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82 너머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늘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못 배우거나 안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늘 앞으로 나서서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기에 스스럼없이 앞으로 나서는데, 앞으로 나설 길이 꽉 막혔으면 맨 뒤에 서서도 기쁘게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맨앞에 있다 하더라도 못 배우거나 안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맨뒤에 있으면 아예 배움에서 손을 뗍니다.


  배우려고 하기에 코앞에서 찬찬히 살피면서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기에 어깨너머로 하나씩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기에 온몸과 온마음을 기울여서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오늘 이곳’에서 기쁘게 땀을 흘리면서 ‘저 너머’를 바라봅니다.


  ‘오늘 이곳’에 있는 줄 아는 사람이 배웁니다. ‘오늘 이곳’에 있는 줄 모르는 사람은 못 배우거나 안 배웁니다. ‘오늘 이곳’에 있는 줄 알기에 ‘저 너머’로 가는 길을 배우려 합니다. ‘오늘 이곳’에 있는 줄 모르기에 ‘저 너머’는 아예 모를 뿐 아니라 볼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너머’로 가려면 바로 오늘 이곳에 선 내 삶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 선 내 삶을 제대로 보지 않고서는 ‘너머’가 있는 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곳’을 알더라도 ‘저 너머’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꽤 많아요.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삶으로도 넉넉하거나 재미있거나 좋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굳이 ‘저 너머’로 새롭게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구태여 낯선 곳에 가서 힘을 쏟으려 하지 않습니다. 애써 낯설고 물선 곳으로 떠나서 모든 것을 온통 새롭게 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낯설고 물선 곳으로 갈 겨를에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재미있거나 좋다고 여기는 것을 한껏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저 너머’는 힘든 길(고생 길)일까요? 힘들다고 여기니 힘든 길이 될 테고, 낯설리라 여기니 낯선 길이 되어요. 이와 달리, 새로움을 찾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새롭다고 여깁니다. ‘오늘 이곳’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줄 제대로 바라보아서 깨달은 사람은 ‘저 너머’로 새롭게 나아가야 하는 줄 시나브로 알아챕니다. 앞으로 새롭게 일굴 보금자리에서 지을 삶을 하나씩 헤아리면서 꿈을 키웁니다.


  왜 ‘저 너머’로 가려 할까요? 왜 ‘오늘 이곳’을 흐뭇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까요? 제아무리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워 보이는 솜씨나 재주로 살림을 꾸리더라도, 이 모든 삶이 쳇바퀴가 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삶이 쳇바퀴질 아닌 오직 삶이 되도록 하자면, ‘오늘 이곳’에서 ‘저 너머’로 오가는 걸음마를 떼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 씨앗을 뿌려서 돌보고 거두어 갈무리합니다. 씨앗을 심어서 보살피고 거두어서 갈무리하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다만, 이 아름다운 삶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으면 힘겨운 굴레가 됩니다. 해마다 씨뿌리기를 하면서 새로움을 찾지 못한다면 고단한 굴레로 바뀝니다. 해마다 가을걷이를 하면서 새로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벅찬 굴레로 바뀝니다. 해마다 갈무리를 하면서 새로움을 짓지 못한다면 나른한 굴레로 바뀝니다.


  ‘저 너머’를 바라보면서 그곳으로 나아가려는 까닭은, 이곳을 떠나려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리걸음이나 쳇바퀴질을 하지 않으려는 뜻입니다. 늘 씩씩한 걸음이 되려는 뜻입니다. 아이한테 물려주기 앞서 어버이 스스로 새로운 웃음과 노래를 언제나 맑고 밝게 지으려는 뜻입니다. 나 스스로 오롯이 서서 홀가분한 숨결로 거듭나려는 뜻입니다.


  ‘저 너머’는 ‘오늘 이곳’과 대면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곳’이 ‘가장 좋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목숨은 언제나 ‘저 너머’를 바라봅니다. 새 숨결은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오직 ‘사랑’을 헤아립니다. ‘꿈’을 바라보는 ‘새 아이’입니다. 해님을 바라보고 별빛을 바라봅니다. 무지개를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봅니다. 언제나 ‘저 너머’를 바라보면서 내 가슴에 노랗고 하얗다가 푸르다가 파랗다가 빠알간 빛결을 바라봅니다. 새로 깨어나려고 ‘저 너머’를 마음속에 짓습니다. 새로 태어나려고 ‘저 너머’로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너머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에는 웃음이 있습니다. 이 웃음에는 바로 사랑이 있어요. 4348.3.24.불.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숲말/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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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얼마 앞두고 서울에 있는 ㅅ고등학교 청소년한테서 누리편지를 받았습니다. 저한테 누리편지를 보낸 청소년은 ‘한국말(우리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어떻게 써야 하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쓴 책에서 밝히기도 했고, 이 나라 어린이와 청소년과 어른 모두 슬기로운 눈길과 마음길과 손길로 말·넋·삶을 정갈하면서 곱게 가꿀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답장을 써서 보냈어요. 청소년하고 주고받은 누리편지 이야기가 한글날에 말과 글을 새롭게 바라보거나 헤아리는 길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빌며 이 글을 옮겨 봅니다.





