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에 미우치 단편 1 - 요귀비전
스즈에 미우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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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39



마음을 움직이는 힘

― 스즈에 미우치 단편 1 요귀비전

 스즈에 미우치 글·그림

 대원씨아이 펴냄, 2005.6.15.



  땅거미가 질 무렵 나타나는 박쥐를 보며 무섭다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박쥐이든 생쥐이든 무섭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후드득 날아가면 깜짝 놀랄 만합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박쥐도 사람이 무서울 만해요. 박쥐로서는 사람을 놀래키면서 재빨리 내빼려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박쥐가 무서웁다면 왜 무서울까 생각해 봅니다. 방송이나 영화에서 박쥐를 무섭게 그리기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이나 만화에서 박쥐를 으레 무섭게 보여주려 하기 때문은 아니랴 싶습니다.


  이를테면, 뱀을 무섭게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개구리도 두꺼비도 무섭다고 할 까닭이 없습니다. 지네도 나방도 무서울 까닭이 없어요. 모두 다른 목숨이고, 저마다 다른 숨결로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이웃일 뿐입니다.





- “아무도 없는 백화점 안은 꼭 무덤 같아.” (53쪽)

- ‘미야노우치, 요귀비! 지하감옥과 그 기묘한 인형무리. 아흑왕! 우리가 본 건 대체 뭐지?’ (107쪽)

- “불타고 있는 게 아니야, 캐롤. 숲이 모래와 싸우는 거야. 잎이 갈가리 찢겨지고 가지가 꺾이고 쓰러져 파묻히면서도 어떻게든 살려고 하는 거야. 레노아 마을의 주민도 200년 전부터 싸워 왔어. 저 숲처럼. 파묻히고 파괴당하면서 공격해 오는 모래와 몇 번이고 몇번이고 싸워 왔어. 누가 뭐래도 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토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거야. 살아남으려면 모래를 막아 줄 숲이 필요했어. 저런 숲이라도 마을 사람들에겐 신과 같은 존재지.” (341쪽)



  누군가는 박쥐나 뱀을 무서워 할 만하지만, 도시에서 박쥐나 뱀이 나올 일은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누군가는 범이나 곰을 무서워 할 만하지만, 도시뿐 아니라 이 나라 시골에서 범이나 곰을 만날 일은 아예 없다고 할 만해요. 정작 무서운 무엇인가를 꼽으라 하면, 바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 못지않게 무서운 무엇인가를 들라 하면, 자동차나 전쟁무기나 핵발전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송전탑이 무섭고 댐이 무섭습니다. 화학공장이 무섭고 농약이 무섭습니다. 바다에서 뒤집히면서 기름을 엄청나게 흘리는 배가 무섭습니다. 흙과 물을 모두 죽이는 쓰레기를 내놓는 공장이 무섭습니다.


  하나하나 따진다면, 오늘날 사회는 사람이 스스로 만든 무서운 것투성이입니다. 사람은 사람이 스스로 무섭도록 문명이 치닫습니다.


  때로는 학력차별이 무섭습니다. 때로는 남녀차별이 무섭습니다. 때로는 따돌림과 괴롭힘이 무섭습니다. 때로는 정치와 경제가 무섭습니다. 때로는 언론 매체가 무섭고, 때로는 제도권 교육과 신분 사회가 무섭습니다. 경찰이나 군인이 무섭기도 하고, 돈이나 카드회사가 무섭기도 합니다.





- “실은 이때부터 요귀비는 자신의 힘을 깨닫고 힘을 키우기 시작했던 모양이야.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잡을 수 없고, 말도 못 했지. 그래서 차츰 염력으로 물건을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 같아.” (125쪽)

- “가면을 쓰고 남의 눈을 피했지만, 이윽고 나의 몸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숨이 끊어지고 심장소리도 멈췄는데 그래도 내 영혼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지. 이 추한 몸은 그저 영혼을 담아두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는걸!” (163쪽)



  《스즈에 미우치 단편 1 요귀비전》(대원씨아이,2005)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스즈에 미우치 님이 짤막하게 그렸다고 하지만, 그리 짧지 않은 만화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스즈에 미우치 단편》에 나오는 작품은 어느 모로 보면 《유리가면》과 이어집니다. 《유리가면》에 흐르는 수많은 이야기는 《스즈에 미우치 단편》에 흐르는 여러 이야기와 맞닿습니다.


  이 작품과 저 작품 모두 마음을 다룹니다. 짧게 그린 만화도 《유리가면》도 우리 삶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을 다룹니다. 사랑을 그리는 마음을 다룹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이 되는가를 다룹니다. 즐거움을 나누는 마음을 다루고, 두려움이 찾아들면서 덜덜 떠는 마음과 두려움을 털어내려는 마음을 다룹니다.





