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만큼 읽는 책


 책을 더 많이 읽어 보았기에 새로운 책을 마주할 때에 한결 잘 읽어내지는 않습니다. 책을 덜 읽었기에 새로운 책을 맞이하면서 제대로 못 읽어내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읽는 만큼 읽는 책입니다. 누구나 느끼는 대로 느끼는 삶입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대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빈틈없이 잘 읽어내는 사람이 있으나, 언제나 빈틈없이 잘 읽어내지는 않습니다. 어설프거나 어수룩하게 읽어내는 사람이 있지만, 늘 어수룩하게 읽어내지는 않습니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만큼 사람을 만나고, 어제오늘 살아온 만큼 이야기를 나누며, 모레글피 살아가고픈 만큼 책을 받아들입니다.

 글쓴이나 그린이 넋을 고스란히 톺아보는 일도 즐겁습니다. 글쓴이나 그린이 넋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도 즐겁습니다. 글쓴이나 그린이 넋을 엉뚱하게 읽는다면 좀 슬프거나 안쓰럽지만, 옳게 읽을 줄 모르는 사람한테 옳게 읽으라 말하거나 잡아당길 수 없습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옳게 읽을는지 모르나, 언제까지나 옳게 안 읽으며 살아갈 수 있어요.

 익숙한 대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익숙한 대로라기보다 나 스스로 좋아하거나 몸에 맞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좋아한대서 참으로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올바르거나 착한 길은 아닙니다. 내 몸에 맞다고 여긴대서 거룩하거나 예쁘거나 슬기롭거나 참다운 삶은 아니에요.

 아름다운 삶을 좋아하거나, 좋아하는 삶을 아름다이 일구기란 참 어려운지 모릅니다. 아니, 어렵습니다. 내 무게를 내려놓고 내 자리를 내주며 내 이름을 지울 줄 알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삶을 좋아합니다. 더 귀담아들을 줄 알고, 더 들여다볼 줄 알며, 더 몸을 맡길 줄 알 때에 내 삶을 아름다이 일굽니다.

 그렇지만, 내 무게를 내려놓거나 내 자리를 내주거나 내 이름을 지울 줄 안다면, 아름다운 삶을 좋아하기란 참 쉽습니다. 더 귀담아듣기를 즐기거나 더 들여다보기를 반기거나 더 몸을 맡기며 흐뭇해 한다면, 좋아하는 삶을 아름다이 일구기란 몹시 쉬워요.

 읽는 만큼 읽는 책이지, 아는 만큼 읽는 책일 수 없습니다. 읽는 만큼 읽는 책이기 때문에, 사는 만큼 일구는 삶입니다. 살고자 애쓰는 대로 살아갑니다. 살려고 마음쓰는 대로 살아냅니다. 못할 일이란 없으며, 안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할 만한 일이 가득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오늘대로 오늘 맞아들여 읽는 책으로 고맙습니다. 속속들이 알아챈다거나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샅샅이 읽어야 기쁜 책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한 줄을 읽어도 즐겁고, 열 줄을 읽어도 기쁘며, 한 권을 통째로 읽어도 고맙습니다. 읽지 못해도 나쁘지 않을 뿐더러, 여러 날 먼지만 쌓이도록 해도 괜찮습니다. 책을 읽으려는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바쁜 나날인데 어찌하겠습니까. 아이가 함께 놀자며 손을 잡아끄는데 책을 어찌 펼치겠습니까. 고단한 몸을 얼른 누여 쉬고픈데 책을 어떻게 넘기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모든 책을 낱낱이 읽을 수 없으며, 반듯하게 책상맡에 앉아 차분히 읽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틈을 쪼개어 읽습니다. 국을 끓이면서 살짝 손을 놓고 히유 한숨을 돌리는 겨를에 한두 줄 겨우 읽습니다. 밥과 찌개와 반찬 세 가지를 불에 올리고 이래저래 바지런히 손을 쓰다가 1분쯤 틈이 나서 손을 쉴 때에 한 쪽이나마 책을 펼칩니다. 버스나 택시를 모는 일꾼은 신호등에 걸린 1분이나 2분을 살려 책 한두 줄 읽을 수 있겠지요. 하루에 1분씩 한 달에 30분이고, 한 해에 365분입니다. (4344.3.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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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신문에 보내는 글입니다) 

