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속에 사는 악어 사계절 저학년문고 12
위기철 지음, 안미영 그림 / 사계절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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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8



잔소리와 사랑 사이에서

― 신발 속에 사는 악어

 위기철 글

 안미영 그림

 사계절 펴냄, 1999.4.3.



  잔소리는 이렇게 꾸민들 저렇게 덧씌운들 언제나 잔소리입니다.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잔소리를 해도 잔소리는 늘 잔소리입니다. 그래서, 잔소리를 요렇게 꾸미거나 조렇게 꾸미더라도,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잔소리를 들을 뿐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안 꾸미거나 저렇게 안 덧씌워도 늘 사랑입니다. 딱히 웃음을 짓지 않더라도 사랑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굳이 꾸미지 않습니다. 사랑은 애써 덧씌우지 않습니다. 사랑을 듣는 사람은 한결같이 사랑을 듣습니다.



.. 할머니도 늙고 / 호랑이도 늙고 /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는 / 길고 긴 가래떡 ..  (가래떡)



  위기철 님이 쓴 동시 《신발 속에 사는 악어》(사계절,1999)를 읽습니다. 위기철 님은 ‘잔소리’를 여러모로 꾸미고 덧입히면서 아이한테 들려주려고 했답니다. 아이한테 늘 잔소리만 늘어놓는 이녁 모습을 돌아보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다는군요.


  아이한테 들려주는 말을 떠올리자면 아무 말이나 들려줄 수 없습니다. 어버이가 거칠게 말하면 아이도 거칠게 말해요. 어버이가 잔소리쟁이라면 아이도 잔소리쟁이가 될 테지요. 그러니, 위기철 님은 이녁 잔소리에 이야기옷을 입힙니다. 투덜투덜거리는 잔소리가 아니라, 상냥하고 재미나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되기를 빕니다.



..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 세모들만 살고 있는 세모 나라에 / 세모 아가씨와 세모 총각이 결혼해서 / 네모 부부가 되었대 ..  (세모 나라가 사라진 까닭)



  이야기라는 옷을 입은 잔소리는 새롭습니다. 아이는 여느 때 듣던 잔소리가 아니니 귀가 안 따갑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깨닫지요. 이 이야기도 알고 보면 ‘잔소리’인 줄 깨달아요. 다시 말하자면, 처음부터 이야기로 짓지 않고, 잔소리에 옷을 입힐 뿐인 말은 ‘새로운 잔소리’입니다.


  학교에서는 ‘글짓기’라는 말을 안 쓰고 ‘글쓰기’라는 말을 쓰지만, 정작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가꾸면서 글을 쓰도록 이끌거나 북돋우지 못합니다. 이름은 ‘글쓰기’로 바꾸더라도 낡은 교육 얼거리는 그대로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해마다 입시제도를 고친다느니 무엇을 한다느니 법석을 떨지만, 막상 입시지옥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껍데기를 바꾼다고 하면 껍데기가 바뀔 뿐, 알맹이가 바뀌지 않습니다. 알맹이를 바꾸어야 비로소 알맹이가 바뀝니다. 입시지옥을 없애야 아이들이 지옥에서 풀려납니다. 입시지옥은 그대로 두면서, 시험제도만 바꾼다 한들 아이들이 지옥에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 너는 참 좋겠다. // 엄마가 비싼 옷을 안 입히니 / 모래 장난도 실컷 할 수 있거, // 집에 피아노가 없으니 / 피아노 연습도 안 하겠구나 ..  (누가 더 행복할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지어서 아이한테 들려주어야, 아이도 어른도 즐거울까요? 우리는 아이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서로 즐거우면서 기쁘게 웃을까요?


  아주 쉽습니다. 사랑을 이야기로 지어서 들려주면 됩니다. 꿈을 이야기로 지어서 들려주면 됩니다. 사랑을 이야기로 지으면 언제나 사랑입니다. 꿈을 이야기로 지으면 언제나 꿈입니다. 그러니까, 잔소리를 이야기로 지으니 이러한 이야기는 언제나 잔소리일 뿐이에요. 겉보기로는 맛깔스럽거나 구성지거나 재미나 보이지만, 가만히 읽고 보면, 남는 것은 오로지 잔소리입니다.


  동시와 동화를 쓰는 어른은 우리 스스로 무엇을 쓰는지 제대로 생각하거나 살펴야 합니다. 아이한테 어떤 마음밥을 먹이고 싶은지 올바로 헤아리거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잔소리밥을 먹으면 기뻐할까요? 아이들이 사랑밥을 먹거나 꿈밥을 먹을 적에 기뻐하지 않을까요?



