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서랍에서 튀어나온 묵은 40만 원


 책상서랍을 갈무리한다. 여러 해 동안 거의 돌보지 않고 이것저것 집어넣기만 한 책상서랍을 갈무리한다. 책상서랍을 쓸 일이 없는 나는 자잘한 물건을 끊임없이 집어넣기만 하니까, 나한테는 튼튼한 종이상자만 있으면 된다. 굳이 책상서랍에 자질구레한 물건을 처박을 까닭이 없다. 서랍 하나는 내 몫으로 남기고 다른 칸은 차근차근 비운다. 옆지기가 책상서랍을 쓸 수 있게끔 비운다.

 책상서랍을 비우다가 돈을 찾는다. 두 가지 돈을 찾는다. 흰봉투에 담긴 돈은 봉투마다 20만 원에서 2∼3만 원쯤 모자란다. 거의 40만 원이 되는 돈이 불쑥 튀어나온다.

 40만 원 가까운 이 돈은 나로서는 허리띠 조르는 살림이면서 뒷날을 손꼽으며 아낀 돈이었을 테지. 돈 만 원이 아쉬운 살림을 벌써 몇 해째 꾸리는가. 돈 만 원이 아니라 돈 천 원 없어 숨막히던 날이 꽤 길었으니까, 이렇게 큰 돈이 책상서랍에서 잠자던 일이란 참 딱하고 안쓰럽다.

 그런데 이 돈이 그때그때 내 손에 쥐어졌더라도 내 살림은 넉넉했을까. 이 돈이 그때그때 내 손에 쥐어졌다면, 며칠 지나지 않아 책값으로 모조리 날아가지 않았을까. 어려운 살림이면서도 책상서랍에 고이 묻었으니까 오늘까지 남을 수 있지 않았는가.

 이 돈을 언제 얻었는가 곱씹는다. 먼저, 봉투 하나. 이 봉투는 지난해 여름에 우리 살림집을 인천에서 시골로 옮길 때에 받은 돈. 돈도 마땅히 없으며 도서관 책짐을 옮기느라 짐차며 사다리차며 일꾼이며 이백만 원 즈음 써야 했으니, 이 돈 걱정으로 참 빠듯했는데, 우리 식구를 걱정해 준 고마운 이웃 아주머님이 봉투에 이십만 원이나 넣어 주셨다. 이 가운데 이만 원만 빼서 쓰고는 책상서랍에 넣었나 보다.

 다음 봉투 하나. 다음 봉투는 세뱃돈으로 받았던 봉투. 셋째 작은아버지가 몇 해 앞서 설날에 세뱃돈으로 건넨 봉투이다. 언제였을까. 만 원짜리가 새돈으로 바뀌던 해에 받은 봉투인데, 이 봉투에는 만 원짜리 석 장이 빈다. 아마 이십만 원을 주셨을 텐데 3만 원만 빼내어 쓴 듯하다. 만 원짜리 새돈이 갓 나오며 반닥반닥할 뿐더러 돈 번호가 고스란히 이어지는 열일곱 장이다.

 새돈이 들어오면 손이 떨려 못 쓰는 내 삶을 돌아본다. 내 삶이 이러다 보니, 이 엄청난 세뱃돈을 못 쓰고 서랍에 고이 모셨나 보다. 옆지기하고 함께 살기 앞서부터 책상서랍에서 잠든 돈이다. 앞으로는 이 돈을 쓸 수 있을까. 앞으로는 이 묵은 새돈을 깰 수 있을까.

 나는 책방에서 책을 사며 책값을 치를 때에는 가장 깨끗한 돈을 내민다. 다른 가게에서는 덜 깨끗한 돈을 내민다. 지갑에 만 원짜리이든 오천 원짜리이든 천 원짜리이든 빳빳한 차례에 따라 넣는다. 책값을 치를 때에는 맨 뒤에 놓은 가장 빳빳한 종이돈부터 골라서 내민다. 똑같은 돈이라 하더라도 나로서는 헌책방이건 새책방이건, 내 마음밭을 살찌울 고마운 책을 장만하는 마당인 만큼, 책값보다 넘치는 돈을 낼 주머니는 못 되고, 모자라나마 가장 깨끗한 돈을 내밀기만 한다.

