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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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4



어머니가 물려주는 노래

― 해질녘에 아픈 사람

 신현림 글

 민음사 펴냄, 2004.7.10.



  말은 어머니가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랄 적에 아기는 어머니가 여느 때에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듣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느긋하게 자라고 나서 이 땅에 태어난 뒤에는 어머니 품에서 젖을 먹으면서 새롭게 자라는데, 이동안 어머니가 아기한테 들려주는 말을 새삼스레 듣습니다.


  아기한테는 어머니 뱃속에서 지낼 무렵과 어머니 젖을 빨며 자라는 동안에 배우는 말이 새롭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 목소리랑 손길을 나란히 누리면서 말을 노래처럼 듣다가, 이 땅에 태어난 뒤에는 어머니 눈길이랑 몸짓을 나란히 지켜보면서 말을 춤사위처럼 익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았고, 우리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았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 온 사랑으로 말을 물려줍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쓰는 말은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면서 물려준 말입니다.



.. 가난에 갇힌 것보다 / 힘없는 나라에 사는 일보다 / 체념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서러워 / 슬픈 눈을 땅에 떨어뜨리며 ..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 무섭게 흐르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 / 달리는 바다는 달리지 않는 바다 / 시간이란 아예 없는 겁니다 최대의 재산인 꿈이 있을 뿐이죠 ..  (우울한 로맨스-휘말려 가다)



  말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찬찬히 물려줍니다. 어머니는 따사로운 사랑노래를 물려주고, 아버지는 슬기로운 삶노래를 물려줍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따사롭게 흐르는 사랑으로 노래와 같은 말을 물려주고, 아버지는 언제나 한결같이 기쁜 삶으로 웃음짓는 말을 물려줍니다.


  아기를 낳으려 한다면,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로서 이녁 삶을 새롭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기를 낳으려 하는 어버이는 돈만 많이 벌어서는 안 됩니다. 아기는 돈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사랑을 바랍니다. 아기가 바라는 사랑을 물려줄 수 있게끔, 돈은 좀 적게 벌더라도 사랑을 한결같이 물려줄 수 있을 만한 너른 가슴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아기 눈망울을 바라보셔요. 아기 눈망울은 오직 어버이 사랑을 바랍니다. 아기가 피자나 케익을 바랄까요? 아기가 떡이나 밥을 바랄까요? 아기는 오직 어머니 젖이랑 물을 조금씩 받아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젖이랑 물이랑 바람, 이렇게 세 가지만 있으면 아기 몸은 씩씩하게 큽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어야지요. 바로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노래로 불러서 물려주는 사랑스러운 말이 있어야 합니다.



.. 오래된 꿈과 비밀을 간직한 부드러운 사람이고 싶어 / 부드러움은 / 망가진 것을 소생시킬 마지막 에너지라 믿어 ..  (해질녘에 아픈 사람-세월아,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를 더 아프게 해라)



  갓난쟁이한테 그림책이나 동화를 읽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갓난쟁이는 이야기책을 받아먹지 않습니다. 갓난쟁이는 책을 읽어 주는 ‘목소리’만 받아먹습니다. 그러니까, 아기를 옆에 누이고 영어 그림책이나 영어 동화책을 읽어 준다면, 아기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어버이는 아기가 일찌감치 영어를 잘 배우기를 바랄는지 모르나, 아기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기는 오직 한 가지 목소리만 듣고 싶습니다. 저를 이 땅으로 부른 어버이가 얼마나 깊고 너른 사랑으로 저를 바라보는가 하는 대목을 알고 싶습니다.


  일하면서 부르는 모든 노래는 삶노래이면서 자장노래이고, 일노래이면서 놀이노래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여느 때에 흔히 부르는 일노래를 귀여겨들은 뒤 저희끼리 놀면서 이 일노래를 놀이노래로 삼아서 부릅니다. 나중에는 일노래를 조금씩 바꾸어요. 노랫가락과 노랫말을 아이 나름대로 바꾸어 새로운 놀이노래를 짓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 곁이나 둘레에서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모든 말을 다 받아먹으니까요. 아이들이 기쁜 눈망울로 아름답게 받아먹을 만한 가장 사랑스럽고 착하면서 참다운 말을 하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어른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운 숨결이 되어야 하고, 어버이라면 누구나 가장 착하고 참다우면서 고운 넋이어야 합니다.



.. 나는 나를 깨워 이렇게 말하겠죠 / “내가 나를 가질 수 없는데 /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서 뭐 하냐”고요 ..  (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 사랑 안에 들어가 살고 싶어 / 사랑으로 이승을 건너고 싶어 .. (사랑)



  신현림 님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2004)을 읽습니다. 사랑을 바라고, 사랑을 찾으며, 사랑을 노래하고 싶은 신현림 님이 젊은 날에 쓴 시를 그러모은 책입니다(그렇다고 신현림 님이 이제는 ‘안 젊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해질녘에 아픈 사람은, 해뜰녘에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해질녘에만 아프고, 해뜰녘에는 안 아플까요. 해질녘뿐 아니라 해뜰녘에도 아플까요.



