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21 | 122 | 123 | 124 | 12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창비시선 243
류인서 지음 / 창비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66



시와 한가위

―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류인서 글

 창비 펴냄, 2005.3.15.



  한가위가 되니, 시골에는 자동차가 부쩍 늘어납니다. 우리 마을에도 이웃 여러 마을에도 온통 자동차투성이입니다. 여느 때에는 볼 수 없는 온갖 자동차가 마을마다 가득합니다.


  아마 서울을 비롯해 여러 도시에는 자동차가 부쩍 줄었을 테지요. 거의 다 시골로 왔을 테니까요. 그래서 한가위 언저리에는 어디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안 듭니다. 조용하고 깨끗하던 시골에 시끄러운 소리에다가 어지러운 자동차 물결에다가 매캐한 배기가스가 춤추기 때문입니다.



.. 운주사 골자기에서 비 잠시 긋는 동안 / 바위와 석탑을 머리에 이고 선 석불 곁에 / 먹을 것 마실 것 힘겹게 지고 온 배낭나찰을 내려 기대 놓는다 ..  (운주에 오르다)



  한가위 언저리에 시골마을에 자동차가 빼곡하게 들어서면서, 곳곳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립니다. 여느 날에는 저녁 여덟 시만 되면 마을마다 불을 다 끄는데, 한가위 언저리에는 저녁 열 시가 넘도록 불을 안 끄는 집이 수두룩합니다. 이때까지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곤 합니다. 깊어 가는 밤에 아이들 쉬를 누인 뒤 쉬통을 비우고는 나도 쉬를 한 뒤 집으로 들어가면서 이웃집 불빛을 바라봅니다.


  대청마루로 들어서는 모기문을 열면서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립니다. ‘시끄럽다.’ 모처럼 시골에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지만, 왜 그런지 자꾸 ‘시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시끄럽습니다.


  먼 도시에서 오랫동안 달려 시골까지 달려온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틀어박혀 바깥으로 안 나옵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마당에서 놀거나 고샅을 달리는 아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직 가을걷이를 하지 않았으니 빈들이 없어 들에서 놀 수 없기도 하지만, 마을 어귀 빨래터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도 없습니다. 한가위이고 설이고 연을 날리는 아이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폭죽놀이라도 하는 아이마저 없습니다.



.. 몸에 무수한 방을 가진 남자를 알고 있다 / 햇살방 구름방 바람방 풀꽃방 / 세상에, 남자의 몸에 무슨 그리 많은 방을 ..  (그 남자의 방)



  아이들은 도시에서도 ‘집에 틀어박혀’ 지내고, 한가위를 맞이해서 시골로 왔어도 ‘집에 코 박혀’ 바깥으로 안 나옵니다. 모처럼 애써 시골에 왔지만,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바깥으로 나다니지 않습니다. 바깥바람을 쐰다든지 숲길을 거닌다든지 나무그늘에 앉는 어른도 아이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을 테지만, 오늘날 시골에는 숲정이가 없어요. 마을 둘레 나무를 거의 다 베었기에 숲정이가 남아날 수 없습니다. 시골집 가운데 마당나무 한 그루라도 제대로 건사하는 집이 드뭅니다. 마당나무 한 그루쯤 있어도 가지를 죄 치거나 목아지를 뎅겅 베어 그늘이 없습니다.


  한가위나 설을 맞이해서 시골로 왔지만, 정작 마당이나 바깥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탓할 수 없습니다. 집 바깥으로 나와도 갈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사람들은 집 바깥에서 어울릴 수 없습니다. 집 바깥에서 어울릴 너른 터나 마당이나 자리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 하늘색 빨래걸이에 말그레 웃고 있는 몇잎의 빨래 / 그것의 입김이었습니다, 프리지어향 산뜻한 ..  (빨래꽃)



  류인서 님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창비,2005)를 읽습니다. 늘 왼쪽에 앉는다는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지만 ‘왼쪽’은 어디일까요. 누가 보기에 왼쪽일까요. 왼쪽이라고 해 본들 언제까지 왼쪽이 될 만할까요.


  아무래도 왼쪽에 앉고 싶으니 왼쪽에 앉을 테지요. 스스로 왼쪽이 좋으니 왼쪽에 앉을 테고요.



.. 누적된 불면에 현기증까지 겹친 마녀가 어느날 굳게 성문을 잠가버렸어, 부엌의 밥솥 타이머를 정확히 백년에 맞춰두고 풍덩, 잠솥에 빠져버린 거야. 재미있지 않니? 백년 동안의 뜨거운 솥단지를 생각해봐, 그동안 여기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다 일어났지 ..  (뚱딴지)



  날이 새로 밝고 한가위 연휴가 끝나면 시골마을을 가득 채우던 자가용은 모두 떠나리라 생각합니다. 모처럼 시골집마다 늦도록 불을 밝히던 아이들도 모조리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애써 시골로 나들이를 왔어도, 도시내기 어른들이 시골에서 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애써 시골로 와서 늙은 어버이가 못하는 농약치기를 해 줄까요? 뭐, 안 해 줘도 됩니다. 요사이 시골 어르신들은 농협에 돈을 주고는 ‘농약 헬리콥터’를 사서 씁니다. 시골 어르신들은 이제 돈만 있으면 됩니다. 일꾼이 없어도 됩니다. 다 농약을 치니까 풀을 낫으로 벨 일도 없습니다. 풀을 베어야 해도 기계로 슥슥 밀 뿐이니, 도시내기가 거들 일이 그야말로 없습니다. 손으로 나락을 벨 일도 없으니, 이앙기를 사서 쓰도록 돈만 있으면 됩니다.