- ‘난 완전히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문득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지하철 미야노우치역 저편은 대체 어디로 통하고 있을까 하고.’ (183쪽)

- ‘분신사바니 지박령이니 제령이니 심령사진이니 하는 건, 나와는 상관없는 책에서나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설마 정말로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내가 직접 경험하게 되다니.’ (224쪽)



  누군가는 풀을 맛있게 먹습니다. 누군가는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습니다. 누군가는 물 한 잔을 마시면서 배가 부릅니다. 누군가는 밥그릇을 여럿 비워도 배가 고프다고 합니다.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을 덜어 이웃과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을 던 일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밥그릇을 아예 통째로 이웃한테 건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웃이 굶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어버이가 아플 적에 곁에서 아픈 어버이를 돌본다면, 우리 가운데 아픈 어버이한테서 ‘돌봄삯’을 받을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나,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은 어버이를 돌보면서 돈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동무가 아프거나 이웃이 아플 적에도 돈을 받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해요. 아픈 동무나 이웃한테 죽을 끓여서 내밀면서 ‘죽값’을 받을 생각은 아닐 테지요.


  그러면, 어디까지 이웃이고, 어디까지 동무일까요. 내 이웃과 살가운 이웃이라면? 내 동무와 아주 가까운 동무라면? 내 동무와 아주 가까운 동무하고 아주 가까운 동무라면? 우리 마음은 어디까지 즐겁게 손길을 내밀고, 우리 마음은 어디부터 돈을 바랄 만할까요?





- “너 자신이 코모리 사요코의 영혼과 싸워야 한다. 널 죽이려는 저주에 대항해 살고 싶다고 강하게 비는 거야. 그리고 사요코의 저주를 물리치는 거다. 살아야겠다는 각오로 영혼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줘서는 안 돼. 만약 조금이라도 그 신념이 무너지거나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면 넌 죽는다. 사고일지 병일지 알 수는 없지만 결국 죽게 될 거다!” (238쪽)

-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하느님, 살려 주세요! 죽고 싶지 않아. 코모리 사요코! 난 이 세상에 살아서 하고 싶은 일이 아직도 잔뜩 있어! 살고 싶어!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아!’ (240쪽)



  온누리에는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꼭 한 가지 있으리라 느껴요. 무서움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장 무서우리라 느낍니다. 무서움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서운 것이 없으리라 느껴요.


  온누리에는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다고 느낄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하면 어디에서나 사랑을 심고 꽃피우며 가꿉니다. 내 마음이 사랑으로 아름다우면, 나 스스로 즐겁게 웃으면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합니다.


  마음에 따라 삶이 다릅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삶을 다르게 일굽니다. 마음을 읽으면서 삶을 읽습니다. 마음을 아끼면서 이웃을 아낍니다. 마음을 빛내면서 하루를 새롭게 빛내고, 마음을 노래하면서 언제나 기쁘게 노래합니다. 4347.5.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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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2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4-05-12 20:21   좋아요 0 | URL
잘 날아갔네요.
한국에서는 거의 사랑받지 못해서
아마 초판만 찍고 재판을 못 찍지 않았나 싶은 책인데,
우연하게 한 권을 보았어요.
잘 아끼고 사랑해 주는 분 손길을 타면
예쁜 이야기가 되살아나리라 생각해요~
 

오진령 지음 / 이안북스(IANNBOOKS)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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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71



노래하고 사랑하는 사진

― 짓

 오진령 사진

 이안북스 펴냄, 2014.4.1.



  비가 오고 집안에 지네가 볼볼 기어다닙니다. 벌써 지네가 깨어나 볼볼 기어다니는 철이 되었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달에도 한 마리를 보았어요. 집에서 기어다니는 지네를 얼른 잡아서 풀밭에 휙 던진 적이 있어요. 오늘 본 지네도 잡아서 바깥 풀밭에 휙 던질까 하다가 방바닥에 불을 넣기로 합니다. 낮부터 비가 죽죽 내려서 집안이 축축하니 지네가 들어오나 싶습니다.


  비가 오면서 바람이 세게 붑니다.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고, 바람 따라 나무가 휘청휘청 흔들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렇게 바람이 불고 나면 오월에 핀 꽃은 잎이 많이 떨어져요. 비를 맞고 잎이 떨어지기도 하고, 또 비바람 따라 들딸기알이 툭툭 떨어지기도 합니다.


