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새로쓰기 생각 고쳐쓰기


 처음 쓴 글은 처음 쓴 그대로 좋습니다. 처음 이 글을 쓰던 느낌과 생각과 마음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고쳐서 쓴 글은 고쳐서 쓴 대로 좋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새삼 깨닫는 가운데, 앞으로도 힘차고 씩씩하게 걸어가자며 새삼스레 다짐할 수 있습니다.

 새로 써야 할 글이 많으나, 자꾸자꾸 예전 글을 들추며 손질합니다. 예전 글에서 어리숙하거나 모자란 대목이 많다면, 이제부터 어리숙하거나 모자란 대목을 가다듬어 새롭게 태어나듯 살아가면 좋으련만, 그예 예전 글을 깎고 다듬으며 추스릅니다.

 예전 글은 고치지 말아야 할까 싶으면서, 예전 글을 되읽어야 할 때면 더없이 슬퍼 그예 손질하고야 맙니다. 이냥저냥 나 혼자 되새기는 자리에 썼다든지, 누리집에 올렸던 글이라면 그때그때 지나치지만, 이 글을 종이로 담는 책으로 내놓으려 할 때에는 여러 차례 되읽으면서 수없이 고쳐씁니다.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여러 날 여러 달 여러 해에 걸쳐 생각합니다. 새로 읽을 책처럼 새로 쓸 글이 많은 사람이 자꾸만 지난 삶에 얽매이는 일은 달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읽는 책처럼 다시 읽는 글이라 할 때에는 지난 삶을 놓아 버리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내 목숨이 백 해 이백 해 이어지기라도 할 듯 여기기 때문일까요.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며 지난해와 지지난해와 지지지난해 발자국이 남우세스럽거나 부끄럽다고 느끼기 때문이려나요. 그렇다고 지나온 삶을 모두 고친다거나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흔 나이까지 살아간다면 여든아홉 나이에 쓴 글마저 남우세스럽거나 부끄럽겠지요. 그러나 아흔에는 아흔 그대로 살아내야 할 테지요. 아흔에는 아흔 나이에 쓸 글을 써야겠지요.

 다만,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쓴 모든 글을 모든 사람한테 읽힐 수 없고, 읽혀야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쓸 책으로는 꼭 한 권이면 넉넉할는지 모릅니다. 내가 나 스스로 흐뭇하면서 내 아이와 내 아이가 낳아 기를 아이한테도 흐뭇할 ‘우리 말 바로쓰기 사전’을 선물한다 할 때에는 이 사전에 담을 글조각 하나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고쳐쓰고 싶습니다. 한 권 내놓은 뒤에는 고쳐쓰지 않겠습니다. 첫 한 권이 버거워 그예 고쳐쓰고 맙니다.

 가만히 보면, 나부터 내 모자라거나 어루숙한 모습까지 두루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하는 셈입니다. 나부터 내 모자라거나 어수룩한 모습까지 골고루 사랑하거나 아낀다면 섣불리 글을 고쳐쓰지 않겠지요. 모자라거나 어수룩한 대로 새로운 글을 쓰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며 새로운 밥을 차리면서 집식구들 오순도순 시골살이 즐기겠지요. (4343.12.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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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46 : 어린이책 읽기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이 1975년에 내놓은 《얘들아 내 얘기를》(대한기독교서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나 이제나 아이들한테 읽히는 책은 으레 동시나 동화나 그림책이나 과학책이나 지식책에 머물지만, 이원수 님은 일찍부터 ‘어린이가 읽을 수필’을 써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아이들이 읽을 만한 ‘자유로운 글(산문/수필)’은 거의 없을 뿐더러, 자유로운 넋과 삶을 담아 아이들이 씩씩하고 튼튼하게 커 나가는 데에 길잡이가 되도록 힘쓰는 어른은 몹시 드뭅니다.