.. 전쟁이나 대구 참사처럼 사람이 만든 재앙은 / 어미가 막을 순 없지만 / 네가 그린 코끼리를 하늘로 띄울 수 있고 / 어미의 눈물로 한 사발 밥을 만들 수 있고 / 어미의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 희망의 폭동을 일으킬 수 있지 / 고향 저수지를 보면 나는 멋진 쏘가리가 되고 / 너를 보면 섬이 된단다 / 너라는 근사한 바다를 헤엄치는 섬 ..  (싱글 맘-엄마는 너를 업고 자전거 탄단다)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읽으면 ‘싱글 맘’ 이야기가 흐릅니다. 신현림 님은 가시내를 낳아 씩씩하게 이 아이와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이가 받아먹을 삶노래를 언제나 싱그러이 부르고, 아이와 함께 어른도 함께 누릴 사랑노래를 늘 해맑게 부릅니다.


  때로는 아픔이 사무쳐서 슬픈 노래를 부르지만, 아이 얼굴을 바라보면서 새삼스레 빙그레 웃음짓고는 씩씩하게 기쁜 노래로 고쳐서 부릅니다. 이 지구별에서 살아갈 기쁜 숨결로 거듭나려고 스스로 애씁니다. 이 땅에서 꿈꾸며 노래하는 예쁜 사람이 되려고 스스로 온힘을 기울입니다.



.. 만화는 단추만한 구멍을 뚫어 여유로운 바람을 불어넣는군.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란 말에 사랑 받는 기분에 휩싸여 오전 열한 시에 쏟아지는 햇살같이 따뜻하고, 창밖 행인들이 아름다워 뵈는군. 시냇물엔 하얀 벚꽃잎이 쌓여 흐르고 봄바람에 보들보들 길이 미끄러지는군 ..  (순정 만화에 중독되겠네)


.. 벨벳처럼 부드러운 어둠 속에 내가 있고 / 여자의 몸보다 사람의 몸이길 바라는 내가 있소 ..  (우울한 육체의 시-생각이 많은 몸)



  어머니랑 아버지가 들려주는 노래를 물려받은 아이는 새로운 어른으로 자랍니다. 새로운 어른이 된 아이들은 이 땅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다시금 새로운 노래를 부르면서 새로운 아이를 낳습니다.


  어제만 바라본다면 슬픔만 가득할 수 있습니다. 오늘만 바라본다면 까마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에 이어 찬찬히 찾아올 모레를 바라본다면, 이 앞날을 눈물이나 슬픔으로만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발 새롭게 내딛을 모레에는 기쁜 웃음이 넘치도록 맑은 노래를 불러야지요.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활짝 웃음꽃을 피우는 노래를 불러야지요.


  사람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사랑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삶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말 한 마디는 사람노래이면서 사랑노래이고 삶노래입니다.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쇠가시울타리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아름답게 흐르는 무지개가 되도록 노래를 부릅니다.



.. 나무마저 없다면 이곳은 딱딱한 피자 한 덩이요 / 삭막하오 요즘 사람들은 폭탄 같소 성이 나 있소 ..  (한잔의 서울을 들이마시오)


..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스스로 노래가 됩니다. 꽃씨를 심는 사람은 스스로 꽃이 됩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파란 숨결로 웃는 사람은 스스로 바람이 됩니다.


  무엇이 되든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무엇이 되든 저마다 이루는 꿈입니다. 이리하여,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삶을 짓는 어버이나 어른이라면, 가슴에 고운 꿈씨를 심기 마련입니다. 너와 내가 한넋이 되어 따사로이 손을 맞잡는 삶을 이루고 싶은 꿈씨를 심습니다. 우리가 함께 큰 사랑이 되어 넉넉하게 웃음짓는 하루를 짓고 싶은 노랫말을 씨앗으로 심습니다.


  어머니가 물려준 사랑스러운 말을 물려받은 나는 어느새 새로운 어머니가 됩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아름다운 말을 이어받은 나는 어느덧 새로운 아버지가 됩니다. 너와 나는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활짝 웃음짓습니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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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는 부끄럼쟁이
오장환 지음, 도종환 엮음, 곽명주 그림 / 실천문학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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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57



포근한 마음을 꿈꾸는 노랫가락

― 부엉이는 부끄럼쟁이

 오장환 글

 도종환 엮음

 곽명주 그림

 실천문학사 펴냄, 2014.9.15.



  어버이가 밥을 지으면서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은 밥 익는 냄새를 큼큼 맡으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릅니다. 어버이가 빨래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은 마당에서 신나게 뛰놀면서 조잘조잘 노래를 부릅니다. 어버이가 밥을 지으면서 투덜거리거나 골을 부리면, 아이들은 밥을 먹는 자리에서 주눅이 들거나 쭈뼛거립니다. 어버이가 빨래나 청소를 하면서 잔소리만 잔뜩 늘어놓으면, 아이들은 어버이가 내쏘는 잔소리를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 빨래 합니다. / 빨래 합니다. // 엄마는 내 옷, / 나는 풀각시 / 시집가는 때때옷 ..  (빨래)



  오장환 님 동시집 《부엉이는 부끄럼쟁이》(실천문학사,2014)를 가만히 읽습니다. 동시집인 만큼 어린이가 읽도록 쓴 시입니다. 누구보다 어린이가 즐겁게 읽으면서 마음밭에 생각 씨앗을 곱게 심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쓴 시입니다.


