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63 그대는 나, 나는 그대



  손이 하나일 때에는 손뼉을 못 칩니다. 우리 옛말로는 ‘손바닥(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두 손일 때에 소리가 나고, 두 손으로 소리를 내면서 모든 노래가 터져나옵니다. 손이 하나일 때에는 아무것이 없습니다. 소리도 없고 모습도 없습니다. 오직 고요하기만 합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요한 점과 같은 숨결에서 손이 하나만 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길지도 짧지도 않은 동안 ‘한 손’이었으나, 이 한 손이 어느새 ‘두 손’이 됩니다. 둘로 갈린 하나가 아니라, 새로운 하나가 ‘처음 하나’에서 태어납니다. 처음 하나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는 처음과 똑같이 생깁니다. 다만, 하나는 왼손이고 다른 하나는 오른손일 뿐입니다. 서로 거울처럼 마주볼 뿐입니다.


  거울처럼 마주보기 때문에 서로 짝 소리가 나게 부딪힐 수 있습니다. 거울처럼 서로 바라보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가만히 헤아리기에 서로 한몸처럼 부딪힐 수 있습니다. 짝 소리가 나도록 부딪히자면 어느 한 군데도 어긋나지 말아야 합니다. 꼭 맞닿아야 비로소 소리가 납니다. 살짝 뒤틀리기만 해도 소리가 안 나요.


  이렇게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는 물결과 같은 소릿결을 피우면서 차츰 퍼집니다. 소릿결은 조금씩 커집니다. 물결이 차츰 커지듯이 소릿결은 위아래로 커지고,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면서 커집니다. 커지는 소릿결은 새로운 곳으로 자꾸 떠납니다. 한 걸음이 두 걸음으로, 두 걸음이 세 걸음으로, 세 걸음이 네 걸음으로 갑니다. 이윽고 다섯 걸음과 여섯 걸음과 일곱 걸음까지 갑니다. 일곱째 걸음에서 멈추면서 둘레를 살피다가 다시 첫 걸음으로 돌아갑니다(나아갑니다).


  처음부터 하나였던 소리이기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소리를 냅니다. 처음에 하나인 소리이니, 새로운 하나가 태어나서 다시금 새로운 이야기를 빚습니다.


  둘이 된 하나는, 처음에 하나였고, 새롭게 둘로 나뉘어서 온갖 이야기를 빚다가, 가만히 하나로 돌아와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이렇게 마무리를 지으면 어느새 새삼스레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은 새롭게 온갖 이야기를 빚으며, 이내 다시금 하나로 돌아와서 마무리를 지어요.


  먼저 가는 하나가 아니고, 기다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함께 가는 하나요, 함께 움직이는 하나입니다. 이 하나에서 저 하나가 태어났으니, 이 하나가 저 하나보다 낫지 않습니다. 둘은 똑같이 사랑스러운 하나입니다. 둘이 똑같이 사랑스러운 하나이기에, 둘은 짝 소리가 나도록 부딪힐 수 있습니다. 짝 소리가 나도록 부딪힌다고 할 적에는 기쁨으로 새롭게 하나가 되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기쁨으로 새롭게 하나가 되는 사랑일 때에 이야기가 태어나듯이 새로운 목숨과 삶이 태어납니다. 짝짓기라고 할까요. 짝을 짓는다고 할까요.


  ‘짝짓기’란 둘이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짝짓기라는 말마디는, 둘이 새롭게 하나가 되어 사랑을 지으려는 몸짓을 가리킵니다. 짝짓기는 ‘살섞기’ 같은 놀음놀이가 아닙니다. 짝짓기는 처음부터 하나인 둘이 새롭게 하나가 되도록 돌아와서 수없고 끝없으며 가없는 이야기를 빚으려는 몸짓이요 꿈이며 사랑입니다. 온몸과 온마음이 사랑으로 어우러질 때에 꿈이 태어나고, 이 꿈이 바야흐로 삶이 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면서 사랑을 속삭일 때에 생각 한 줌이 씨앗으로 자라서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 삶을 이룹니다. 마음에 심는 사랑이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기운이 되고, 몸을 일으키는 기운은 새로운 숨결로 거듭나서 온갖 것을 짓는 삶으로 거듭납니다.


