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씁니다 ― 28. 어렵다



  2016년에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을 써냈는데, 그때에 틀림없이 올림말로 삼았거니 하고 여겼으나 막상 빠뜨린 낱말 가운데 ‘어렵다’가 있습니다. 이 낱말하고 비슷한 ‘힘들다’는 올림말로 삼았으나 ‘어렵다’를 왜 빠뜨렸나 하고 돌아보니 ‘까다롭다’도 빠뜨렸더군요. 그러나 빠뜨렸다기보다 사전을 사람들이 읽도록 하자니 너무 두껍게 할 수 없어서, 천 남짓 되는 낱말만 추려서 담기로 해서 미처 못 실었다고 해야 옳아요. 이렇게 세 해가 지난 며칠 앞서 아침에 불쑥 ‘어렵다’라는 낱말풀이가 머리에서 빙빙 맴돕니다. 마음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저한테 나긋나긋 속삭이더군요. “‘어렵다’라는 낱말은 있지, 마음이 없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어. 마음이 없으면 어떠니? 막히거나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지? 마음이 없어서 막히거나 갑갑하다면 받아들이지 못해. ‘힘이 들지 않’더라도 ‘어려운’ 일이 있어. 왜 그러겠니? 마음이 없기 때문이요, 마음이 없어서 못 받아들이는 탓이야. 이와 달리, 그리 어렵지는 않은데 힘이 드는 일이 있어.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지만 몸을 쓸 만하지 못하기에 ‘힘들다’고 해.” 제 마음에 대고 속삭인 목소리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저는 어떻게 마음소리를 받아들여서 낱말풀이를 할 수 있을까요? 문득 생각하면, 저는 낱말풀이를 붙이면서 ‘어렵다는 생각’이나 ‘힘들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다 해내리라 여기면서 한 걸음씩 걷습니다. 곁님하고 아이들을 바라보고, 하늘숨을 먹으면서 살림꽃을 노래하고플 뿐입니다. ㅅㄴㄹ



어렵다


키 크면 손을 뻗어

키 작으면 걸상 디뎌

높은 선반으로

어렵지 않게 올려


낯설기에 새롭게

무뚝뚝하기에 해사하게

나긋나긋 말 걸면

어려운 사이는 없어


두 벌 닷 벌 더 읽고

열흘 달포 마음 쓰니

어떤 수수께끼라도

어려운 실타래 풀 수 있어


까다롭게 따진다지만

빈틈없는 모습이기도 해

힘들게 해야 했다지만

서로 어깨동무하니 보람찼지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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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26. 손발



  수원마실, 서울마실, 일산마실, 서울마실을 거쳐 인천마실을 한 아침입니다. 길손집에서 하루를 묵고 잠을 아주 달게 자고 일어나서 씻는데 불현듯 낱말 하나가 마음에 파고들었어요. ‘손발’입니다. 몸을 씻으면서 노래가 넘쳐흘러서, 다 씻고서 곧장 글로 옮겨적었습니다. 이 글은 제 오랜 인천벗한테 쪽글로 띄웠습니다. 오랜 인천벗하고 그 아이네 누님한테 주고 싶더군요. 이렇게 오랜벗한테 글을 선물로 주면서 스스럼없이 말을 보탰어요. 제 통장에 오늘 남은 돈이 5만 원 안팎이기에, 오랜벗더러 인천버스나루까지 택시를 타고 갈 삯, 인천버스나루에서 고흥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갈 삯, 이렇게 해서 46000원을 설날 선물로 주면 고맙겠다고. 오랜벗은 기꺼이 설날 선물을 보내 주었습니다. 4000원을 얹어 50000원으로. 앞으로 우리 살림통장에 5만 원이 아닌 5억 원도 50억 원도 들어올 날이 있으리라 여겨요. 그렇지만 오늘은 아직 5만 원이기에 살림돈을 보태어 주는 즐거운 손길을 바랐습니다. 오랜벗이기에 이렇게 물어보고 바랄 수 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아름다운 사이라면, 서로 창피하거나 부끄러울 일이 없이 스스럼없이 툭 터놓고서 말하면 될 노릇이라고 새로 배웠어요. 제가 쓴 사전하고 책을 사 주시는 이웃님도 우리 살림살이를 돕는 상냥한 손길이자 발걸음이 되겠지요. 우리 책숲집 은행계좌에 살그마니 살림돈을 띄우는 이웃님도 포근한 숨결이자 꽃송이일 테고요. ㅅㄴㄹ