  이 동시집에 깃든 동시는 일제강점기에 썼겠지요. 이웃나라 군홧발에 짓밟힌 아이들한테 새로운 꿈을 심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썼겠지요.


  아픈 아이들한테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총칼을 앞세워 쳐들어온 사람들하고 총칼로 맞서서 싸우자는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요? 아니면, 총칼을 모두 내려놓고 사이좋게 이웃이나 동무가 될 수 있는 길을 밝혀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요?



.. 봉사 씨는 / 톡, 톡, 튀어 / 땅으로 떨어졌었어요. / 올여름에 / 빨간 꽃이 다시 피려고 / 한겨울을 / 땅속에서 지냈답니다 ..  (봉사꽃)



  사랑은 언제나 사랑을 낳습니다. 꿈은 언제나 꿈을 낳습니다. 콩씨를 심으니 콩이 자라고, 팥씨를 심으니 팥이 자랍니다. 민들레씨가 퍼지면 민들레가 새로 돋고, 봉숭아씨가 퍼지면 봉숭아가 새로 돋지요. 그러니까, 미움이라는 씨앗을 심으면 미움이 자랍니다. 따돌림이나 괴롭힘이라는 씨앗을 심으면 따돌림이나 괴로움이 자라요. 전쟁이라는 씨앗을 심으면 마땅히 전쟁이 불거지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아이들한테 입시지옥이라는 씨앗을 심으면, 아이들 마음에는 입시지옥에 얽매이는 이야기가 자랍니다.



.. 개똥불은 / 초롱에 불을 밝히고 / 메뚜기 새끼, 불빛 찾아 나온다. / 올챙이는 헤엄 배우고 / 어린 개구리가 / 이 논, 저 논, 건너뛰어도 / 개굴개굴, 점잖은 개구리는 / 울기만 한다 ..  (여름밤)



  스스로 겪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추위나 더위도 스스로 겪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기쁨이나 슬픔도 스스로 겪을 때에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웃음이나 눈물도 스스로 겪기에 비로소 알 수 있어요.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눈부신 별빛은 우리가 스스로 바라볼 때에 알 수 있습니다. 깜깜한 밤이 없는 하늘도 스스로 바라볼 때에 알 수 있습니다. 조용하게 부는 산들바람도 스스로 쐬어야 알 수 있고, 거세게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도 스스로 맞아야 알 수 있습니다. 번갯불을 보지 않고서 번갯불을 알 수 없고, 개똥불을 만나지 않고서 개똥불을 알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이 스스로 겪거나 만나거나 마주할 만한 삶을 헤아려서 동시라는 이야기를 엮습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스스로 가꾸거나 일굴 만한 아름다운 삶을 헤아려서 동시라는 노래를 엮습니다. 전쟁이 아닌 평화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동시를 쓰고, 미움이 아닌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동시를 씁니다.



.. 돌이는 숨바꼭질 하느라고 화초밭에 엎드렸다가 벌한테 쏘여도 아무 소리도 안 했습니다. 그렇지만 순이가 찾아내니까 으애― 하고 울었습니다 ..  (숨바꼭질)



  일제강점기에 동시를 쓴 오장환 님은 ‘으애―’라든지 ‘조―그마하게’처럼 글을 씁니다. 이런 글투는 일본 글투입니다. 한국사람은 이렇게 글을 쓰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라면 ‘으애―’가 아닌 ‘으앵’이나 ‘으애앵’이라고 말을 하면서 글을 쓰고, ‘조―그마하게’가 아닌 ‘조그마하게’나 ‘조오그마하게’라고 말을 하면서 글을 씁니다.


  아무래도 예전에는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으로서 씩씩하게 서기 어려웠으니 이 같은 말투가 동시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구나 싶습니다. 《부엉이는 부끄럼쟁이》는 자료집으로 내는 책이 아닌, 오늘날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새로 엮어서 내놓은 책인 만큼, 이 같은 대목은 손질하거나 꼬리말을 붙여서 알려주어야지 싶습니다.



.. 누나야, 편지를 쓴다. / 뜨락에 살구나무 올라갔더니 / 웃수머리 둥구나무, / 조―그만하게 보였다. / 누나가 타고 간 붉은 가마는 / 둥구나무 샅으로 돌아갔지 ..  (편지)



  포근한 마음을 꿈꾸는 노랫가락으로 동시를 씁니다. 따스한 마음을 바라는 노랫가락으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말도, 아이가 어버이한테 알려주는 말도, 언제나 포근하거나 따사롭게 흐릅니다.


  어버이는 사랑을 물려주려는 뜻으로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는 사랑을 물려받으려는 뜻으로 태어납니다. 어버이는 사랑을 베풀며 아이를 돌봅니다. 아이는 사랑을 고이 받으며 씩씩하게 자랍니다.