  이리하여, 그대는 나요, 나는 그대입니다. 그대는 나한테서 나오고, 나는 그대한테서 나옵니다. 그대는 나를 이루는 사랑이고, 나는 그대를 이루는 사랑입니다. 그대는 내 꿈이고, 나는 그대 꿈입니다. 그대와 나 사이에는 바람이 한 줄기 붑니다. 나와 그대 사이에는 꽃 한 송이가 피도록 햇빛 한 줄기가 드리웁니다. 우리는 꿈을 꾸는 한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짓는 한마음입니다. 우리는 삶을 가꾸는 한넋입니다. 4348.3.15.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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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2 수수께끼 놀이 하자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수수께끼는 내가 스스로 내서, 내가 스스로 풉니다. 수수께끼는 남이 나한테 내지 않습니다. 수수께끼는 남이 내 몫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남이 내 수수께끼를 슬기롭게 풀어 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남이 풀어 준 대로 길을 가지 않아요. 나는 내가 스스로 푸는 결대로 하나하나 살피면서 내 길을 갑니다.


  ‘묻는’ 사람이 ‘안다’고 했습니다. 물어 볼 수 있는 사람이 알아볼 수 있습니다.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이 스스로 수수께끼를 짓고, 궁금하게 여기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를 얻습니다.


  길은, 길을 찾으려는 사람이 찾습니다. 길은, 길을 걸으려는 사람이 걷습니다. 길은, 길을 짓는 사람이 스스로 지어서 닦고 돌봅니다.


  삶은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실마리를 하나 풀어서 이 수수께끼를 끝마쳤구나 싶으면, 어느새 곧바로 새로운 수수께끼가 나한테 찾아옵니다. 나는 이 수수께끼를 풀면서 저 수수께끼로 나아가고, 저 수수께끼를 풀면 새롭게 이 수수께끼로 나아갑니다. 언제나 새로운 수수께끼가 깨어납니다.


  수수께끼가 없는 삶이라면 삶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서 목숨을 잇는 까닭은, ‘삶 = 수수께끼’이기 때문입니다. 수수께끼가 없으면 우리 목숨은 곧장 끝나요. 궁금한 이야기가 없으면 삶이 아닌 죽음이고, 궁금한 이야기가 없는 채 목숨만 잇는다면, 삶에 아무런 보람도 재미도 기쁨도 웃음도 노래도 없습니다. 궁금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내 하루에 보람과 재미와 기쁨과 웃음과 노래가 피어납니다. 궁금해 하면서 길을 찾고, 궁금하기 때문에 길을 열며, 궁금한 꿈이 바야흐로 삶꽃으로 피어나도록 하려고 길을 걷습니다.


  궁금함이 없으니 ‘딴 재미’를 찾으려고 여러 가지 ‘여흥·오락·여가·쾌락’으로 나아갑니다. 궁금함이 없어 ‘딴 재미’를 찾으려고 여러 가지 ‘여흥·오락·여가·쾌락’으로 가지만, ‘여흥·오락·여가·쾌락’을 붙잡고 또 붙잡더라도 보람이나 기쁨이나 웃음이나 노래가 흐르지 않습니다. 자꾸자꾸 다른 오락이나 쾌락으로 나아가지만, 내 마음을 채우지 못합니다. 온갖 여흥과 여가로 내 하루를 가득 채우려 하지만, 하루를 빡빡한 일정으로 채운들 이튿날이 되면 모든 것은 다시금 물거품처럼 됩니다. 여흥도 오락도 여가도 쾌락도 ‘소비’이기 때문에, 내 삶을 못 채웁니다. ‘소비’는 쓰고 없어지면서 쓰레기로 남기 때문에, 내 삶을 넉넉하게 북돋우지 않습니다.


  돈이 많기에 넉넉한 삶이 아닙니다. 궁금해 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넉넉한 삶입니다. 돈이 많아도 쓸 줄 모르면 아무런 재미도 보람도 찾을 수 없습니다. 궁금해 하는 마음이기에, 스스로 길을 찾으면서 재미를 누리고 보람을 얻습니다. 궁금해 하는 마음은 이윽고 꿈결로 닿고, 꿈결로 닿는 마음은 시나브로 사랑에 이릅니다.


