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을 먹는 책읽기

 


  마을 비탈밭이 있는 뒷산으로 네 식구 함께 오른다. 비탈밭은 어디에서 끝나고 뒷산은 어떻게 이어질까 생각하며 이리저리 다니다가 딸밭을 한 번 보고는, 곧잘 이곳으로 찾아가 딸먹기를 한다. 다른 데에서는 딸을 따면서 모기에 물리지만, 이곳에서는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 다른 데에서는 딸을 따며 딸만 딸 뿐이지만, 이곳에서는 딸을 따고는 땅바닥에 풀썩 앉아 마을을 널찍하게 바라보며 쉴 수 있다.


  새빨갛게 익은 딸을 따서 병에 담는다. 첫째 아이랑 옆지기가 병 하나씩 들고 둘째 아이한테 틈틈이 먹이면서 맛나게 딸을 먹는다. 딸을 먹는 입은 빨간 물이 든다. 손도 빨간 물이 들고, 딸내음 밴다.


  들딸이든 멧딸이든 어느 누가 풀약을 치거나 비료를 주지 않는다. 오직 햇살이 딸밭을 돌본다. 오로지 빗물이 딸밭에 물을 준다. 그예 바람과 흙이 딸밭을 살찌운다.


  딸을 먹으며 햇살을 함께 먹는다. 딸을 먹으며 바람을 함께 마신다. 딸을 먹으며 내 몸으로 흙기운이 스며든다. 읍내 저잣거리에 나가 보면, ‘딸기’는 벌써 예전에 들어가고 안 보인다. 요즈음은 참외랑 수박이랑 곳곳에 널린다. 그런데, 오이도 참외도 박도 수박도 이제서야 꽃이 필 때인데, 어떻게 벌써 나올 수 있을까. 모든 저잣거리 모든 가게에 나온 참외나 수박이란 온통 비닐집에서 풀약과 비료로 키웠을 테지. 오월 끝무렵이나 유월 첫머리에 참외나 수박을 사다 먹는 사람은 햇살이나 바람을 먹지 못한다. 오직 풀약과 비료를 먹을 뿐이다. 지난 사월과 오월 첫머리에 가게에서 딸기를 사다 먹은 사람 또한 풀약과 비료를 먹었을 뿐, 막상 햇살과 바람은 못 먹었으리라 느낀다. 딸밭은 오월 한복판부터 유월 한복판까지 흐드러진다. 딸은 이무렵 새빨갛게 익으며 우리 몸과 마음을 새빨간 꽃빛과 햇빛으로 물들인다. (4345.6.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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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 책읽기

 


  해거름에 뒷밭에 물을 주다가 뽕나무에서 까만 오디가 떨어진 모습을 본다. 바람이 그닥 안 불었는데 오디가 떨어지네 하고 생각하며 한 알 두 알 줍는다. 뽕나무 가지가 퍽 높아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오디를 따겠거니 싶더니, 이렇게 한 알 두 알 바닥에 떨어지기도 한다고 문득 깨닫는다. 안 떨어지고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달린 오디가 훨씬 많겠지. 날이 밝으면 오디를 더 줍고, 사다리를 챙겨서 신나게 오디를 따자고 생각한다. 들딸이랑 멧딸을 배부르도록 따먹으니, 이제 오디철이 되는구나 싶다. 식구들 모두 오디를 맛나게 먹으니 좋다. 말랑말랑한 오디는 흙과 햇살과 바람과 비가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면서 나무 한 그루를 살찌운 푸른 맛이다. (4345.6.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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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서재는 '다 다른 빛깔로 다 다른 즐거움 누리는 서재'이기에 좋은 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과 '네 생각'은 서로 다르면서 이 지구별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고 느낍니다. 서로 다르면서 아름다운 이웃 서재인 줄 살피지 않고, 스스로를 갉아먹기까지 하는 빈말과 막말로 생채기를 내는 일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빕니다. 남한테 '당신은 이걸 알아야 해' 하고 밀어붙인다든지 '당신이 하는 말은 틀렸니' 하고 말한들 무슨 보람이 있을까요. 스스로 가장 옳다고 여기는 길을 걸어가면서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글'을 써서 나누면 넉넉합니다. '비판'이라는 이름을 내걸면서 이웃을 다치게 하고, 다친 이웃이 알라딘서재를 떠나도록 하는 일은 참말 누구한테 기쁘거나 좋은 일이 될까 알쏭달쏭합니다.