 그나저나 40만 원에서 5만 원이 빠지는 돈이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 나는 틀림없이 책을 사려 하겠지. 그동안 침만 바르던 나라밖 훌륭한 사진책을 사려 할 테지.

 그러나, 이러면 안 된다. 이 돈만큼은 내 책을 사는 데에 쓰지 말자. 우리 옆지기가 서너 해 앞서부터 노래를 부르던 리코오더를 사자. 내 국민학교 적 학교 앞 문방구에서 천 원인가 이천 원인가에 팔던 싸구려 플라스틱 리코오더가 아니라, 음계와 화음을 또박또박 잘 잡으며 고즈넉한 소리꽃을 피우는 좋은 리코오더를 장만하자. 그러고 나서 아이 몫으로 조금 남겨야지. 나중에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저 하고픈 무언가 있을 때에 쓰라며 얼마쯤 빼서 따로 모아야지. (4344.3.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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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춘천에 자리한 〈경춘서점〉은 한 곳에서 참으로 오래도록 뿌리를 박았습니다. 마흔 해 넘게 한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러다가 2010년 여름날 새 자리로 옮깁니다. 새 자리로 옮긴 줄 아는 사람은 이 헌책방을 드나드는 사람뿐일 테지요. 춘천시장이든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이든 간행물윤리위원회 일꾼이든 헌책방 한 곳이 옮기거나 말거나 알 턱이 없습니다. 예전 자리 사진이든 새 자리 사진이든 찍는 사람이란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헌책방처럼 한 자리에 오래도록 뿌리박아 장사를 하면서 사람들이 잘 못 알아채는 가게는 참 드뭅니다.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모르는 채 잘 살아갑니다. 책이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기 때문일까요. 우리 삶이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기 때문인가요. 책손 한 사람 고맙게 여기며 책 한 권 고마이 다루는 헌책방이 춘천에는 두 군데 있습니다. (4344.3.19.흙.ㅎㄲㅅㄱ)


- 2009.9.7. 강원도 춘천시 경춘서점

 

(옛자리 사진 -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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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은 모두들 비슷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헌책방마다 갖춘 책은 어슷비슷하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비슷비슷하게 생기고 저마다 어슷비슷하달 책을 갖추었다고 합니다만, 어느 헌책방에 가든 똑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똑같은 책을 갖추었다지만 다 다른 헌책방이고, 다 다른 사람이 일구는 헌책방이며, 다 다른 이야기가 서린 헌책방입니다. 다 다른 헌책방에서 똑같은 책을 장만하는 동안 다 다른 이야기를 한결같이 받아들입니다. (4344.3.19.흙.ㅎㄲㅅㄱ)


- 2010.10.14. 서울 강동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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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날에는 헌책방이 땅밑으로 내려가는 일이란 없었습니다. 아무리 조그마한 책방일지라도 언제나 땅위에서 해바라기를 했습니다. 이제 헌책방은 서울에서 자리를 잡을 때에는 땅밑이 아니고는 자리를 얻기 몹시 힘듭니다. 사람들이 책방과 책 모시는 손길이 이렇습니다. 그러나, 땅밑에 자리하는 헌책방이라 하더라도 햇볕 한 줄기 깃들어, 책방으로 내려가는 섬돌에 사뿐사뿐 내려앉습니다.

 - 2010.10.27. 서울 뿌리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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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헌책방에는 서울내음이 배어들고, 제주 헌책방에는 제주내음이 배어듭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착한내음을 나누고, 슬프게 살아가는 사람은 슬픈내음을 나눕니다. 책 하나에 사랑스러운 손길을 깃들인다면, 이 사랑내음을 언제까지나 고이고이 이을 수 있습니다.

 - 2010.11.15. 제주도 제주시 <책밭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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