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48 : 그림책 읽기

 새벽에 일어나서 글쓰기를 하고, 바깥이 희뿌윰히 밝는 아침에 쌀을 씻어 불리며, 국거리로 끓일 다시마를 끊고 말린버섯을 풀어 불립니다. 이윽고 뒷간에 갔다 와서 글쓰기를 마저 하다 보면 아이가 먼저 깨어납니다. 이 즈음부터 아침을 해서 차리고 아이를 먹이고 치우노라면 어느새 한낮이 됩니다. 이 다음에 빨래를 하고 이불을 털곤 하는데, 기운이 남으면 자전거수레에 아이를 태우고 살짝 마실을 다녀옵니다. 낮나절이 되어도 집일은 그치지 않습니다. 낮나절에는 저녁밥을 헤아려야 하니까요. 이무렵 아이가 살짝 낮잠이라도 자 주면 아빠로서 책읽기를 조금이나마 합니다. 낮잠 없이 저녁까지 놀자고 엉겨붙으면 그만 지쳐떨어져 저녁에 아이한테 그림책 한 권 제대로 읽어 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오늘날이 되어도 여느 아빠들은 집 바깥에서 돈 버는 일만 합니다. 오늘날이 되어도 여느 엄마들은 집순이가 되어 살림만 꾸립니다. 또는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할머니한테 맡기고 두 어버이가 돈벌이에 매달립니다. 바깥에서 돈벌이에 바쁜 어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를 씻기거나 먹이거나 재우거나 책을 읽어 주거나 하기 어렵습니다. 바깥에서 온힘을 다 쓰고 돌아왔으니, 이튿날 다시 기운을 차려 돈벌러 나가자면 ‘집순이한테서 다리 주무름을 받으’며 느긋하게 쉬어야 할 테니까요.

 엊저녁에는 아이하고 《까만 크레파스》를 함께 읽습니다. 책에 적힌 얄궂은 말은 아빠가 볼펜을 쥐어 하나하나 바로잡습니다. “타닥타닥 뛰어가다가”는 “타닥타닥 달려가다가”로 고칩니다. ‘뛰어가다’는 콩콩 통통 뛰면서 가는 모습이니까, 타닥타닥이든 다다다다이든 ‘달려가다’라 해야 합니다. “와, 기분 최고다!”는 “와, 좋다!”로 고치고, “황토와 갈색이”는 “흙빛이와 밤빛이”로 고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는 “그림을 그립니다.”로 고칩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즐거이 들으면서 배울 말을 헤아린다면, 아무 말이나 그림책에 적힌 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고, 어린이 말매무새를 살핍니다. 아이는 둘레 어른이 “에이, 젠장!” 하는 말을 고스란히 배워서 따라합니다. 어른이 얄궂게 말하면 아이도 얄궂게 말해요. 줄거리와 엮음새와 그림결 모두 훌륭한 그림책일지라도, 그림책에 담은 ‘말’이 우리 말답거나 참답지 못하다면 슬픈 일이에요.

 일본 그림쟁이 ‘다케다 미호’ 님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고, 이분 그림책 또한 썩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럭저럭 읽히기는 하는데, 2001년에 《책상 밑의 도깨비》, 2007년에 《짝꿍 바꿔 주세요!》, 2008년에 《우리 엄마 맞아요?》가 한글판으로 나왔습니다. 앙증맞으면서 살가운 그림결에, 그윽하면서 따사로운 이야기를 그림책에 담아 내놓기에 사랑받습니다. 이제 막 서른두 달째 접어든 아이는 《까만 크레파스》이든 다케다 미호 님 그림책이든, 아빠가 한 번 함께 읽어 주면 “내가 읽을게!” 하면서 앙증맞은 손으로 앙증맞은 그림책을 넘깁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오늘날 어버이들이 자가용을 버리며 ‘자가용 값’과 ‘자가용 굴릴 기름값’으로 아이들 그림책을 장만해서 아이랑 함께 읽으면 우리 누리가 얼마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레 탈바꿈할까요. 한 아이 한 해 어린이집 배움삯 500만 원을 그림책 값으로 바꾼다면 아이들은 얼마나 좋아할까요. (4344.1.1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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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홀림길에서>(텍스트,2009)에 실은 글. 

