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78 누구



  바깥에서 소리가 납니다. 이때 우리는 묻습니다. “거기 누구셔요?” 우리는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대고 ‘무엇’이느냐 하고 안 묻습니다. ‘누구’이느냐 하고 묻습니다. 바람이 부는 소리였든, 짐승이 지나가는 소리였든,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였던, 우리는 늘 ‘누구’인지 궁금해 하면서 묻습니다.


  바깥을 내다보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소리를 냈을까요? 도깨비일까요? 떠도는 넋일까요? 누구인지 모르지만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바깥에서 누가 소리를 내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바깥에서 누가 소리를 내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나를 찬찬히 느끼고 나를 제대로 생각하면서 나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리하여, 내가 나를 참답게 알아서 ‘참나’가 되니, 내 둘레에서 흐르는 바람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찬찬히 느낄 수 있고, 이 기운을 제대로 살피면서 모두 오롯이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나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찬찬히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선 이곳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내가 있는 이때를 하나도 헤아리지 못하니, 내 둘레에서 어떤 소리가 나든 누가 움직이든, 어느 한 가지조차 알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어느 때에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어느 곳에서는 누가 내 앞을 지나가더라도 느끼지 못합니다.


  내 몸에 깃든 넋을 느낄 때에 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흐르는 숨결을 만날 때에 나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에 나로서 있기에, 너는 저기에 너로서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요? 여기에 있는 넋입니다. 너는 누구인가요? 저기에 있는 넋입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어떤 넋인가요? 나는 여기에서 내 꿈을 짓는 숨결입니다. 너는 무엇을 하는 어떤 넋인가요? 너는 저기에서 네 꿈을 짓는 숨결입니다.


  나한테서 네가 나옵니다. 너한테서 내가 나옵니다. 모두 한꺼번에 한자리에서 함께 나옵니다. 닭과 달걀은 따로 있지 않고, 늘 함께 있습니다. 함께 태어나기에 함께 살 수 있고, 함께 살 수 있기에 함께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깥에서 소리가 납니다. 이때 나는 빙그레 웃습니다. “거기 네가 있구나?”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네가 나를 찾아온 줄 깨닫습니다. 이제 나는 너를 찾아서 바람을 타고 가려 합니다. 누구나 사랑하고, 모두 다 노래합니다. 누구나 꿈을 꾸고, 모두 다 웃습니다. 누구나 생각하고, 모두 다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여기에 있고, 모두 다 저기로 갑니다. 누구나 오늘에서 모레로 갑니다. 누구이든 타오르는 눈빛이요 사랑이면서 바람결입니다. 4348.3.11.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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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77 왜



  어떻게 그리 되었는지 모르기에 궁금합니다. 어떻게 그처럼 돌아가는지 모르니 궁금합니다. 까닭을 몰라 알고 싶으며, 영문을 몰라 알려 합니다. 궁금함을 풀려는 마음이고, 까닭을 알아내려는 마음이며, 영문을 찾으려는 마음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한 마디 말을 터뜨립니다. “왜?”


  아이들은 늘 묻습니다. 아이들은 아주 짧게 묻습니다. “왜?” 아이들은 그야말로 궁금합니다. 옳거나 그른 것을 안 따지면서 그저 궁금합니다. 어른들이 어느 것이 옳다고 하면 왜 옳은지 궁금하고, 어른들이 어느 것이 그르다고 하면 왜 그른지 궁금합니다. 옳음과 그름을 구태여 왜 나누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옳거나 그르다고 따지기 앞서 즐겁거나 기쁜 삶을 생각하면 될 텐데 하고 궁금합니다.


  새롭게 알려는 마음이기에 “왜?” 하고 묻습니다. 아직 듣지도 보지도 겪지도 않았으니 “왜?” 하고 묻습니다. 스스럼없습니다. 거침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마음으로 묻습니다. 사회의식이나 고정관념이나 편견으로 묻지 않고, 티없이 열리고 가없이 넓으며 끝없이 깊은 마음으로 묻지요, 꼭 한 마디를, 바로 “왜?”라고 하면서.


