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68 마루, ‘밀다·미루다’



  ‘갓머리’나 ‘멧마루’나 ‘산마루’ 같은 말이 있습니다. ‘물결마루’나 ‘마루터기’나 ‘고갯마루’나 ‘등마루’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루’는 맨 위쪽 자리를 가리킵니다. 한창 고비에 이른 흐름이나 결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집에서는 방과 방을 잇는 한복판이면서, 집과 마당을 잇는 자리가 ‘마루’입니다.


  가만히 보면, 고갯마루나 물결마루는 ‘가장 높은 곳’이면서, 이곳과 저곳을 잇는 구실을 합니다. 집에서 마루도 이곳과 저곳을 잇는 노릇을 합니다. 이곳과 저곳을 잇되 가장 높이 있는 자리가 마루인 셈입니다.


  마루에 서면 어디나 돌아볼 수 있습니다. 마루에 있기에 모든 일을 환하게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마루에 서지 않으면 내가 있는 자리를 헤아리지 못하고, 마루에 있지 않으면 내 할 일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내 일을 너한테 밉니다. 네 일을 나한테 밉니다. 서로 밀고 당깁니다. 반갑지 않으니 밀어 줍니다. 달갑지 않기에 자꾸 밀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기쁘거나 반갑거나 고마운 선물을 서로서로 밀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밀’지 않고 ‘미루’기도 합니다. 오늘 누릴 삶을 오늘 누리지 않고 다음날로 미루기도 합니다. 내가 할 몫을 스스로 하지 않고, 남한테 미루기도 합니다.


  마루에 서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남한테 밀거나 미루지 않습니다. 마루에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을 스스로 맞아들여 건사합니다. 마루에 서지 않으니 으레 이쪽으로 저쪽으로 자꾸 밀고 맙니다. 마루에 있지 않은 탓에 지레 발목을 잡아서 남한테 미루거나 다른 날로 미룹니다.


  내 몸을 지키려면 내가 손수 밥을 떠서 먹어야 합니다. ‘밥술 뜨기’를 남한테 미루면 어떻게 될까요. 내 밥을 내가 안 먹고 미루면, 내 몸은 어떻게 될까요. 나는 바람을 마셔야 목숨을 잇습니다. 그런데 내가 ‘바람 마시기(숨쉬기)’를 안 하고 미룬다면, 내 숨을 내가 안 마시고 너더러 마시라고 한다면, 이렇게 미루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미루는 삶은 ‘죽음’으로 갑니다. ‘미루기’는 곧 ‘죽음’입니다. 나한테 오는 것을 너한테 민다고 하면, 이때에는 죽음길로 가지는 않으나 죽음길과 가까이 다가섭니다. 왜 남한테 밀까요. 남한테 밀 까닭이 없고, 남을 밀어서 어느 쪽으로 보낼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받을 것은 기쁨이든 슬픔이든 내가 받으면 됩니다. 내가 누릴 것은 선물이든 가시밭길이든 스스럼없이 누리면 됩니다. 나는 모든 삶을 누리면서 온사랑을 나눕니다.


  마루에 서야 합니다.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마루를 보아야 합니다. 미루려는 생각을 지워야 합니다. 마루에 깃들어 아름다운 사랑으로 삶을 지어야 합니다. 미루고 미루다가 그만 내 삶을 스스로 놓치면서 죽음길로 가는 어리석은 짓은 그쳐야 합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여겨 미룰 수 있겠지요. 그러면, 언제 때가 올까요. 잘 하든 잘 못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하면 되고, 잘 못하면 잘 못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굳이 미루어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겪거나 치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잘 하거나 무엇을 잘 못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언제나 스스로 온몸과 온마음으로 마주하면서 겪거나 치를 때에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보’아서 ‘내가 나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못 보고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나는 내 삶을 제대로 가꾸지 못합니다.


  마루에 서는 사람만이 사람다운 삶으로 사랑을 짓습니다. 마루에 깃들면서 삶을 지으려는 사람일 때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사랑을 나누면서 하루를 새롭게 엽니다. 4348.3.5.나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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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7 별, 깨어나기



  하늘을 보면 ‘별’이 있습니다. 무척 멀다 싶은 곳에 별이 있습니다. 별이 얼마나 있는지 숫자를 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별이 얼마나 있는지 숫자로 세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별을 볼 뿐이고, 별을 생각할 뿐이며, 별을 마주할 뿐입니다.