  젊은 사람은 도시에서 돈을 법니다. 늙은 어버이는 시골에서 돈을 들여 기계를 부리고 농약을 부립니다. 아이들은 도시와 시골 사이를 가끔 오가지만, 도시와 시골이 무엇이 다른가를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시골로 왔어도 꽃이나 나비를 볼 틈이 없습니다. 시골에 왔지만 나무나 숲을 만나지 않습니다.



.. 소꿉시절 잃어버린 손거울을 꿈에서 찾았다 / 내 손바닥 안의 작은 연못 / 빛의 방죽길 ..  (거울연못)



  류인서 님은 이녁 시집에서 ‘늘 왼쪽에 앉는 그’를 노래합니다. 왼쪽에 앉는 그가 있으면 오른쪽에 앉는 이웃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왼쪽에 앉는 그 사람 곁에는 아무도 없을는지, 오른쪽을 차지하는 이웃이 있을는지, 아니면 더 왼쪽에 앉는 동무가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이웃 어르신들이 하도 농약을 뿌려대어 풀벌레도 얼마 살아남지 못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한 한가위가 흐릅니다. 아마 보름달이 떴겠지요. 그러나 보름달을 구경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을 고샅을 거니는 발걸음 소리를 아직 못 들었습니다. 4347.9.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찬 날 애지시선 27
표성배 지음 / 애지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77



쇠말뚝 나라에서

― 기찬 날

 표성배 글

 애지 펴냄, 2009.7.10.



  시외버스는 서울을 벗어납니다. 여섯 시간에 걸쳐 시외버스를 타고 또 타서 서울로 온 뒤 볼일을 마쳤습니다. 여관에서 하룻밤 묵었습니다. 서울은 아주 조그마한 방 한 칸짜리 여관삯도 제법 셉니다. 작은 땅뙈기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살아가니 비쌀밖에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습니다. 옷을 갈아입습니다. 이를 닦습니다. 가방을 멥니다. 영차 하고 소리를 내고는 걷습니다. 한참 걷다 보니 대추나무가 나옵니다. 나는 서울에서도 나무를 보고 싶기 때문에, 서울 한복판 골목을 걸어서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도 대추나무를 만납니다. 살짝 걸음을 늦춥니다. 멈추지는 않고 아주 느긋하게 천천히 거닐면서 대추나무를 바라봅니다.


  아이들과 이 길을 걸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대추나무한테 한 마디 물었겠지요. 얘, 네 열매 한 톨 따서 우리 아이한테 줘도 될까?



.. 햇볕 따뜻한 봄날 토요일 오전 일 마치고 퇴근하는 길 낡은 아반떼 승용차 한 대 마산 봉암 공단 해안 길을 씽씽 달리는데, 숭어 떼가 은빛 비늘 반짝이며 장단 맞추듯 숭숭 치솟는다 ..  (기찬 날)



  빗방울이 듣습니다. 빗물은 가늘게 톡톡 내 안경과 머리와 어깨를 건드립니다. 아니, 빗물은 내 몸에 닿으면서 인사를 합니다. 여 봐, 서울마실은 잘 했나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고흥에 있는 우리 세 식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버지를 목 빼며 기다리는 두 아이 이야기를 알려줍니다.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울기도 하다가 그림도 그리다가 마당에서 뛰놀다가 노래를 부르는 어린 두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서울을 벗어나려는 시외버스는 이 길 저 길 달립니다. 서울 한복판 골목을 거닐 적에는 대추나무 한 그루 겨우 만났는데, 서울을 벗어나려는 ‘자동차 전용도로’에는 이쪽과 저쪽으로 나무가 있습니다. 와, 사람들 걷는 자리에는 없는 나무가, 자동차만 오가는 데에 우거졌구나.



.. 이력서를 당당히 내밀던 때가 있었다 / 이때만 해도 사람이 기계를 돌렸다 // 사람이 기계를 돌릴 때만 해도 / 공장 화단에 핀 벚꽃은 / 내 마음 들뜨게 했고, // 점심시간이면 그리운 이에게 / 분홍색 편지를 쓰기도 했다 ..  (이때만 해도)



  서울 시내를 벗어나려 하던 시외버스는 한참 느릿느릿 기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차츰 멀어질수록 시외버스는 빨리 달립니다. 이제 서울에서 꽤 벗어났다 싶으니, 시외버스는 거침없이 달립니다.


