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씁니다 ― 17. 빔



  곁님이 책을 보내 드리고 싶은 이웃님이 있다고 해서 주섬주섬 책을 챙깁니다. 이렇게 이 사람, 저렇게 저 사람, 그렇게 그 사람 … 곁님이 책을 드리고 싶다는 이웃님은 자꾸자꾸 나오고, 책을 자꾸자꾸 보냅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글쓴이가 선물로 책을 주려면 글쓴이가 출판사에 여쭈어 사 놓아야 합니다. 책선물을 참 잘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제 책을 여러 이웃님한테 선물로 드릴 만큼 즐거운 읽을거리로 삼을 수 있으면 기쁘겠다고 느낍니다. 오늘 심는 작은 책씨는 차츰차츰 자라서 숲이 되겠지요. 뜨개모임을 이끄는 분한테 책을 보내는 길에, 책만 보내기보다는 뭔가 하나 곁들이자고 생각하며 ‘빔’이라는 글을 씁니다. 시골버스를 타고 우체국으로 가는 길에 썼어요. 풀에서 얻는 실을, 실로 얻는 천을, 천을 얻고서 이 살림 저 집일을 하느라 바빠 살짝살짝 틈을 내어 바늘을 놀리는 밤을, 그리고 모든 바느질·뜨개질을 마치고서 흐뭇하게 선물하는 마음을, 이 새옷을 받고서 활짝 웃으며 춤출 아이들 얼굴빛을 동시 몇 줄에 담으려고 했습니다. 옷을 새로 지어서 ‘새옷’인데, 새옷을 새옷이라 하지 않고 ‘빔’이라는 낱말을 굳이 지은 뜻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낱말 하나를 새롭게 지어서 쓰는 뜻이란 얼마나 고운 사랑인가를, ‘빔’이라는 낱말로 새옷을 가리키려는 마음은 얼마나 너른 기쁨인가를, 찬찬히 생각합니다. ㅅㄴㄹ




쑥쑥 자란 풀에서

가늘고 질긴 가닥

물레는 실을 잣고

베틀은 천을 밟아


가위가 천을 마름하면

이제부터 바늘이 나서지

한 땀 두 땀 지나면

한 올 두 올 엮어


한 밤을 새우다가

밥하고 빨래하고 치우고

두 밤을 지새다가

아기 보고 밭 매고


일판은 끝없는 듯하지만

어느덧 마무리하는 뜨개판

어때? 설빔이란다

꽃무늬옷 두르고 잔치판 가자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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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16. 켠



  작은아이하고 순천으로 나들이를 가는 길에 동시를 썼어요. 작은아이가 겨울에 발이 시리지 않으면서 꿸 만한 포근신을 장만할는지, 아니면 이리저리 둘러보는 구경길이면 될는지 생각해 보는데, 마실을 가는 길에 작은아이가 포근신을 딱히 바라지 않기에 찬찬히 이곳저곳 거닐며 구경하기로 했어요. 시외버스에서 내리기 앞서 ‘켠’이라는 글을 썼어요. 이날 〈골목책방 서성이다〉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책집지기님이 시를 좋아하시고, 박노해 님이 쓴 시에서 ‘서성이다’란 말이 깃든 글을 좋아하시더군요. ‘서성이다’라는 말을 가만히 혀에 얹고서 생각했지요. 어디를 서성이고 어떻게 서성이며 왜 서성이는지를, 앞으로 어디로 가려는 서성임질이고, 이제부터 누구하고 어깨동무를 하려는 서성임짓인가를 더 헤아리니 ‘켠’이라는 낱말로 이야기가 솔솔 풀렸습니다. 저켠에 있는 아이를, 그켠에서 쓸쓸한 아이를, 이켠에서 같이 놀고 싶은 아이를, 어느 켠에도 고루 볕이 들고 환한 잔치가 될 수 있으면서 노래가 터져나오는 아이를 그리면서 글을 썼지요. 책집마실을 마치고서 고흥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외버스에서 작은아이가 잠들기 앞서 문득 한 마디 해요. “아버지, 다음에 부츠 사러 가자. 발이 시렵더라. 발가락하고 발바닥이 시려워.” 응? 아까는 포근신이 없어도 된다더니, 고흥하고 순천만 대도 바람이 확 다르지? 진작에 말을 했으면 나온 김에 장만했을 텐데. 오늘은 못 샀지만 다음에 다시 나와서 네 포근신부터 장만하자꾸나. ㅅㄴㄹ




우물쭈물하면서

거기 한켠서 서성이는

작은 아이를

얼핏 보았다


동무들하고 한참

술래잡기를 하는데

이쪽을 내내 지켜보며

그켠에서 꼼짝을 않네


드디어 술래 잡았다

이마에 흐르는 땀

손등으로 훔치고서

하늘에 대고 불쑥 외친다


“숨바꼭질 할 사람 여기 붙어라!”

