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속의 불 시작시인선 80
이대흠 지음 / 천년의시작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7



시와 역사책

― 물 속의 불

 이대흠 글

 천년의시작 펴냄, 2007.1.30.



  나무는 나무도감에 없습니다. 나무는 숲에 있습니다. 풀은 식물도감에 없습니다. 풀은 들에 있습니다. 사랑은 책이나 영화에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들 가슴에 있습니다. 역사는 역사책이나 대학교에 없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우리가 짓는 삶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나무와 풀과 사랑과 역사를 책이나 도감이나 영화나 신문이나 학교 같은 데에서만 찾기 일쑤입니다. 나무를 찾으려고 숲에 가는 사람이 드물고, 풀을 사귀려고 들을 가꾸는 사람이 드물며, 사랑을 일구려고 마음을 가다듬는 사람이 드뭅니다.


  책이나 영화를 본대서 사랑을 알지 않습니다. 여행이나 관광이나 답사를 다닌다고 해서 역사를 배우지 않습니다. 인문 강좌를 듣거나 인문 지식을 쌓는다고 해서 역사를 바로알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바로세울 때에 비로소 바로서는 역사입니다.



.. 찌시가 익어가고 / 누이와 나는 진흙을 빻아서 / 떡을 만들고 아이를 만들고 // 어머니는 장에 가셨고 ..  (모래의 금요일 3)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는 숨결은 육아책에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사랑을 가르치거나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기를 몸에 품고 마음에 담아서 열 달 동안 아끼면서 이 땅으로 나오도록 이끈 어머니 마음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젖을 물리는 손길이 사랑이고, 기저귀를 빠는 손길이 사랑이며, 젖떼기밥을 먹이고 몸을 정갈하게 씻기고 자장노래를 부르는 온갖 손길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아기를 사랑하는 넋은 바로 어머니처럼 아버지 가슴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될 사람은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는다고 해서 사랑을 익히지 못합니다. 아기를 품에 안아서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놀리면서 날마다 따사롭게 어루만지고 아낄 때에 비로소 가슴 가득 일어나는 사랑을 깨닫습니다.


  삶을 읽으면서 사랑을 알아야 하고, 삶을 가꾸면서 사랑을 지어야 합니다. 삶을 노래하면서 사랑을 나누어야 하고, 삶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 철푸덕 철푸덕 뒤척이며 / 철푸덕 철푸덕 지고 나고 / 이 나라 강이 그렇고 산이 그렇고 / 이 나라 바다도 철푸덕 철푸덕 ..  (철푸덕 철푸덕)



  이대흠 님이 빚은 시집 《물 속의 불》(천년의시작,2007)을 읽습니다. 물 속에 있는 불이란 무엇일까요. 물 속에 잠긴 불이란 무엇일까요. 물 속에서 타오르는 불이란 무엇일까요.


  이대흠 님은 싯말로 어떤 역사 한 가지를 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녁 가슴에 사랑이라는 숨결로 갈무리하는 역사를 싯말로 들려주려고 합니다.


  역사는 싯말로 노래할 수 있을까요. 역사는 싯말로 갈무리해서 이웃들과 나눌 수 있을까요. 역사는 싯말로 지어서 이 땅 아이들한테 차곡차곡 물려줄 수 있을까요.



..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 하는 사람을 보면 일 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  (동그라미)



  봄은 바람과 함께 찾아옵니다. 따사롭게 부는 바람이 겨울눈을 깨우고 들풀을 일으킵니다. 봄은 백화점이나 짧은치마에는 없습니다. 봄은 달력이나 인터넷에 없습니다. 사람들 가슴에 따순 바람을 바라는 넋이 있기에 봄은 해마다 기쁘게 찾아옵니다.


  정치권력자는 왜 우악스러운 짓을 일삼을까요? 경제 우두머리는 왜 바보스러운 짓을 자꾸 꾀할까요? 정치권력을 거머쥐면 이녁한테 무엇이 기쁠까요? 돈을 온통 긁어모으면 이녁 삶이 얼마나 빛날까요?


  군대를 앞세워 대통령이 된다 한들, 숨을 못 쉬면 바로 죽습니다. 큰돈을 앞세워 어마어마한 돈을 긁어모은다 한들, 숨을 마시지 못하면 바로 죽습니다. 기껏 쉰 해쯤 독재권력을 부린다 한들, 애써 100조 원이나 1000조 원을 주물럭거린다 한들, 맑고 싱그러운 바람은 돈으로 사들일 수 없습니다.



