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에 걸린 전화기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3
에리히 캐스트너 지음, 발터 트리어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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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50



내 손은 무지개

― 마법에 걸린 전화기

 에리히 캐스트너 글

 발터 트리어 그림

 김서정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1995.5.27.



  내 손은 무지개입니다. 그래서 내 손을 가만히 바라보면, 내 손에서 조그마한 무지개가 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지개가 안 보인다고요? 그렇다면, 내 손을 제대로 안 보았다는 뜻입니다. 찬찬히 마음을 기울여서 다시 들여다보셔요. 내 손에서 피어나는 무지개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내 손은 무지개입니다. 그래서 내 손을 움직이면, 내 손에서 조그미한 무지개가 이곳저곳으로 퍼지는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지개를 못 느끼겠다고요? 그렇다면, 내 손을 제대로 안 썼다는 뜻입니다. 즐겁고 신나게 손을 써 보셔요.


  내 손은 무지개입니다. 그래서 내 손을 뻗으면, 내 손에 닿는 네 손에 두근두근 따순 기운이 흐릅니다. 내 손에 닿는 나무와 풀과 꽃은 기쁨이 넘쳐서 노래합니다. 내 손에 닿는 흙은 기름진 숨결을 얻어 새롭게 깨어납니다.



.. 그런데 엄마가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 빨간 머리 그레테가 소리를 질렀어. / “너희들,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놀이가 뭔지 아니? / 나랑 같이 전화기 있는 데로 가 보자.” ..  (마법에 걸린 전화기)



  내 손은 무지개이기 때문에 빛납니다. 낮에도 빛나고 밤에도 빛납니다. 꽃송이를 쓰다듬으면서 빛나고, 꽃잎을 어루만지면서 빛납니다. 내 손은 무지개이기 때문에 환합니다. 풀잎을 뜯으면서 빛나고, 풀줄기를 스치면서 환합니다. 내 손은 무지개이기 때문에 따스합니다. 밥을 지으면서 따스하고, 밥을 먹으면서 따스합니다. 내 손은 무지개이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빙그레 웃으면서 아름답고, 기쁘게 노래하면서 아름답습니다.



.. 아돌프는 프리츠를 실컷 두들겨 패면서 / 그게 굉장히 재미있는 놀이라고 생각했어. / 프리츠가 윗도리를 벗으면서 / “이제 그만 하시지!” 하고 말할 때까지는 ..  (권투 챔피언)



  무지개를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우리 보금자리에 있으면 됩니다. 무지개를 보려면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우리 살림터에 있으면 됩니다. 무지개를 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두 눈을 바라보면서 우리 손을 느끼면 됩니다.


  어느 먼 곳에 가야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곳에 있으면서 기쁩니다. 어느 한때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늘 이곳에서 즐겁습니다.


  에리히 캐스트너 님이 쓴 재미난 이야기를 동시처럼 묶은 《마법에 걸린 전화기》(시공주니어,1995)를 읽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전화기는 마법에 걸립니다. 마법에 걸린 전화기를 손에 쥐면, 전화를 거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마법에 걸립니다. 그러면 마법은 무엇일까요? 새로움을 짓는 숨결입니다. 마법은 누가 일으킬까요? 새로움을 짓고 싶은 사람이 일으킵니다.



.. 풍선이란 아주 사랑스럽고 / 세상에서 가장 예쁜 거지. / 첫째, 언제나 동그랗고. / 둘째, 대개는 알록달록해. // 셋째, 얼마나 멋지게 나는데! ..  (하늘을 나는 우르줄라)



  아이가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는 처음 태어날 적부터 노래를 알았을까요, 아니면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노래를 물려주었을까요. 노래를 부르는 아이는 맑게 웃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는 밝게 뛰놉니다. 아마 어버이도, 아이한테 노래를 물려준 어버이도, 아이한테 찬찬히 노래를 물려주면서 맑게 웃었을 테고, 아이한테 노래를 물려주는 동안 이녁이 어릴 적에 뛰놀던 이야기를 그렸을 테지요.


  아이가 춤을 춥니다. 아이는 처음 태어날 무렵부터 춤을 알았을까요, 아니면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춤을 물려주었을까요. 춤을 추는 아이는 곱게 웃습니다. 춤을 추는 아이는 기쁘게 뛰놉니다. 아마 어버이도, 아이한테 춤을 물려준 어버이도, 아이한테 신나게 춤을 물려주면서 곱게 웃었을 테고, 아이한테 춤을 물려주는 동안 이녁이 어릴 적에 동무들과 놀던 이야기를 그렸을 테지요.


  아이는 웃으면서 자라고, 어른은 웃으면서 큽니다. 아이는 노래하면서 자라고, 어른은 노래하면서 큽니다. 웃음과 노래는 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이야기를 일으킵니다. 웃음과 노래를 함께 누리는 아이와 어른은 언제나 이야기꾼입니다.



