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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1 님


  예부터 한겨레는 이 땅에서 ‘님(임)’을 그리면서 살았습니다. 가까이에서 사랑으로 마주하는 이를 가리켜 ‘님(임)’이라 했어요. 어른은 서로 그리면서 ‘님(임)’이라 했고, 아이는 동무끼리 이 말을 따로 쓰지는 않았으나, 해를 바라보고 별을 바라보고 꽃을 바라보고 달을 바라보고 풀을 바라보고 나무를 바라보고 나비를 바라보면서 으레 ‘해님·별님·꽃님·달님·풀님·나무님·나비님’이라 했어요. 어른은 집 둘레에 수많은 ‘님’이 있어서, 이 님이 우리 집, 그러니까 ‘보금자리’를 보살펴 준다고 여겼습니다. 한겨레가 이 나라에서 쓰던 ‘님(임)’이라는 낱말은, 오늘날 이 땅에서 ‘신(神)’이라는 낱말로 가리키는 모든 숨결을 가리킨 셈입니다.

  그런데, ‘님’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알거나 느끼거나 생각하면서 쓰는 사람이 아주 드물어요. 왜 그런가 하면, 지난날 가운데 조선 무렵에는 나라에서 유교를 종교로 삼으면서 ‘임금’한테만 ‘님’을 붙여서 ‘임금님’처럼 쓰도록 닦달했습니다. 고려 무렵에는 나라에서 불교를 종교로 높이면서, 이때에도 ‘임금’한테만 ‘님’을 붙여서 ‘임금님’과 같이 쓰라 몰아세웠습니다.

  임금이라고 하는 사람 하나, 그러니까 정치 우두머리인 한 사람, 다시 말하자면 정치와 종교로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거머쥐면서 사람들한테서 세금을 뽑아내고 사람들을 군대(싸울아비)로 끌어들이고 사람들을 종(노예)처럼 부려 소작인살이를 보내도록 했던 그 한 사람만 ‘님’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때에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정치 권력자와 지식인 따위는 여느 사람들더러 ‘임금님’이라 부르도록 윽박질렀는데, 여느 사람들은 칼부름과 주먹다짐 앞에서는 허리를 꺾으면서도, 뒤에서는 고개를 돌리고는 ‘임금놈’이라 불렀어요.

  곰곰이 돌아보면 거의 즈믄 해 즈음 우리는 ‘님’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못 쓰도록 억눌린 채 살았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 둘레에 있는 모든 ‘신’이라는 숨결을 ‘님’이라 말했는데 말이지요. 그러니, 나라에서는 불교와 유교 권력을 휘두르면서, 마을에 있는 작은 비손집(사당)을 나쁘게 여겼지요. 조선 무렵에는 사직단이라는 곳을 지어서 ‘사내가 가시내를 억누르는 또 다른 가시방석’을 마련하기까지 했습니다.

  요즈음에는 누리모임(인터넷 동호회) 사람들이 서로를 ‘아무개 님’이라 부릅니다. 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살던 여느 사람들이 으레 쓰던 말이 제자리를 찾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요즈음 서로를 ‘님’이라 부를까요? 무언가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아쉽게도 아직 깨닫지는 못한 채 쓰는데, ‘님’이 ‘신’을 가리키던 오랜 한국말인 터라, ‘사람 몸마다 깃든 새로운 숨결’이 바로 ‘님’이기에, 누리모임이라는 곳이 곳곳에 퍼지면서 사람들은 ‘너와 내가 똑같이 고운 목숨이요 숨결’이라 여겨 이 낱말을 이름으로 삼아서 쓰고, 이 이름은 차근차근 자리를 잡아서 제 빛을 찾는다고 하겠습니다. 4348.1.19.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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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 말과 넋과 삶



  사람은 누구나 삶을 가꾸는 넋을 말로 짓는 일을 합니다. 어느 나라나 겨레에서도 이와 같습니다. 나라와 겨레는 다르지만, 다 다른 나라와 겨레에서 ‘제 말’을 바탕으로 삼아서 넋을 짓고, 말로 지은 넋으로 삶을 짓습니다. 그래서, 말을 가꾸는 삶은 넋을 가꿀 수 있고, 넋을 가꾸는 사람은 삶을 가꿀 수 있습니다. 말을 가꾸지 않는 사람은 넋을 가꿀 수 없으며, 넋을 가꿀 수 없는 사람은 삶을 가꿀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누구나 스스로 곰곰이 생각을 기울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손수 생각을 북돋우면 마음에 환하게 그림 하나 그릴 수 있습니다.