 아이들한테 들려줄 ‘자유로운 글’이란 어른들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가면서 아름다움과 착함과 참다움을 사랑할 때에 쓸 수 있습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나라사랑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나라사랑이고, 손으로만 깨작대는 올바른 삶이 아닌 온몸으로 부대끼는 올바른 삶이어야 해요. 이원수 님은 《얘들아 내 얘기를》에서 아이들하고 아이들 어버이하고 아이들 가르친다는 사람들한테 “학교에서 공부해서 좋은 기술만 배우면 장래에 잘 살 수 있다든가, 지식을 쌓아서 사회에 중요한 일을 맡아 할 수 있다든가 하는 생각으로서는 안 된다. 기술이나 지식만으로서는 하나의 기계와 같은 것이 될 뿐, 아름다운 인간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186쪽).” 하고 말을 겁니다. “마음이 곧은 사람은 곧은 글을 쓰고, 마음이 슬픈 사람은 슬픈 글을 쓰고, 성격이 괄괄한 사람은 괄괄한 모양의 글을 쓴다(142쪽).”는 얘기를 덧붙입니다. “어린이들이 책을 사는 것은 그 속에 씌어 있는 글을 읽기 위해서다. 화려한 겉치레를 해야 내용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겉치레가 심해지면 책값은 글값이 아니라 치레값이다(180쪽).”는 생각을 덧답니다.

 어느덧 새롭게 맞이하는 2011년을 헤아립니다. 지난 서른여섯 해 동안 이 나라 학교는 얼마나 ‘기술 교육’을 넘어 ‘사람된 배움’에 마음을 쓰는지 궁금합니다. 나날이 쏟아지는 숱한 책과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은 어느 만큼 ‘곧거나 착한 글’인지 알쏭달쏭합니다. 동네 작은 책방이 거의 사라진 요즈음 소담스러운 책이나 수수한 책은 얼마나 사랑받는지 아리송합니다.

 어린이책이란 어린이만 읽도록 어른이 쓰는 책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어린이가 좋아하면 그만인 책이 어린이책이라 할 만한가요. 어린이가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책이 어린이책이 되려나요. 어린이하고 어른이 함께 좋아서 읽는 책이 어린이책일까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마음을 따스하고 넉넉히 돌보는 책이 어린이책일는지요. 어린이랑 오순도순 어깨동무하면서 누구나 즐길 책이 어린이책인가요.

 어른들은 이런 문학도 즐기고 저런 예술도 누립니다.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수많은 문화와 공연과 영화가 있습니다. 아직 아이한테 보여주기 어렵거나 아이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가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아이들 생각은 한줌조차 없이 살아가면서 아이들한테는 ‘귀여워 보이는’ 이야기만 던져 놓는다고 느낍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른이요, 아이들 또한 고운 목숨임을 옳게 살피지 못하는 어른이라고 느낍니다. 책(글)은 어린이가 나란히 읽을 만한 눈높이로 써야 아름답습니다. 책(이야기)은 할머니랑 어린이를 마주앉히고 함께 읽도록 들려주어야 아리땁습니다. (4343.12.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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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리는 빨래 새로


 하루 사이에 얼었다가 다시 녹은 물꼭지가 밤새 또 얼다. 물을 살짝 틀어 놓았는데 더 틀었어야 하나 보다. 지난밤에도 몹시 추웠는가 보다. 밤새 한두 차례 깨어나서 물꼭지를 틀어 보았다면 얼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아이도 밤에 기저귀 갈 일이 한 번이나 두 번뿐이다 보니 밤에 일어나서 물꼭지를 틀 생각을 못하기도 하고, 몸이 무거워 못 일어나기도 한다. 아침부터 물을 끓여 붓고 전기난로를 켜 놓았으나 좀처럼 안 녹는다. 낮이 되어 날씨가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면 풀리려나. 아침밥을 안친다. 곧 찌개를 끓일 생각이다. 아이는 아빠 옆에서 이 놀이 저 놀이 요 쫑알 조 쫑알 하면서 논다. 오늘 아이를 씻기려 했는데 이래서야 씻길 수 있겠는가. 히유, 다시 한숨을 쉰다. 겨우내 시골살이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애 아빠는 참말 살림꾼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제부터 몇 시간 동안 밥 마무리하고 밥 먹이고 물 녹이려 더 바둥거리고 아이하고 놀고 책 읽히고 그림그리기 하다가는 꼴딱 날이 저물겠지. 그나마 어젯밤에 아이 두꺼운 겉옷을 빨고 몇 가지 밀린 빨래를 했으니 한숨을 돌린다. (4343.12.2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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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린 빨래 끝


