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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3 종교와 ‘믿다·생각하다’



  ‘종교(宗敎)’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뜻풀이를 살피면,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 나옵니다. ‘宗’이라는 한자는 “마루, 뿌리, 으뜸, 우두머리, 갈래, 높이다, 섬기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종교’라고 하는 낱말은 “가장 으뜸이 되는 무엇을 높이거나 섬기면서 이를 따르려 하는 말씀”인 셈입니다. ‘마루’나 ‘뿌리’나 ‘으뜸’이나 ‘우두머리’가 “내가 아닌 내 바깥에 있다”고 여기도록 이끄는 가르침이 ‘종교’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장 으뜸’이 될까요? 아무래도 ‘하느님’이 가장 으뜸으로 될 테지요. 그러면 하느님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늘에 있는 님이 하느님이니 하늘에 있을 텐데, ‘하늘’은 어디일까요? 땅에서 1미터를 떨어지면 하늘일까요, 땅에서 1킬로미터를 떨어지면 하늘일까요, 지구별에서 벗어나면 하늘일까요?


  ‘하늘’이란 “때와 곳을 벗어난 파란 바람결”입니다. “땅과 대기권 사이에 있는 공기층”이 하늘일 수 없습니다. 하늘은 손에 잡을 수 없으나 손에 잡히는 것이고, 하늘은 알 수 없으나 알 수 있는 것이며, 하늘은 늘 우리 곁에 있으나 곁에 있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파랗게 눈부시면서 아무런 빛깔이 없는 숨결이 바로 ‘하늘’이기도 합니다.


  ‘하늘숨을 쉰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바람을 마신다’는 소리입니다. ‘파란 숨결’을 마시는 셈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늘숨을 쉬기에, 우리는 누구나 바람을 마시지요. 바람을 마시는 사람은, 바람을 마시는 줄 못 느낍니다. 숨을 쉬는 우리는 숨쉬기를 안 느끼면서 숨을 쉽니다. 그러면 언제 숨을 느낄까요? 몸이 아플 때에는 숨쉬기가 어려워서, 숨을 비로소 느낍니다. 바람결이 달라진 곳에서 바람맛이 좋다고 느낍니다. 바람결이 새로운 곳에서 내 온몸이 새로워지는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이때에도 숨을 느낍니다.


  바람을 마시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늘에 있고, 하늘에 있는 님인 하느님은 바로 우리들 모두입니다. 우리들이 저마다 하느님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저마다 이 땅에서 하늘을 마시고, 하늘에 살며, 하늘과 한몸·한마음이 되어서 하루를 열고 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종교’란 무엇일까요? 종교는 바로 ‘우리 스스로 하느님인 줄 잊도록 가르치는 정치권력’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로 나’인데, 이 ‘참말(참된 진리, 참다운 깨달음)’을 사람들이 잊거나 잃도록 길들이려는 경전이 종교인 셈입니다. 나 스스로 참말을 잊은 채, 거짓말에 매달려서 엉뚱한 데에서 ‘하느님 찾기’와 ‘하느님 섬기기’와 ‘하느님 모시기’와 ‘하느님 높이기’를 하도록 내몰도록 하는 바보짓이 바로 종교라고 할 만합니다.


  하느님은 성경에도 없지만 십자가에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우리들 가슴에 있으니, 다른 데에서 찾으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예부터 “업은 아기 삼 면 찾는다” 같은 말을 했습니다. 아기를 업고 허둥지둥하면서 길을 잃은 사람을 빗대는 옛말인데, 하느님을 놓고도 똑같이 말하지요. 그러니까, “업은 아기 삼 면 찾는다”는, 하느님이 가슴속에 있으나 이를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 스스로를 깨우치려고 슬기로운 옛사람이 재미있게 지은 ‘이야기말(속담, 깨우침말)’입니다. 이 이야기말을 생각할 때에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릴 때에 눈을 뜹니다. 이 이야기말을 생각하지 못하면 마음이 안 열리고, 마음이 안 열리면 눈을 뜨지 못해요.


  우리는 ‘믿다’가 아닌 ‘생각하다’인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다’라는 낱말은 “스스로 더 생각하거나 따지거나 살피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다”를 뜻합니다. ‘생각하다’는 어떤 낱말일까요? “스스로 궁금하게 여겨서 이리저리 찾으면서 스스로 수수께끼를 풀고자 스스로 머리로 실마리를 짓다”를 뜻합니다.