.. 네가 잠이 들면 / 세상도 모두 잠이 든단다. / 텔레비전은 하품을 하고 / 시계는 코를 골고 / 길 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 말하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 쿨쿨 잠을 잔단다 ..  (잠자기 싫을 때 읽어 봐)



  말재주를 부리는 글은 말재주입니다. 말재주는 동시가 아닙니다. 말장난을 치는 글은 말장난입니다. 말장난은 동시가 아닙니다. 재미나게 이야기를 엮을 줄 아는 위기철 님인 만큼, 잔소리에 옷을 입히려는 몸짓이 아닌, 아이와 함께 사랑으로 짓는 삶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엮는다면 아주 아름다울 만하리라 봅니다. 왜 구태여 잔소리를 동시로 써야 할까요? 아이한테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뜻이 없기에 잔소리를 가볍게 이야기로 꾸미고 말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아이하고 더 신나게 뛰놀면서 까르르 웃고 노래하려는 삶이 못 되기에 그만 잔소리에 살그마니 손쉽게 덧옷을 입히고 말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 옛날 옛날 어느 마을에 / 눈물 대신 꿀물이 나오는 / 그런 아가씨가 살고 있었대. // 아가씨가 울 때마다 / 들판에 나비랑 꿀벌들이 날아와 / 꿀을 빨아먹기 때문에 / 아가씨는 슬퍼도 울 수가 없었지 ..  (울고 있을 때 읽어 봐)



  아이와 함께 밥을 지어요. 아이한테 이것저것 차근차근 맡기면서 함께 밥을 지어요. 그러면 아이는 눈을 똘망똘망 밝히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고픈 줄조차 잊으면서 밥짓기에 온마음을 쏟습니다. 아이와 함께 손으로 척척 비벼서 걸레를 빨고는, 노래하면서 온 집안을 닦아 보셔요. 아이는 눈빛을 환하게 밝히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팔 아픈 줄조차 잊으면서 걸레질에 온힘을 기울입니다.


  삶을 사랑하면서 노래하는 시 한 줄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삶을 꿈꾸면서 짓는 웃음 한 자락은 늘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우리 어버이가 우리한테 물려준 사랑과 꿈을, 오늘 어른으로 이 땅에 선 우리들이 우리 아이들한테 즐겁고 기쁘게 다시 물려줄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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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찾아서 창비시선 207
정희성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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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9



삶을 찾아서 사랑을 노래하는

― 詩를 찾아서

 정희성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2001.6.5.



  하늘이 날마다 선물을 베풉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이 날마다 선물을 합니다. 자, 나를 바라보면서 웃으렴 하고 손짓하는 하늘이 날마다 곱게 선물을 나누어 줍니다.


  하늘은 무엇을 선물할까요? 빙그레 웃음짓는 이야기를 선물합니다. 하늘은 왜 선물을 할까요?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하루를 열면, 이 따사로운 기운이 온누리를 아름답게 어루만지기 때문입니다.



..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 덜렁 집 한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 다섯살 배기 딸 민지 /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  (민지의 꽃)



  하늘이 활짝 열리는 곳을 보금자리로 삼습니다. 하늘이 활짝 열리는 곳을 보금자리로 삼는 사람이 하나둘 모여 마을을 이룹니다. 마을에 있는 집은 서로서로 하늘을 나눕니다. 함께 누립니다. 어느 집 한 채만 높다라니 올리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만 차지해야 하는 하늘이 아닙니다. 따순 볕은 골고루 받아야 합니다. 어느 한 집이 높다라니 서면, 그만 이웃은 겨울에 그늘이 지면서 추워요. 몇몇 집이 서로 겨루듯이 높이 오르려 하면, 그만 다른 이웃은 여름에도 겨울에도 싱그러운 바람과 고운 햇볕을 제대로 못 누려요.


  예부터 시골이든 도시이든 옹기종기 모여서 집을 지었습니다. 다 함께 햇볕과 바람을 나누었고, 하늘도 서로 사이좋게 누렸습니다. 내가 즐거울 적에 너도 즐거우며, 네가 즐거울 적에 나도 즐거웠어요. 그런데 차츰차츰 달라지는 사회에서는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법에 따라’ 집을 짓습니다. 너도 나도 집을 높이 올리려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웃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 발표 안된 시 두 편만 /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 부자로 살고 싶어서 / 발표도 안한다 ..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정희성 님이 쓴 시를 단출하게 묶은 《詩를 찾아서》(창작과비평사,2001)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새파란 겨울하늘을 바라보면서 시를 읽습니다. 새파란 겨울하늘을 함께 누리는 풀과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시를 읊습니다.


  새가 살 수 있는 곳이면 사람도 살 수 있습니다. 새가 살 수 없는 곳이면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제비가 집을 짓는 자리라면 사람도 보금자리를 틀 만합니다. 제비가 둥지를 틀지 않는 자리라면 사람도 보금자리를 가꿀 만하지 않습니다.