  버스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봅니다. 서울이 되고 싶은 다른 도시들이 아파트를 새로 짓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 높지 않은 멧자락을 휘감는 아파트를 바라봅니다. 구름은 멧봉우리에 걸렸는지 아파트 꼭대기에 걸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외버스 아재는 라디오를 틀며 버스를 몰다가 라디오를 조용히 끕니다. 그저 조용히 버스를 몹니다. 차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손전화 만지작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퍼집니다. 나는 가만히 두 눈을 감고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과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품이 얼마나 넓거나 따스한가 하고 곱씹습니다.



.. 누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가 / 세상 처음 소리처럼 맑아 / 마음이 다 녹아내리는 // 누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가 /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 바람 같은 ..  (망치의 노래)



  생각해 보면,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웃는 얼굴인 이웃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모두 도시로 보낸 시골 할매와 할배는 늘 고단한 몸짓으로 농약을 치고 비닐을 씌우며 경운기를 몹니다. 둘이 시골에 남아 살림을 꾸리는 할매와 할배는 들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아이고 에고 아유 헉헉 하는 한숨과 외마디소리를 낼 뿐입니다.


  도시로 온 아이들은 무럭무럭 커서 어른이 됩니다. 이녁 짝꿍을 도시에서 사귑니다. 한국도 연변도 중국도, 아마 일본도 그러할 텐데, 시골에 눌러살면서 짝꿍을 만나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시골에는 젊은이가 남아나지 않아요.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는 아이들은 왜 아직도 도시로 못 갔느냐는 눈치를 받습니다.


  그러면, 도시로 온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놀까요. 도시로 와서 어른이 되어 돈을 버는 어른들은 노래잔치를 누리면서 살림을 가꾸는가요.



.. 빗방울 소리 들으며 마음 가다듬어 보지만 / 반쯤 비우다 만 술잔에도 빗방울이 떨어진다 / 반쯤 비우다 만 밥그릇에도 빗방울이 덜어진다 / 반쯤 비우다 만 국그릇에도 빗방울이 떨어진다 ..  (빗방울이 떨어진다)



  표성배 님 시집 《기찬 날》(애지,2009)을 읽습니다. 표성배 님 삶이 묻어나고, 표성배 님 목소리가 진득한 시집을 읽습니다. 표성배 님이 시 한 줄에 담아서 우리한테 들려주고 싶은 노래를 듣습니다.


  아, 노래입니다. 예쁜 노래입니다.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들려주는 노래입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 얼굴에 주름이 살짝 잡히려는 아저씨가 가만히 들려주는 노래입니다.



.. 비 갠 하늘이 참 파랗다 // 공장 야적장 바닥 여기저기 / 발자국만 한 웅덩이에 빗물이 고여 있다 // 고인 물가에 / 잠자리 한 쌍 나란히 앉아 데이트 중이다 / 크르릉 크르릉 탱크 소리를 내며 / 트랜스포트가 지나간다 ..  (참 미안하다)



  시외버스 아재는 다시 라디오를 켭니다. 버스 창문 바깥으로 송전탑이 나옵니다. 송전탑은 멧자락을 넘습니다. 송전탑은 들을 가로지릅니다. 송전탑은 시골마을 비닐집 위로 지나갑니다. 송전탑은 시골에도 있는 아파트 옆으로 지나갑니다.


  이 나라 곳곳에 송전탑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송전탑을 더 박으려 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일입니다. 얼마 앞서까지, 꽤 많은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이 나라 골골샅샅에 때려박은 쇠말뚝을 뽑는다고 부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 사람들은 아직 쇠말뚝을 다 뽑지도 못했으면서, 더 무시무시하고 커다란 쇠말뚝인 송전탑을 끝없이 박습니다. 돈을 들여 박고, 사람을 죽이면서 박으며, 마을을 짓밟는 짓까지 서슴지 않으며 박습니다.



.. 손에 땀이 난다 // 여보! 그러고 보니 당신과 편안한 여행 한번 하지 못했소 // 얘들아! / 너희들과 숲길 한번 조용히 걸어본 적 없었구나 ..  (부치지 못한 편지)



  쇠말뚝으로 춤을 추는 이 나라에는 어떤 시가 있을까요. 쇠말뚝이 넘실거리는 이 나라에서는 누가 어떤 노래를 부를까요. 날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쇠말뚝잔치이니까, 쇠말뚝 노래를 부르면 될까요. 쇠말뚝을 기리는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면 될까요. 우리는 쇠말뚝 박는 일로 ‘청년 일자리 창출’을 하지는 않나요. 젊은이한테 쇠말뚝 박는 일을 시키면서 돈을 주고, 젊은이한테 시골 할매를 때리는 짓을 시켜서 돈을 주지는 않나요.


  시외버스를 너덧 시간 달려도, 이 나라에서 우람한 나무를 못 만납니다. 이 나라에는 아름드리로 아름다운 나무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나무를 심지 않고, 나무를 아끼지 않는 이 나라에는 어디에나 그예 쇠말뚝입니다. 그러면, 이녁은 쇠말뚝을 품에 안으면서 노래할 수 있나요? 대통령은 쇠말뚝 곁에 집을 짓고 오순도순 살 수 있나요? 4347.9.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그머니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6
조성국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65



시와 한가위 풀베기

― 슬그머니

 조성국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7.3.28.