 

90. Audubon's Birds of America (Audubon 그림/Artabrasm,1981)

 인천상륙작전을 했다는 날, 하루 내내 집에만 있던 아기와 자유공원으로 밤마실을 다녀온다. 마침 맥아더동상 옆을 스쳐 지나간다. 동상 앞에는 온갖 군부대 별들이 보내 온 꽃들이 놓여 있다. 나이든 아저씨들이 동상을 한참 올려다보며 ‘나라를 지켜 주었다’는 미국 장군을 기린다. 젊은 짝꿍도 꽃이 놓인 동상 앞에 한동안 서며 코 큰 흰둥이 장군을 기린다. 아기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아랑곳 않고 둘레 꽃밭 앞에 쭈그려앉아 꽃잎에 살며시 손을 대면서 놀다가 쉬를 한다. “그래, 녀석아, 아빠가 여기에 쉬를 할 수 없으니 네가 아빠 몫으로 해 주는구나.” 해마다 이맘때에는 무슨무슨 관변단체에서 ‘베낭 3000개 선착순 선물 증정’을 한다면서 ‘맥아더동산 수호 궐기대회’를 연다. 지난 2008년에 이어 올 2009년에도 김동길 씨가 강연자로 나와서 ‘빨갱이 때려잡자’는 목소리로 핏대를 세웠다고 한다. 맥아더동상을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얼추 열 해 앞서부터 나오지 않았나 싶은데(훨씬 더 앞서에도 있었겠지), 인천에는 한국전쟁 때 미국을 우러르는 동상이 여럿 있고 기념관도 있으며 미국이 개화기 때 군함으로 밀고 들어오며 맺은 한미수호통상을 기리는 높은 탑마저 있다. 개화기 때 일본집 또한 많이 남아 있으니, ‘다른 나라한테 짓밟힌 자취로 가득한’ 도시라 할 만하다. 고은 시인 같은 이는 ‘이제 와서 맥아더동상 허물어 무엇하느냐, 이 동상에도 역사가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옳은 소리이다. 김영삼 씨가 허문 총독부 건물에도 역사가 깃들어 있었겠지. 그런데 총독부 건물은 헐어도 되고 맥아더동상은 허물지 않아도 될까? 맥아더동상은 그대로 두면서 인천땅 수수하고 가난한 사람이 살아가는 골목동네는 깡그리 헐어도 될까? 목소리를 내려면 고르게 내야 하지 않을까? 장님한테 빛줄기가 된 한글 점글을 만든 박두성 님 집은 교회에서 주차장으로 쓴다며 허물렸고, 박두성 님 따님이 살며 수채화집으로 가꾸는 오랜 벽돌집(예전에는 병원이었고 예전에 쓰이든 병원기구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다)은 재개발구역에 들어가 있다. 인천뿐 아니라 나라를 빛낸 큰별이라는 이름을 뒤늦게 받은 박두성 님이라지만, 또 미국에 ‘모세 할머니’가 있다면 한국에 ‘수채화 할머니 박정희’가 있는데, 이런 분들 삶자락 또한 함께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를 함께 내야 하지 않을까? 맥아더만 지키자고 목소리를 내면 그만인가? 미국에서는 ‘오두본’ 새 그림을 거룩하게 여기며 크고 멋진 책으로 꾸준히 새로 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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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홀림길에서>(텍스트,2009)에 실은 글. 