.. 한 처음 말이 있었네 / 채 눈뜨지 못한 / 솜털 돋은 생명을 / 가슴 속에서 불러내네 // 사랑해 ..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이제 서울에는 제비가 찾아가지 않습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도 제비를 굳이 바라지 않고 기다리지 않으며 생각조차 않습니다. 부산이나 대구 같은 큰도시는 어떠한가요? 광주나 인천이나 대전 같은 큰도시는 어떠한가요? 제비를 꿈꾸는 아이가 있는가요? 꾀꼬리나 종달새를 동네에서 보고 싶은 아이가 있나요? 두루미나 고니가 내려앉는 커다란 나무가 동네에 아름답게 서기를 바라는 아이가 있나요?



.. 어디 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 멀리는 못 가고 /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  (同年一行)



  새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시를 쓰지 못합니다.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귀여겨듣지 못하는 사람은 시를 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새는 늘 사랑으로 노래를 하기 때문입니다. 새는 언제나 사랑으로 둥지를 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은 서로 사랑하면서 꿈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마을살이와 동네살이를 북돋우지 못할 적에는, 겉모습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닙니다.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두레와 품앗이로 마을과 동네에 고운 사랑이 바람처럼 흐르도록 하지 못한다면, 몸차림은 사람일는지 모르나 사람이 아닙니다.


  새마을운동은 시골을 망가뜨렸습니다. 새마을운동이 불어닥친 뒤부터 사람들은 시골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시골사람이 시골을 사랑하도록 이끌지 않은 새마을운동은, 도시로 떠난 사람들한테까지 도시를 도시답게 가꾸면서 사랑하도록 이끌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살든 도시에서 살든, 새마을운동은 사람들 가슴에 있던 사랑과 꿈을 끔찍하게 짓밟았습니다. 사랑과 꿈이 짓밟혀 울부짖던 사람들은 그만 돈에 휘둘리고 졸업장에 휩쓸리면서 이웃을 잊고 그저 다투고 싸우며 악다구니가 됩니다.



..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번을 외우라고 했다 ..  (첫 고백)



  왜 입시지옥을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일까요? 왜 우리 스스로 동무를 ‘맞수’로 삼아서 밟고 올라서려고 할까요? 내가 서울에 있는 손꼽히는 대학교에 붙으려면 너는 밑바닥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네가 서울에 있는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려면 나는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져야 합니다.


  함께 가는 길이 아니라 ‘나 혼자’ 가려는 길입니다. 서로 어깨를 겯으면서 웃고 노래하는 길이 아니라 ‘나 혼자’ 돈과 이름과 힘을 몽땅 거머쥐려는 길입니다.


  입시지옥 수렁에 빠진 아이들은 하늘을 안 봅니다. 낮하늘도 밤하늘도 안 봅니다. 오직 교과서와 문제집만 봅니다. 어버이 얼굴이나 동무 얼굴이나 이웃 얼굴은 바라볼 겨를이 없고, 그저 시험지와 참고서를 볼 뿐입니다.


  이런 바보스러운 나라에서는 하늘이 하늘빛을 잃고, 사람은 사람빛을 잃으니, 시를 쓸 수도 읽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바보스럽게 악다구니 다툼질을 벌이기에, 이러한 곳에서는 제비도 꾀꼬리도 종달새도 두루미도 깃들지 못합니다. 새도 못 살고 사람도 못 살아, 그만 몽땅 죽음 구렁텅이로 내달리는 꼴입니다.


  시를 찾는 길은 삶을 찾는 길입니다. 삶을 찾는 길은 사랑을 찾는 길입니다. 사랑을 찾는 길은, 내가 나다우면서 사람답게 아름다우려는 길이요, 사람과 이웃인 새와 풀벌레와 들짐승이 모두 숲에서 푸른 바람을 마시는 길입니다. 4348.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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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동에 내리는 비 문학과지성 시인선 74
윤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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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4



시와 술잔

― 본동에 내리는 비

 윤중호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88.11.15.



  꽃밭을 키우는 사람은 꽃밭에 물을 줍니다. 텃밭을 일구는 사람은 텃밭에 물을 줍니다. 꽃밭이나 텃밭에는 물을 주지 않으면 꽃이나 남새가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사람이 따로 심었기 때문에 사람이 돌보아야 할 수 있지만, 꽃씨나 풀씨를 심으면서 이 아이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는가 하는 이야기를 씨앗한테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나무에 물을 주는 일이란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비료를 줄 일이란 없습니다. 냉이나 민들레한테 물을 주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나팔꽃이나 해바라기도 사람이 따로 물을 안 주어도 씩씩하게 자랍니다. 왜냐하면 해가 지고 밤이 되어 차가운 기운이 감돌다가 새벽이 찾아와서 날이 밝을 무렵 이슬이 맺혀 풀잎과 줄기와 꽃망울과 뿌리는 촉촉하게 젖기 때문입니다. 꽃과 풀과 나무가 마시는 바람에는 언제나 촉촉한 기운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 헐리운 집 담장 근처에, 샛노란 / 돼지감자꽃이 피었읍니다 ..  (본동일기·하나)



