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73 한다



  하려고 하니 합니다. 할 수 있으니 합니다. 하고 싶으니 합니다. 할 생각을 품으니 합니다. 그러니까, 안 하려고 하니 안 합니다. 할 수 없으니 안 합니다. 하고 싶지 않으니 안 하고, 할 생각을 안 품으니 안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까닭은 ‘하자’고 생각해서, 이 생각을 내 몸에 스스로 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안 하는 까닭은 ‘하자’는 생각을 안 하기에, 내 몸에 스스로 심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못 한다고 한다면, ‘하자’는 생각이 아닌 ‘못 한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서 몸에 심기 때문입니다.


  “하면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참말입니다. 하기에 됩니다. 그러니까, 안 하면 안 됩니다. 이 말도 참말입니다. 안 하기에 안 될 뿐입니다. 하려고 하지 않으니 하지 못하고, 하려고 하니 할 뿐입니다. 다만, 하려고 할 적에 곧장 할 수 있기도 하고, 한 달이나 한 해가 걸리기도 하며, 열 해나 서른 해가 걸리기도 합니다. 기나긴 나날이 걸릴 수 있으나, 스스로 ‘한다’는 생각을 품고서, 이 길을 바라보기 때문에 끝끝내 다 될 수 있습니다.


  하기 때문에 되고 나면, 이제 나는 나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겠노라 마음을 품고 이 일을 붙잡은 뒤, 이 일이 될 때까지 헤아리면, ‘아무리 긴 나날이 흘렀다’고 하더라도, 긴 나날을 모두 잊습니다. 서른 해가 걸린 일이어도, 서른 해를 마치 하루처럼 느낍니다. 아니, 짤막하게 흐른 때로구나 하고 느끼고, 때와 곳(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습니다.


  할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은 하루가 지나도 못 하지만, 열 해나 서른 해가 지나도 못 합니다. 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루 만에 되기도 하고 서른 해 만에 되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제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루 만에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요? 서른 해가 흐른 뒤 되는 사람과 서른 해가 흘러도 안 되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요? 오직 하나, 마음이 다릅니다. 한 사람은 ‘한다’는 생각을 품고 날마다 새롭게 스스로 가다듬거나 갈고닦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한다’는 생각이 없기에, 날마다 안 새롭습니다. 스스로 안 가다듬고 스스로 안 갈고닦아요.


  가다듬는 데에 서른 해가 걸릴 수 있고, 갈고닦는 데에 하루가 걸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길거나 짧은 나날이 걸리든 대수롭지 않아요. 길어도 되고 짧아도 됩니다. 스스로 하려고 해서 하면 될 뿐입니다.


  하려는 사람은 ‘한다’고 생각하기에 늘 이렇게 말하지요. “자, 우리 좀 하고 보자.” 하고. 되든 안 되든 “하고 보자” 하고 말합니다. 하면서 봅니다. 해 봅니다. 처음으로 한발을 내딛습니다. 첫걸음을 내딛고, 첫발을 뗍니다. 첫걸음을 내딛기에, 이윽고 새걸음으로 이어집니다. 첫발을 떼기에, 차근차근 새발을 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씨앗처럼 우리 마음에 깃듭니다. 어떤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때부터 내 마음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얼거리가 되’도록 몸한테 말을 겁니다. 내 몸은 마음한테서 받은 말(생각)을 듣고 나서 차근차근 새로운 얼거리로 그물을 짭니다.


