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마단 사람들
오진령 지음 / 호미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꼭 열 해 앞서 이 사진책 느낌글을 썼는데

열 해가 지난 오늘 다시 읽어 보니

너무 부끄러워서

새롭게 느낌글을 쓴다.


사진가 오진령 님 앞날이

환하게 빛나면서

고운 사진이야기 흐르기를 빈다.


..


찾아 읽는 사진책 166



날마다 새롭게 숨쉬는 사진

― 곡마단 사람들

 오진령 글·사진

 호미 펴냄, 2004.1.15.



  사진은 날마다 새롭게 숨쉽니다. 처음 태어난 날에는 첫빛을 안고 숨쉽니다. 한 해가 지나면 첫돌을 지나는 빛으로 숨쉽니다. 세 해가 흐르고 여섯 해가 흐르면, 세 살 빛깔과 여섯 살 빛물결을 품으면서 숨쉽니다.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살아갑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바깥으로 나온 첫날에는 첫날대로 살고, 백 날을 지내면 백 날대로 살며, 돌을 지내면 돌대로 삽니다. 다섯 살이 되면 다섯 살 어린이대로 살며, 열 살이 되면 열 살 어린이대로 살아요.


  숲은 날마다 새롭게 빛납니다. 봄에는 봄빛이 가득한 숲이요, 여름에는 여름빛이 그윽한 숲이며, 가을에는 가을빛이 고운 숲이다가, 겨울에는 겨울빛으로 하얀 숲입니다.


  한 자리에 머무는 사진이나 사람이나 숲은 없습니다. 늘 새로운 사진이고 사람이며 숲입니다. 찬찬히 흐르면서 거듭나고, 꾸준히 빛나면서 즐거운 사진이요 사람이면서 숲이에요.






  오진령 님은 2004년에 《곡마단 사람들》(호미 펴냄)이라는 사진책을 선보입니다. 2014년에 《짓》(이안북스 펴냄)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열 해만에 둘째 권입니다. 앞으로 또 열 해가 지나면 셋째 권을 베풀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2004년에 선보인 《곡마단 사람들》을 새로 꺼내어 읽습니다. 오진령 님은 “곡예사들의 소박하고 자유롭고 진정 어린 삶에서 감동을 받았고, 순정하고 여린 탓에 상처 많은 그들에게서 아픔도 느꼈다(머리말).” 하고 말합니다. 열 해 앞서나 오늘이나 이 마음은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웃고 울던 삶을 사진으로 차곡차곡 갈무리했으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즐겁지 않으면 즐거운 기운을 사진으로 못 담고, 자유롭지 않으면 자유로운 기운을 사진으로 못 담아요. 노래하는 사람이 노래와 같은 사진을 찍고, 춤을 추는 사람이 춤이 샘솟는 사진을 찍습니다.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은 없습니다. 삶결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보이는 대로 찍는 사진은 없습니다. 살아가는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들은 서커스를 어린 시절의, 과거 한때의 추억으로 돌려 버리고는 외면하고 잊으려 한다. 그러나 동춘서커스는 팔십 년 가까운 역사를 등에 지고서, 곡예사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사람들을 재미와 감동으로 울고 웃게 하면서 한 해 내내 전국을 유랑하고 있다. 과거가 아닌 오늘의 것으로서 서커스를 바라보면 좋겠다는 마음이다(머리말).”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똑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동춘서커스를 ‘지나간 추억’으로 여깁니다. 누군가는 동춘서커스를 ‘여든 해 가까운 나날 이어온 오늘 삶’으로 여깁니다.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찍는 사진입니다. 보이는 대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로 찍는 사진입니다. 내 앞에 보이는 저곳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담아 사진을 찍어요. 내 앞에 있는 이곳을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랑스럽지 않은’ 사진을 빚습니다.


  “그들이라고 왜 두렵지 않겠는가? 곡예를 하다가 떨어져 몇 번씩 병원 신세를 진 그들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새처럼 아름다운 비행을 하고 있다(54쪽).” 하고 이야기하는 오진령 님은 어떤 마음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곡예사가 ‘새처럼 아름답게 난다’고 이야기하는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그냥 날지 않고 새처럼 날되 아름답게 난다고 해요. 아니, 곡예를 하지 않고 새처럼 난다고 해요. 그러면, 오진령 님이 찍은 사진은 바로 ‘곡예를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새처럼 아름답게 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찍은 사진이겠지요.





  사진이 날마다 새롭게 숨쉬는 까닭은 사진은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말, 사진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이야기를 합니다. 사진은 오늘 우리가 누린 삶을 이야기합니다.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어제 우리가 누린 삶을 도란도란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기록물을 쳐다보면서 ‘아하 옛날에는 이랬지’ 하는 추억에 잠기지 않습니다. 아니, 이렇게 추억에 잠기는 사람도 있어요. 오진령 님은 추억에 잠기려고 사진을 찍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사진을 찍었고, 2004년뿐 아니라 2014년과 2024년에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오순도순 꽃피우고 싶어 사진을 찍었구나 싶습니다.


