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달빛 마이노리티 시선 15
표광소 지음 / 갈무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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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시와 싸움

― 지리산의 달빛

 표광소 글

 갈무리 펴냄, 2002.8.27.



  때때로 졸음이 쏟아집니다. 어 왜 이렇게 졸린가 하고 문득 돌아보면, 아하 하고 깨닫습니다. 나는 이른 새벽에 알림시계 없이 늘 스스로 일어납니다. 저녁에 잠들면서 이튿날 몇 시에 일어나야지 하고 마음속에 말을 걸면 언제나 그때에 일어나요. 그런데 낮에 졸음이 쏟아지면, 아침마다 하루를 열면서 오늘 하루 어떻게 무엇을 할는지 제대로 생각을 짓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때에 나는 두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으이구 바보 같으니라구, 하면서 혼자 뉘우치거나 나를 스스로 깎아내릴 수 있습니다. 둘째, 아 그래 오늘 아침에 하루를 미처 안 지었네, 하면서 혼자 되새기거나 이제부터 비로소 하루를 새롭게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졸음은 졸음대로 받아들이면서 몇 분쯤 눈을 붙이면서 쉰 다음 맑은 넋으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졸음은 졸음대로 억지로 버티다가 하루 내내 고단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 간밤의 어둠이 깃들었던 / 계단 밑에 / 소주 병 하나, 종이 컵 하나, 귤껍질 하나 / 꽁꽁 얼어붙어 있다 ..  (방 한 칸)



  졸린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한껏 신나게 놀다가 졸음이 가득 두 눈에 고인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힘들고 지칠 때가 아니면 스스로 잠자리에 눕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힘들고 지칠 적에 잠자리에 스스로 눕기도 하지만, 놀다가 고개를 폭 꺾으며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밥이나 과자나 빵이나 떡이나 뭔가를 먹다가 그만 고개를 폭 숙이며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졸음이 잠으로 바뀌어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바라보면 몹시 즐겁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버이를 믿거든요. 믿고 얼마든지 기대거든요. 내가 졸려서 곯아떨어지면, 나를 포근히 안아서 따스히 재우리라 믿고 기쁘게 곯아떨어져요. 나는 아무리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졌어도, 이 아이들을 안고서 천천히 걷습니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도 빙그레 웃으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서 아이들이 곯아떨어졌으면 한동안 무릎에 누여 토닥토닥 달래다가 잠자리로 옮기지요.



.. 내 딸 / 은송이는 / 가난한 노동자와 병약한 어머니 사이에서 / 난산 끝에 태어나 / 뒤집기 / 배밀이 / 홀로서기 끝에 / 함박 웃으며 / “엄마” / “아빠” / “맘마” / “어부바”도 곧잘 하고 / 첫돌이 되어 잔치 준비를 하는 동안 / 첫걸음을 뗐다 / 예쁘기도 하지 ..  (잔치)



  설이나 한가위나 다른 날에 아이들과 먼 나들이를 다닙니다. 시외버스이든 기차이든 으레 예닐곱 시간이나 여덟아홉 시간을 달려서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찾아갑니다. 이동안 아이들은 새근새근 곯아떨어지기도 하고, 버스나 기차에서 개구지게 놀기도 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이면서 몸이 힘들면, 나도 버스나 기차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한숨을 돌립니다. 나는 아이들을 믿습니다. 무엇을 믿느냐 하면, 아버지가 한동안 눈을 붙이더라도 두 아이가 씩씩하게 잘 놀면서, 버스나 기차에서 그리 크지 않은 알맞춤한 목소리로 재미있게 지내리라 믿습니다. 아이들은 나를 믿고 잠들고, 나도 아이들을 믿고 잠듭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기대면서 아낄 수 있는 삶을 누립니다.



.. 산다는 것은 / 거푸 / 기쁘다 ..  (거푸)



  표광소 님 시집 《지리산의 달빛》(갈무리,2002)을 읽습니다. 2002년에 처음 선보인 이 시집은 2015년에 어떻게 읽을 만할까 하고 곰곰이 돌아봅니다. 앞으로 열세 해가 더 흘러 2028년이 되면, 또 2050년이 되면, 이 시집은 앞으로 어떤 빛이 나거나 어떤 바람으로 사람들한테 다가갈 만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집일까요. 사랑을 읊는 시집일까요. 아픔과 슬픔을 밝히는 시집일까요. 피가 튀기도록 싸우다가 다친 사람들을 달래는 시집일까요. 고단하거나 괴로운 삶에서도 웃음과 노래가 반드시 있는 대목을 드러내는 시집일까요.