  종교는 사람들이 ‘믿도’록 내몹니다. 종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을 짓지 않’고 ‘그저 믿고 또 믿어’야 종교가 됩니다. 종교가 우뚝 서서 종교 지도자(우두머리)가 나오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곧바로 권력이 되고, 정치 권력이 스멀스물 불거집니다. 정치와 종교는 언제나 한덩어리가 되어 우리를 억누르는 노예신분 사회로 치닫습니다. 현대문명 사회에서도 정치와 종교는 늘 한덩어리가 되어 우리를 억눌러요. 이 얼거리를 보아야 합니다. ‘믿지’ 말고 ‘생각하’면서 내 삶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아닌 ‘생각’으로 내 삶을 손수 짓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시골에서 흙을 만지던 사람은 어느 누구도 종교가 없이 아름답고 착하며 사랑스레 살았습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종교를 퍼뜨리려는 정치 권력자는 사람들을 종(노예)으로 부리려고 자꾸 종교를 퍼뜨렸습니다. 종교가 없던 사회에서는 전쟁무기도 군대도 없었으니 언제나 평화로운 삶이었으나, 종교가 있은 뒤부터 권력자가 생겨서, 권력자는 손에 흙을 안 묻히면서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거나 짓밟았습니다. 먼먼 옛날, 종교가 없던 때에는 어느 겨레에서도 ‘국가 권력’을 세우지 않았고, ‘국가 권력’이 없으니 모든 겨레가 서로 ‘이웃’이나 ‘동무’로서 사이좋게 지냈어요. 종교가 없던 때에는 전쟁이 마땅히 없었습니다. 종교가 있고부터 전쟁이 터집니다. 오늘날 미국 정치 권력이 끝없이 전쟁을 일삼는 까닭은, 미국이 바로 ‘종교 권력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이슬람도 똑같이 ‘종교 권력 사회’이니 미국하고 서로 싸움질을 하려고 사람들을 내몰아요.


  수수께끼는 종교 지도자나 성경이 풀어 주지 않습니다. 수수께끼는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풉니다. 우리가 섬길 하느님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나를 섬기면서, 나는 너를 섬깁니다. 내가 하느님이듯이 너도 하느님이거든요.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섬기고 아끼고 보살피고 가꾸면서 삶을 짓습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볼 때에 ‘종교라고 하는 정치권력’이 사라집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못 바라본다면 ‘종교라는 쇠사슬 정치권력’이 우리를 굴레에 가두어 멍청이가 되도록 길들입니다.


  스스로 바람을 마시듯이,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 하늘숨을 먹듯이, 스스로 종교 굴레를 벗어야 합니다. 바람을 느낄 때에 비로소 나를 느낍니다. 바람을 마시는 나를 바라볼 때에, 생각을 짓고 삶을 짓는 내 참모습을 알아봅니다.


  삶을 스스로 짓는 사람은 예배당에 다니지 않습니다. 삶을 스스로 짓지 못하는 사람이 예배당에 다닙니다. 삶은 ‘어떤 전지전능한 님’이 선물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뜨려 주지 않습니다. 삶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님’인 내가 손수 기쁘게 웃고 노래하면서 아름답게 짓습니다.


  사랑을 스스로 길어올리는 사람은 하느님이 바로 내 가슴속에서 ‘내가 불러서 깨울 때’를 기다리는 줄 압니다. 하느님 마음일 때에 사랑을 나누고, 하느님 마음일 때에 아기를 낳으며, 하느님 마음일 때에 삶이 깨어납니다. 하느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를 믿고야 말며, 하느님 넋이 아니기 때문에 경전과 십자가에 스스로 못이 박히고 맙니다. 우리는 권력자 손바닥에서 벗어나, 내 몸과 마음을 내가 스스로 다스리고 사랑하는 길에 홀가분하게 설 수 있어야 합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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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2 동그라미와 ‘있음·없음’



  한국에서는 ‘있다’고 할 적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없다’고 할 적에는 ‘점(·)’을 찍어요. ‘있음’은 ‘가득’을 가리키니 동그라미로 나타내며, 없음은 하나도 안 보이는 모습을 가리키니 씨앗처럼 생긴 점 하나를 톡 찍습니다. 어떻게 보면, ‘없음’은 “텅 빔”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말에서는 ‘없음’을 “텅 빔”으로는 여기지 않습니다. 한국말에서는 ‘죽음’을 “없어짐”이나 “사라짐”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삶’도 늘 새걸음으로 나아간다고 여기는 한국말이고, ‘죽음’도 언제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고 여기는 한국말입니다.