 

 


 석류꽃 몽우리 책읽기

 


  감나무에 감꽃이 맺힌다 해서 모든 감꽃이 천천히 무르익어 감알이 되지는 않습니다. 고추꽃도 오이꽃도 콩꽃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빗물에 톡 떨어지는 꽃잎이 있어요. 봄바람에 스러지는 꽃잎이 있어요. 미처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 다리에 부딪히며 바스라지는 꽃잎이 있어요. 그런데, 빗물도 봄바람도 사람들 다리도 아닌데, 그저 조용히 스스로 흙으로 돌아가는 꽃잎이 있어요.


  꽃잎이 왜 씨나 열매를 맺지 않고 흙으로 돌아가는가를 모두 알아채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꽃잎 스스로 알 테고, 꽃잎 피우는 풀이나 나무가 알 테며, 풀이나 나무를 살찌우는 지구별이 알 테지요.


  밭뙈기에 떨어진 감꽃을 주워서 혀에 올려놓습니다. 감꽃 내음을 맡으며 천천히 오물오물 씹어서 먹습니다. 흙바닥에 떨어진 매화 열매를 주워 흙땅으로 옮깁니다. 아이는 이웃집 석류나무 밑으로 들어가 미처 봉오리가 되지 못한 몽우리를 줍습니다. 석류꽃은 바알간 빛깔 환한데, 봉오리가 못 된 몽우리는 노오란 빛깔 맑습니다. (4345.6.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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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름빛 책읽기

 


  올여름에도 첫째 아이 이름이 된 ‘사름’을 맞이한다. 우리 집에는 논이 없으나 이웃 집에는 모두 논이 있으니, 날이면 날마다 모내기를 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먼저 모내기를 마친 논에는 반짝반짝 눈부신 논물이 푸른 숲 멧자락을 비춘다.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에 걸쳐 논물은 새삼스레 바뀌는 그림을 끝없이 그린다. 옮겨심은 모가 뿌리를 튼튼히 내린 논을 들여다보면 볏모 빛깔이 그지없이 푸르다. 그런데, 아직 옮겨심지 않은 모도 모판에 꽂힌 모습을 바라보면 가없이 푸르다. 마을 이장님 댁 모판을 나르는데, 모판 한복판에 참개구리 한 마리 떡하니 앉아 골골 노래를 부르던걸.


  다섯 살 첫째 아이 사름벼리는 제 이름 넉 자 가운데 첫 두 글자가 비롯한 ‘사름’을 날마다 마주한다. 날마다 마주하면서 아직 ‘낱말과 이름’을 서로 맞대어 헤아리지는 못한다. 한 해를 더 살고 또 한 해를 새로 살면 시나브로 알아채며 즐길 수 있겠지.


  모 심는 기계에 모판을 실을 때에 일손을 살짝 거들며 어린 볏모가 얼마나 보드라운가를 새삼스레 느낀다. 이 보드라운 볏모가 보드라운 논흙에 뿌리를 내리고 보드라운 햇살을 먹는 한편 보드라운 바람을 누리면서 보드라운 꽃을 피우고 보드라운 열매를 맺는다. 여름빛은 사름빛이다. (4345.6.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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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두알 책읽기

 


  멧딸을 따러 네 식구 멧길을 오른다. 멧길은 밭둑을 따라 차츰차츰 비알이 진다. 먼먼 옛날부터 이곳 멧자락에 밭을 일구며 돌 쌓아 밭둑 이룬 분들 손길이 얼마나 깊이깊이 배었을까. 멧길을 올라 멧딸을 따기 앞서 마을 이웃집 앞을 지나가는데, 앵두나무 밑에 경운기를 대고 앵두알 따는 이웃 할매와 할배를 만난다. 우리더러 같이 먹자며 앵두알을 한 아름 따서 베푸신다. 나누어 받은 앵두알을 아이들도 어른들도 함께 먹는다. 둘째 아이는 한손에 한 알씩 쥐고는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이리 빨고 저리 빨고 하면서 논다. 작은 손에 작은 알 하나씩 조물딱조물딱 빨간 물 들으며 아이 몸속으로 스며든다. 앵두씨를 심어 앵두나무 키우고 싶다 생각한다. 앵두씨 하나 우리 마당 가장자리에 심는다. (4345.6.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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