. . .


물음 1. 우리가 쓰는 글은 한자말이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한자말이 너무 많아 글을 읽기 힘들 때가 있지요. 한자말을 우리말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 청소년이 제대로 모르는 대목을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은 ‘한자말이 많이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잖은 사람들은 ‘한자말이 한국말에서 크게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해요. 왜 그러할까요? 교과서를 보면 한자말이 많이 나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도, 또 웬만한 인문책에서도 한자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와 달리 어린 아이들이 쓰는 말에서는 한자말이 매우 드뭅니다. 아이를 마주하는 어른은 아이한테 ‘어려운 한자말’이나 ‘낯선 한자말’로 섣불리 얘기하지 않아요. 그러니, 한두 살부터 일고여덟 살 언저리 사이인 아이들은 무척 깨끗하면서 쉬운 한국말을 씁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흙을 일구면서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한자말을 거의 안 써요. 시골 어른들은 농협이나 관청에서 쓰는 몇 가지 한자말을 섞어서 말씀하기는 하지만, 이런 행정용어를 빼고는 여느 삶에서 아주 수수하면서 정갈한 한국말을 이녁 고장에서 나고 자라면서 이어온 사투리로 들려줍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우리 청소년은 교과서와 여느 책과 방송에 둘러싸인 곳에서 지냅니다. 이러다 보니, 학교와 사회와 매체에서 아주 흔히 쓰는 한자말에 둘러싸였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마치 한자말이 많은 듯이 여길 만합니다.


  한자말을 딱히 한국말(우리말)로 바꾸어야 하지 않아요. 다만, 이 대목 하나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 우리는 모두 한국사람이에요. 한국사람이라면 한국말을 써야 할 테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살피면 ‘똑같은 한 가지’를 놓고 한국말과 한자말(일본 한자말 + 중국 한자말)과 영어로 나타내기 일쑤예요. 이를테면, ‘부엌’을 한자말(일본 한자말)로 ‘주방’이라고도 하고, 영어로 ‘키친’이라고도 합니다. 굳이 이렇게 세 가지 말로 ‘똑같은 한 가지’를 나타내야 할까요?


  이러한 말씀씀이는 ‘표현 다양성’이 될 수 있을까요? ‘글’을 놓고 한자말로는 ‘문자’라 하고 영어로는 ‘텍스트’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회에서는 ‘글’보다 ‘텍스트’라는 영어를 흔히 쓰고, ‘사진기’라는 말이 있어도 ‘카메라’라는 영어를 자주 써요. ‘사진기’는 한자로 빚은 낱말이지만 이 낱말을 쓰면서 한자말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해요. 한자말이든 아니든 우리가 즐겁게 쓰는 말이면 모두 한국말인데, 왜 똑같은 한 가지를 놓고 ‘사진기·카메라’ 두 가지를 써야 할까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제대로 못 쓰는 탓에 한국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는구나 싶습니다. 한자말을 한국말로 바꾸어야 하지는 않되, 스스로 슬기롭게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내가 쓰는 한국말은 가장 쉽고 정갈하면서 아름답게 가꾸는 몸짓’을 다스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음 2. 그렇다면 한자말을 우리말로 바꾸면 무엇이 좋을까요?


  앞서 말했듯이 한자말을 한국말로 바꾼다고 해서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습니다. 한자말을 쓰는 사람은 그저 한자말을 쓸 뿐이고, 영어를 쓰는 사람은 그저 영어를 쓸 뿐입니다.


  자, 한번 더 생각해 봐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만한 낱말을 골라서 부드럽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레 말할 적하고, 전문 지식이 있어야 알아들을 만한 낱말을 골라서 딱딱하게 가르치는 듯이 말할 적에 어떠한가요? “책을 읽을까?” 하고 말하면 될 텐데 굳이 “독서를 시도할까?”처럼 말해야 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자”를 굳이 “스터디를 하자”처럼 말해야 하지 않아요.


  한국말에 ‘모임·동아리’가 있고, 한자말에 ‘회’가 있으며, 영어에 ‘클럽·서클’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쓰나요? 우리는 여러 나라 말을 자꾸 섞어서 쓸까요?