  ‘토박이말’을 살려서 쓰거나 캐내서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쓰고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쓰며 핀란드사람은 핀란드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한국사람이 한국 토박이말을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일본사람이 일본 토박이말을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니며, 핀란드사람이 핀란드 토박이말을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모두 ‘토박이말’일 텐데, ‘그냥 토박이말’이 아니라, 내 생각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는 말을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한글로 적는다고 해서 모두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글은 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한글로 영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을 담을 수 있습니다. ‘굿바이’는 영어를 담은 한글입니다. ‘사요나라’는 일본말을 담은 한글입니다. ‘쎄쎄’는 중국말을 담은 한글입니다. 이러한 ‘한글’은 말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닙니다.


  한국에서 사는 사람이 쓸 말은 그예 수수한 말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쓰는 말이 한국말이고, 시골과 도시에서 함께 쓰는 말이 한국말입니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쓰고, 지식이 적은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 나란히 쓰는 말이 한국말입니다.


  많이 배우거나 책을 꽤 읽은 사람이 쓰는 말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이를 똑똑히 바라보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지식이나 철학이나 학문으로 기울어진 말은 ‘조금도 한국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지식이나 철학이나 학문으로 기울어진 말로는 넋을 가꾸지 못하고, 이런 말로는 삶을 가꾸지 못합니다. 지식이나 철학이나 학문을 털어내고서, 손수 하루를 짓는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이러한 말로 넋을 가꿉니다. 손수 하루를 짓는 마음이 아니라면, 말부터 못 가꾸니까 넋을 못 가꾸지요.


  신분이나 계급을 가르는 말도 ‘껍데기 한글’입니다. ‘말’조차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이란 우리 넋을 이루는 숨결입니다. 그래서 우리 넋을 이루는 숨결인 말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제대로 알아차리고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말을 슬기롭게 보고, 말을 언제나 새롭게 배울 적에, ‘나는 말을 가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말을 가꾼다’고 될 때에 비로소 ‘나는 넋을 가꾼다’가 되며, 이때에 저절로 ‘나는 삶을 가꾼다’가 됩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말을 꾸미거나 치레하는 일은 ‘말 가꾸기’가 아닙니다. 말을 이쁘장하게 꾸미거나 말을 그럴듯해 보이도록 치레하는 일은 ‘말 꾸미기’나 ‘말치레’입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넋 꾸미기·넋치레’가 아니고 ‘삶 꾸미기·삶치레’일 수 없으니, 우리는 꾸미기나 치레가 아닌 가꾸기를 할 노릇이요, 말을 제대로 바라보고 똑바로 알아차리며 슬기롭게 가꾸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4348.1.18.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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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8 ‘참말’과 ‘너무’



  예부터 이 나라 시골사람은 마음을 나타낼 적에 “참말 좋지”나 “참 좋지”처럼 말했습니다. ‘참말’과 ‘참’은 시골사람이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날에는 이 나라를 이루는 99.9%에 이르는 사람이 시골사람이었기에, 이들은 ‘시골사람’이 아닌 ‘사람’이었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사람이 쓰는 말(사람말)’은 ‘참말·참’이었어요.


  오늘날 한국은 시골이 거의 사라지면서, 시골사람이 함께 사라집니다. 물질문명을 만드는 도시사람이 되고, 도시사람이 아이를 낳아 다른 도시사람을 이룹니다. 오늘날 한국은 도시사람이 99%%에 이릅니다. 이제 이 도시사람은 ‘도시말’을 씁니다. 도시말을 쓰면서 시골과 도시라는 터를 가릅니다. 도시와 시골이 갈리니, 예전에는 누구나 ‘시골사람 = 사람’인 얼거리였는데, 오늘날에는 ‘도시사람 ↔ 시골사람’이 갈리는 얼거리가 되는 한편, 시골사람이 도시사람한테 얕잡히고 말면서 ‘사람말(사람이 쓰는 말)’까지 함께 사라집니다.


  도시사람이 쓰는 도시말은 ‘正말’과 ‘眞짜’입니다. 그리고 ‘너무’입니다. 이 세 가지 말은 한국말이 아니고 사람말이 아닙니다.