 

 책으로 보는 눈 154 : 반공문학과 친일문학

 요즈음에는 ‘반공문학’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반공문학 따위를 써 보았자 읽을 어린이가 없을 뿐더러 부질없기 때문입니다. 그리 오랜 옛날이 아닌 1980년대 끝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이 나라 어린이문학은 온통 반공문학투성이였습니다. 어른문학은 반공문학 울타리에 섣불리 갇히지 않았으나 어린이문학은 엉망진창이었어요.

 그렇다고 이 나라에서 ‘친공문학’을 하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반공문학만큼이나 친공문학은 덧없습니다. 어떤 주의주장을 내세워 어린이한테 억지로 쑤셔넣으려고 하는 무서운 짓을 일컬어 문학이나 교육이라 이름붙일 수 없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착하며 슬기롭고 아름다이 자라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어린이문학이 어른문학과 견주어 오래도록 찬밥처럼 내몰린 탓 가운데 하나를 들자면, 아무래도 반공문학이 큰힘을 떨치면서 동심천사주의가 끝없이 춤을 추었기 때문입니다. 반공문학이든 친공문학이든 요즈음에는 찾아볼 길조차 없으나, 동심천사주의문학은 오늘날에도 수없이 나돕니다. 어린이문학이라면 그저 어린이문학이어야 할 텐데, 어린이를 어린이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니까 동심천사주의를 비롯해 과학동화이니 철학동화이니 성교육동화이니 생활동화이니 하는 이름을 자꾸 덕지덕지 갖다 붙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요, 문학은 문학입니다.

 이 나라 어린이문학에서 반공문학이든 친공문학이든 동심천사주의이든 처음부터 등을 돌릴 뿐 아니라, 아이들이 아이들 삶을 사랑하며 착하게 어깨동무하도록 이끄는 문학을 했던 분은 이원수 님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1981년에 몸이 아파 숨을 거두기까지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은 언제나 어린이 자리에 서서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원수 님조차 일제강점기 끝무렵에 친일문학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로서는 너무 슬프며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어린이문학을 홀로 꿋꿋하며 튼튼히 지킨 어른조차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문학을 했습니다. 1942년과 1945년 사이에 친일문학을 쓰셨으니 서른을 갓 넘은 나이에 당신 얼굴을 더럽혔습니다.

 그런데 이원수 님은 다른 ‘친일문학 작가’하고는 달랐습니다. 다른 친일문학 작가는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해방과 한국전쟁 뒤로도 권력자한테 달라붙으며 독재부역문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원수 님 한 사람은 마치 온몸으로 죄를 씻으려는 듯이 어린이문학 창작과 번역을 어마어마하게 쏟아낼 뿐 아니라, 젊은 어린이문학가들이 반공문학이나 동심천사주의문학이나 독재부역문학이 아닌 참다운 어린이문학을 하도록 돕거나 북돋았습니다. 이원수 님 땀과 씨를 받아 이오덕·권정생·임길택 같은 어린이문학 창작과 비평이 태어났습니다.

 어떤 이는 《뿌리깊은 나무》 1980년 5월치 ‘털어놓고 하는 말’이라는 꼭지에서라도 이원수 님이 ‘친일문학 뉘우침’을 했어야 한다고 손가락질하지만, 서슬퍼런 독재시절에 어린이문학을 외로이 지킨 사람한테 요즈음 같은 ‘자기고백(커밍아웃)’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원수 님은 목숨이 끊길 듯 말 듯하던 병원 침대에서 입으로 더듬더듬 마지막말을 남깁니다. “얼음 어는 강물이 / 춥지도 않니? / 동동동 떠다니는 / 물오리들아 / 얼음장 위에서도 / 맨발로 노는 / 아장아장 물오리 / 귀여운 새야 / 나도 이젠 찬바람 / 무섭지 않다 / 오리들아, 이 강에서 / 같이 살자.” (4344.3.1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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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개잡지, 헌책방잡지, 어린이잡지