  수수께끼 놀이는 스스로 삶을 찾으려는 기쁜 몸짓입니다. 수수께끼 삶은 스스로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고운 노래입니다. 내 목소리를 내가 들으면서 기쁩니다. 내 웃음을 내가 느끼면서 아름답습니다. 내 눈빛을 내 숨결이 바라보면서 사랑스럽지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는 없습니다. 풀지 않는 수수께끼만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없습니다. 풀려는 마음이 없을 뿐입니다. 4348.3.11.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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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1 ‘일’과 ‘직업’



  한국말사전에서 ‘일’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으로 풀이하고, ‘직업(職業)’이라는 낱말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로 풀이합니다. 아마 오늘날 사회에서는 이렇게 풀이할 만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직업’은 모르되, ‘일’을 “대가를 받으려고 하는 활동”으로 풀이를 해도 될는지 궁금합니다.


  ‘일’이라는 낱말은 여러 곳에서 씁니다. 이 낱말을 ‘직업’을 가리키는 자리에서도 쓸 수 있습니다만, ‘일’은 처음부터 ‘직업’을 가리키는 자리에는 안 썼습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써서 움직이는 모든 삶을 가리켜 ‘일’이라 했어요. 이리하여, 아이한테는 ‘놀이 = 일’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네, 심심하구나.” 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생기지 않거나,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거나, 아무런 움직임이 없을 때에도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흐름과 움직임이나 몸짓이 나타날 때에 비로소 ‘일’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스스로 움직여서 무엇을 이루면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직업’이나 ‘노동’이기 때문에 ‘일’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어떤 것을 이루거나 지을 적에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이나 ‘옛 일’을 돌아봅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묻고, ‘도울 일’을 찾습니다. ‘기쁜 일’을 함께 기쁘게 여기고, ‘슬픈 일’을 같이 슬프게 삭입니다. 꾸짖거나 나무랄 일이 있을 테고, 북돋우거나 살릴 일이 있을 테지요. ‘네가 다녀오면 될 일’이라든지 ‘손수 나무를 심으면 될 일’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이 있어’야 삶이 있습니다. 노동을 하거나 직업이 있어야 삶이 있지 않아요. ‘일이 있어’서 내 몸과 마음이 움직일 때에 삶이 있습니다.


  돈을 벌어야 삶이 있지 않습니다. 돈이 있어야 한다면 돈이 있도록 하면 됩니다. 우리가 일을 할 적에는 돈 때문에 하지 않습니다. 오직 삶 때문에 일을 하고, 오로지 삶을 가꾸고 지어서 아름답게 하루를 누리려는 뜻에서 일을 합니다. 그러니,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삶이 즐거우면서 돈도 저절로 따라옵니다. 기쁘게 일하는 사람은 삶이 기쁘면서 돈도 찬찬히 따라오지요. 고되게 일하는 사람은 삶이 고될 뿐 아니라 돈도 고되게 들어와요. 힘겹게 일하는 사람은 삶이 힘겨운데다가 돈도 힘겹습니다.


  일을 찾으려 한다면, 먼저 삶을 어떻게 가꾸려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지어서 누리려고 하는 삶을 먼저 찬찬히 생각해서 알뜰살뜰 가꾸어야 합니다. 삶을 그림으로 아름답게 그릴 때에, 내가 할 일이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삶을 그림으로 즐겁게 그리기에, 내가 할 일이 즐겁게 나타납니다. 삶을 그리지 않고 ‘일거리’를 찾는다면, 직업이나 노동은 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이리하여 돈은 좀 벌거나 만질는지 모르나, 막상 ‘무엇을 해야 내 삶이 기쁘거나 아름답거나 보람이 있는지는 모르는’ 모습이 되고 말아요. 생각이 없이 돈만 벌어서 무엇을 할까요? 삶을 그리지 않고 돈만 많이 모은 사람은 무엇을 할까요?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고 하는 옛말은, 생각을 해서 삶을 그리는 사람만 ‘삶을 누리’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고되거나 벅찬 일이란 없습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 일이 고되거나 벅찹니다. 지겹거나 따분한 일이란 없습니다. 아무런 꿈이 없으니 지겹거나 따분합니다. 귀찮거나 성가신 일이란 없습니다. 아무런 사랑이 없으니 귀찮거나 성가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삶을 그리고, 꿈을 지으며, 사랑을 길어올려야 합니다. 바로 내 마음속에 삶을 그려서 담고, 꿈을 지어서 놓으며, 사랑을 길어올려서 가꾸어야 합니다. 이때에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아름다운 손길을 타면서 따사롭고 넉넉하게 이루어집니다. 4348.3.14.흙.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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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0 숨으로 쉬는 바람



