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58 ‘뛰다’와 ‘달리다’



  한 사람은 뛰고, 다른 한 사람은 달립니다. 한 사람은 높이 솟으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멀리 나아가려 합니다.


  한 사람은 뛰면서 높이 솟으려 하는데, 가슴이 함께 뛰고, 뜻과 생각이 나란히 뜁니다. 뛰기 때문에 처음에는 올라가고, 이내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이윽고 내려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달리면서 멀리 나아가려 하는데, 달리면 달릴수록 더욱 빠릅니다. 빠르게 달리면서 바람을 가릅니다. 달리고 달리니, 내가 처음 있던 이곳에서 더 빠르게 멀어지고, 내가 처음 있던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아가면서, 어느새 저곳에서도 또 새로운 다른 곳으로 나아갑니다.


  한곳에 가만히 있으면서 뜁니다. 한곳에서 노래하며 뜁니다. 한곳에서 웃음을 지으면서 뛰고, 한곳에서 춤을 추어 이야기를 지으며 뜁니다.


  한곳에 가만히 있지 않으면서 달립니다. 한곳에 가만히 있지 않으면서 노래합니다. 한곳에서 다른 새곳으로 나아가면서 웃음을 짓고, 새로운 춤이 잇달아 터지면서 새로운 이야기도 함께 터져나옵니다.


  우리 숨은 늘 쿵쿵 뜁니다. 때로는 콩콩 뜁니다. 내 숨은 늘 내 몸에 고즈넉히 있으면서 뜁니다. 내 숨은 다른 데로 가지 않고 늘 내 몸에 깃듭니다. 내 넋도 언제나 내 몸에 함께 있습니다. 내 넋은 내 몸이 내 숨을 받아들여서 내 목숨을 건사하도록 지켜보면서 이곳에 함께 있습니다. ‘뛰기’란 바로 늘 언제 어디에서나 이곳에 깃들면서 새롭게 거듭나려는 몸짓입니다.


  우리 마음은 늘 바람을 가릅니다. 우리 몸은 마음을 따라서 어디이든 함께 달립니다. 우리 마음이 바다를 가로지르면, 우리 몸도 바다를 가로지르는 길을 찾아나섭니다. 우리 마음이 너른 숲을 헤치고 달리면, 우리 몸도 너른 숲을 헤치고 달리는 길을 찾아나섭니다. 내 넋은 내 생각을 따라서 어디로든 달립니다. 내 몸은 내 마음을 따라서 어디로든 달립니다. 달리고 다시 달리고 또 달리고 거듭 달려서 새롭게 달리니, 내 몸은 지치지 않습니다. 달리고 달리며 자꾸 달리는 몸과 마음은 늘 새롭게 다시 태어나니, 언제나 ‘기쁨’이면서 젊음입니다. 달리는 몸과 마음에는 ‘늙음’이나 죽음이 없습니다.


  뛰는 숨결은 언제나 즐거움입니다. 제자리에서 뛰지만, 언제나 즐거움이요 싱그러운 삶입니다. 그리고, 뛰는 숨결이 멎으면, 이때에도 곧바로 늙음이면서 죽음입니다.


  뛰지 않거나 달리지 않으면 죽음이자 늙음입니다. 뛰거나 달리면 삶이자 새로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뛰면서 달립니다. 우리는 저마다 달리면서 뜁니다. 뛰기만 하지 않고, 달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합니다. 뜀박질과 달음박질이 서로 맞물리면서 삶이 태어납니다. 뛰고 달리는 몸짓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자랍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으나, 이내 한숨이 몸에 깃들어 새숨이 되고, 한숨이 새숨으로 되는 결을 살펴서 첫걸음이 새걸음으로 나아갑니다. 즐겁게 뛰면 됩니다. 기쁘게 달리면 됩니다. 즐겁게 웃고 노래하면 됩니다. 기쁘게 웃고 노래하면 됩니다. 우리 삶에는 늘 즐거움과 기쁨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마음으로 고이 품는 즐거움이요, 마음 바깥으로 바람에 실려 날리는 기쁨입니다. 웃음과 노래가 즐거움과 기쁨을 만나서 이야기로 태어나니, 이 이야기에서 사랑과 꿈이 가만가만 피어나면서 온누리를 따사롭고 너그럽게 껴안습니다. 4348.3.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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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7 ‘한꺼번에’와 ‘함께’