.. 페터는 늘 그래. 가장 튼튼한 대들보도 / 구부릴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지. / 그런데 가장 나쁜 것은, / 자기가 한 거짓말을 믿는다는 거야 ..  (떡에 얽힌 사건)



  동시집이라 할 《마법에 걸린 전화기》는 부드럽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맑게 웃는 하루가 언제 태어나는가 하고 부드럽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곱게 노래하는 삶은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하고 보드라이 이야기합니다.


  지구별 한쪽에서 나무가 자라 숲이 우거집니다. 숲이 우거진 곳에서 푸른 바람이 붑니다. 푸른 바람은 구름과 함께 지구별 다른 한쪽으로 갑니다.


  지구별 다른 한쪽에서 나무가 자라 숲이 짙푸릅니다. 숲이 짙푸른 곳에서 푸른 바람이 붑니다. 푸른 바람은 달이랑 별이랑 함께 지구별 또 다른 한쪽으로 갑니다.



.. 불쌍한 클라우스, 부모님이 / 네 귀를 보면 뭐라고 하시겠니? / 아, 그 귀 때문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 / 겨울에는 귀가 동상에 걸릴 거야. // 이제 너한테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겠구나. / 뾰족한 돌을 던지면 안 된다고? / 아냐, 네가 마침내 깨달아야 할 것은 / 동물을 괴롭히는 건 절대로 권할 일이 아니라는 거지 ..  (못되게 굴면 좋을 게 없다)



  내 손에서 피어난 무지개는 네 손에서 새롭게 자랍니다. 네 손에서 자란 무지개는 내 손에서 다시금 자랍니다. 무지개 꼬리 한쪽은 내 손에 있고, 다른 한쪽은 네 손에 있습니다. 우리 손에 무지개가 있으니, 우리는 늘 어깨동무를 하면서 놉니다. 우리 손에서 자라는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우리 노래를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껏 부르면서 달립니다.


  노래하는 아이들이 달리는 소리를 듣고 지구별이 웃습니다. 춤추는 아이들이 깔깔 웃는 소리를 듣고 지구별이 웃습니다. 지구별은 푸르게 웃습니다. 지구별은 하얗게 웃습니다. 지구별은 파랗게 웃습니다. 이 웃음은 다시 사람들을 살찌우는 숨결이 됩니다. 사람들을 살찌운 숨결은 새로운 웃음과 노래를 낳고, 새로운 웃음과 노래는 다시금 지구별을 사랑스레 어루만집니다. 4348.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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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은 따뜻하다 창비시선 88
정호승 지음 / 창비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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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5



시와 뼈다귀

―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0.10.25.



  고흥 시골자락을 떠난 시외버스는 다섯 시간 가까이 달려 서울에 닿습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자락을 떠나 도시로 볼일을 가면서 책을 읽습니다.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시외버스에서 시집을 세 권째 다 읽습니다. 시집을 읽는 동안 시외버스 텔레비전에서는 사람들이 싸우고 죽이고 피가 튀는 모습이 흐르고, 내가 앉은 자리에서 네 칸쯤 앞에 앉은 일곱 살짜리 아이는 이런 방송을 버젓이 들여다봅니다.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나들이를 가는 할매도, 할매 곁에 있는 여러 할배도, 시외버스 일꾼도, 일곱 살 아이가 ‘사람들이 때리고 죽이고 거친 말을 일삼는 온갖 몸짓’이 흐르는 연속극을 안 보게 하도록 멈추거나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아이와 함께 멍하니 이 연속극을 들여다봅니다.


  재미 삼아서 보면 될 연속극일 수 있습니다. 주먹다짐 연속극도, 살 섞는 이야기 흐르는 연속극도, 일곱 살 아닌 대여섯 살 아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틀어도 될는지 모릅니다. 아니, 한국 사회는 어른과 아이를 모두 주먹다짐 물결과 살섞기 바람으로 휘감으려 하는지 모릅니다.



.. 내 너를 위해 더듬이를 잘라야겠느냐 / 내 너를 위해 저녁해를 따라가야겠느냐 / 모래내 성당의 종소리는 들리는데 / 개연꽃 피는 밤에 가을달은 밝은데 ..  (이별에게)



  서울로 접어든 시외버스는 오직 아스팔트만 있는 찻길을 달려 고속버스역에서 멈춥니다. 서울에서는 길바닥이 아니면 볼 것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길바닥 아닌 다른 데를 보고 걷다가는 전봇대에 부딪히거나 광고판에 부딪히거나 오토바이에 치이거나 다른 사람이 툭툭 치고 지나갈 테니까요. 서울에도 곳곳에 나무가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나무를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걷기 어렵습니다. 겨울눈이 텄구나 하고 생각하며 쳐다보고 길을 걷다가는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자동차가 빵빵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랄 수 있습니다. 거님길을 빠르게 내달리는 자전거한테 치일 수 있습니다.