  우리는 ‘살려’고 ‘숨’을 쉽니다. 그렇지만, 막상 ‘살려’고 하는 우리들이면서, ‘살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일은 드뭅니다. 그냥 삽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숨을 쉬기는 하지만, 정작 숨을 쉰다고 느끼거나 생각하면서 숨을 쉬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그냥 숨을 쉽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삶을 이루는 수수께끼가 있다고 느낍니다.


  살면서 ‘삶’을 늘 느끼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살지만 ‘삶’을 거의 안 느끼거나 아예 생각조차 못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을 늘 느끼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아침을 새로 맞이할 때마다 그야말로 ‘새로운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삶을 늘 못 느끼거나 안 생각하는 사람은, 아침을 다시 맞이할 때마다 그야말로 ‘다시 찾아온 아침’에 해야 하는 수많은 일을 떠올리면서 바쁩니다.


  삶을 생각하는 사람은 새롭게 하루를 삽니다. 삶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똑같은 하루를 다시 보냅니다. 이와 같은 얼거리로, 숨을 쉬는 일에서도, 숨을 늘 스스로 바라보고 제대로 쉬는 사람은 내가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마음을 가꾸는 숨결이 어떠한 바람결인가를 돌아보면서 내 살결이 늘 새롭게 피어나도록 북돋웁니다. 숨을 늘 안 보고 안 느끼면서 그냥 쉬기만 하는 사람은 내가 몸으로 받아들이는 숨결로 마음을 가꾸는지 안 가꾸는지 모르는 채 그저 하루를 보내기만 합니다.


  숨을 안 쉬면 죽기 때문에 숨을 쉬어야 합니다. 숨을 안 쉬면 죽기 때문에, 숨만큼 사람한테 대수로운 것이 더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수로운 숨을 제대로 바라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몹시 드뭅니다. 숨을 잊고 숨결을 잃습니다. 숨을 모르고 숨결을 안 배웁니다. 숨을 등지고 숨결을 제대로 안 익힙니다.


  숨을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은 마음을 제대로 바라봅니다. 숨과 마음을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은 몸을 제대로 바라봅니다. 숨과 마음과 몸을 제대로 바라보기에 삶을 이루고, 숨과 마음과 몸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기에 삶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럭저럭 살림을 꾸리고 밥을 먹는다고 해서 ‘삶’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먹고사는 일을 한다고 해서 ‘삶을 짓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삶을 짓는다고 할 적에는 날마다 새로운 몸짓으로 새로운 웃음과 노래를 짓는 이야기를 이룹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온삶 가운데 가장 바탕이 되면서 가장 대수로운 일부터 제대로 바라보면서 해야 합니다. ‘숨쉬기’부터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냥 버릇이 되거나 길든 채 마셨다가 내쉬는 숨이 아니라, 제대로 바람결을 느끼고 살피면서 나한테 맞아들여야 하고, 나한테 맞아들인 바람결이 우리 몸에서 새로운 숨결로 흘러서 내 마음결을 가꾸도록 새 기운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우리가 숨을 쉴 때에는 ‘바람을 마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람이란 무엇일까요? 바람이란 바로 하늘입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이 바로 바람입니다. 바람은 파란 하늘을 이루는 거미줄 같은 뼈대이면서 바로 하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바람)만 제대로 쉬어도 몸이 아프지 않을 뿐 아니라, 숨을 제대로 쉴 때에 몸이 무럭무럭 자라요. 아이들이 자라는 까닭은 밥을 먹기 때문이 아니라, 숨을 쉬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떤 바람(숨)을 먹느냐에 따라서 몸과 마음이 달라집니다. 이리하여, 밥은 영양에 맞추어 먹더라도, 바람이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서 사는 아이는 몸이 여리거나 파리하지요. 바람이 제대로 들면서 싱그러운 곳에서 사는 아이는 밥을 적게 먹어도 몸이 튼튼하면서 씩씩해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른은 으레 ‘더 낫다는 학교’를 찾아서 집을 옮기려 합니다. 아이가 다닐 학교와 직장을 살펴서 ‘집 사고팔기’를 되풀이합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누리면서 새롭게 지을 삶을 생각하는 ‘보금자리 가꾸기’에 마음을 쏟는 어른이 너무 드뭅니다. 이러니, 아이는 아이대로 바람다운 바람을 못 쐬고, 어른은 어른대로 쳇바퀴질 같은 회사를 다니며 돈만 버느라 바람다운 바람을 못 마십니다. 도시 문명사회에서는 그저 경쟁과 다툼과 경제와 지식과 졸업장만 판칩니다. 삶다운 삶이 없이, 사랑다운 사랑조차 싹트지 못해요. 바람결이 아무런 힘을 못 쓰니까요.