  이리하여, ‘없음’은 ‘밤·어둠’과 이어지기도 하는데, 한국말에서 밤과 어둠은 ‘새롭게 피어날 씨앗이 있음’이기도 합니다. 한자말로는 ‘가능성’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할 수 있음”과 “될 수 있음”이 ‘없음’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리하여, ‘없음’을 나타내려 할 적에 점(·)을 찍어요. 없음은 씨앗이고, 씨앗은 “새로 피어날 수 있음”입니다.


  ‘있음’인 동그라미(○)는 ‘가득’이면서 ‘온’입니다. 오롯한 모습이요 옹근 삶입니다. 동그라미는 “모두 있는” 숨결이면서, 이러한 덩어리는 ‘또 다른 씨앗’입니다. 점(·)과 대면 커다란 씨앗이라고 할는지 모르나, 동그라미(○)도 고스란히 씨앗입니다. 그래서, ‘있음’인 ‘동그라미’는 ‘가시내(어머니)’를 나타내기도 하고, ‘없음’인 ‘점’은 ‘사내(아버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밤(어머니)과 낮(아버지)이 바뀐 모습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밤은 어머니요, 낮은 아버지인데, ‘없음’인 ‘씨앗’은 ‘어둠’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생각할 수 있다면 새로운 한 가지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밤은 어머니요, 낮은 아버지이지만, 사람한테는 두 가지 기운이 함께 있습니다. 밤이 더 두드러지는 어머니이지만, 어머니한테도 낮은 늘 함께 있고, 낮이 더 두드러지는 아버지이지만, 아버지한테도 밤은 늘 함께 있습니다. 두 가지 다른 씨앗(○와 ·)은 따로 있으면 아무것도 못 낳는 씨앗일 뿐이지만, 두 가지 다른 씨앗이 서로 만나서 한몸과 한마음이 되면, 새로운 몸과 마음이 태어납니다. 새로운 몸과 마음이 태어나도록 하려면, 두 가지 다른 씨앗은 서로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밤은 낮을 받아들여야 하고, 낮은 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실마리가 ‘있음·없음’에서 드러납니다.


  한국말에서는 ‘있기’에 더 좋거나 낫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말에서는 ‘없기’에 더 나쁘거나 덜떨어진다고 보지 않습니다. 한국말에서는 ‘있음 = 없음’으로 여기고, ‘없음 = 있음’으로 여깁니다. 있기에 없고, 없기에 있다고 봅니다. 있다고 여기는 때에 곧바로 없어지고, 없다고 여기는 때에 곧바로 있습니다. 이를 중국에서는 ‘새옹지마’라는 한자말을 빌어서 나타내기도 합니다. 한국말에서는 ‘동그라미’로 이를 나타내고, ‘있고 없음’이라는 말로도 나타냅니다.


  동그라미는 ‘있음’이면서 ‘없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동그라미는 ‘온 것(모든 것)’이면서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씨앗인 점은 ‘없음’이면서 ‘있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씨앗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면서 ‘모든 것을 낳는 첫머리(실마리)’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고, 없는 줄 알았는데 있습니다. 이리하여 흐릅니다. 물결은 위아래로 움직입니다. 물결은 앞으로 가는 줄 알았지만 앞으로 안 가고, 뒤로 가는 줄 알았으나 뒤로 안 갑니다. 늘 그 자리(제자리)에 있습니다. ‘늘 그 자리(제자리)에서 움직이면서 있고 없는’ 모습이 바로 물결이요, 이러한 물결처럼 하늘에서 흐르는 바람결이요, 하늘에서 흐르는 바람결을 숨으로 들이켜서 우리 몸에 담으면 숨결입니다. 삶이 흐를 수 있는 까닭은 ‘있고 없음’이 언제까지나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기에 고이 흐르면서 ‘사랑’으로 깨어납니다. 4348.3.8.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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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1 ‘거듭나다’와 ‘바뀌다·달라지다’



  사람이 달라집니다. 어제와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어떻게 이 사람은 어제와 사뭇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몸을 바꾸었을까요? 네, 몸을 바꾸었을 테지요. 몸은 어떻게 바꾸었을까요? 마음을 바꾸었으니, 몸은 마음에 따라 바뀌었을 테지요.