  스스로 줏대가 튼튼하게 선다면 외국말을 함부로 안 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쓰는 말은 의사소통을 할 적에만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무엇보다 내 생각을 가꿀 적에 씁니다. 내가 나타내거나 그려서 보여주고 싶은 생각을 ‘말’로 짓기 때문에, 아무 말이나 함부로 쓸 수 없어요. 의사소통이 되기에 아무 말이나 함부로 쓴다면, 나는 내 생각을 가꾸거나 지을 적에 제대로 된 말을 쓰지 못합니다.


  말을 말답게 써야 하는 까닭은, 바로 내가 나를 스스로 곱고 슬기롭게 가꾸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막말이나 거친 말씨를 쓴다면 내가 나를 스스로 망가뜨리거나 무너뜨리거나 괴롭히는 짓입니다. 지식을 자랑하거나 뽐내려고 하는 말을 쓴다면, 내가 나를 스스로 겉치레나 껍데기에 휘둘리는 넋으로 나아가는 셈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언제나 내 얼굴이요 내 마음이며 내 숨결입니다.



물음 3. 요즘 쓰는 말 중 일본식 말투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달인, 수타, 야매 등 이러한 일본말이나 일본식 한자말들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본 한자말이든 중국 한자말이든, 또 그냥 일본말이든 중국말이든 영어이든 딱히 대수롭지 않습니다. 쓸 만한 자리라면 쓸 노릇이고, 쓸 만하지 않은 자리라면 안 쓰면 되어요. 그리고, 왜 외국말을 그냥 쓰려고 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사람한테 알맞게 한국말로 번역하거나 창작하지 않고 외국말을 고스란히 쓰는 모습이나 까닭을 짚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막일을 하는 분들이 일본말을 매우 널리 씁니다. 막일뿐 아니라 공공기관과 출판업계에서도 일본말을 매우 널리 씁니다. 디자인을 하는 분들도 일본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한국 사회에서 좀 ‘전문가 집단’이라 할 만한 자리에서는 으레 일본말을 널리 씁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전문가 집단’에서는 일본말을 써야만 했고, 일본사람한테서 배웠으며, 한국사람을 제자나 일꾼으로 두었어도 일본말로 모든 일을 물려주었습니다. 이 흐름은 오늘날까지 하나도 안 바뀌었습니다.


  낱말 한두 마디를 외국말로 쓰는 모습은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수롭게 살필 대목은 ‘내 말이 아닌 외국말, 그러니까 내 말이 아닌 남 말’로 내 생각을 휘젓도록 내버려두거나 못 느끼는 모습입니다. 스스로 줏대가 없으니 외국말을 쓰고, 스스로 생각이 깊지 않으니 외국말을 씁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떨어지기 때문에 아무 외국말이나 함부로 씁니다. 스스로 생각을 가꾸는 슬기가 자라지 못한 탓에 ‘내 말을 알차게 가꾸는 숨결’로 거듭나지 못하지요. 철들지 못했다고 할 만합니다.



물음 4. 어떤 사람들은 한자말이 더 전문적이고 뜻이 정확해 한자말을 더욱 많이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일상 생활에서 글을 쓸 때도 한자말을 많이 쓰는 것이 옳을까요?


  일제강점기부터 전문가 집단이 일본 한자말을 썼으니, 이러한 일본 한자말을 써야 ‘전문적’이라 여기고 ‘뜻이 정확’하다고 여깁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전문가 집단은 그들 스스로 익숙한 말을 써야 비로소 ‘전문 용어’라고 여깁니다. 쉬우면서 부드러운 말이라든지, 어린이도 알아들을 만한 여느 말은 ‘전문 용어’가 될 수 없다고 여겨요.


  그런데, 사회 한쪽에서는 일제 찌꺼기를 털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이러면서 우리 삶과 사회를 이루는 밑바탕인 말을 놓고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일제 찌꺼기를 말에서 털려고 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요? 바로 ‘전문가 집단’이 흔히 쓰는 ‘일제강점기 찌꺼기가 그대로 흐르는 일본 한자말’부터 털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을 바로잡지 못하면서 사회나 삶을 어떻게 바로잡을까요? 말부터 바로잡고 바로세울 때에 비로소 사회와 삶을 바로잡으면서 바로세울 밑틀을 튼튼하게 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문가 집단은 ‘전문 활동’을 할 때뿐 아니라 여느 자리(일상 생활)에서도 바로 그 ‘전문 한자말’을 섞기 마련입니다. 저절로 스며 나오니까요. 여느 자리와 ‘전문 활동’에서도 참답고 슬기로우면서 정갈한 한국말로 제대로 ‘번역·창작’을 해서 올바로 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한국사람이 한국사람다우면서 한국말이 한국말다울 수 있습니다.