  바람 한 줄기가 내 둘레에서 흐르다가 내 몸으로 들어와서 온몸을 휘감은 뒤 다시 불길처럼 내 몸 바깥으로 터져나가도록 숨을 쉬어야 합니다. ‘숨쉬기’가 곧바로 ‘숨 터뜨리기’로 거듭나야 합니다. 불 같은 바람을 마시고 뱉으면서, 온몸에 파란 거미줄을 이루어 나 스스로 새로운 하늘이 되어야 합니다.


  숨은 곧 바람이고, 바람은 곧 하늘숨입니다. ‘숨 = 바람 = 하늘숨’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을 숨쉬는 사람이란 누구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숨을 쉬는 목숨인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하늘을 마시는 사람이 바로 ‘님’입니다. 바람숨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님, 그러니까 ‘하느님’입니다. 내 가슴속에 님이 깃들고, 내 가슴속에 깃든 님을 깨우는 바람을 마시기에, 이 바람이 새로운 숨결이 되어, 내 마음에 새로운 생각을 심을 수 있고, 이 새로운 생각이 모든 새로운 것을 이루어, 바야흐로 내 삶이 깨어납니다.


  숨을 쉬면서 모든 것을 짓습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모든 삶을 짓습니다. 하늘을 머금으면서 모든 꿈을 짓습니다.


  하느님이 온누리를 지었다는 뜻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이 땅은 다른 어떤 놀라운 ‘남’이 짓지 않았습니다. 바로 내가 스스로 지었습니다. 아름다운 숲도 내가 지었고, 끔찍한 전쟁무기도 내가 지었습니다. 사랑스러운 곁님과 이루는 보금자리도 내가 지었고, 무시무시한 차별·경쟁·신분·노예도 내가 지었습니다. 좋고 나쁜 모든 것을 바로 내가 지었습니다.


  숨을 엉터리로 쉴 때에 내가 모든 엉터리를 짓습니다. 숨을 제대로 쉴 때에 내가 모든 아름다움을 짓습니다. 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람과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람과 하늘을 마시는 내 몸과 마음을 제대로 읽고 느껴서 알아야 합니다.


  ‘숨쉬기’는 ‘숨보기’라고 할 만합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숨을 내 눈과 마음으로 함께 바라봅니다. ‘몸에 있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바람결이 있고, ‘온눈(제3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바람결이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눈을 함께 써서 바람결을 읽고 느껴서 삭입니다. 바람결이 불꽃처럼 피어나도록 북돋웁니다.


  한숨을 쉬면서 새숨으로 나아갑니다. 한숨에서 멎으면 제자리걸음이 되면서, 그저 무거운 몸뚱이가 됩니다. 한숨을 쉬었으면 바로 ‘두숨’, 곧 ‘새숨’으로 뻗어야 합니다. 두숨이나 새숨으로 뻗지 않고 그저 한숨만 내쉬기에, 내가 지은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이 걱정과 근심과 괴로움과 고단함만 찾아듭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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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9 별이 보이는 눈



  별은 늘 있습니다. 지구 바깥에 수많은 별이 늘 있습니다. 지구는 온별누리(온 은하계)를 이루는 별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별에서도 수많은 다른 별을 보기 마련이고, 지구별에서도 수많은 다른 별을 보기 마련입니다.