  새벽 다섯 시 반에 마을방송이 퍼집니다. 한가위를 앞두고 마을청소를 하자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오늘 새벽에 마을청소를 하자는 줄 알았으면 어제 낮에 아이들과 함께 마을 빨래터와 샘터를 치웠을 텐데, 엊저녁과 오늘 새벽에 마을방송을 하니, 마을 빨래터와 샘터는 우리가 못 치웁니다. 아이들은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지는 않으니까요.


  한가위를 앞둔 구월 첫머리 새벽은 꽤 어둑합니다. 낫을 하나 챙겨서 고샅으로 갑니다. 우리 집 대문 둘레에 돋은 여러 가지 풀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내가 아끼고 귀엽게 바라보는 풀이지만, 오늘 하루는 베기로 합니다. 석석 낫질을 할 적마다 풀은 뭉텅뭉텅 잘립니다. 오늘날 시골마을에서 하는 마을청소는 ‘풀베기’입니다.



.. 가문 마당에 / 소낙비 온 뒤 // 붉은 지렁이 한 마리 / 안간힘 써 기어가는 ..  (여름 한때)



  예부터 풀은 아무 때나 함부로 베지 않았습니다. 소한테 먹일 풀이 아니라면, 또 밥상에 올릴 나물이 아니라면, 풀을 섣불리 베지 않았습니다. 바구니를 엮는다든지 실을 뽑을 일이 아니라면, 함부로 풀을 베지 않았어요.


  오늘날에는 소한테 풀을 베어 먹이지 않습니다. 아니, 풀을 베어 소한테 줄 아이들이 없습니다. 풀을 먹으며 지낼 만한 일소가 시골에 없기도 합니다. 게다가 시골에 젊은이가 몽땅 사라져서 도시로 가고 말았으니, 시골에서는 논둑이고 밭둑이고, 논밭이고 어디이고 온통 농약입니다. 이곳저곳에 농약을 뿌려대는 시골인 만큼, 마을 고샅길에서 자라는 풀조차 섣불리 쓸 수 없습니다. 그저 베어낼 뿐입니다.



.. 농협 마당 나락 섬에 / 불 놓던 지아비 / 약병 들고 스러지던 솔밭 새로 가네 ..  (망종길)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잘 자라던 쑥포기를 그대로 두고 싶지만, 그대로 두면 안 되겠구나 싶습니다. 우리 집이 홀로 조용히 떨어진 멧골집이라면 그대로 둘 테지만, 마을 한복판에 있는 집입니다. 마지막으로 대문 앞 쑥포기를 벱니다. 내 키보다 웃자란 쑥포기를 벱니다. 이 쑥포기는 아까워 마당으로 들입니다. 잘 말려야지요.


  가만히 생각하면, 시골 할매나 할배가 한가위를 앞두고 풀베기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도시로 떠난 이녁 딸아들이 시골에 와서 풀을 베 주면 베 줄 노릇이지, 늙은 몸을 이끌고 풀을 베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언제부터 한가위나 설을 앞두고 풀베기를 ‘마을청소’라는 이름을 붙여서 했을까요? 아무래도 박정희 독재정권 새마을운동 때부터일 테지요. 풀로 이은 지붕을 모조리 석면 지붕으로 갈아치우도록 닦달하던 새마을운동 때부터 시골사람이 스스로 ‘풀을 미워하고 짓밟도’록 내몰았을 테지요.



.. 외상 점방이 있다 꽉 막힌 골목길이란 없다 / 막다른 끝에 누군가의 집이 있고 / 케케묵은 거기에 구뜰하게 세 들어 사는 / 헐값에도 팔 수 없는 싸구려 고물들 ..  (오래된 골목)



  조성국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슬그머니》(실천문학사,2007)를 읽습니다. 삶은 슬그머니 빛나고, 슬그머니 저뭅니다. 삶은 슬그머니 기지개를 켜고, 슬그머니 웃고 떠들면서 일하다가, 슬그머니 하품을 하고는 고단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한가위를 앞두고 참새가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참새는 무리를 지어 슬그머니 낟알을 먹고 싶습니다. 나락내음이 훅훅 온 마을에 퍼지는걸요. 참새더러 낟알을 훑지 말라 할 수 없습니다. 잘 익는 냄새가 퍼지는데 참새가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숲정이가 있나요. 숲정이를 모조리 없앤 시골에서 참새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가을이 되어 낟알을 조금 얻어먹으려는 참새인데, 참새는 봄부터 가을까지 바지런히 벌레를 잡아먹었어요. 사람들이 아무리 농약을 써도 잡을 수 없던 벌레를 수많은 참새가 그야말로 바지런히 다니면서 애써서 잡아먹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참새도 낟알을 조금 얻어먹을 만합니다. 누군가 슬그머니 참새한테 낟알을 나누어 줄 만합니다.