  먼 옛날에 어떤 사람이 ‘별’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생각해서 이 이름을 붙였을까요? 영어로 ‘star’라는 낱말은 언제 누가 처음으로 이 이름을 생각했을까요? 영어에서는 ‘star’라는 낱말이 ‘astro’하고 같다 하며, ‘concider’라는 낱말도 ‘별(star)’과 얽힌다고 합니다. 별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가꾸기에 ‘concider’라는 낱말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흔히 “별을 헤아리다”처럼 말합니다. 옛 시인이 “별을 헤아리며”처럼 말하기도 했지만, 시인이 아닌 여느 아이와 어른 누구나 “별을 헤아린다”고 말합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누구나 별을 ‘헤아린다’고 해요. 그러면 ‘헤아리다’는 무슨 뜻일까요? ‘헤아리다’는 ‘헤다’에서 왔고, ‘헤다’는 ‘세다’에서 왔습니다. ‘헤아리다’는 첫째 뜻이 “숫자를 알아보려 하다”입니다. ‘헤아리다’ 둘째 뜻은 “어느 것을 미루어서 생각하다”입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에서나 영어에서나 ‘별·star’는 말밑이나 밑쓰임이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생각’과 ‘셈’과 ‘헤아림’은 모두 같은 말이기 때문에, 한국말에서도 ‘생각하기’란 ‘별을 바라보면서 하늘 흐름을 살핀다’는 소리가 되고, 별을 읽을 줄 알 때에 ‘생각할’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을 때에 ‘삶을 알아보거나 읽는다’고 말할 만합니다.


  별을 바라볼 때에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저 보면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뭇느낌을 마음에 품지 않은 채 그저 별을 바라보면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좋음도 나쁨도 아닌 마음으로 별을 바라볼 때에 깨어날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도 따지지 않고, 미움과 싫음과 반가움 같은 마음도 없이, 오로지 고요하면서 차분하고 밝은 마음으로 별을 바라볼 때에 깨어날 수 있습니다.


  고요누리가 되는 넋으로 별을 헤아립니다. 어둠도 빛도 아닌 눈길로 별을 헤아립니다. 별을 바라보는 때는 밤(어둠)입니다. 낮에도 틀림없이 별이 저 먼 하늘에 있으나, 햇빛에 우리 눈이 가려지니 별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몸에 달린 눈’이 아닌 ‘마음으로 뜨는 눈’으로 별을 헤아린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밤이나 낮이나, 별빛과 별결과 별살과 별넋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해한테서 빛과 볕과 살이 나오듯이, 별한테도 똑같이 빛과 볕과 살이 있을 테지요. 곧, 지구별에서는 해님이 베푸는 빛과 볕과 살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기운을 북돋웁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구별에서 다른 수많은 뭇별이 베푸는 빛과 볕과 살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깨어난다는 뜻입니다.


  별을 헤아리기에, 우리가 이 몸으로 선 지구별을 제대로 헤아립니다. 별을 헤아리지 않기에, 우리는 우리 몸도 제대로 못 헤아리고, 지구별도 제대로 안 헤아립니다. 지구별도 똑같은 별이기에, 온별누리에 있는 가없는 별을 헤아리는 넋으로 지구별을 헤아려야 나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나와 마주한 너를 제대로 바라봅니다.


  별을 헤아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몇 가지 지식이나 철학이나 학문이나 종교는 거머쥘는지 모르나, 별을 모르니 삶을 모르고 사랑을 모르며 꿈을 모르지요. 천문학만 되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점성술만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학學(굳은 철학)’이나 ‘-술術(굳은 재주)’에서 그치지 말고, ‘열린 배움’과 ‘트인 손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기쁘게 배울 때에 배움입니다. 누구한테서나 배울 때에 배움입니다. 어디에서나 지을 때에 손길입니다. 언제라도 지을 때에 손길입니다.


  지구별과 가까이 있는 달과 해와 ‘해누리(태양계)’에 있는 모든 별부터 제대로 차근차근 헤아리면서, 우리는 나를 이루는 ‘조각(별 조각)’을 살필 수 있습니다. 내 몸을 이루는 세포 하나도 ‘별’입니다. 온별누리에 있는 별은 별 하나하나가 모여서 온별누리(은하계)를 이루고, 내 몸을 이루는 세포는, 세포 하나하나가 모여서 ‘내 몸이 됩’니다. 별이 곧 삶이고, 별이 곧 목숨이며, 별이 곧 꿈이자 사랑입니다. 4348.3.17.불.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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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6 알·애벌레·번데기·나비



  알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알입니다. 알은 으레 풀잎이나 나뭇잎에 처음 자리를 잡습니다. 요즈음은 아파트 벽이나 쇠기둥에도 알이 붙을는지 모르나, 알을 낳는 ‘어미’는 풀잎이나 나뭇잎이 아니라면 아무 데나 알을 두지 않습니다.