  “공연장 밖에서 손님을 맞는 원숭이들에게 사람들은 인사 치레인 양 손가락질을 하거나 무언가를 집어던지곤 한다. 그러나 정작 원숭이들은 사람들의 그런 무례한 행동도 재치 있게 받아넘기는 아량을 보인다. 서커스와 동고 동락해 온 오랜 연륜을 그들에게서 느끼게 된다(148쪽).”와 같은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어떤 사람은 원숭이를 괴롭혀요. 어떤 사람은 원숭이뿐 아니라 사람도 괴롭혀요. 어떤 사람은 들과 숲에 농약을 함부로 뿌리면서 풀과 나무를 괴롭힙니다. 어떤 사람은 전쟁무기를 만들면서 지구별을 괴롭혀요. 핵무기를 만드는 핵발전소인데, 핵발전소를 멈추지 않으면서 지구별뿐 아니라 이 나라와 사회와 마을 모두 괴롭힙니다.





  마을 한복판을 고속도로가 꿰뚫고 지나가는 한국입니다. 숲 한복판을 밀고 고속철도가 달리는 한국입니다. 더 빨리 달리니까 좋은가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더 빨리 가는 사람은 좋겠지요? 그러면, 마을 한복판을 고속도로와 고속철도한테 빼앗긴 조그마한 시골마을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요? 땅값이 싼 시골에 공장을 지어 도시에서 문명과 문화를 누리는 오늘날인데, 시골마을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맑은 물을 못 마신다면, 시골사람은 어떤 문명과 문화를 누린다고 해야 할까요?


  사진을 찍는 오진령 님은 동춘서커스단 곡예사를 마주하면서 “줄 타는 곡예사가 고작 바이킹 따위에서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이 처음에는 의아스러웠다. 그 공포심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래, 곡예사라고 해서, 줄을 탄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느낀다. 다만 날마다 그 큰 두려움을 견디는 것일 뿐이다(156쪽).” 하고 생각합니다. 곡예사도 사람이고 구경꾼도 사람입니다. 사진 찍는 이도 사람이고 사진 읽는 이도 사람입니다. 대통령도 사람일 테고 국무총리도 사람일 테지요.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가라앉아 슬피 우는 사람들이 있고, 슬피 우는 사람들 옆에서 컵라면을 후루룩 먹는 사람도 있어요. 모두 사람이에요. 더 나은 사람이나 덜 떨어진 사람이 아니에요.






  사진책 《곡마단 사람들》을 덮습니다. “우리 사회가 서커스 하는 사람을 이방인 대하듯 하는 한, 그들에게는 무대 밖의 우리가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159쪽).”라고 읊는 이야기를 곰곰이 읽으면서 책을 덮습니다. 한자말 ‘이방인(異邦人)’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뜻합니다. 무대에 선 곡예사를 바라보는 구경꾼은 곡예사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무대에 선 곡예사는 구경꾼을 바라보면서 이녁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도시에서는 시골내기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여길 만해요. 시골에서는 도시내기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여길 만할 테지요. 시골에서도 농약 안 쓰는 사람은 농약 쓰는 사람 둘레에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 됩니다. 시골에서 농약을 마구 쓰는 사람은 농약 안 쓰는 사람 둘레에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 되어요.


  사진은 누가 찍는가요. 사진은 누가 누구를 찍는가요. 사진은 누가 누구를 찍어서 누구한테 읽히는가요. 이쪽 자리에서 찍는 사진과 저쪽 자리에서 찍는 사진은 저마다 어떻게 다를까요. 더 옳은 사진이 있을까요. 참을 숨긴 사진이 있을까요. 한 가지만 외곬로 바라보느라 큰 틀을 못 본 사진이 있을까요. 큰 틀로 바라본다고 하면서 막상 작은 곳을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사진이 있을까요.




  글과 그림과 사진은 모두 기록이 아닙니다. 이야기입니다. 노래와 춤은 문화나 예술이 아닙니다. 이야기입니다. 기록으로 남기려고 글을 쓰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려고 글을 씁니다. 문화나 예술을 꽃피우려고 노래나 춤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예 삶을 즐기려고 노래나 춤을 즐깁니다. 오진령 님은 동춘서커스 곡예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웃과 동무로 살가이 마주했기에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이 사진들은 곱게 빛나면서 사진책으로 태어났습니다. 4347.4.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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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요리 인류사 - 혀로 배우는 인간과 생명의 역사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3
권은중 지음, 심상윤 그림 / 철수와영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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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14



밥 한 그릇을 먹으려고

― 10대와 통하는 요리 인류사

 권은중 글

 심상윤 그림

 철수와영희 펴냄, 2014.4.19.



  옛날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고 절구질을 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고 흙을 일구면서 한 해를 기다렸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고 숲에 들어가서 나무를 하고 아궁이에 불을 땠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고 흙과 돌을 써서 집을 짓고 부엌을 만들며 무쇠로 솥을 지었을 뿐 아니라, 키로 쌀을 까부르고는 조리로 일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고 수저를 만들고 그릇을 만들었으며 밥상을 만들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고 흙을 북돋우고 풀을 아꼈으며 나무를 사랑했습니다.



