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집 아이들


 지난 한가위에도 작은집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고, 올 설에도 작은집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다. 퍽 여러 해 작은집 아이들을 못 만났다고 느낀다. 작은집 아이들 이름을 떠올리면서, 이 아이들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하고 곱씹는데, 큰애가 중학생쯤 아닐까 했으나, 작은어머니 말씀을 들으니 큰애가 고3이요 작은애가 중3이라 한다. 설에도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동네 동무를 만나서 논다는데, 이 아이들은 큰아버지 댁에 발길을 해 본 지 꽤 되었다. 올 설에는 막내 작은집 아이들이 모처럼 함께 찾아왔다. 막내 작은집 큰애는 스물여섯, 작은애는 스물넷. 못 본 지 여러 해 지났던 만큼 이렇게 숙숙 크는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막내 작은집 작은애는 고2인가 고3때 마지막으로 보고 이렇게 보았으니 얼마만인가. 제사상을 차리고 치우는 동안 막내 작은집 아이들이 일손을 제법 거든다. 이 아이들은 알까. 저희들이 그동안 제사상 차리고 치울 때에 일손을 거의 안 도왔는 줄. 이제 이렇게 알뜰히 손길을 나누어 즐거이 도와주는 줄 깨달을까. 그러나 막내 작은집 아이들도 제사밥을 큰어머니가 어떻게 마련해서 차려 놓은 줄을 알지는 못한다. 만두를 먹고 떡을 먹고 고기를 먹고 나물을 먹고 지짐이를 먹고 닭을 먹고 하지만, 이 모든 제사밥을 밥상에 올려놓기까지 며칠에 걸쳐 몇 시간을 들여 한 땀 두 땀 사랑을 쏟았는지를 알 수는 없다.

 작은집 아이들이 보고 싶다. 작은집 아이들이 ㅅ대학교이든 서울에 있는 대학교이든 철썩 붙는 일도 좋다고 생각한다. 올해에 붙을는지 모르고 이듬해에 붙을는지 모른다. 그만 자꾸자꾸 떨어질 수도 있겠지. 대학생이 된 다음에는 명절마실을 할까. 대학생이 되고 난 다음 할 명절마실 때에는 작은집 아이들은 이 집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즐기거나 무엇을 느끼려나.

 나는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나날을 썩 좋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자로 태어나서 옆지기를 만나 아이를 낳고 살아오는 나날이면서, 이렇게 명절날 쉴새없이 씩씩하게 갖은 집일을 함께 나누어 할 수 있기에 기쁘며 신난다. 내가 여자이면서 집일을 이렇게 한다면 으레 ‘아주 마땅하다’고 여길 테지만, 내가 남자이면서 집일을 이렇게 할 때에는 참말 ‘아주 고맙다’고 여기는데, 작은집 아이들이 남자이면서 명절날 안 온다든지 명절날 아무것도 안 하며 가만히 텔레비전만 본다든지 한다면 몹시 못마땅할 터이나, 여자이면서 명절날 안 오거나 그저 텔레비전만 본다든지 하는 일은 그닥 못마땅하지 않을 뿐더러 괜찮은데, 함께 저희 어머니하고 부엌일도 하고 다른 잔일을 거들 때에는 더없이 어여쁘다고 느낀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에 앞서 사람이고, 아이이니까. 대학생이 되기 앞서 사람이 되어야 할 우리들이고, 지식인이나 비즈니스맨이나 공무원이 되기 앞서에도 사람이 되어야 할 우리들이니까. 작은집 아이들이 똑똑한 사람이 되기보다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비손을 올린다. (4344.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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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팔아요?


 모를 만한 사람이 아닌 알 만한 사람이 나한테 “책 팔아요?” 하고 물을 때에는 참 갑갑하다. 모를 만한 사람이 아닌 알 만한 사람조차 내가 ‘헌책방을 열어 장사하는’ 줄 여긴다. 이들은 내가 쓴 글을 제대로 읽기나 했을까. 이들은 내가 무엇을 하는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안다고 여길까. 이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가 나오면 어떤 뜬소문을 퍼뜨리며 다닐까.

 묵어서 좀처럼 안 보이는 헌책이나 옛책을 사고 싶으면 인터넷 검색기를 돌려서 인터넷헌책방에서 사면 그만이다. 스스로 다리품을 팔아 헌책방마실을 하기 싫으면 집에서 인터넷 켜 놓고 또닥거리면 된다. 애써 나한테 전화할 까닭이란 없다.