물음 5.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한자말이 우리말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한자말이 많이 쓰였을까요?


  한자말이 한국말을 아슬아슬하게 흔든다기보다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쓰는 사람들 몸짓’이 바로 한국말을 흔들고 사회와 문화를 모두 흔듭니다.


  예부터 한국사람은 누구나 시골사람이었고, 손수 흙을 일구어서 밥과 옷과 집을 얻었습니다. 예부터 한국사람 가운데 정치인이나 지식인은 거의 없습니다. 1퍼센트조차 안 되었어요. 예부터 글을 쓰거나 글로 먹고사는 사람은 1퍼센트는커녕 0.1퍼센트조차 안 되었어요.


  한자말은 한자와 한문이라는 글로 이룬 권력입니다. 임금님과 신하와 사대부와 양반 계층이 바로 한자와 한문이라는 글로 권력을 이루었어요. 이와 맞서는 자리는 이 나라 거의 모두를 이룬 시골사람이지요.


  이 대목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권력자 집단은 중국에서 글과 말을 빌어서 썼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서 글과 말을 받아들여서 썼고, 해방 뒤에는 미국에서 글과 말을 받아들여서 써요. 여느 한국사람은, 한 나라를 밑바탕에서 이루는 여느 한국사람은, 입으로 말을 하고 입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입으로 노래를 불렀어요. 삶을 이루는 모든 한국말은 바로 시골에서 손수 흙을 지어서 밥·옷·집을 지은 사람들이 갈고닦았습니다. 숲, 나무, 하늘, 땅, 별, 사람, 사랑, 그릇, 쌀, 꽃, 풀, 바다 같은 낱말이 바로 시골사람이 스스로 지어서 쓴 말이에요.


  권력자 집단이 흔히 쓰던 온갖 한자말은 개화기와 강점기와 해방을 지나는 동안 학교교육하고 사회와 정치와 문화와 예술과 경제와 문학에까지 모두 퍼졌습니다. 교과서를 거쳐서 퍼졌고, 신문하고 방송을 거쳐서 퍼졌습니다. 문학책이나 인문책을 거쳐서 퍼졌지요. 이와 달리 ‘책을 안 읽는 사람’이나 ‘학교를 안 다닌 사람’은 ‘권력자 집단이 사회와 학교와 문화로 퍼뜨리려 하던 한자말’에 드러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시골사람은 수수하고 쉬운 말을 무척 오랫동안 썼는데, 요새는 시골사람도 텔레비전을 늘 쳐다보기 때문에 시골말도 많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아무튼, 따로 대단한 말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다.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되는 말을 알맞고 슬기롭게 쓸 줄 알면 됩니다.



물음 6. 저희가 이오덕 선생님의 책을 읽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꾸 외국말을 쓰려는 이유는 유식한 척, 아는 척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랍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꾸 외국말을 쓰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잘난 척하거나 아는 척하면서 외국말을 쓰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각이 얕기’ 때문이며, 생각이 얕아서 아직 스스로 튼튼하게 마음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줏대(주체성)를 튼튼히 세운 사람은 아무 말이나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줏대를 튼튼히 세운 사람은 아무 일이나 덥석 맡아서 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바르게 세우고, 생각을 아름답게 가꾸며, 생각을 사랑스레 북돋울 줄 안다면, 어설픈 외국말은 안 쓰는 슬기로운 몸짓이 되겠지요.



물음 7. 선생님 책에서 사람들이 ‘똥오줌’은 더럽게 생각하면서 ‘대소변’은 품위를 지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왜 순수하고 참된 우리말을 오히려 천박하고 격낮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정갈하고 참된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는 까닭은, ‘생각이 없’거나 ‘생각하는 힘을 잃’거나 ‘생각하는 기쁨을 모르’거나 ‘생각하며 삶을 짓는 아름다움하고 동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똥오줌이든 대소변이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어느 한 가지를 가리키는 말일 뿐입니다. 그런데, 시골사람은 예부터 한국말을 썼고, 지식 집단과 전문가 집단과 권력 집단은 한자말을 썼어요. ‘대소변’이라는 한자말을 쓴 사람은 바로 지식 집단과 전문가 집단과 권력 집단이지요.


  그러니, 지식과 전문가와 권력 집단은 여느 시골사람을 깔보거나 억누르는 몸짓이 되면서,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깎아내리는 바보짓’을 한 셈입니다.