  마음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그동안 흘러온 결을 고스란히 내려놓고 새로운 길로 가려 할 때에, 내 마음을 내가 스스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동안 흘러온 결을 하나도 안 내려놓으려 한다면, 나는 하나도 안 바뀝니다. 하나를 내려놓으면 하나가 바뀔 테고, 모두 내려놓으면 모두 바뀝니다.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달라지기는 하되 새롭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달라지기는 하는데 왜 새롭지 못할까요? 이 모습에서 저 모습으로 옮기느라 ‘다른 모습’은 되지만, 정작 마음이 새롭게 깨어나도록 북돋우지 않으니, 겉모습은 ‘다르게’ 드러나지만, 속알맹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이때에는 ‘달라지는 쳇바퀴’에 갇힌 모습입니다.


  달라지거나 바뀌기에 한결 낫거나 더 낫지 않습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달라지거나 바뀔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달라질 수 있고, 엉터리로 바뀔 수 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우리 모습은 늘 달라지거나 바뀝니다. 다시 말하자면, 달라지거나 바뀌는 모습은 우리 삶자리에서 첫째 조각(1차 단계, 1차원) 언저리입니다. 좋고 나쁨을 따지는 얼거리예요. 크게 달라지거나 많이 달라져서 둘째 조각이나 셋째 조각까지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달라지거나 바뀌는 모습은, 언제나 이 자리에서만 맴돕니다. 더 나아가거나 뻗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달라지거나 바뀔 적에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자리만 옮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갔다가, 다시 저곳에서 이곳으로 오는 ‘바뀜·달라짐’에서 한 걸음 나아가려면, 눈을 뜨고 깨어나야 합니다. 거듭나야지요. 새로 태어나야지요.


  거듭나거나 새로 태어나는 모습도 ‘바뀜·달라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새로 태어남’은 바뀌거나 달라진다는 말로는 모두 나타낼 수 없어요.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삶은 ‘새로움’입니다. 허물을 내려놓고 나비로 깨어난 삶은 ‘오직 새로움’입니다. 허물을 몽땅 이곳에 두고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삶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새로움’입니다.


  ‘새롭게’ 나아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바뀌거나 달라지더라도 쳇바퀴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뀌거나 달라지는 모습에 갇혀요. 바뀌기는 늘 바뀌는데 ‘새로운’ 숨결이 없다면, 바뀌거나 말거나 늘 같습니다.


  우리는 굳이 안 바뀌어도 되고, 굳이 너와 내가 ‘달라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바꾸려는 생각이 아니라, 거듭나려는 생각일 때에 새롭습니다. ‘너와 내가 다른 모습’이라는 겉차림에 매달리지 말고, 새로 태어나려는 생각일 때에 기쁨이 흘러넘쳐 사랑이 됩니다.


  사랑을 속삭이는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만나서 이루는 삶’이 아닙니다. 사랑을 속삭이는 두 사람은 ‘이제부터 새로 태어나서 이루는 삶’입니다. ‘다른 사람이 만나서 이루는 삶’이기에 싸움이 그치지 않고, 좋고 싫다는 뭇느낌에 얽매입니다. 이래야 좋고 저러면 나쁘다고 하는 뭇느낌에 얽매인 삶이라면, 이때에는 ‘사랑’이 아닙니다.