https://blog.naver.com/hbooklove/220188525158


손발


손을 정갈히 씻으니

손이 아주 좋아해

발을 깨끗이 씻으니

발이 참말로 반겨


노느라 지친 몸은

마루에 그대로 눕혀

반짝반짝 새 기운

샘솟도록 돌보지


배우느라 애쓴 머리는

만화책 펴고

마당에서 뛰놀고

하면서 환히 쉰다


손은 언제나 놀라워

뭐든지 지을 수 있어

발은 늘 대단해

어디든지 갈 수 있어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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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25. 른



  새벽바람으로 마을에서 고흥읍으로, 고흥읍에서 순천으로, 순천에서 기차로 갈아타고서 수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저녁에 서울에서 이야기꽃을 펴기로 했는데, 서울에 닿기 앞서 살짝 틈을 낼 만하구나 싶어서 수원나루에서 기차를 내린 뒤에 이곳에 있는 마을책집 한 곳을 거치려고 해요. 처음 찾아가는 곳인데 어떤 책빛이 반길지 가만히 그리면서 글을 짓습니다. 아른아른 생각을 기울여 ‘른’으로 첫머리를 풀려 하니, 지난 이레 동안 매우 부산스레 일손을 잡은 일이 떠올라 까무룩 곯아떨어져서 나른하군요. 곁님이 서른 즈음에 큰아이를 낳았지 싶고, 우리가 꿈을 바라보며 걸어가려는 길은 참으로 바른 몸짓이지 싶어요. ‘바르다’고 할 적에는 반듯반듯을 나타내기도 하겠지만, 다른 데를 기웃거리지 않고 우리 마음을 헤아리면서 씩씩하다는 결도 나타낸다고 느껴요. 오른쪽이 아니나 왼쪽도 아닌, 오롯이 숲바람 같은 흐름으로 살림길을 고릅니다. 차근차근 힘을 기르고, 어두운 밤을 고요히 불빛으로 사르면서, 옷 한 벌을 살뜰히 지으려고 천을 마를 줄 아는 몸짓이고 싶어요. 나이 아닌 철이 드는 어른이 되려 합니다. 빠른 걸음도 느린 걸음도 아닌 우리 걸음으로 한 발짝씩 딛으려고 합니다. 어른이란, 어린이 티를 벗은 사람이 아니라, 그야말로 철을 오롯이 헤아리고 익혀서 슬기로운 사랑으로 삶을 짓는 이슬떨이라고 생각합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곁에 없어도 느껴 아른

오늘은 힘이 빠져 나른

어머니 나를 낳은 서른

꿈을 보고 걸으며 바른


오른이 옳은을 가리킨다면

왼은 무엇을 가리킬까

푸른이 풀을 나타낸다면

파란은 어떤 길 나타낼까


꼭 하나 누리려고 고른

따스히 돌보는 마음으로 기른

불빛으로 밝게 사른

곱게 옷을 지으려고 마른


나이는 들었어도 참하지 않은

빠른 걸음은 안 할래

철철이 기쁘게 배우는

철든 어른이라면 반가워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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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24. 움찔