  쓸쓸하거나 슬프거나 아픈 아이들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손길은 바로 사랑입니다. 배고프거나 고단하거나 힘겨운 아이들 몸을 보살필 수 있는 손길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사랑스레 말 한 마디를 들려주고, 사랑스러운 몸짓으로 밥을 차립니다.


  말치레로 꾸미는 거짓스러운 사랑이 아닌, 가슴에서 깊이 우러나오는 사랑이 되어 함께 누리는 동시를 쓸 때에 즐겁습니다. 우리는 시인이 아니어도 시를 써서 아이와 함께 나누는 어버이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를 쓰듯이 말을 하는 어른입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노래하듯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4348.5.8.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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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고 말해 줘 문학동네 동시집 30
이상교 지음, 허구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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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56



우리는 누구나 사랑스러운 넋

― 예쁘다고 말해 줘

 이상교 글

 허구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4.7.28.



  나무는 푸르게 우거집니다. 그래서, 나무를 바라보면서 ‘이야, 푸르구나.’ 하고 말합니다. 작은 들꽃도 커다란 나무꽃도 곱게 피어납니다. 그래서, 꽃을 바라보면서 ‘이야, 곱구나.’ 하고 말합니다. 소나기를 이끌고 찾아오는 뭉게구름은 새하얗습니다. 그래서, 구름을 바라보면서 ‘이야, 하얗구나.’ 하고 말합니다. 새파랗게 빛나는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파랗습니다. 그래서, 너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야, 파랗구나.’ 하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어버이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늘 말합니다. ‘이야, 참으로 사랑스럽구나.’ 따사로운 손길로 늘 정갈하게 어루만지는 어버이가 반가운 아이들이 어버이를 바라보며 언제나 말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해요.’



.. 어딘지 모르지만 / 난 아파 // 내일 학교에 / 못 갈 것 같아 // (참, 내일은 토요일!) ..  (난 아파)



  모든 꽃은 곱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스럽습니다. 모든 나무는 푸릅니다. 모든 별은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내가 어느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곱네.’ 하고 말하기에 꽃이 고울 수도 있고, 내가 굳이 꽃더러 ‘너 곱구나.’ 하고 말하지 않아도 꽃은 늘 그곳에서 곱게 피고 집니다. 내가 누군가를 마주하면서 ‘참으로 사랑스럽네요.’ 하고 말하기에 그 사람이 사랑스럽게 웃을 수도 있고, 내가 굳이 어느 한 사람더러 ‘그대는 몹시 사랑스럽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스러운 숨결로 하루를 삽니다.



.. “네 동생 참 이쁘던데.” / 김밥집 아줌마가 말했다 // 그 사람들은 / 내가 진짜 / 이쁠 때를 못 봐서 / 그런다 ..  (내가 이쁠 때)



  이상교 님이 빚은 동시집 《예쁘다고 말해 줘》(문학동네,2014)를 읽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예쁘니 예쁘다고 말할 만하고, 아이들은 늘 예쁘기에 굳이 예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될 만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아이다운 숨결이기에 곱고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들이 하는 짓이나 목소리나 낯빛 때문에 곱거나 사랑스럽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 가슴에 깃든 넋을 바라보면서 곱거나 사랑스럽다고 말합니다.


  어른은 누구나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자랍니다. 그러니까, 어른들 가슴에도 곱고 사랑스러운 넋이 있습니다. 다만, 아기에서 아이를 지나 어른이 되는 사이에 ‘내 가슴속 곱고 사랑스러운 넋’을 잊는 사람이 많을 뿐입니다. 스스로 곱고 사랑스러운 넋인 줄 잊지 않는 어른은 늘 웃고 노래하면서 밝은 숨결입니다. 스스로 곱고 사랑스러운 넋인 줄 잊고 마는 어른은 자꾸 바보스러운 짓을 일삼으면서 웃음을 잊고 노래를 잃으며 밝은 숨결마저 팽개칩니다.



.. 쌀만 먹어 / 하얗고 / 쌀만 먹어 / 통통 살 오른 / 꼬물꼬물 쌀벌레 / 한 마리 ..  (쌀벌레)



  곰곰이 돌아본다면, ‘예쁘다’는 말은 아이보다 어른이 들어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예쁘다’ 같은 말을 듣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어른들은 ‘예쁘다’ 같은 말을 들은 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스스로 예쁜 줄 잊고, 스스로 고운 줄 잊으며, 스스로 사랑스러운 줄 잊은 어른이에요. 그러니까, 어른들은 자꾸자꾸 ‘예쁘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예쁘고 고우며 사랑스럽다는 말을 들으면서, 차근차근 ‘어린이 마음’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따사로운 넋을 되찾고, 사랑스러운 숨결을 되찾아서, 언제나 아름다운 길을 씩씩하게 걷는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어야 합니다.



