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깨어나는 눈 (2022.6.20.)

― 서울 〈서울책보고〉



  우리는 두 가지 몸을 입습니다. 사람도 암수요, 풀꽃나무도 암수요, 짐승도 암수요, 벌나비도 암수요, 고래도 헤엄이도 암수입니다. 처음에는 수(돌이)가 태어났고, 이윽고 암(순이)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암이 먼저 태어나지 않았으나, 우리말에서는 ‘암수’처럼 순이를 앞에 놓습니다. ‘어버이’라는 낱말도 ‘어머니(순이)’가 앞입니다. ‘가시버시’라는 낱말도 ‘가시내(갓)’이 앞이에요.


  처음에 태어난 ‘수(돌이)’는 덜 깨어난, 또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숨결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처음 지은 사람인 수였으나 덜 깨어나거나 아직 깨어나지 않은 탓에 마음을 열 줄 모르고, 마음을 틔울 줄 모르며, 마음을 닦을 줄 몰랐다지요. 이리하여 이 수(돌이)를 바탕으로 ‘다르지만 닮아서 닿도록’ 빚은 몸인 사람이 ‘암(순이)’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먼저 태어난 수가 앞인 듯싶으나, 그저 먼저 태어났을 뿐, ‘깨어나지 못 한 마음’이요, 나중에 태어난 암은 뒤라고 하지만 늦게 태어났어도 ‘깨어난 마음’입니다. 그래서, 몸나이로 앞뒤를 가르지 않고 마음빛으로 앞뒤를 살펴 ‘암수’로 쓰는구나 싶어요.


  태어날 적에 스스로 깨어난 빛인 암인 터라 구태여 다른 데에서 빛을 안 찾습니다. 이와 달리, 태어날 적에 스스로 안 깨어나거나 덜 깨어난 수인 터라 스스로 밝히려 하기보다는 바깥(남)에서 빛을 찾으려고 합니다. 짝을 맺을 적에 수(돌이)가 그렇게 뽐내거나 자랑하거나 내세우면서 무지갯빛으로 꾸미는 뜻을 읽을 만해요.


  암수에서 ‘수’는 ‘수수함·숲·수월함’을 품을 만했는데, 막상 수컷은 수수한 숲으로 수월하게 피어나는 숨빛하고 동떨어졌어요. 이와 달리 암컷은 스스로 알고 스스로 앞장서면서 살림을 짓는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빛으로 알찬 삶으로 나아갑니다.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룬 첫자리가 ‘엄마누리(모계사회)’일 만합니다.


  서울마실을 하며 〈서울책보고〉로 찾아갑니다. 즐거이 책숲마실을 할 헌책집을 두 곳 이야기하는 날입니다. 일찌감치 잠실나루에 닿아 책시렁을 돌아봅니다. 돌이(수컷)란 몸을 입고 태어났기에 덜 깨어난 마음을 살찌울 책을 하나둘 헤아립니다. 돌이는 참말로 바지런히 읽고 쓸 노릇입니다. 돌처럼 딱딱한 머리랑 마음을 깨뜨려야 깨어날 테니까요. 이와 달리 순이는 굳이 글이나 책에 기대지 않고서 마음빛을 돌아보면 언제 어디에서나 어질고 슬기로운 눈망울로 살피겠지요.


  글로만 적는 이야기로는 어느 마음도 깨울 수 없습니다. 숲을 수수하게 품으며 푸르게 살리려는 이야기일 적에 마음을 깨웁니다. 머슴으로 머물지 않으려고 하루를 읽고 바람을 노래하고 별빛을 보듬습니다.


ㅅㄴㄹ


《제3세계의 이해》(변형윤·박현채·사무엘 팔머 외, 형성사, 1979.2.첫/1990.7.25.중판)

《경주 속담·말 사전》(김주석·최명옥, 한국문화사, 2001.6.15.)

《영리한 공주》(다이애나 콜즈 글·로스 아스키스 그림/공경희 옮김, 비룡소, 2002.4.24.)

《일본의 소출판》(와타나베 미치코/김광석 옮김, 신한미디어, 2000.6.25.)