  시골집에서는 언제나 나무를 바라보며 지냈으나, 볼일을 보러 서울로 오면 길바닥만 바라봅니다. 사람이 걷기에는 너무 좁은 길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자전거와 다른 사람한테 치이지 않으려고 바삐 걸음을 놀립니다.



.. 어둠 속에서도 풀잎들은 자라고 / 오늘도 서울 가는 야간열차의 흐린 불빛을 바라보며 / 내가 던진 마음 하나 별이 되어 사라지면 ..  (당신에게)



  서울을 가득 채운 아주 많은 사람은 저마다 일이 많아 바쁩니다. 발걸음도 바쁘고, 살림돈을 벌어서 달삯을 치르느라 바쁩니다. 여기를 갔다가 저기를 가느라 바쁩니다. 그래도 저마다 손에 손전화를 들고 무엇인가 들여다봅니다. 손에 종이책을 쥐는 일은 드물지만, 손전화에 찍히는 글은 바지런히 들여다봅니다. 책은 안 읽어도 글은 읽는 셈입니다. 다만, 삶을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요, 사랑을 노래하는 글이 아니며, 꿈을 짓는 글이 아닙니다. 10초만 지나면 낡거나 삭는 ‘새롭지 않은 새소식’만 들여다봅니다. 10초만 지나도 잊고 마는 수없이 많은 ‘쪽글’만 들여다봅니다. 하나같이 바쁘면서 ‘새롭지 않은 새소식과 쪽글’을 들여다보느라 바쁘기 때문에, 이 넓은 서울에서는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무척 드물고,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조차 매우 드뭅니다. 지하철역 유리벽에 시 몇 줄을 아로새기기는 하지만, 이 시 몇 줄이나마 읽을 겨를을 낼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유리벽에 아로새긴 시 말고, 정갈한 마음으로 곱게 꿈을 지은 이야기를 엮은 시집 한 권 장만하려고 동네책방으로 나들이를 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  (가을꽃)



  정호승 님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1990)를 읽습니다. 시골집을 떠나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에서 읽습니다. 시골집을 벗어나 읍내로 가까이 갈수록 줄어드는 나무와 숲을 흘깃 바라보면서 시집을 읽습니다. 고흥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탄 뒤로는 차츰 줄어드는 나무와 숲을 살짝 쳐다보다가 시집을 다시 읽습니다.


  별은 따뜻합니다. 저 먼 별도 이 지구별도 따뜻합니다. 연속극을 쳐다보는 일곱 살 시골아이도 따뜻하고, 큰 소리로 연속극을 틀고 시외버스를 모는 일꾼도 따뜻합니다. 따뜻하지 않은 사람은 없고, 따뜻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 호롱불 켜놓고 밤새워 / 콩나물 다듬으시던 어머니 / 날 새기가 무섭게 콩나물다라이 이고 나가 / 온양시장 모퉁이에서 밤이 늦도록 / 콩나물 파시다가 할머니 된 어머니 / 그 어머니 관도 없이 흙 속에 묻히셨다 ..  (어머니)



  그런데, 서울에서는 해가 질 무렵 별을 볼 수 없습니다. 새벽에도 별을 볼 수 없습니다. 달조차 볼 수 없고, 볼 수 없는 별과 달은 아예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천만이 넘는 사람이 바글거리는 서울인데, 경기도를 아우르면 이천만이나 되는 사람이 우글거리는 도시인데, 이곳에서 별을 그리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정호승 님은 《별들은 따뜻하다》 같은 시집을 선보이지만, 정호승 님 스스로 서울에서 별을 얼마나 쳐다보고 나서 이러한 시집을 쓸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밤새 환한 불빛 때문에 별이 안 보이기도 하지만, 높다란 아파트숲 때문에 별이 가리기도 하지만, 엄청난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가스가 하늘을 잿빛으로 덮어 별이 묻히기도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두 발로 디디는 이 지구별부터 제대로 느끼려고 하는 몸짓은 아주 드물다고 느낍니다.



..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 가장 높은 가지 위에 집을 짓다가 // 홀로 바람 되어 / 산길 따라 떠난 사내 // 지은 죄 많아 영혼 없어도 / 이제는 죽음도 아프지 않아 // 별들의 시냇물 소리에 / 새벽잠 드는 사내 ..  (金宗三)



  뼈다귀를 묻을 땅 한 뼘이 없는 서울입니다. 고기를 뜯는 사람은 많아도, 고기가 밥상에 오르기까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다가 잡히는가를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뼈다귀를 묻어 흙으로 돌아가도록 할 만한 땅 한 뼘이 없는 서울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을 땅 한 뼘이 없는 서울이요, 고작 한 평짜리 자투리땅조차 대단히 비싼 값으로 사고파는 서울입니다.