 퍽 . 꽤

 아주 . 매우 . 무척 . 제법 . 몹시

 대단히

 엄청나게

 어마어마하게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할 적에,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으로서 말을 할 적에는 낱말 숫자에 따라 느낌을 달리하면서 여러 말을 때와 곳에 맞게 썼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큰 낱말이 있어요.


 참 . 참말


  ‘참·참말’은 느낌을 나타내는 낱말을 모두 아우릅니다. 그래서, “참 사랑해”나 “참말 사랑해”는 마음 가득 사랑이 넘치는 숨결을 드러냅니다. 이와 달리 “정말 사랑해”나 “진짜 사랑해”는 겉치레와 꾸밈과 속임수와 거짓이 드러납니다. 왜 그러할까요? 시골사람 시골말, 그러니까 사람이 쓰는 사람말은 ‘정말·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낱말을 한국사람이 쓴 지는 기껏 백 해조차 안 됩니다. 한국 사회가 일본한테 식민지가 되면서 종살이를 하는 동안 한국말(사람말)을 빼앗겼고, 이러는 동안 사람들 스스로 종이 되면서 넋을 잃었습니다. 넋을 잃으니 삶과 말을 함께 잃어요.


  한국 사회는 일제 강점기에서 풀려났으나, 삶과 넋과 말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말(사람말)이 살아나려면 제대로 된 말, ‘참말’을 써야 합니다.


  그러면 “너무 좋아”는 무엇일까요? ‘너무’라는 낱말은 “너무 아파”나 “너무 싫어”나 “너무 슬퍼”처럼 씁니다. ‘너무’는 “좋아해”나 “사랑해” 앞에 쓸 수 없습니다. 이러한 얼거리를 읽을 때에 비로소 말을 깨닫습니다. 말을 깨달아야 넋을 알아봅니다. 넋을 알아보아야 삶을 짓습니다. 4348.1.2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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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7 ‘함께살기’와 ‘쇠북꾼’



  나는 스무 살 언저리에 내 이름을 찾았습니다. 내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준 이름은 ‘종규’인데, 내 어버이한테서 벗어나고 싶은 꿈을 키우면서 내 이름을 스스로 지었습니다. 그무렵, 그러니까 스무 살 언저리에 내가 스스로 지어서, 그때부터 스무 해 남짓 아끼면서 섬기는 내 이름은 ‘함께살기’입니다.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준 이름은 ‘종규’는 한자로 ‘鐘圭’로 적습니다. 어버이한테 이 이름이 무슨 뜻이냐 하고 여쭈었을 적에, 어버이는 이 이름이 무슨 뜻인지 말해 주지 못했습니다. 어버이는 이 이름을 ‘항렬 돌림자’로 붙였을 뿐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짓지 않았어요.


  한자로 내 이름을 살피면 ‘쇠북(鐘) + 홀(圭)’입니다. 그러니까, “쇠북을 홀로 치는 사람”인 셈이지요. 절집이라든지 서울 종로에 보면 ‘커다란 종’이 있습니다. ‘종’은 한자말이고, 한국말은 ‘쇠북’입니다. 쇳덩이로 지은 북이기에 ‘쇠북’이고 ‘종’입니다.


  어릴 적에는 “쇠북을 홀로 치는 사람”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몰랐고, 알고 싶지 않기도 했습니다. 나 스스로 철이 들 무렵 찾아와서 내가 기쁘게 맞아들여서 나한테 붙인 이름 ‘함께살기’는 ‘쇠북꾼’하고는 아주 맞서는 낱말이라 할 만합니다. 하나는 하나요,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입니다. 하나(쇠북꾼)는 ‘1차 의식’이고, 다른 하나(함께살기)는 ‘2차 의식’입니다. 내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준 ‘1차 의식’에서 내가 작은 점을 찾아내어 ‘2차 의식’을 지은 뒤, 나로서는 내 나름대로 ‘엄청나고 새로운 경험’을 여태 스스로 지으며(창조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쇠북꾼’과 ‘함께살기’는 다르면서 같은 말이고, 같으면서 다른 말입니다.


  ‘함께살기’는 겉으로 보자면, 겉뜻으로 보자면 “함께 살기”입니다. 속으로 보자면, 속뜻으로 보자면, “함께 보고 함께 느끼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꿈꾸고 함께 노래하여 함께 살다”입니다. ‘함께살기’라는 이름에는 일곱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일곱 빛깔 무지개이고, 일곱 가지 조각(씰)입니다. ‘보다’에서 ‘느낌’이 태어나고, ‘생각’이 다시 태어나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꿈’이 자라서 ‘노래’가 되고, 이윽고 시나브로 ‘삶’이 됩니다.


