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집놀이터 186. 이야기가 되기



  혼자만 읊으면 중얼중얼. 마주보지 않고서 혼자 외면 혼잣말. 마주보면서 혼자 늘어놓으면 외곬이 되는 말. 혼자 있더라도 눈앞에 있구나 하고 여기면서 주거니 받거니 할 적에는 이야기. 눈으로 마주보고 살내음을 느끼면서 나눌 적에도 이야기. 이야기란 둘이나 여럿이 함께 있으면서 곱게 흐르는 생각을 씨앗처럼 담아낸 말을 가꾸는 일. 그러니 아이들을 꾸짖거나 나무랄 적에는 이야기 아닌 말마디, 외마디, 외침이 되기 일쑤. 아이들 생각이나 느낌을 듣고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얼거리가 된다면, 이때에는 어버이도 아이도 삶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누리는 이야기.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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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85. 왜 ‘학교’라 할까



오늘날 졸업장을 주는 터는 학교라는 이름이 안 어울리지 싶다. 이름은 학교라 쓰지만 정작 학교다운 곳은 아니지 싶다. 학교에서 자율학습하고 보충수업을 한다는데, 자율학습은 스스로(자율) 익히는(학습) 길이 아니기 일쑤요, 보충수업은 보태는(보충) 배움자리(수업)가 아니곤 하다. 억지로 시키면서 자율이란 이름을 붙이고, 교과서 진도나 시험문제 풀이를 하면서 보충이란 이름을 붙인다. 이런 이름이 알맞을까? 학교에서는 모범생을 가리고 문제아나 불량학생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면 무엇이 모범이거나 문제이거나 불량일까? 뭘 잣대로 아이를 함부로 나누거나 가를까? 교사나 학생한테 “학교는 어떤 곳입니까?” 하고 물으면 하나같이 “배우는 곳입니다.” 하고 말할 텐데, 왜 배우는 곳을 ‘배움곳·배움터’라는 이름으로 안 쓰고 ‘학교’라는 이름으로 뒤집어씌울까? 배우는 곳이 아닌 길들이는 곳이요, 배우면서 나누는 곳이 아닌 길들어 쳇바퀴질을 하도록 내모는 곳이기에 ‘배움곳·배움터’ 같은 이름을 못 쓰는 셈 아닐까? 껍데기를 씌우고, 겉치레에 갇히는 곳이 바로 학교 아닌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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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84. 외우지 않아



외웠던 이야기는 잊곤 한다. 외우지 않고 익힌 이야기는 좀처럼 안 잊는다. 겪지 않고 어깨너머로 구경한 일은 스미지 않는다. 엉성하거나 어설프더라도 스스로 겪은 일은 몸으로 깊이 스민다. 머리나 마음에 새기는 배움길은 좋다고 여긴다. 그러나 새기지 않고 외우는 길이라면 배움하고는 동떨어지지 싶다. 배울 적에는 외우지 않는다. 외우는 길이란 똑같이 하는 길이고, 똑같이 해서는 틀에 맞출는지 몰라도 철이나 결을 살피지 못한다. 외우지 않고 익힐 적에는 틀에는 안 맞더라도 철이나 결을 읽으면서 맞추니, 그때그때 다르면서 그때그때 알맞기 마련이다. 함께 배우는 곳이라면 척척 외워서 맞춰야 하는 시험문제를 낼 까닭이 없다. 함께 배우지 않고 점수에 따라 줄세우기를 하는 곳이라면 배움길하고 동떨어질 테니 척척 외워서 맞추는 아이를 높이고, 못 외우는 아이는 뒤처지고 말 테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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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83. 묻지 않는다



배우려 하는 사람은 묻는다. 배우니까 묻는다. 더 알고 싶으니 묻고, 배워서 알면 더 즐거워서 새삼스레 묻는다. 알아서 마음이 새로 열리는 하루가 신이 나서 자꾸자꾸 묻는다. 그리고 더욱 기쁘게 받아들여서 몸에 고이 담는다. 이와 달리 안 배우니까 안 물어본다. 안 배우는 이들은 사회의식에 이끌려 믿음(종교·정보)을 쌓고, 이러면서 더욱더 걱정하고 두려움을 키운다. 안 배워서 믿음을 굳히고 걱정하고 두려움을 쌓다 보면, ‘사람이 사는 터’가 아닌 ‘사회 유지’라는 생각에 스스로 발목이 잡혀서 더더욱 안 배우고 안 물어볼 뿐 아니라, ‘사회를 지키자’는 마음을 한결 모질게 밀어붙이고 만다. 오늘날 졸업장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물어보지 않도록 다그친다. 교과서하고 시험문제를 풀이하는 데에서 그치니, 아이들로서도 물어볼 만한 이야기가 없다. 새롭게 바라보면서 물어볼 틈을 여는 배움터가 아닌, 졸업장을 거머쥐도록 내모는 학교에서는, 그저 집어넣고(주입식) 그저 외우고(시험문제) 그저 닦달하는(점수따기) 쳇바퀴만 있다. 이곳에서는 학생이나 교사 모두 즐거움이나 기쁨이 없으니, 운동경기하고 동아리하고 체험학습을 자꾸 꾀해야 하느라 바쁘다. 배우지 않으니 바쁘고, 바쁘니 배울 틈이 없는 졸업장학교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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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집놀이터 182. 누리그물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을 두지 않는다. 여느 집에 가 보면 다들 텔레비전을 모시며 산다. 그냥 두지도 않고 모시기 일쑤이다. 가만히 보라. 마루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떡하니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는가? 더구나 온집사람이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울 자리에 텔레비전을 척 모시면서 서로 얼굴을 안 보는 얼거리 아닌가? 오늘날 삶터를 돌아보면 집집마다 ‘1. 텔레비전 모시기 2. 컴퓨터 섬기기 3. 손전화 붙잡기’를 하는구나 싶다. 첫쨋길을 안 가도 둘쨋길에서 묶인다. 셈틀을 켜서 누리그물에 흐르는 갖가지 자잘한 정보를 머리에 넣고 만다. 우리는 이다지도 넘치는 정보를 굳이 듣거나 보아야 할까? 정치꾼 이야기나 사건·사고 이야기를 왜 자꾸 쳐다볼까? 그런데 손전화로 언제 어디에서나 누리그물을 쓸 수 있다 보니, 텔레비전이나 셈틀이 아니어도 자질구레한 정보를 끝없이 쳐다본다. 걷는 길에 나무가 있는지 봄꽃이나 가을잎이 아름다운지 못 본다. 구름이 얼마나 멋진지 바람이 얼마나 싱그러운지 못 느낀다. 누리그물은 온누리를 거미줄처럼 곱게 엮어서 튼튼히 가꿀 적에 아름답다. 그러나 누리그물은 우리 몸과 마음과 삶을 꽁꽁 사로잡아서 가두는 그물이 된다면, 빠져나올 길 없는 그물이 된다면, 우리는 갇힌 삶이자 사람이 된다. 내가 굳이 ‘인터넷’이란 영어를 안 쓰고, 이를 손질해 ‘누리그물’이란 이름을 쓰는 까닭을 밝히자면 이렇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배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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