.. 쌀밥 한 그릇과 같은 음식에는 45억 년 전 지구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엄청난 생명의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근대사는 음식이 인간의 삶에 미친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 문제는 기계 덕분에 사람이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영국이 대량으로 값싼 면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하자 면직물 가격이 폭락합니다.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인도인이 실업자 신세가 되어 굶어죽게 돼요. 그 과정에서 영국은 잔인한 계략을 쓰기도 합니다. 경쟁국을 견제하고자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인도 방직 기술자들의 엄지손가락을 잘랐죠 ..  (17, 20쪽)



  오늘날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고 돈을 법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고 밥집에 가거나 전화를 걸어 시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고 전기밥솥이나 여러 가지 기계를 씁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밥을 먹으려고 가시내한테 한 마디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서른 살이 되어도 밥을 지을 줄 모르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흔 살이건만 밥과 국과 반찬을 정갈하게 차릴 줄 모르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밥 한 그릇 얻기까지 어떤 땀과 품과 손길을 들이는지 모르기 일쑤입니다. 날마다 세 끼니 꼬박꼬박 밥을 먹는다지만, 정작 밥 한 그릇이 어떤 숨결이요 넋인지 헤아리지는 않습니다.



.. 햇빛과 물 그리고 이산화탄소만 있다면 식물은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빼앗는 포식 행위 없이 생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다른 생명체를 키울 수 있는 깨끗한 산소를 내놓습니다 … 저는 요즘 아이들에게 아토피가 많아지는 것도 음식이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화학 첨가제가 잔뜩 들어간 과자와 사탕을 입에 달고 사니까요. 우리 몸의 신장이나 간은 이런 합성물질을 100퍼센트 완벽하게 거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떻게든 이물질을 밖으로 내보내려는 과정에서 보이는 몸의 과민함이 바로 아토피라고 합니다. 아토피는 사실상 약이 없어요. 음식물에 쓰이는 각종 화학 첨가물은 아토피뿐 아니라 ADHD 등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습니다 ..  (54, 130쪽)



  남이 지은 나락을 빻은 쌀하고 내가 지은 나락을 빻은 쌀은 맛이 다릅니다. 그만큼 사랑과 숨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은 나락은 내 온 사랑이 깃듭니다. 내 숨결과 손길이 고스란히 감돕니다. 내가 지은 나락을 내 손으로 밥으로 지어 먹으면 더할 나위 없이 맛있습니다. 남이 지은 나락으로 밥을 짓는대서 맛이 없지는 않으나, 내가 손수 거둔 쌀하고 맛을 견줄 수 없습니다.


  내가 낚은 물고기하고 남이 낚은 물고기하고 맛이 같을 수 없어요. 내가 뜯은 나물하고 남이 뜯은 나물은 맛이 같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 스스로 손길을 들일 때에 가장 맛있습니다. 언제나 우리 손빛을 담을 때에 가장 몸에 좋습니다.


  이모나 고모가 아이를 잘 돌봐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살가운 이모와 사랑스러운 고모보다도 제 어버이한테서 살갑고 사랑스러운 손길을 받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늘 기다립니다. 곁에서 어버이가 가장 아름답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면서 저희를 어루만질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흔히 ‘어머니 손맛’이라고 하지만, 꼭 어머니 손맛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 손맛이나 아버지 손맛이나 똑같습니다. 할머니 손맛이나 할아버지 손맛이나 똑같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베풀면서 물려주는 손맛일 때에 즐겁고 반가우며 고맙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손맛’이란 내 어버이가 물려주는 삶맛입니다. 손맛이란 우리 어버이가 나한테 베풀면서 내가 우리 아이한테 이어줄 사랑맛입니다.



.. 독립국이 된 미국은 영국의 비싼 차 대신 커피를 마시기 시작해요. 당시 커피를 생산하던 중남미와 지리적으로 훨씬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들이 먹는 감자를 만들어 낸 그들의 손, 자신을 닮은 그들의 손이 부각되게 그렸다”라고 말합니다. 먹는 표정과 속도만 부각시키는 요즘의 ‘먹방’과 달리 고흐는 먹는 사람의 마음마저 헤아렸던 것이죠 ..  (176, 181쪽)



  권은중 님이 쓴 《10대와 통하는 요리 인류사》(철수와영희,2014)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밥 한 그릇을 살피면 우리 삶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밥 한 그릇을 어떻게 먹었는가 하고 돌아보면 우리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어야 역사를 알 수 있지 않아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리는 밥상을 살피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즐기는 밥상을 보면, 우리 문화와 역사를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요리나 음식과 얽힌 문화는 궁중에 없습니다. 요리나 음식과 잇닿는 역사는 책에 없습니다. 우리 혀에 문화가 있어요. 우리 눈과 손에 역사가 있어요.


  먼먼 옛날인 거의 오천 해 앞서인 때부터 쑥과 마늘이 있었다고 해요. 쑥은 들에서 나는 풀을 대표하고, 마늘은 사람이 손수 심는 풀을 대표해요. 들에서 스스로 자라는 풀을 먹는 한편, 사람이 사랑으로 심어서 꿈을 담아 돌보는 풀을 먹을 때에 비로소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는 뜻을 옛 신화에서 들려준다고 느껴요. 쑥떡을 먹고 마늘장아찌를 먹는 한겨레는 스스로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길을 걸으려는 몸짓이지 싶어요.


  대단한 요리를 해서 무슨무슨 대회에 나가 1등을 해야 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을 날마다 가장 즐거우면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차리면 됩니다. 밥 한 그릇을 언제나 웃으면서 차리고 노래하면서 먹으면 됩니다.