  지구별 가운데 바깥별을 알아보거나 살펴보기 어려운 곳이 차츰 늘어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구별에 있는 땅바닥에서 하늘을 올려다볼 적에, 하늘을 이루는 바람이 매캐하거나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유리창이 지저분하면 유리창 너머가 잘 안 보이듯이, 하늘을 이루는 바람이 맑거나 싱그러운 바람이 아니라, 온갖 매연과 쓰레기로 얼룩진 지저분한 바람이 되면, 우리는 이 지구별에서 다른 바깥별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지구에서 다른 별을 못 본다고 하더라도 다른 별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별이 안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별을 못 보는 채 지내다 보면, 어느새 별을 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아무런 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내가 별을 못 볼 뿐’이거나 ‘내가 별을 안 볼 뿐’이지만, 마치 ‘별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 됩니다.


  어느 곳에서는 별을 거의 못 보고, 어느 곳에서는 별을 제법 많이 보며, 어느 곳에서는 쏟아지듯이 넘치는 별을 봅니다. 터에 따라 별을 달리 본다고 할 텐데, 꼭 터에 따라 별을 달리 보지는 않습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먼 데를 더 잘 보듯이, 눈이 밝다면 매캐한 바람이 가득한 도시에서도 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유리창이 웬만큼 지저분해도 눈이 밝으면 유리창 너머를 알아볼 수 있어요.


  ‘별이 보이는 눈’과 ‘별이 안 보이는 눈’이 있습니다. ‘별을 생각하는 눈’과 ‘별을 잊은 눈’이 있습니다. 별을 보거나 생각하는 눈이라면, 마음을 마음으로 바라보려는 눈입니다. 별을 안 보거나 잊는 눈이라면, 마음을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눈입니다.


  별은 늘 온별누리에 가득합니다. 사람한테는 누구나 마음이 있습니다. 별이 있어도 별을 보지 않거나 느끼지 않는다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이 있어도 이들 가슴속에서 흐르는 ‘마음을 안 읽거나 못 읽는다’고 할 만합니다.


  남다른 재주나 기운이 있어야 별을 보거나 마음을 볼까요?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다른 재주나 기운은 누구한테 있을까요? 몇몇 사람한테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생각대로 몇몇 사람한테만 남다른 재주나 기운이 있을 테고, 바로 나한테도 남다른 재주나 기운이 있다고 여긴다면 나는 나대로 남다른 재주나 기운을 쓸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바라보기에 별을 봅니다. 마음을 기울여서 바라보기에 별을 봅니다. 온마음을 열어서 이웃을 마주하려 하기에 서로 마음을 읽고 나눕니다. 온마음을 열지 않기에 이웃하고 나란히 있어도 서로 어떤 마음인지 모릅니다. 별을 보는 눈은 마음을 보는 눈입니다. 별을 보지 않는 눈은 마음을 보지 않는 눈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기에 봅니다. 몸에 있는 눈을 뜨기에 여러 가지를 손에 만지면서 바라볼 수 있고, 마음에 있는 눈을 뜨기에 온갖 것을 사랑으로 어루만지면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두 눈으로만 별을 보려 한다면, 바람이 매캐한 곳에서는 어떠한 별도 못 볼 수 있으나, 마음에 깃든 눈으로도 별을 보려 한다면, 바람이 매캐한 곳에서도 뭇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우리 아이’나 ‘우리 님’을 알아보려 한다면, 알아볼 수 있다면, 알아보며 기쁘다면, 나는 ‘몸눈’뿐 아니라 ‘마음눈’을 떠서 서로 마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읽는 눈은 몸눈이 아닌 마음눈(온눈)입니다. 삶을 읽고, 꿈을 읽으며, 이야기를 읽는 눈도 몸눈이 아닌 마음눈(온눈)입니다. 온눈을 뜨면서 가슴에 별을 담아 새로운 삶을 엽니다. 4348.3.10.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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