  빗줄기가 제법 굵습니다. 비가 내리는 시골길을 우산을 받고 거닙니다. 곳곳에서 흙물이 흐릅니다. 가는 비가 내리든 굵은 비가 내리든, 요즈음은 어느 시골에서나 흙물이 흐릅니다. 비가 여러 날 내리고 난 뒤 마을 논밭을 보면, 어느 밭자락은 흙이 많이 쓸려서 갈라지기까지 합니다. 해마다 적잖은 시골집에서 흙을 사다가 논밭에 붓습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 봄을 맞이해서 씨앗을 뿌릴 즈음, 참말 여느 시골 논밭은 흙이 메말라요. 비료와 농약으로 고단하게 한 해를 보냈으니 흙이 메마르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모든 곳에서 흙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풀이 자라지 않는 땅에서만 흙물이 흐릅니다. 이를테면, 고추와 마늘만 심고는 다른 풀은 한 포기도 못 자라도록 다 뽑거나 약을 쳐서 죽이는 논밭에서는 어김없이 흙물이 흐릅니다. 논둑에 아무 풀이 없도록 다 깎거나 태우거나 농약을 뿌려 없앤 곳에서도 반드시 흙물이 흘러 논둑이 무너집니다. 이와 달리, 여느 풀이 옹기종기 자라는 곳에서는 흙물이 덜 흐르거나 안 흐릅니다. 참말, 풀이 수북하게 자란 곳에서는 빗물이 고이기는 하더라도 흙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풀이 흙을 단단하게 붙잡으니 흙이 쓸리지 않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오진령 님 사진책 《짓》(이안북스,2014)을 가만히 읽습니다. 어느덧 한 달 째 책상맡에 놓고 틈틈이 들여다보는 사진책 《짓》을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오진령 님은 사진책 끝자락에서 “사람들은 웃는다. 살며 웃고, 사랑하며 웃고, 감사하며 웃고, 행복하며 웃고, 기쁨에 웃고, 슬픔에 웃으며, 울다가 웃고, 헤어질 때 웃고, 머쓱해서 웃고, 주고받으며 웃고, 절망에 웃고, 실패하여 웃고.” 하고 이야기합니다. 즐거울 때에 웃고, 슬플 때에 웃습니다. 즐겁게 울다가 때때로 웃고, 슬프게 울다가 다시금 웃어요.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에 담은 모습은 웃음일까요 눈물일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웃을까요 울까요. 사진을 읽는 사람은 웃는가요 우는가요.




  우리는 저마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빛을 사진으로 찍어서 이웃한테 보여주는가요. 우리는 스스로 어떤 보금자리를 가꾸면서 어떤 노래를 사진으로 담아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려는 생각인가요.


  오진령 님은 “절규하며 웃고, 진심을 담아 웃고, 진실을 감추며 웃으며, 웃기 위해 웃고, 그렇게 너와 내가 만나 웃는다.” 하고 덧붙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렇습니다. 밥을 차리면서 웃습니다. 빨래를 하면서 웃습니다. 자장노래를 부르면서 웃습니다. 아이를 안으면서 웃습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서 웃습니다. 책을 읽다가 웃습니다. 영화나 만화를 보면서 웃습니다.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웃어요. 버스를 탈 적에 웃고, 기차에서 내리면서 웃습니다.


  가만히 보면 삶은 웃음입니다. 맛난 밥을 먹으면서 웃습니다. 참 맛없는 밥을 먹다가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잘 끓인 미역국을 먹으면서 웃습니다. 엉성하게 끓여 엉성한 미역국을 먹다가 하하 웃습니다.


  맛있게 지은 밥이라면 다음에도 맛있게 지어서 먹으면 즐거워요. 맛없게 지은 밥이라면 다음에는 맛있게 지어서 먹자고 생각하며 즐겁습니다. 넘어지지 않고 잘 달리면 안 넘어졌으니 즐겁습니다. 자꾸 넘어지다가 무릎이 깨지면 아파서 쩔뚝거리면서도 다음에는 안 넘어지고 잘 뛰놀자고 하면서 즐겁습니다.






  사진책 《짓》은 우리 삶에서 어떤 이야기를 가만히 비추는 빛일까 헤아려 봅니다. 사진책 《짓》을 빚은 오진령 님은 이녁 이웃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에 이와 같은 빛을 이루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진령 님은 “얼굴, 그 헐벗은 곳에서, 마치 인생을 대변하듯, 주름진 굴곡들 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날리면서, 견디고, 차갑고 강한 바람, 뜨거운 태양 아래 눈물, 콧물, 그리고, 땀, 반복하여 호흡한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하, 그렇지요.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하듯이 사진을 찍습니다. 숨을 쉬듯이 사진을 찍습니다.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콧물을 흘리듯이 사진을 찍습니다. 햇볕이 뜨겁다고 느끼는 여름에 사진을 찍습니다. 햇볕이 따스하다고 느끼는 겨울에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찍습니다. 사진은 어디에서나 찍습니다. 사진을 못 찍을 날은 없습니다. 사진을 못 찍을 곳은 없습니다. 스스로 이야기를 빚으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스스로 웃고 울며 노래하기에 사진을 찍어요.


  오진령 님이 사진에 담아서 보여주는 웃음이란 무엇일까요. “한 사람이 웃는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웃음, 현재의 웃음이 아닌 웃음, 이 세상을 향하고 있지 않은 그런 웃음, 생의 터널 밖을 향한 소멸의 순간에 웃음, 시간이 멈추어 버린 호흡하지 않는 웃음을 본다.”와 같은 이야기처럼, 웃음은 어제와 오늘을 이어 모레와 글피로 나아갑니다. 삶은 어제와 오늘을 지나 모레와 글피로 뻗습니다.






  빗소리가 굵습니다. 굵은 빗소리에 개구리 노랫소리가 잠깁니다. 어쩌면, 개구리는 이 굵은 빗줄기에 가만히 쉴는지 몰라요. 개구리도 빗소리를 듣느라 노래를 안 부를는지 몰라요. 어서 비가 그쳐서 저희 노래를 들과 숲에 가득 퍼뜨리고 싶을는지 모릅니다.