..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처럼 곰팡이는 생명체를 키우고 다시 순수한 원자 자체로 돌립니다. 원자에서 시작해 생명으로 그리고 생명이 다해 다시 원자로 돌아가는 그 긴 과정을 곰팡이들은 함께합니다 … 콜라는 출발부터 다릅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음식들이 농부나 어부의 손에서 시작했다면 콜라는 ‘공장’에서 출발한 ‘상품’입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대지나 바다가 아니라 공장에서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 세계 최장수 지역으로 꼽혀 온 일본 오키나와에도 햄버거와 피자를 판매하는 패스트푸드 체인이 들어온 이후 평균 수명이 일본 본토보다 떨어졌다는 뉴스도 있습니다 ..  (195, 202, 221쪽)



  푸름이와 함께 읽는 《10대와 통하는 요리 인류사》입니다. 아무래도 오늘날 인문책은 한겨레 문화와 역사보다는 서양 문화와 역사를 더 다루기 마련이라, 이 책도 서양 요리 문화와 역사를 더 깊이 돌아봅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먼먼 옛날부터 수수하고 투박하게 살아온 여느 사람들 손길과 손빛과 손맛이 깃든 작고 살가운 밥 한 그릇을 이야기하지는 못해요.


  그러나, 푸름이가 스스로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밥 문화는 책에 없습니다. 우리 밥 역사는 교과서에 없습니다. 우리 밥 예술은 요리전문가가 알려줄 수 없습니다.


  잘 알아야 할 일인데, 배추김치가 한겨레 반찬이 된 지는 아직 얼마 안 되었습니다.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한겨레가 쓴 지는 이제 겨우 백 해가 될락 말락 합니다. 배추를 한겨레가 먹은 지도 천 해가 될까 말까 한다고 해요.


  우리는 무엇을 먹었을까요. 우리 옛사람은 지난날에 배를 곯았을까요? 우리 옛사람은 배추도 무도 감자도 고구마도 오이도 몰랐을 지난날에 어떤 밥을 먹으면서 어떤 삶을 노래했을까요? 고추도 수박도 토마토도 당근도 양파도 없었을 지난날에 우리 한겨레는 무엇을 들과 숲에서 얻으면서 몸을 살찌우고 삶을 빚었을까요?



.. 집에서 손수 만들어 먹는 어머니표 밥상, 저에겐 나이가 들면서 가장 소중하고 그리운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 청소년 여러분들에게 지식을 외우기보다 감자 샐러드나 멸치 국물을 내는 요리를 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쉬운 요리를 하나씩 하다 보면 금세 연관된 요리를 몇 가지 더 할 수 있습니다. “학원 가느라 바쁜데 어떻게 요리를 해요”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요리는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건강과 감성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됩니다 ..  (221, 237쪽)



  《10대와 통하는 요리 인류사》라는 책이 우리 겨레 밥살이를 더 돌아보면서 찬찬히 다루었다면 훨씬 아름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쓰신 분뿐 아니라, 오늘날 여느 어버이와 수많은 아이들은 아직 한겨레다운 삶을 모릅니다. 겉보기로는 한겨레요 한국사람이지만, 늘 먹는 밥이 ‘한국 밥’이라고 할 만한지 알 수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셔요. 앞으로 쉰 해나 백 해쯤 흐른 뒤를 생각해 보셔요. 2200년이나 2300년에 오늘날 한국을 돌아볼 적에 ‘한겨레 밥 문화’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한국사람이 누리는 밥이란 얼마나 우리 문화요 역사이며 삶이라 할 만할까요?


  밥 한 그릇을 먹으려고 예부터 사람들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밥 한 그릇을 나누려고 예부터 사람들은 서로서로 돕고 어깨동무하면서 웃었습니다. 요즈음 이 나라 국민소득이 꽤 높지요? 그렇지만 아직도 굶는 사람은 많고, 가난한 이웃도 많아요. 게다가 북녘에서 나고 자라는 한겨레는 너무 배고플 뿐 아니라 너무 괴롭습니다. 이와 달리 남녘에서는 밥쓰레기가 해마다 어마어마하게 쏟아져요.


  우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한국사람은 어떤 밥 문화를 누리는가요. 중·고등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입시교육에만 매달리면 될까요? 밥 한 그릇 냄비밥으로 끓일 줄 모를 뿐 아니라, 배를 곯거나 굶어죽는 한겨레가 있는 줄 모르는 채 ‘한국에서 몇 손가락으로 꼽는 대학교’에 척 하니 붙으면 그만일까요? 밥과 문화와 역사란 무엇일까요? 오늘 이곳에서 열예닐곱 나이로 살아가는 어여쁜 푸름이가 ‘새로운 밥 이야기’를 써서 새로운 책으로 선보일 수 있기를 빕니다. 4347.4.2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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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문학의 자리 - 경계의 문학, 소통의 문학, 청소년문학을 말하다!
박상률 지음 / 나라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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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13



열여섯 살에 읽을 책

― 청소년문학의 자리

 박상률 글

 나라말 펴냄, 2011.8.20.



  스물여섯 살이라면 어른이라고 합니다. 서른여섯 살도 마흔여섯 살도 어른이라고 합니다. 쉰여섯 살이나 예순여섯 살도 똑같이 어른이라고 할 테지요. 일흔여섯 살이나 여든여섯 살을 두고도 어른이라고 해요. 여섯 살은 어린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열여섯 살은?


  옛날을 생각하면 열여섯 살은 어른입니다. 다 큰 나이인 만큼 어른입니다. 스스로 제 몫을 할 만큼 일할 수 있는 나이인 터라 열여섯 살은 어른입니다.