.. 여느 날과 같이 잔업 마치고 늦은 밥상에서 / 코훌쩍이 아들의 이마를 향해 / 잔뜩 힘을 준 종주먹을 냅다 뻗었는데 / 그보다 훨씬 빠른 것은 / 제 이마를 팔뚝으로 가로막고 / 밥알을 잽싸게 주워 먹는 녀석의 / 날랜 동작이었다 ..  (날랜 유전)



  아마 오늘은 내가 가장 먼저 낫을 들고 나와서 풀을 다 베었지 싶습니다. 우리 집 앞 고샅길에서 자라던 풀이 감쪽같이 사라진 줄 이웃 할매나 할배는 나중에 알아차릴 테지요. 누가 이리 베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는지 모릅니다. 나는 그야말로 슬그머니 풀을 베고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볕바른 동원훈련장의 / 늙수그레한 중대장 눌변대로라면 / 그 육십년대의 중무장한 남파특수부대가 / 단박 침투해 올 것 같았다 / 요즘도 그런 사태가 발발하겠느냐는 듯 / 두엇 두엇 모인 예비군은 / 옹송그려 졸고 / 어깨에 기댄 M16 총구 위로 / 노랑나비도 쪽잠 들러 날아들었다 ..  (호접점경)



  차츰 동이 틉니다. 천천히 날이 밝습니다. 이웃집에서 경운기 굴리는 소리가 퍼집니다. 풀 베는 기계로 윙윙 풀을 베는 소리가 들립니다. 낫질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소리는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낫이 아닌 ‘예초기’를 쓰면서 노래를 못 부릅니다. 기계로 풀을 베면 기계에 잘린 풀이 날카롭게 튀기 때문에 긴옷을 입고 입을 꾹 다물어야 합니다. 경운기를 굴리면 아주 시끄러운 엔진 소리 때문에 말을 섞을 수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자가용과 손전화가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와 말을 빼앗았습니다. 시골에서는 농약과 농기계가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와 노래를 앗아갔습니다. 우리한테는 이제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누리는 삶일까요. 사랑과 꿈은 언제 어떻게 다시 자랄 수 있을까요. 4347.9.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끼리 주파수 창비시선 327
김태형 지음 / 창비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76



아이들을 태운 자전거

― 코끼리 주파수

 김태형 글

 창비 펴냄, 2011.2.10.



  내가 마흔 살이 아니고 스무 살이라면, 아이 둘을 자전거에 태우고 골짝마실을 다녀온 뒤에 어떠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스무 살 몸이라면 자전거를 몰아 골짝마실을 다녀왔어도 기운이 넘칠까요. 스무 살 몸이라면 달게 한숨 자고 나면 고단함이 모두 사라질까요.


  마흔 살인 내 몸은 일곱 살과 네 살인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골짝마실을 다녀오고 나서 도무지 새 힘을 되찾지 못합니다. 어찌저찌 밥 한 끼니 차려서 먹인 뒤 등허리를 펴려고 잠자리에 눕습니다. 한 시간쯤 눕지만 뻑적지근한 어깨가 안 풀립니다. 한 시간을 더 누우면 등허리를 말끔히 펼 수 있을까요.



.. 한 발짝 새똥 눌어붙은 자리까지 다가가 한참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 등 뒤에서 또 제비 한 마리 휘이익 날아드는 게 아닌가 / 문간을 넘어서다 저도 놀랐는지 / 비좁은 부엌을 한 바퀴 돌고는 황급히 안대문 쪽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  (유목―제비)



  스무 살 적에 신문배달 하던 일을 떠올립니다. 열여섯 살 무렵에 신문배달 하던 일을 되새깁니다. 열여섯 살 무렵에는 신문 백 부를 옆구리에 끼고 두 다리로 달리면서 돌렸습니다. 신문꾸러미를 이제 막 옆구리에 끼고 달리자면 몸이 기우뚱합니다. 한 집 두 집 돌리면서 신문꾸러미가 줄어듭니다. 열 집 스무 집을 돌리면 신문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 달려도 이럭저럭 몸이 덜 기우뚱합니다. 서른 집을 지나 마흔 집을 돌릴 즈음 온몸은 땀으로 젖습니다. 이때부터 신문에 땀이 묻지 않게끔 마음을 기울입니다. 보자기나 비닐을 옆구리에 대고 신문을 움켜쥡니다. 일흔 집을 돌리고 여든 집을 돌릴 즈음에는 숨이 턱에 닿습니다. 아흔 집을 돌리면 비로소 옆구리가 가벼워 달리기도 수월합니다. 그러나 이제껏 쉬잖고 달렸으니 다리가 살짝 후들거립니다. 마지막 집까지 모두 돌리면 두 손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땀을 훔칩니다.


  새벽에 신문을 돌릴 적에는 쳐다보는 사람이 길거리에 없습니다. 낮에 신문을 돌릴 적에는 다들 쳐다봅니다. 왜냐하면, 두 다리로 달려서 신문을 돌리고 나면 웃옷도 아랫옷도 땀으로 흠뻑 젖어요. 머리카락에도 땀방울이 맺힙니다. 한낮에 온몸이 땀으로 젖은 아이가 돌아다니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쳐다보지요.