  옛날이라면, 이 비를 맞고 떨어진 꽃잎은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옛날이라면, 이 비가 내리는 오월에 헌 잎을 떨구는 동백나무나 후박나무 잎사귀는 흙으로 돌아갔어요. 그러나 오늘날은 이 비를 맞고 떨어지는 꽃잎이나 나뭇잎은 흙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꽃잎도 나뭇잎도 시멘트 바닥이나 아스팔트 바닥에서 구릅니다. 갈 곳이 없어 헤맵니다. 따로 청소 일꾼이 있어야 잎사귀를 쓸어서 쓰레기봉투에 담습니다. 잎이 흙이 아닌 쓰레기봉투로 들어가면서 나무 둘레가 허전해요. 흙에 제 빛을 잃습니다.


  그러면, 제 빛을 잃는 흙을 알아보는 오늘날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제 빛이 사라진 흙과 풀과 나무를 알아차리는 오늘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제 빛을 잃는 흙을 이야기하는 교과서나 책이나 매체는 얼마나 있을까요. 제 빛이 사라지는 흙과 풀과 나무를 되살리려고 애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오진령 님은 “그들이 누구이고 왜 웃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웃음은 웃음으로, 영원한 순간이 되도록.” 하고 이야기합니다. 웃음은 웃음으로 사진을 찍을 뿐이라 합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웃음은 웃음으로 찍고, 웃음은 웃음으로 나눕니다. 노래는 노래로 찍으며, 노래는 노래로 나누어요.


  사랑은 사랑으로 받습니다. 눈물은 눈물로 받습니다. 바람이 맑게 불면 내 몸과 마음도 맑습니다. 바람이 차디차게 불면 내 몸과 마음도 차디찹니다.


  노래하고 사랑하는 사진이 되는 길이라면, 노래하고 사랑하는 삶이 되는 길이리라 느껴요. 웃고 꿈꾸는 사진이 되는 길이라면, 웃고 꿈꾸는 삶이 되는 길이리라 느껴요. 바라보는 대로 삶을 짓고, 바라보는 대로 짓는 삶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태어납니다. 마주하는 대로 삶을 이루고, 마주하는 대로 이루는 삶이 차곡차곡 사진으로 거듭납니다. 삶짓이 그대로 사진짓입니다. 사랑짓이 그대로 사진짓입니다. 말짓과 몸짓과 꿈짓이 그대로 사진짓입니다. 하늘을 우러르듯이, 숨을 쉬듯이, 물을 마시고 밥을 먹듯이, 사진은 우리 삶을 살뜰히 보여주는 노래입니다. 4347.5.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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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삶창시선 39
함순례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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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55



시와 눈물밥

― 혹시나

 함순례 글

 삶창 펴냄, 2013.12.6.



  오월이 무르익습니다. 우리 집 뒤꼍에서 자라는 복숭아나무 한 그루는 어느새 복숭아알을 몇 맺습니다. 아직 조그마한 알입니다. 지난해에 심은 자그마한 나무인데 올해에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맺습니다. 씩씩한 복숭아나무를 바라보면서 대견하구나 싶고 빙그레 웃음이 납니다. 아이들을 불러 복숭아나무한테 인사합니다. 복숭아알을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라고 얘기합니다.


  뒤꼍에서 자라는 감나무와 탱자나무에 하늘타리 넝쿨이 꽤 올라옵니다. 어느새 또 올라왔느냐 싶어 가시에 찔리면서 두둑두둑 뜯습니다. 너희가 나무 말고 돌울타리를 타고 자라면 그대로 두는데, 왜 나무를 타고 자라니. 너희가 나무를 타고 자라니 나뭇가지가 아프고 힘들어 하는구나. 너희한테 안 된 일이지만, 다른 데에서 자라면 어떻겠니.


  하늘타리잎은 쌈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하늘타리 열매는 여러 곳에서 약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늘타리뿌리도 무엇엔가 쓰지 싶습니다. 해마다 하늘타리는 이 나무 저 나무를 감돌고 자랍니다. 이레쯤 눈여겨보지 않으면 어느새 나무마다 친친 감습니다. 등나무나 칡처럼 넝쿨이 빠르게 뻗습니다.



.. 나는 왜 누가 내놓은 길만 따라왔는지 / 이 겨울 산골에 들어온 건 / 사랑을 놓치고 사랑에 서러워서였네 ..  (담양)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되면, 하늘타리잎은 모두 마릅니다. 잎이 모두 떨어집니다. 이러면서 하늘타리 넝쿨줄기도 죽는가 하고 생각하는데, 이듬해 봄에 보면, 말랐다 싶은 넝쿨줄기에서 새롭게 잎이 돋습니다. 죽은 듯이 보이지만 죽은 넝쿨줄기가 아니에요. 말랐거니 하고 나무에 얽힌 넝쿨을 그대로 두면 더 굵고 단단하게 나무를 감싸고 오릅니다.


  넝쿨도 넝쿨대로 자랄 뜻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틀림없이 무엇인가 할 일이 있어 감나무도 감싸고 뽕나무도 모과나무도 매화나무도 감싸면서 오르리라 생각해요.


  무엇일까요. 넝쿨줄기는 왜 온갖 나무마다 감싸면서 오르려 할까요.


