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집놀이터 181. 어두움



‘어두운 데서 책을 보면 눈 나빠진다’는 말은 참일까? ‘밝은 데서 책을 봐야 눈이 안 나쁘다’는 말이 참일까? 집이며 학교이며 마을이며 건물이며 온통 눈이 부시도록 밝은데, 사람들은 나날이 ‘눈이 나빠’진다. 눈 병원이나 안경집이 엄청나게 늘어나는데 사람들은 빛하고 눈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배우거나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눈은 햇빛하고 별빛만 받으면 되지 않을까. 집에서는 숲에서 얻은 기름으로 켠 등불빛을 누리면 넉넉하지 않을까. 어디에서나 번쩍거리는 형광등 불빛은 우리한테 얼마나 이바지하려나. 느긋하게 쉬면서 몸을 달래야 할 밤에 지나치게 밝도록 형광등을 켜 놓기에 눈이랑 몸이 닳으면서 고단할 수 있다. 형광등 불빛에 닿은 책이 쉽게 바래면서 삭는다. 낮에 햇빛을 잃고 밤에 몸을 못 쉬면서 형광등에 시달려야 한다면, 튼튼한 길하고 자꾸 어긋나는 셈이지 싶다. 밝은 낮에 신나게 움직였으면, 어두운 밤을 고이 맞아들이면서 고요히 잠들 노릇이라고 느낀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집놀이터 180. 나막신



일본으로 배움마실을 다녀오면서 곁님하고 나막신을 한 켤레씩 맞추었다. 일본 옛신을 신장이 두 분이 손님 발크기를 살피면서 꼼꼼히 지어 주는 마을 신집을 보았기에, ‘화학소재 아닌 숲에서 온 나무하고 실’로 엮은 나막신을 반기면서 발에 꿰었다. 나막신을 꿴 지 한 달 즈음 지나니, 이제 나막신을 꿰고 가볍게 달릴 수 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 걸었다면, 이제 나막신하고 발이 한몸 되어 움직인다. 나막신을 꿰면 늘 맨발로 마룻바닥을 걷는 느낌이다. 옛사람이 이 땅에서 짚을 삼아 발에 꿰고 먼길을 나설 적에는 늘 풀숲을 걷는 느낌이었을 테지. 몸에 어떤 실로 짠 천으로 지은 옷을 걸치느냐에 따라 몸이 받아들이는 결이 다르다. 화학섬유 옷이라면 기름냄새 빼고 없겠지. 숲에서 온 실로 지은 옷은 ‘실이 되어 준 풀포기’가 자라던 들이며 바람이며 해님이며 빗물을 느끼면서 입을 만하다. 맨발로 땅을 디딜 적에 두 발로 땅기운을 느끼면서 받아들이니, 발을 꽁꽁 감싸면서 시멘트나 아스팔트만 디뎌야 한다면 발이랑 몸에 아무 숲기운·별기운이 스밀 수 없겠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집놀이터 179. 스쳐보내다



나이란 숫자일 뿐이다. 나이가 어리대서 맑지 않고, 나이가 많대서 안 맑지 않다. 나이가 많대서 안 젊지 않고, 나이가 어리대서 젊지 않다. 사회의식에 갇혔으면 나이가 어린 아이들도 안 맑기 일쑤요, 사회의식이 아닌 살림빛을 품으면 나이가 많아도 언제나 맑은 기운으로 살아간다. 사회의식으로는 ‘나이가 들면 빨리 죽는다’ 같은 말을 섣불리 하는데, 빨리 죽는 사람은 안 배우는 사람이다. 삶과 살림과 사랑을 슬기롭게 배우는 사람은 즐겁게 오래오래 산다. 삶도 살림도 사랑도 안 배울 뿐더러 슬기로운 길하고 등을 지면서 겉치레나 이름값을 내세우는 사람은 즐겁지 않고 오래 못 살고 만다. 우리가 배우는 까닭이라면, 책을 읽는 까닭이라면, 그리고 여러 갈래로 여러 가지로 마음하고 몸을 갈고닦아 튼튼하면서 정갈히 다스리려는 까닭이라면, 나이를 잊고서 늘 즐겁고 아름다운 길을 가려는 뜻이지 싶다. 몇 가지 숫자를 놓고 얽매려는 사회의식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을 새롭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 걸림돌이 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꿈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길을 노래하면서 나아가면 된다. 마음에서 새롭게 지핀 말을 새롭게 지어서 새롭게 들려주기에 어버이하고 아이는 서로 배우면서 가르친다. 사회의식은 스쳐보내자. 멀리멀리 날려보내자.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집놀이터 178. 배워 보렴



