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을 못하는 사람


 어제가 큰보름인지 몰랐다. 그저 달이 참 밝다고 느꼈다. 애 아빠 혼자 서울로 볼일 보러 나와서 서울 종로 뒷골목을 걷다가 문득 생각이 나기에 형한테 전화를 건다. 형은 지난 설날 몸에 아프다면서 음성 부모님 집에 찾아오지 못하고 목포에 혼자 머물었다. 형한테 전화를 걸면, 형은 늘 동생한테 “뭐 필요한 거 없어?” 하고 묻는다. 내가 형이고, 형이 동생이었으면 나도 이렇게 묻지 않았을까. 지난 설날에 어떠했는가 말하고 형은 잘 지내는가를 물으며 둘째가 오월에 태어나니까 그무렵에 한번 놀러오라고 이야기한다. 형이 또 “뭐 필요한 거 없어?” 하고 묻기에, “글쎄, 뭐가 있어야 할까?” 하다가 “그러면 기름 보내 줘.” 하고 말한다. “무슨 기름?” “보일러에 넣는 기름.” “내가 기름을 보내 줄 수는 없고, 기름을 살 수 있는 돈을 보내 줄게.” “지난해 12월에 300리터를 넣을 때에 삼십이만 원인가 들었는데 지난달에 넣을 때에는 삼십오만 원인가 들었어. 아마 이달에는 36만 원쯤 되겠지.” 형은 알았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하다가 전화를 끊는다. 잠을 얻어 자려고 인천으로 전철을 타고 간다. 이듬날 시골집으로 돌아갈 찻삯이 없기에 은행에 들른다. 늦은 때라 600원이나 물어야 하지만 돈을 찾기로 한다. 이듬날 아침 일찍 움직이자면 은행 있는 데까지 돌아올 발걸음이 아쉽기 때문이다. 이 발걸음만큼 다른 골목길을 거닐며 사진 한 장을 더 찍고 싶다. 600원은 몹시 쓰리고 아프지만, 사진 한 장 얻는 값을 헤아리면 아무것 아닌 돈이다. 그런데 내 은행계좌에 자그마치 2000리터 넣을 만한 기름값이 들어왔다. 형, 300리터면 된다고 했는데, 형은 왜 이리 셈을 못하시우? 에그. 잠잘 집을 찾아 걸어가면서 조용한 골목 한켠에서 눈물 몇 방울 훔친다. (4344.2.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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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으로 쓰는 책 

 손으로 글을 쓰면 참말 엉뚱하거나 바보스럽거나 어리석은 글은 안 쓰기 마련입니다. 팔이 저려서라도 못 씁니다. 꼭 써야 할 만큼 쓰며, 저린 팔을 버티면서까지 써야겠다 싶은 글을 뼈를 깎으며 내놓습니다. 나는 내 글부터 모두 내 손으로 쓸 뿐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한결같이 내 고운 이웃들이 손으로 썼구나 하고 느끼는 책을 찾아서 고마이 장만하여 읽습니다. (4344.2.1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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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려받은 책, 다친 책


 누군가한테 책을 빌려줄 때에는 ‘그냥 준다’고 생각해야 한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냥 주는 셈치고 빌려주어야지, 빌려줄 때 모습 고스란히 돌아오리라 생각하면 안 된다고들 말한다.

 서울사진축전을 하는 자리에 사진책 300권 남짓 빌려주었다. 책은 열여덟 상자에 담겨 돌아온다. 드디어 돌아와 준다. 상자를 하나하나 끌른다. 내 품을 떠나 숱한 사람들 손길을 타던 책을 그립게 어루만진다. 고맙게 거의 다치지 않은 책이 있다. 다치지 않은 책이란, 서울사진축전에 온 사람들이 ‘거의 안 들춘 책’이란 뜻이다. 다칠 까닭이 없는 번듯한 새책이요 나온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책이나 제본이 망가지고 종이가 찢어지며 뒤틀린 책이 있다. 그만큼 많이 들추거나 읽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1960년대 앞에 나왔던 책들은 하나같이 겉장이 떨어지거나 떨어질락 말락 한다.

 누군가한테 빌려준 책이 뜻밖에 나한테 돌아올 때에는 그저 ‘고맙다’고 여겨야 한다고들 한다. 그래, 고맙다. 다쳤을지라도 이렇게 돌아와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우면서 반가운가.

 앞겉장과 뒷겉장이 똑 떨어지고 만 1960년대 일본 사진잡지 하나는 큰 비닐에 넣는다. 앞으로 우리 시골 도서관으로 찾아와서 이 사진잡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되리라. 내가 웬만해서는 안 보여줄 테니까. 그런데, 사람들 손을 타는 자리가 아닌 유리 진열장 안쪽에 넣기로 한 책조차 앞뒷 겉장이 똑 하고 떨어졌다. 왜? 1950년대에 나온 한국 사진책 하나 몹시 알뜰히 여겨야 한다고 틀림없이 말했는데, 왜?

 빌려준 사람이 잘못이다. 빌려간 사람 탓을 할 수 없다. 책은 벌써 망가졌으니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이제부터 이 모습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건사해야 한다. 이 책도 크기에 맞는 비닐을 찾아서 곱게 넣어야지.