.. 새가 / 똥을 / 뽀지직! // 풀씨 한 톨 든 / 똥을 / 뽀지직! ..  (새똥)



  새 한 마리가 하늘을 가릅니다. 아이들은 새처럼 하늘을 날면서 놀고 싶습니다. 어른들은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을까요? 어른들은 비행기를 타면 된다고 여길까요? 비행기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하늘을 가르면서 새와 동무가 되어 놀고 싶은 마음은 어느새 사라졌을까요? 어른이 된 탓에 ‘사람도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생각을 잊었을까요?



.. 새 한 마리 /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 내려와 앉는다 ..  (휘청)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새는 제 몸에 씨앗을 품습니다. 새끼 새를 낳을 씨앗도 몸에 품지만, 이곳저곳에 새로운 풀과 나무가 자라도록 이끌 풀씨와 나무씨도 품습니다.


  가만히 따지면, 사람도 예부터 풀씨와 나무씨를 옮기며 살았습니다. 옷에 풀씨를 붙이면서 돌아다니니, 사람이 걷는 길에 따라 풀이 옮겨서 자랄 수 있습니다. 나무 열매를 따서 먹고는 씨앗을 흙한테 돌려주면, 나무씨는 씩씩하게 새로운 곳에서 천천히 자랄 수 있습니다.


  사람은 풀씨나 나무씨를 옮기는 줄 알아채지 못해요. 새도 풀씨나 나무씨를 옮기는 줄 알아채지 않습니다. 그저 수수하게 씨앗을 옮깁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나무씨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서 줄기를 올리기까지 퍽 긴 해가 걸립니다. 사람이 열매를 먹고 씨앗을 흙한테 돌려주고 나서 제법 긴 해가 흘러야 비로소 나무 한 그루가 새로 오릅니다. 그러니, 그 나무가 ‘사람이 먹고 흘한테 돌려준 씨앗’에서 비롯한 줄 알기는 어렵습니다.



.. 봉오리 속에 / 흰 새 한 마리씩 / 감추고 있다가 // 호르륵호르륵― / 다 놓아주었다 ..  (목련)



  동시 한 줄에 고운 마음이 깃듭니다. 동시 두 줄에 사랑스러운 숨결이 서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동시를 읽는 어른은 ‘몸은 어른’이되 ‘마음은 아이’다운 넋으로 하루를 새롭게 열고 싶은 뜻이리라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들려줄 동시를 쓰는 어른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맑은 눈빛으로 거듭나면서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노래로 부르고 싶은 뜻이리라 느낍니다.


  봉오리에 새를 한 마리씩 품은 꽃나무처럼, 가슴에 사랑을 가득 품은 사람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모두 예쁘고 고우며 사랑스럽습니다. 이 예쁜 마음을 알뜰히 북돋웁니다. 이 고운 숨결을 살뜰히 가꿉니다. 이 사랑스러운 넋을 따사롭게 보듬으면서 오늘 아침도 새롭게 엽니다. 4348.5.3.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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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즐거운 산지니시인선 11
표성배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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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7



고요히 누리는 기쁜

― 은근히 즐거운

 표성배 글

 산지니 펴냄, 2015.4.20.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립니다. 비가 와도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할 곳이 있으니 자전거를 달립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갈 수 있지만,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기에, 빗줄기를 가로지르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아이들은 버스를 타든 자전거를 달리든 나들이를 가면 기뻐하니,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왜 굳이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려야 했을까요. 우체국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 비가 멎은 이튿날 가지 않고 비가 오는 날에 가야 할까요. 날짜에 맞추어서 보내야 하는 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방에 편지를 담고, 작은아이는 수레에 태우고, 큰아이는 비옷을 입고 장갑을 낀 손으로 샛자전거에 앉습니다. 우리는 셋이서 빗길을 자전거로 천천히 하느작하느작 달립니다.



.. 우체국 가자 / 좀 멀다 싶으면 자전거라도 타고 가자 / 우체국 가는 길 새로 생긴 우체통 있어도 / 그냥 우체국 가자 ..  (흑백사진)



  두 아이와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드뭅니다. 아마 한 해에 한두 차례쯤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어리니 빗길 자전거를 잘 안 타기도 하지만, 굳이 비오는 날까지 자전거를 달리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리면 비를 맞으면서 빗소리를 듣고 빗물내음을 먹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고 나도 혼자 살던 지난날에는 비가 오는 날에 퍽 자주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아니, 나는 혼자 살림을 꾸리며 살던 예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몰아치나 벼락이 떨어지나 씩씩하게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비를 잔뜩 맞은 나머지 멈추개가 망가진 날에도, 비를 여러 시간 맞고 자전거를 달리느라 손가락이 얼어붙은 날에도, 나 스스로 나한테 ‘너 참 씩씩하구나’ 하고 말하면서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나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전거를 익혔기에, 자전거를 탈 적에 날씨를 안 가리는구나 싶습니다. 신문배달은 한 해 내내 합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신문을 돌려야 합니다. 날이 푹푹 찌든 모질게 춥든 신문을 돌려야 합니다. 언젠가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서 가슴께까지 빗물이 찬 적이 있는데, 신문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꽁꽁 싸매고 머리에 짊어지면서 물길을 자전거를 헤치면서 신문을 돌렸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그러니까, 신문배달을 하는데 뒤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나를 들이받고는 뺑소니를 치느라 손목과 팔꿈치가 부러진 뒤에도, 아픈 손과 팔에 붕대를 감고 자전거를 달려서 신문을 돌렸습니다.