.. 도시를 둘러싼 산 속에는 / 귀신들이 우글거린다 머리가 텅 빈 귀신들이 / 술을 마신다 얼핏 보기에는 사람 같은 / 숲 속의 새들은 다른 하늘로 날아가고 / 피어난 꽃들은 모가지가 꺾였다 ..  (물 속의 불 6-위대한 탄생)



  봄바람이 불지 않으면 도시는 와장창 무너져야 합니다. 봄바람이 불어서 온누리를 따스하게 감싸지 않으면 도시는 그대로 무너져야 합니다. 봄이 오지 않으면 시골에서 아무것도 못 심고 아무것도 못 거두겠지요.


  한 해라도 봄이 없다면 시골뿐 아니라 도시도 무너집니다. 한 해라도 겨울이 없다면, 여름과 가을이 없다면, 지구별 사람들은 모조리 죽어야 합니다.


  역사란 무엇이고, 문화와 예술이란 무엇이며, 경제와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읽어야 하며,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역사책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하고,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우리가 이야기할 역사는 어떤 숨결이어야 할까요.



..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발바닥에 / 입을 맞추라 붉은 혀로 / 그가 살아온 내력에 침을 묻히라 ..  (물 속의 불 3-미친 꽃)



  동그란 지구별은 둥글게 돕니다. 동그란 지구별을 둥근 해가 비춥니다. 지구별은 스스로 둥글게 돌면서 둥근 해 둘레를 또 둥글게 돕니다. 풀과 나무가 베푸는 열매는 으레 둥글고, 어버이는 아이한테 둥근 마음을 나누어 줍니다. 아이들은 서로 둥글게 어우러지고, 둥글둥글 활짝 웃습니다.


  시인을 낳은 시골 어머니는 언제나 둥글둥글 노래하듯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시인을 낳은 시골 어머니는 시를 쓴 적도 읽은 적도 없으리라 느끼는데, 시인을 낳은 시골 어머니는 역사책이나 문학책에 이녁 이름을 올리지 못할 테지만, 시를 쓰고 역사를 말할 줄 아는 아이를 따사롭게 돌보면서 사랑했습니다.


  시를 낳는 힘이 어머니한테 있습니다. 역사를 적는 손길이 어머니한테서 태어납니다. 시가 노래로 거듭나는 숨결이 바람을 타고 어머니 가슴으로 찾아듭니다. 역사를 노래처럼 부르면서 이야기꽃으로 피울 수 있는 사람은 봄바람을 마시면서 가슴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4348.3.30.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닌의 노래 문학.판 시 12
김정환 지음 / 열림원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6



시와 발길질

― 레닌의 노래

 김정환 글

 열림원 펴냄, 2006.9.18.



  바람을 쐬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들길을 가로질러 면소재지로 나옵니다. 아이들은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있는 놀이터로 나와서 놀고 싶습니다. 이곳에 있는 몇 가지 놀이기구를 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이 되기를 손가락을 빨면서 기다렸습니다. 여덟 살이 된 큰아이도 다섯 살인 작은아이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안 다니기 때문에, 월요일부터 금요일 사이에는 초등학교 놀이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토요일이 되어 학교를 쉬고, 일요일이 되어 학교가 조용할 때에라야 드디어 놀이터 나들이를 합니다.



.. 2011년 4월 어느 날 봉천동 밤거리 / 인파가 자동차에 지워진다 / 사람이 사는 집도, 건물뿐이다 / 현실사회주의의 영광과 좌절, 그리고 / 멸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노래는 그렇게 한국형 천민자본주의의 / 변두리 밤풍경 위로 부유하다가 ..  (레닌의 노래)



  두 아이는 놀이터에서 아주 개구지게 놉니다. 두 시간쯤 씩씩하게 놉니다. 우리 집 마당이나 뒤꼍에도 이런 놀이기구를 세울 수 있으면 재미있겠다고 느낍니다. 우리 집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아이들이 타고 놀 만큼 우람하면 재미있겠다고 느낍니다. 그때에는 나뭇가지에 줄을 달아 그네를 밀 수 있겠지요.