 그러나 나한테 책 팔라 하는 이들은 그저 책에만 눈이 멀었기 때문이니까 어쩌는 수 없다. 이 불쌍한 넋들을 어찌할 길이 없다. 나는 내가 그동안 사서 읽고 마을 도서관을 열면서 갖춘 이 책들을 팔 까닭이 없고, 팔 수 없으며, 팔 일이 없다. 도서관을 열어서 꾸리는 사람 가운데 누가 책을 팔까? 그토록 책을 갖고 싶으면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책 좀 파셔요.” 하고 여쭐 노릇이다. 아니, 이런 책들이 묵지 않도록, 새로 나왔을 때에 부디 알뜰살뜰 제값 치르며 장만해 줄 노릇이다. 널리 팔리던 때에는 장만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없다고 수선을 피운들 이 책들이 짠하고 나타날 일이란 없다.

 사람들이 참 몰라본다 싶어 하루하루 묻히는 몇 가지 묵은 헌책 이야기를 틈틈이 느낌글 하나로 적바림해 놓으면, 내가 마치 이 책들을 경매시장 같은 데에 내놓아 팔려 하는 줄 생각하나 본데, 책을 팔려면 서지사항하고 사진하고 책값만 붙여 목록을 올리지,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어떻게 일군다 하는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 붙이지 않는다.

 사람을 읽지 않으면서 책을 어떻게 읽는지 궁금한 일이다. 사람을 읽지 못하는 눈길로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아리송한 일이다. 사람을 읽으려 하지 않으면서 책마다 다 다르며 깊고 너르게 깃든 이야기를 얼마나 껴안을는지 모를 일이다.

 제발, 책 좀 내려놓자. 책은 좀 내려놓고, 돈 있으면 어떤 책이든 다 사서 간직할 수 있다는 엉터리 생각 좀 내려놓자. 돈 있는 사람은 그저 돈 있을 뿐이니까, 이 돈냄새 나는 짓은 제발 그만두자. (4344.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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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2-03 22:22   좋아요 0 | URL
ㅎㅎ 된장님께 직접 전화를 걸어서 책 팔라고 하는 사람도 있나 보군요.정성은 갸륵한데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궁금해 집니다^^

숲노래 2011-02-03 23:59   좋아요 0 | URL
출판사로도 전화를 걸고, 인터넷에서 조금만 찾아보면 다 나오기도 하고, 그러지요 뭐... 그냥, 책에만 눈이 먼 사람들이라 더없이 딱하답니다......
 



 읽어 봐서 아는데요


 사람은 누구나 철없던 적이 있기 때문에 철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헤아려 보곤 합니다. 왜냐하면 손가락 끝이 다친 적 있기 때문에 손끝 한 번 다치면서도 얼마나 고달픈가를 깨달으니까, 손끝이 아닌 팔 하나 잘린다든지 다리 하나 부러진다든지 하면 어느 만큼 괴로우면서 힘든가를 어렴풋하게나마 돌아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끝이 아파 보았기 때문에 팔이 잘리는 사람 아픔과 괴로움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렴풋이 헤아릴 뿐입니다. 똑같이 팔이 잘려서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팔이 잘리는 아픔을 알 수 없어요.

 책을 읽을 때에는 어떠할까요. 같은 책을 읽었기에, “나, 그 책 읽어 봐서 아는데요.”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같은 영화를 보았기에, “나, 그 영화 한번 봐서 아는데요.” 하고 이야기할 수 있나요. 사랑을 해 본 사람이기에, “나, 사랑 한번 해 봐서 아는데요.” 하고 읊을 수 있을는지요.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나는 내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나, 아이 키우는 아버지로서 아는데요.” 하고 말해도 괜찮을까요. 아이를 둘이나 셋, 넷이나 다섯, 여섯이나 일곱을 키운 어버이는 아이키우기를 한결 잘 안다 할 수 있는가요.

 야구를 일곱 해쯤 지켜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할 만할까요. 야구를 열일곱 해쯤 돌아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할 수 있나요. 야구를 스물일곱 해나 서른일곱 해, 또는 마흔일곱 해나 쉰일곱 해쯤 바라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해야 하나요.

 깊이 있게 보아서 좋을 때가 있고, 두루 보아서 나을 때가 있으며, 오래 보아서 훌륭한 때가 있습니다. 살짝 보아서 알맞을 때가 있고, 사랑스레 보아서 기쁠 때가 있으며, 따스히 보아서 즐거울 때가 있어요. 읽기에 따라 다른 삶이고, 읽는 매무새에 따라 새로운 삶이에요.

 읽어 본 사람은 틀림없이 읽었기에 아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아직 못 읽었거나 곧 읽으려 하거나 애써 읽은 사람이라면, 이 사람들 나름대로 무언가 가슴으로 느끼거나 보듬으려는 이야기가 있겠지요.