.. 학생과 선생 사이처럼 빚쟁이와 빚꾸러기 사이처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처럼 의사와 환자 사이처럼 사이에 사랑 하나 머물지 못해 진지하다 그런데 시마저 진지하기만 하면 이 사이를 어떻게 좁히느냐며 시 좀 재미있게 쓰잔다 ..  (헐렁했으면 좋겠다)



  표성배 님 시집 《은근히 즐거운》(산지니,2015)을 읽으면서, 표성배 님이 오늘 이곳(표성배 님 삶자리)에서 누리는 즐거운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이러면서 내가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즐거운 노래를 헤아립니다.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 가운데 ‘자전거’가 나오는 싯말이 있기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내 신문배달 삶을 되새기면서, 어쩜 그때 그렇게 일하면서 살았을까 하고 빙그레 웃습니다. 내 자전거 바구니에서 신문을 몰래 한 부씩 훔쳐가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한겨울에 길바닥이 꽁꽁 얼어붙은 날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안 미끄러지려고 용을 쓰던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눈이 너무 쌓인 겨울에 골목동네 오르막길을 자전거로 끌고 올라갈 수 없어서, 자전거는 아래쪽에 두고 신문을 옆구리에 낀 채 오르막길을 깊은 새벽에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간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장마가 이어지는 어느 날, 지국장님 반지하집에 물이 차오른다면서, 신문배달을 마치기 무섭게 옷장이며 살림이며 빼내어 신문지국으로 나르던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노래입니다. 슬픈 노래도 있고 기쁜 노래도 있습니다. 아픈 노래도 있고 웃음이 터지는 노래도 있습니다. 이 노래이기에 나쁘지 않고 저 노래이기에 좋지 않습니다. 이 노래만 부를 수 없고, 저 노래는 귀를 막을 수 없습니다.



.. 바람이 있으면 하면 바람이 있었고 // 햇볕이 있으면 하면 햇볕이 있었는데 // 어디 따로 눈 둘 곳 찾지 못해 오늘은 자꾸 멀뚱하다 ..  (장마 탓이다)



  바람이 붑니다. 내가 바람을 불렀으니 나한테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멎습니다. 내가 바람을 바라지 않으니 나한테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꽃이 핍니다. 내가 꽃을 바라기에 꽃이 핍니다. 꽃이 안 핍니다. 내가 꽃을 안 바라니까 꽃이 안 핍니다.


  그러면, 군사독재정권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이런 것을 바랐기에 군사독재정권이 생겼을까요? 전쟁과 핵무기 따위는 무엇일까요? 이런 것도 내가 바란 탓에 생겼을까요?


  나는 사랑과 평화만 바라보려고 하지만, 자꾸 전쟁과 핵무기 따위가 눈에 어른거립니다. 나는 꿈과 노래를 어루만지려고 하지만, 자꾸 따돌림과 괴롭힘 따위가 눈에 밟힙니다.



.. 평생을 기계와 같이 사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이고지고 사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위해 밥을 하고 물을 끓이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위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람 ..  (기술자)



  기뻐하는 이웃이 있고, 슬퍼하는 이웃이 있습니다. 노래하는 이웃이 있고, 노래를 잊거나 빼앗긴 이웃이 있습니다. 눈물짓는 이웃이 있고, 웃음을 그치지 않는 이웃이 있습니다. 잔치를 누리는 이웃이 있고, 배고파서 허덕이는 이웃이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이웃이 있고, 책 한 권조차 모르는 이웃이 있습니다. 술독에 빠진 이웃이 있고, 술 한 방울 입에 안 대는 이웃이 있습니다. 늘 웃는 이웃이 있으나, 늘 아무 낯빛이 없는 이웃이 있습니다.


  부드럽고 맑은 말씨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말끝마다 온갖 거친 막말을 섞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밥을 차리는 어버이가 있고, 얼렁뚱땅 끼니를 때우는 어버이가 있습니다. 입시지옥에 휘둘리며 아픈 푸름이가 있고, 학교를 안 다니면서 제 꿈을 스스로 찾으려는 푸름이가 있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한테 다 다른 노래가 있습니다.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이야기가 자랍니다. 다 다른 삶에서 다 다른 시가 한 줄씩 흐릅니다.