《현대 출판학 원론》(박유봉·채백, 보성사, 1989.4.15.첫/1992.10.15.4벌)

《전통무용 1호》(최종실·최석실 엮음, 월간 전통무용, 1987.11.1.)

《남북한 청소년 말모이》(정도상·박일환 글, 홍화정 그림, 창비교육, 2020.7.30.)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왜 왔읍니까?》(지학순, 뿌리깊은나무, 1984.4.2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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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2022.5.31.)

― 고흥 〈더바구니〉



  오늘로 드디어 모든 시끌짓(선거유세차량)이 끝납니다. 곰곰이 보면 그들(정치꾼·공무원)은 늘 시끄럽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을 자랑삼아 떠들지 않는데, 그들은 뭘 했다고 떠들고 뭘 하겠다며 떠듭니다.


  굳이 잘난책(베스트셀러)을 안 읽습니다. 잘났다고 떠들썩하게 온갖 곳에 알림글로 채우는 책은 속이 비었거든요. 빈수레는 시끄럽습니다. 빈책(공허한 베스트셀러)은 자꾸자꾸 알림글을 여기저기 목돈을 띄워서 떠듭니다.


  삶을 삶답게 새로 읽으려고 할 적에 비로소 책집에 깃들어 스스로 차분히 하루를 되새길 만하지 싶습니다. 쇳덩이(자동차)를 내려놓고서 마을책집으로 천천히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달리지 않는다면, 삶을 삶답게 읽을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쇳덩이를 빨리 달려 부릉부릉 끼이익 세워서 후다닥 사들이는 몸짓이라면 구태여 책을 읽을 까닭이 없어요. 빨리빨리 하고 싶으면 그냥 빨리 죽는 길이 낫습니다.


  둘레(사회)에서는 ‘병·병신’을 하염없이 나쁘게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낱말 ‘병·병신’은 하나도 안 나쁩니다. 이 낱말을 나쁘게 여기거나 쳐다보는 눈썰미가 ‘나쁘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병신 = 아픈 몸 / 앓는 몸’이란 뜻입니다. 아프거나 앓을 적에 비로소 몸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알아’ 가는 길이게 마련이라, 속뜻으로 놓고 보면 ‘아프다·앓다·병·병신’은 나쁜말일 수 없어요. 뜻을 모르니 함부로 쓰거나 나쁘다고 손가락질을 할 뿐입니다. ‘사춘기’도 ‘앓이(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배움터(학교)를 안 다니는 아이는 봄앓이(사춘기)가 없습니다. 스스로 하루를 그리고, 손수 풀꽃나무를 쓰다듬고, 몸소 흙살림을 짓는 푸름이도 ‘사춘기라는 병’이 없습니다. 그러나 배움터에 길들어야 하고 옭매여야 하는 모든 푸름이는 ‘사춘기라는 병’ 탓에 시름시름 앓아야 하고 아파야 하지요. 굴레에서 벗어나자니 끔찍하게 앓고서 털어야 합니다.


  자전거를 달려 〈더바구니〉로 옵니다. 반가이 읽을 책을 등짐에 챙기고서 새삼스레 천천히 자전거를 달려 집으로 돌아갑니다. 55킬로미터쯤 달리는 자전거길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습니다. 그저 멧길이자 들길이자 바닷길입니다. 우리는 종이에 앉힌 이야기도 읽지만, 두 다리로 디디는 바람길도 싱그러이 읽을 만합니다.


  우리는 왜 책을 안 읽을까요? 첫째, 우리 스스로 그들(정치꾼·공무원)이 된 탓에 빈수레처럼 떠들어요. 둘째, 쇳덩이를 부여잡느라 부릉부릉 빵빵빵 빨리 달리니 이웃도 참나도 안 봅니다. 셋째, 해바람비를 안 읽으니 숲도 종이도 안 읽습니다.


ㅅㄴㄹ


《한국 개미 사전》(동민수, 비글스쿨, 2020.12.20.)

《고해정토, 나의 미나마타병》(이시무레 미치코/김경연 옮김, 달팽이출판, 2022.1.18.)

