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밭 2

 


  땡볕을 고스란히 쬐며 마늘밭에서 일한다. 마늘밭에는 햇볕을 가릴 데가 없다. 논이든 밭이든 볕이 잘 들도록 마련하는 만큼 그늘 지는 자리가 없다. 밭둑 한켠에 잎사귀 우거지는 나무 한 그루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하지만, 잎사귀 우거지는 나무 한 그루 있으면 옆 밭이나 논에 그늘을 드리우겠지.


  한 조각이라도 더 논이나 밭으로 삼으려고 애쓴 끝에 나무그늘 없는 논둑과 밭둑이 되었는지 모른다. 먼먼 옛날에는 논둑이나 밭둑에 으레 나무가 줄을 짓고, 논일이나 밭일을 하는 틈틈이 나무그늘에 앉아 시원스레 부는 바람을 맞으며 땀을 훔쳤을는지 모른다.


  전쟁도 부역도 세금도 없이, 작은 마을 작은 살림집 조용하면서 따사로이 살아갔을 지난날을 돌이킨다. 흙에 깃들며 흙을 먹고 흙을 만지는 사람들한테 얄딱구리한 ‘병’이 생길 까닭이 없다. 따지고 보면, 한겨레 말마디에 ‘병(病)’은 없다. 이 낱말은 중국에서 건너왔고, 한자를 쓰는 임금님이나 권력자와 부자한테만 쓰일 뿐이었다. 흙사람은 때때로 ‘앓이’가 있었고 ‘아프’곤 했다. 정부가 서고 세금이 생기며 전쟁과 부역을 자꾸 일으키니, 수수하고 투박한 흙사람은 ‘일이 고된 나머지’ 앓고 아파야 했다.


  쑥과 마늘을 백 날 동안 먹은 곰은 사람이 되었다 했다. 쑥이며 마늘은 한겨레 삶에서 얼마나 오래된 먹을거리일까. 시골 어른들은 쑥을 그냥 쑥이라 일컫지 않고 ‘약쑥’이라 일컫는다. 그러고 보면, 비료나 항생제나 풀약을 안 쓰고, 나아가 비닐까지 안 쓰며 거두는 마늘이라 한다면 참말 ‘약마늘’이리라 생각한다. 먼먼 옛날, 나라도 정부도 권력자도 부자도 없이, 작은 마을 작은 살림집으로 이루어졌을 흙터에서는 미움도 생채기도 아픔도 전쟁도 없이, 온통 사랑과 꿈과 믿음과 어여쁜 노랫소리 가득했으리라 느낀다. 마늘밭에서 뒹굴던 내 발바닥이 이 흙밭에 서린 옛이야기 한 자락 들려준다. (4345.5.23.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밭 1

 


  이장님 마늘밭 마늘 캐는 일을 거들다. 마을 할머님들이 먼저 바지런히 마늘을 캐셨고, 캔 마늘을 굵기에 따라 큰 녀석과 작은 녀석으로 가른다. 이 다음에 쇠끈이나 새끼줄로 마늘을 쉰 알씩 엮는다. 엮은 마늘은 굵기에 따라 짐차 앞뒤로 나누어 차곡차곡 눌러 싣는다. 마늘을 가르고 솎으며 엮다가 날라서 싣는 일을 하는 틈틈이 땡볕을 쉬려고 나무그늘에 모두 모여 앉는다. 마을 할머님들은 막걸리를 마시고 김치를 자시며 고된 일을 쉰다. 나도 곁에서 막걸리와 김치를 들며 고단한 허리를 쉰다.