  우리는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합니다. 이른바 ‘동시다발’이라는 한자말로도 나타낼 수 있는데, 우리는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살면서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합니다. 우리가 선 자리를 현대 물질문명 사회인 오늘날이 아닌, 기원전이나 단군이 나타났을 무렵으로 돌려서 생각해 보셔요. 자, 오천 해 앞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산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무렵 이 땅에는 교통도 통신도 없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말도 안 타고, 고개 너머 다른 마을로 찾아다니지도 않습니다. 아니, 고개 너머에 다른 마을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태어난 마을에서, 또는 내가 태어난 집에서 살 뿐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어떤 말을 쓸까요? 고개 너머에서 누군가 찾아온다면, 우리 이웃과 동무가 고개 너머에 있는데 가끔 우리한테 찾아오는 손님이 된다면, 우리는 서로 어떤 말을 나눌까요?


  ‘표준말’로는 ‘청미래덩굴’이라고 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표준말로는 이런 이름이 ‘억지스럽게’ 붙습니다만, 이 나무를 가리키는 고장말(사투리)은 대단히 많습니다. 망개, 맹감, 밍감, 멍감, 명감, 멜대기, 명개, 뭥개, 멍게, 멍개, 멩저남, 땀바구, 깜바구, 퉁갈, 늘렁감, 버리둑덤풀, 처망개, 망개딩이, 망개덤불 …… 끝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름이 나올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셔요. 어떻게 고장마다 고을마다 마을마다 수많은 이름이 태어날 수 있을까요? 저마다 제 삶자리에서 제철을 살피면서 제 눈길로 바라보고 제 마음으로 제 생각을 짓기 때문입니다. ‘고장말(사투리)’이란 무엇인가 하면, “내가 태어나서 삶을 짓는 곳에서 손수 지은 말”입니다. ‘표준말이 아닌 말’이 사투리가 아니라, 손수 삶을 지으면서 지은 말이 사투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표준말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하고, 표준말을 함부로 내세우면 안 되며, 표준말을 앞세워 고장말(사투리)을 몰아내려 하거나 짓밟는 짓을 멈추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는 고장마다 ‘다 다른 사투리’로 엮어서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표준말이란, 정치권력이 우악스럽게 만든 ‘우리 스스로 바보가 되도록 길들이려는 말’입니다.


  정치권력은 고장말을 반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장마다 고장말을 쓰면, 말 그대로 ‘오롯한 마을살이(완성된 지방자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마을마다 마을 스스로 삶을 지어서 가꾼다면, 마을사람은 굳이 도시로 올 까닭이 없습니다. 두레와 품앗이가 아름다우니, 사람들은 저마다 태어나 자라는 마을에 그대로 있으면서 삶을 가꾸고 사랑을 꽃피우겠지요. 정치권력은 바로 이 대목을 안 바랍니다. 정치권력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틀에 가두어 똑같은 말만 쓰도록 길들이면서 똑같은 도시문명에 젖어들어서 ‘정치권력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얼거리’를 꾀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부터 모든 말을 ‘다 다른 고장과 고을과 마을과 집에서 한꺼번에’ 터뜨렸습니다. ‘똑같은 것’을 바라보면서 ‘다 다른 말’을 터뜨렸는데, ‘표준말 청미래덩굴’ 하나를 놓고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다 다른 말이면서도 느낌으로는 다 헤아리거나 짚을 수 있을 만큼 닮거나 비슷합니다. 모든 사투리와 고장말이 이와 같아요. 서로 조금만 말을 섞어도 ‘아하, 네가 말하려는 것이 이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을 만합니다.


  다 다른 곳에서 ‘한꺼번에’ 터지는 말이요 삶이기에, 다 다른 자리에서 ‘함께’ 짓는 말이면서 삶입니다. 우리는 모든 말을 함께 짓습니다. 우리는 모든 삶을 함께 짓기에, 말도 함께 짓고, 사랑과 꿈과 이야기도 함께 짓습니다. 고장마다 다른 아리랑 노래이지만, 모두 ‘아리랑’입니다. 고장마다 다 다른 〈청개구리〉나 〈해와 달〉이나 〈팥죽 할멈〉 이야기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말씨와 얼거리와 흐름은 조금씩 다 다르면서, 큰 줄거리와 넋과 뜻과 사랑은 모두 같습니다.