.. 돈도 배경도 없는 / 노동자 구보 씨의 / 첫 직업은 / 독립문 청소부였다 ..  (독립문, 노동자 구보 씨의 일일 1)



  돈이나 뒷줄이 없기에 표광소 님은 서울 독립문에서 청소 일꾼을 맡았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표광소 님이 아니더라도 서울 독립문 둘레에서 청소 일꾼을 지낸 사람이 많습니다. 참말 이들은 돈이나 뒷줄이 없어서 이 일을 맡을 만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돈이나 뒷줄을 애써 바라지 않기에 이 일을 맡을 만합니다.


  돈은 돈대로 아름답습니다. 즐겁게 쓰면서 이웃과 나눌 수 있는 돈이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돈은 돈대로 안 아름답습니다. 돈을 손에 거머쥔 사람이 즐겁게 못 쓰거나 이웃과 살가이 나누지 못하면, 이러한 돈은 안쓰럽고 슬픕니다.


  서울 독립문에서 청소지기로 일한 사람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까요. 비질을 하면서 무엇을 마주하고 헤아리고 맞이할까요.


  어느 한쪽에서는 쓰레기를 버립니다. 어느 한쪽에서는 쓰레기를 줍습니다. 조금만 헤아려 보면, ‘내 집 방바닥’에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집 방바닥’을 남한테 치우라고 맡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요. 이러한 얼거리라야 맞지요. 그런데, 내 집 방바닥에다가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고, 이러한 쓰레기를 남한테 치우라고 윽박지르는 사람이 있어요.



.. 너는 / 내가 부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가버릴 것 같다 / 그것이 무섭다 ..  (연애 감정)



  삶은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너와 내가 싸우면서 어느 한 사람이 외치는 목소리가 더 옳다고 내세우려 할 수 있습니다. 삶은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너와 내가 사랑하면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노래하는 기쁜 숨결이 될 수 있습니다.


  싸우는 사람은 늘 싸움을 생각합니다. 싸우는 사람은 누구하고 싸워야 할는지 자꾸 찾고 자꾸 따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사랑을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하고라도 사랑을 하는 너르면서 깊은 품이 되어 언제나 웃음을 노래합니다.


  시집 《지리산의 달빛》을 덮습니다. 여덟 살 큰아이하고 글씨놀이를 하려고 조그마한 그림엽서 뒤쪽에 정갈하게 글 몇 줄 적습니다. 아이가 읽을 글이기에 어버이인 나는 가장 정갈하다 싶은 글씨로 노래를 씁니다. 아이와 함께 부를 노래를 글로 쓰고, 아이와 함께 사랑할 하루를 글로 담습니다. 4348.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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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새 창비시선 118
김경희 지음 / 창비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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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8



시와 바람결

― 작은 새

 김경희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4.3.30.



  따스한 바람으로 바뀌는 겨울 끝자락에는 모두 따스하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직 바람이 쌀쌀하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포근하네 하고 생각이 바뀝니다. 이제는 차갑거나 시린 바람은 더 없으리라 느끼거든요.


  차가운 바람으로 바뀌는 가을 끝자락에는 모두 차갑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직 바람이 따뜻하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차갑네 하고 생각이 바뀝니다. 이제 한동안 차갑거나 시린 바람이 오겠구나 하고 느끼거든요.



.. 매양 탐나는 것은 / 만 톤의 물과 비누라서 // 빨래 솜씨 유명한 / 저 처녀 ..  (백합표)



  겨울에는 빨래를 하면 손이 얼어붙습니다. 여름에는 빨래를 하면 손이 시원합니다. 겨울에는 자전거를 타면 낯이 얼어붙습니다. 여름에는 자전거를 타면 땀이 주르르 흐르는 볼이 시원합니다. 추운 날이기에 겨울이고 더운 날이기에 여름입니다. 겨울에 불기에 겨울바람이고, 여름에 불기에 여름바람입니다. 겨울에는 여름이 그리울 만하고, 여름에는 겨울이 그리울 만합니다. 이리하여,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알맞게 흐릅니다. 따스한 바람 다음으로 더운 바람이 오지요. 더운 바람 다음으로 스산한 바람이 오지요. 스산한 바람 다음으로 차가운 바람이 오지요. 차가운 바람 다음으로 다시 따스한 바람이 오면서, 하루하루 새롭게 삶이 흐릅니다.