물음 8. 저희가 준비를 하면서 저희 또래 아이들의 글을 읽어 보았는데 많은 아이들이 글을 쓸 때 한자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때부터 벌써 한자말을 쓰는데 더 익숙해진 것이지요. 저희 같은 나이가 어린 학생들이 한자말에 익숙해지면 무엇이 안 좋을까요?


  교과서가 다 일본 한자말이나 중국 한자말입니다. 교과서에 지식을 담는 데에는 여러 뜻있는 어른들이 훌륭하다고 할 테지만, 지식을 어떤 말로 살피거나 다루어서 교과서를 엮어야 아름답거나 알찰까 하는 데까지 생각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한자말을 쓰든 안 쓰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한 가지’를 놓고 ‘이중언어(한국말과 한자말)’를 쓰는 몸짓이나 말투가 어릴 적부터 스며든다면, 여기에다가 ‘삼중언어(한국말과 한자말과 영어)’를 쓰는 몸짓이나 말투로 바뀌고 만다면, 그야말로 스스로 생각하는 슬기로운 삶하고 자꾸 멀어져요.


  한자말을 쓰기에 나쁘지 않고, 한자말을 안 쓰기에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대목은, ‘모든 말은 생각을 일으키는 바탕’이기 때문에, 어떤 말을 쓰더라도 스스로 생각을 가꾸는 길을 씩씩하게 가야 합니다. 이중언어나 삼중언어를 쓰면서 제 넋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면, 우리 청소년은 어릴 적부터 줏대 있게 홀로 서서 삶을 짓는 길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슬기롭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려고 말을 배웁니다. 말을 배워서 쓰는 까닭을 살펴야 합니다. 한국말이냐 한자말이냐 영어냐 하는 금긋기가 아닙니다. 내 생각을 스스로 슬기롭게 다스리는 길이 어디에 있느냐를 살펴서 깨달아야 합니다.



물음 9. 그렇다면 우리말을 살리기 위해 청소년들이 할 수 있는 일, 혹은 사회가 할 수 있는 일들엔 무엇이 있을까요?


  어른들이 하는 말을 무턱대고 받아들이거나 따르지 마셔요. 그리고, 스스로 배우셔요. 스스로 길을 찾으셔요. 내 생각을 내가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레 가꾸려면 어떤 말을 스스로 배우고 찾아서 써야 하는가를 돌아보셔요.


  스스로 생각해야 하고,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 일어서야 하고, 스스로 웃고 노래하는 삶을 지어야 합니다. 입시지옥 흐름에 맞추어 대학입시만 바라보는 청소년이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생각해서 ‘대학에 가든 대학에 안 가든’ ‘내 길을 스스로 생각해서 찾는’ 씩씩하고 아름다운 청소년(젊은이)이 되자면, 어떤 말을 골라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같은 실마리는 스스로 풀 수 있습니다. 사회에 바라지 말고 스스로 해야지 싶어요. 아직 한국 사회는 경제성장에 너무 목을 매다느라 삶을 슬기롭게 다스리거나 아름답게 가꾸는 길하고 너무도 멀리 떨어졌거든요.



물음 10. 지금까지 저희 질문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우리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답해 주신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


  모든 나라에서 쓰는 모든 말은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한국말이 아름다운 까닭이라면, 우리가 바로 한국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사람은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일본말을 아름답게 가꾸면 우리한테 사랑스러운 이웃이 됩니다. 한국사람은 바로 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국말을 아름답게 가꾸면 스스로 씩씩하고 튼튼할 뿐 아니라, 바깥 물결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전라도에서는 전라말이 아름답고 경상도에서는 경상말이 아름답습니다. 서울에서는 서울말이 아름답고 부산에서는 부산말이 아름답습니다.


  제 뿌리(바탕)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뿌리가 제대로 내려야 나무가 우람하게 자랍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말라죽거나 쓰러지듯이, 뿌리를 배우거나 살피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무 삶을 못 짓습니다. 스스로 숲이 되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 숲과 같이 말을 하며, 스스로 숲바람을 일으키는 사랑스러운 숨결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고맙습니다. 2015.9.3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말넋삶)


+ +


그동안 써낸 몇 가지 책을 곰곰이 돌아본다.

앞으로는 한결 재미나면서 즐거운 이야기가 흐르는

말 넋 삶 노래를 부르자고 생각한다.




