃이 핍니다. 때이른 냉이꽃이 피고 갓꽃이나 유채꽃이 핀 곳이 있습니다.


  날이 폭하거나 볕이 좋으면 꽃과 나비는 슬그머니 깨어나 눈부신 몸짓으로 고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변소 갈 때마다 / 보는 꽃 // 우물 갈 때마다 / 보는 꽃 ..  (호박꽃)



  낮에는 볕이 포근하지만 아침저녁에는 바람이 찹니다. 날씨가 크게 바뀌는 흐름입니다. 엊그제까지도 쑥쑥 올라오는가 싶던 모시풀은 이제 크게 꺾입니다. 어제그제 사이에 우리 집 모시풀은 모조리 고개를 폭 꺾습니다. 끝없이 넝쿨을 뻗던 호박도 이제 잎이 모두 시듭니다. 이와 달리 한겨울에도 푸른 잎사귀를 선보이는 유채와 갓은 새 잎이 돋으며 싱그럽습니다. 마을밭에는 배추가 알이 야무지고 넓적한 잎사귀는 소담스럽습니다.


  내가 지내는 시골이 전라남도 바닷가 가까운 데가 아닌 충청북도나 강원도 멧골이라면 이 같은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 느낍니다. 충청북도나 강원도 멧골은 요즈음 얼마나 추울까요. 벌써 꽁꽁 얼어붙을 테지요.


  강원도 위쪽 평안도나 함경도도 몹시 추우리라 생각해요. 평안도와 함경도 위쪽은 연길은 더욱 추우리라 생각해요. 시베리아는 어떤 추위일까요. 알래스카는 어떤 겨울바람일까요.



.. 뒤뜰에 감꽃처럼 / 텃밭에 깨끛처럼 / 촘촘히 피어나는 / 개구리 울음 소리꽃 ..  (시골 밤에 피는 꽃)



  도시에서 건물로 일하러 가는 사람은 건물에 있는 뒷간에서 똥오줌을 눕니다. 도시에 있는 건물은 따로 청소지기를 둡니다. 청소지기가 아침저녁으로 변기를 깨끗이 닦지 않으면, 건물 뒷간은 무척 지저분하리라 느껴요.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린 건물이나 도시이기 때문일까요.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왁자하게 모인 건물이나 도시이기 때문일까요.


  도시에 짓는 건물은 좁은 땅에 높다라니 올려야 합니다. 땅은 좁은데 사람은 끔찍하도록 많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좁은 땅에 높다라니 건물을 올리는 도시에서는 뒷간을 넉넉하게 쓰지 못합니다. 뒷간을 제법 크게 짓더라도 문을 꼭 닫아야 합니다. 똥을 누면서 나무를 본다든지, 새를 만난다든지, 나비와 벌을 사귄다든지, 꽃내음이나 풀내음을 맡을 일이 없습니다.



.. 내가 웃으면 / 아가도 웃어요 // 내가 울면 / 아가도 따라 울어요 ..  (아가)



  언제나 풀밭에 둘러싸인 사람은 풀내음을 맡으면서 풀노래를 부릅니다. 언제나 숲에 깃드는 사람은 숲내음을 맡으면서 숲노래를 부릅니다. 자동차물결에 휩쓸리는 사람은 수많은 자동차를 살피면서 다치지 않으려고 걱정해야 합니다. 자동차물결을 살피느라 하늘을 올려다볼 겨를이 없고, 새나 풀벌레나 개구리를 살필 틈이 없습니다. 아니, 이웃이나 동무를 쳐다볼 겨를이 없고, 나 스스로 되돌아볼 틈조차 없습니다.



.. 마루 기둥 빨랫줄에 앉은 / 어미 제비 한 쌍 / 장대비 속을 뚫고 / 쏜살같이 날아갑니다 ..  (어미 제비)



  김은영 님이 쓴 동시를 엮은 《빼앗긴 이름 한 글자》(창비,1994)를 읽습니다. 조그마한 학교에서 이쁜 아이들과 어우러지는 삶을 누리면서, 김은영 님 어린 나날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담은 동시라고 합니다. 제비를 동무로 삼고, 밭자락을 놀이터로 삼은 이녁 어린 나날을 그린 동시라고 합니다.



.. 말하기 시간에 / 공부 못 하는 우식이가 / 얼굴 붉힌 채 서 있다가 / 선생님이 다그치자 / 겨우 말했다 // 농사 지을래요 ..  (우식이)



  오늘날 초등학생 가운데 ‘나는 앞으로 농사꾼이 될래요’ 하고 말하는 어린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1%조차 아닌 0.1%조차 아닌 0.01%조차 아닌, 아니 숫자로 따질 수 없을 만하겠지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가운데 ‘내 꿈은 농사꾼이에요’ 하고 말할 푸름이는 아마 없으리라 느껴요. 대학생 가운데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흙을 일구겠습니다’ 하고 다부지게 외치는 젊은이는 있기나 있을까요.


  제도권 입시지옥 학교에서도 농사꾼이 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안학교에서도 농사꾼이 되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스스로 삶을 짓고 생각을 지으며 사랑을 짓는 길을 밝히거나 보여주지 못하기 일쑤예요.



.. 오시려거든 / 네 바퀴로 빵빵거리며 / 논둑 길 내달려 오지 말고 / 맨발 맨손으로 / 살포시 흙을 밟고 오세요 ..  (흙을 밟고 오세요)



  흙을 만지는 까닭은 삶을 손수 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흙을 가꾸는 까닭은 삶을 이루는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흙을 사랑하는 까닭은 내 넋이 깃든 몸뚱이가 튼튼하게 서서 이 땅에서 아름답게 춤추도록 북돋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흙을 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도시와 시골 모두 흙땅이 있고, 이 흙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야 하며, 풀과 나무가 자라는 곳에 집을 예쁘게 지어 마을을 알뜰살뜰 이루어야 사랑스럽습니다.



.. 똥 누고 나오면서 / 달을 보아요 ..  (어디에서 달을 보나요)



  초승달이 이쁘장합니다. 반달이 아름답습니다. 보름달이 넉넉합니다. 달빛은 별빛을 가리지 않습니다. 달빛이 어우러지는 밤하늘이 초롱초롱 눈부십니다. 우리는 온누리 수많은 별 가운데 지구별에서 함께 삽니다. 서로 아끼고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서로 돌보고 믿는 사이입니다.


  마음에서 자라는 꿈으로 씨앗을 심어요. 흙을 포근히 어루만지면서 씨앗을 심어요. 교과서나 문제집이 아니라 ‘참답고 슬기로운 책’을 아이와 함께 읽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 시를 써요. 문학 전문가만 쓰는 시가 아니라, 우리가 손수 삶을 짓는 나날을 고스란히 담아서 이웃과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써요. 4347.11.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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