  이러구러 노는 아이들을 곁에서 지켜보다가, 초등학교 가장자리에 선 커다란 나무 앞으로 옵니다. 나무그늘이 얼마나 넓은지 헤아립니다. 나무 밑에서 춤을 추어 봅니다. 바람이 살랑 붑니다. 나무 앞에 쪼그려앉습니다. 내 새끼손톱 길이만 한 큰 개미가 기어다닙니다. 내 냄새를 맡았는지 꽤 많이 몰려듭니다.


  개미를 가만히 쳐다봅니다. 개미 꽁지가 맑습니다. 꽁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잘 살펴보면 개미 주둥이에 있는 톱니가 무척 날카롭습니다. 개미가 물 적에 그렇게 따끔한 까닭을 알 만합니다. 개미 눈을 바라보고, 여섯 발을 어떻게 놀리는지 지켜봅니다. 문득 고개를 듭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하염없이 재미있고, 나는 개미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재미있습니다.



.. KBS 강원도 속초라나 지방 방송국 여자 아나운서가 / 청년 떠난 마을 노인네들을 서울 식으로도 / 시골 식으로도 다루지 못하고 어정쩡한 방청석 / 아줌마 다루듯 아니면 학예회 부추기듯 / 시장, 도지사, 국회의원과 원로 문인들이 한데 모인 / 공식석상으로는 아무래도 얼렁뚱땅하는 / 애교도 흐드러졌다. / 관광객들은 대만족이다 ..  (산 너머 새)



  김정환 님 시집 《레닌의 노래》(열림원,2006)를 읽습니다. 김정환 님은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진 이 나라에 천민자본주의가 자꾸 판쳐서 재미없어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그래요, 옳은 말씀입니다. 이 바보스러운 나라와 정치꾼과 신문사와 이런저런 곳에 발길질을 할 만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발길질을 해 본들, 이 발길에 걷어차이는 재벌 우두머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시인이 아무리 발길질을 하더라도 정치 우두머리나 문화 우두머리나 교육 우두머리는 멀쩡합니다. 마치 하늘에 대고 하는 발길질 같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첨벙이는 발길질 같습니다.



.. 역사 따지는 사람 턱없다 그곳에는 / 농게 참게 노랑조개 모시조개도 있지만 / 그보다 생명이 태어나는 수천만 년의 광경이 있다 ..  (갯벌 새만금)



  하늘에라도 대고 발길질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헤아려 보면, 발길질을 할 까닭도, 발길질을 안 할 까닭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스스로 아름답게 살면 됩니다. 예쁜 사람들은 서로 예쁘게 어우러지면서 예쁜 마을을 일구면 됩니다.


  다른 사람을 나무라거나 탓할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꾸짖거나 손가락질할 일이 없습니다. 나무는 어느 누구도 나무라지 않아요. 풀은 어떤 사람도 꾸짖지 않습니다. 꽃은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 한 해가 진다 인간은 왜 사는가 보이지 않는 해가 / 소리도 없이 저무는데 목숨은 어떻게 이렇게 / 이어지는가 집단적인 질문이다 거룩함이다 / 인간의 불야성이 끝끝내 가닿지 못하는 어둔 밤 ..  (종로통 망년-사랑노래 8)



  우리 모두 커다란 나무 같은 마음이 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 커다란 나무 같은 사랑으로 서로 아끼고 노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 커다란 나무 같은 품으로 얼싸안고 껴안으며 쓰다듬으면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할 만하리라 느낍니다.


  손에 호미를 쥐고 텃밭을 일구어요. 손에 삽을 쥐고 밭을 갈아요. 손에 호미를 쥐고 씨앗을 심어요. 손에 삽을 쥐고 나무를 심어요.


  나무 한 그루가 우리한테도 푸른 숨결을 나누어 주고, 저 바보스러운 정치 우두머리한테도 푸른 숨결을 베풀도록 나무를 심어요. 풀씨 한 톨이 우리한테도 고운 풀꽃을 베풀고, 저 우악스러운 문화 우두머리한테도 고운 풀꽃을 베풀도록 풀씨를 심어요.