  바람을 느낄 줄 안다면, 철을 압니다. 철을 안다면 삶을 압니다. 삶을 안다면 사랑을 압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알고 싶은 사람은 바람을 먼저 알아볼 노릇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삶을 짓고 싶은 사람은 바람을 먼저 헤아릴 노릇입니다. 싱그럽게 마실 바람을 살피고, 서로 기쁘게 마실 바람을 돌아볼 노릇이에요.



.. 손에 들고 / 등에 지고 / 머리에 이었다 / 목에마저 걸 수만 있다면 걸고, // 밀어주는 손도 없는 맞바람 / 맞으며 안으며 품으며 / 길을 가는 사람 ..  (짐)



  오늘 나는 자전거를 몰면서 두 아이와 나들이를 갑니다. 이월 끝자락은 아직 썰렁하지만, 이월 끝자락이니 맨손으로 자전거를 탈 만합니다. 삼월이 코앞인 들녘을 바라보면 ‘겨우내 누렇게 시든 풀잎’ 빛깔이 새롭습니다. 아주 샛노랗습니다. 풀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릴 무렵에도 샛노란 풀빛인데, 봄이 코앞인 이월 끝자락에도 풀빛은 샛노랗습니다.


  가을에는 열매와 함께 샛노란 풀빛이라면, 겨울 끝자락과 봄 첫머리에는 ‘흙으로 돌아가려’고 샛노란 풀빛입니다.


  나는 이월 끝자락에 아이들과 자전거로 들녘을 가로지르면서 이 샛노란 풀빛을 듬뿍 마십니다. 바람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드는 샛노란 기운을 맞아들입니다. 내 몸과 마음도 샛노란 풀빛처럼 흙으로 돌아가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내 넋과 숨결도 샛노란 풀빛처럼 환하게 타오르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 벼랑 끝에서만 나는 꽃이었다가 / 그 벼랑 끝에서 언제나 한 걸음 더 내딛는 ..  (詩法)



  김경희 님 시집 《작은 새》(창작과비평사,1994)를 읽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작은 새’를 노래하고 싶은 시집 《작은 새》입니다. 큰 새도 어중간한 새도 아닌 작은 새입니다.


  작은 새는 누구일까요. 작은 새는 작은 새일 테지요. 매와 수리가 보기에 참새는 작은 새일 테지만, 나비와 잠자리가 보기에 참새는 큰 새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딱새는 작은 새일 테지만, 애벌레와 풀벌레가 보기에 딱새는 무척 큰 새입니다.



.. 어머니는 소금이 ‘달다’고 한다 / 물이 ‘달다’고 한다 / 올해도 아들딸들에게 나누어 줄 / 고추장 된장 간장이 소금에 물이 / 잘 맞아 달다고 웃으신다 ..  (어머니의 철학)



  겨울이 끝날 무렵에는 바람결이 바뀝니다. 뭍바람에서 바닷바람으로 바뀝니다. 겨우내 뭍바람을 맞으면서 땀을 뻘뻘 흘렸으니, 이제부터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땀을 덜 흘릴 만합니다. 그러나, 등바람을 좀 업고서 자전거를 달린다 하더라도, 가는 길과 오는 길은 같기에, 한 번 등바람이면 한 번 맞바람이에요. 한 번 등바람을 타고 가볍게 자전거를 달리면, 다른 한 번은 맞바람을 이기면서 힘차게 자전거를 밟아야 합니다.


  샛자전거와 수레에 탄 두 아이가 노래합니다. 앞머리에서 자전거를 이끄는 나도 노래합니다. 두 아이는 기쁘게 노래하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래합니다.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맞이하는 바람을 마시면서 노래합니다. 다 다른 넋으로 다 다른 기쁨을 노래하는 가락은 바람에 실려 마을 곳곳으로 퍼집니다. 아이들 목소리가 없는 이 시골마을에 우리 아이들이 새로운 노랫가락을 퍼뜨립니다.



.. 꽃이 되지 않는 풀 / 개가 되지 않는 강아지 // 한 뼘 하늘가에 / 풀 강아지 ..  (강아지풀-박용래 님께)



  아이들은 맨몸으로 나들이를 누립니다. 나는 이것저것 챙기고 꾸려서 나들이를 누립니다. 아이들은 근심도 걱정도 없이 웃고 노래하면서 나들이를 누립니다. 나는 온갖 짐을 잔뜩 짊어지면서 빙그레 웃고 노래하면서 나들이를 누립니다.