  씨앗 한 톨에서 싹이 트면서 자라고 또 자라다가 씨앗이 늘고 또 늘면서 숲을 이룹니다. 작은 하나에서 모든 것이 태어납니다. 서로 함께 이루는 한편, 한꺼번에 이룹니다. 나 스스로 내 삶에서 작은 것 하나를 바꾸거나 고치려 하기에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 하나이지만, 이내 큰 것을 거쳐, 모든 것이 새롭게 거듭나요. 처음에는 하나씩 이루는 듯 보일 테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모든 것은 늘 ‘한꺼번에’ 터졌으며, ‘함께’ 흐르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잡습니다. 다 같이 걷는 길입니다. 4348.3.8.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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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6 타오르는 눈



  언덕길을 타고 오르니 어느새 고갯마루에 닿습니다. 오르느냐 마느냐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내 길을 가는구나 하고 여기면서 내 발바닥과 몸뚱이에 가벼운 마음을 싣고 걸으니, 나는 어느새 고갯마루를 올라 타고 서서 멧봉우리를 둘러싼 구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새는 늘 스스로 날갯짓을 하면서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그런데 하늘로 날아오를 적에 새는 으레 바람을 살짝 타고 오릅니다. 스스로 날갯짓을 하기에 바람을 가볍게 탈 수 있고, 어느 만큼 날갯짓에 힘이 붙어 높디높이 치솟으면, 이제는 높은 하늘에서 새로운 바람을 다시금 타고는 날개를 곧게 폅니다. 첫 날갯짓은 가벼우면서 기운찬 날갯짓이라면, 새로운 날갯짓은 온몸에 힘을 모두 뺀 뒤 바람한테 그대로 맡기는 홀가분한 날갯짓입니다.


  불길이 오릅니다. 불길이 타고 오릅니다. 불길은 바람을 먹고 풀과 나무를 먹으면서 타고 오릅니다. 불길은 옆으로 번지는 듯하면서도 늘 하늘을 바라보면서 치솟습니다. 어느 만큼 위로 솟구칠 수 있을까 하고 꿈을 꾸면서 불길이 타오릅니다.


  눈이 이글이글 타오릅니다. 내 눈에서 뜨거운 기운이 활활 타오릅니다. 내 눈은 무엇을 볼까요? 설렘을 볼까요, 두려움을 볼까요, 새로움을 볼까요, 미움을 볼까요? 부딪히려고 하는 울타리를 볼까요, 뛰어넘으려는 담을 볼까요?


  나는 타올라야 합니다. 먼저, 바람을 타고 올라야 합니다. 바람을 타지 않고서야 어디로도 가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불길을 타고 올라야 합니다. 내 몸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솟도록 불을 지펴야 합니다. 나는 ‘바람으로 타오르’고 ‘불로 타오르’는 숨결이 되어, 비로소 이 몸을 움직이는 새로운 마음이 됩니다.


  나는 네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지구별 곳곳에서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른 별누리에서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냇물과 바닷물에서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늘과 구름과 무지개에서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온 기운을 받아들여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기운을 맞아들여 바람을 타고 불길을 탑니다. 바람과 불길이 하나로 되어 새로운 몸으로 타오릅니다.


  내 숨결은 바람이요 불길인 마음에 씨앗을 심고 천천히 눈을 뜹니다. 온것(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온눈’으로 거듭납니다. 온것을 보는 온눈이 될 때에, 온몸에서 온힘이 솟고, 팔과 다리와 가슴과 머리에 온불이 켜집니다.


  넋은 바람처럼 가벼우면서 기운차고, 넋은 불길처럼 뜨거우면서 따뜻합니다. 타오르는 넋은 ‘바람불’입니다. 바람불은 이곳에 새싹이 터서 자라도록 흙을 어루만지고, 바람불은 이곳에 숲이 이루어지도록 나무를 쓰다듬으며, 바람불은 이곳에 보금자리가 열리도록 사람을 보살핍니다.