  아기는 어머니젖을 먹고, 아이는 어버이가 차린 밥을 먹는데, 차츰 자라서 어느 나이가 되면 씩씩하게 홀로 서서 밥을 손수 짓습니다. 열다섯 나이나 스물 나이라면 손수 밥을 지을 줄 알아야 옳습니다. 서른 나이나 마흔 나이가 되어서도 남이 차리는 밥만 받는다면 철이 안 든 어리광쟁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많은 사내는 철이 안 드는데다가 어리광쟁이입니다. 부엌일이 아닌 밥짓기와 삶짓기를 못하는 사내가 아주 많습니다. 손에 물을 어떻게 묻혀야 하는지 모르는 사내가 매우 많습니다. 갓난쟁이 똥오줌을 치울 줄 모르는데다가, 아이를 씻길 줄 모르는 사내가 무척 많습니다.


  밥을 손수 짓지 못한다면, 몸을 스스로 어떻게 건사할까요. 삶을 손수 짓지 않는다면, 마음을 스스로 어떻게 다스릴까요. 사내는 자꾸 바보스럽고 철부지인 길을 가면서, 집 바깥이나 마을 바깥에서 맴돕니다. 사회에서 이름을 얻거나 돈을 벌거나 힘을 거머쥘는지 모르나, 이름과 돈과 힘하고 사뉘는 사내는 삶이나 사랑하고는 등지고 맙니다.



.. 나는 비탈에 산다 / 사철 응달인 비탈이라, 봄은 더디 오지만 / 겨울 소식은 언제나 일등으로 오고, / 몰랐지? 먹어봐야 입만 아리지만 / 여기서는 돼지감자꽃도 핀다 ..  (본동일기·열)



  오늘날 거의 모든 사내는 손수 술을 빚지 않습니다. 집 바깥에서 돈을 벌어 술을 사다 마십니다. 밥을 손수 짓지 못하는 사내인 터라, 술을 손수 빚을 줄 모를밖에 없습니다.


  손수 밥을 짓는 사람은 밥알 하나 허투루 다루지 않습니다. 손수 술을 빚는 사람은 술잔을 함부로 돌리거나 들이붓지 않습니다. 손수 삶을 짓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사랑과 꿈을 노래합니다.


  그러니까, 사내는 밥도 술도 삶도 손수 일구지 않으면서 언제나 철이 없습니다. 언제나 철이 없는 채 어리광을 부리고, 이런 어리광쟁이를 너무 많은 가시내가 뒷바라지를 합니다. 바보스럽고 철이 없는 사내를 차마 내치지 못합니다. 사내는 가시내가 얼마나 따사롭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는지를 하나도 못 깨닫습니다.



.. 아무도, 비껴서는 바다의 울음 소리를 / 미움이라 할 수 없으리라 / 말장 뗏목을 띄우며, 또 바람이 불고 / 온몸으로 찬 바람을 안은 채, 산비탈마다 / 겨울보리가 새파랗다 ..  (안면도·하나)



  윤중호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본동에 내리는 비》(문학과지성사,1988)를 새삼스레 꺼내어 다시 읽습니다. 이제 이 땅을 떠나고 없는 윤중호 님인데, 이녁이 아직 팔팔하게 살아서 기운차게 술잔을 들이붓던 즈음 두세 차례 마주친 예전 모습을 아련하게 그립니다. 밤새워 술잔을 들이붓던 윤중호 님은 무슨 까닭으로 그토록 술잔을 들이부어야 했을까요. 술잔을 빌어서 어떤 아픔을 달래고, 술잔을 빌어서 어떤 그리움을 씻어야 했을까요.



.. 참 알 수가 없다 / 서울이란 동네를. / 다들 참 용하게 살아가지만 / 어디를 둘러보아도 / 마른 등허리만 내다보인다 ..  (길을 익히며)



  몸이 아픈 사람은 아무것도 못 먹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몸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죽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 이웃이 있으나, 아픈 사람은 아무것도 안 먹고 몸을 가만히 지켜볼 때에 비로소 몸에 기운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밥이나 죽이 아닌, 바람을 제대로 마시고 햇볕을 제대로 먹어야 합니다. 몸이 아픈데에도 서울이나 도시에 남아서 이름이나 돈이나 힘을 붙잡으려 한다면, 몸을 그예 망가뜨리려는 꼴이 됩니다.


  들꽃이나 들풀처럼 바람과 햇볕으로 하루를 지낼 때에 아픈 기운이 사그라듭니다. 숲에 우거진 나무처럼 오직 바람과 햇볕을 벗삼아 하루를 누릴 때에 아픈 곳이 사라집니다.