  어른들이 “왜?”라는 말을 쓸 적에는 아이들과 사뭇 다릅니다. 아이들은 티없고 가없으며 끝없이 묻지만, 어른들은 으레 ‘두려움’과 ‘무서움’과 ‘걱정’과 ‘근심’을 부여잡고서 묻습니다. 어른들은 스스로 틀에 갇히고 굴레에 사로잡힌 채 묻습니다. 어른들은 ‘왜’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어른들은 ‘왜’ 알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어른들은 ‘왜’ 따라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른들은 하기 싫고 알기 싫으며 따르기 싫습니다. 어른들은 마음을 조금도 안 열면서 묻는데, 마음을 안 연 채 읊는 ‘왜’는 궁금함이 아닙니다. 거스르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른들은 손사래치면서 눈을 감고 싶기에 ‘왜’라는 말마디로 고개를 홱 돌립니다.


  아이들은 “왜?” 하고 물으면서 하나도 안 두렵습니다. 새로운 것을 바라보거나 듣거나 겪으니 즐겁게 묻습니다. 아이들은 “왜?” 하고 물으면서 새로운 마음이 되기에 기쁩니다. 앞으로 새로운 숨결로 새로운 이야기를 누릴 만하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똑같이 쓰는 ‘왜’입니다. 이곳에서든 저곳에서든 같은 말로 쓰는 ‘왜’인데, 막상 다른 마음으로 쓰고 마는 ‘왜’입니다. 이리하여, ‘여는 마음’으로 묻는 “왜?”는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고, ‘갇힌 마음’으로 대꾸하는 “왜?”는 두려움으로 치닫는 제자리걸음이 됩니다.


  왜 그러할까요? 왜 우리는 새로움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두려움에 스스로 갇히려 할까요? 왜 우리는 스스로 사회의식을 붙잡은 채 종으로 얽매인 수렁에 빠지고 말까요? 왜 우리는 스스로 하느님인지 안 알아보려 할까요? 왜 우리는 스스로 웃음과 노래를 길어올려 스스로 사랑스러운 삶을 지으려는 몸짓을 잃을까요?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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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76 무엇



  이름을 모르기에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무엇인지 모르니, 무엇을 알려고 마음을 기울여 바라봅니다. 그런데,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무엇을 바라보는지조차 모릅니다. 무엇인지 모르기에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마저 모릅니다. 그래도, 내가 모르는 무엇을 찾고자 만나고자 알고자 이루고자 마음을 기울입니다. 이리하여, 나는 내가 모르기에 볼 수조차 없던 무엇을 처음으로 봅니다. 처음으로 보면서 이 새로움에 놀라 그만 아무 말이 안 나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가만히 ‘새로운 무엇’을 바라보다가 첫 마디가 터져나옵니다. 이 첫 마디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새로운 무엇’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온누리 모든 말은 이렇게 태어납니다. 처음 만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가만히 바라보면서 이 무엇이 참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한 끝에 비로소 무엇인지 마음으로 느끼고는, 이 무엇한테 ‘첫 이름’을 ‘첫 말’로 붙여서 부릅니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에 아직 모릅니다. ‘무엇’이라는 말로밖에는 나타낼 길이 없으니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직 모르기에 앞으로 알려고 합니다. 아직 모르기에 이 새로운 것을 알아서 내 삶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아직 알지 못하고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는 것에 내가 스스로 새로운 이름을 붙여서 내 기운을 실으려 합니다. 내 손길을 타고 내 기운이 실린 ‘무엇’은 비로소 내 둘레를 이루는 수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되고, 꽃이며 풀이며 나무이며 흙이며 해이며 별이며 바람이며 사람이며 사랑이며, 맨 처음(꽃등)에는 ‘무엇’이었을 뿐이지만 ‘사람이 붙인 이름’을 얻으면서 바야흐로 아름다운 숨결로 다시 태어납니다.


  ‘무엇이라는 것’이 ‘무엇’으로만 있을 적에는 아무 뜻이 없고 넋도 숨도 없지만, 이 ‘무엇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남지 않고 ‘내가 붙인 이름’으로 새롭게 부를 수 있을 때부터, 새로운 뜻과 넋과 숨이 흐릅니다.


  내가 바라보며 알아채고 마주하면서 손을 뻗어 만질 때에 꽃입니다. 내가 들여다보며 알아내고 맞이하면서 온몸으로 껴안을 때에 나무입니다. 내가 찾아보며 알아보고 받아들이면서 온마음으로 사랑할 때에 사람입니다.