  오늘날을 생각하면 열여섯 살은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나이에 있는 사람을 두고 ‘청소년’이라는 한자말을 따로 지어서 가리킵니다. 한국말로는 ‘푸름이’로 가리키기도 합니다.


  열여섯 살쯤 되면 낫질을 제법 잘 할 수 있습니다. 지게질도 썩 잘 할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밥을 지을 수 있고, 아픈 이를 돌본다든지 아기를 어를 수 있습니다. 열여섯 살쯤 된다면 혼자 먼 나들이를 다녀올 수 있습니다. 혼자 집을 볼 수 있으며, 모내기며 가을걷이며 소꼴베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 1990년대에는 동화가 돈이 되었다. 그랬기에 아동문학과 그다지 관련 없는 출판사들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화책을 냈다 … 대부분의 작가들이 청소년에 댜한 이해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 서둘러 작품을 쏟아내기 때문에 요즘 청소년소설은 청소년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것이 문제다 … 청소년은 왜 오늘이 아닌 미래에만 주역이고 내일에만 주인이 될까? 오늘에도 주역이고 주인이면 안 될까 ..  (13, 14, 31쪽)



  밤이 되면 시골은 어둡고 조용합니다. 어두운 시골은 별빛을 환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조용한 시골에서는 멧골에서 울려퍼지는 새소리를 가만히 들을 수 있습니다.


  시골은 여름밤이 그리 무덥지 않습니다. 흙이 있고 풀이 있으며 나무가 있는 시골은 여름밤이 시원합니다. 흙과 풀과 나무가 없다면, 시골도 도시와 똑같이 무덥거나 후덥지근합니다. 마당을 시멘트로 바른 시골은 도시와 비슷하게 덥습니다.


  요즈음은 봄이 봄 같지 않다 말합니다. 왜냐하면 겨울이 끝나서 봄인가 싶더니 여름이라고들 해요. 도시에는 흙도 풀도 나무도 모두 밀려나야 하니까, 저녁이 되어도 봄볕이 식을 수 없고, 싱그러운 바람이 불 수 없어요.


  이런 도시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까요.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하더라도 시골을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루 빨리 도시로 갈 생각인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까요. 초등학교를 마친 뒤 시골 중·고등학교에서도 입시공부만 하거나 입시학원을 다닌다면, 이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까요.



.. 요즘 나오는 청소년소설들은 한결같이 감동보다는 재미를 추구한다. 그럼 소설을 읽는 이유는 재미를 맛보자는 것일까? 그건 그렇지 않다. 재미는 그저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맛이 나는 것이고, 감동은 어떤 느낌이 있어 마침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 게임을 하거나 오락물을 보면서 감동까지 받고자 하는 이는 없다. 그런데 청소년소설이 자꾸만 그런 것들의 꽁무니를 따라가지 못해 안달이다 … 제대로 된 문학은 어린이용이든 청소년용이든 어른용이든 재미가 우선이 아니고 감동이 우선이다. 그러면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 ..  (21∼23쪽)



  한국에서 2000년대 열여섯 살은 어떤 나이일까 헤아려 봅니다. 한국에서 열여섯 살은 어른이 아니지만 어린이도 아닐 뿐더러, ‘학생’으로 여깁니다. 열여섯 살이기에 모두 학교를 다녀야 하지 않으나, 이 나이에는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여깁니다. 열일곱 살이나 열여덟 살도 학생으로 여겨요. 이뿐 아니라 스무 살이나 스물다섯 살조차 학생으로 여깁니다. 아니, 요새는 서른 살까지 학생이기 일쑤요, 마흔 살짜리 학생까지 있습니다.


  열여섯 살이지만 밥을 못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스물여섯 살이지만 국을 못 끓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서른여섯 살이지만 아이와 어떻게 놀며 아기를 어떻게 재우는가를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학교를 마치고 책을 꽤 읽었다지만 삶을 모르는 마흔여섯 살이 많습니다. 회사에서 직책이 높고 돈을 제법 모았으며 아파트 한두 채를 거느린다지만 삶을 깨우치지 못하는 쉰여섯 살이 많습니다.


  예순여섯 살 어른은 얼마나 어른다운 한국 사회인지 궁금합니다. 일흔여섯 살 어른은 얼마나 슬기로운 어른다운 한국 문화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이값을 잊거나 잃으면서 사람다운 빛을 함께 잊거나 잃지는 않는지 궁금합니다.



.. 작금의 청소년소설 가운데 많은 작품이 아주 극단적인 청소년상을 보여주고 있는 건 바로 어른의 시선만으로 청소년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 많은 청소년소설들이 인위적인 성장을, 나아가 강요된 성장을 그리고 있다 … 이론적인 정의를 평생 공부해 봐야 시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시에 대한 그럴싸한 생각만 가지를 쳐 가며 나올 것이다. 시는 문학 이론서  몇 권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시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나온다. 세상을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끙끙 앓으며 살아가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시는 나오는 것이다 ..  (33, 35, 86쪽)



  박상률 님이 쓴 《청소년문학의 자리》(나라말,2011)를 읽습니다. 청소년문학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밝히려는 글을 모은 책입니다. 오늘날 청소년문학이 참말 청소년문학다운가를 묻고 따지는 글을 모은 책입니다.