 한국에서 나오는 뜨개잡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사람 손으로 만들고 한국사람이 마련한 뜨개법을 다루는 뜨개잡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나오는 ‘우리 말 잡지’는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일구는 ‘헌책방 잡지’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스스로 참 어설프며 어리숙한 깜냥인 줄 알지만, 제때에 짠짠짠 내놓지 못할 뿐 아니라 여느 새책방에 내놓지조차 못하지만 ‘우리 말 잡지이자 헌책방 잡지’를 혼자서 만든답시고 바둥거립니다.

 우리 나라에도 자전거잡지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골사람이 시골마을에서 조용히 즐기는 자전거 이야기를 다루는 자전거잡지는 없습니다. 도시에서 골목동네 가난한 사람이 호젓하게 자전거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든지, 신문을 돌리며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삶을 담는 자전거잡지 또한 없습니다. 쌀집자전거로 흔히 아는 짐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눈물과 웃음을 다루는 자전거잡지조차 없어요. 돈으로 사들여서 돈으로 타는 ‘놀러다니는’ 이야기로만 어우러진 자전거잡지만 있습니다.

 한국에도 생태와 환경을 다루는 잡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생태사랑 환경사랑으로 거듭난다든지, 여느 시골자락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 눈높이에서 쉬우며 맑은 말마디로 수수하게 빚는 환경잡지는 없습니다.

 교육잡지는 여럿입니다만, 막상 어린이 손으로 일구는 교육잡지라든지 어린이가 즐거이 읽을 교육잡지란 없습니다. 제도권 울타리에 깃든 교육잡지나 제도권 울타리 바깥에서 싸우는 교육잡지만 있습니다.

 책을 말하는 잡지란 있을까요. 그토록 수많은 출판사가 수많은 책을 낼 뿐 아니라, 책 만들어 돈 톡톡히 버는 출판사 또한 꽤 많은데, 막상 ‘책을 말하는 책잡지’는 있는지 없는지 아리송합니다.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책을 쓰신 분이 있습니다만, 당신들끼리 당신 울타리에서 복닥거리는 책마을에서 맴도는 책잡지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 푸름이 어린이가 제 삶을 예쁘게 사랑하거나 아끼는 어여쁜 책잡지가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린이교육잡지라든지 어린이학습잡지라든지 어린이교양잡지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이삶과 어린이놀이와 어린이꿈을 꾸밈없이 들려주는 잡지는 없습니다. 왜 아이들한테 무엇이든 애써 가르치려고만 하나요. 왜 아이들 앞에서 어른들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지 못하나요. 아이들 몸과 나이에 걸맞게 심부름과 일을 즐기도록 어깨동무하는 이야기를 잡지로 묶기란 그토록 어려운가요.

 가만히 보면, 한국에는 팔림새에만 눈길을 두는 만화잡지가 몇몇 있으나, 만화를 만화다이 돌보는 만화잡지는 없다 할 만합니다. 사진을 사진 그대로 껴안는 사진잡지는 힘겹게 태어났어도 이내 숨을 거둡니다. 삶으로 스미는 사진을 북돋우는 사진잡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겉멋든 예술과 껍데기를 벗지 못하는 다큐멘터리 허울에 슬프게 얽매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 잡지를 만드는 사람이 엉터리라서 참다운 잡지가 발붙이지 못하는 우리 나라라 할 수 없습니다. 잡지를 사서 읽을 사람부터 슬기롭지 못하니까, 잡지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슬기를 그러모으지 못합니다. 잡지를 사서 읽을 사람부터 제 삶을 옳게 사랑하면서 예쁘게 일구지 못하니까, 잡지다운 잡지가 태어나더라도 금세 기운이 꺾이며 사라지고야 맙니다.