.. 그리운 사람 이리 많은 나는 행복한가 늙었는가 / 뒤늦은 누님과 누이 사이 / 온기와 쇠 사이 / 이어짐과 채워짐 사이 / 망년 중이므로 술에 취해 결국 상투적으로 / 옛날과 오늘 사이..  (쉰 살, 망년 중)



  진딧물을 사로잡은 개미가 내 앞에서 지나갑니다. 개미는 진딧물을 꽉 물고 어디론가 갑니다. 어디를 갈까요? 혼자 먹을 곳으로 갈까요, 아니면 개미집으로 갈까요?


  우리 집 아이들은 이제 제비꽃을 잘 알아봅니다. 지난해까지 우리 집 제비꽃과 우리 마을 제비꽃을 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 보렴, 얘가 제비꽃이야.” 하고 알려주었거든요. 해마다 봄이 되면 “자 보렴, 이 아이는 봄까지꽃이야, 이 아이는 별꽃이야, 이 아이는 코딱지나물꽃이야, 이 아이는 냉이꽃이야, 이 아이는 갯기름나물이야, 이 아이는 갈퀴덩굴이야, 이 아이는 비름나물이야, 이 아이는 괭이밥이야 …….” 하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이들은 즈믄 번쯤 들어도 잊습니다. 아이들한테 다시 즈믄 번쯤 노래해도 또 잊습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노래하고 거듭 이야기합니다. 언제나 새롭게 풀과 꽃과 나무를 마주하면서 가슴 가득 껴안기를 꿈꾸면서, 우리 풀과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길을 생각합니다. 4348.3.29.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참 맑은 물살 창비시선 137
곽재구 지음 / 창비 / 199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85



시와 피리

― 참 맑은 물살

 곽재구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5.11.10.



  아침저녁으로 멧새 노랫소리가 싱그럽습니다. 겨울에 듣는 멧새 노랫소리는 추위에 떠는 숨결이로구나 싶다면, 봄에 듣는 멧새 노랫소리는 산뜻하고 상큼한 숨결이로구나 싶습니다.


  이레쯤 앞서부터 우리 집 뒤꼍에서 매화꽃이 터졌고, 엊그제부터 매화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집니다. 아이들은 매화꽃잎을 손바닥 가득 주워서 입김으로 후후 날립니다. 이러더니 다시 꽃잎을 주워 손바닥에 얹어서 또 후후 날립니다.


  떨어진 꽃잎이 많으나 대롱대롱 달린 꽃잎도 많습니다. 이 꽃잎이 모두 지면 천천히 매화알이 익을 테지요.  



.. 무꽃들이 바람에 나부끼면 / 북채 잡은 손끝에서 절로 흰 나비 난다 / 가시내야 속썩는다고 봉초 말지 말아라 / 앞산 숲그늘 뻐꾹새 울음 피 쏟던 바로 그 자리 / 산벚꽃나무 한 그루 속불 지폈으니 ..  (흥타령-남동리 김생임 할아버지가 안성단 할머니에게)



  어제부터 몽실몽실 부풀던 앵두나무 겨울눈도 터집니다. 앵두나무도 나뭇잎보다 꽃송이가 먼저 터집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집 앵두나무에서 꽃송이 하나가 활짝 터지고, 꽃송이 둘이 곧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합니다.


  가까이 다가서서 앵두나무 곁에 서면, 참말 앵두내음이 납니다. 매화나무 곁에 서면 매화내음이 나지요. 살구나무 곁에 서면 살구내음이 나고, 복숭아나무 곁에 서면 복숭아내음이 나요.


  열매를 따서 먹어야 그 열매내음이 나지 않습니다. 나무에서도, 잎사귀에서도, 꽃잎에서도 똑같은 냄새가 훅 끼칩니다. 그러면, 감나무에서는 감내음이 나겠지요? 무화과나무에서는 무화과내음이 날 테고요. 참으로 모든 나무는 저마다 다른 냄새를 훅훅 끼칩니다. 바람결에 제 상그러운 냄새를 그득 담고서 봄날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 산으로 들어간 당숙의 외아들과 / 나는 국민학교 동창 / 늘 혼자 보리피리를 불던 그를 / 동네사람들은 꼭 애비 닮았노라 얘기했지 / 밀입국 십년 만에 영주권을 얻었다던가 ..  (캘리포니아는 따뜻해)



  곽재구 님 시집 《참 맑은 물살》(창작과비평사,1995)을 읽습니다. 조그맣고 조그마한 마을을 찬찬히 돌면서 누린 발자국을 싯말 하나로 갈무리한 이야기로 읽습니다. 싯말 한 마디에는 할머니 목소리가 흐르고, 할아버지 노래가 흐릅니다. 싯말 두 마디에는 뱃사람 노래가 흐르고, 다방에서 물을 파는 아가씨 노래가 흐릅니다. 골골샅샅 어디에나 마을이 있고 집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이 사람이 보금자리를 이루고, 저 섬에는 저 사람이 살림을 꾸립니다.