  내 어버이도 오늘 나처럼 온갖 짐을 잔뜩 짊어지면서 나(어린 나)를 데리고 나들이를 다니셨겠지요. 내 어버이도 오늘 나처럼 먼먼 지난날 기쁨으로 가득 차오르는 노래와 웃음을 퍼뜨리면서 골골샅샅 함께 누비면서 삶을 지으셨겠지요.


  다가오는 먼 앞날에는 우리 아이들이 새로운 아이를 낳아서 새롭게 나들이를 누리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잇는 새 노래가 포근히 흐르면서, 이 노래는 언제나 새삼스러운 글이 되고 책이 되고 시가 되고 문학이 되고 이야기가 되면서 이 땅에 곱게 깃들리라 생각합니다. 4348.2.1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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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잠 애지시선 15
김열 지음 / 애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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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7



시와 모레

― 여수의 잠

 김열 글

 애지 펴냄, 2007.10.31.



  사라지거나 잊힌 말이 있습니다. 나라와 겨레마다 사라지거나 잊힌 말이 꽤 있으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이 서서 사회를 바꾸면서 힘으로 윽박지르려 할 적에는 평화가 사라지고 전쟁이 불거지면서 딱딱한 틀(제도권)이 울타리처럼 솟거든요. 서로 아끼는 삶이 아니라 서로 짓밟아서 빼앗으려는 전쟁이나 경쟁이 불거지면, 따사롭거나 너그러운 말은 어느새 주눅이 들어 사라지거나 잊힙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꽤 많은 말이 사라지거나 잊힙니다. 이를테면, ‘한가람 아파트’ 같은 데에서는 쓰지만, 막상 냇물을 가리킬 적에는 안 쓰는 ‘가람’ 같은 낱말이 잊힙니다. 한자말 ‘내일(來日)’은 있되, 한국말 ‘하제’는 사라집니다. 한국말에서 ‘어제’와 ‘오늘’은 있지만, 이튿날을 가리키는 낱말은 그만 사라졌어요. 그래도 ‘그제’처럼 ‘모레’라는 낱말은 있습니다. 이와 함께 ‘글피’라는 낱말이 있어요. 다만, 모레와 글피라는 낱말이 있어도 이 낱말을 알맞고 즐겁게 쓰는 사람은 차츰 줄어든다고 느낍니다.



.. 구두약 둥근 뚜껑 안에서 / 말달리도록 맨 처음 고안한 사람의 마음과 / 손을 넣어 구두를 빛나게 닦아주는 푸른 풀밭 같은 마음을 생각한다 ..  (말)



  ‘오늘’이라는 낱말은 “바로 이곳 이때”를 가리킵니다. ‘어제’라는 낱말은 “지난날”을 가리킵니다. “앞날”을 가리킬 낱말은 무엇일까요? 이제는 ‘모레’라는 낱말이 앞날을 가리켜요.


  어제에서 오늘로 흐르고, 오늘에서 모레로 흐릅니다. 오늘 이곳에서 어우러지는 우리는 씩씩하게 모레로 나아갑니다. 오늘 하루 즐겁게 살기에 모레가 그립고, 어제 하루 기쁘게 누렸기에 오늘이 아름답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사라지거나 잊힌 말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거나 잊히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사라져서 아쉽구나 싶은 말이 있지만, 사라지지 않아서 즐겁게 쓰는 말이 있어요. 우리 곁에 남은 말을 돌아보면서 이 말을 새롭게 엮어서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말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속내는 사라지지 않는 셈입니다. 어떤 말이 다른 말로 자리를 옮겨 우리 곁에 있는 셈입니다. 말에 깃든 넋은 늘 그대로 있으면서 언제나 새롭게 거듭나는 셈입니다.



.. 여수가 아니어도 좋았다 탁 트인 바닷가라면 좋았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한 유적처럼 떠 있는 섬들과 먼 바다로 떠나는 외양선 불빛이 닿는 높은 언덕이 있는 곳이라면 더 좋았다 여수행 열차표를 다짐이즛 꼭 쥐었던 건 오랜 병을 알고 있는 항구를 떠올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여수의 잠)



  어느 때나 똑같이 쓰는 말은 없습니다. 모습은 같아도, 쓸 때마다 느낌이 다른 말입니다. 날마다 밥을 똑같이 먹는다지만, 날마다 다르면서 언제나 새로운 밥입니다. 오늘 먹는 밥과 어제 먹는 밥은 같지 않아요. 오늘 먹는 밥과 모레에 먹을 밥도 같지 않아요. 언제나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새로운 밥입니다. 늘 새롭게 맞이하는 재미나고 기쁜 밥입니다.


