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57 ‘한꺼번에’와 ‘함께’
우리는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합니다. 이른바 ‘동시다발’이라는 한자말로도 나타낼 수 있는데, 우리는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살면서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합니다. 우리가 선 자리를 현대 물질문명 사회인 오늘날이 아닌, 기원전이나 단군이 나타났을 무렵으로 돌려서 생각해 보셔요. 자, 오천 해 앞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산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무렵 이 땅에는 교통도 통신도 없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말도 안 타고, 고개 너머 다른 마을로 찾아다니지도 않습니다. 아니, 고개 너머에 다른 마을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태어난 마을에서, 또는 내가 태어난 집에서 살 뿐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어떤 말을 쓸까요? 고개 너머에서 누군가 찾아온다면, 우리 이웃과 동무가 고개 너머에 있는데 가끔 우리한테 찾아오는 손님이 된다면, 우리는 서로 어떤 말을 나눌까요?
‘표준말’로는 ‘청미래덩굴’이라고 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표준말로는 이런 이름이 ‘억지스럽게’ 붙습니다만, 이 나무를 가리키는 고장말(사투리)은 대단히 많습니다. 망개, 맹감, 밍감, 멍감, 명감, 멜대기, 명개, 뭥개, 멍게, 멍개, 멩저남, 땀바구, 깜바구, 퉁갈, 늘렁감, 버리둑덤풀, 처망개, 망개딩이, 망개덤불 …… 끝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름이 나올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셔요. 어떻게 고장마다 고을마다 마을마다 수많은 이름이 태어날 수 있을까요? 저마다 제 삶자리에서 제철을 살피면서 제 눈길로 바라보고 제 마음으로 제 생각을 짓기 때문입니다. ‘고장말(사투리)’이란 무엇인가 하면, “내가 태어나서 삶을 짓는 곳에서 손수 지은 말”입니다. ‘표준말이 아닌 말’이 사투리가 아니라, 손수 삶을 지으면서 지은 말이 사투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표준말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하고, 표준말을 함부로 내세우면 안 되며, 표준말을 앞세워 고장말(사투리)을 몰아내려 하거나 짓밟는 짓을 멈추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는 고장마다 ‘다 다른 사투리’로 엮어서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표준말이란, 정치권력이 우악스럽게 만든 ‘우리 스스로 바보가 되도록 길들이려는 말’입니다.
정치권력은 고장말을 반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장마다 고장말을 쓰면, 말 그대로 ‘오롯한 마을살이(완성된 지방자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마을마다 마을 스스로 삶을 지어서 가꾼다면, 마을사람은 굳이 도시로 올 까닭이 없습니다. 두레와 품앗이가 아름다우니, 사람들은 저마다 태어나 자라는 마을에 그대로 있으면서 삶을 가꾸고 사랑을 꽃피우겠지요. 정치권력은 바로 이 대목을 안 바랍니다. 정치권력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틀에 가두어 똑같은 말만 쓰도록 길들이면서 똑같은 도시문명에 젖어들어서 ‘정치권력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얼거리’를 꾀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부터 모든 말을 ‘다 다른 고장과 고을과 마을과 집에서 한꺼번에’ 터뜨렸습니다. ‘똑같은 것’을 바라보면서 ‘다 다른 말’을 터뜨렸는데, ‘표준말 청미래덩굴’ 하나를 놓고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다 다른 말이면서도 느낌으로는 다 헤아리거나 짚을 수 있을 만큼 닮거나 비슷합니다. 모든 사투리와 고장말이 이와 같아요. 서로 조금만 말을 섞어도 ‘아하, 네가 말하려는 것이 이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을 만합니다.
다 다른 곳에서 ‘한꺼번에’ 터지는 말이요 삶이기에, 다 다른 자리에서 ‘함께’ 짓는 말이면서 삶입니다. 우리는 모든 말을 함께 짓습니다. 우리는 모든 삶을 함께 짓기에, 말도 함께 짓고, 사랑과 꿈과 이야기도 함께 짓습니다. 고장마다 다른 아리랑 노래이지만, 모두 ‘아리랑’입니다. 고장마다 다 다른 〈청개구리〉나 〈해와 달〉이나 〈팥죽 할멈〉 이야기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말씨와 얼거리와 흐름은 조금씩 다 다르면서, 큰 줄거리와 넋과 뜻과 사랑은 모두 같습니다.
씨앗 한 톨에서 싹이 트면서 자라고 또 자라다가 씨앗이 늘고 또 늘면서 숲을 이룹니다. 작은 하나에서 모든 것이 태어납니다. 서로 함께 이루는 한편, 한꺼번에 이룹니다. 나 스스로 내 삶에서 작은 것 하나를 바꾸거나 고치려 하기에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 하나이지만, 이내 큰 것을 거쳐, 모든 것이 새롭게 거듭나요. 처음에는 하나씩 이루는 듯 보일 테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모든 것은 늘 ‘한꺼번에’ 터졌으며, ‘함께’ 흐르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잡습니다. 다 같이 걷는 길입니다. 4348.3.8.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