  숲에서도 넝쿨줄기가 이처럼 뻗을까요. 어떤 나무는 넝쿨줄기한테 몸을 모조리 빼앗깁니다. 어떤 나무는 넝쿨줄기가 깃들지 않습니다. 어떤 나무는 넝쿨줄기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저마다 어떤 삶이거나 숨결일까 궁금합니다.



.. 나무에 깃들어 붉은 열매 쪼아 먹고 / 이파리를 갉아 먹던 / 벌레들의 생애가 한순간에 지나간 것이다 / 누군가는 까치발 세워 그 자릴 건너가고 / 누군가는 아예 멀리 돌아가고 / 몇몇은 성큼성큼 밟고 간다 ..  (검은무당벌레)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있는 놀이터에 마실을 갑니다. 초등학교에 들어서서 자전거를 세우기 무섭게, 두 아이는 놀이터로 달려갑니다. 토요일 낮, 초등학교 운동장은 조용합니다.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가 백 남짓 되는데, 아무도 토요일 낮에 이곳에서 놀지 않습니다.


  면소재지 초등학교라 하더라도 꽤 먼 데서 노란버스를 타고 다니는 아이가 많습니다. 면소재지 어린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집에서 인터넷게임을 할는지 모르고, 이냥저냥 마당에서 놀거나 텔레비전을 볼는지 모릅니다. 시골에 살면서 바다나 숲이나 들로 나들이를 가는 어린이는 거의 없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어버이 일손을 거들면서 바닷일이나 들일을 하는 어린이 또한 거의 없습니다.



.. 하루쯤 학원 좀 쉬자 하더니 / 내가 잠시 조는 틈에 사라진 아들 녀석 / 얼굴 뿔그족족 술 냄새 확 풍기며 돌아왔다 ..  (술국)



  아이들은 배부르면 사이좋게 잘 놉니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난 뒤 개운한 몸으로 상냥하게 잘 놉니다. 아이들은 배고플 적에 곧잘 툭탁거립니다. 아이들은 졸음이 몰려들면 떼를 쓰거나 투정을 부립니다.


  어른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어른은 가난하기 때문에 서로 다투고 마나요. 어른은 주머니가 후줄근하기에 웃음기 없이 차가운 낯빛으로 살아가나요. 어른은 언제나 고단하기에 스스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서 손전화 기계나 텔레비전을 멍하니 들여다보면서 하루를 보내는가요.



.. 서울 모퉁이에 / 집 한 채 들였습니다 / 웃풍 심한 살림에도 찡그림 없던 / 시누이 / 저리 펄펄 납니다 ..  (첫눈)



  함순례 님 시집 《혹시나》(삶창,2013)를 읽습니다. 눈물밥을 먹으면서 지낸 이야기를 싯말로 읽습니다. 눈물밥과 함께 곧잘 누리던 웃음밥 이야기를 싯말로 읽습니다. 삶에는 눈물밥도 있고 웃음밥도 있구나 싶습니다. 눈물밥만 있는 삶은 없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웃음밥만 있는 삶도 없을까요. 웃음밥만 짓는 삶은 참말 없을까요. 노래밥을 짓고, 춤밥을 지으며, 이야기밥을 짓는 삶은 어디에 있을까요. 꿈밥과 사랑밥을 짓는 삶은 누가 어디에서 지을 수 있는가요.



.. 사대강 사업으로 뒤틀린 금강 자락 / 차고 높은 나포길에서 / 우린 사이좋게 / 장딴지에 힘주고 칼바람을 밀고 나갔다 ..  (금강하구언, 차고 높은)



  햇볕이 누그러지는 때부터 개구리가 논마다 울어댑니다. 햇볕이 기울 즈음 개구리 노래는 한껏 솟습니다. 달이 뜨고 별이 돋을 무렵 개구리는 그예 노래잔치입니다. 시골마을에 마지막 군내버스가 끊기는 여덟 시 반 언저리에는 온통 왁왁 소리로 가득합니다. 멧골에서 노래하는 멧새 노래는 개구리 노래에 잠깁니다.


  아이들을 재웁니다. 모기 한 마리가 내 뒷통수로 윙 나는 소리가 들려 잽싸게 손바닥을 찰싹 맞부딪습니다. 모기가 살짝 걸렸으나 잡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자는 방은 문을 가만히 닫고 불을 켭니다. 내 손바닥에 살짝 스친 모기가 방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재빨리 왼손바닥으로 모기를 철썩 내리칩니다. 모기 주검은 내 손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습니다. 부엌으로 가서 손바닥을 씻습니다. 작은아이가 낮에 먹다가 남긴 밥그릇을 봅니다. 아이들이 저녁에 남긴 밥은 내가 치워야지요.


  깔깔대고 놀다가 서로 툭탁거리기도 하던 아이들은 새근새근 가늘게 숨소리를 내며 잡니다.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깁니다. 두 아이 사이에 가만히 누워서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작은아이가 노랫소리를 듣고 살짝 깹니다. 그대로 이마를 쓸어넘깁니다. 코코 자고 아침에 다시 즐겁게 일어나서 웃음꽃을 피우렴. 새 하루에 새로운 웃음으로 이야기보따리를 꾸리렴. 4347.5.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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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가 - 도종환 시인의
도종환 지음, 안선재 옮김, 김슬기 그림 / 바우솔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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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87



자장노래 부르는 어버이

― 도종환 시인의 자장가

 도종환 글

 김슬기 그림

 바우솔 펴냄, 2012.12.21.