 

91. 까마귀의 죽음 (김석범 씀,김석희 옮김/소나무,1988)

 국민학교를 다닌 여섯 해에 걸쳐 학교에 갖다 내야 하는 돈이 참으로 많았다. 무어를 짓는다며 돈을 모으고, 교실에 ‘시청각교육’을 하겠다며 텔레비전을 놓는다고 할 때에도 돈을 모았다. 대놓고 돈을 모으는 일이 너무 잦아 때로는 ‘국화 화분을 사라’고 우리들한테 몇 그릇씩 몫을 나누어 주었고, 폐품수집은 학급과 학년마다 끝없이 싸움을 붙여 서로 옆 반 빈병과 신문지와 책을 훔쳐 오게까지 내몰았다. 다달이 방위성금을 내고 저축통장에 돈을 내라 했으며 전투기성금이 있었다. 동무들 가운데에는 ‘불량식품’이라는 문방구 먹을거리를 사먹느라 돈이 없는 녀석이 있기도 했지만, 주마다 한두 가지씩 있는 모금과 성금에 돈을 내기가 빠듯한 살림인 집안이 훨씬 많았다. 너무나 많은 성금이요 모금이었기 때문에 한 번에 500원을 내는 동무란 드물었다. 어쩌다 한둘이 500원을 성금으로 내거나 저축으로 내면 “우와!” 하면서 놀라 했고, 1000원을 내면 “이야!” 하며 기가 죽었으며, 부잣집 동무가 5천 원이나 1만 원을 내기까지 하면 끽소리를 하지 못했다. 명절을 치러 친척 어른한테서 돈을 얻은 다음에는 천 원짜리 한 장을 저축에 내기도 했는데, 이렇게 돈을 낼라치면 “바보야, 곧 또 돈을 내야 하는데, 500원씩 나눠서 내면 두 번을 채우고 300원씩 나눠도 세 번이 되는데!” 하면서 옆 짝꿍이 나무랐다. 그런데 이런 성금과 모금은 담임교사한테 매를 맞으면서 겨우겨우 메꾸고 채우고 했지만, 1986∼87년에 냈던 ‘평화의 댐 모금’은 죽을맛이었다. 나와 동무들은 텔레비전 소식을 들으며 홀랑 넘어가 “엄마 엄마 우리가 돈을 안 내어 평화의댐을 못 지으면 다 물에 잠겨 버린대요!” 하면서 졸라댔다. 그렇지만, 다른 성금은 ‘기본 300원 넘게’ 내도록 했고 전투기성금도 500원 넘게 내도록 했으나, 평화의댐 성금은 5천 원이었다. 5천 원이라니! 바나나 한 송이 아닌 한 가닥이 500원을 하던 때요, 짜장면 한 그릇이 150∼200원을 하던 때였는데. 이무렵 대통령은 퍽 자주 ‘카 퍼레이드’를 했고, 경인고속도로 들머리인 우리 학교는 틈나는 대로 길에 나란히 서서 대머리 대통령한테 손을 흔들어야 했다. 시위나 데모라는 말을 모르던 국민학생 때, 남동공단이나 만석동 쪽을 버스 타고 지나갈 때 으레 최루탄 냄새로 재채기를 했고, 동인천역 앞에 버스가 뚝 끊기고 고갯마루에 돌이 어마어마하게 깔린 모습에 등골이 오싹했다. 학교와 집과 신문방송에는 한 마디도 안 나온 ‘민주찾기 싸움’이 벌어지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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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해 앞서 쓴 글입니다. 짧게 쓴 글에서 제 마음을 이렇게 짧게 적바림할 수 있는 매무새를 잘 추슬러야겠다고 다시금 되뇝니다.) 