《제주도》(이즈미 세이치/김종철 옮김, 여름언덕, 2014.5.25.첫/2019.1.1.2벌)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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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랑하는 마음 (2021.7.17.)

― 제주 〈동림당〉



  애월 곽지부터 달려 제주시로 넘어오기까지 여러 오름을 거쳤고 여러 바닷가를 돌았습니다. 오늘 하루는 ‘책집마실’을 누리자고 생각했으나, 그만 ‘자전거마실’만 실컷 했습니다. 〈바라나시 책골목〉에서 짜이를 마시면서 다릿심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마침 오늘은 〈바라나시 책골목〉가 쉬는날이더군요. 철렁이는 바닷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동림당〉에 가기로 합니다. 아직 첫걸음을 떼지 못 한 다른 마을책집을 헤아리자니 곧 마감입니다.


  며칠 만에 〈동림당〉 지기님을 만납니다. 책을 더 사더라도 등짐에 담을 수 없는데, 이곳에서 책짐을 풀어 고흥으로 부쳐도 된다고 말씀합니다. 빈꾸러미를 얻어 차곡차곡 책짐을 옮깁니다. 〈동림당〉에서 만나는 책도 한 자락만 새로 등짐에 담아 밤에 읽으려 합니다.


  제주에서는 ‘제주 것’을 찾거나 챙기거나 가꾸거나 알리려는 빛이 짙습니다. 서울이며 부산이며 수원이며 여러 큰고장도 이런 물결이 있습니다. 고장지기(지자체장)가 조금이나마 살림(문화)에 마음을 기울이면 고장빛을 살찌우는 길(정책)을 어느 만큼 폅니다. 그런데 제가 나고자란 인천이라든지, 제가 보금자리를 누리는 전남 고흥에서는 고장빛을 북돋우거나 가꾸는 길을 좀처럼 못 봅니다. 인천이나 전남 고흥에는 살림빛(문화정책)이 없다고 해도 될 만합니다.


  굳이 ‘우리 것’을 앞장세우거나 치켜세우거나 높여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살림살이’를 스스로 사랑하고 돌보면서 오늘을 노래하면 즐겁습니다. 아이 곁에서 도란도란 보금살림을 ‘우리 나름대로’ 지으면 됩니다. 다른 집에서 하는 살림살이를 기웃거리거나 따라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른 집 아이’를 쳐다보면서 ‘우리 집 아이’를 맞춰야 할 일조차 없습니다.


  이웃나라 사람이 쓴 책이건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이건 대수롭지 않아요. 어느 책을 손에 쥐건 마음빛을 읽고서 우리 사랑씨앗을 보듬으면 넉넉합니다. 그저 모든 책은 ‘우리말’로 쓰고 ‘우리글’로 읽으면 됩니다.


  우리말 우리글은 ‘토박이말·순우리말’이 아닙니다. 우리말 우리글은 ‘삶말·살림말·사랑말·숲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말’이지요.


  어린이한테서 놀이를 빼앗으면 어린이한테 우리말(살림말)을 빼앗는 셈입니다. 어른 스스로 살림을 등지면 우리 스스로 우리글(사랑글)을 잊는 셈입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오늘 이곳에서 짓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말을 가없이 품고 돌보며 밝히는 눈빛’입니다.


ㅅㄴㄹ


《寫眞輯 朝鮮解放1年》(朝鮮民衆新聞社 엮음/水野直樹 옮김, 新幹社, 1994.9.1.)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페터 빅셀/전은경 옮김, 푸른숲, 2009.10.30.)

《안전운전 (신규자 교재)》(편집부, 경찰청 감수, 도로교통안전협회, 1991.11.27.)

《관광교통 시각표 223호》(안종복 엮음, 철도여행문화사, 1993.5.5.)

- “호텔 충무”

《고등학교 세계사》(오인석·김규호, 동아출판사, 1990.3.1.)

《고등학교 국어 (하)》(박갑수 외 여덟 사람, 교육부, 1990.9.1.)

《보건실 이야기》(곤노 히토미/박소연 옮김, 가람북, 200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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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꽃 (2021.7.17.)