+ +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http://www.yes24.com/24/goods/12221044?scode=032&OzSrank=1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3463187&orderClick=LAG&Kc=


<뿌리깊은 글쓰기> http://www.bandinlunis.com/front/product/detailProduct.do?prodId=3419014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7652057&start=slayer


<사자성어 한국말로 번역하기> http://book.interpark.com/product/BookDisplay.do?_method=Detail&sc.shopNo=0000400000&sc.dispNo=&sc.prdNo=21121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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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81 간다



  나는 내가 되는 곳으로 갑니다. 내가 가는 어느 곳에서든 나는 늘 나로 있는 듯이 여길 만하지만,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길을 가지 않는다면, 내가 나로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휩쓸려서 가거나 휘둘려서 간다면, 나는 ‘간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때에는 ‘끌려간다’거나 ‘잡혀간다’고 해야 할 테지요.


  내가 어디로 ‘간다’고 할 적에는 맨 먼저 눈길이 갑니다. 눈길이 가서 가만히 바라봅니다. 가만히 바라보면서 생각을 합니다. 이제 마음이 갑니다. 눈길과 마음이 가서 어느 곳에 내가 갈 만하다고 느끼면, 바야흐로 몸이 갑니다. 눈길과 마음과 몸이 내가 바라는 곳에 가면, 이제 그곳에서 내 손을 써서 삶을 짓습니다. 내 손길이 그리로 가서 새로운 이야기를 엮습니다.


  스스로 짓는 삶일 때에는 ‘살아 + 간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못 짓는 삶일 때에는 ‘죽어 + 간다’고 말합니다. ‘살아 + 간다’고 할 적에는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모든 이야기를 손수 짓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죽어 + 간다’고 할 적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늘 내 뜻이 없는 터라 오직 죽음으로만 치닫는 재미없고 힘들며 슬픈 굴레라는 뜻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사람한테는 ‘내 뜻’이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나로 서지 못하니 내 뜻이 있지 못합니다. 삶으로 가는 사람한테는 ‘내 뜻’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나로 서기에 내 뜻이 있어요.


  삶으로 가기에 살고, 죽음으로 가기에 죽습니다. 스스로 이루려는 꿈으로 가기에 꿈을 이루고, 손수 길어올리려는 사랑으로 가기에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그러니,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갈 길을 생각하고, 내가 가는 길을 차근차근 짚으면서 헤아려야 합니다. 내가 삶으로 가는지 꿈으로 가는지 사랑으로 가는지 제대로 바라보면서 살펴야 합니다. 내가 죽음으로 가는지 쳇바퀴로 가는지 굴레나 수렁으로 가는지 똑똑히 바라보면서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늘 한 번에 갑니다. 한 번에 삶으로 가고, 한 번에 죽음으로 갑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곧바로 갑니다. 먼 곳은 없습니다. 가까운 곳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 스스로 가려는 곳으로 곧바로 갈 뿐입니다.


  죽음으로 가기에 ‘맛이 간다’고 합니다. 새로운 삶을 짓지 못하기에 ‘한물 간다’고 합니다.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리지 못하기에 ‘곁에서 떠나간다’고 합니다. 마음에 생각을 심지 않아서 꿈길을 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길을 가야 합니다. 내 길을 갈 때에 ‘내 길 걷기’가 새롭게 이어지고, 내 길을 가지 않을 때에 ‘죽음으로 가기’가 되고 맙니다.


  죽음길로 가는 사람은 죽음길로 갈 뿐이기에 하늘길로 가지는 않습니다. 죽음나라로 가는 사람은 죽음나라로 갈 뿐이니 하늘나라로 가지는 못합니다. 하늘길로 가려면 삶길을 가야 하고, 하늘나라로 가려면 삶나라로 가야 합니다. 여느 때에 늘 삶을 짓는 길을 갈 때에 비로소 하늘나라로 갑니다. 여느 때에 늘 죽음이라는 걱정에 가득 휩싸인 채 길 아닌 길을 가면 언제나 수렁으로 가서 옴쭉달싹 못하고 맙니다.


  가는 말은 오는 말이 되고, 가는 걸음은 새로운 걸음으로 피어납니다. 잘 가기에 잘 옵니다. 살펴서 가기에 살펴서 옵니다. 사랑으로 가기에 사랑으로 옵니다. 바람을 타고 나들이를 가는 씨앗은 스스로 보금자리를 기쁘게 일군 뒤, 다시 바람을 타고 나들이를 옵니다. 삶을 이루는 첫걸음은 ‘가자!’입니다. 첫발을 떼어 새걸음이 되도록 ‘가자!’고 스스로 외칠 때에 비로소 모든 길이 내 앞에 활짝 열립니다. 4348.3.24.불.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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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80 네, 아니오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왜 여기에 있느냐 하면, 내가 여기에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여기에 있고 싶을까요. 내가 여기에 있을 적에 내 마음이 가장 너그럽고 포근하면서 기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여기 말고 다른 데에 있을 적에는 어떠할까요. 다른 데에서는 안 너그럽고 안 포근하며 안 기쁠까요? 다른 데에서도 너그럽거나 포근하거나 기쁠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내가 가장 너그럽거나 포근하거나 기쁜 곳에 깃듭니다.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입는 내 보금자리는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곳에 짓습니다.