  돈이 될 만하면 시멘트 건물을 높이 올리는 서울입니다. 언제나 돈부터 따져야 하는 서울입니다. 삶을 생각하거나 사랑을 헤아리는 보금자리하고는 너무 먼 서울입니다. 아이와 함께 꿈을 짓거나, 어른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두레를 하기에는 너무 벅찬 서울입니다. 지구가 무너지더라도 나무를 심는다는 사람이 있다지만, 막상 이곳 서울에서 나무 한 그루 심겠노라 외치는 사람은 어디에서 만날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아파트를 내 집으로 삼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아이와 함께 나무를 심을 만한 보금자리를 찾거나 살피려는 사람은 없는 서울입니다.


  나무를 심으려 하지 않으니 책을 읽으려 하기 어렵습니다. 나무를 바라보려 하지 않으니 손수 시를 쓰고 노래하면서 웃기란 어렵습니다.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푸른 바람을 쐬어야 비로소 별을 볼 텐데, 서울에서 부산하게 하루를 여는 아주 많은 이웃들이 이녁 따순 가슴을 자꾸 잊으면서 그예 쳇바퀴만 돌려 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는 ‘어느 별이 어떻게 따뜻한지’를 밝히거나 들려주지는 못합니다. 문득 뼈다귀가 떠오릅니다. 4348.1.1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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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씨 - 최명란 동시집
최명란 지음, 김동수 그림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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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9



이야기가 자라는 마음밭

― 수박씨

 최명란 글

 김동수 그림

 창비 펴냄, 2008.4.30.



  최명란 님이 글을 쓰고 김동수 님이 그림을 넣은 동시집 《수박씨》(창비,2008)를 읽습니다. 예쁘장한 말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동시집이로구나 싶습니다. 이 동시집을 읽는 아이들은 예쁘장한 말과 그림을 함께 보면서 살며시 웃음을 지을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누구나 예쁩니다.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고 하듯이, 예쁘지 않은 아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니까, 어른 가운데에도 예쁘지 않은 어른은 없습니다. 모든 아이가 예쁘고, 모든 어른이 예쁩니다. 아이가 하는 말은 모두 예쁘며, 어른이 하는 말도 모두 예쁘지요.



.. 어미 닭이 / 알을 품었어요 / 쫄쫄 굶으며 / 꼼짝도 안 해요 ..  (어미 닭)



  아이와 어른이 저마다 예쁜 까닭은 겉모습을 꾸미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저마다 예뻐서 사랑스러운 까닭은 겉치레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모습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으면 내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내 모습을 꾸밈없이 마주할 수 있으면 내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바라보기에 조약돌 하나를 갖고 온누리를 읽으면서 놉니다. 내가 나를 꾸밈없이 마주하기에 나무열매와 나뭇가지로 놀잇감을 엮어 소꿉놀이를 합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빗놀이를 하고, 눈이 오는 날에는 눈놀이를 합니다. 구름이 흐르는 날에는 구름놀이를 하고, 해가 방긋 웃는 날에는 해놀이를 하지요. 모든 삶이 놀이요, 언제나 즐겁습니다. 어디에서나 놀이요,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즐겁습니다.



.. 나는 엄마 품 안의 / 초승달이다 ..  (나는 초승달)



  겉모습을 바라보려 하면 알맹이를 놓치기 일쑤입니다. 겉치레에 휩쓸리면 속내를 잊기 일쑤입니다. 동시를 쓰든 동화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만화를 그리든, 우리는 마음결을 차근차근 살펴서 즐겁게 담으면 됩니다. 덧붙이거나 덧씌울 일이란 없습니다. 수수한 모습 그대로 가장 따스하면서 아름답습니다.


  동시집 《수박씨》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단출하면서 깔끔한 싯말과 그림은 여러모로 예쁩니다. 다만, 예쁘장한 말과 그림은 있되, 이 다음으로 아이들이 생각할 꿈과 사랑은 무엇일까 아리송합니다. 동생 어금니에 썩은 자국을 바라보면서 까만 수박씨를 닮았다고 읊는 말은 재미있고 예쁩니다. 그런데, 어금니는 왜 썩을까요. 왜 썩은 자국이 자꾸 보일까요. 아이들 이는 어느 때에 튼튼하면서 단단할까요. 과자나 사탕을 먹기에 이가 썩을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먹고 마시면서 뛰놀 때에 이가 단단하면서 튼튼할 수 있을까요. 썩은 이는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는데, 썩은 이를 바라보고 나서 서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기쁘게 웃을 수 있을까요. 썩었으니까 치과에 가서 이를 뽑아야 할는지요, 아니면 아이한테 네 몸을 네가 손수 지키고 다스리면서 아끼는 길을 들려줄 수 있는지요.