  알은 따스한 볕을 받으면서 어느 날 조용히 깨어납니다. 조용히 깨어난 알에서는 아주 조그마한 벌레가 나옵니다. 아주 조그마한 벌레는 ‘아기 벌레’라 할 만합니다. ‘애벌레’입니다. 애벌레는 볼볼 기면서 알껍질부터 갉아서 먹습니다. 신나게 먹은 뒤 쉬고, 다시 먹습니다. 알이 붙은 풀잎이나 나뭇잎도 먹습니다. 신나게 먹고 또 먹습니다.


  잎사귀를 갉아먹는 애벌레는 잎똥을 눕니다. 푸른 빛깔이 도는 똥을 누면서 잎사귀를 꾸준히 먹습니다. 이제 애벌레는 조금 자랍니다. 허물을 벗습니다. 조금 큰 애벌레가 됩니다. 조금 큰 애벌레가 되면 잎사귀를 더 많이 먹습니다. 잎사귀를 더 많이 먹으니, 풀똥을 더 많이 누고, 풀똥을 더 많이 누던 어느 날 다시 허물을 벗어 더욱 큰 애벌레가 됩니다.


  더욱 큰 애벌레는 바지런히 잎사귀를 갉아먹습니다. 이러던 어느 날, 몸이 무척 무겁습니다. 커다란 덩치만큼 굼뜨는 몸은 아닙니다. 어쩐지 잠들고 싶습니다. 아니, 잠들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듯합니다. 맛난 잎사귀를 더 먹지 않습니다. 마땅한 자리를 찾아 꼬물꼬물 기어서 찰싹 달라붙습니다. 이윽고 몸이 딱딱하게 굳습니다. 어느덧 고치가 생깁니다.


  고치에 깃든 애벌레는 조용히 고즈넉히 잠듭니다. 잠든 애벌레는 아주 천천히 번데기로 바뀝니다. 번데기로 바뀐 몸은 그대로 고치에 머뭅니다. 번데기로 몸이 바뀐 줄 깨달은 애벌레는 ‘내가 어디로 가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잠듭니다.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없이 깊디깊이 잠이 듭니다.


  잎사귀를 잊고, 애벌레 몸뚱이를 잊으며, 번데기가 된 새로운 몸까지 잊은 이 아이는 새로운 꿈을 꿉니다. 꿈결에 바람을 타고 하늘을 가르는 누군가를 봅니다. 바람결이 몹시 보드라우면서 재미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꿈속에서 바람을 부릅니다. 번데기라는 옷(몸)을 입은 아이는 바람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바람아, 나도 네 등을 타고 하늘 구경을 해도 되겠니?” 바람은 고개를 살레살레 젓습니다. “아니야, 나는 아무도 내 등에 태우지 않는단다. 하늘 구경을 하고 싶다면, 네가 스스로 하렴.” “내가 어떻게 하늘을 나니?” “그래, 못 나는구나. 못 날면 할 수 없지. 못 날면 하늘 구경을 못 하지.” “그래도 하늘 구경을 하고 싶어.” “네가 살짝 등을 내 주면 될 텐데.” “아니야. 나는 아무도 내 등에 태우지 않아. 다만, 나는 누구나 하늘로 오르려 하면 함께 놀지. 너도 얼른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아, 졸립다. 더 자야겠어. 더 잘 테니 이따가 보자.” 바람과 꿈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는 더욱 깊이 잠듭니다. 얼마나 잤을까요. 어느 만큼 꿈속을 헤매었을까요. 번데기는 갑자기 온몸이 간질간질합니다. 고치가 답답합니다. 뭔가 다 벗어 버리고 싶습니다. 갑갑한 껍데기는 이제 내려놓고 싶습니다.


  고치가 갈라집니다. 번데기라는 옷(몸)을 입은 아이는 바깥으로 나옵니다. 눈이 부십니다. 퍽 오랫동안 깜깜한 고치에 깃들어 잠을 잤으니, 눈이 따갑습니다. 게다가 몸이 축축합니다. 내 몸이 왜 이리 축축한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이는 갑자기 등짝이 아픕니다. 등짝이 쩍 갈라집니다. 쩍 갈라진 등짝에서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 아이가 나옵니다. 딱딱한 껍데기를 벗고 바깥으로 나온 아이는 몹시 홀가분합니다. 다만, 눈이 부시고 몸이 축축하니, 눈을 쉬고 몸을 말려야 합니다.