― 제주 〈몽캐는 책고팡〉



  제주섬 곽지 바닷가에서 아침을 맞습니다. 어제 이야기꽃은 즐거이 마쳤습니다. 제주바다를 보러 제주에 오지 않았습니다. 제주책집을 찾아가려고 제주에 왔습니다. 부릉부릉 쇳덩이가 아닌 두 다리로 이 책집하고 저 책집 사이를 잇는 길을 달리면서 이 고장이 어떤 숨결로 흘러가는가를 느끼고자 합니다.


  오늘 달릴 길을 어림하자니 일찌감치 나서야 합니다. 등짐 책무게를 얼마 줄이지 못 했으니 쉬엄쉬엄 달리며 등판하고 다리를 쉬자고 생각합니다. 사락사락 발판을 굴러 느슨히 나아갑니다. 바닷가하고 등지면서 한라산을 바라보는 길을 달립니다. 나즈막한 바닷길은 수월할 테지만, 바닷길은 부릉이도 사람도 많기에, 부릉이도 사람도 적을 길을 살펴서 달립니다.


  구경터가 아닌 마을 고샅으로 들어서니 한갓집니다. 골목집을 지나고, 우람하게 선 마을나무 곁을 스치고, 땀비를 길바닥에 쏟으면서 스륵스륵 나무숲 사이 조용한 길에 섭니다. 제대로 길을 짚으면서 가는지 엉뚱하게 헤매며 서귀포 쪽으로 빠지는지, 제자리에서 맴돌듯 헤매는지 알 턱이 없습니다. 오가는 부릉이가 드문 길을 나무로 둘러싼 데에 문득 서면서 해바라기를 합니다.


  어디인지 종잡을 수 없더라도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갈 곳을 잃고 거꾸로 달렸으면, 오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면 됩니다. 오르막에 또 오르막이 나와 “으째 책집이 아닌 한라산으로 가는가베.” 싶으면 그만 오르다가 등짐을 내려놓고 고무신을 벗고 발바닥을 쉽니다. 풀밭에 앉아 글종이를 꺼내어 노래꽃(동시)을 씁니다.


  아마 과오름을 지난 듯싶고, 고내봉을 에도는 듯싶습니다. 이러다가 농협하고 더럭어린배움터를 봅니다. 옳거니, 아주 어긋나게 헤매거나 돌지는 않았군요. 어린배움터 옆길을 무시무시하게 달리는 커다란 짐차를 다 보내고서 다시 자전거를 달립니다. 드디어 〈몽캐는 책고팡〉에 이릅니다. 그러나 마침 오늘은 책집을 안 여는 날인 듯싶습니다. 자전거는 돌담에 기대어 놓고서 돌담꽃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닫힌 책집 둘레를 서성이면서 무릎이랑 허벅지랑 허리를 토닥입니다. 어디 우체국이 있어 책짐을 덜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돌담을 낀 고샅에 나무가 크고, 바람은 나뭇잎을 후루루루 흔들며 싸락싸락 물결소리 같은 노래를 들려줍니다. 땀이 다 식습니다. 물 한 모금으로 입을 헹굽니다. 이다음 제주마실을 하는 길에 들를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자전거를 달립니다. 책집이 깃든 마을을 천천히 한 바퀴를 돕니다. 이렇게 이룬 마을에 이렇게 책집이 깃드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손을 흔듭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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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살림 (2021.7.14.)

― 제주 〈책밭서점〉



  나를 기다리는 책은 언제나 나한테 찾아옵니다. 내가 기다리는 책은 마침내 내 품에 안깁니다. 새로 태어나는 책은 아침을 밝히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예전에 깨어난 책은 밤을 밝히는 별빛으로 다가옵니다.


  온누리에 괴롭힘질·들볶음·때리기·태움 따위로 가리킬 일을 모두 녹여내어 푸르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 길을 헤아려 봅니다. 누가 나를 괴롭히거나 들볶거나 때리거나 태우려 했어도, 빙그레 웃으면서 이 모든 멍울짓을 그들한테 되돌려주기보다는 사르르 녹인 따뜻한 빗물이나 이슬이나 눈물로 이 땅에 내려놓으려는 길을 생각합니다. 아이가 넘어질 적에 돌부리나 땅바닥을 탓할 까닭이 없습니다. 넘어진 아이를 빙그레 바라보면서 “자, 일어나서 먼지를 털고 또 달리자!” 하고 속삭이면 아이는 아프거나 다치는 일이 없이 활짝 웃으면서 스스로 빛납니다.