.. 솔숲에 가면 솔바람 불고요 / 강가에 가면 강바람 부는데 / 공단에는 무슨 바람 불까 / 가슴만 두근거리네요 ..  (바람)



  시집 《은근히 즐거운》을 차근차근 읽습니다. 빗길을 아이들과 자전거로 달리고 나서 몸을 씻고 빨래를 한 뒤에 읽습니다. 아이들한테 저녁을 차려 주고 나서 기지개를 켜다가 등허리를 펴려고 자리에 살짝 누운 뒤에 읽습니다. 몸이 뻑적지근해서 몇 줄 읽다가 어느새 곯아떨어집니다. 삼십 분쯤 눈을 붙였을까요. 아이들이 저희끼리 잘 노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깹니다. 살짝 누웠더니 허리를 펼 만합니다. 두 아이를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방에서 빙글빙글 돕니다. 마당으로 나가서 두 손을 잡고 휘휘 돌립니다. 우리 집 마당에 선 후박나무 가지까지 번쩍번쩍 들어올리거나 하늘 높이 던지고서 받습니다.


  개구리가 노래하고, 사이사이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낮새는 고이 잠들었고, 밤새가 일어나서 노래합니다. 아이들이 짓는 웃음은 밤노래가 되어 저 먼 별까지 퍼집니다. 저 먼 별은 우리 집으로 고운 빛줄기를 베풉니다.



.. 고철 더미 속에서 붉은 녹물을 토하는 늙은 기계가 말하고 고철 장이 듣고 있는 가령, //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곳을 볼 수 있는 것은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 // 안녕, 망치야 안녕, 비둘기야 안녕, 그라인더야 안녕, 나의 일터야 ..  (안녕, 망치에게)



  모든 시는 삶을 담습니다. 모든 시는 삶글입니다. 시를 쓰는 모든 사람은 일을 합니다. 애써 ‘노동’이라는 한자말을 빌지 않아도 됩니다. ‘일하는 사람’이 시를 씁니다. 우리는 회사에서도 일하고, 공장에서도 일하며, 시골에서도 일합니다. 부엌에서도 일하고, 책상맡에서도 일하며, 텃밭에서도 일합니다. 자전거를 달리며 일하는 사람이 있고, 두 다리로 걸으며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토바이로 편지를 나르며 일하는 사람이 있고, 짐차를 몰며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 내내 한곳에 꼼짝 않고 서서 일하는 사람이 있으며, 빗자루를 들고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글은 삶글이면서 살림글입니다. 살아가며 쓰는 글이기에 삶글이요, 저마다 다르게 하는 일을 가꾸면서 쓰는 글이니까 살림글입니다. 삶을 쓰는 글은 삶노래입니다. 글은 언제나 노래처럼 흐르기에 삶노래입니다. 살림을 쓰는 글이라면 살림노래가 될 텐데, 일을 읊는 노래라면 일노래이기도 하지요.


  들에서 일하면 들노래입니다. 집에서 일하면 집노래입니다. 숲에서 일하면 숲노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지구별에 두 다리를 딛고 일한다고 여기면 별노래입니다.


  망치한테 인사하는 표성배 님 시집은 어떤 노래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고요히 누리는 기쁜 삶을 노래하는 싯말은 어떤 노래가 되어 이 땅에서 고이 흐를까 하고 헤아립니다. 저녁이 깊어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 곁에서 자장노래를 나긋나긋 부르면서 내 삶노래와 살림노래와 꿈노래와 별노래를 하나씩 함께 헤아립니다. 4348.4.29.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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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04-30 00:03   좋아요 0 | URL
저도 18쪽의 `흑백사진`을 읽으며 절로 함께살기님이 생각나 빙그레 웃었습니다~

모든 시는 삶을 담습니다. 모든 시는 삶글입니다.-
정말 그렇지요.^^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읽은 이 시집을, 함께살기님의 느낌글로 다시 읽으니 참으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좋은 시집에 좋은 느낌글입니다!

숲노래 2015-04-30 00:23   좋아요 0 | URL
우리 스스로 즐거운 이야기를 짓고
다 함께 아름다운 삶이 된다고 느껴요.
appletreeje 님도 오늘 하루를
기쁘게 누리셔요~
 
몸에 피는 꽃 창비시선 144
이재무 지음 / 창비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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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3



시와 꽃숨

― 몸에 피는 꽃

 이재무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6.2.20.



  다섯 살은 다섯 살대로 아름답습니다. 다섯 살에는 다섯 살에만 누리는 빛나는 삶이 있습니다. 열다섯 살은 열다섯 살대로 아름답습니다. 열다섯 살에는 열다섯 살에만 즐기는 기쁜 삶이 있습니다.


  다섯 살 아이는 열다섯 살이 아니기 때문에 서운하지 않습니다. 열다섯 살 아이는 스물다섯 살이 아니기 때문에 섭섭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제 나이에 맞게 빛나면서 기쁩니다.



.. 포대자루에 담긴 감자알, / 낡고 헐한 버스에 실려 청양엘 간다 ..  (청양행 버스)



  사람이 누리는 모든 나이는 이녁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한 살도, 두 살도, 열한 살도, 열두 살도, 스물한 살도, 스물두 살도, 모두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마흔 살이나 마흔한 살도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예순 살이나 예순한 살도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사람한테는 나이만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도 언제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새로 찾아온 봄이기에 똑같은 봄이 아닙니다. 내가 누리는 나이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봄입니다. 봄에 보는 꽃도 지난해에 보던 꽃을 다시 보는 셈이 아니라, 내 나이에 새롭게 맞이하면서 기쁘게 누리는 꽃입니다.