  우리는 사랑도 할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으며, 놀이도 할 수 있습니다. 못 하는 사랑이 없고, 못 하는 일이 없으며, 못 할 만한 놀이가 없습니다. 못 읽을 만큼 어려운 책이 없고, 못 배울 만큼 어려운 학문이 없으며, 못 이룰 만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걸요.” 하고 말하는 사람은 이 말대로 그림을 언제까지나 못 그립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려고 해요.” 하고 말하는 사람은 붓질이 서툴다 하더라도 그림을 그립니다. 처음에는 서툰 붓질일 테지만, 이내 ‘부드럽고 멋스러운 붓질’로 거듭나고, 시나브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붓질’로 다시 태어납니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새롭게 태어나려는 사람입니다. ‘한다’는 생각을 마음에 심는 사람은 언제나 새롭게 바라보려는 사람입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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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72 제철, 제맛, 제삶



  ‘제철’에 나는 밥을 먹을 줄 알아야 철이 든 사람입니다. 제철에 나지 않는 밥을 먹을 때에는 철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사람은 거의 모두 철이 없이 삽니다. 한겨울에 수박을 먹고, 이른봄에 딸기를 먹습니다. 말이 안 되는 노릇이지만, 참말 오늘날 사람은 거의 모두 스스로 철을 잊거나 잃거나 버리거나 팽개치거나 망가뜨리면서 지냅니다. 철을 잊으니 삶이라 하기 어렵고, 철을 잃으니 삶과 동떨어지며, 철을 버리니 삶과 등질 뿐 아니라, 철을 팽개치니 삶하고 멀어지기만 하는데, 철을 망가뜨리니 철이 들 수 없습니다.


  제철에 나는 밥을 먹지 않으니 ‘제맛’을 알기 어렵습니다. 쑥은 봄에 뜯어서 먹을 때에 제맛입니다. 그런데, 쑥떡이나 쑥부침개를 가게에서 사다 먹기만 한다면, 손수 쑥을 뜯어 보지 않으면, 쑥내음이 무엇이고 쑥밭이 어떠하며 쑥이 돋는 봄이 어떠한 철인지 알 수 없습니다. 능금꽃과 배꽃이 피고 나서 천천히 꽃이 지고 천천히 열매가 무르익는 결을 살피지 않은 채, 저온창고에 있던 열매를 한겨울이나 봄에 가게에서 사다 먹기만 한다면, ‘아무리 좋다고 말하는 과일을 먹는다’ 하더라도 제맛을 알 수 없습니다.


  제철을 모르고 제맛을 모른다면 ‘제삶’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제길’이 아니요, ‘제자리’하고 멉니다. 제자리를 모르기에 어느 곳으로 나아가는 삶인지 모르고, 제자리를 모르니 ‘새걸음’으로 가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만 합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에 제대로 모르는 셈입니다. 제대로 살려고 하지 않으니 제대로 사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알 길조차 없습니다. 이리하여, ‘제결’을 잃은 채 맴돌고, 주머니에 돈이 많을는지 모르나 삶은 조금도 넉넉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습니다.


  겨울에는 찬바람을 마십니다. 봄에는 포근한 기운이 가득한 바람을 마십니다. 여름에는 무더우면서도 시원한 바람을 마십니다. 가을에는 따사로우면서도 살짝 서늘한 바람을 마십니다. 철마다 바람이 다릅니다. 철바람입니다. 바다에서는 바닷바람이고 숲에서는 숲바람입니다. 그러니, 철을 아는 사람은 밥을 알 뿐 아니라, 바람을 압니다. 바람을 살펴 어느 때에 씨앗을 심어야 하는가를 알고, 바람을 살펴 열매를 언제 거두어야 하는가를 알며, 바람을 살펴 보금자리를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가를 압니다.


  밥과 바람을 알기에 흙을 알고, 밥과 바람과 흙을 알기에 풀과 나무를 알며, 밥과 바람과 흙과 풀과 나무를 알기에 해와 별과 달을 알아요. 앎은 차츰 넓고 깊게 퍼집니다. 차츰 넓고 깊게 퍼지는 앎에 따라 삶이 거듭납니다.