저켠서 혼자 있던 아이

활짝 웃으며 달려온다

“나도 같이 할래!”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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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15. 사람



  저는 어릴 적부터 “어떤 사람”으로 크거나 살아가려나 하고 헤아렸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거칠 적에는 학교에서 언제나 “어떤 돈벌이 자리”를 얻으면 좋겠느냐를 가르치고 찾으라고 다그쳤지요. 학교 바깥에서도 “어떤 사람”이 아닌 “돈을 얼마나 버는 어떤 일자리”에 있어야 하느냐만 따졌어요. 그렇지만 제 마음은 ‘돈이야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번다’는 생각이었고 ‘일이야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모두 일자리’로 여겼습니다. 남을 따라갈 뜻이란 없었어요. 오로지 나를 보고서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내어 내 길을 내 손으로 짓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린이로 살 적에는 ‘어른’을 꿈꾸었고, 어른 나이가 된 뒤에는 ‘어버이’를 꿈꾸었는데, 이제 어른 나이로 어버이 자리에서 사는 동안 ‘사람’을 새롭게 꿈꿉니다. 몸뚱이라는 겉모습을 넘어서, 마음을 다스리는 넋이라는 속알맹이로 사람이 되는 길을 헤아려요. 밥을 먹는 사람도, 말을 하는 사람도, 두 손을 쓰는 사람도, 두 발로 걷는 사람도 아닌, 슬기로운 사람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나 즐거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빛나는 사람이 되는 길을 헤아립니다. 나부터 스스로 사람다이 살아가려는 꿈으로 하루를 맞이할 적에, 내 곁에 있는 숨결도 저마다 다르면서 싱그럽게 슬기롭고 사랑스럽고 즐겁고 곱고 빛나는 사람으로 활짝 웃을 테지요. 눈을 감으면서 비로소 만나는 사람입니다. 마음눈으로 사귀는 사람입니다. 온넋으로 안고 손잡는 사람입니다. ㅅㄴㄹ



사람


내가 되려는 사람은

하늘빛 그리는 사람

흙내음 맡고서 배부른 사람

풀잎 뜯어 피리 부는 사람


나무줄기 타고 노는 사람

냇물에 멱감으며 빨래하는 사람

감자를 삶아 나누는 사람

자장노래 부드러이 들려주는 사람


옛이야기 사근사근 읊는 사람

숲을 얼싸안는 사람

아기 업고 해바라기하는 사람

잠자리하고 수다 떠는 사람


꽃송이랑 웃으며 속삭이는 사람

날듯이 춤추며 걷는 사람

이웃별로 마실 다니는 사람

그리고 상냥한 사람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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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14. 동시



  저나 곁님은 이 나라를 믿지 않습니다. 정부도 학교도 안 믿습니다. 정부나 학교라는 데가 여태 무엇을 했고, 오늘 무엇을 하는지 아리송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2018.12.1.) 전남교육감을 고흥에서 만나는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 어찌할까 하고 망설이다가 찾아가기로 합니다. 저 혼자서 찾아갈 수 없는 외진 바닷가 볕바라기집에서 모임이 있다고 했는데, 자동차로 태워 주시는 분이 있어서 함께 갔습니다. 처음에 10분 남짓 전남교육감이 들려주는 지난 넉 달 했던 일을 풀어내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런 일은 여태 누구나 했으니까요. 나흘 동안 몸살을 앓다가 오늘 비로소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데, 이 아름다운 낮나절이 이렇게 아깝게 흐르는가 싶더군요.


  이러다가 생각을 바꾸기로 합니다. 새로 일하겠다는 새 전남교육감이 아직 엉성한 걸음걸이라면, 부디 앞으로 어떤 걸음걸이를 바라는가를 동시로 써서 건네자고 말이지요. 어제 쓴 동시를 옮겨적어서 건넬까 하다가, 불현듯 큰아이 궁금덩어리가 떠올랐습니다. 큰아이가 무척 궁금하다고 여기는 ‘사랑·별·노래’가 무엇인지를 단출하게 풀어내고, 이를 아울러서 이야기를 짓자고 생각했습니다. 전남교육감 입에서 자꾸 “학교 밖”하고 “학업 중단” 같은 말이 튀어나와서 꾹 참고서 동시를 마무리지은 뒤 손을 들어 한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교육감님, 오늘 따가운 말은 안 하고 싶었습니다만 한 마디는 해야겠습니다. 아이들은 집도 마을도 학교입니다. 졸업장을 주는 시설만 학교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학교를 다닙니다. 그런데 자꾸 ‘학교 밖, 학교 밖’이라면서 어린이하고 청소년을 가르려 하면, 이 말이 얼마나 언어폭력인지 아십니까? 졸업장을 바라지 않을 뿐인 아이들이 어디에서나 배우는 삶을 생각하지 않으니 언어폭력입니다. 긴 말씀을 여쭈기 어려워서 따로 글을 써 왔으니 조용한 자리에서 이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는 ‘학교 밖 청소년’이 아니라 새 이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감님이 ‘학교 밖 청소년’한테 무엇을 지원한다거나 또 무슨 교육지원 같은 사업을 말씀하시는데요, 저희는 두 아이, 열한 살 여덟 살 두 아이를 집에서 배우도록 하면서 아무 시설도 안 보냈는데, 이렇게 하면 여덟 살까지는 10만 원을 주더군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닌다고 하면 ‘머릿수마다 50만 원씩 유치원에 준다’고 하대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집에서 배우는 아이하고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받을 교육비가 10만 원하고 50만 원으로 갈릴까요? 요새 한창 불거지는 유치원 비리는 바로 이런 데서 비롯하지 않았을까요? 처음부터 모든 아이 어버이한테 똑같이 50만 원을 주면, 어버이가 알아서 집에서 아이를 돌보든, 알맞은 유치원을 골라서 그 유치원에 치러야 할 돈을 내든, 그렇게 해야 유치원 비리가 사라지겠지요? ‘학교 밖 청소년’한테 무슨 교재이니 시설이용이니 지원한다면서 예산을 쓰시지 말고요, 직접 ‘학교 밖 어린이·청소년’ 은행계좌에 50만 원씩이라도 주는 길이 가장 좋다고 느낍니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피시방에서 게임만 하든, 책을 사서 읽든, 자전거를 사서 타든, 목돈으로 모아 여행을 다니든, 어린이와 청소년 스스로 결정권을 누려서 생각하고 쓰도록 하면 된다고 느낍니다. 이런 게 교육 아닐까요? 고맙습니다.”