.. 서울 하고도 종로 한복판에 자리한 / 조계사 총무원 건물은 / 다 아시다시피 5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 1층 출입구는 교도소 철문보다 더 튼튼한 / 쇠문으로 가려 있구요 / 선방 스님들은 이 건물 안에서 목련이 피는지 / 보리수나무가 썩는지 도무지 알 길 없습니다 ..  (자목련)



  시골에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마을은 띄엄띄엄 있습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논밭도 있지만, 골짜기나 숲이나 봉오리가 있습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들길에는 들노래가 흐릅니다. 들녘에는 작은 새가 둥지를 틀어 새끼를 까고, 풀벌레가 해와 바람을 등에 업고 풀노래를 부릅니다.


  서울에는 동네가 커다랗습니다. 서울에서는 커다란 동네와 동네가 다닥다닥 맞붙기만 합니다. 동네와 동네 사이에 찻길이 널따랗게 있기는 하지만, 자동차만 지나다닐 수 있고, 딱히 노래가 없습니다. 싱싱 가로지르는 자동차는 사람이 이 땅에서 더는 두 다리로 걷지 못하게 막습니다.



.. 아침 저녁 / 방을 닦습니다 / 강바람이 쌓인 구석구석이며 / 흙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  (마음)



  시멘트를 부어서 만든 층집에도 사람이 삽니다. 층집 둘레에도 꽃밭이 있습니다. 층집 둘레에 심은 나무는 층집을 허물어 새로 만들려 할 적에 뿌리가 뽑히거나 줄기가 잘리지만,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마흔 해나 쉰 해쯤 도시에서 살아남는 나무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거리나무 목숨과 도시사람 목숨이 엇비슷합니다. 도시에서 쉰 해나 예순 해를 용케 살아남는 사람처럼, 도시에서 쉰 해나 예순 해를 용케 한길을 파며 일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거리나무는 스무 해를 씩씩하게 버티기 어렵습니다. 스무 해나 서른 해를 거리나무로 씩씩하게 버티더라도 해마가 가지치기에 몸살을 앓아요. 도시에서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씩씩하게 버티는 사람도 해마다 연봉조정이라든지 구조조정이라든지 정리해고라든지 정년퇴직을 생각하면서 끙끙 앓습니다.



.. 산으로 가는 길에 / 산나리꽃 피었다 / 사내들아 사내들아 / 남녘 사내들아 / 웃통 벗고 나오너라 / 땅덩이 같은 너의 가슴 한복판 / 꽃등 한 송이 꺾어 들고 / 산 넘어 물 건너 / 북녘땅으로 가자 ..  (북춤)



  노래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조그마한 마을에도 노래가 있지만, 커다란 도시에도 노래가 있습니다. 다만, 커다란 도시에서는 자동차 소리에 막히고, 텔레비전 소리에 스러지며, 오늘날에는 손전화 소리에 잦아들 뿐입니다.


  곽재구 님은 남녘에서 마을을 두루 돌면서 싯말을 길어올리고 싶다는 꿈을 피웠다는데, 얼마쯤 돌았을까요. 이 나라 모든 마을에서 하룻밤씩 묵었을까요. 그러면, 이 나라 도시는 동네마다 두루 돌았을까요.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도 사람이 살고, 이야기가 있으며, 노래가 있는데, 이러한 꿈과 사랑은 싯말로 어느 만큼 삭일 만할까요.