  그런데, 사람은 철만 든다고 해서 삶을 이루지 않습니다. 철은 들되 사랑이 없으면 삶이 메마릅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사회에서도 ‘철없는 밥’을 먹는다 하더라도, 기쁜 웃음으로 고맙게 맞아들일 수 있다면, ‘아름다운 밥’으로 몸에 받아들입니다. 이는 곧 ‘아이 마음’입니다. 아이는 따로 씨를 뿌리거나 돌보거나 거두거나 갈무리하지 않아요. 아이는 어른이나 어버이가 차려서 주는 밥을 먹고, 아이는 어른이나 어버이가 지은 집에서 살며, 아이는 어른이나 어버이가 마련한 옷을 입어요. 아이는 아직 철이 들지 않은 목숨인데, 철이 안 들었어도 늘 기쁘게 웃으면서 고맙게 모두 받아들입니다.


  철이 들지 않았다면 ‘아이다운 웃음과 노래’를 누리면서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다운 웃음과 노래를 ‘어른이 되어도 그대로 잇는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숨결로 다시 태어나는 하루를 맞이합니다.


  씨앗을 뿌릴 줄 알아도, 웃고 노래하면서 기쁘게 뿌리는 마음이어야 제대로 자라도록 북돋웁니다. 열매를 거둘 줄 알아도, 웃음과 노래와 기쁨과 고마움을 누리면서 나누는 마음이어야 제대로 거두는 손길이 됩니다. 철이 들려는 사람은 ‘어른’이고, 사랑을 가슴에 품으면서 철이 들고자 하는 사람은 ‘어버이’입니다. 4348.3.8.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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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71 꼴 보다, 꼴 사납다



  나는 내 눈으로 내 꼴을 볼 수 없습니다. 내 눈은 오직 앞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기에, 내 얼굴을 못 보고, 내 몸짓을 못 봅니다. 나는 내 얼굴이나 몸짓이 아닌 네 얼굴이나 몸짓을 볼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을 들여다보면 내 꼴을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이나 유리를 바라보아도 내 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과 거울과 유리가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나 스스로 내 꼴을 보지 않습니다. 가만히 살피면,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제 꼴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숨결이라고 할 만합니다. 내 꼴을 바라보는 데에 얽매이지 말고, 내가 지을 삶을 바라보는 데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할 만합니다.


  내 눈은 내 꼴을 못 보지만, 내 마음은 내 꼴을 늘 봅니다. 그래서, 나는 나한테 말할 수 있어요. ‘꼴 보기 싫다’라든지 ‘꼴 보기 좋다’ 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기면 나는 내 꼴을 보기 싫습니다. 내가 스스로 지은 삶을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기면 나는 ‘내 꼴이 보기 좋다’는 말을 비아냥처럼 합니다. ‘꼴좋다’고도 하지요.


  그러나, ‘꼴’이라는 낱말은 먼 옛날부터 좋음이나 나쁨을 가리는 자리에 안 썼습니다. 생김새를 가리키는 낱말일 뿐입니다. ‘세모꼴’이나 ‘네모꼴’이나 ‘부채꼴’처럼 말합니다. 집을 짓거나 일을 할 적에 ‘꼴’을 잘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자리에 ‘모습’이나 ‘새’나 ‘생김새’ 같은 낱말을 쓰지 않아요. 어떻게 보이는가를 나타내려고 하면서 ‘꼴’을 씁니다. ‘몰골’이나 ‘얼굴’ 같은 낱말도 이 같은 느낌과 결을 나타내면서 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내 꼴’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나는 ‘내 꼴’을 따지지 않습니다. ‘내 꼴’을 바라보는 사람은 오직 남(너, 그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내 꼴을 바라보지 않고 ‘네 꼴(다른 사람 모습)’을 바라봅니다. 네가 나를 보면서 ‘꼴사납다’고 한다면, 나도 너를 보면서 ‘꼴사납다’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 두 눈으로만 마주할 적에 겉모습만 훑습니다. 저마다 어떤 꼴로 어떤 일을 하는가를 들여다볼 노릇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를 들여다보아야 하지만, 자꾸 ‘눈으로 보는 꼴’에 얽매입니다.