  같은 노래를 날마다 불러도 언제나 다르면서 새로운 느낌이에요. 가만히 보면, ‘같은 노래’를 ‘똑같이 부를’ 수 없습니다. 부를 때마다 조금씩 다르고, 부르는 자리마다 조금씩 새롭습니다. 부르면 부를수록 새롭게 거듭나고, 가슴 깊이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피어납니다.



.. 옆 의자엔 여행용 가방이 불룩하게 앉아 있다 // 여행과 베이지색 코트의 소매는 낡아 보이지 않는다 ..  (역)



  김열 님이 빚은 시집 《여수의 잠》(애지,2007)을 읽습니다. 시를 쓴 김열 님은 한자말을 빌어 여러 가지 뜻과 느낌을 나타내려 합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생각합니다. 한국사람은 한자말을 빌거나 영어를 빌어서 ‘새로운 생각’을 나타내려고 여러모로 애쓰는데, 막상 한국말을 살려서 ‘새로운 생각’을 나타내려고는 못 하기 일쑤입니다. 늘 쓰는 한국말로는 재미난 결을 살리지 못하기 일쑤이고, 언제나 주고받는 한국말로는 사랑스러운 무늬를 살찌우지 못하기 일쑤예요.


  풀빛이라 하더라도 똑같은 풀빛이 없습니다. 도시사람이 흔히 먹는 상추만 하더라도 똑같은 상춧빛은 없습니다. 깻잎이라서 모든 깻잎이 똑같은 빛깔이지 않은데, 상춧잎빛과 깻잎빛도 다르고, 배춧잎빛이나 양배춧잎빛도 다 달라요.



.. 버드나무 잎사귀 화르르 늘어지던 / 겨울 / 부여읍 / 동남리 / 연꽃이 맨 먼저 피었다던 / 연꽃잎 졌다던 ..  (궁남지)



  흔하거나 너르다고 하는 곳에서 흐르는 숨결을 읽는다면, 삶을 늘 새롭게 지핍니다. 수수하거나 투박하다고 하는 것에 감도는 넋을 읽는다면, 삶을 언제나 새삼스레 짓습니다.


  삶을 이루는 수수께끼는 늘 내가 스스로 내어 내가 스스로 풉니다. 삶을 일구는 실마리는 늘 내가 처음에 맺고 내가 나중에 풉니다.


  내가 나를 보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남이 나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내가 남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내가 읽을 시는 내가 쓸밖에 없습니다. 네가 읽을 시는 네가 쓸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인이요, 문학가이며, 법률가인데다가, 교사요, 학자이고, 살림꾼이고,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한편, 하느님이고, 사람입니다.



.. 풀섶 제비꽃과 다섯 번 눈 맞췄다 / 여자는 뒤척이다 또렷한 / 턱선까지 이불자락을 끌어덮는다 / 이제 그만 이사를 가야 한다 / 바람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  (열아홉 번째 불면)



  나한테 찾아올 모레는 내가 짓습니다. 내가 밟고 지나간 어제는 바로 내가 지었습니다. 오늘 쐬는 바람은 내가 스스로 맞아들입니다. 숨을 한 차례 들이마시고, 숨을 두 차례 들이켭니다. 모두 내 뜻에 따라 내 몸이 움직이면서 마시는 숨입니다. 내 뜻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내 뜻이 있기에 나는 모든 것을 합니다.


  사랑도 미움도 내 뜻입니다. 전쟁도 평화도 내 뜻입니다. 꿈도 굴레도 내 뜻입니다. 무엇을 하든 내 뜻이니, 나는 내 몸짓을 가만히 살피면서 내 삶을 찬찬히 지을 수 있으면 됩니다. 여수에 가도 즐겁고, 고흥에 가도 즐거우며, 해남이나 강진에 가도 즐겁습니다. 통영에 가든 남해에 가든 늘 즐겁습니다. 어디로 가든, 내 몸은 바로 내 뜻에 따라 가니까, 내가 스스로 즐겁습니다.


  집을 또 옮기든 다시 옮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즐겁게 옮기면 돼요. 한 곳에 내처 머무르든 말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즐겁게 살면 돼요. 시 한 줄에는 내 숨결이 고이 깃듭니다. 4348.2.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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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13
강형철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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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2



푸른 별에서 파란 별로 찾아온

― 환생

 강형철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3.12.6.