  오늘날 학교를 보면 언제나 시험입니다. 시험으로 가득한 학교에서 겨우 벗어난 아이들은 집과 동네에서도 언제나 시험입니다. 학교에 있든 학교 바깥으로 나오든 으레 시험입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시험에 짓눌린 채 아프고, 시험에 짓눌린 채 아프니 이 아픔을 털어내려고 거칠거나 쓸쓸한 짓을 일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마음껏 놀거나 신나게 뛰놀 틈이 없거든요. 놀이가 없고 놀이동무가 없으니, 아이들로서는 생각이 갇히고 마음이 무거워요. 그러면, 이때에 어떤 이야기밥을 아이들한테 줄 만할까요. 학교에서든 학교 바깥에서든 집에서든 동네에서든 꿈·삶·사랑이 모두 없으니, 어린이문학에서도 꿈·삶·사랑은 안 그려도 될까요.



.. 올챙이는 개구리의 아기 ..  (냇가에서) 



  학교에서 겪거나 집에서 부대끼는 여러 가지 일을 아이와 나누는 일은 재미있습니다. 다만, 재미에서만 그친다면 이 이야기는 흐르지 못합니다. 가벼운 재미를 찾는 일은 더 좋지도 더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예 가벼운 재미로 그칠 뿐입니다.


  사랑을 받으면서 자랄 아이요, 사랑을 주면서 함께 지내는 어른이니, 아이와 어른이 서로 주고받는 사랑을 조금 더 헤아려서 ‘예쁘장한 말과 그림’에 따사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기를 빕니다. 손수 짓는 삶을 보여주고, 손수 가꾸는 사랑을 들려주며, 손수 일구는 꿈을 그릴 수 있는 글과 그림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이야기가 자라는 마음밭입니다. 마음밭에 심는 씨앗에 따라 아이와 어른이 누리는 하루가 달라집니다. 이야기가 살아서 숨쉬는 마음자리입니다. 마음자리에 어떤 꿈을 짓느냐에 따라 아이와 어른이 맞이하는 하루가 달라집니다. 이야기가 태어나서 흐르는 마음결입니다. 마음결을 쓰다듬는 손길에 따라 아이와 어른이 보금자리를 가꾸는 하루는 새로 깨어납니다.



.. 땅속에는 / 고구마도 있고 / 감자도 있고 / 땅콩도 있다 / 내 마음속에는 / 피자도 있고 / 라면도 있고 / 아이스크림도 있다 ..  (있다)



  우리 아이들한테 무엇이 있으면 즐거울까요. 우리 어른들한테 무엇이 있으면 기쁠까요. 우리 아이들은 어떤 곳에서 무엇을 하며 놀아야 신날까요. 우리 어른들은 어떤 곳에서 누구와 함께 일해야 아름다울까요.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수수하게 그리되,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깃든 넋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 하루를 누려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그릴 수 있는 동시가 되기를 빕니다. 땅에는 씨앗을 심고, 씨앗을 심은 땅을 아끼며, 씨앗이 자라서 돋는 잎과 꽃을 사랑하고, 다시 새로운 씨앗을 맺는 온누리를 가꾸는 손길을 어린이문학으로 빚을 수 있기를 빕니다.


  수박씨를 땅에 심어요. 수박씨에서 싹이 트기를 기다려요. 수박씨에서 튼 싹이 자라고 자라서 수박꽃을 피우고 커다란 수박알이 맺도록 돌보고 지켜봐요. 수박알이 소담스레 익으면 이웃과 동무를 불러서 함께 먹어요. 아이와 함께 그릴 ‘수박씨 이야기’는 훨씬 넓고 깊으면서 애틋합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지어서 부를 ‘수박씨 노래’는 한결 따뜻하고 넉넉하면서 환합니다. 눈으로 보았으면, 이 다음에는 손으로 가꾸고, 이러면서 마음과 생각으로 하루를 짓는 동시가 되기를 빕니다. 4348.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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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4 15:06   좋아요 0 | URL
어릴 때 한 동네 살던 동생의 한 반아이가 그렇게나 그 동생을 괴롭혔다.
그 동생이 항렬도 성도 같은 집 안은 아니었는데 발음은 같은 성씨..더구나 돌림자마냥 마지막 자까지 같아서 어릴때부터 그애 숙제봐주기도 내 몫 .그애 시험지나오는 날도 나까지 검사를 당하는 기분..내가 그 애보다 이년 위. 큰 차이는 아니었는데..그 앨 괴롭힌다는 그 머슴애를 혼내주라는 지령을 받았었다.그 동생은 반에서 키가 제일 컸는데 그 남자애도 그랬다.그래서 죽어라 짝이되서는 6년을 붙어지내야했던..불운한 (?)운명..어쩌냐..김치국..아하핫..내가 6학년 그내가 4학년 였을 때 기억이다.
수박씨...아마도 먹는 과일의 수박씨를 말함이겠지..그런데 나는 이름이 수박이고 누구누구 씨..할때..씨를 붙이는 상상을 하며..웃고있다..
아주 옛날의 동생기억까지 불러 들이면서..그앤..중간에..부천으로 이사를 갔다.
헤어져 동네는 썰렁하고 이젠 학생이라곤 얼마 안남은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가 뭔가...
이십리? 흥...! 학교가는 길엔 중부고속도로가..떡하니 놓여..허리를 자른게 내 입학하고 2년쯤였던가? 그때만해도 팔당 상수원인 그곳 의 물은 깊고 푸르고..그랬는데..
지금은 자글자글..물보다..넓은 자갈밭..엉성한 다리가 그곳이 한 때 물이 지나던 곳임을 알려줄뿐..
수박씨..하나가..별 기억을 다 불러들인다..이따금 아버지 산소에나 가야 드나들지..
그리운 것이 너무 많았던 곳인데..산허리 중턱으로 버스가 영차영차 그림을 그려대는 ..재미난 곳.
내 사는 아랫 말에서 꼭대기 산으로 버스가 꾸불텅꾸불텅 지나는게 훤히 보였는데..
최명란+수박씨=조합이 추억을 불러내는 주문인 모양이다.
 