  이러거나 말거나 일을 다 마쳤으니, 집까지 달려서 돌아갑니다. 신문을 돌릴 적에도 달리고, 신문사지국에 신문을 받으러 갈 적에도 달리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달립니다.



.. 방문을 꾹 눌러닫고 한구석에 두 아이를 눕힌다 / 아이들 이마 위에 / 가만히 얹어보던 굳은 손으로 / 새파랗게 죄 지은 손으로 바닥을 쓸어본다 ..  (흰 고래를 찾아서)



  열여섯 살 즈음에는 두 다리로 달리면서 신문을 돌렸어도 찬물로 땀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 고단한 줄 몰랐습니다.


  스무 살에는 자전거를 달려 신문을 돌렸습니다. 이때에는 더 많이 돌립니다. 자전거는 맨몸으로 타기만 했을 뿐, 앞뒤로 신문을 싣고 달리기는 처음입니다. 신문 한 부는 가볍지만, 백 부가 되고 이백 부가 되면 자전거가 휘청거립니다. 제대로 무게를 맞추어 자전거 발판을 구르지 않으면 한쪽으로 기우뚱하다가 와장창 하고 넘어집니다.


  넘어져서 무릎이나 이마가 팔꿈치가 깨지면 며칠 지나면 아뭅니다. 그렇지만, 자전거는 찌그러집니다. 무엇보다 신문이 다쳐요. 배달 자전거에 아직 익숙하지 않던 때에 신문꾸러미를 앞뒤에 실은 채 달리다가 넘어지면, 지국장이든 누구이든 ‘배달원’ 몸을 살피지 않습니다. 신문 귀퉁이가 깨졌나 안 깨졌나 살피고, 자전거가 괜찮은가 살핍니다. 배달원 몸은 맨 나중입니다.


  곰곰이 돌이켜니, 스무 살 적에도 신문배달을 마친 뒤 한 차례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 몸이 멀쩡했습니다.



.. 세살 갓 지난 딸아이가 / 화장실에서 빼온 두루마리 화장지 / 죄다 풀어내어 바다를 만들었다 / 바다를 처음 보고 와서는 늘 바다 바다를 외치더니 / 아빠 바다 아빠 바다 하고 / 제가 만든 두루마리 바다를 보여준다 / 작은 사내놈은 덩달아 ..  (마지막 상상)



  군대에 다녀오고 스물네 살 적에도 신문배달을 합니다. 신문배달로 밥벌이를 하던 때라, 군대에 다녀오기 앞서보다 곱절로 신문을 돌립니다. 신문은 더 무겁습니다. 해가 가면 갈수록 신문이 더 무겁습니다. 신문사마다 쪽수를 늘릴 뿐 아니라, 광고종이도 늘어납니다. 돌릴 구역에 맞추어 신문을 한 번에 실어서 나를 수 없어, 두 차례로 나눕니다. 한 차례 다 돌리고 돌아와도 다시 그만큼 돌려야 합니다.


  모두 잠든 새벽 두 시 무렵부터 자전거를 몰아 신문을 돌립니다. 한여름 장마철에는 비를 맞으면서 신문을 안 적시려고 용을 쓰며 돌립니다. 한겨울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맞으면서 눈길에 안 넘어지려고, 또 눈을 안 맞히려고 애를 쓰며 돌립니다. 한여름에는 으레 물에 젖은 몸으로 신문을 돌리고, 한겨울에는 언제나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신문을 돌립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마흔 살이 넘었지 싶은 지국장 아저씨는 신문배달을 마치고 으레 한 시간 남짓 방바닥에 드러누워 허리를 폈습니다. 그때에 서른 살이 넘은 형들도 일을 마치고는 한 시간쯤은 방바닥에 누워서 허리를 펴고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나도 예전에 신문사지국에서 보던 지국장 아저씨나 나이든 형들과 같은 나이를 맞이했습니다. 아이 둘을 자전거에 태워 골짜기를 오르내리자니 온몸이 결리거나 쑤실밖에 없지 싶습니다.



.. 집 안에서 텔레비전을 치워버리고 나자 / 또다른 화면들이 내 앞에 몰려든다 / 이른 아침부터 몰래 들어와 재잘거리는 참새들 ..  (공유지의 비극)



  김태형 님 시집 《코끼리 주파수》(창비,2011)를 읽습니다. 김태형 님이 시에 쓴 아이들 이야기는 이녁 아이들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마음속으로 지어낸 아이들 이야기일까요. 아마 김태형 님과 함께 삶을 꾸리는 아이들 이야기일 테지요.