  내가 혼자 나들이를 다닐 적에,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으레 외국사람인 줄 여기면서 영어로 무언가 묻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다닐 적에조차, 나를 처음 마주하는 사람은 곧잘 외국사람으로 여기며 영어로 말을 겁니다. 이러기를 스무 해 남짓 지냈어요. 영어로 나더러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묻는 말에 이제껏 한 차례도 대꾸를 한 적이 없지만, 엊저녁에도 이런 소리를 듣고는 앞으로는 대꾸를 해야겠다고 느낍니다.


  ‘나는 푸른 별에서 왔습니다’ 하고 영어로 말하려 합니다. 내 마음속에서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내 넋은 푸른 별에서 지구별로 왔다고 합니다. 푸른 별은 어디일까요? 나는 아직 잘 모릅니다. 아마, 예전 삶을 잊거나 잃었을 수 있어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내 예전 삶 이야기가 조용히 잠든 채 내가 깨어나는 날을 기다릴 수 있어요.



.. 한 방울의 빗물에도 / 온몸의 주름을 펴며 안아 주는 호수 ..  (눈인사)



  푸른 별에서 살던 내 넋은 왜 지구별로 왔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수많은 별 가운데 왜 지구별을 골라서 몸을 빌어 이곳에서 지낼까 하고 꿈을 꿉니다. 문득 싹이 하나 틉니다. 자그마한 씨앗에서 싹이 하나 돋습니다. 작은 싹은 무럭무럭 오르면서 줄기가 되고, 새로운 잎이 돋으면서, 새로운 꽃이 핍니다. 새로운 열매가 맺고, 새로운 열매에는 새로운 씨앗이 깃들어요. 새로운 씨앗은 새로운 곳으로 새로운 바람을 타고 날아갑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다시금 새롭게 싹이 터서 무럭무럭 자라요.


  이윽고 수많은 새로운 씨앗은 새로운 나무가 됩니다. 새로운 숲이 하나 태어납니다. 이때 문득 잠에서 깹니다. 그래,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내가 지구별로 온 까닭은 지구별에 푸르게 우거진 숲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음 태어난 푸른 별에서는 언제나 푸른 별빛이 감돌았고, 이 별빛은 지구별에 닿아서 푸른 숲이 우거지도록 까만 씨앗을 낳았어요.


  그러니까, 지구별은 숲이 우거질 수 있는 별입니다. 지구별은 나무가 가득하여 숲내음이 넘실거릴 수 있는 별입니다. 지구별은 풀과 나무과 어깨동무하면서 숲으로 노래할 수 있는 별입니다.



.. 도토리 두 발로 껴안고 / 앞니 두 개로 / 뇸뇸거리는 다람쥐 ..  (은적운 13)



  지구를 지구 바깥에서 보면 어떤 빛깔일까요? 숲빛이 가득해서 푸른 빛깔일까요? 아니면 바닷빛을 뿜으면서 파란 빛깔일까? 지구별이 파랗게 보인다면, 바닷빛이 파랑이기 때문일 텐데, 바닷물에는 딱히 아무런 빛깔이 없어요. 바닷물은 맑습니다. 바닷물이나 냇물은 모두 맑아서 모든 빛깔을 받아들여요. 숲에서는 맑으면서 푸른 물입니다. 새파란 하늘만 있는 드넓은 바다에서는 파란 물입니다. 지구는 아무래도 바다가 한결 넓으니, 지구 바깥에서는 ‘파란 별’로 보일 만해요. 하늘빛을 닮은 바닷물이요, 하늘과 바다가 파랑으로 한몸이 되어 빛나는 지구라고 할까요. 파란 지구별에 푸른 숲이 얼크러져서 곱게 빛난다고 할까요.



.. 어머니 일흔아홉이니 / 쌀 씻어 밥 안치는 일은 칠십 년은 됐으리라 / 짚풀은 부지깽이로 아궁이에 넣어 지피고 / 한참 후엔 전기밥통에 쌀 씻어 안쳤으리라 ..  (환생)



  강형철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환생》(실천문학사,2013)을 읽습니다. 강형철 님이 손수 짓는 삶을 싯말 하나로 읊고, 강형철 님을 낳고 기른 어머니가 늙어서 ‘늙은 아이’가 된 강형철 님이 어머니를 보살피고 헤아리는 삶을 누리는 하루를 싯말 둘로 읊습니다. 시집 《환생》은 다시 태어나서 새로우면서 아름답게 누리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 그 이름도 곱고 고운 장미아파트 / 동 이름도 순 조선말로 가동과 나동 / 사이 / 그러니까 한 이십여 미터쯤 되는 거리에서 / ‘베란다 담뱃불’을 돋운 것에 / 약간 미안해하며 고개 돌린 사람에게 ..  (차나 한 잔)