  나는 서른여덟 해 살아오며 처음으로 마늘밭 일을 거들었다. 마늘을 캐는 일부터 해 보고 싶었으나, 마늘 캐기는 할머님들이 미리 다 해 놓으셨다. 캔 마늘을 가르고 솎으며 엮다가 날라서 싣는 일만 하는데 참 만만하지 않다. 마늘밭은 얼마나 넓은가. 마늘밭이 몇 백 평이나 몇 천 평이 되는가. 그닥 넓지 않다 할 만한 마늘밭인데, 이만 한 일을 하기에도 만만하지 않다고 느낀다. 아니, 마을 일꾼이 모두 할머니이기 때문에 이처럼 느낄는지 모른다. 마을 일꾼이 젊은 아줌마와 아저씨였다면, 또 마을에 열대여섯 살 푸름이가 얼마쯤 있었다면, 또 마을에 열 살 안팎 아이들이 얼마쯤 있었다면, 이리하여 마을 어느 집에서 마늘을 캔다 할 때에 모두 품앗이를 한다 하면, 모두들 즐거이 일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참을 먹고 하루를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는 모두 도시로 가서 돈을 벌 테지. 도시로 가서 돈을 버는 젊은이는 시골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내는 마늘을 느긋하게 먹겠지. 때로는 회사에서 동무들하고 고기집에 마실을 가서 마늘을 먹을 테고, 때로는 식구들과 회집에 나들이 가서 마늘을 먹을 테지.


  마늘을 먹을 때에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을까. 마늘을 캐고 다루어 내다 파는 시골 어버이와, 이 마늘을 사서 까고 다듬어 밥상에 올리는 밥집 일꾼들 땀방울을 생각할 수 있을까.


  따순 봄날 마늘밭 할머니들 손가락은 온통 멍투성이에 핏투성이에 흙투성이.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며 자장노래 부르고 나서 한숨을 돌린 다음 내 손을 들여다보니, 내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퍽 도톰하게 피고름 하나 맺혔다. (4345.5.22.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찔레꽃 책읽기

 


  지난주쯤부터 손톱보다 조금 크다 싶은 하얀 꽃송이 달린 자그마한 찔레나무를 보았다. 하얀 꽃송이가 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찔레나무로구나 하고 알아채는 셈이지만, 하얀 꽃송이가 달린 모습을 보면서도 ‘응, 찔레 같은데?’ 하고 생각할 뿐, ‘이야, 찔레로구나!’ 하고 깨닫지 못한다. 네 식구 나란히 들길 마실을 다니면서 이 꽃송이를 바라보며 선뜻 ‘저기 보렴, 찔레꽃이란다!’ 하고 말하지 못한다. 요즈음 시골은 길이든 들이든 이웃을 만나기 어려우니, 막상 ‘찔레로구나 싶은 꽃을 보더라도 여쭈지 못한’다.


  어제 낮, 충북 음성에서 아이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찾아오셨다. 두 분이 하룻밤 주무시고 돌아가시기를 바라며 집 안팎을 며칠에 걸쳐 바지런히 치우고 쓸고닦았다. 그러나 두 분은 안 주무시고 바로 돌아가신다. 얼마나 서운하고 기운이 빠지는지 온 하루가 고단하고 슬프다. 그래도, 아이들 할머니한테 몇 가지 여쭈었다. 찔레꽃이 크기가 얼마만 하느냐 여쭙고, 요즈막 길에서 흔히 보는 하얀 꽃송이가 무슨 꽃이냐 여쭙는다. 아이들 할머니는 “아니, 찔레도 몰라?” 하면서 “바로 여기에도 있네. 저기에도 가득 폈네.” 하고 말씀하신다.


  어머니, 그럼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인천에서 찔레꽃을 구경했던 적이 떠오르지 않는걸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인천 골목동네에도 틀림없이 곳곳에 찔레꽃이 흐드러졌을 테지만, 찔레꽃이라 알려준 이웃 어른은 없었거든요.


  아이들 재우며 자장노래로 이원수 님 동시에 가락을 붙인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남모르게 하나둘 따먹었다오.” 하는 노래를 날마다 불렀다. 정작 아이들 어버이로서 ‘얘들아, 우리 찔레잎 따먹을까?’ 하고는 얘기하지 못했지만, 새해에는 찔레꽃을 제대로 알아보아야지 하고 다짐하며 이 노래를 늘 불렀다. 아이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금세 돌아가셔서 못내 서운했지만, 이제부터 아이들하고 찔레꽃잎 같이 따먹고, 밥에도 찔레꽃잎 얹어서 먹으려 한다.