  청소년문학이란 무엇일까요. 어린이문학 다음은 청소년문학이고, 청소년문학 다음은 어른문학인가요? 누가 청소년문학을 쓰고 누가 청소년문학을 읽어야 할까요?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만 읽는 문학이 아닙니다. 청소년문학도 청소년만 읽을 문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요즈음 태어나는 청소년문학을 ‘청소년부터 모든 어른이 읽도록’ 쓰거나 엮거나 빚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태어나는 청소년문학이 ‘청소년부터 모든 어른한테 삶을 밝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책도 많이 읽는가? 그렇다. 무지막지하게 많이 읽는다. 그런데 그들이 읽는 책은 인간의 삶과 존재를 이해하는 책이 아니다. 오로지 시험문제로 나옴직한 것들이 버무려진 책이다 … 아이들이 시험에 필요한 책만 책으로 알게 된 게 그들 탓인가? 아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보다도 훨씬 더 책을 읽지 않는 어른들이 버티고 있다 ..  (154, 155쪽)



   열여섯 살에 읽는 책은 교과서여야 하지 않습니다. 열여섯 살에 시집이나 연애소설이나 무협지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땅 열여섯 살은 어떤 책을 읽을 때에 아름다울까요. 이 나라 열여섯 살은 어떤 책을 읽을 때에 사랑스러울까요.


  스스로 밥 한 그릇 짓지 못하는 열여섯 살이 시험성적만 잘 나오면 될까요? 스스로 바느질이나 빨래를 할 줄 모르는 열여섯 살이 책을 많이 읽고 독후감을 많이 쓰기만 하면 될까요?


  청소년을 맡아서 가르치는 교사는 중·고등학교에서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는지 궁금합니다. 청소년을 돌보며 아낄 어버이는 푸름이와 함께 어떤 삶을 빛내면서 하루하루 아름답게 살림을 가꾸는지 궁금합니다. 굳이 청소년문학이라는 갈래를 나눌 까닭이 없이 아름다운 문학을 빚고, 아름다운 책을 엮으며, 아름다운 삶을 일굴 우리 어른이라고 느낍니다. 따로 청소년책을 선보여서 읽히기보다는 사랑스러운 글을 쓰고, 사랑스러운 그림을 그리며, 사랑스러운 노래를 함께 부를 우리 어른이라고 느낍니다.


  열여섯 살에도 여섯 살에도 스물여섯 살에도, 또 서른여섯 살과 예순여섯 살에도 우리가 읽을 책은 늘 하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4347.4.2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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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시에서 펴내는 <책이 열리는 마을>에 싣는 글입니다.

올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차례

우리 말 이야기를 싣기로 했습니다.


..


말넋 27. 이웃과 나누는 글내음

― 봄꽃이 봄바람을 부르듯이



  한국은 예부터 ⅔에 이르는 땅이 멧골이나 멧자락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⅓은 들이었겠지요. 멧골에 집을 마련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을 테고, 들에 집을 장만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을 터입니다. 멧골에 마련하면 멧골집인데, 멧골집 둘레는 숲이기 마련입니다. 숲에 깃든 집, 그러니까 숲집에서 살아야 땔감을 얻습니다. 숲집에서는 멧나물을 캐거나 뜯어서 먹고, 멧자락에 밭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합니다. 들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나무가 우거진 곳에 집을 짓습니다. 들에 짓는 집이면 들집이 될 텐데, 나무가 가까이 있어야 땔감으로 삼습니다. 여러 가지 연장도 나무를 깎아서 만드니, 나무는 늘 곁에 있어야 합니다. 냇물이 흐르고 숲으로 둘러싼 들이 사람이 살기에 알맞다 할 만한 터인 셈입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들’과 얽힌 낱말을 퍽 많이 썼어요. 이를테면, ‘붉은닥세리’라든지 ‘노해’라든지 ‘펀더기’라든지 ‘푸서리’ 같은 낱말을 썼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낱말을 쓰는 분이 없고, 이런 낱말을 소설이나 수필이나 시에 넣으면, 거의 모든 사람이 못 알아들으리라 느껴요. 모두 ‘들’을 가리키는 낱말이지만, 옛날처럼 들집을 지어 들밥을 먹고 들일을 하는 ‘들사람’이 아니라, 도시를 이루어 도시사람으로 살기에, ‘들말’은 잊히거나 사라집니다.


  낱말뜻을 살피자면, 붉은닥세리는 “풀이나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거친 땅”이고, ‘펀더기’는 “펀펀하면서 너른 들”이며, ‘노해’는 “바닷가에서 들을 이룬 곳”입니다. ‘푸서리’는 “거칠면서 풀이 우거진 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자말로 ‘불모지(→ 붉은닥세리)’와 ‘광야(→ 펀더기)’와 ‘황야(→ 푸서리)’를 쓰곤 해요. 들살이와 멀어지면서 들빛을 잃지만, 들말을 써야 할 자리가 곧잘 있습니다.


  이러한 들말과 함께 ‘들녘·들판·벌·벌판’ 같은 낱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도 어느새 쓰임새를 잃으면서 차츰 우리 마음에서 잊힙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시골에서 들을 가꾸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새로운 도시를 ‘신도시’나 ‘뉴타운’으로 넓히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따라 말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면서 삶도 나란히 달라집니다.