 모든 책은 앎(지식)이 아닙니다. 모든 책읽기는 앎읽기(지식쌓기)가 아닙니다. 모든 책은 삶이고, 모든 책읽기는 삶읽기입니다. 삶을 읽는 책이기 때문에, “읽어 봐서 아는데.” 같은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살아 봐서 아는데.” 같은 말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이한테는 여태껏 살아 봤으니 “그이가 살아온 나날”을 알겠지만, 이이한테는 “이이가 앞으로 살아갈 나날은, 참말 앞으로 살아 봐야 아니”까 어느 누구도 이이한테 ‘네 앞날이 이렇게 되거나 저렇게 되거나’ 하고 섣불리 짚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이가 살아왔다는 나날조차 그이 스스로 얼마나 잘 안다 밝힐 수 있을는지요.

 이렇게만 살라는 법이 없는 나날처럼, 이렇게만 읽으라는 법이 없는 책입니다. 책은 저마다 살아가는 나날대로 읽습니다. 책은 사람들마다 꾸리는 삶자락대로 엮어서 내놓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내 오늘 하루에 따라 책을 받아들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내 오늘 하루를 고이 담아 책을 내놓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내 삶에 따라 내 삶을 읽지, 책을 쓴 사람 삶을 읽지는 않거나 못합니다. 책을 쓴 사람 삶은 책을 쓴 사람만 압니다. 그러니까, 책을 쓴 사람 넋과 마음을 ‘책 읽는 이’가 알 수 없을 뿐더러, 어설피 비평이나 비판을 할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나는 이 책 하나를 받아들이면서 내 삶을 어떻게 돌보겠다’ 하고만 말할 뿐입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이란 없습니다. 좋은 내 삶이냐 나쁜 내 삶이냐만 있습니다. 아, 어쩔 수 없이 이 땅에는 나쁘다 할 만한 책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 나쁘다 할 만한 책들조차, 이 책을 쥐어든 사람이 어떻게 삭여내거나 곰삭이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사랑이 사람을 바꾸고, 사람이 사랑을 바꿉니다. 삶이 책을 바꾸고, 책이 삶을 바꿉니다. 사랑하는 넋으로 보듬는 책이란 내 삶을 사랑하는 넋이 더욱 따숩고 넉넉하도록 이끌고, 사랑하는 넋으로 보듬으며 꾸리는 내 삶은 내가 손에 쥔 책이 사랑씨를 고이 나눌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 줍니다.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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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쟁이 손가락 사진쟁이 손바닥


 새벽녘 쉬를 하러 일어서는 옆지기가 엉덩이가 몹시 아프다고 한다. 옆지기 발바닥부터 등뼈까지 천천히 주무른다. 발바닥과 종아리와 허벅지와 엉덩이와 등과 등뼈를 하나하나 주무르면서 생각한다. 집일에 치이고 아이하고 복닥인다면서 옆지기 몸을 주무른 지 퍽 오래되었다고 느낀다. 틀림없이 내 몸이 힘들거나 고되기 때문에 옆사람 몸을 찬찬히 돌아보지 못한다 할 수 있다. 옆지기 아픈 몸을 주무르면서 내 손가락이나 손목이나 팔이 제대로 힘을 내지는 못한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여린 손으로도 얼마든지 주무를 수 있고, 힘없는 손으로도 아픈 사람을 보듬을 수 있다. 힘들 때에는 힘든 만큼 조금씩 주무를 노릇 아니겠는가. 아무리 힘들어도 일기를 쓰자면서, ‘책일기’하고 ‘사진일기’하고 ‘아이돌봄일기’ 세 가지를 날마다 한 줄이나마 공책에 끄적이면서, 막상 옆지기 팔다리와 등허리 주무르기는 하루에 오 분도 못한다면 집식구로서 할 말이 없다.

 찌개나 국에 마늘을 빻아 넣는 데에 1∼2분만 더 쓰면 된다. 팔다리를 주무를 때에 즈믄까지 숫자를 세어도 된다. 한 번 주무를 때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을 주무를 일이 아니라, 틈틈이 조금씩 보살필 수 있으면 된다.