  아이들은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달게 잡니다. 아이들은 풀벌레와 개구리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곱게 잡니다. 아이들은 밤새나 낮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맑게 잡니다. 아이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물소리, 풀소리, 벌레소리, 개구리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기쁘게 맞아들여 새근새근 잡니다.


  아주 고단한 아이는 시끌벅적한 도시 한복판이나 전철이나 버스에서도 자요. 너무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곁에 따사로운 어버이가 있으면, 아이는 아무리 시끄럽거나 어지러운 곳에서도 마음을 살포시 놓고 즐겁게 꿈나라로 갑니다.





.. 강아지는 문간에서 어두워도 혼자 자고 ..



  시골집에 아침이 밝습니다. 창호종이 바른 문으로 밝은 빛이 스며듭니다. 큰아이가 먼저 잠을 깨고, 이윽고 작은아이가 잠을 깹니다. 잠을 깬 아이들은 저녁까지 내처 뛰놉니다. 햇빛을 즐기고 햇볕을 쬐며 햇살을 먹으면서 하루 내내 새로운 놀이로 웃습니다.


  달게 자고 일어난 아이는 개운합니다. 곱게 자고 일어난 아이는 싱그럽습니다. 맑게 자고 일어난 아이는 까르르 노래합니다.


  어버이는 아침을 차립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힙니다. 아이는 스스로 뛰거나 달립니다. 아이는 스스로 그림책을 손에 쥐기도 하고, 가위를 들어 종이를 오리기도 합니다. 흙땅에 퍼질러앉아 흙을 조물거리고, 풀밭에 서서 작은 들꽃을 찾습니다.




.. 뻐꾸기야 울지 마라, 우리 아기 아직 잔다 ..



  도종환 님이 쓴 글에 김슬기 님이 그림을 붙인 《도종환 시인의 자장가》(바우솔,2012)를 읽습니다. 자장자장 포근한 노래가 흐릅니다. 해 지고 깜깜한 밤에 뜬 별과 달이 예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어머니는 빙그레 웃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방그레 웃습니다. 서로 웃으면서 말없이 잠자리에 듭니다. 같이 웃음지으면서 조용히 잠자리에 들어요.



.. 혼자 자는 벌레들은 나뭇잎이 재워 주고 ..




  고운 노래가 흐르는 그림책이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몇 가지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어머니가 아이를 안는 매무새가 엉성합니다. 그림책으로 보자면 아이는 세 살쯤 되지 싶습니다. 세 살이라면 혼자서 씩씩하고 걷고 콩콩콩 뛸 나이일 텐데, 이 아이를 재우면서 품에 안는다면, 머리를 한손으로 받쳐야 합니다. 네 살이나 다섯 살 아이를 품에 안아도 똑같아요. 아이들이 자라며 다리가 길면 다리는 가만히 모으더라도, 무엇보다 머리를 잘 받쳐야 합니다. 게다가 자는 아이인걸요. 그렇지만, 그림책 《도종환 시인의 자장가》에 나오는 그림을 보면, 어머니가 아이 머리를 받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아이는 잠들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머리를 안 받치는데, 아이가 이 그림책에 나오는 모습대로 잠들 수 없어요.


  만화와 비슷한 그림으로 그려도, 어머니와 아이 손이 너무 작습니다. 손을 얼굴 크기만 하게 그려서, 그야말로 ‘포근히’ 재우는 결이 드러나도록 해야지 싶습니다. 그리고, 손은 얼굴을 가릴 만큼 큽니다. 아이 손도 아이 얼굴을 가릴 만큼 큽니다.


  도시가 아닌 시골이고, 전깃불이 하나도 없으나, 별이 너무 적습니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이 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별자리를 더 살펴, 봄날에 알맞게 별자리 무늬를 그릴 수 있으면 훨씬 나았겠지요. 이밖에, 나무를 모두 똑같이 그린 대목도 아쉽습니다. 마당이나 마을에 똑같은 나무만 있지 않을 텐데, 나무가 모두 똑같이 생겼어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쓴 글에 일론 비클란드 님이 그림을 넣은 그림책을 보면, 일론 비클란드 님은 스웨덴 마을이나 시내를 그리면서 ‘나무를 다 다르게 그려 넣’습니다. 아주 마땅하거든요. 똑같은 나무만 줄줄이 심는 일이 없거든요. 그리고, 나무마다 잎빛이 모두 달라요. 그림책 《도종환 시인의 자장가》는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아닌 봄을 바탕으로 그렸지 싶어요. 그러면, 봄빛 나무를 그려야 할 텐데, 봄날 숲으로 가면, 나무마다 잎빛이 얼마나 알록달록한 풀빛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짚자면, 서양 자장노래가 아닌 한국 자장노래라 한다면, 어머니와 아이가 같은 방에서 자야 맞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즈음은 한국에서도 어머니와 아이가 다른 방에서 잘는지 모르는데, 우리 겨레는 예부터 조그마한 시골집에서 온 식구가 모두 모여서 잤어요. 자장노래는 어른도 듣고 아이도 듣습니다. 아이한테 따로 놀이방이 있다 하더라도, 잠을 잘 적에는 어버이와 아이가 같은 방에서 새근새근 자면서 어버이가 한손으로 아이 가슴을 토닥이는 모습이 ‘한겨레 자장노래와 자장빛’답다고 하리라 느낍니다. 이 그림책 끝에 영어로 자장노래를 옮긴 만큼, 외국사람한테 한겨레 자장노래를 알리려 한다면, 그림결은 더더욱 한겨레 삶을 담아야지 싶어요.