  이것을 하느냐 저것을 하느냐 하고 망설이지 않습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고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과 저것’은 어느 것이 되든 ‘고르기’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어느 하나를 고르는 길이 아닙니다. 삶은 ‘네·아니오’ 가운데 하나로 가는 길입니다. 내가 가야 할 길로 가느냐 하고 스스로 묻고는 ‘네’라면 그 길로 가고, ‘아니오’라면 그 길로 안 갑니다. ‘네·아니오’는 ‘이것·저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은 양비론이거나 이원론이거나 이분법입니다. 삶은 둘로 가르지 않습니다. 삶은 언제나 오직 삶입니다.


  그런데 삶은 ‘한 가지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삶은 ‘둘’로 가르지 않는 길이지만, ‘하나’로 뭉뚱그리는 길도 아닙니다. 삶은 늘 삶입니다. 삶은 늘 ‘삶’ 그대로 꽃피우는 길입니다.


  삶은 참말 늘 삶일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은 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거나 저런 사랑이 있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다 다르게 느껴서 받아들이거나 나누지만, 다 다르게 느껴서 받아들이거나 나누는 사랑은 언제나 ‘사랑’으로 나아갈 때에 참다운 사랑이요, 사랑으로 가지 않고 ‘이런 사랑’이나 ‘저런 사랑’이 된다면, 이때에는 거짓 사랑입니다. 사랑이기에 사랑이고, 사랑은 사랑 아닌 다른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미운 사랑’이나 ‘고운 사랑’은 없습니다. ‘더 나은 사랑’이나 ‘작은 사랑’이나 ‘큰 사랑’이나 ‘모자란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그저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것’이나 ‘저것’으로 나누거나 가르지 못해요. 책은 언제나 책일 뿐이에요. 좋은 책이 없고, 나쁜 책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일 뿐이지요. 좋은 사진이나 나쁜 사진이 따로 없습니다.


  꿈은 늘 꿈입니다. 꿈은 내가 이루려고 하는 꿈일 뿐입니다. 꿈도 삶과 사랑처럼 ‘그 결 그대로’라고 말할 뿐이면서도 다른 것이 되지 않습니다. 뭉뚱그릴 수 있는 꿈이 아니라, 꿈도 늘 그저 꿈입니다. 내가 이루려는 꿈은 큰 꿈도 작은 꿈도 아닙니다. 낡은 꿈도 새로운 꿈도 아닙니다. 어리석은 꿈도 놀라운 꿈도 아닙니다. 그저 꿈으로 나아가고, 그예 꿈으로 가꾸며, 그대로 꿈이 되도록 이룹니다.


  이리하여, 나는 늘 ‘네’나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내가 하려는 일인가 하고 묻습니다. 내가 이루려는 꿈인가 하고 묻습니다. 내가 스스로 길어올려서 나누려는 사랑인가 하고 묻습니다. 내가 날마다 아침에 새로 열어서 지으려는 삶인가 하고 묻습니다. 나는 ‘네’라고 스스로 말할 만한 길을 걷습니다. 나는 ‘아니오’라고 스스로 말할 만한 길은 안 갑니다. ‘아니오’만 자꾸 나온다면, 내가 갈 길을 새롭게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면서 늘 생각합니다. ‘이것·저것’ 사이에서 고르지 않습니다. ‘네’라고 말할 만하기에 씩씩하고 즐겁게 노래하면서 걸어갈 길을 생각합니다. ‘네’라고 당차게 외치면서 기쁘고 아름답게 춤추면서 걸어갈 길을 생각합니다.


  삶이 되고 사랑이 되며 꿈이 될 길을 생각합니다. 삶으로 이루고 사랑으로 이루며 꿈으로 이룰 길을 걷습니다. 삶으로 나누고 사랑으로 나누며 꿈으로 나눌 이야기를 짓습니다. 나는 바로 오늘 여기에 있으면서 내 삶을 짓고, 이야기를 지으며, 생각을 짓습니다. 4348.3.23.달.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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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79 물구나무서기



  우리는 새·하늬·마·높(동서남북)으로 네 곳을 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새녘이나 하늬녘이라 하든, 이곳은 다른 데에서 보면 마녘이나 높녘이 됩니다. 새녘이라 할 곳은 따로 없고, 높녘이라 할 곳도 따로 없습니다. 어느 곳이든 언제 어디에서나 ‘한복판’이 됩니다.