 손가락으로 힘을 쓰기 벅차 손바닥을 쓰고, 손가락을 안으로 곱아 손가락 등으로도 눌러 본다. 문득, 내 손가락이 꽤나 뻣뻣하다고 느낀다. 그렇다고 손가락 그림이 모조리 지워진 사람도 아니다. 사람이 눈을 감고 흙으로 돌아갈 무렵이 되면 온몸이 뻣뻣해진다는데, 핏기가 사라지며 뻣뻣해지는 가운데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이러한 내 손가락은 슬픈 손가락이라 해야 할까, 여태껏 온갖 일을 수없이 치러내 주었으니 고이 쉴 수 있는 기쁜 손가락이라 해야 할까.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닥 많지 않고, 한 사람이 손가락을 놀려 할 수 있는 일 또한 그다지 많지 않다고 깨닫는다. 나는 내 삶에 어떠한 책을 곁에 놓는가. 나는 내 삶을 어떠한 손가락으로 돌보는가. 지쳐 나가떨어질 듯한 하루하루이다 보니, 글 한 줄을 쓰면서도 이 글 한 줄에 들이는 품이 몹시 애틋하다. 내가 아이를 키우지 않는 삶이었다면, 틀림없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싶을 책을 그야말로 대단히 많도록 사고 읽으며 건사했을 테고, 이렇게나 많은 책을 사들이며 읽는 사람은 나라 안팎에 거의 없을 테지. 그렇지만, 아이를 함께 낳아 키우는 삶을 보내면서, 책을 읽는 다른 길을 들여다본다. 곧 둘째를 함께 낳아 키울 때가 되면, 책을 읽는 새삼스레 다른 작은 길을 들여다보겠지.

 어느새 내 손가락은 글쟁이 손가락하고 멀어진다. 차츰차츰 내 손바닥은 사진쟁이 손바닥하고 동떨어진다. 어쩌면 비로소 글쟁이 손가락이 되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이제서야 사진쟁이 손바닥이 된다 할는지 모른다. 천천히 동이 튼다. 이제 곧 쌀을 씻고 불려 아침을 차려야 한다. (4344.1.2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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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49 : 믿음책 읽기


 이오덕 님이 1984년에 내놓은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 2010년 7월에 《삶을 가꾸는 어린이문학》(고인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이 책에는, “교훈을 너무 밖으로 드러내어 보이는 훈화나 도덕 교과서의 글같이 되었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이라 할 수 없지만, 교훈성 그 자체를 죄다 빼려고 하는 것은 어린이문학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교훈을 꺼리고 무서워하는 사람일수록 재미없고 해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다. 교훈이 없다는 것은 글쓴이의 의도가 없고 사상이 없다는 것이고, 역사와 사회·어린이에 대한 믿음과 정열·사랑에 없는 것을 말해 준다(98∼99쪽).”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틀림없이 배웁니다. 어른들은 틀림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교과서나 책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교과서나 책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살아내는 몸뚱이로 가칩니다.

 교과서란 지식입니다. 그야말로 지식덩어리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쥐어 줄 책은 으레 ‘삶책’이 아닌 ‘지식책’이기 일쑤입니다. 과학동화나 철학동화는 온통 지식책이에요. 동화책이라 하는 문학 또한 지식책으로 기울거나 값싼 ‘시간 때우기’ 책에 머물곤 합니다.

 어린이책을 잘 모르는 분들은 자칫 ‘어린이문학 = 가르침(교훈)’이어야 하는 듯 잘못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무언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어린이문학이든 어른문학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면, 이 모든 이야기는 ‘가르침’이 되고 ‘배움’이 됩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왁자지껄 떠는 수다 또한 서로서로 가르치는 말이요 배우는 말이에요.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며 비질과 걸레질 하는 모든 삶이 바야흐로 책이자 배움이요 가르침입니다.

 아이들한테도 삶이 배움입니다. 가까운 어른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둘레 어른이 읊는 말마디를 고스란히 배웁니다. 어른들이 아이를 태운 차를 거칠게 몰면 아이들은 시나브로 거친 매무새를 배웁니다. 어른들이 길가에 담배꽁초뿐 아니라 갖은 쓰레기를 버리니, 아이들도 과자봉지를 아무 데나 버립니다. 어른들이 바쁘다며 사람들을 마구 밀치며 걸으니, 아이들도 동무를 때리거나 괴롭히는 짓을 서슴지 않습니다.

 온삶이 그야말로 ‘교과서’입니다. 온삶을 따스히 어루만지지 않는다면 가르침과 배움이 올곧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부터 내 삶을 포근히 돌보며 넉넉히 일구어야 비로소 내 아이한테든 이웃 아이한테든, 사랑하는 짝꿍과 살붙이한테든 좋은 손길을 내밉니다.

 이 나라 한국에는 예배당이 대단히 많습니다. 딱히 부처님 나라나 하느님 나라가 아니지만, 불교·천주교·개신교를 믿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이리하여, 불경이든 성경이든 믿음을 담은 책이든 어마어마하게 쏟아집니다. 그렇지만, 막상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가르친 ‘사랑과 믿음’을 ‘따뜻함과 넉넉함’으로 나누는 사람은 드뭅니다. 수수한 여느 자리에서 사랑과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믿음책이 제아무리 값지거나 훌륭하달지라도 참된 믿음이(신자)로 거듭나지 않으나, 좀처럼 깨닫지 않습니다. (4344.1.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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