  우리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이름은 모두 ‘밭’이요 ‘바탕’이면서 ‘뿌리’입니다. 이러한 밭과 바탕과 뿌리에 씨앗을 심지요. 이 씨앗을 심으면서 ‘내 이름을 내가 손수 새로 짓기’를 할 수 있으며, 이렇게 내 손에 숨결을 담아서 ‘내 이름을 새롭게 처음 지으’면, 내 몸은 어느새 바람이 되어 하늘을 납니다.


  우리는 모두 두 가지 이름이 있는 사람이고, 두 가지 이름은 함께 맞물리면서 흐릅니다. 함께 맞물리면서 흐르는 이름은 서로 아끼고 섬기는 넋이고, 서로 아끼고 섬기는 넋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징검다리를 기쁘게 밟고 노닐면서 자랍니다. 고맙습니다. 4348.1.2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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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 ‘섬·서기·서다’와 ‘진화’



  한자말 ‘진화(進化)’를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이나 사물 따위가 점점 발달하여 감”으로 풀이합니다. 이 풀이말을 읽고서는 ‘진화’라는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자를 낱으로 뜯어서 보면, ‘진화’는 “나아감 + 되다”입니다. 그러니까, “나아가게 되다”를 가리킨다고 할 만한 ‘진화’입니다.


  그러면, ‘영적 진화’라고 하면, 이 말은 무엇을 뜻하거나 가리킬까요? 참 알쏭달쏭하지요. 여러모로 꽉 막힌 말마디이지요. 아무래도 알아차리기 힘들고, 아무래도 알아차리기 힘드니까 이 사람은 이대로 말하고 저 사람은 저대로 말할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낱말 하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에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않아서 제대로 알지 못하니,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진화’나 ‘영적 진화’라는 말마디를 쓰고 싶다면, 이 말마디부터 제대로 바라보고서 알아챈 뒤에 써야 합니다. 이 말마디를 써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말마디를 제대로 읽고 알아서 내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나아가게 되다”란 무엇일까요? 생각을 기울여 봅니다. 나아가게 된다고 할 때에는, 이제 이곳에 있지 않고 저곳에 갈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진화’는 “머무르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진화’는 ‘감·가기·가다’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머무르지 않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 수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진화’이지만, 이 낱말은 한국말로는 ‘섬·서기·서다’입니다. 왜냐하면, ‘일어서다’와 ‘바로서다’를 가리키는 ‘서다’이기 때문입니다. 멈추는 모습을 가리키는 ‘서다’가 아니라 “일어서다 + 바로서다”인 ‘서다’입니다.


  오늘날 우리 둘레 사람들이 사회의식으로 ‘진화·영적 진화’라는 낱말을 쓰는 자리를 살피면, 다음처럼 적어 볼 수 있습니다.



 깨어나기 . 새로 깨어나기

 눈 뜨기 . 눈을 떠서 보기

 태어나기 .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

 거듭나기



  사회의식으로 ‘진화’라는 낱말을 쓰는 사람은 으레 ‘거듭나기’를 가리키는 자리에 씁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인가 하면, ‘거듭나기’라 말해야 하는 자리에서 자꾸 ‘진화’라는 말마디를 엉뚱하게 쓰니까, ‘깨어나기’와 ‘눈 뜨기’와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라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도 그만 뜬금없이 ‘진화’나 ‘영적 진화’라는 말마디를 집어넣을 뿐 아니라 ‘내적 성장’ 같은 일본 한자말을 자꾸 끌어들입니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바라보지 못하는 몸이니, 한국말을 잊을 뿐 아니라, 뜻도 모르는 채 이 말 저 말 주워섬기고 말아요.


  말부터 제대로 보면서 ‘우뚝 서야’ 이곳에서 저곳으로 한 발짝 내디딥니다. 말부터 제대로 보면서 ‘슬기롭게 서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어디이든 홀가분하게 내 마음껏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말부터 제대로 보면서 ‘아름답게 서야’ 새처럼 바람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면서 내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화’라는 낱말을 쓰고 싶다면, 이 한자말이 ‘서다’를 가리키는 줄 바르게 바라보면서 느끼면 됩니다. 4348.1.2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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