  거듭나서 새로 태어날 수 있는 삶일 때에 비로소 사랑입니다. 거듭나서 새로 태어나는 넋일 때에 비로소 사람입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나누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홀가분하게 서려면, 날마다 늘 새로 태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어제와 다르다’에 머물지 말고, ‘나는 어제에서 오늘로 새로 태어난다’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에서 모레로 새로 태어난다’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쳇바퀴를 도는 사람은 ‘날짜만 다른 나날’을 똑같이 보냅니다. 굴레에 갇힌 사람은 ‘자리만 바꾼 나날’을 똑같이 보냅니다. 내 바보스러운 버릇이나 몸짓을 고치거나 손질하거나 바꾸거나 달라지도록 하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꾸거나 달라지도록 하더라도 늘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아요. 우리는 누구나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 깨어나서 아름답게 눈을 뜰 수 있습니다. 4348.3.6.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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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0 떨잎·가랑잎·진잎



  잎사귀가 떨어집니다. 바람이 불어 그만 톡 끊어져서 떨어집니다. 아직 푸른 잎사귀인데, 그만 바람을 맞고 떨어집니다. 때로는 벌레가 갉아서 떨어집니다. 때로는 새가 쪼거나 밟아서 떨어집니다. 어느 때에는 아이들이 장난스레 놀다가 떨어지고, 어른들이 툭 치고 지나간 탓에 떨어집니다. 더 햇볕을 쬐면서 푸르게 노래하고 싶던 잎사귀는 몹시 아픕니다. 서운하고 서러우며 슬픕니다. 그래서 땅바닥으로 떨어진 잎, ‘떨잎’은 한동안 푸른 빛을 고스란히 지킵니다. 다시 나뭇가지에 붙고 싶습니다.


  ‘가랑잎’은 다 마른 몸뚱이인데 안 떨어지기도 합니다. 나뭇가지에 말라붙은 채 대롱대롱 매달리며 겨울을 나기도 합니다. 다 말랐으면 흙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가랑잎 가운데 나뭇가지한테서 안 떨어지려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미나무가 그리울까요. 어미나무한테 매달려서 칭얼거리려는 뜻일까요. 봄까지 버틴 가랑잎도 있지만, 봄이 되어 새로운 잎이 하나둘 돋으면, 가랑잎은 어느새 톡 떨어집니다. 다른 모든 가랑잎이 지난가을과 지난겨울에 떨어져서 찬찬히 삭아서 흙으로 돌아간 뒤에 비로소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흙땅에서 흙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봄이 되면 흙에서도 새로운 풀이 돋으니까요. 새롭게 자라려는 풀잎은 봄에 떨어진 가랑잎이 성가십니다. 왜 이제서야 떨어져서 ‘내 햇볕’을 가르느냐고 성을 냅니다.


  가을과 겨울에 떨어진 가랑잎은 겨우내 풀벌레한테 보금자리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겨울잠을 자는 풀벌레는 가랑잎이 소복히 쌓인 데를 찾아서 조용히 깃들어요. 그러니, 가랑잎은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으로 다시 태어날 뿐 아니라, 흙땅에서 겨울잠을 잘 조그마한 풀밭 동무와 이웃한테 고맙고 너른 품이 되어 주지요.


  ‘진잎’은 이제 다 말라서 지는 잎입니다. 질 때가 되어, 지는 잎입니다. 아직 덜 말랐어도 잎이 지기도 합니다. 이제 그만 나뭇가지한테서 떨어져 흙으로 일찌감치 가려는 마음입니다. 나뭇가지는 진잎더러 더 머물다 가라고 말하지만, 진잎은 괜찮다면서 손을 젓습니다. 어차피 곧 갈 흙이라면, 일찌감치 떨어져서 흙내음을 맡겠노라 합니다. 진잎은 씩씩하게 흙 품에 안겨서 바람 따라 또르르 구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사람들 눈에 뜨입니다. 사람들은 진잎을 보고는 한 마디 하지요. “어머나, 어쩌면 이렇게 빛깔이 고울까.” 사람들은 진잎을 찬찬히 살피면서 한둘쯤 골라서 줍습니다. 책 사이에 꽂습니다. 책 사이에 꽂고는 알맞게 눌러서 마저 말리면 멋진 책살피로 거듭납니다. 진잎은 일찌감치 흙으로 돌아가려고 나뭇가지를 떠나는데, 이 아이들 가운데에는 사람들 손을 거쳐서 오래도록 새로운 숨결로 다시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어요.