  봄을 맞이해 어디에서나 봄꽃이 피어납니다. 시골숲에서는 할미꽃과 진달래와 복수초 같은 꽃이 고개를 내밉니다. 시골마을에서는 냉이꽃과 봄까지꽃과 별꽃과 코딱지나물꽃 들이 방긋 웃습니다. 삼월에는 산수유나무나 동백나무나 매화나무나 닥나무에서 마알간 꽃송이를 터뜨립니다. 사월에는 앵두꽃이랑 딸기꽃이 하얗고, 오월에는 찔레꽃과 탱자꽃이 하얗습니다. 삼월부터 오월까지 유채꽃이 노랗게 물결을 칩니다. 사이사이 냉이꽃이랑 꽃다지꽃이랑 민들레꽃이랑 콩꽃이 빙그레 웃어요.


  온갖 봄꽃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월 첫무렵에 피는 현호색을 바라볼 적에 ‘현호색빛’이라는 말 아니고는 현호색 꽃빛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딸기꽃은 ‘딸기꽃빛’입니다. 탱자꽃은 ‘탱자꽃빛’이요, 동백꽃은 ‘동백꽃빛’입니다. 사월에 느티나무도 새 잎사귀를 내면서 조물조물 조그마한 꽃을 줄줄이 매달며 옅푸른 빛이 감돌아요. 느티나무 느티꽃은 풀빛이면서도 풀빛이라는 말로는 모자라 ‘느티꽃빛’이라고 가리켜야 비로소 제대로 나타낸다 할 만합니다.


  풀빛과 얽혀 일본 한자말 ‘녹색’이라든지 중국 한자말 ‘초록’이 있어요. 영어로는 ‘그린’입니다. 나라와 겨레마다 가리키는 말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은 좀처럼 한국말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 나라 여러 겨레가 저희 삶터에 맞게 지어서 쓰는 낱말을 몽땅 받아들여 뒤죽박죽으로 써요. 한국말 ‘빨강’과 ‘붉음’이 있으나 구태여 ‘적색’과 ‘레드’를 끌어들입니다. 서로 헤어지는 자리에서 ‘잘 가’나 ‘살펴 가셔요’라 말하기보다는 한자말로 ‘안녕’이나 ‘조심히 가셔요’라 말한다든지, 영어로 ‘바이바이’를 쓰곤 합니다.


  봄꽃은 봄바람을 부릅니다. 봄꽃이 퍼뜨리는 꽃내음은 봄바람에 살포시 실려 온 집안과 마을을 감돕니다. 멧새 날갯짓에도 봄꽃내음이 묻어 골골샅샅 퍼집니다. 일찌감치 깨어난 벌과 나비한테도 봄꽃가루와 봄꽃내음이 깃들어 이곳저곳으로 번집니다.


  도시에서는 어떤 빛이 될까요. 도시에서는 어떤 내음이 퍼질까요. 자동차가 그득그득 넘치기에 자동차 배기가스가 골골샅샅 퍼지겠지요. 공장 곁에서 공장 매연이 두루 번지겠지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시는 바람은 무엇이고, 우리가 먹는 밥은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맑은 바람을 마셔야 몸이 튼튼해요. 도시사람이나 시골사람이나 정갈한 밥을 먹어야 몸에 새 기운이 솟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 한 마디가 거칠거나 메마르다면 우리 마음은 어떤 빛이 될까 궁금합니다. 우리가 나누는 글 한 줄에 사랑스러움이나 살가움이 깃들지 못하면 우리 넋은 어떤 모습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기에 한국말을 배우고 씁니다. 한국에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니 이웃과 오순도순 주고받을 아름다운 한국말을 살핍니다. 우리는 어떤 보금자리와 마을을 가꾸면서 어떤 말빛을 밝힐 때에 즐거울는지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어떤 글내음을 퍼뜨리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에 사랑스러울는지 생각합니다.


  말 한 마디는 천 냥 빚을 갚을 뿐 아니라, 말 한 마디가 씨앗이 되어 고운 빛으로 거듭납니다. 콩을 심은 곳에서 콩이 나듯이, 따뜻한 말 한 마디 심은 자리에서 따뜻한 말이 사랑스럽게 태어납니다. 새봄에 새롭게 눈부신 봄빛을 마음속으로 그려요. 내 마음을 살찌울 ‘봄말’ 한 마디 그려요. 스스로 마음밭에 씨앗 한 톨 심듯이 말빛을 북돋우면, 이 말빛이 이웃한테 살그마니 퍼지면서 좋은 기운으로 깃들어요. 스스로 마음자리에 나무 한 그루 돌보듯이 글내음을 보듬으면, 이 글내음이 이웃한테 시나브로 스미면서 기쁜 웃음으로 샘솟아요.


  온누리를 촉촉히 적시는 빗물을 머금으며 흐르는 구름과 같은 넋으로 말빛을 가다듬습니다. 온누리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햇볕과 같은 마음씨로 글내음을 다스립니다. 4347.3.2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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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계단 찔레꽃 울타리
질 바클렘 지음, 강경혜 옮김 / 마루벌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79



​이야기가 샘솟는 흙

― 비밀의 계단

 질 바클렘 글·그림

 강경혜 옮김

 마루벌 펴냄, 1997.5.1.