 뜨신물 나오는 꼭지가 얼다. 개수대에서 물을 받아 고단하게 빨래를 한다. 씻는방 큰 대야로 물을 퍼 옮기며 빨래를 한참 하니 끝마칠 무렵 드디어 물이 녹다. 밀린 빨래도 끝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어제 해 놓아 다 마른 빨래를 걷는다. 새로 한 빨래를 넌다. 걷은 빨래를 갠다. 그런데 아이가 입은 옷이나 엄마가 입은 옷도 머잖아 빨아야 하니까, 모조리 새로 밀리는 빨래이다. 이들 밀린 빨래를 마치면 이듬날 또 새로운 빨래가 쌓이겠지. 밥하고 밥 차리고 밥 먹이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빨래 걷고 널고 개고 겨우 한숨 돌리며 아이한테 흰종이 하나 내어주며 그림을 그리도록 해 놓는다. 아빠는 아이 곁에서 책 뒤쪽 안종이에 글을 끄적인다. 셈틀을 켜고 글을 쓰고프지만, 셈틀을 켜면 아이는 아빠 품에 안긴다느니 등에 올라탄다느니 할 테지. 어느새 열한 시가 넘고 열두 시가 되네. 새벽 여섯 시 조금 지나 일어난 아이는 낮잠 좀 안 자 주려나. (4343.1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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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읽기 글쓰기


 글이란, 글을 읽는 사람 몫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 몫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글을 아름답고 알맞게 잘 썼어도 글을 읽는 사람이 아름답거나 알맞게 헤아리지 못하면 부질없습니다. 글쓴이한테 부질없지 않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한테 부질없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빈틈없거나 옹글게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제 마음속에서 샘솟는 싱그러운 물줄기가 있기에 글을 씁니다. 여기저기 엉성하거나 어리숙할 테지요. 이 엉성하고 어리숙한 가운데 깃든 보배덩어리를 읽는이가 받아들이거나 맞아들이면 넉넉합니다.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는 글읽기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한결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게 살아가는 길을 느끼면서 살피고자 찾아서 하는 글읽기입니다. 글쓴이는 처음부터 삶쓰기를 하듯이 글쓰기를 합니다. 읽는이 또한 처음부터 삶읽기를 하듯이 글읽기를 하면 됩니다. 삶쓰기와 삶읽기가 어우러질 때에 글쓴이와 읽는이는 마음과 마음으로 만납니다. 술자리에서 다 함께 소주 열 병을 까야 술맛이 나지 않습니다. 고작 보리술 한 병을 앞에 놓고 헬렐레 할지라도 술맛이 납니다. 가락이니 높낮이니 엉터리라 할지라도 노래하는 맛이 있습니다. 노래하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글을 쓰는 마음은 하느님 마음이나 부처님 마음이 아닙니다. 그저 조그마하며 모자란 사람 마음입니다. 글을 읽는 마음 또한 하느님 마음이나 부처님 마음이 아닙니다. 그예 작달막하며 어줍잖은 사람 마음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삶과 삶을 나누며 사랑과 사랑이 예쁘게 어깨동무합니다. 이 사이에서 책 하나 태어납니다. (4343.1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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