  시를 쓰는 아저씨가 바라본 아이들은 어떤 모습이요 어떤 눈빛이며 어떤 놀이로 하루를 즐겼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시를 읽는 아저씨가 늘 마주하는 우리 아이들은 어떤 모습이요 어떤 눈빛이며 어떤 놀이로 하루를 즐기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 새벽마다 오줌 싸는 아이가 / 몰래 새 구름 한 벌 갈아입는다 / 아침이면 햇빛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아이들 / 내 아름에도 벅찬 구름이 두 팔에 매달린다 ..  (구름 일가)



  아이들은 날마다 자랍니다. 키도 몸도 자라고, 말도 생각도 자랍니다. 어른들은 날마다 어떠할까요. 어른들은 날마다 나이만 먹으면서 늙을까요? 어른들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씩씩하게 자랄까요?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 집 아이들을 처음 자전거에 태운 날에도 고단하기는 똑같았습니다. 온몸이 쑤셨습니다. 홀몸으로 자전거를 달릴 적하고 아이를 태워 자전거를 달릴 적은 사뭇 다릅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살집이 붙습니다. 아이들은 찬찬히 키가 자랍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려고 수레랑 샛자전거를 붙이니, 늘 매다는 무게가 꽤 묵직합니다.


  그런데, 큰아이가 꽤 어릴 적에 처음 자전거에 태우면서 느낀 무게나 두 아이를 요즈음에 자전거에 태우면서 느끼는 무게는 엇비슷해요. 그러니까, 나도 아이들과 함께 자랍니다. 내 몸도 아이들이랑 나란히 자랍니다. 내 마음과 내 넋과 내 꿈과 내 사랑까지 언제나 자랍니다.



.. 유리창 밖에 떨어져 죽어 있는 산새 한 마리 / 퍼포먼스였으면 좋았겠지만 / 나뭇가지가 기를 쓰고 붙들고 있는 허공으로 아무것도 날아가지 않았다 / 청소부 아줌마가 그 딱딱한 것을 거두어갔다 ..  (백남준아트쎈터)



  코끼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졌어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고래 또한 참으로 멀리 떨어졌어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해요.


  사람은 어떤가요. 사람은 손전화가 있어야 이야기를 주고받을까요. 사람은 인터넷을 켜야 비로소 이야기를 나누는가요.


  사람은 마음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까요. 사람은 서로서로 따사로운 마음이 되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 기러기 한 마리씩 뜯어먹는 대신 / 뭔가 그리워하는 얼굴로 / 안타까워하는 모습들로 앉아 있으면 안되나 ..  (외로운 식당)



  내가 마음을 열어야 네 마음을 읽습니다. 네가 마음을 열어야 내가 마음을 읽습니다. 서로 마음을 열어야 서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야기는 입을 열어야 나누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손으로 글을 써야 나눌 수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서로 마음을 열고 사랑을 가꾸려 할 때에 나눌 수 있습니다. 서로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넉넉하고 따사로운 마음일 때에 이야기꽃이 피어납니다.


  시 한 줄을 쓸 수 있으려면, 글솜씨가 글재주가 아닌,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시 두 줄을 쓸 수 있으려면, 대학교를 마치거나 문학강좌를 듣기보다, 사랑을 가꾸는 삶을 누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시 석 줄을 쓸 수 있으려면, 언제나 맑게 눈을 뜨고 밝게 귀를 열며 즐겁게 온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버지가 모는 자전거를 타고 골짝마실을 다녀온 아이들은 기운이 넘칩니다. 기운이 넘치는 아이들은 저희끼리 툭탁거리면서 잘 놉니다. 참으로 대견하며 씩씩하고 아름답습니다. 4347.8.3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64



시와 늦여름

― 간절하게 참 철없이

 안도현 글

 창비 펴냄, 2008.1.21.



  여름이 저뭅니다. 늦여름 바람이 제법 시원합니다. 해는 늦게 뜨고 일찍 집니다. 아직 낮에는 햇볕이 뜨거워 이불이나 빨래를 말리기에는 좋습니다. 일찍 찾아오는 저녁에 부는 바람에는 가을내음이 물씬 흐릅니다. 논이 펼쳐진 들길 사이를 걷거나 자전거를 달리면 제법 익은 나락마다 고소한 냄새를 퍼뜨립니다.


  풀벌레 노랫소리가 짙을 만한 철입니다. 멧새는 겨울을 앞두고 부산을 떨어야 할 철이고, 멧짐승도 슬슬 바지런히 추위를 헤아려야 할 철입니다. 그런데 풀벌레 노랫소리가 그리 짙지 않습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시골에는 으레 농약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 가끔 나는 숙박계에 이 세상에 없는 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쓰고 벽에 구름의 바지를 걸어놓고 잠든 적 있다 ..  (세상의 모든 여인숙)



  흙이 있는 땅이면 으레 풀이 돋기 마련입니다. 풀은 어디에서나 돋습니다. 사람이 심은 남새 씨앗도 돋지만, 풀이 스스로 퍼뜨린 씨앗도 돋습니다. 풀은 사람이 뜯어서 먹기도 하지만, 들짐승이나 숲짐승이 뜯어서 먹기도 합니다. 지난날에는 마을마다 소를 많이 키웠기에 소한테 풀을 먹이려 했지, 풀에 함부로 약을 뿌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모든 풀은 저마다 쓰임새가 있어서 함부로 뜯거나 죽이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풀을 여러 가지로 씁니다. 첫째, 즐겁게 먹습니다. 둘째, 옷을 짓는 실을 얻습니다. 셋째, 바구니나 자리나 신을 삼을 적에 씁니다. 넷째, 지붕에 얹거나 울타리를 두를 때에 씁니다. 다섯째, 몸이 아플 때에 알맞게 씁니다. 여섯째, 잎사귀를 덖거나 말려 우려서 마십니다. 일곱째, 짐승한테 먹이려고 씁니다. 여덟째, 풀이 돋아 흙을 붙잡으면 큰비가 내려도 흙이 쓸리지 않습니다. 아홉째, 풀밭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 언제나 싱그러우면서 맑은 바람을 마실 수 있습니다.