  잎은 모두 같은 잎입니다. 그러나, 잎은 모두 다른 삶을 누립니다. 잎은 모두 똑같은 어미나무한테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잎은 모두 다른 삶을 지으면서 다른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더 좋거나 나쁜 삶은 없습니다. 책살피가 된 진잎을 빼고는 모두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으로 살아나고, 새로운 흙으로 살다가 다시 어미나무 뿌리를 거쳐서 새로운 잎사귀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돌고 돌고 다시 돌면서 새로운 숨을 받습니다. 돌고 돌고 또 돌면서 새로운 바람을 마십니다. 나뭇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릅니다. 나뭇잎이 추는 춤과 부르는 노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늘까지 곱게 흐릅니다. 4348.3.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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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9 콩씨와 팥씨



  한겨레가 먼 옛날부터 주고받는 말 가운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가 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옳습니다. 그야말로 옳습니다. 대단히 옳고 바르면서 멋진 말입니다. 콩을 심으니 콩이 납니다. 팥을 심기에 팥이 나요.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마음에 심으면 사랑이 자랍니다. 꿈을 마음에 심으면 꿈이 자라요. 더할 나위 없이 올바른 말입니다.


  내 마음에 미움을 심으면 무엇이 자랄까요? 미움이 자라지요. 내 마음에 시샘을 심으면 무엇이 자라나요? 시샘이 자라지요. 내 마음에 기쁨이나 웃음을 심으면 기쁨이나 웃음이 자라고, 기쁨이랑 웃음을 함께 심으면 ‘기쁜 웃음’이나 ‘웃는 기쁨’이 자랍니다.


  나무를 심기에 나무가 자랄 수 있습니다. 나무를 보살피고 아끼기에, 나무는 우리한테 사랑스럽고 맛난 열매를 고맙게 베풉니다. 씨앗 한 톨을 흙땅에 정갈한 손길로 기쁜 꿈을 품으면서 심으니, 씨앗 한 톨은 흙 품에 안겨서 씩씩하게 자랍니다.


  한편, 한겨레 옛말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콩을 심은 데에 팥이 나거나, 팥을 심은 데에 콩이 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까요? 심기는 콩을 심었는데 왜 팥이 나지요? 콩을 심으면서 콩이 아닌 팥을 생각하니까 팥이 납니다. 팥을 심으면서 팥이 아닌 콩을 생각하니 콩이 납니다. 이 또한 아주 옳습니다. 그래서, 한겨레는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와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진다.”고도 이야기합니다. 똑같은 말이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씨앗 한 톨을 심으면서 ‘씨앗 한 톨’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것을 생각한다면, 씨앗이 제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콩씨를 심어도 콩알이 안 맺을 수 있습니다. 씨앗 한 톨을 심으면서 ‘열매가 잔뜩 열리면 돈을 많이 벌어야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이때에도 열매가 제대로 안 맺을 수 있습니다. 첫발(첫걸음)을 내디디는 우리는 새발(새걸음)을 내딛으려고 해야 합니다. 첫발을 내딛으면서 끝(열매)을 지레 생각하니까, 첫발부터 어긋나고 맙니다.


  다시 말하자면, 콩씨를 심으면서 팥을 생각한 사람은 처음부터 ‘콩을 심지’ 않고 ‘팥을 심는구나’ 하고 여길 만합니다. 씨앗을 심으면서 ‘씨앗’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것’을 심은 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우리가 손수 심은’ 대로 거둡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옛말처럼, 생각을 마음자리에 심거나 뿌린 대로 삶이 나타납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씨가 삶이 됩니다. 말은 언제나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과 같은 말을 함부로 뇌까린다면, 나는 내 삶을 스스로 함부로 망가뜨리려는 셈입니다. 언제나 씨앗과 같은 말이니, 말을 정갈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서 슬기로운 생각으로 마음자리에 둘 수 있으면, 이 말은 마음자리에서 사랑스레 깨어납니다.


  어떤 씨앗을 심을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씨앗을 바라보면서 내 손에 쥐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선 땅에 어떤 씨앗을 쥐고 어떤 몸짓으로 어떤 삶을 지으려 하는가를 또렷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손에 쥔 씨앗을 제대로 바라볼 때에 내 길을 제대로 걷습니다. 내 손에 쥔 씨앗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내 길은 그예 어긋나기만 합니다. 4348.3.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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