  한복판이란 어떤 곳인가 하면 ‘바로 여기’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자리가 한복판입니다. 왜 ‘어느 곳이든 언제 어디에서나 한복판이 되는가’ 하면, 참말 어느 곳이든 모두 한복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은 없습니다. 위와 아래도 없습니다. 이러한 이름은 늘 ‘나’를 한복판에 놓고서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서 새와 하늬가 갈리고, 왼쪽과 오른쪽을 나눕니다. 내가 바라보는 눈길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 곳도 알 수 없습니다.


  지구별에서는 북반구와 남반구를 말하는데, 북반구라고 해서 똑바로 서지 않고, 남반구라고 해서 물구나무서기를 하지 않습니다. 북반구이든 남반구이든, 또 적도이든, 사람들은 저마다 ‘똑바로 서’고 ‘한복판에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제주섬이 마녘에 있는 데가 아닙니다. 제주섬으로 치면 제주섬이 한복판입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다른 시골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 뿐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길에서는 언제나 ‘이 한복판’에서 ‘저 한복판’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한복판’에서 ‘저 한복판’으로 가지 않는다면, 움직임이 생길 수 없습니다. 모든 움직임은 ‘오롯한 하나’에서 ‘다른 오롯한 하나’로 갑니다.


  해에는 위나 아래가 있을까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별에 위나 아래가 있을까 헤아릴 노릇입니다. 해나 별이나 지구에서 위나 아래를 따지려 한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온누리에서 위아래를 따질 적에는 참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위’를 말하면 위는 언제나 곧바로 ‘아래’가 되고, ‘아래’를 말하면 아래는 늘 막바로 ‘위’가 됩니다.


  물구나무서기를 합니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두 발은 하늘을 밟습니다.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문득 생각합니다. 여느 때에는 땅을 두 발로 밟는 동안 두 손으로 하늘을 짚었구나 하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하늘을 두 손으로 짚으면서 사는 숨결입니다. 온별누리(은하계) 하늘을 늘 두 손으로 짚으면서 살아요.


  우주선을 타면 알 테지만, 우주선에서는 위나 아래가 없습니다. 거꾸로 나는 우주선은 없습니다. 늘 날아야 할 자리로 날 뿐입니다. 사람 몸에는 손과 발이 있는데, 왜 손과 발이 있느냐 하면, 손은 언제나 하늘을 짚어야 하고, 발은 언제나 땅을 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 몸에 깃든 넋에는 손이나 발이 있을까요? 없겠지요. 넋이 생각을 지어서 심는 마음에는 손이나 발이 있을까요? 마음에 왼쪽이나 오른쪽이 있을까요? 사랑이나 꿈에 위아래가 있을까요? 넋이나 마음이나 사랑이나 꿈을 크기로 따질 수 있을까요? 큰 마음이나 작은 마음이 있을까요?


  별에는 ‘별힘(당김힘, 중력)’이 있습니다. 별힘은 무엇인가 하면, 별이 당기는 힘입니다. 그래서, 어느 별에서든 몸이 살려면 발이 있어서 땅을 밟아야 합니다. 어느 별에서든 ‘한복판’이 있기 마련이고, 한복판이 한 곳 따로 있기에, 이곳을 바탕으로 위아래나 옆이나 새·하늬·마·높 같은 자리를 따집니다.


  온별누리에는 ‘온별누리힘’, 다시 말하자면 ‘온힘’이나 ‘누리힘’이 있습니다. 온힘이나 누리힘에는 위아래나 크고작음이 없어서 모든 것이 언제나 모든 자리에서 새로운 기운이 됩니다. 온별누리에서는 한복판이 없습니다. 모든 곳이 한복판입니다. 그러니 ‘별힘(당김힘, 중력)’이 없어서 우리를 어느 한쪽으로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모든 곳(온 곳)이 ‘모든 것(온 것)’이 됩니다.


  별을 바라볼 적에 삶을 배우고, 별누리를 살필 적에 넋을 살피며, 온별누리를 헤아릴 적에 사랑을 헤아립니다. 삶에는 바탕이 되는 한복판이 있습니다. 넋에는 위아래나 크기가 없습니다. 사랑은 가없이 넉넉하면서 끝없이 포근합니다. 별(지구별)에서는 따로 물구나무서기를 해야 하지만, 이 별에서 몸이라는 옷을 살며시 벗고 온별누리로 나아가는 숨결이 되면, 늘 홀가분하게 ‘고요춤’을 추는 새로운 밤무지개빛이 됩니다. 4348.3.22.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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