.. 그해 봄 우리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  (명자꽃)



  풀을 모르는 사람은 시골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풀을 모르고서는 삶을 가꿀 수 없습니다. 풀을 죽이거나 짓밟는 사람은 시골내기가 되지 못합니다. 아니, 풀을 죽이거나 짓밟으니 시골마을을 돌볼 수 없습니다.


  풀이 죽은 데에서는 나무가 죽습니다. 풀이 죽어 나무가 죽으면 사람이 죽습니다. 풀이 죽어 나무가 죽으면 숲이 사라집니다. 숲이 없는 곳은 비가 오지 않아요. 메마를 뿐입니다. 풀과 나무가 없으면 냇물이 흐를 수 없어요. 풀과 나무가 없으면 논이고 밭이고 일굴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억지로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로 ‘풀 없이 먹을거리를 뽑아내는 짓’을 함부로 합니다. 흙을 온통 죽이거나 말리면서도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로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만드는 공산품 같은 먹을거리를 거둡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셈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은 셈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땅을 망가뜨릴까요. 우리는 무엇을 바라면서 이 땅에 푸른 물결이 아닌 잿빛 도시와 아파트와 공장과 발전소와 송전탑 따위만 들이부을까요.



..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  (조문弔文)



  안도현 님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2008)를 읽습니다. 애타면서 철이 없는 모습을 가만히 떠올립니다. 어떤 사람이 애타는 몸짓이면서 철없다고 할 만할는지 헤아립니다.


  너일까요. 나일까요. 우리 모두일까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두 철없는 노릇이 아닐까요. 스스로 어떤 숨결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말 철없는 삶이 아닐까요.


  안도현 님이 사는 마을에서 뒷집 할배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안도현 님은 뒷집 할배가 ‘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렴요. 모든 사람은 저마다 길입니다. 더 밝은 길이나 더 어두운 길은 따로 없이 우리는 모두 길입니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 길인 줄 모르기 일쑤이고, 어떤 길인지 안 느낄 뿐입니다.


  그러면, 안도현 님은 어떤 길일까요. 안도현 님은 스스로 어떻게 빛나는 길일까요. 안도현 님은 스스로 어떤 철이 든 사람으로서 시 한 줄을 읊을까요.



.. 식구들이 모두 달라붙어 키운 염소를 / 겨울에 잡았다 ..  (염소 한 마리)



  늦여름이 저물면서 가을이 코앞입니다. 달력에 있는 숫자로 헤아리는 가을이 아니라 살갗으로 느끼는 가을이요, 달력 숫자가 아닌 바람결과 햇살로 느끼는 가을입니다. 가을이 지나고 찾아오는 겨울도 살갗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마주하는 철이 되겠지요.


  바람을 느끼듯이 여름을 듬뿍 느끼다가 가을내음을 맡습니다. 햇살을 느끼듯이 여름을 한가득 누리다가 가을빛을 바라봅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따사롭게 춤을 춥니다.


  우리 마음에 봄이 싹틀 때에 들에도 봄빛이 피어납니다. 우리 마음에 가을열매가 무르익을 때에 들에도 가을열매가 무르익습니다. 우리 마음에 봄이 싹트지 않는다면 들에도 봄바람이 불지 않아요. 우리 마음에 가을이 무르익지 않는다면 들에도 가을내음이 퍼지지 않습니다.



.. 시골 서점 책꽂이에 아주 오랜 시간 꽂혀 있는 시집이 있다 / 출간된 지 몇해째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시집이다 ..  (오래된 발자국)



  자전거를 타고 들길을 달리는데 풀벌레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이웃 여러 마을에서도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농약바람은 맡을 수 있지만 짙은 풀바람을 쐬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풀벌레와 새와 개구리가 노래잔치를 이루는 모습은 차츰 사라지면서,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기곗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넘칩니다.


  소리가 사라진 곳에 노래가 사라지고, 노래가 사라진 곳에서는 시를 읽지 않습니다. 라디오를 켜거나 텔레비전은 켤 테지만, 시집을 펼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조용히 자취를 감춥니다. 시골에 아이들이 없어서 조용하지 않습니다. 시골에 노래가 없기에 조용합니다. 시골은 풀이 죽고 노래가 멀어지면서 고요할 뿐입니다. 4347.8.2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21 | 122 | 123 | 124 | 12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