  타오릅니다. 내가 스스로 타오릅니다. 바람씨를 심어 높이 타오르고, 불씨를 심어 깊이 타오릅니다. 내 숨결은 바람씨와 불씨를 함께 품에 안으면서 타오릅니다. 가없는 곳에 끝없이 가려고 천천히, 그렇지만 빠르게 타오릅니다. 뜨겁게 타오르다가 따뜻하게 타오르고, 시원하게 타오르다가 넉넉하게 타오릅니다. 땅바닥에 살포시 내려앉는 나뭇잎처럼 가만히, 이러면서도 씩씩한 소리를 내면서 타오릅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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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5 위아래



  삶에는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사람한테는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별에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지구에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어디에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알아보기 쉽’거나 ‘이야기를 나누기 좋’도록 위와 아래를 나누기도 하고, 왼쪽과 오른쪽을 가르기도 하며, 새·하늬·마·높(동·서·남·북)으로 살피기도 합니다.


  내가 바라보면 이곳은 왼쪽일 테지만, 나와 마주보는 사람한테 이곳은 오른쪽입니다. 내가 선 곳이 위라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보면 아래입니다. 내가 동쪽으로 간다고 하지만 저쪽에서는 서쪽입니다. 그러니, 모든 곳은 어느 곳도 아닌 셈입니다.


  말에도 위아래가 없습니다. 이 말을 쓰니까 높임말이 되지 않고, 저 말을 쓰기에 낮춤말이 되지 않아요. 위아래라고 하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좋고 나쁨’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높임말이라고 할 적에도 ‘틀에 맞추는 겉말’을 쓸 때에는 높이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느 말이나 수수한 말이나 투박한 말을 쓰더라도 ‘마음으로 서로 높이려는 넋’일 때에 비로소 높임말입니다. 겉보기로는 높임말 시늉이나 흉내라 하더라도 ‘마음으로 서로 깎아내리거나 낮추려는 넋’이라면 낮춤말이에요.


  높임말도 위아래도 없다면, 사람 사이에서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더 높은 사람이 따로 없고, 더 낮은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 사이에 경계나 신분이나 계급을 둔다면, ‘더 높다는 자리’에 서는 사람이야말로 더 낮다는 자리로 스스로 가면서 제 삶을 갉아먹는 셈입니다. 이웃사람을 ‘더 낮다는 자리’에 내리깔려고 한다면, 더 낮다는 자리에 내리깔리는 사람이야말로 더 높다는 자리로 저절로 올라서는 셈입니다.


  위와 아래가 없지만,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흐릅니다. 삶이란 흐름입니다. 다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흐름이 아닙니다. 삶을 이루는 일곱 조각을 돌고 도는 흐름이 아닙니다. 첫째 조각에서 둘째 조각으로 갔다가, 셋째와 넷째와 다섯째와 여섯째를 지나 일곱째 조각으로 간 뒤, 다시 첫째 조각으로 돌고 도는 흐름이 아니라, 그저 흐르고 새롭게 흐르는 삶입니다.


  흐름은 늘 한꺼번에 이루어집니다. 따로따로 나누어 일곱 갈래인 듯이 말하기는 하지만, 첫째에서 일곱째에 이르는 흐름은 한결입니다. 한결로 한꺼번에 흐릅니다. 첫째에서 둘째로 간다 싶으면 어느새 셋째에 있고, 셋째에서 넷째로 간다 싶으면 곧바로 다섯째입니다. 그래서 첫째에서 일곱째로 곧장 가고, 일곱째로 곧장 가면 어느새 첫째입니다. 마치 제자리걷기를 하는 듯하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제자리걷기가 아닌 흐름이요, 흐름이면서 삶입니다. 어제와 오늘과 모레가 늘 한꺼번에 이루어지듯이, ‘삶흐름’도 늘 한꺼번에 함께 나란히 나타납니다.