  우리 몸은 푸릅니다. 우리 몸은 숲에서 난 것을 받아들여서 기운을 얻거든요. 우리 마음은 파랗습니다. 우리 마음은 하늘을 흐르는 바람을 맞아들여서 기운을 얻어요. 밥을 먹으면서 몸이 푸르고, 바람을 마시면서 마음이 파랗습니다. 우리 몸에는 푸른 기운과 파란 기운이 함께 얽히고, 두 가지 기운은 빨간 빛깔로 흐르는 물(피)이 사이에 깃들면서 고운 숨결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 머리는 생각을 지어서 마음에 심는데, 우리 머리가 지은 생각은 노란 해님처럼 빛나면서 까만 씨앗이 되어요. 우리 마음에는 머리가 지은 노란 해님처럼 빛나는 까만 씨앗이 깃들고, 이 씨앗은 하얗게 깨어납니다. 몸과 마음에서 온갖 빛깔 무지개가 태어난다고 할까요.



.. 바람 지나간 자리 / 가을이면 익힐 / 포도송이 닮은 열매 / 눈짓처럼 감춰 두고 ..  (노래-담쟁이덩굴)



  시집 한 권을 읽으면서 내 몸을 생각합니다. 시집 한 권을 찬찬히 읽고 덮으면서 내 마음을 헤아립니다. 내가 태어난 별을 그리고, 내가 삶을 짓는 별을 돌아봅니다. 푸른 별에서 파란 별로 찾아온 내 넋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곱다랗게 노래하려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내 이웃이 쓴 시를 읽으면서 하하 웃습니다. 나 스스로 시를 새롭게 써서 우리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서 나긋나긋 노래합니다. 내 동무가 쓴 시를 읽으면서 깔깔 웃습니다. 나 스스로 시를 다시금 새롭게 써서 우리 아이들과 같이 읽으면서 기쁘게 노래합니다. 4348.2.8.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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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시인선 15
장석남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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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6



시와 그물

―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장석남 글

 문학동네 펴냄, 2012.2.25.



  시골집에서 시골사람으로 지내면서 느끼지 못한 대목을 도시로 나들이를 와서 느낍니다. 시골집에서는 아이들더러 ‘얘들아, 마루에서 뛰지 말고 마당에서 뛰렴’ 하고 타이를 수 있으나, 도시에서는 아이들더러 바깥에 나가서 뛰놀라고 이르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뛰놀 골목이나 빈터가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아이도 이웃 아이도 골목이나 빈터에서 뛰놀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야, 도시에 있는 외할머니나 이모나 큰아버지나 여러 이웃한테 찾아가니까, 골목이나 빈터에서 놀 겨를이 없기도 할 테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 몰려서 사는데, 어느 골목이나 빈터에도 아이들 그림자가 없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골목에서 몰아냈습니다. 정치권력이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기자나 작가 같은 사람뿐 아니라, 이 땅 모든 어른이 똘똘 뭉쳐서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에만 몰아넣으면서, 먼 옛날부터 마을과 빈터와 숲과 냇가에서 놀던 아이들한테서 놀이를 죄다 빼앗았습니다.



.. 갈대나 물결 / 새나 바람 / 평수 많은 밤 // 어디서 오는지 ..  (호수)



  도시를 거닐다 보면, 골목이나 빈터는 어김없이 주차장입니다. 좀 놀 만하다 싶은 자리는 으레 자가용이 차지합니다. 아이들은 도시에서 인라인조차 타기 벅찹니다. 자동차 때문에 아예 엄두를 못 냅니다. 자전거도 마음 놓고 타지 못합니다. 공원이라도 있으면 겨우 이런저런 끄트머리에서 바퀴를 조금 굴리다가 그칩니다.


  아이들이 몸을 쓸 틈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숨을 쉴 겨를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넋을 살찌울 자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꿈을 꿀 바탕이 없습니다.


  도시에서 며칠 지내면서 아이들한테 해야 하는 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길에서 달리지 마라’와 ‘집에서 뛰지 마라’와 ‘전철에서 노래 부르지 말거나 목소리를 낮추어라’와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아라’ 같은 말입니다. 이런 말을 쉬잖고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잔소리뿐입니다.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아이도 고달프고, 잔소리를 해야 하는 어버이도 고단합니다. 우리 아이들이야 며칠 머물다가 시골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아이들은 하루 내내 잔소리에 시달리다가 아예 ‘뛰놀기’와 ‘노래하기’를 몽땅 잊거나 잃을밖에 없습니다.