  남이 나를 보면서 ‘꼴좋다’고 비아냥을 하거나 ‘꼴사납다’고 나무란들, 나로서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눈으로 보이는 꼴’로 삶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나 사랑이나 꿈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으로만 마음을 보고, 사랑으로만 사랑을 보며, 꿈으로만 꿈을 보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남, 너, 그대)이 하는 말에 휘둘릴 적에는 내 삶·사랑·꿈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좋고 나쁨이라는 굴레에 스스로 갇힌 채 제 길을 잃거나 잊습니다. 나도 이와 같아요. 나도 나와 마주한 그대(너, 남)한테 ‘네 꼴이 우습네’ 하고 말할 수 있어요. 나도 그대를 뒤흔들 수 있습니다. 그대도 내가 하는 말 때문에 막상 그대가 짓는 삶과 사랑과 꿈을 잊거나 잃으면서 어지럽게 떠돌거나 헤맬 수 있습니다.


  ‘꼴’이라는 낱말은 낮잡거나 깎아내리려는 뜻이 안 담깁니다. 그러나, 사회의식은 이 낱말을 낮잡거나 깎아내리려는 자리에 쓰도록 부추깁니다. ‘별(別)꼴’ 같은 말마디는 그야말로 우스꽝스럽습니다. 아무 뜻도 없는 말마디인 ‘別꼴’은, 한국말로 뜻을 풀면 “다른 꼴”입니다. “다른 모습”이라는 소리요, “다른 삶·사랑·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머, 별꼴이야!” 하고 읊는 말은 네가 나와 다르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요. 서로 다르면서 새로운 삶과 사랑과 꿈을 지으니까요. 그렇지만 ‘별꼴’이라는 말마디로 마치 어느 한쪽은 나쁘거나 틀리거나 그릇되기라도 하는듯이 몰아세우는 사회의식입니다. 이 대목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다른 꼴’이어야 맞고, 우리는 저마다 새로운 삶을 지으려 하기에 ‘새로운 꼴’로 가야 즐겁습니다.


  ‘내 꼴’을 내가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남이 나를 재거나 따지는 틀에 휘둘리지 말고, ‘내 꼴’은 늘 씩씩하고 튼튼하면서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내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네 꼴’을 기쁘게 맞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너를 재거나 따지는 틀에 휩쓸리지 말고, ‘네 꼴’은 언제나 상냥하고 착하면서 아름답구나 하고 느껴야 합니다. 다른 꼴이기에 웃고, 새로운 모습이기에 노래합니다. 다른 모습이기에 어깨동무하고, 새로운 꼴이기에 손을 맞잡습니다. 4348.3.16.달.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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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70 숲에서 살리는 말



  내가 쓰는 말을 손수 지을 때에, 나는 늘 가없는 곳으로 새롭게 나아갑니다. 내가 쓰는 말을 손수 짓지 못할 때에, 나는 늘 똑같은 곳에서 쳇바퀴를 돌듯이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나는 남이 만든 말만 쓰면서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남이 만든 울타리에서 아무 걱정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남이 만든 쳇바퀴를 타면서 밥을 안 굶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남이 만든 이야기에 폭 사로잡혀서 내 이야기는 하나도 안 지으면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쓸 말을 손수 짓는 사람은, 내가 먹을 밥을 손수 짓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웃과 주고받을 말을 손수 짓는 사람은, 내가 입을 옷을 손수 짓는 사람입니다. 내가 곁님과 아이하고 나눌 말을 손수 짓는 사람은, 내가 머물 집을 손수 짓는 사람입니다. 내가 꿈꾸려는 말을 손수 짓는 사람은, 내가 걸어갈 이 길을 손수 열어서 내 삶을 손수 짓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숲에서 삽니다. 사람이 숲을 지었을 수 있고, 숲이 사람을 지었을 수 있으며, 숲과 사람은 서로 한꺼번에 스스로 지어서 태어났을 수 있습니다.