  한동안 잎사귀에 매달려 눈을 천천히 뜨고 몸을 말린 아이는 문득 ‘내 몸이 예전하고 사뭇 다른’ 줄 알아차립니다. 뭘까요? 무엇일까요? 눈을 떠서 하늘을 볼 수 있고, 몸이 다 말라서 가벼운 아이는, 잎사귀를 붙잡은 발을 모두 놓습니다. 어느새 하늘을 가르면서 바람 옆을 함께 납니다. 어, 이 아이 등에 날개가 달렸습니다. 이 아이는 나비입니다. 조그마한 알에서 애벌레를 지나고 번데기를 거쳐서 새로 태어난 나비입니다. 나비는 바람 등짝을 간질이면서 날개를 팔랑입니다. 바람은 새로 찾아온 동무가 반갑습니다. 오래오래 함께 하늘을 누빕니다. 파란 하늘에서 파란 숨을 마시면서 새롭게 삶을 누립니다. 4348.3.4.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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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5 건너뛰기, 제자리뛰기, 멀리뛰기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차근차근 한 발 두 발 떼면서 나아가지만, 어느 사람은 두 발이나 석 발을 한꺼번에 건너뛰면서 나아갑니다. 한 발씩 떼는 사람 눈길로 보자면, 저 사람은 나와 같이 한 발씩 떼지 않으니 ‘건너뛰기’를 하는 듯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저곳으로 한달음에 나아가는 사람 눈길로 보자면, 한 발씩 떼는 사람은 ‘제자리뛰기’를 하는 듯 느낄 수 있습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휙휙 지나가려고 하는 건너뛰기라 한다면, 제대로 알 길이 없습니다. 홀가분한 몸과 마음이 되어 마치 나비처럼 훨훨 날면서 하는 건너뛰기라 한다면, 제대로 알면서 길을 갑니다.


  건너뛸 수 있는 사람은 가로지릅니다. 건너뛰지 못하는 사람은 가로지르지 못합니다. 건너뛰지 못하니 ‘높은 울타리’에 스스로 막혀서 이곳으로 고이거나 저곳으로 고입니다. 건너뛰는 사람한테는 울타리가 없으니 ‘높은 울타리’도 없고 ‘낮은 울타리’조차 없습니다. 언제나 건너뛰는 만큼, 고일 만한 웅덩이마저 없습니다. 이리하여, 이쪽과 저쪽 사이를 홀가분하게 가로지르면서 한결 너른 품으로 넉넉하게 삶을 지을 수 있습니다.


  건너뛰어서 가로지르는 사람은 넘나듭니다. 고이지 않고, 울타리가 없으니, 언제 어디에서나 넘나들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을 넘나들고, 오늘과 모레를 넘나듭니다. 거칠 것이 없고, 거리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막혀야 할 것이 없고, 멈추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넘나들 수 있을 적에는 바람처럼 홀가분합니다. 바람처럼 홀가분하기에 어디에서나 언제나 산들산들 넘나듭니다.


  제자리뛰기를 하는 사람도 땀이 납니다. 아니, 제자리뛰기를 하는 사람은 땀이 납니다. 건너뛰는 사람은 땀이 나지 않습니다. 바람을 가르면서 달리거나 날아가니 땀이 나지 않습니다. 바람을 가르지 못하고 제자리에 고여서 폴짝거리는 사람은 땀을 옴팡 흘리는데, 막상 땀은 흘리더라도 아무것을 이루지 않습니다. 제자리에서 뛰느라 제풀에 지치고, 제자리뛰기를 하느라 바빠 둘레를 살피지 못합니다. 업은 아기를 허둥지둥 다른 데에서 찾고야 맙니다.


  제자리뛰기에서 벗어나려고 멀리뛰기를 하려 합니다. 그동안 오래 고였으니 멀리 뛰쳐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멀리 뛰어야 할까요. 1미터를 뛰면 멀리 뛴 셈일까요. 100미터를 뛰면 멀리 뛴 셈일까요. 1.1미터를 뛰거나 99미터를 뛰면 어느 만큼 뛴 셈일까요.