신발 속에 사는 악어 사계절 저학년문고 12
위기철 지음, 안미영 그림 / 사계절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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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8



잔소리와 사랑 사이에서

― 신발 속에 사는 악어

 위기철 글

 안미영 그림

 사계절 펴냄, 1999.4.3.



  잔소리는 이렇게 꾸민들 저렇게 덧씌운들 언제나 잔소리입니다.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잔소리를 해도 잔소리는 늘 잔소리입니다. 그래서, 잔소리를 요렇게 꾸미거나 조렇게 꾸미더라도,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잔소리를 들을 뿐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안 꾸미거나 저렇게 안 덧씌워도 늘 사랑입니다. 딱히 웃음을 짓지 않더라도 사랑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굳이 꾸미지 않습니다. 사랑은 애써 덧씌우지 않습니다. 사랑을 듣는 사람은 한결같이 사랑을 듣습니다.



.. 할머니도 늙고 / 호랑이도 늙고 /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는 / 길고 긴 가래떡 ..  (가래떡)



  위기철 님이 쓴 동시 《신발 속에 사는 악어》(사계절,1999)를 읽습니다. 위기철 님은 ‘잔소리’를 여러모로 꾸미고 덧입히면서 아이한테 들려주려고 했답니다. 아이한테 늘 잔소리만 늘어놓는 이녁 모습을 돌아보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다는군요.


  아이한테 들려주는 말을 떠올리자면 아무 말이나 들려줄 수 없습니다. 어버이가 거칠게 말하면 아이도 거칠게 말해요. 어버이가 잔소리쟁이라면 아이도 잔소리쟁이가 될 테지요. 그러니, 위기철 님은 이녁 잔소리에 이야기옷을 입힙니다. 투덜투덜거리는 잔소리가 아니라, 상냥하고 재미나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되기를 빕니다.



..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 세모들만 살고 있는 세모 나라에 / 세모 아가씨와 세모 총각이 결혼해서 / 네모 부부가 되었대 ..  (세모 나라가 사라진 까닭)



  이야기라는 옷을 입은 잔소리는 새롭습니다. 아이는 여느 때 듣던 잔소리가 아니니 귀가 안 따갑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깨닫지요. 이 이야기도 알고 보면 ‘잔소리’인 줄 깨달아요. 다시 말하자면, 처음부터 이야기로 짓지 않고, 잔소리에 옷을 입힐 뿐인 말은 ‘새로운 잔소리’입니다.


  학교에서는 ‘글짓기’라는 말을 안 쓰고 ‘글쓰기’라는 말을 쓰지만, 정작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가꾸면서 글을 쓰도록 이끌거나 북돋우지 못합니다. 이름은 ‘글쓰기’로 바꾸더라도 낡은 교육 얼거리는 그대로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해마다 입시제도를 고친다느니 무엇을 한다느니 법석을 떨지만, 막상 입시지옥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껍데기를 바꾼다고 하면 껍데기가 바뀔 뿐, 알맹이가 바뀌지 않습니다. 알맹이를 바꾸어야 비로소 알맹이가 바뀝니다. 입시지옥을 없애야 아이들이 지옥에서 풀려납니다. 입시지옥은 그대로 두면서, 시험제도만 바꾼다 한들 아이들이 지옥에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 너는 참 좋겠다. // 엄마가 비싼 옷을 안 입히니 / 모래 장난도 실컷 할 수 있거, // 집에 피아노가 없으니 / 피아노 연습도 안 하겠구나 ..  (누가 더 행복할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지어서 아이한테 들려주어야, 아이도 어른도 즐거울까요? 우리는 아이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서로 즐거우면서 기쁘게 웃을까요?