  고운 노래가 흐르는 그림책인 만큼, 글빛이 환할 수 있도록 그림빛에 더 마음을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4347.5.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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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르에게 배우는 식물 이야기 철수와영희 생명수업 첫걸음 1
노정임 지음, 안경자 그림, 이정모 감수, 바람하늘지기 / 철수와영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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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86



꽃내음을 먹고 살아간다

― 파브르에게 배우는 식물 이야기

 바람하늘지기 기획

 노정임 글

 안경자 그림

 철수와영희 펴냄, 2014.5.5.



  꽃마다 꽃내음이 다릅니다. 바람이 싱그럽게 부는 날 꽃 옆에 서면 꽃에서 풍기는 냄새가 코와 입과 눈과 살결에 가득 스며듭니다. 아침에 우리 집 마당에서 풀을 뜯을라치면, 초피나무에서 피어난 초피꽃내음이 물큰 스며듭니다. 꽃내음이 워낙 짙어 가끔 머리가 어질어질합니다. 초피나무 옆에는 후박나무가 우람하게 있는데, 초피꽃과 후박꽃은 나란히 핍니다. 초피꽃내음에 후박꽃내음이 곁들이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릅니다. 게다가 사월 한 달 동안 갓꽃내음과 유채꽃내음이 뒤섞이니 더욱 싱그러워요.


  동백꽃 옆에 서면 동백꽃내음을 맡습니다. 매화꽃이 피면 매화꽃내음을 맡습니다. 모과나무 옆에서는 모과꽃내음을 맡습니다. 올망졸망 피어난 봄까지꽃을 바라보며 쪼그려앉으면 봄까지꽃내음이 확 퍼집니다. 고개를 들이밀어 꽃마리꽃내음을 맡기도 합니다. 흔하게 피어나는 민들레꽃내음을 흰꽃과 노란꽃이 얼마나 다른가 헤아리며 맡기도 합니다.


  살갈퀴꽃내음을 맡다가 꽃술 그대로 달린 풀줄기를 톡 끊어서 냠냠 먹습니다. 돌나물에 노랗게 꽃이 올라와도 꽃과 함께 즐겁게 먹습니다. 오월에 눈부시게 피어나는 찔레꽃을 살그마니 뜯으면서 손과 혀에 찔레꽃내음이 감돌아요.




.. ‘식물과 동물은 형제’라는 걸 알아보러 이번에는 바닷속으로 가 보자. 그림은 바다에 사는 산호들이야. 산호는 식물 아니냐고? 겉모습은 작은 나무같이 생겼지만, 산호는 식물이 아니라 동물이야 … 이 돌기는 식물의 싹인 ‘눈’과 비슷해. 새로운 히드라와 폴립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도 줄기에 붙은 ‘눈’에서 잎과 꽃이 뻗어 나오는 거야. ‘눈’은 식물의 아기인 거지 ..  (18, 21쪽)



  꽃마다 냄새가 다르듯이 잎마다 냄새가 다릅니다. 꽃이 진 나무 곁에 서면 짙푸른 잎사귀에서 잎내음이 퍼집니다. 바람이 불든 안 불든 잎내음이 집 둘레를 감돕니다. 시골에서 살거나 도시에서 살거나 마당을 두어 나무를 돌볼 수 있다면 언제나 잎내음을 누릴 수 있어요. 그리고, 잎내음을 누릴 때에 몸과 마음이 정갈하게 거듭나는구나 싶습니다. 꽃내음은 몸을 살찌우고 잎내음은 몸을 보듬습니다.


  그런데 어느 도감이나 사전이나 식물지를 들추더라도, 꽃내음이나 잎내음을 다룬 책이 없습니다. 어느 학자도 꽃내음이나 잎내음이 얼마나 다른가를 밝히지 못합니다. 아니, 아예 생각을 안 할는지 모릅니다. 꽃내음이나 잎내음은 학문으로 다룰 만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고, 다룰 만한 깜냥이나 깊이가 없을 수 있습니다.


  봄바람이 싱그러운 까닭은 꽃가루가 그득 깃들면서 불기 때문입니다. 여름바람이 시원한 까닭은 잎빛이 솔솔 서리면서 불기 때문입니다. 가을바람이 고운 까닭은 잎이 지면서 열매가 익는 기운이 찬찬히 스미면서 불기 때문입니다. 겨울바람이 추운 까닭은 잎이 모두 떨어지고 알몸뚱이로 겨울눈을 돌보려고 옹크리는 나무만 있기 때문입니다.