 뜨개질은 취미일 수 없는 삶이고, 사진찍기이든 글쓰기이든 만화나 영화나 교육이나 환경이나 자전거나 모두 아름다운 우리 삶입니다. 삶을 느끼지 못하거나 삶을 깨닫지 않을 때에는, 이 나라에 잡지다운 잡지가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4344.3.1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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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읽으려고 하는 책은


 사람들이 읽으려고 하는 책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싶은 길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살아가고 싶은 길에 따라 사람들이 읽으려고 하는 책이 달라집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고 싶은 길에 따라 내가 읽으려고 하는 책이 달라집니다.

 나 스스로 내 아이를 사랑하고 싶다면, 내 아이와 함께 읽을 책을 먼저 고릅니다. 내 아이를 한결 깊이 사랑하는 길을 걷고 싶다면, 굳이 내 아이와 읽을 책을 고르기보다 아이 손을 맞잡고 놀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딱히 책이 없더라도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을 얼마든지 신나게 걸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에 몰려들어 살아갑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골 터전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 살아갑니다. 도시에서 살아도 더 큰 도시로 들어가려고 애씁니다. 더 큰 도시에서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찾으려고 힘씁니다. 더 작은 도시로 가거나 시골마을로 가려고 마음쓰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장만해서 즐겁게 모는 사람은 자가용을 장만해서 즐겁게 모는 길에 걸맞게 책을 고릅니다. 또는, 책 따위란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도시에서 빽빽히 밀리는 버스나 지하철에 시달리는 사람은 커다란 도시에서 빽빽히 밀리는 버스나 지하철에 시달리는 길에 따라 책을 살핍니다. 또는, 책이란 아예 생각할 수 없이 고단합니다.

 여성해방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는대서 남녀평등을 이루는 길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여성해방 이야기 지식을 더 쌓는 일하고 남녀평등 이루는 길은 같지 않습니다. 삶은 삶이고 지식은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요리책을 많이 읽어 이 요리 저 요리를 안다 한들, 맛집을 많이 다녀 맛난 밥으로 무엇이 있다고 안다 한들, 나 스스로 밥을 차리지 않는다면 이 모든 지식은 지식으로 그치지, 삶으로 이어가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 맡을 몫이란 교과서나 교재에 담긴 지식을 아이들이 머리속에 더 많이 가두도록 내모는 일이 아닙니다. 아이 스스로 지식을 바란다면 아이 스스로 바라는 지식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아서 스스로 갈고닦도록 돕는 일이 교사가 할 몫입니다. 아이가 지식을 찾으려 할 때에 지식이란 어떻게 이루어지며, 지식 하나가 태어나기까지 어떠한 길을 거쳐야 하는가를 찬찬히 밝히는 일이 교사가 할 몫입니다. 교사는 아이들한테 지식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란 교재나 교과서에 모두 담겼으니까요. 교사는 몸으로 삶을 보여주면서 삶을 물려줄 뿐입니다.

 이른바 ‘진보대연합’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아무개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말로 진보가 크게 하나가 되는 일인지, 아니면 진보이든 아니든 크게 하나가 되는 일인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이러한 이름을 내거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름대로 무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일 텐데, 이렇게 굵직한 이름 하나로 모여서 ‘아무개 반대’를 이루는 일만 하겠다는 소리이지, 정작 ‘진보를 이루는 어떠한 일’이라든지 ‘우리 삶을 아름다이 일구는 어떠한 일’이라든지 ‘진보이든 보수이든 누구이든 즐겁고 예쁘며 착하게 살아가는 좋은 일’을 하겠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자리에서 ‘아무개 반대’를 이루겠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다만, ‘아무개 반대’가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아무개 반대’를 할 만하며, 아무개를 반대하는 일로도 좋은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곰곰이 생각할 노릇입니다. 아무개를 반대하면서 내 삶은 어느 쪽으로 어떻게 무엇이 나아지거나 좋아질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삶을 어느 쪽으로 어떻게 나아가도록 하고 싶은가요.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얼른 죽어서 거꾸러지기를 바라는가요.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한결 아끼거나 사랑하면서 이이가 착하거나 참다운 길을 걷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가요.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따사롭고 믿음직하게 살아가도록 도우면서, 저마다 옳고 바르면서 어여쁜 길을 씩씩하게 걷는 데에 내 몫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가요.