이가 돋아서 드디어 젖 아닌 밥을 스스로 씹어서 먹을 줄 아는 아기는 먹을거리를 앞에 두고서 겉모습으로 따지지 않는다. 돌멩이도 나무토막도 쇠붙이도 종잇조각도 플라스틱마저도 손으로 척 집어서 입에 넣고 씹거나 물려고 하는 아기인 터라, 무엇을 주든 스스로 씹어서 맛을 보려 하고 느끼려 하며 알려 한다. 더없이 훌륭한 배움짓이다. 그런데 둘레 어른이 “아유, 그걸 어떻게 먹어?” 하고 한마디라도 거들라치면 아이들은 바야흐로 겉모습을 따진다. 징그러운 것이란 없지만 아이들은 어른이 곁에서 거든 말을 고스란히 따라서 “징그러워서 안 먹어”라든지 “처음 본 거라 안 먹어” 같은 말을 내뱉고 만다. 이때에는 먹을거리로 배우는 살림하고 멀어진다. 낯선 출판사 낯선 작가 책이기에 안 읽어도 될까? 우리는 이름값이나 겉모습으로 책을 고르는가? 낯익은 출판사나 작가라 하더라도 ‘무엇이 얼마나 낯익은가?’ 하고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지난날에 아쉽다 싶은 모습을 보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은 얼마나 거듭나거나 나아졌는가?’를 스스럼없이 꾸밈없이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우리 스스로 배우기 때문이다. 울타리를 세워서 ‘이러면 안 돼’ 하고 금을 그으면 스스로 안 배우겠다는 뜻이다. 허름한 차림새로 다니는 100조 원 부자가 있다면, 이이는 허름한 차림새이니 바보일까? 까맣고 큰 자가용에, 까만 양복에, 반들반들한 머리카락에, 까만 가죽신을 꿰어야 뭔가 ‘있어 보이는’ 셈일까? 겉모습에 휘둘리면 아무것도 못 배우고, 아무것도 못 배우면 스스로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한다. 우리는 늘 속마음을 읽고 보고 배우고 나누고 가꿀 줄 알아야 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집놀이터 177. 스스로 찾기



‘졸업장 학교’ 아닌 ‘우리 집 학교’를 다니는 두 아이인데, 아이만 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두 어버이도 ‘우리 집 학교’를 함께 다닌다. 둘레에서는 이를 늘 제대로 모른다. 아이들만 배우지 않는다. 어버이도 늘 함께 배운다. 모든 배움터에서는 학생하고 교사가 함께 배우는 사이, 서로 배움벗이다. 이웃이 우리한테 “집에서 어떻게 가르치나요?” 하고 물으면 우리는 “우리 집 학교에서 가장 크게 삼는 대목은, 스스로 배울 길은 스스로 찾기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스스로 찾아나서고 찾아내어, 이를 어떻게 배워야 할는지도 스스로 찾도록 하려고 합니다.” 하고 이야기한다. 매우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무엇을 배울는지’를 스스로 찾느냐고 궁금해 하곤 하시는데, 언제나 스스로 찾아내기 마련이다. 기다리면서 두고보면 된다. 지켜보면서 모든 살림을 함께 이야기해 보면 된다. 우리는 졸업장 학교에 길들면서 ‘스스로 찾기’하고 ‘스스로 배우기’를 잃거나 잊는다. 이러다 보니 ‘한국말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조차도 스스로 찾지 않고 배우지 않기 일쑤라, 한국말을 잘 모르거나 제대로 모르는 한국사람이 너무 많다. 어릴 적부터 집이나 마을이나 졸업장 학교 모든 곳에서 거의 하루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스스로 생각한 적이 없는 탓이겠지. 모든 배움터는 ‘스스로 찾아서 배우는 길’을 스스로 배우도록 이끌어야 참다운 노릇을 하리라 본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