  이런 말을 마치고서 ‘동시’란 이름을 붙인, 이 자리에서 새로 쓴 동시를 전남교육감한테 건넸습니다. 이 동시도, 함께 건넨 책하고 글도 모쪼록 찬찬히 읽어 주시기를. ㅅㄴㄹ



동시


사랑이라면

즐겁고 밝게 속살이면서

곱게 돌볼 줄 아는

슬기로운 숨결이야


별이라면

해도 지구도 별이고

우리도 메뚜기도 별이고

마음에 씨앗으로 빛나며 별이야


노래라면

문득 터져나오는 기쁨이

웃음으로 눈물로 춤으로 꿈으로

피어나는 말이면서 가락이야


동시라면

사랑을 담은 글이지

별처럼 빛나는 글이지

노래가 되는 글이지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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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13. 말씀



  다달이 빨래터랑 샘터로 걸음을 합니다. ‘빨래터걸음’이란, 마을 어귀에 있는 빨래터하고 샘터에 낀 물이끼를 걷어내는 마실입니다. 이를 두고 마을 어르신은 ‘샘 청소’라고들 말씀합니다. 저는 2011년에 전남 고흥에 깃들어 살면서 그때부터 빨래터걸음을 잇습니다. 그해부터 여러 해는 언제나 저 혼자 솔질을 해서 물이끼를 벗기고 걷어낸 뒤에 우리 집 두 아이가 빨래터에서 물놀이를 했고, 요즈막은 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아버지 곁에서 함께 물이끼를 걷습니다. 때로는 아이들이 저희 신을 이 빨래터에서 손수 빨아요. 마을 어르신은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를 거들어 물이끼를 걷거나 저희 신을 스스로 빨래할 적에 돌담 너머로 건너다보시면서 말씀합니다. “아이고, 이를 고마워서 워쩌나. 샘터를 깨끗이 치워 주네. 복 받으실 거요. 용왕님이 다 지켜보실 거요. 암.” 빨래터 물이끼를 걷을 뿐인데 ‘용왕님이 지켜보’시고 ‘복을 받는’다고 하셔서 한동안 아리송했습니다. 이 작은 빨래터하고 용왕님은 무슨 사이? 그러나 마을 뒷메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고스란히 솟는 이 빨래터하고 샘터는 바다로 이어지는 물길이기도 할 테니, 이 물살을 타고 바다밑 미르님한테도 이야기가 가 닿을 만하겠다고 어림해 봅니다. 아무렴, 그렇겠지요. 아니, 마을 할매하고 할배가 말끝에 붙이는 한 마디 ‘암’, 그렇겠지요. ‘암’이란 한 마디는 전라말이 아니고 온나라에서 두루 쓰는 말일 텐데, 이 한 마디가 흘러나올 적에는 언제나 상냥하면서 따사로운 바람이 일렁이지 싶습니다. 고운 말씀을 여는 한 마디로, 고운 말씀을 마무르는 한 마디인 ‘암’입니다. ㅅㄴㄹ



말씀


한 땀 두 땀 엮어

옷 한 벌 지으니

여름내 시원하고

겨우내 따뜻한 살림


세 그릇 네 접시 담아

밥 한 끼니 차리니

아침에 넉넉하고

저녁에 푸짐한 하루


다섯 톨 열 알 심어

밭 한 뙈기 일구니

보금자리 알뜰하고

곳간이 살뜰한 갈무리


손수 지은 살림 듣고

몸소 차린 하루 나누고

같이 일궈 갈무리하는

어른들 말씀 배운다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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