  멀리뛰기를 한대서 건너뛴다고 할 수 없습니다. 먼 곳까지 뛰기는 했으나, 울타리 안쪽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일 수 있어요. 멀리뛰기를 했다지만 우물에 스스로 갇힌 채 뛰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제대로 뛰려면 옷을 벗어야 합니다. 제대로 뛰려면 모든 껍데기를 벗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뛰어서 모든 때와 곳과 울타리와 웅덩이를 가로지르거나 넘나들려 한다면, 모든 앙금을 털고 새로운 숨결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바람을 마시면서 새로운 넋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무턱대고 건너뛰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건너뛰면, 어디에서 내려앉아야 할는지 모릅니다. 홀가분하게 건너뛸 수 있어야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압니다.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아는 몸짓으로 홀가분하게 건너뛰어야, 어디에서 내려앉아 새로운 씨앗으로 뿌리를 내려 씩씩하게 자랄 나무가 될는지 똑바로 알아차립니다. 4348.3.17.불.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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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4 자전거



  자전거는 ‘스스로 구르는 바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 스스로 구르는가 하면, 내가 발판에 한 발을 디딜 적에 스스로 구릅니다. 그러니까, 자전거는 ‘스스로 구르는 바퀴’이되, 내가 한 발을 발판에 디뎌야 비로소 스스로 구릅니다.


  내 삶은 내가 짓습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에 아무런 생각을 심지 않으면 나는 내 삶을 못 짓습니다. 내가 내 삶을 지으려면 나는 언제나 맨 먼저 스스로 생각을 품어서 마음에 씨앗으로 심어야 합니다. 이때에 곧바로 내 마음은 내 몸한테 ‘일(놀이)’을 알려줍니다. 내 몸은 내 마음한테서 받은 씨앗(어떤 일이나 놀이를 하라는 뜻)을 받아들여서 곧바로 움직입니다. 내 몸도 자전거와 똑같이 ‘스스로 움직이는 몸’이지만, 마음이 생각을 건네주어야 비로소 ‘스스로 움직이는 몸’이 됩니다.


  자전거는 바람을 가릅니다. 자전거는 바람을 마십니다. 자전거는 바람을 달립니다. 자전거에 몸을 실은 ‘나’는 자전거 발판을 구르면서 어느덧 자전거와 ‘한몸’이 되고, ‘한마음’으로 움직입니다. 이제 나는 스스로 구르는 바퀴요, 스스로 움직이는 몸이며, 스스로 짓는 삶입니다.


  자전거를 달릴 수 있으려면, 두 바퀴로 이 땅에 서야 합니다. 처음에는 새끼 바퀴를 뒷바퀴에 붙일 수 있으나, 이때에는 자전거답게 달리지 못합니다. 아기가 처음에 걸음마를 하듯이, 자전거를 달리기 앞서 새끼 바퀴를 붙여서 ‘걸음마 자전거’로 조금 움직이는 셈입니다. 걸음마를 마친 아기가 걸음을 걷듯이, 새끼 바퀴를 붙인 자전거는 ‘자전거’가 되려고 애씁니다. 마음을 쓰고 몸을 쓰며 기운을 씁니다. 이리하여, 어느 날 비로소 두 바퀴 자전거가 됩니다. 두 발로 이 땅에 우뚝 서서 걷듯이, 걷고 나면 뛰거나 달릴 수 있듯이, 두 바퀴로 오롯이 달릴 수 있는 자전거는, 바야흐로 ‘스스로 구르는 바퀴’로 거듭납니다.


  가만히 선 자전거는 그저 가만히 선 자전거입니다. 가만히 선 자전거는 구르지 않습니다. 생각이 없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저 가만히 있는 사람입니다. 생각을 마음에 심어야 꿈이 자랍니다. 꿈이 자라는 마음일 때에 몸으로 할 일(놀이)이 있습니다. 몸으로 할 일이 생길 때에 비로소 사랑스레 하루를 짓습니다. 사랑스레 하루를 지으니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갑니다.


  자전거 발판을 구르면서 바람을 가르고, 바람을 마시면서, 바람을 달립니다. 내 온몸으로 삶을 지으면서 바람을 가르고, 바람을 마시면서, 바람을 달립니다. 바람을 가르며 내가 갈 곳을 찾습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내가 깃들 보금자리를 살핍니다. 바람을 달리면서 내가 지을 꿈을 이룹니다.


  자전거와 함께 살면서 내 몸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자전거와 하나되면서 내 마음을 새롭게 가꿉니다. 자전거와 한덩이로 달리면서 내 넋은 싱그러운 바람을 타고 언제나 싱그러이 춤을 춥니다. 4348.3.3.불.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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