  위아래가 없는 흐름인 줄 읽을 수 있다면,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 나이가 더 적은 사람하고 삶을 어떻게 가꿀 때에 아름다운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위아래가 아닌 흐름이 삶인 줄 바라볼 수 있다면, 나이가 더 어린 사람이 나이가 더 든 사람하고 사랑을 어떻게 나눌 때에 즐거운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한테 어떤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제 꿈을 바라보면서 제 길을 걷기에 제 사랑이 샘솟아 기쁘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우리는 다 함께 노래하는 길로 흘러서 갑니다. 우리는 겉모습이 아닌 참모습을 바라보려 합니다. 우리는 겉치레가 아닌 속가꿈으로 삶을 지으려 합니다. 달력에 따라 찾아오는 하루가 아니라, 어제를 마무리하고 오늘을 새롭게 여는 하루입니다. 오늘을 새롭게 열면서 모레로 나아가고자 하루를 즐겁게 닫습니다. 열면서 곧바로 닫고, 닫으면서 곧바로 엽니다. 위이기에 곧바로 아래이고, 아래이기에 막바로 위입니다. 물결입니다. 물결치는 흐름입니다. 물결치는 흐름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물결은 위와 아래가 없이 위아래로 흐르는 결이듯이, 사랑은 바로 내 가슴에서 스스로 길어올립니다. 삶은 언제나 바로 오늘 이곳에 있습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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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4 ‘따스하다’와 ‘포근하다’



  지구별에서 뭇목숨이 저마다 지내기에 알맞구나 싶은 기운일 때에 ‘따뜻하다’라는 낱말을 씁니다. ‘따뜻하다’는 한 해 내내 쓰는 낱말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쓰는 낱말입니다. 이와 달리 ‘포근하다’는 아무 때나 쓰지 않는 낱말입니다. ‘포근하다’는 겨울에만 쓰는 낱말입니다. 추위가 온누리를 꽁꽁 얼어붙게 하는 때에, 이 추위를 잊을 수 있도록 찾아오는 ‘지내기에 알맞구나 싶은 기운’이 ‘포근하다’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언제나 사랑으로 가득한 기운이라 한다면, 이 사람은 ‘따뜻하다’고 할 만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여느 때에는 그리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못할 만한데, 뜻밖이라고 할 만한 자리나 아슬아슬하거나 힘들거나 고되거나 아무튼 우리한테 춥고 어려운 어느 때에 문득 사랑으로 다가오는 기운이 되어 준다면, 이 사람은 ‘포근하다’고 할 만합니다. 또는, 모진 추위와 괴로움 따위로 덜덜 떨거나 어려울 때에 모든 추위와 괴로움이 우리한테 오지 않도록 너른 품으로 안아 줄 때에 ‘포근하다’고 합니다.


  한결같이 흐르는 사랑이기에 ‘따뜻합’니다. 추울 때에 흐르는 사랑이기에 ‘포근합’니다. 따뜻한 사랑에는 구비진 곳이 없습니다. 따뜻한 사랑은 곧게 흐르는 숨결입니다. 포근한 사랑에는 구비진 곳이 있습니다. 포근한 사랑은 ‘오르락내리락 물결치는 우리 삶’에서 힘든 고빗사위마다 찾아오는 고마운 숨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이 ‘알맞고 너그러우면서 차분한 기운’인 사랑은, 좋고 나쁨이 없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 사랑은, 늘 두 갈래로 느끼거나 마주합니다. 하나는 한결같은 따뜻함입니다. 하나는 힘들거나 지칠 때에 새롭게 기운을 북돋우는 포근함, 곧 ‘물결치는 포근함’입니다.


  한결같은 따뜻함은 한결같이 새롭습니다. 물결치는(추운 날) 포근함은 뜻밖이면서 기쁘도록 새롭습니다. 한결같은 따뜻함은 즐거운 노래입니다. 늘 즐거우니 늘 노래이되, 차분하게 잇는 사랑입니다. 물결치는 포근함은 기쁜 노래입니다. 그동안 춥고 힘들었지만, 이 추위와 힘듦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포근함은 기쁘게 터져나오는 노래가 됩니다.


  삶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함께 있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은 한몸이면서 다른 몸입니다. 즐거움과 기쁨은 한마음이면서 새로운 마음입니다. 곧게 흐르는 사랑이면서 물결치는 사랑입니다. 하나로 나아가는 사랑이면서 새로운 하나를 낳는 사랑입니다. 너와 내가 이루는 사랑이요, 사내와 가시내가 만나는 사랑입니다. 너와 내가 우리로 거듭나는 사랑이요, 사내와 가시내가 아기를 낳아 새로 태어나는 사랑입니다. 따스한 즐거움과 포근한 기쁨이 아름답게 어우러져서 삶에 꽃이 한 송이 두 송이 핍니다. 웃음잔치와 노래마당이 되는 삶입니다. 꽃 한 송이는 웃음이 되고, 꽃 두 송이는 노래가 됩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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