  무엇 하나 없던 고요누리에, 무엇이든 새롭게 깃듭니다. 무엇 하나 없던 ‘하얀밤’에, 무엇이든 처음으로 흐릅니다. 무엇보다, 삶은 재미있고 즐거우며 아름답습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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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75 궁금하거나 못 미덥거나



  알고자 하는 사람은 늘 궁금해 합니다.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늘 못 미덥게 여깁니다. 알고자 하는 사람은 아직 스스로 모른다고 여깁니다.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벌써 다 안다고 여기거나, 굳이 알 까닭이 없다고 여깁니다.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새롭게 배우려고 합니다.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더 배울 뜻이 없습니다. 알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한테서나 배우려 하고, 언제 어디에서나 배울 뜻이 있습니다.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한테서도 배우려 하지 않고, 언제 어디에서든 딱히 배울 마음이 아닙니다.


  궁금한 사람이 묻습니다.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묻지 않습니다. 궁금해 할 수 있는 마음이기에 묻습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고자 하지 않으나 인사치레로 묻고, 알려는 뜻이 없으나 심심풀이로 그냥 묻습니다.


  궁금해서 묻는 사람은 스스로 실마리를 찾습니다. 궁금해서 묻기에 무엇이든 스스로 알 길을 찾습니다. 궁금해서 물으려는 마음이기에 언제나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궁금해 하지 않고 묻지 않는 사람은 실마리를 찾을 생각조차 없습니다. 모든 것은 틀에 짜인 대로 있다고 여기니, 실마리가 없거나 있거나 대수롭지도 않기 마련입니다. 궁금해 하지 않으니 언제나 똑같다고 여길 뿐, 다시 보거나 새로 보지도 않거나 아예 안 쳐다보기까지 합니다.


  궁금해 하기에 자꾸 묻고 새로 묻습니다. 자꾸 묻기에 자꾸 생각하며, 새로 묻기에 새로 생각합니다. 궁금해 하지 않아서 묻지 않는 사람은 그저 못 미덥다고만 여깁니다. 못 미더우니 고개를 젓거나 돌립니다. 못 미덥기에 짐짓 다른 데를 쳐다보는 듯 보이지만, 막상 어느 곳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는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릴 뿐입니다.


  아이들이 날마다 새롭게 자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이든 궁금하게 여기면서 새롭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언제나 무럭무럭 자라면서 씩씩해지거나 튼튼해지는 까닭은, 무엇이든 어떤 틀로 굳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틀을 만들지 않으니 새롭고, 틀을 굳히지 않으니 자라며, 틀을 세우지 않으니 사랑스럽습니다.


  어른은 어떤 사람일까요? 아이다운 숨결을 어른이 되어도 건사한다면, 언제나 믿음직하고 사랑스러우면서 씩씩한데다가 튼튼합니다. 아이다운 숨결, 그러니까 무엇이든 늘 언제 어디에서나 궁금하게 여기면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숨결을 잊거나 잃는다면, 그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채 딱딱하게 굳어 버립니다.


  굳어 버린 사람은 몸과 마음이 함께 굳으니 죽음과 늙음으로 달립니다. 굳어 버린 사람은 몸과 마음뿐 아니라, 눈길도 굳고 눈빛도 굳습니다. 사랑과 꿈마저 굳어 버립니다. 모든 것이 굳어 버리니까 따스하게 나누는 사랑이 샘솟지 못하고, 언제 어디에서나 모조리 굳어 버리니까 넉넉하게 이루는 꿈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을 열 수 있을 때에 궁금해 합니다. 마음을 열 수 있기에 활짝 웃으면서 궁금한 대목을 묻습니다. 마음을 열어 이곳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을 수 있기에 누구라도 따스하게 맞아들이면서 이웃으로 삼고 동무로 여깁니다. 마음을 열어 싱그러운 바람을 들이켤 수 있으니 스스로 숲이 되고 나무가 되면서 꽃이 됩니다.