.. 어로작업 중에 해양 순시선이 다가오면 / 비닐봉지에 싼 돈봉투 하나 바다에 던진다 / 날치다! 날치가 날아오른다! / 순시선의 박경장이 뜰채로 날치를 채 올린다 / 점에 백원짜리 고스톱 어울려 치며 / 파도보다 작은 섬 꽃섬 간다 ..  (꽃섬 사람들)



  하룻밤을 머무는 곳에서는 하룻밤만 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이틀을 지내는 곳에서는 이틀만 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열흘을 묵는 곳에서는 열흘만 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하룻밤 묵은 이야기라서 열흘 묵은 이야기보다 덜떨어지지 않습니다. 이틀을 지낸 이야기라서 이태를 묵은 이야기보다 모자라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이야기이든, 우리가 마음을 붙여서 사랑으로 마주한다면 모두 아름답게 태어납니다. 시집 《참 맑은 물살》이 들려주는 ‘참 맑은 사람들’ 이야기는 이 나라 어디에도 고요하게 흐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저 먼 나라가 아닌,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은 저 먼 데에 있지 않고, 바로 내 둘레에 있습니다. 네가 아름답고 내가 아름답습니다. 네가 사랑스럽고 내가 사랑스럽습니다. 어디에서나 피리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삶노래가 태어납니다. 4348.3.27.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창비시선 180
노향림 지음 / 창비 / 199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84



시와 제비집

―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노향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8.10.24.



  아이도 어른처럼 발냄새가 납니다. 어쩌면 아이한테서는 어른한테서보다 발냄새가 더 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일하거나 쉬기도 하지만, 아이는 한자리에 가만히 앉거나 쉬는 일이 없거든요. 학교와 학원만 맴돌아야 하는 아이라면 오늘날 수많은 어른처럼 발에 땀이 날 틈이 없을 테지만, 개구지게 뛰놀 줄 알 뿐 아니라 언제나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은 발냄새가 퐁퐁 납니다.



..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던 / 김 스테파노가 운명했다 ..  (창)



  저녁이 되어 아이들 옷을 갈아입힙니다. 아이들이 많이 어릴 적에는 옷을 모두 어버이가 벗기고 입혀야 하지만, 아이들이 차츰 자라면서, 이제 옷을 벗거나 입는 일은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많이 컸어도 손씻기와 발씻기를 혼자 하도록 맡기지 못합니다. 큰아이는 혼자 할 수 있을 테지만, 작은아이는 어버이가 해 주어야 합니다.


  작은아이만 손발을 씻길 수 있지만, 큰아이가 서운해 할 수 있어요. 아니, 큰아이는 딱히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하고 싶어 하기에, 큰아이는 혼자 하도록 할 수 있는데, 그래도 두 아이를 함께 자리에 앉히고 손발을 뻗도록 해서, 대야에 발을 담그라고 말합니다. 이런 뒤 나는 두 아이 앞에 쪼그려앉아서 발을 비누로 문지르고 발가락 사이까지 구석구석 씻습니다.


  아이들은 발가락이 간지럽다면서 하하 낄낄 웃습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이 아이들만 할 적에 내 어머니가 내 발을 씻기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와 형 발을 씻길 적에 나와 형이 짓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기운을 차리셨으리라 느낍니다.



.. 야윌수록 / 맑은 쟁쟁한 악기 소리들을 / 내는 가을풀들은 혼자서 하루 종일 / 흔들린다 ..  (풀잎 일기 1)



  옷을 갈아입고 이를 닦으며 손발과 낯을 씻은 아이들은 개운합니다. 물도 마시고 쉬도 누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앞서 마저 놉니다. 이제 마지막 힘까지 쏟아부어서 놀고 나면 비로소 까무룩 잠들 테지요. 길면서 짧고, 짧으면서 긴 하루가 저뭅니다. 새끼 제비 같은 아이들과 지내는 하루는 밤에 닫고 아침에 엽니다. 어미 제비처럼 보내는 하루는 새벽 일찍 열고 밤 늦게 닫습니다. 올해에도 봄이 새로 열렸으니, 곧 우리 집 처마 밑에 어른 제비가 찾아올 테고, 어른 제비는 알을 까서 씩씩하게 새끼 제비를 돌보겠지요.



.. 해묵은 갈대들이 / 물속을 무시로 드나들며 / 무릎을 꺾고 / 또 꺾었다 ..  (물의 나라 1)



  노향림 님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창작과비평사,1998)을 읽습니다. 노향림 님은 바다와 섬을 그리는 노래를 꾸준히 쓰셨구나 싶습니다. 노향림 님이 쓴 시 가운데 ‘압해도’ 이야기는 압해섬 한쪽에 싯돌로 섰다고도 합니다.