  오늘날에는 풀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르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풀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만 사람들이 풀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풀과 사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풀이 자라는 데에서 살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일하고 놀고 어울리는 곳에는 풀이 돋지 않습니다. 늘 풀을 안 보고 살다 보니, 상추를 먹으면서 상추가 풀인 줄 느끼지 못하고, 민들레가 풀 가운데 하나인 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풀을 풀로 여기지 못하는 삶이기에, 골목길뿐 아니라 아스팔트길 사이사이에 풀이 돋아도 풀인 줄 느끼지 않아요. 도시 한복판 길거리에 심은 나무 둘레에 풀이 자라도 풀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쩌다 들여다보는 이가 있어도 ‘잡초’라 말할 뿐입니다.



..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찔레꽃울타리 마을의 들쥐들은 부지런히 일하며 삽니다. 날씨가 좋을 때면 덤불 속과 주변 들판에서 꽃, 열매, 과일, 견과 들을 모아 말리거나 맛있는 잼, 절임 등을 만들어 다가올 추운 겨울을 위해 저장 창고에 잘 간직해 둡니다 ..  (1쪽)



  이 지구별에는 잡풀이 없습니다. 모두 그저 풀입니다. 쓸모가 없는 풀은 없습니다. 쓸모없이 태어나는 풀은 없습니다. 너무 마땅한 일이에요. 쓸모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쓸모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모든 사람은 저마다 쓸모가 있고 빛과 값과 넋과 사랑이 있어요. 이를 알아채거나 느끼는 사람이 있고, 이를 안 알아채거나 못 느끼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풀마다 자라는 땅이 다릅니다. 메마른 땅에서 기운차게 오르는 풀이 있습니다. 풀을 잊거나 모르는 사람은 망초나 쇠비름이 메마른 땅에서 기운차게 뻗는 모습을 보면서 소름이 돋는다 합니다. 그러나 그뿐이에요. 망초나 쇠비름은 메마른 땅에서 기운차게 뻗은 뒤 이듬해에 다시는 태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망초나 쇠비름은 가을에 시들고 겨울에 스스로 쓰러지고 나서 봄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어느새 망초잎이나 쇠비름잎은 자취조차 없습니다. 모두 흙이 됩니다. 망초잎과 쇠비름잎이 흙으로 돌아가면서, 메마르던 땅이 조금 나아지고, 조금 나아진 땅에서는 새로운 풀이 돋습니다. 새로운 풀은 가을에 시들고 겨울에 말라죽으면서 흙으로 돌아가 봄부터 또 다른 새 풀이 돋을 흙이 되어 줍니다. 해마다 땅은 천천히 기름진 흙으로 바뀝니다. 기름진 흙으로 바뀌면서, 이런 땅에 나무씨앗이 드리워 천천히 나무가 자라면서, 어느새 숲이 이루어지지요.




  흙이 되살아난 곳이 숲이 되기까지 제법 기나긴 해가 걸립니다. 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은 풀과 흙이 서로 어떤 사이인지 모르기 일쑤요, 생각조차 않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큰나무를 베어 장작이나 기둥이나 종이로 만들어 쓸 생각은 하지만, 이 나무가 다시 자라기까지 숲에 어떤 일이 있어야 하는가를 헤아리지 못해요.


  다만, 이렇게 해마다 차츰 나아지는 흙인데, 농약을 함부로 뿌리거나 비료를 마구 치면 흙은 죽고 맙니다. 흙은 풀을 받아들여 흙이 되지, 농약이나 비료를 받아들이면 사막이 됩니다. 농약이나 비료는 흙을 죽음터로 바꾸어 놓습니다.



.. 앵초와 머위는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둘만이 아는 비밀의 계단을 올라가서 재미있게 놀 생각에 젖어 있었습니다. 곧 두 아이는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고 그러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  (30쪽)



  질 바클렘 님이 빚은 그림책 《비밀의 계단》(마루벌,1997)을 읽습니다. 들쥐를 사람에 빗대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목숨은 모두 들쥐이지만, 이 들쥐가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들 하루입니다. 겉모습만 들쥐요, 모두 사람살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숲에서 얻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책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숲에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숲에서 얻으면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하루를 누리며 잔치를 자주 열어요. 언제나 기쁨이요 사랑이니 언제나 잔치입니다. 흥청망청 노닥거리는 잔치가 아니라, 삶을 노래하면서 웃음꽃으로 춤추는 잔치입니다. 술에 저는 잔치가 아니라, 삶을 즐기면서 어깨동무하는 잔치입니다.


  어른은 삶을 물려줍니다. 아이는 삶을 물려받습니다. 어른은 어른 나름대로 아름답다고 여긴 삶을 누리면서 물려줍니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어른한테서 아름답구나 싶은 삶을 가려서 물려받습니다.


  어떤 삶을 물려주고 싶은가요. 어떤 삶을 물려받고 싶은가요. 어떤 땅에서 자라는 나무가 아름다운가요. 어떤 흙을 우리 곁에 두어 어떤 풀이 돋는 모습을 기쁘게 바라보고 싶은가요. 흙을 알 때에 풀을 알고, 풀을 알 때에 나무를 알며, 나무를 알 때에 숲을 알아, 숲을 알 때에 삶을 압니다. 삶을 알아야 사랑을 알고, 사랑을 알아야 사람을 알며, 사람을 알 때에 마음을 아는데, 마음을 알면서 비로소 이야기를 알고, 이야기를 아는 사이에 시나브로 흙을 깨닫습니다. 이야기가 샘솟는 흙을 깨닫지요. 4347.4.2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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