.. 나무는 해마다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면서 대개 수백 년을 살아가지. 나무가 아무리 오래되었다 해도 언제나 새롭고 젋은 나이테를 동시에 갖추고 있어 … 왜 소나무의 속심과 겉껍질을 빼고 흰 속껍질을 먹었는지 알겠지? 양분이 흐르고 있고 세포가 살아 있는 부분을 먹은 거야. 옛사람들은 참 지혜롭게도 나무의 영양이 흐르고 있고 세포가 살아 있는 부분을 알았던 거지 ..  (45, 67쪽)



  풀이 있기에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가 있기에 숲이 있습니다. 숲에는 햇볕이 드리웁니다. 숲에 비가 옵니다. 숲에 바람이 입니다. 햇볕과 비와 바람이 어우러지면서 숲을 푸르게 가꿉니다. 사람은 숲 둘레에서 집을 짓고 살림을 꾸립니다. 숲 한쪽을 일구어 들로 거느립니다. 들을 조금 거느릴 뿐, 숲은 통째로 보살피면서 나무를 얻고 땔감을 얻으며 나물을 얻습니다.


  나물은 들에서도 얻습니다. 사람이 손수 거두는 남새뿐 아니라, 남새 곁에서 자라는 모든 풀이 나물입니다. 사람이 먹지 못하는 풀은 없습니다. 사람이 쓰지 못하는 풀은 없습니다. 입에 넣어 먹거나, 실을 뽑아 옷을 짓거나, 새끼를 꼬아 신을 삼거나 바구니를 짜거나, 짚을 이어 지붕으로 삼습니다. 사람은 숲이 있기에 살아왔으며, 사람은 숲이 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구별에서 숲이 사라진다면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어요. 어떤 현대문명으로도 사람 앞날을 밝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서양문명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숲을 지키려 하지 않아요. 도시에서는 아파트를 때려짓느라 바쁘다면, 시골에서는 고속도로를 놓고 공장을 세우며 골프장을 마련하고 관광단지를 꾸릴 뿐 아니라 발전소와 송전탑을 때려막느라 바쁩니다. 들과 숲마다 농약을 뿌려 애벌레와 풀벌레를 잡느라 골을 냅니다.


  숲이 없이 얼마나 버틸까요. 한국에 숲이 사라져 외국에서 나무를 사들이고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잔뜩 사들이는데, 앞으로 이웃나라에서 돈을 손사래치면서 나무도 곡식도 열매도 푸성귀도 안 팔겠다고 하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될까요. 숲이 없이 이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는지요.





..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체가 썩지 않았다면 지구는 벌써 쓰레기더미가 되었겠지 … 잎은 햇빛이 꼭 필요해. 햇빛을 받지 못하면 누렇게 되고 잘 자라지도 못해 … 만약 식물의 잎들이 광합성을 멈춘다면? 식물 자신도 살 수 없지만, 모든 동물은 먹을 게 없어지겠지 ..  (61, 102, 113쪽)



  노정임 님이 글을 쓰고 안경자 님이 그림을 그린 《파브르에게 배우는 식물 이야기》(철수와영희,2014)를 읽습니다. ‘파브르 식물기’를 알뜰히 사랑하는 넋으로 빚은 ‘풀과 나무 이야기’입니다. 파브르한테서 배운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는 책입니다. 파브르한테서 배우고, 들한테서 배우며, 숲한테서 배운 이야기를 어린이와 함께 누리려는 책입니다.



.. 가느다란 줄기로 와글와글 모여 달린 무거운 알갱이를 매달고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바로 줄기 속에 비어 있기 때문이지. 새가 가볍게 날갯짓을 하며 몸을 하늘로 띄울 수 있는 건 날개 뼈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인 것과 비슷해 … 줄기가 해마다 새롭게 태어나듯 뿌리도 멈추어 있지 않아 … 나무마다 잎은 생김새가 다 달라.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모양을 하고 있어. 게다가 웬만하면 잎 모양을 절대 바꾸지 않아. 수억 년 전에 생긴 은행나무는 그때나 지금이나 잎 모양이 같아 ..  (72, 90, 98쪽)





  풀을 모르고서는 사람이 사람답기 어렵습니다. 꽃을 모르고서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합니다. 나무를 모르고서는 사람이 사람다운 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풀을 모를 적에는 이웃을 아끼지 않아요. 꽃을 모를 적에는 착한 넋을 가꾸지 않아요. 나무를 모를 적에는 삶을 올바로 추스르지 않아요.


  가까운 숲이나 들로 찾아가서 나무한테 몸을 기대어 헤아려 보면 좋겠어요. 풀밭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풀내음을 맡으면서 헤아려 보면 좋겠어요. 우리들은 어떤 목숨인가요. 우리들은 어느 때에 아름다운 숨결일까요. 우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누구와 어떤 삶을 지을 때에 사랑을 속삭일 수 있나요.


  꽃내음을 먹는 사람입니다. 풀내음을 마시는 사람입니다. 나무내음으로 집을 짓고 살림을 가꾸는 사람입니다. 4347.5.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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