.. 바람의 맛 달디단 것 / 새삼 밤밭골에 와 알았습니다 / 배 주린 후에야 밥 / 귀한 줄 알듯 / 서울 떠나고야 알았습니다 ..  (수목송)



  이재무 님이 빚은 시집 《몸에 피는 꽃》(창작과비평사,1996)을 읽습니다. 시집 이름처럼 ‘몸에 피는 꽃’을 이야기하는 싯말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몸에 피는 꽃이라면 ‘몸꽃’이 됩니다. 몸꽃이 피는 삶이라면 삶꽃이라 할 만합니다. 꽃이 피어나는 삶이요, 꽃이 피어나는 몸이니, 생각도 꽃과 같아 생각꽃이 될 테고, 사랑도 꽃과 같아 사랑꽃이라 할 만합니다. 모두 꽃이요, 꽃내음이며, 꽃밭입니다.



.. 도회지에 사는 동안 나무는 / 수직상승의 욕망만이 허용된다 / 길을 닮은 나무 / 나무는 단 한번 줄기의 높이만큼 / 가지의 넓이 갖고 싶다 ..  (가로수)



  한껏 봄이 무르익는 사월 끝자락입니다. 우리 집 마당과 뒤꼍을 갓꽃과 유채꽃이 가득 둘러쌉니다. 갓꽃과 유채꽃은 이 미터가 넘게 자랍니다. 경관사업을 하느라 군청에서 나누어 준 유채씨를 뿌린 논에서는 유채꽃이 일 미터가 채 안 되지만, 우리 집 유채꽃은 키가 참으로 큽니다.


  높다랗게 자라는 유채꽃과 갓꽃 밑에는 봄까지꽃이랑 코딱지나물꽃이랑 별꽃이 가득하고, 살갈퀴꽃이 막 올라오는 한편, 민들레꽃이 골고루 어우러집니다. 마당과 뒤꼍에서 풀을 뜯으면 내 몸에는 풀내음뿐 아니라 꽃내음이 번집니다.


  신나게 뜯은 풀을 부엌에서 헹구어 밥상을 차리는데, 어깨 쪽에서 뭔가 떨어집니다. 뭐가 떨어지나 하고 살피니 꽃송이입니다. 높다랗게 자란 유채꽃과 갓꽃을 스치면서 다니니, 어깨와 목덜미에 꽃송이가 붙었는가 봅니다.



.. 텃밭 장다리꽃 피어 / 나비 눈부시네 / 이 집 살림은 어떤가? / 저 집 곳간이 났나? / 이 꽃 저 꽃 치마폭 / 한나절 내내 들춰보더니 ..  (장다리꽃과 나비)



  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꽃눈’이 됩니다. 꽃을 바라보면서 내 둘레를 꽃빛으로 받아들입니다. 숲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숲눈’이 됩니다. 숲을 바라보면서 내 둘레를 숲빛으로 헤아립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 다른 눈’이 되어 둘레를 바라봅니다. 다 다른 눈으로 다 다른 삶을 살피고, 다 다른 사랑을 가꾸면서 다 다른 꿈으로 나아갑니다.


  장미꽃도 곱고 동백꽃도 곱습니다. 튤립꽃도 곱고 찔레꽃도 곱습니다. 앵두꽃도 곱고 팬지꽃도 곱습니다. 곱지 않은 꽃은 없습니다. 곱지 않은 삶은 없습니다. 곱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시를 쓴 님은 싯말에 새로운 숨결을 넣으면서 곱고, 시를 읽는 님은 싯말에 새로운 가락을 입혀서 즐기기에 곱습니다.



.. 쑥국이 올라온 저녁밥상 / 국물 한 방울도 아껴 먹는다 / 밥 두 숟갈에 국물 한 숟갈 ..  (조그만 행복)



  시집 《몸에 피는 꽃》을 읽으면서 내 꽃삶을 떠올립니다. 새봄 내내 쑥부침개와 쑥국을 즐기는 내 꽃밥을 떠올립니다. 나는 늘 꽃밥을 차린다고 생각합니다. 꽃접시에 담기에 꽃밥이 아닙니다. 꽃을 먹는다고 여기기에 꽃밥입니다. 곁님과 아이들하고 늘 꽃밥을 누리면서 꽃내음을 먹고, 꽃사람이 된다고 느낍니다. 꽃으로 피어나는 숨결을 아침저녁으로 먹으면서 꽃사람이 되고 꽃마음이 되어 꽃사랑을 피웁니다.


  우리는 저마다 늘 먹는 밥대로 몸빛이 바뀝니다. 누구나 늘 마시는 바람대로 몸결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늘 쬐는 햇볕대로 몸매가 새롭습니다. 싱그러운 밥과 푸른 바람과 맑은 햇볕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아름답게 자랍니다. 꽃숨을 쉬면서 꽃살림을 가꿀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사랑스럽게 거듭납니다. 참말 우리는 꽃넋이 되어 꽃노래를 부르는 꽃동무가 될 수 있습니다. 4348.4.26.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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