  바람결에 묻어나는 꽃가루를 마셔요. 바람결에 깃든 푸른 숨결을 마셔요. 바람결에 서리는 햇살 한 조각을 마셔요. 바람결에 감기는 흙내와 풀내를 마셔요.



.. 아직도 금강은 낮게만 흘러 / 흐르고 또 흘러, 하얀 물싸리나무꽃, 아직 / 한 묶음씩 터뜨리는지, / 그걸 보러왔어, 정말이다 ..  (어떤 이별을 위하여·둘)



  서울사람은 모두 아픈 사람입니다. 나는 서울에서 아홉 해를 살아 보았는데, 서울에서 지낸 아홉 해는 날마다 아픈 삶이었다고 떠오릅니다. 아프고 아파서 술잔에 기대든 책에 기대든 동무한테 기대든 하면서 하루하루 버티었구나 싶습니다.


  참말 그렇지요. 서울에는 지하철은 있되 꽃이 없습니다. 서울에는 버스가 많되 들이 없습니다. 서울에는 건물과 가게가 많되 숲이 없습니다. 서울에는 문화와 문명이 넘치되 사랑과 꿈이 없습니다. 서울에는 찻길과 자동차가 물결치되 하늘과 별과 해가 없습니다.



.. 원래 시원스레 웃고 난 다음에는 / 꼭 감기를 앓기로 했다. / 이 땅에 살면 웃는 것도 죄, / 이 땅에 살면 앓는 것도 죄, / 이 딸에 살면 사는 것도 죄, / 죄, 죄, 죄, 그 많은 죄들이 / 내 대신 웃기 시작했단 말이지, 그날 저녁엔 / 히히히 ..  (저녁 편지)



  새근새근 자는 아이들 머리맡에 앉아서 이불깃을 여밉니다.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가 이불깃을 여미는 손길을 잠결에도 또렷하게 느낍니다. 이를 갈다가도 잠꼬대를 하다가도 가위에 눌리다가도 이불을 걷어차다가도 뒹굴뒹굴 구르다가도, 이불깃을 여미는 손길이 이마에 닿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 어느새 길게 하품을 하면서 아주 느긋하며 아늑한 낯빛이 됩니다.


  술 한 잔과 함께 시를 노래하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싶던 윤중호 님이 머물다 떠난 자리에 시골바람 한 줄기를 보냅니다. 4347.12.3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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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12-30 09:08   좋아요 0 | URL
옮겨주신 구절을 소리내 읽어보니 듣기 좋습니다.
벌써 올 한해도 다가네요.
올한해도 따뜻한 소식 전해주셔서 즐거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숲노래 2014-12-30 09:50   좋아요 0 | URL
그저좋은휘모리 님한테도
아름다운 새해 기운과 빛살이
두루 퍼지기를 빌어요.
새해에도 아름다운 책에 깃든
아름다운 이야기를 솔솔 나누어 주셔요~ 고맙습니다 ^^
 
우두커니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2
박형권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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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8



겨울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

― 우두커니

 박형권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9.9.30.



  겨울바람을 듬뿍 쐬면서 자전거를 타면 얼굴이 까슬합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맞바람을 안고 자전거를 오래 달리면 등허리가 결립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다녀오고 나서 여러 시간 끙끙 앓습니다. 자리에 누워 등허리를 폅니다. 내가 자전거를 몰지 않고 자동차를 몬다면 등허리가 결릴 일이란 없을까요. 내가 자전거로 아이들을 이끌고 다니지 않고 자동차에 태우고 다닌다면 얼굴이 까슬할 일은 없을까요.



.. 겨울 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둔 산 아래 밭에 /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 빵 딸기우유 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며 가는데 / 농부 하나 밭둑에 우두커니 서 있다 ..  (우두커니)



  자전거 타기가 고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혼자 자전거를 타더라도 고단합니다. 자전거 타기가 즐겁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이를 둘이나 셋을 태우고 이끌더라도 즐겁습니다. 자전거 타기가 아슬아슬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곁에서 지켜 주는 사람이 여럿 있어도 아슬아슬하다고 느낍니다. 자전거 타기가 홀가분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혼자 아무리 먼 길을 돌아다녀도 걱정이나 근심이 없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많아야 넉넉하지 않습니다. 주머니에 만 원이 있건 백만 원이 있건 천만 원이 있건 천억 원이 있건, 마음이 안 넉넉할 때에 삶이 안 넉넉합니다. 주머니에 푼돈조차 없더라도 마음이 넉넉할 때에 삶이 넉넉합니다.