 

 ..


  요즈음 사람들은 봄을 맞이하며 봄꽃을 기다린다 하지만, 막상 벚꽃이니 진달래이니 개나리이니 하고 말하는 데에서 그친다. 먼먼 옛날부터 여느 시골 사람들하고 살가운 벗이던 찔레꽃 구경하거나 즐기는 일은 거의 생각하지 못하거나 않는다. 아무래도, 요즈음 사람들은 몽땅 도시사람이기 때문일까. 요즈음 사람들은 고작 쉰 해쯤 앞서만 하더라도 이 나라 거의 모두 시골 흙일꾼 딸아들로 태어나 살아온 줄 잊기 때문일까.


  나는 봄을 맞이하며 다른 어느 꽃보다 살구꽃을 기다린다. 살구꽃이 질 무렵이면 딸기꽃을 기다린다. 딸기꽃이 저물 무렵이면 찔레꽃을 기다린다. 찔레꽃이 저물 무렵에는 감꽃을 기다릴까. 감꽃이 저물 무렵이면 어느 꽃을 기다리려나. 들에서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씨앗을 틔우며 씩씩하게 자라나는 찔레나무가 우리 집 뒤꼍으로도 날아들 수 있기를 빈다. (4345.5.20.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푸른 빛 모 책읽기

 


  모내기를 앞둔 시골마을 논자락에는 모판에서 볏모가 푸르게 자란다. 볍씨에서 막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며 줄기를 올리는 볏모는 포근하며 시원한 논으로 옮기면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더 높이 줄기를 올리겠지. 푸른 들판은 푸른 숨결을 내뿜으며 여름을 난다. 가을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몸을 살찌우며 겨울을 맞이하도록 한다. 사람들은 벼에서 알맹이를 먹는다지만, 벼 알맹이를 먹기 앞서까지 논에서 푸른 빛깔 드러내던 볏잎 숨결을 먹었다. 벼 알맹이를 먹을 때에는 한 알이 뿌리내려 수백 알이 되는 너른 목숨을 먹는 셈이다. 한 포기씩 알뜰히 건사하며 모를 낸다. 열 포기 백 포기가 모여 논자락을 이룬다. 사람들은 벼 한 포기가 긴긴 여름부터 가을까지 받아들인 햇살을 함께 먹고, 벼 한 포기가 오래오래 마신 빗물을 함께 마시며, 벼 한 포기가 언제나 쐬던 바람을 함께 쐰다. 볏포기에 스미는 사랑은 숟가락 들어 밥그릇 비우는 사람들 가슴으로 새삼스레 천천히 되스민다. (4345.5.18.쇠.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2-05-19 08:01   좋아요 0 | URL
아, 벌써 모판이...
밥 먹을 때 쌀알에 숨어 있는 그 숨결, 바람결, 햇살을 느끼며 먹을 수 있는, 그런 마음결이면 참 좋겠습니다.

숲노래 2012-05-19 08:04   좋아요 0 | URL
날마다 잘 헤아려 보셔요.
그러면 더 즐겁게 밧맛이 나요.

..

눈치가 빠른 분은 알아보셨을 텐데,
이 글은 '사름벼리' 딸아이한테 바치는 글이에요.

사름벼리 이름 가운데 '사름'은 바로
모내기하고 얽힌 말이거든요~ ^^
 


 무화과 책읽기

 


  무화과나무에 꽃송이 달립니다. 무화과나무 꽃송이는 다른 나무 꽃송이하고 사뭇 다르게 생깁니다. 언뜻 보기에는 ‘꽃 같지 않다’ 여길 만합니다.


  무화과는 따로 꽃이 피지 않는다 하고 딱히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서 ‘無花果’처럼 한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다고 하지요. 사람이 바라보는 눈으로는 ‘꽃이 따로 없고 열매 또한 딱히 없다’ 할 터이나, 무화과나무 삶으로 돌아보면, 사람 눈으로 볼 때에는 느낄 수 없는 꽃송이요, 사람 넋으로 헤아릴 때에는 알 수 없는 열매라 하리라 느낍니다.