  숲은 지구별 모든 목숨이 깃드는 터전입니다. 지구별이 통째로 숲입니다. 겉으로 보자면, “나무가 우거진 곳”을 일컬어 ‘숲’이라 하는데, 숲은 그저 “나무가 우거진 곳”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온 목숨이 깃들어 사는 터”가 바로 ‘숲’입니다. 지구별이 통째로 새로운 숲이요, 지구별처럼 다른 별도 오롯이 새로운 숲입니다. 별과 별이 어우러진 별누리(은하)도 옹글게 새로운 숲입니다. 별누리와 별누리가 어우러진 온누리(우주)도 하나로 새로운 숲입니다. 이리하여, 사람은 숲에서 말을 짓습니다. 사람은 숲을 살리면서 말을 살립니다. 사람은 스스로 제 목숨을 살리면서 제 숨결을 터뜨리는 말을 터뜨립니다.


  숲사람은 숲말을 짓습니다. 숲사람이 지은 숲말에는 숲결이 드러나고, 숲내음이 묻어나며, 숲노래가 흐릅니다. 숲에서 바람이 붑니다. 숲바람입니다. 숲바람은 지구별을 골고루 돌면서 어느 곳에서나 새로운 숨으로 깃듭니다. 벌레도, 풀과 꽃도, 나무도, 짐승과 새도, 물고기와 사람도, 다 함께 ‘바람이 숲에서 일으킨 숨’을 마시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숲에서 지은 말은 바로 사람 스스로 살리는 말입니다. 숲에서 지은 말은 바로 사람 스스로 생각을 드러내는 숨결입니다. 숲에서 지은 말은 바로 사람 스스로 ‘머리에서 생각을 짓고 마음에 씨앗을 심어 몸으로 삶을 이루는 하루’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


  숲사람은 스스로 ‘숲’이라는 낱말을 짓고, ‘사람’이라는 낱말을 지으며, ‘흙·해·바람·물·꽃·나무’ 같은 낱말을 짓습니다. ‘님·곁·우리·너·나’ 같은 낱말과 ‘밥·옷·집’ 같은 낱말을 짓습니다. 이윽고 ‘사랑·꿈·따스함·봄·겨울·추위’ 같은 낱말을 지으면서, 새롭게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숲사람은 새로운 말을 스스로 끝없이 짓습니다. 숲사람은 새로운 말을 손수 가없이 지으면서, 그치지 않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숲을 등돌리거나 등집니다. ‘숲에서 살리는 말’이 아닌 ‘문명과 권력과 종교로 만드는 말’을 세워서 ‘너와 나 사이’에 ‘종(노예)’을 둡니다. 네가 나를 종으로 삼고, 내가 너를 종으로 부립니다. 새로운 말이 태어나지 않으면서, 쳇바퀴 삶이 됩니다. 새로운 말이 막히면서, 톱니바퀴처럼 구를 뿐입니다. 새로운 말을 잊으면서, 문명과 권력과 종교는 커집니다. 새로운 말을 잃으면서, 사람다운 사랑과 꿈을 함께 잃습니다.


  오늘날 지구별에서는 ‘새말’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한국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숲말’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유행말’이 떠돌고 ‘영어 권력’이 자랍니다. 홀가분한 넋이 숨을 쉬지 못하고, 아름다운 숨결이 퍼지지 못합니다. 스스로 숲을 저버리기에 스스로 숲말을 저버리는 셈입니다. 스스로 숲을 가꾸지 못하기에 스스로 숲말을 못 가꾸는 셈입니다.