.. 그 밭에 가보아라 / 네가 먹고 무심코 버린 복숭아씨 / 산복숭아 되어 아비의 그늘을 만들어준다 ..  (산복숭아)



  자전거를 타는 내 마음이 고단하기에 겨울바람을 핑계로 삼아 얼굴이 까슬합니다. 자전거를 타는 내 삶이 고달프기에 겨울 맞바람을 핑계로 삼아 등허리가 결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마실을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거든요. 자전거를 몰며 노래를 부를 적에 힘들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즐거우면서 홀가분합니다. 자전거를 몰면서 노래를 부르기에 숨이 가쁘지 않습니다. 숨이 안 가쁘지도 않습니다. 자전거를 몰면서 얼마든지 노래를 부를 만할 뿐입니다.


  언제나 내 생각이 내 하루를 짓습니다. 내가 생각하려는 대로 내 하루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기쁨이나 슬픔 같은 느낌은 모두 내가 지어서 내 앞에 나타납니다. 웃음과 눈물 같은 몸짓은 모두 내가 지어서 내 앞에 드러납니다.


  겨울이니까 찬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겨울에도 곧잘 포근한 바람이 붑니다. 왜 겨울에도 찬바람과 더운바람이 갈마들까요. 그리고, 여름에도 왜 시원한 바람과 무더운 바람이 갈마들까요. 우리는 저마다 어떤 마음이 되어 하루를 짓고, 어떤 생각을 펼쳐 삶을 가꿀까요.



.. 고구마꽃은 어쩌다 한번 피는 거라서 평생 가도 못 보는 사람도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데 / 주식 자랑 새 차 자랑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고구마꽃 자랑을 쓱 까뭉개버렸다 /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 / 밭이 피우고 비가 피우고 바람이 피운 고구마꽃을 / 내가 피운 것처럼 말한 것이 부끄러웠다 ..  (고구마꽃)



  박형권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우두커니》(실천문학사,2009)를 읽습니다. 박형권 님은 ‘우두커니’ 선 흙지기를 보았다고 합니다. 흙지기는 참말 우두커니 섰을까요. 박형권 님 마음이 우두커니이지 않았을까요. 흙지기는 딱히 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박형권 님 혼자 저이는 우두커니 있네 하고 여긴 셈 아닐까요.


  우두커니 선들, 물끄러미 선들, 하염없이 선들, 부질없이 선들, 홀가분히 선들, 차분하게 선들, 고요하게 선들, 호젓하게 선들, 한갓지게 선들, 가붓하게 선들,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랑스레 서거나 믿음직히 서거나 노래하며 선대서 딱히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저 서는 모습이고, 그저 사는 모습입니다.



.. 별빛 초롱한 밤, 잠 안 오는 밤 / 허파가 헛헛한 것이 암만 생각해도 담배 생각이다 / 가게에 갔더니 / 공터에서 집 짓던 인부들 노가리 뜯어놓고 맑은 소주 마신다 ..  (봄밤)



  내 아버지가 대통령일 때에 내 삶이 즐거우리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가 대통령이기는 한데,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이였어도 내 삶은 즐거울 만한지 궁금합니다. 내 아버지가 시골 흙지기일 때에 내 삶이 고단하리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나무를 심고 풀을 아끼며 꽃을 사랑하면서 흙을 가꾸는 어버이가 나를 낳았으면, 나는 여러모로 일을 고단하게 하더라도 언제나 따사로운 사랑을 듬뿍 물려받거나 배울 만합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한테는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삶을 가꾸면서 걸어갈 뿐입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녁 스스로 가꾸거나 일구는 길을 나한테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걷는 길과 어머니가 사는 길을 곰곰이 바라보면서 모든 내 길을 모두 내 손으로 짓습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했기에 내가 저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했으니 내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일구는 삶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일굽니다.



..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아비가 되어 서울 중랑천 옆으로 이사 온 뒤에 나와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아들을 데리고 중랑천 둑길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 오목눈이 떼가 우리를 지나갔다 머리에 앉아서 이마를 톡톡 쪼아보고 진주 같은 똥도 떨어뜨렸다 내 어깨에 삭정이를 물고 와서 집을 지으려는 놈도 있었다 ..  (새들이 나를 나무로 볼 때)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면서 오줌그릇을 비웁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나이를 더 먹으면 이제 오줌그릇을 아버지가 비울 일은 없으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이 아직 나이가 적으니 오줌그릇을 비워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직 나이가 어리니 밥을 차려서 주고, 옷을 빨아서 입히며, 몸을 구석구석 씻깁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어버이는 날마다 새롭게 하루를 지으면서 아이를 가르치거나 이끕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새롭게 눈을 떠서 새로운 놀이를 누리려 합니다. 어버이는 언제나 새롭게 생각을 키우고 마음을 가다듬어 새로운 일을 붙잡으려 합니다.