  궁금한 사람은 아이입니다. 궁금한 사람은 어른입니다. 궁금한 사람은 바람입니다. 궁금한 사람은 해님입니다. 궁금한 사람일 때에 비로소 참다이 사람입니다. 궁금해 하지 않는다면, 겉모습으로는 아이요 어른이요 바람이요 해님이요 사람이라 하더라도, 겉모습만 있는 빈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알찬 사람은 바람이 불면 시원해 하면서 노래를 부르지만, 텅 빈 껍데기인 사람은 바람이 불면 먼지처럼 휘 날아가고 맙니다. 4348.3.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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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74 안 보일 때, 보일 때


  낮이 저물고 밤이 되면 둘레가 온통 깜깜합니다. 이제 빛이 없는 때입니다. 빛이 없으니 눈으로 알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빛이 있을 적에는 온갖 빛깔이 알록달록 드러나는데, 빛이 없을 적에는 모두 까맣기만 합니다. 게다가 어느 것도 눈에 안 보이니까,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낮에서 밤으로 접어들 적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면서 눈에 기운을 모으면, 차츰 눈이 밝게 트입니다. 사람한테는 낮눈과 함께 밤눈이 있어요. 안 보인다고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못 보고 말지만, 내 밤눈을 생각하면서 차분히 기다리면 밤눈이 천천히 뜨입니다.

  어떤 사람은 밤눈이 아닌 다른 눈으로 봅니다. 적외선을 볼 수 있다면 아무리 어둡더라도 환하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따로 장치를 눈에 씌워서 볼 테고, 어떤 사람은 맨눈으로도 적외선을 보겠지요. 그러면, 안 보이기에 두렵거나 무섭고, 보이기에 안 두렵거나 안 무서울까요? 우리는 어떤 눈으로 무엇을 볼까요?

  바닷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에 바닷물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닷속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으나 헤엄을 칠 줄 알아서 바닷물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헤엄을 칠 줄 알고 바닷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어요. 바닷속에서 무섭다 싶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 사람한테는 무서운 것’이 ‘어느 한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두려움에 떨지만, 한 사람은 느긋하면서 차분하지요.

  1억 원에 이르는 돈을 손에 쥐었지만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고, 1억 원에 이르는 돈을 손에 쥐었기에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한푼조차 없으나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1억 원에 이르는 돈은 도무지 손에 쥘 수 없다는 생각에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는 눈’이란 무엇일까요? 겉모습을 보기에 ‘보는 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못 보는 눈’이나 ‘안 보는 눈’이란 무엇일까요? 겉모습을 못 보면 ‘못 보는 눈’일까요? 겉이나 속 어느 것도 안 쳐다보려고 하면 ‘안 보는 눈’일까요?

  같은 책을 놓고 읽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책에 깃든 참이나 거짓을 느끼거나 헤아리지 못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책에 깃든 참이나 거짓을 느끼거나 헤아립니다. 참이나 거짓을 ‘보는 눈’은 어떤 눈일까요? 참이나 거짓을 ‘못 보는 눈’이나 ‘안 보는 눈’은 어떤 눈일까요? 몸에 있는 눈으로 얼굴이나 차림새를 알아본다고는 하지만, 마음속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보는 눈’일까요 ‘못 보는 눈’일까요 ‘안 보는 눈’일까요? 삶을 이루는 사랑과 꿈을 알아보지 못하면, 우리는 ‘뜬 눈’일까요 ‘감은 눈’일까요?

  어떤 것이 코앞에 있어도 안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아주 멀리 있어도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코앞에 두고도 안 볼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이 대단히 멀리 떨어진 데 있어도 서로 마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몸에 달린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몸에 깃든 마음’으로도 함께 보기 마련입니다. 이제 하나하나 헤아려야 합니다. ‘몸에 깃든 마음’ 가운데 어떤 눈으로 서로 마주보거나 바라보는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네 마음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내 ‘마음눈’은 무엇인지 헤아려야 하고,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내 ‘마음눈’은 어느 자리에 있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마음눈을 뜨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마음눈을 안 뜨는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마음눈을 활짝 열지 않으면 참이나 거짓을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사랑과 꿈으로 나아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마음눈을 활짝 열 때에 비로소 참과 거짓을 환하게 알아볼 뿐 아니라, 참과 거짓을 넘어 사랑과 꿈으로 곱게 거듭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4348.3.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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