  틀에 박힌 말은 우리 생각이 못 자라도록 막습니다. 제도권과 사회제도는 우리가 스스로 못 자라도록 찍어 누릅니다. 씨앗 한 톨이 너른 숲이 되고 온누리로 퍼지듯이, 말씨 하나를 마음에 심어서 너른 사랑이 되고 온누리에서 눈부시게 깨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숲과 내가 한몸이면서 한마음인 줄 바라볼 때에 비로소 숲말을 손수 짓는 아름다운 삶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4348.3.6.쇠.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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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9 짓고 씻어서 날리다



  마음속에 짓는 생각이 있을 적에, 이 생각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지은 생각이 아직 없다면, 아직 나한테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에, 그저 가만히 있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을 적에는 내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때에 누군가 나한테 어떤 말(생각)을 들려준다면, 나는 그 말(생각)을 쉽게 받아들여서 그 말(생각)대로 쉽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내가 나한테 아무런 말(생각)을 지어서 들려주지 않았으니 남(다른 사람)이 나한테 지어서 들려주는 말이 내 몸을 움직입니다.


  학교는 아이한테 온갖 말(생각)을 들려줍니다. 학교는 어떤 틀에 따라 세운 교과서를 아이한테 가르치면서 수많은 말(생각)을 들려줍니다. 학교에서는 다 다른 아이를 다 다르게 살피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가 스스로 생각을 지어서 이러한 생각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아이는 학교에 들어가면 ‘내 생각’을 키우지 않고 ‘남 생각’을 마치 ‘내 생각’이라도 되는 듯이 여기도록 길듭니다.


  내 생각을 스스로 짓지 않은 사람은 몸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꿈을 짓지 못합니다. 꿈을 짓지 못하기에 삶을 짓지 못합니다. 사회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직업이 있을 수 있고, 사회에서 여러 가지 문화를 누릴 수 있으며, 사회에서 여러 가지 계층이나 계급에 설 수 있습니다만, 손수 가꾸어 나누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내 생각이 없으니 ‘내 꿈’이 없고, 내 꿈이 없을 때에는 ‘내 삶’이 없으며, 내 삶이 없을 때에는 ‘내 이야기’가 없습니다.


  말을 짓고, 씻어서, 날립니다. 생각을 짓고, 씻어서, 날립니다. 꿈을 짓고, 씻어서, 날립니다, 삶을 짓고, 씻어서, 날립니다. 이야기를 짓고, 씻어서, 날립니다.


  내가 지은 삶이 내 이야기입니다. 내가 지은 삶이 내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는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즐겁고 넉넉하며 아름답습니다. 내 삶이 내 이야기인 터라, 나는 신문이나 방송이나 영화가 없어도 얼마든지 기쁘고 너그러우며 사랑스럽습니다. 먼 옛날부터, 삶을 손수 지어서 가꾼 사람은 모든 노래와 춤과 이야기를 손수 지어서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이와 달리, 삶을 손수 못 짓고 못 가꾸는 이들은, 아무런 노래도 춤도 이야기도 손수 못 짓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다른 사람)이 지은 노래와 춤과 이야기에 빠져들기만 합니다. 오늘날에는 몇몇 ‘노래 전문가’와 ‘춤 전문가’와 ‘이야기 전문가(시인·소설가)’한테 사로잡히는 ‘팬클럽’이 될 뿐, 스스로 제 이야기를 짓지 못합니다.


  삶이 있으려면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있으려면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있으려면, 이 생각을 이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내 말’을 터뜨려야 합니다. 맨 처음 지은 내 말이 마음을 거쳐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면서, ‘내 몸을 이루는 파란 거미줄 같은 숨결’을 건드리고, 내 온 숨결을 건드린 말은 내 몸에서 빠져나와서 바람을 타고 멀리 퍼집니다. 멀리 날아가지요. 이리하여, 우리는 저마다 말(생각)을 지어서, 이 말로 내 몸(숨결)을 새롭게 씻기고, 새롭게 씻긴 말을 내 바깥으로 내놓아서 바람에 실려 날릴 때에 이러한 말이 꿈으로 드러나고, 삶으로 피어나면서, 이야기로 자랍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짓지’ 않고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나아가려는 길을 스스로 지어서 내가 이루려는 꿈으로 스스로 노래할 수 있는 한편, 내 생각은 하나도 없이 ‘남이 시키는 굴레와 틀에 스스로 갇히는 몸뚱이’가 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4348.3.11.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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