.. 텅 빈 주차장 앞길로 / 강바람이 불어온다. / 바람과 나는 늘 아는 이 길로만 다닌다. // 바람이 몇번씩 몸부림칠 때마다 / 수양버드나무 메마른 가지 사이로 불빛 몇송이 / 흐린 눈을 숨기고 있다가 납작 엎드린다 ..  (밤길)



  신안군에 있는 압해섬과 여러 섬을 찾아가던 때를 가만히 그립니다. 나는 신안군 여러 섬을 다닐 적에 다른 무엇보다 ‘제비집’을 보았습니다. 아니, 어디를 가든 제비집이 잘 보였고, 제비 날갯짓을 쉽게 마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제비집이나 제비 날갯짓을 보았을까요? 괜히 나만 제비 날갯짓이랑 제비집을 눈여겨보았을까요?


  노향림 님은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을 노래로 부르는데, 오늘날 적잖은 섬이나 마을에 제비가 찾아가지 않습니다. 제비뿐 아니라 다른 새도 찾아가지 않습니다. 꾀꼬리가 찾아가지 않는 섬과 마을이 퍽 늘었습니다. 종달새를 만날 수 있는 섬과 마을도 많이 줄었습니다. 뜸부기는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청둥오리가 내려앉아서 다리쉼을 하는 섬이나 마을은 몇 군데가 될까요?



.. 경비행기들이 일직선으로 사라진 하늘가에 / 스사스사 아으아으 쇳소리를 내며 / 숨차게 주저앉는 가을 / 그들은 모두 어디로 쉬엄쉬엄 흩어져갔을까 / 담그늘 밑에 까부라져 뒹구는 수레국화 몇점 ..  (가을 서정)



  새마을운동이 휘몰아치던 때부터 제비집을 마구 허물었습니다. 지난날에는 사람들이 제비집을 함부로 허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옛날 사람들은 제비집뿐 아니라 참새집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새가 짓는 둥지와 보금자리를 섣불리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어요. 아이들이 더러 새알을 훔쳐서 먹더라도 새집을 다치게 하지는 않아요. 이러면서 사람들은 ‘둥지’와 ‘보금자리’라는 낱말을 ‘사람이 살뜰히 지내는 집’을 가리키는 이름으로도 썼습니다.


  새마을운동 깃발은 아직도 골골샅샅 나부낍니다. 새마을운동 깃발이 나부끼는 곳에는 농약과 비료와 비닐이 춤을 춥니다. 앞으로 이 나라에 어떤 새가 찾아들 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앞으로 제비는 바다를 가로질러 한국으로 애써 찾아올는지, 아니면 더는 안 찾아올는지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4348.3.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문학과지성 시인선 178
김신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4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3



시와 이곳에서

―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김신영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96.4.25.



  나는 늘 이곳에서 바람을 마십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도 마시고, 한들한들 부는 바람도 마십니다. 따사롭게 부는 바람도 마시며, 포근하게 부는 바람도 마셔요. 때로는 차갑게 부는 바람을 마시고, 어느 날에는 스산하게 부는 바람을 마십니다.


  어떠한 바람이든 기꺼이 마십니다. 어떤 바람이 불든 씩씩하게 마십니다. 어떻게 부는 바람이라 하더라도 고맙게 마십니다.


  왜냐하면, 나는 바람을 마셔야 살 수 있는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나한테 밥이나 소금이나 물이 없어도 살 수 있으나, 나한테 바람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나는 밥을 달포쯤 끊거나 소금이나 물을 열흘이건 보름이건 입에도 못 댈 수 있습니다만, 바람 한 줄기는 1초라도 끊을 수 없습니다.



.. 여기 황폐한 문지방이며 무너진 흙담을 / 일으키어 내 출렁이는 바닷과 별들과 / 유성이 되어도 좋은 밤을 맞고 싶다 ..  (가벼운 섬 1)



  꽃이 핀 나무 곁에 서서 꽃바람을 마십니다. 꽃바람을 마시면서 생각합니다. 꽃바람이란 이처럼 향긋하고 놀랍구나. 꽃바람을 마시면서 나뭇줄기를 쓰다듬습니다. 네가 나한테 이렇게 놀라우면서 멋진 바람을 베풀어 주니, 너는 나한테 아름다운 님이로구나.