.. 허 참, 먹을 복은 있어서, 머리 쓱쓱 긁으며 / 나를 받치느라 약간 기우뚱해지는 배에 뛰어올라 / 내 밥숟가락 하나 받았다 ..  (배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가 태어나는 자리는 삶터입니다. 꼭 이러한 삶터라서 시가 태어나지 않고, 꼭 저러한 삶터이기에 시가 못 태어나지 않습니다. 옳은 시도 그른 시도 없고, 눈부신 시도 구지레한 시도 없습니다. 다만, 바닷물 같은 시라든지 나뭇잎 같은 시는 있습니다. 구름빛 같은 시라든지 꾀꼬리 노래 같은 시는 있습니다.


  박형권 님은 《우두커니》라는 시집을 어떤 숨결이 되도록 엮어서 선보인 셈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박형권 님이 스스로 짓는 삶은 어떤 빛깔과 무늬가 되어 우리한테 이야기보따리로 건네는 싯말로 태어나는지 찬찬히 돌아봅니다. 겨울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곱씹습니다. 4347.12.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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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이들 창비아동문고 113
윤동재 지음 / 창비 / 198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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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7



서울에서든 시골에서든 똑같다

― 서울 아이들

 윤동재 글

 박승순 그림

 창작과비평사 펴냄, 1989.12.10.



  모과알은 모과나무에 달립니다. 모과알이 달리자면 모과꽃이 핍니다. 모과꽃이 피려면 모과나무가 자라야 하고, 모과나무가 자라려면 모과씨가 흙에 깃들어 찬찬히 자라야 합니다.


  씨앗은 열매가 되고, 열매는 다시 씨앗이 됩니다. 열매와 씨앗은 모두 목숨입니다. 목숨을 먹는 사람은 새로운 목숨을 잇고, 목숨을 받아들이는 숨결은 새로운 기운을 얻어 삶을 짓습니다.


  곰곰이 헤아리면, 누구나 무엇이든 먹기에 삽니다. 지구별에 있는 모든 목숨은 반드시 무엇이든 먹습니다. 입으로 먹든 살갗으로 먹든, 풀과 나무뿐 아니라 벌레와 짐승과 물고기 모두 무엇이든 먹습니다.



.. 서울 아이들에게는 / 질경이꽃도 / 이름 모를 꽃이 된다. // 서울 아이들에게는 / 굴뚝새도 / 이름 모를 새가 된다 ..  (이름도 모르고)



  우리 삶에서 밥은 대단히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먹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고 할 만하니까요. 그렇지만 학교를 다니면 정작 밥을 가르치거나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밥 이야기를 거의 안 다룹니다. 이제는 학교에 도시락을 가져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인문계 학교는 아이와 어른 모두 손수 밥을 짓는 살림일을 몸소 하지도 않습니다. 학교에서 하는 일이란, ‘밥을 돈을 치러 사서 먹을 수 있도록 돈을 잘 버는 일자리를 얻는 길’을 알려주는 데에서 그칩니다. 어떤 밥을 먹을 적에 몸이 즐거운지 안 가르칩니다. 어떤 밥을 어떻게 지어서 먹을 적에 삶을 아름답게 가꿀 만한지 못 가르칩니다. 어떤 밥을 어떻게 지어서 누구와 먹을 적에 삶을 사랑스레 북돋울 만한지 하나도 안 가르칩니다. 밥을 지으려면 먹을거리는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조금도 못 가르칩니다.



.. 학교 오갈 때는 걷고 싶은데 / 자가용 꼭꼭 태워 줘요 // 이렇게 자라서 무엇이 될까요 /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  (이렇게 자라서)



  예전에는 ‘서울 아이’만 질경이꽃을 몰랐을 테지만, 요즘에는 ‘시골 아이’도 질경이꽃을 모릅니다. 그리고, 예나 이제나 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하는 어른 가운데 질경이꽃을 알아보는 사람이 퍽 드물고, 앞으로는 더욱 드물 테며, 대학교나 공공기관이나 법원이나 청와대나 국회나 신문사나 방송사 같은 데에서 질경이꽃을 다루는 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른 자리에 선 사람은 예나 이제나 무엇을 알까요? 학교에 자가용을 몰고 가는 교사는, 일터에 자가용을 끌고 오가는 어른은, 어제와 오늘 무엇을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는가요?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굴뚝새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굴뚝부터 만나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비둘기나 까치나 참새쯤 으레 본다고 하지만, 이러한 새를 보면서 ‘새’를 본다고 느끼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도시에도 온갖 들풀이 돋고 시들지만, 들풀마다 어떤 이름인지 헤아리거나 살피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동시집 《서울 아이들》(창작과비평사,1989)을 쓴 윤동재 님은 〈이렇게 자라서〉라는 동시에서 묻습니다. “이렇게 자라서 무엇이 될까요 /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되었을까요? 현대문명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할까요? 물질문명을 더욱 뽐냅니다.