  무르익는 한여름에 먹는 무화과 꽃송이(또는 꽃주머니)는 오월 한복판에 들어서자 통통하게 물이 오릅니다. 언제 이만큼 꽃송이(또는 꽃주머니)가 부풀었나 싶어 놀랍니다. 내가 날마다 틈틈이 들여다보더라도 무럭무럭 자랄 테고, 내가 따로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스스로 씩씩하게 자라겠지요.
  아이들은 날마다 자랍니다. 튼튼하게 잘 크는 첫째 아이 키를 다달이 재 보는데, 다달이 잴 때면 1센티미터씩 높아집니다. 따로 줄자로 키를 재지 않더라도 아이를 안거나 재울 때면 이 아이 키가 느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딱히 아이를 안지 않더라도 가만히 바라보며 이 아이 키가 자란다고 느낍니다.


  어른이 되면 키가 더 늘지 않습니다. 어른은 몸뚱이가 더 커지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면 바야흐로 마음이 자랍니다. 어른이 되었다 할 때에는 날마다 새삼스레 마음이 깊어지거나 넓어집니다. 아니, 마음이 자라고, 깊어지며, 넓어질 때에, 시나브로 ‘어른’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하다 싶습니다. 마음을 가꾸고, 돌보며, 사랑할 때에, 참말 ‘사람’이라는 이름이 걸맞다 싶습니다.


  햇살을 먹고 바람을 마시며 물을 받아들이는 흙땅에서 무화과나무가 자랍니다. 새잎이 돋습니다. 새 꽃봉우리 터집니다. 비가 멎은 새 아침 하늘은 파랗고, 들새와 멧새는 새벽 일찍부터 신나게 노래하며 먹이를 찾아 마을과 들판을 날아다닙니다. (4345.5.15.불.ㅎㄲㅅㄱ)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2-05-15 07:06   좋아요 0 | URL
꽃 '봉우리'가 맞는가요? 저는 봉오리로 알고 있었는데...
무화과 꽃송이가 꼭 포도씨 확대해놓은 것 처럼 생겼네요.

숲노래 2012-05-15 10:0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때때로 잘못 적어요.
산봉우리, 꽃봉오리,
이렇게 생각하면 틀릴 일은 없는데,
새벽에 아기 안고 글을 쓰며 졸음을 참다가
잘못 적었네요 @.@

에구구~

기억의집 2012-05-15 13:40   좋아요 0 | URL
무화과는 꽃이 없다고 해서 무화과라고 알고 있었는데,
꽃송이가 피는군요. 색깔을 보니 나뭇잎하고 색이 같아 언뜻보면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알고 있던 지식을 수정해야겠는데요.
근데 왜 아직까지도 무화과로 이름지을까요?

숲노래 2012-05-15 15:44   좋아요 0 | URL
수술이며 암술이며, 저 '주머니' 같은 푸른 싸개 안쪽에만 옹크린 채 있어요. 그러니, 따로 꽃이 없다고도 말하고, 이 '수술 암술 덩어리'라 할 뭉치가 그대로 '열매' 노릇까지 하지만, 이 또한 이 모습 그대로 바알갛게 익으니, '무화과'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도 있으리라 느껴요... @.@

노이에자이트 2012-05-15 14:34   좋아요 0 | URL
무화과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입니다.광주는 오래된 주택가에서 가끔 볼 수 있죠.우리동네 주변에도 있는데 무화과 딸 때 하얀 액이 나오죠.저는 껍질이고 뭐고 다 먹습니다.그런데 무화과 못먹는 사람들이 꽤 있더군요.고흥에도 대량재배하는 곳이 있나요?

숲노래 2012-05-15 15:44   좋아요 0 | URL
글쎄, 잘 모르겠어요. 어디엔가 있을는지 모르나, 다들 집에서 먹을 만큼만 몇 그루 두시지 싶어요~

인천에도 골목집마다 무화과나무가 꽤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