.. 산 넘어온 비가 / 산 넘어간다 / 비단옷으로 와서 / 무명옷으로 간다 ..  (장마 끝물)



  장석남 님이 빚은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2012)를 읽습니다. 인천을 거쳐 일산으로 전철을 타고 두 시간 남짓 달리는 길에,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타이르다가, 어르다가, 미리 썰어서 통에 담은 감을 내밀다가, 한 쪽 두 쪽 읽습니다.


  장석남 님은 고요더러 내빼지 말라고 말하지만, 도시에는 고요가 없습니다.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도시에는 시끄러움과 부산함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도시에 개구쟁이 놀이나 말괄량이 노래가 있지는 않아요. 기쁜 노래라든지 즐거운 춤사위가 있지도 않습니다.


  연예인이나 가수나 배우나 이런저런 전문가와 작가와 기자는 죄다 서울에 모여서 일하거나 산다지만, 막상 서울에서 노래나 춤이나 이야기나 웃음을 마주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이런 것을 마주하자면 ‘돈’을 들여야 합니다.



.. 옥수수밭가에 와 살고부터 / 나는 지금 옥수수밭가에 살고 있구나 생각했다 ..  (옥수수밭의 살림)



  먼 옛날부터 놀이는 몸에서 몸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았습니다. 먼 옛날부터 춤과 노래는 삶에서 삶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았습니다. 먼 옛날부터 전문 노래꾼이나 춤꾼이나 이야기꾼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노래꾼이면서 춤꾼이고 이야기꾼입니다. 모든 사람이 살림꾼이면서 사랑꾼이자 숲지기요 들지기요 집지기입니다. 예부터 모든 사람이 집과 옷과 밥을 손수 지어서 삶을 가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땅 거의 모든 사람은 집을 지을 줄 모르고, 옷이나 밥을 짓는 길을 모릅니다. 가르칠 사람도 배울 사람도 없습니다. ‘돈’을 벌려고 시멘트를 이기는 몸짓이 아닌, 수백 해를 이을 보금자리로 집을 짓는 몸짓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대단한 요리나 맛집이 아니라, 삶을 북돋우는 밥을 날마다 웃으면서 기쁘게 차리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밥을 지으면서 춤추거나 노래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거든요. 쌀을 씻거나 밥을 안치면서 춤추거나 노래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빨래를 하거나 비질을 하면서 춤추거나 노래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아기한테 젖을 물리면서 노래를 즐기거나, 아이를 가만가만 재우면서 노래를 누리는 어버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 내 신발 속 파도 소리 / 내 단춧구멍 속 파도 소리 / 모든 풍문도 음악도 다 이긴 / 나의 파도 소리 ..  (파도 소리)



  텔레비전 유행노래가 아니라, 내 삶에서 저절로 샘솟는 춤과 노래를 아이한테 물려주는 어버이는, 참다운 어른은 이 땅 어느 곳에서 살림을 가꾸는지 궁금합니다. 돈이 아니면 시도 시집도 없는 오늘날이고, 돈이 될 만하지 않으면 시집을 낼 수 없는 오늘날이며, 돈을 벌지 않으면 시를 쓸 살림이 안 되는 오늘날입니다.


  예부터 모든 사람이 시골지기요 흙지기이고 삶지기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글을 알거나 한문을 익혀야 쓰는 시가 아니라, 삶을 짓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면서 스스로 노래를 불렀’고, 일하며 부르는 노래(일노래, 노동요, 민요)가 바로 시입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나 둘레 어른이 일하며 부르는 노래를 가만히 들으면서 놀이노래를 짓고, 놀이노래를 부르며 놀던 아이들이 자라서 일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씩씩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 흐름과 이음고리는 어느새 끊어졌습니다. 새마을운동이나 일제강점기나 군사독재나 영어에 미친 정책이나 입시지옥 같은 핑곗거리(?)도 많을 테지만, 우리 스스로 ‘돈’만 바라보는 삶이 되면서, 모든 춤과 노래와 이야기를 텔레비전과 몇몇 전문가한테 떠넘기고 말았습니다.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는 무엇을 길어올리려는 그물일까요?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는 어떤 이야기를 손수 낚아서 이 땅 이웃한테 들려주려는 선물일까요?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는 글쓴이 장석남 님이 이녁 삶을 스스로 노래하는 이야기라고 할 만할까요? 그러면, 장석남 님한테는 삶이 무엇이고, 어른 몸뚱이인 오늘날 어느 만큼 홀가분하게 이 땅에서 뛰노는 하루일는지요? 4348.2.8.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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