  요즈음 어린이는 ‘존중’이라는 어려운 말을 쓰더군요. 어린배움터(초등학교)부터 길잡이(교사)란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말이로구나 싶습니다. 아이들이 ‘존중’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려나 아리송합니다. 우리말로 쉽게 ‘높이다’나 ‘섬기다’를 쓸 적에 뜻이 제대로 드러날 텐데요.


  그러나 굳이 높이거나 섬겨야 하지 않습니다. “서로 높여 주고 돌봐주는” 길이 안 나쁩니다만, “스스로 사랑하며 서로 사랑하는” 길로 거듭나기에 아름다워요. 사랑이 아닌 몸짓은 사랑이 아니기에 아무리 ‘좋은 뜻으로 존중하려’ 하더라도 으레 어긋난다고 느낍니다. 어려운 말로는 뜻이 제대로 안 드러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몸으로도 펴지 못 하게 마련입니다.


  자전거를 배에 실어 제주로 건너왔습니다. 뙤약볕이 한창인 여름날 자전거를 달리며 제주책집을 천천히 돌아다니려고 합니다. 〈책밭서점〉에 닿아 여러 이야기를 담은 여러 책을 쓰다듬습니다. 거뜬히 짊어져야지요. 책밭에서 길어올리는 이야기밭을 가다듬어 새롭게 글밭을 일구면, 어느새 마음밭이 푸지게 빛나면서 노래밭으로 이어갑니다.


  한 해에 하루이틀을 만나더라도, 이 하루이틀 만남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요. 뱃삯·책값·잠삯을 주섬주섬 모아 책마실길에 섭니다. 책짐을 질끈 메고 달리는 자전거는 길바닥에 땀비를 떨굽니다. 톡톡 내리는 땀비를 따라 오늘자취가 새삼스럽고, 여름빛을 받아들이는 하루가 싱그럽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건널목에서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 숨을 고르며 생각합니다. 빗물은 하늘에 낀 먼지를 씻고, 땀은 몸에 붙은 티끌을 씻고, 책은 마음에 남은 응어리를 씻어 줍니다.


ㅅㄴㄹ


《물질과 생명》(앨런 와츠/김형찬 옮김, 고려원미디어, 1991.7.20.)

《인생유전, 쟝 루이 바로의 일생》(쟝 루이 바로/윤동진 옮김, 홍성사, 1983.4.10.)

《東京商銀20年史》(年史編纂委員會, 東京商銀信用組合, 1974.3.21.)

《문화 차이와 인간관계》(에드워드 스튜어트/김성경 옮김, 보성사, 1989.10.20.)

《영어와 더불어 2 학창시절》(조성식, 신아사, 1992.10.31.)

《아름다운 매듭》(권도룡 엮음, 주부생활사, 1979.5.1.)

- 《엘레강스》 79.6.별책부록

《청년마당 32호》(김성수 엮음, 대한YMCA연맹, 1991.9.1.)

《수수께끼 시》(박시향, 주변인의길, 1992.9.10.)

《진눈깨비》(고정국, 서울, 1990.4.25.)

《한라산의 겨울》(김경훈, 삶이보이는창, 2003.3.27.)

《마라도 등대》(문태길, 자유지성사, 1993.3.5.)

《咸錫憲全集 17 民族統一의 길》(함석헌, 한길사, 1984.8.26.)

《トルスト-イ傳 第一卷》(ビリュ-コフ/原久一郞 옮김, 中央公論社, 1941.3.5.)

《養蠶敎科書》(裁桑及飼育の部 엮음, 朝鮮總督府, 1914. 3.15.)

《農業經濟及法規敎科書》(朝鮮總督府 엮음, 朝鮮總督府, 1915.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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