 내가 그러모은 책으로 내 돈을 들여 도서관을 여는 일이란 참 바보스러운 짓이다. 그냥 나 혼자 조용히 껴안으면 될 노릇인데, 한국 같은 나라에서 개인 도서관을 하는 사람은 다 멍텅구리라 할 수 있다. 한국사람이 책을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보는데. 한국사람이 책을 얼마나 엉터리로 보는데. 한국사람이 책을 얼마나 안 사랑하고 안 아끼는데.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큰 새책방에는 ‘보기책’을 따로 놓기까지 한다. 사람들 손이 너무 거칠기 때문이다. 갓 나와 반들반들한 새책에 손때나 손자국이 묻는다든지 책종이가 접힌다든지 하면 상품으로 팔 수 없다. 그러나, 책방마실을 한다는 사람들은 이러한 책을 함부로 넘기거나 다룬다. ‘값을 치러 사기 앞서’까지는 얌전히 정갈하게 살펴야 할 책인데, 이렇게 하지 않는다. 책방에 마실거리나 먹을거리를 들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까닭을 헤아리지 않는다.

 여느 헌책방에 가 보면, 책방마실을 한다는 사람들 가운데 적잖은 숫자가 헌책이라고 책을 마구 다룬다. 새책조차 알뜰히 돌보지 않는 한국사람이니까 헌책이라면 아무렇게나 던지거나 집거나 쥐거나 다루어도 되는 줄 알기 일쑤이다.

 책을 아끼는 사람은 헌책이든 새책이든 똑같이 소담스러이 아낀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새책보다 헌책을 훨씬 따사로이 사랑한다. 새책방 새책은 언제든지 다시 찍어서 만날 수 있다. 헌책방 헌책은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책이 많다.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을 헌책이랑 언제라도 다시 찍어서 살 수 있는 새책이 함께 있을 때에, 두 가지 모두 같은 책이니까 같이 아낄 노릇인데, 내 손길은 어떠해야 하며 내 눈길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더 값있다기에 더 아끼거나 사랑해야 하지 않다. 더 값있다는 책이 아니라, 더 다치기 쉬우며 더 망가지기 쉬울 뿐 아니라 다시는 찾아볼 수 없도록 보배스럽기 때문에 조금 더 마음을 쏟아야 할 뿐이다. 두꺼운종이도 얇은종이도 같은 종이인 만큼, 종이로서 알뜰히 여겨야 하는데, 얇은종이는 한결 잘 찢어진다. 얇은종이를 조금 더 마음써서 다룰밖에 없다. 몸 튼튼한 사람과 몸 아프거나 여린 사람이 있다면, 몸 아프거나 여린 사람한테 마땅히 더 마음을 쏟거나 사랑을 나눌밖에 없다. (4344.2.15.불.ㅎㄲㅅㄱ)
 

 

(책을 이 따위로 들고 보니까 다친다. 무거운 책을 요 따위로 들고 보도록 살아오는 한국사람들은 책이 얼마나 아파하는지 알아채지 않는다. 그러나 행사를 마련한 쪽부터, 책이 다치지 않도록 볼 수 있게끔 책걸상을 넉넉히 마련하지 않았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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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삯과 책값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달삯을 치르느라 주머니가 텅텅 비었다. 그래도 사야 할 책은 꼬박꼬박 사면서 살았다. 어떻게 달삯 다 치르고 옆지기 밥 먹이며 책까지 살 수 있었나 용하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살림돈 바닥나 갤갤대던 때마다 생각하지 않던 곳에서 도움돈을 받았고, 정 힘들 때에는 형한테서 살림돈을 얻기도 했다. 내 둘레 사람들은 우리 식구가 좋은 책을 가까이하면서 좋은 책이 널리 사랑받도록 힘쓰는 일을 한결같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둘레 사람들 힘과 사랑과 손길을 받으면서 살림을 꾸리고, 책을 읽는다.

 시골에서 살면서 달삯을 치르지 않으나 주머니가 가득하지는 않다. 그러니 시골에서 산달지라도 책을 마음껏 사들일 수는 없다. 다만, 주머니가 비지도 차지도 않는 살림이기는 하나, 사야 할 책이 있을 때에는 여러 날 조용히 지낸 다음 덜컥 지르듯이 장만한다. 곰곰이 살피면 살림돈 없기야 어디에서나 매한가지인데, 우리 식구가 시골집에서 집삯 안 내며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분이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면서 살림을 꾸리다가는 읽고 싶거나 도서관에 갖추고픈 책이 있으면 마음껏 사들인다.

 좋은 사람들이 좋은 책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이끈다. 좋은 사람들 손길은 크거나 많거나 대단하지는 않으나, 좋은 책 하나 스러지지 않을 만큼 알맞으면서 사랑스럽고 따뜻하다. (4344.2.1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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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그림자


 등불 하나 없는 고요한 멧길을 아이 손을 잡고 옆지기와 함께 내려옵니다. 보름달이 아니요 반달조차 아닌 날씬한 초승달인데, 이 초승달은 우리들 머리 위쪽에서 밝은 빛을 뿌리며 그림자를 베풀어 줍니다. 올망졸망 멧길을 걸어 내려오는 시골집 세 식구는 달그림자를 밟으며 노래노래 부릅니다. 달그림자 없이 살아가야 하는 서울사람들이 딱하다 싶지만, 서울사람한테는 달그림자가 없어도 돈그림자가 있겠지요. 달그림자 어리는 책을 알아보거나 느끼지 못할 테지만, 돈을 얻거나 이름을 드날리는 처세책과 경영책을 많이 만나거나 즐겁게 읽을 테지요. 도시사람은 달그림자 없이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테니까요. 도시에 깃든 회사는 달그림자로 굴러가지 않을 테니까요. 도시에서 펴내어 도시에서 읽는 신문은 달그림자 이야기를 다루지 않을 테니까요. 아파트에는 달그림자가 나타날 수 없을 테니까요. (4344.2.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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