  서울살이를 한숨지으며 바라보는 쓸쓸한 눈길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서울 아이들》인데, 이 동시집이 처음 나올 즈음뿐 아니라 2010년대에도 시골은 일찌감치 시골빛을 잃었습니다. 새마을운동 탓만이 아니고 경제개발 탓만이 아니며 올림픽 탓만이 아닙니다. 예나 이제나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삶을 안 가르치고 입시지옥만 몰아세웁니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못 배우고 입시지옥만 배우면서 길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사랑을 못 받으면서 입시지옥 무게에 짓눌리기만 합니다.



..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 내 손잡고 노래도 같이 부르고 / 모르는 것 있으면 친절히 가르쳐 주고 / 어떤 때는 어머니 대신 / 라면도 끓여 주던 우리 누나 / 고등학교 다니고부터는 도무지 / 우리 누나가 아닌 것 같아요 ..  (우리 누나)



  아이들은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아이한테 사랑을 안 가르칩니다. 입시 지도만 합니다. 아이가 바라는 사랑을 찬찬히 이야기하지도 않고, 아이가 꿈꾸는 사랑을 가만히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어른은 누구나 몹시 바쁩니다. 오늘날 어른은 참으로 일이 많습니다.


  학교에서 아주 오랜 나날을 보내는데, 학교에서는 사랑을 안 가르치거나 못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사랑을 안 가르치거나 못 보여주는 학교 얼거리인데, 아이들은 시집이나 동시집을 읽으면서 어떤 마음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 들길을 걷다 보면 / 도랑 가로 달개비꽃 피어 있지요 / 달개비꽃 볼 때마다 / 달개비란 이름 맨 처음 붙인 사람 / 궁금하지요 ..  (누구일까)



  뜨거운 물을 단추만 눌러서 뽑은 뒤 부으면 몇 분 뒤에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은 쓰레기를 낳습니다. 다 먹은 뒤에도 쓰레기가 남고, 컵라면을 만드는 동안에 공장에서 쓰레기가 나옵니다. 냄비로 끓이는 봉지라면도 비닐봉지가 쓰레기로 남고, 봉지라면을 만드는 공장에서도 쓰레기가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공장에서 만들어 가게로 나르자면 짐차가 굴러야 하고 짐차가 구를 찻길이 있어야 합니다. 공장을 돌리자면 숲을 밀어야 하고, 나라밖에서 석유를 사들여야 하는데, 석유를 뽑는 나라는 땅뙈기를 더럽힙니다. 석유를 사들이자면 커다란 배를 무어야 할 텐데, 커다란 배를 뭇느라 바다를 더럽히고, 배를 몰자면 석유를 들여야 하니 또 바다를 더럽히며, 배를 무을 때에 쓰는 쇠붙이를 파내자고 다시 숲을 더 망가뜨립니다. 적은 돈으로 사서 먹는 라면 한 봉지 때문에 지구별 곳곳을 파헤치거나 망가뜨리거나 부숩니다.


  라면 한 봉지를 사다 먹는 일이 나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나쁠 일은 없습니다. 무엇을 먹는지 느끼지 못한다면 삶이 없을 뿐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먹으면서 삶을 지으려고 하는지 깨닫지 않는다면 사랑이 자라지 않을 뿐입니다.


  배를 채우려고 밥을 먹는다면, 왜 배를 채워야 할까요? 배를 채워서 무슨 일이나 놀이를 할 생각일까요? 내가 누리는 일과 놀이는 무슨 보람이나 재미나 뜻이 있을까요?



.. 시냇가에 곱다랗게 / 피어 있는 제비꽃 / 물속에 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제비꽃)



  서울에서든 시골에서든 똑같습니다. 학교가 아이한테 가르치는 것이 똑같고, 어른이 학교와 마을과 집에서 하는 일이 똑같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든 시골에서든 똑같이 하늘을 등에 입니다. 서울에서는 매캐한 먼지띠를 등에 인다고 할 테지만, 너른 누리에서 헤아리자면 먼지띠는 아주 작습니다. 지구별한테까지 빛을 보내는 다른 이웃 별을 헤아리자면 먼지띠는 아무것이 아닙니다.


  먼지띠가 아닌 온누리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지띠 너머에 있는 수많은 별빛과 미리내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야 이웃 별을 사귑니다.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야 내 몸에 깃든 기운을 살핍니다.


  눈을 뜨면 어디에 있더라도 마음을 열어 사랑을 키웁니다. 눈을 못 뜨면 어디에 있더라도 눈먼 바보가 되어 사랑도 꿈도 이야기도 못 짓습니다.


  겨울에 겨울바람을 실컷 느낍니다. 봄에 봄볕을 실컷 느낍니다. 여름에 들나물을 실컷 느낍니다. 가을에 가을빛을 실컷 느낍니다. 마음에서 자라는 꽃을 느끼면서, 들에서 피고 마당과 길가와 골목에서 함께 피는 고운 숨결을 느낄 수 있기를, 서로 이웃이요 동무인 줄 느낄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2.2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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