 헌책방 헌책 느끼기


 나한테 즐거움과 기쁨을 베풀어 주는 온갖 책을 마음 가볍게 만날 수 있는 곳이 헌책방이라고 느낍니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나한테 즐거울 책을 찾는 가운데 책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곳이 헌책방이라고 느껴요. 해묵은 책이건 낡은 책이건 빳빳한 책이건 크게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느 책이건 나 스스로 내 손에 집어들어서 반갑게 읽을 수 있다면 나한테 좋은 책이라고 믿습니다. (4339.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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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 삶쓰기 빨래하기


 아이는 이제 오줌을 잘 가린다. 그런데 아이가 앉는 변기가 작은지 요새는 변기에 오줌을 누어도 자꾸 샌다. 아이가 나날이 크기 때문에 아이 스스로 변기에 얌전히 앉고 바지도 제대로 내려야 하는데, 이렇게 안 하고 아무렇게나 앉아서 쉬를 하면 엉덩이며 허벅지며 바지며 다 튄다. 오늘 하루만 속바지 세 벌과 겉바지 두 벌을 버렸다. 오줌을 가려 빨래감이 줄었다 싶더니, 이제는 이렇게 새로운 빨래감을 쏟아낸다. 오줌으로 젖은 바지를 들고는 짜증을 낸다 한들 어쩔 길이 없다. 아이보고 바가지라도 뒤집어쓰고 소금 얻어 오라고 꾸중하지만, 이런다고 아이가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가뜩이나 물이 얼어 멀리 물을 길어오는 데까지 가서 빨래를 해야 하는데, 자꾸 빨래감이 나오면 속이 아프고 힘들다. 예전에는 아이가 오줌을 누어도 “그래, 잘 눠.” 하고 말한다든지 가만히 다른 일을 해도 되었으나, 이제는 밥을 하다가도 뭐를 하다가도 허리가 아파 살짝 드러누워 쉬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아이를 변기에 제대로 앉혀야 할 뿐더러, 쉬를 눈 아이 밑을 닦아야 한다.

 겨우겨우 아이를 재워 놓고는 느즈막한 저녁나절 아빠는 글조각 하나라도 건사해 볼까 싶어 셈틀을 켜는데, 멍하거나 띵할 뿐 도무지 손을 쓰지 못한다. 아이 옆에 나란히 누워 보기도 하고, 멀뚱멀뚱 앉기도 하지만, 좀처럼 새마음을 차리지 못한다. 살림하는 어머니들한테는 책읽기라든지 글쓰기라든지 꿈조차 꿀 수 없던 일이었을까. 책이고 글이고 뭐고 돌아볼 겨를 없이 바빠맞을 뿐 아니라, 어쩌다가 숨돌릴 겨를을 얻었달지라도 숨마저 못 돌리며 밤하늘 별바라기를 하며 한숨을 쉴 뿐인가. 아이 옆에 다시 드러누워 잠들고도 싶지만, 밤새 아이 기저귀를 갈며 잠을 뒤척일 테고, 새벽나절 일어나서 맑은 넋으로 글조각 조금 붙잡는다 하더라도 아이는 다시금 일찌감치 깨어나 아빠하고 놀자고 옷소매를 붙들겠지.

 잠든 아이 기저귀를 채우는데 퍼뜩 깬다. 한동안 다시 잠들지 못하기에 가슴에 귀를 대고 토닥토닥거리다가는 “쉬 마렵니?” 하고 물으니, “응, 쉬 마려.” 한다. 기저귀를 푼다. 변기에 얌전히 앉힌다. 쉬를 깨끗하게 누도록 해 준다. 밑을 닦는다. 자리에 눕히고 기저귀를 채운다. 아이는 눈을 살며시 떴다가 감았다 한다. 다시 아이 가슴에 귀를 대고 통통통 뛰는 소리를 듣는다. 아이는 아빠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어 준다. 이윽고 일어나서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는 무거우면서도 보드랍게 눈을 떴다가 감는다. 깨어나려나 마려나. 허, 아이가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하며 돌아앉는다. 아이 숨소리가 고르게 들린다. 문득 뒤돌아본다. 아이가 새근새근 잠들었다. 고마우면서 미안하다. 아이 이마에 입을 맞춘다. 아빠도 졸립다. 아무래도 함께 쓰러져야겠다.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다. (4344.1.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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