  아주 쉽습니다. 사랑을 이야기로 지어서 들려주면 됩니다. 꿈을 이야기로 지어서 들려주면 됩니다. 사랑을 이야기로 지으면 언제나 사랑입니다. 꿈을 이야기로 지으면 언제나 꿈입니다. 그러니까, 잔소리를 이야기로 지으니 이러한 이야기는 언제나 잔소리일 뿐이에요. 겉보기로는 맛깔스럽거나 구성지거나 재미나 보이지만, 가만히 읽고 보면, 남는 것은 오로지 잔소리입니다.


  동시와 동화를 쓰는 어른은 우리 스스로 무엇을 쓰는지 제대로 생각하거나 살펴야 합니다. 아이한테 어떤 마음밥을 먹이고 싶은지 올바로 헤아리거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잔소리밥을 먹으면 기뻐할까요? 아이들이 사랑밥을 먹거나 꿈밥을 먹을 적에 기뻐하지 않을까요?



.. 네가 잠이 들면 / 세상도 모두 잠이 든단다. / 텔레비전은 하품을 하고 / 시계는 코를 골고 / 길 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 말하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 쿨쿨 잠을 잔단다 ..  (잠자기 싫을 때 읽어 봐)



  말재주를 부리는 글은 말재주입니다. 말재주는 동시가 아닙니다. 말장난을 치는 글은 말장난입니다. 말장난은 동시가 아닙니다. 재미나게 이야기를 엮을 줄 아는 위기철 님인 만큼, 잔소리에 옷을 입히려는 몸짓이 아닌, 아이와 함께 사랑으로 짓는 삶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엮는다면 아주 아름다울 만하리라 봅니다. 왜 구태여 잔소리를 동시로 써야 할까요? 아이한테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뜻이 없기에 잔소리를 가볍게 이야기로 꾸미고 말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아이하고 더 신나게 뛰놀면서 까르르 웃고 노래하려는 삶이 못 되기에 그만 잔소리에 살그마니 손쉽게 덧옷을 입히고 말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 옛날 옛날 어느 마을에 / 눈물 대신 꿀물이 나오는 / 그런 아가씨가 살고 있었대. // 아가씨가 울 때마다 / 들판에 나비랑 꿀벌들이 날아와 / 꿀을 빨아먹기 때문에 / 아가씨는 슬퍼도 울 수가 없었지 ..  (울고 있을 때 읽어 봐)



  아이와 함께 밥을 지어요. 아이한테 이것저것 차근차근 맡기면서 함께 밥을 지어요. 그러면 아이는 눈을 똘망똘망 밝히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고픈 줄조차 잊으면서 밥짓기에 온마음을 쏟습니다. 아이와 함께 손으로 척척 비벼서 걸레를 빨고는, 노래하면서 온 집안을 닦아 보셔요. 아이는 눈빛을 환하게 밝히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팔 아픈 줄조차 잊으면서 걸레질에 온힘을 기울입니다.


  삶을 사랑하면서 노래하는 시 한 줄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삶을 꿈꾸면서 짓는 웃음 한 자락은 늘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우리 어버이가 우리한테 물려준 사랑과 꿈을, 오늘 어른으로 이 땅에 선 우리들이 우리 아이들한테 즐겁고 기쁘게 다시 물려줄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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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찾아서 창비시선 207
정희성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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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9



삶을 찾아서 사랑을 노래하는

― 詩를 찾아서

 정희성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2001.6.5.



  하늘이 날마다 선물을 베풉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이 날마다 선물을 합니다. 자, 나를 바라보면서 웃으렴 하고 손짓하는 하늘이 날마다 곱게 선물을 나누어 줍니다.


  하늘은 무엇을 선물할까요? 빙그레 웃음짓는 이야기를 선물합니다. 하늘은 왜 선물을 할까요?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하루를 열면, 이 따사로운 기운이 온누리를 아름답게 어루만지기 때문입니다.



..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 덜렁 집 한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 다섯살 배기 딸 민지 /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  (민지의 꽃)



  하늘이 활짝 열리는 곳을 보금자리로 삼습니다. 하늘이 활짝 열리는 곳을 보금자리로 삼는 사람이 하나둘 모여 마을을 이룹니다. 마을에 있는 집은 서로서로 하늘을 나눕니다. 함께 누립니다. 어느 집 한 채만 높다라니 올리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만 차지해야 하는 하늘이 아닙니다. 따순 볕은 골고루 받아야 합니다. 어느 한 집이 높다라니 서면, 그만 이웃은 겨울에 그늘이 지면서 추워요. 몇몇 집이 서로 겨루듯이 높이 오르려 하면, 그만 다른 이웃은 여름에도 겨울에도 싱그러운 바람과 고운 햇볕을 제대로 못 누려요.