 ‘진보 어깨동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루어질 만한 일이란 ‘평화 어깨동무’나 ‘평등 어깨동무’나 ‘일자리 어깨동무’나 ‘통일 어깨동무’나 ‘책읽기 어깨동무’나 ‘영화사랑 어깨동무’나 ‘집살림 어깨동무’입니다. 나 스스로 집살림부터 책읽기와 일자리를 거쳐 평화로운 삶을 어깨동무할 때에 바야흐로 진보 어깨동무이지, 처음부터 진보 어깨동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원의 집》 둘째 권을 읽으면, “아빠는 다시 시냇가로 가서 물을 길어 왔고, 그동안 메리와 로라는 엄마를 도와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37쪽).”는 대목이 나옵니다. 다섯 식구 작은 살림은 ‘엄마가 물을 길어’ 올 수 있고 ‘아빠가 아침을 차리며 두 딸아이가 아빠를 도와 밥을 하든 엄마를 도와 물을 긷든’ 할 수 있습니다. 밥을 하는 평화와 ‘아직 학교는 가 본 적 없는 어린 아이들이 집일을 거들며 함께 밥을 하고 함께 밥을 먹는’ 사랑이 깃드는 나날이 곧 책이면서 삶이고 사랑이면서 믿음입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진보나 보수로 나누지 않고, 착한 사랑은 좌파나 우파로 가르지 않으며, 참다운 책이란 어린이와 어른 모두 흐뭇하게 맞아들입니다.

 오늘날 한국사람 가운데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고픈 사람은 매우 드문 듯합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앞으로도 한국사람치고 삶과 사랑과 책을 예쁘게 하나로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아침에 안친 밥냄비에서 밥내음이 솔솔 납니다. 이제 밥상을 행주로 닦고 수저를 놓아야겠습니다. (4344.3.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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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바늘과 좋은 책


 바느질이나 뜨개질에 익숙한 사람은 바늘이 안 좋아도 잘 쓴다는 이야기를 옆지기가 들려준다. 그러고 보면, 손이 안 보인다 할 만큼 잽싸게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는 분을 곁에서 지켜보면 이분들이 꼭 좋은 바늘을 쓰지만은 않는다. 그저 당신한테 익숙하며 길이 잘 든 바늘을 쓴다. 좋다는 바늘이 익숙하면 좋다는 바늘을 쓰고, 안 좋다는 값싼 바늘이 익숙하면 안 좋다는 값싼 바늘로 옷을 뜬다.

 사람들 누구나 ‘좋다고 하는 책’이나 ‘훌륭하다 여기는 책’이나 ‘아름답다 손꼽는 책’을 읽으면 참으로 즐거울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만히 따지면, 제아무리 좋다고 하는 책이나 훌륭하다고 여기는 책이나 아름답다고 손꼽는 책을 잔뜩 장만해서 읽는다 할지라도, 조금도 좋은 삶을 일구지 못하거나 조금도 훌륭하게 살아가지 못하거나 하나도 안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도 좋은 넋을 북돋우지 못할 뿐 아니라 좋은 말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훌륭하다는 책을 참 많이 읽었다지만 훌륭한 얼이나 훌륭한 글을 길어올리는 사람이 퍽 드물다. 아름답다는 책을 잘 안다지만 막상 살림살이를 아름다이 일구지 못하는 사람은 참말 얼마나 많은가.

 바늘이 좋다면 바느질을 더 잘할 수 있다. 좋은 책을 곁에 두면서 살아가면 더 나은 생각과 마음을 살찌울 수 있다. 그렇지만, 썩 안 좋은 바늘로도 내 아이와 살붙이를 사랑하는 마음 그대로 옷을 뜰 수 있다. 책 한 권 읽지 못하는 살림이라 하지만, 착한 사랑과 고운 믿음으로 이웃과 동무하고 어여삐 어깨동무하거나 품앗이하는 사람이 많다. 좋은 바늘, 좋은 집, 좋은 자동차, 좋은 가방끈, 좋은 옷, 좋은 책은 좋은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라든지 바른길이 될 수 있는가. (4344.3.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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