  꽃바람을 나누어 준 나무한테 입을 맞춥니다. 아직 꽃몽우리가 터지지 않은 나무 옆에도 서서 나뭇줄기를 살살 어루만지다가 입을 맞춥니다. 어떤 나무이든 모두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거든요.



.. 매일 내분이 이는 종로 오가 / 기독교연합회관 십층에서 나는 책을 만든다고 / 죽을 쑤는데 옆건물 기독농민회에서 머리에 붉은 두건 / 두른 전대협 예수들 연좌농성, 퇴근 시간 다되도록 일렁이고 ..  (개방 압력)



  김신영 님이 선보인 시집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문학과지성사,1996)을 읽습니다. 김신영 님이 선보인 시집에는 김신영 님이 누린 삶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김신영 님이 지은 웃음과 눈물이 드러나고, 김신영 님이 바라본 이웃과 동무가 드러납니다.


  웃음과 눈물은 좋은 웃음이나 나쁜 눈물이 아닙니다. 그저 웃음과 눈물입니다. 이웃과 동무는 좋은 이웃이나 나쁜 동무가 아닙니다. 모두 그대로 이웃과 동무입니다.


  좋은 시가 있을까요? 나쁜 시가 있을까요? 독재부역을 하지 않았으나 맹숭맹숭한 시라면, 이러한 시는 좋은 시일까요? 맛깔스럽게 빚었으나 독재부역을 한 시라면, 이러한 시는 나쁜 시일까요?



.. 소풍 가는 학생들 쏟아져내리고 / 지하철 환승역 나갈 출구가 없다 // 역은 최상의 포화 상태, 긴 줄을 세우는 거대한 / 공포의 특급 놀이시설이 된다 아무도 나갈 수 없다 / 역무원은 목이 쉰 호루라기를 쉭쉭 불어대고 ..  (환승역에서)



  이곳에서 시가 태어납니다.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서 시가 태어납니다. 흔히들, 사진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찍는다고 말하는데, 사진만 바로 오늘 이곳에서 찍지 않습니다. 시도 바로 오늘 이곳에서 태어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글쓴이 스스로 겪고 느끼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아파하고 한숨쉬고 노래하고 춤추고 짝짓기를 한 모든 이야기가 시라는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 아산만까지 따라온 詩集은 / 산보다 바다보다 넓어 보였다 ..  (復原)



  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사진을 읽을 줄 압니다. 사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시를 읽을 줄 압니다. 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만화를 읽을 줄 압니다. 만화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시를 읽을 줄 압니다. 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동화를 읽을 줄 압니다. 동화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시를 읽을 줄 압니다.


  그러니까, 시는 읽되 사진이나 만화나 동화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시읽기’를 겉훑기로만 한다는 뜻입니다. 사진이나 만화나 동화를 읽을 줄 아는 넋이나 마음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시를 읽으면서 아름답게 사랑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 새는 구름을 부르며 하늘에 오르고, / 나는 노래를 부르며 꿈에 오른다 ..  (마른 종자 활동 장치)



  문학평론을 쓰는 이들은 사진을 찍을까요? 문학비평을 하는 이들은 만화책을 읽을까요? 문학평론을 쓰는 이들은 아이를 낳아 말을 가르칠까요? 문학비평을 하는 이들은 갓난쟁이한테 젖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갈거나 하면서 아이와 함께 삶을 지을까요?


  우리는 평론이나 비평을 하기 앞서 삶을 먼저 지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를 쓰거나 읽기 앞서 삶을 먼저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이 없이는 아무런 평론이나 비평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삶을 모른다면 어떠한 시도 쓸 수 없습니다. 삶이 없다면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삶을 모른다면 헛소리일 뿐입니다.



.. 고속도로에 들어선다 / 길은 많지만 / 나는 고속도로를 탄다 / 통행료를 지불하고서 /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권한 누린다 / 신호등에 걸릴 염려 없는 곳 /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되는 곳 ..  (고속도로)



  좋은 삶은 없습니다. 좋은 시는 없습니다. 그저 삶이 있고, 그예 시가 있습니다. 나쁜 삶은 없습니다. 나쁜 시는 없습니다. 그대로 삶이요, 고스란히 시입니다.


  이곳에서 시가 태어나고, 이곳에서 시를 읽습니다. 이곳에서 시를 노래하고, 이곳에서 시를 사랑합니다. 4348.3.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