  삶을 읽는 눈을 배우기 앞서 곧잘 움찔 놀랐으나, 삶을 읽는 눈을 스스로 배운 뒤부터는 움찔 놀랄 일이 없습니다. 이러다가 요즈막에 옴찔 놀란 일이 있어요. 저녁나절에 혼자 조용히 불꽃숨을 가다듬으면서 쉬는데, 누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랑 자국을 느꼈어요. 제가 방문을 닫고서 불꽃숨을 쉴 적에는 아이들도 곁님도 안 들어오는데, 무슨 일로 문을 열고 들어오나 싶었지요. 눈을 가리고서 불꽃숨을 쉬는 터라 눈가리개를 벗고서 살짝 볼까 싶기도 했지만, 저는 제가 하던 대로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그런데 낯선 누가 제 앞으로 옆으로 뒤로 돌면서 뭔가 하더군요. 식은땀이 난다고 하는 말을 살며 느낀 일이 없다시피 한데, 아마 처음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왜 식은땀을 흘린다’고 하는가랑 ‘왜 등골이 오싹하다’고 하는가를 뼛속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고 눈가리개를 벗지 않았어요. 눈가리개를 했어도 다 보이니까요. “그대가 바람이면 바람으로 말을 하라. 아니면 나를 건드리지 마라.” 하고 마음으로 속삭이는데, 제가 앉은 자리에서 눈가리개를 한 채로 볼 적에 무릎 밑으로만 보이던 우람한 누가 제 몸을 매우 따스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춤을 추더니 실오라기 무더기가 돌개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일을 겪고서 ‘움찔’이라는 낱말을, 그리고 ‘움트다’라는 낱말을 맞대면서 새롭게 바라보았어요. ‘움’하고 ‘싹’은 아주 비슷한 낱말이에요. 예부터 ‘움트다·싹트다’를 말한 까닭을 알 만했고, 새로 돋는 잎이며 꽃이 옴찔옴찔 터지는 뜻도 알 만했습니다. ㅅㄴㄹ



움찔


움찔하는 작은 결

살짝 나타나는가 싶더니

봉오리 천천히 벌어지는

새봄 새아침 꽃


움찔하는 잔 몸짓

문득 보이는가 싶더니

부르르 보로로 떠는

놀란 얼굴 망설이는 눈


햇살이 콕콕 건드리니

움찔움찔 움트려는 잎

바람이 톡톡 치니

옴찔옴찔 깨어나려는 나비


놀랐지?

아찔아찔 휘둥그레

걱정 말아!

으쓱으쓱 어깨 펴렴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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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23. 쉿



  지난 1월 11일 아침에 순천서 기차를 타고 천안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고흥에서 아산이란 고장까지 가는 길이 참 아득하다 싶었으나 기차로 살피니 뜻밖에 퍽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더군요. 다만 순천에서 고속철도만 있는데, 빈자리가 드물어 ‘아이랑 함께 타는 칸’에 올랐어요. 처음 표를 끊을 적부터 ‘아이랑 함께 타는 칸은 시끄러울 텐데 그대로 표를 끊겠느냐?’고 묻는데요, 가만히 보면 기차에서는 아이보다 어른이 더 시끄럽다고 느낍니다. ‘아이랑 함께 타는 칸’에서도 그래요. 아이들이 놀며 내는 웃음소리나 말소리는 싱그럽습니다. 이와 달리 아이를 나무라거나 꾸짖거나 ‘쉿!’ 하며 내는 소리는 외려 크고 귀에 거슬려요. 두 시간 반 즈음 어른들 쉿타령을 내내 듣다가 문득 이야기가 하나 떠올라서 얼른 종이에 글을 적었습니다. ‘쉿’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어른들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새삼스레 돌아보았어요. ‘아이랑 함께 타는 칸’이라면,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가 아이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한결 신나게 기차마실을 하면 좋겠어요. 아니, 기차에서 ‘아이랑 함께 타는 칸’이란 이름보다 ‘아이랑 노래하며 노는 칸’이란 이름을 붙여서 아이가 갑갑해 하지 않으면서 여러 시간을 기찻길을 달리도록 마음을 써 주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풀밭에 뱀 나올까

아저씨는 자꾸

쉿쉿쉿 느릿느릿

호미질


옆에서 쉿소리 듣던

할아버지는 허허허

뱀은 발자국 울리는 결을

미리 느낀다고 귀띔


기차에서 버스에서

아줌마는 내내 

쉿 쉬잇 쉿쉿

손가락을 입으로


둘레서 쉿타령 듣던

할머니는 호호호

아이들은 깔깔 놀아야

튼튼히 큰다고 이바구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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