  예부터 시골이든 도시이든 옹기종기 모여서 집을 지었습니다. 다 함께 햇볕과 바람을 나누었고, 하늘도 서로 사이좋게 누렸습니다. 내가 즐거울 적에 너도 즐거우며, 네가 즐거울 적에 나도 즐거웠어요. 그런데 차츰차츰 달라지는 사회에서는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법에 따라’ 집을 짓습니다. 너도 나도 집을 높이 올리려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웃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 발표 안된 시 두 편만 /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 부자로 살고 싶어서 / 발표도 안한다 ..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정희성 님이 쓴 시를 단출하게 묶은 《詩를 찾아서》(창작과비평사,2001)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새파란 겨울하늘을 바라보면서 시를 읽습니다. 새파란 겨울하늘을 함께 누리는 풀과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시를 읊습니다.


  새가 살 수 있는 곳이면 사람도 살 수 있습니다. 새가 살 수 없는 곳이면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제비가 집을 짓는 자리라면 사람도 보금자리를 틀 만합니다. 제비가 둥지를 틀지 않는 자리라면 사람도 보금자리를 가꿀 만하지 않습니다.



.. 한 처음 말이 있었네 / 채 눈뜨지 못한 / 솜털 돋은 생명을 / 가슴 속에서 불러내네 // 사랑해 ..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이제 서울에는 제비가 찾아가지 않습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도 제비를 굳이 바라지 않고 기다리지 않으며 생각조차 않습니다. 부산이나 대구 같은 큰도시는 어떠한가요? 광주나 인천이나 대전 같은 큰도시는 어떠한가요? 제비를 꿈꾸는 아이가 있는가요? 꾀꼬리나 종달새를 동네에서 보고 싶은 아이가 있나요? 두루미나 고니가 내려앉는 커다란 나무가 동네에 아름답게 서기를 바라는 아이가 있나요?



.. 어디 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 멀리는 못 가고 /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  (同年一行)



  새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시를 쓰지 못합니다.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귀여겨듣지 못하는 사람은 시를 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새는 늘 사랑으로 노래를 하기 때문입니다. 새는 언제나 사랑으로 둥지를 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은 서로 사랑하면서 꿈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마을살이와 동네살이를 북돋우지 못할 적에는, 겉모습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닙니다.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두레와 품앗이로 마을과 동네에 고운 사랑이 바람처럼 흐르도록 하지 못한다면, 몸차림은 사람일는지 모르나 사람이 아닙니다.


  새마을운동은 시골을 망가뜨렸습니다. 새마을운동이 불어닥친 뒤부터 사람들은 시골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시골사람이 시골을 사랑하도록 이끌지 않은 새마을운동은, 도시로 떠난 사람들한테까지 도시를 도시답게 가꾸면서 사랑하도록 이끌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살든 도시에서 살든, 새마을운동은 사람들 가슴에 있던 사랑과 꿈을 끔찍하게 짓밟았습니다. 사랑과 꿈이 짓밟혀 울부짖던 사람들은 그만 돈에 휘둘리고 졸업장에 휩쓸리면서 이웃을 잊고 그저 다투고 싸우며 악다구니가 됩니다.



..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번을 외우라고 했다 ..  (첫 고백)



  왜 입시지옥을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일까요? 왜 우리 스스로 동무를 ‘맞수’로 삼아서 밟고 올라서려고 할까요? 내가 서울에 있는 손꼽히는 대학교에 붙으려면 너는 밑바닥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네가 서울에 있는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려면 나는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져야 합니다.


  함께 가는 길이 아니라 ‘나 혼자’ 가려는 길입니다. 서로 어깨를 겯으면서 웃고 노래하는 길이 아니라 ‘나 혼자’ 돈과 이름과 힘을 몽땅 거머쥐려는 길입니다.


  입시지옥 수렁에 빠진 아이들은 하늘을 안 봅니다. 낮하늘도 밤하늘도 안 봅니다. 오직 교과서와 문제집만 봅니다. 어버이 얼굴이나 동무 얼굴이나 이웃 얼굴은 바라볼 겨를이 없고, 그저 시험지와 참고서를 볼 뿐입니다.


  이런 바보스러운 나라에서는 하늘이 하늘빛을 잃고, 사람은 사람빛을 잃으니, 시를 쓸 수도 읽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바보스럽게 악다구니 다툼질을 벌이기에, 이러한 곳에서는 제비도 꾀꼬리도 종달새도 두루미도 깃들지 못합니다. 새도 못 살고 사람도 못 살아, 그만 몽땅 죽음 구렁텅이로 내달리는 꼴입니다.


  시를 찾는 길은 삶을 찾는 길입니다. 삶을 찾는 길은 사랑을 찾는 길입니다. 사랑을 찾는 길은, 내가 나다우면서 사람답게 아름다우려는 길이요, 사람과 이웃인 새와 풀벌레와 들짐승이 모두 숲에서 푸른 바람을 마시는 길입니다. 4348.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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