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



  요즈음은 그야말로 ‘말’로 폭력을 일삼는 일이 엄청나게 늘었다. 한국말에는 ‘욕(辱)’이 없었는데, 요새는 웬만한 누리집마다 그악스럽고 끔찍하다 할 만한 욕이 넘친다. 욕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말로 죽이는’ 짓이 가득하다.


  한국말에는 참말 ‘욕’이 없었다. 한국말에는 그저 ‘말’만 있었다. 이는 다른 겨레한테도 똑같으리라 느낀다. 손수 삶을 짓고 오순도순 어우러져서 두레와 품앗이로 사랑을 나눈 사람들한테 ‘말’이 아닌 ‘욕’이 있어야 할 까닭이 없다. 다만, ‘막말’이라든지 ‘거친 말’이라는 말이 찬찬히 생겼다. 권력자가 나타나고 전쟁이 불거지면서 이런 말이 태어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본다.


  ‘말로 사람을 죽이는 댓글’은 누가 쓸까? 흔히 ‘초딩’이 그런 글을 쓴다고 하지만, 초딩이 그런 댓글을 남길 만큼 느긋하거나 할 일이 없으랴 싶기도 하다. 초딩 가운데 ‘말로 사람을 죽이는 댓글’을 쓰는 아이가 있기도 할 테지만, 웬만한 ‘말로 사람을 죽이는 댓글’은 바로 어른이라는 사람이 쓰리라 느낀다. 나이만 먹은 사람인 어른, 그러니까 ‘철부지’라고 할 사람들이 쓰지 싶다.


  오늘날 사회가 메마르고 차갑기 때문에 ‘말로 사람을 죽이는 글’을 쓰는 사람이 나타난다고 느낀다. 봉건제 사회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버젓이 신분하고 계급을 가르는 오늘날 사회이다. 돈과 졸업장과 얼굴 따위는 신분하고 계급을 가르는 잣대가 된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입시지옥에 휩쓸리면서 마음이 다치거나 망가진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는 ‘말로 사람을 죽이는 글’을 쓰는 철부지가 생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괴롭고 힘든 삶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괴롭고 힘든 삶을 스스로 떨쳐내지 않는다면, ‘말로 사람을 죽이는 짓’도 사라지지 않고, 떨쳐낼 수 없으리라 느낀다. 4348.8.2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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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일, ‘여덟 살 첫 한국말사전’



  한국말사전을 새롭게 쓰는 사람으로서 ‘아직 아이가 없던 때’부터 “초등 국어사전” 편집자 노릇을 했다. “초등 국어사전” 편집자 노릇을 할 적에 ‘나도 언젠가 아이를 낳을까?’ 하는 생각은 했으나, 정작 아이를 낳아 돌볼 줄은 알지 못했다. 그무렵에는 아직 나한테 아이가 없었으니, ‘어린이가 곁에 두고 읽을 한국말사전’을 어떻게 엮으면 좋을는지 더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느덧 해는 흐르고 흘러 큰아이가 여덟 살을 씩씩하게 누빈다. 열 살 어린이가 읽을 ‘숲말 이야기책’은 한 권 썼고 열여섯 살 푸름이가 읽을 ‘한국말 이야기책’도 한 권 썼는데, 정작 여덟 살 어린이한테 선물로 물려줄 ‘첫 한국말사전’은 미처 엮지 못했다. 어젯밤 잠자리에서 생각에 잠기는데, 다른 어느 일보다 이 일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못 했구나 하고 깨닫는다.


  새벽 동이 트기 앞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 이불깃을 여미어 주며 꿈을 새롭게 한 가지를 그린다. 그래, 큰아이한테 ‘첫 한국말사전’을 선물로 물려주지 못했지만, 큰아이하고 함께 ‘일고여덟 살 어린이가 읽을 첫 한국말사전’을 지으면 된다. 이리하여, 다섯 살 작은아이가 앞으로 여덟 살이 되기 앞서 ‘첫 한국말사전’을 마무리지으면 되지.


  두 아이를 낮잠을 재우고 나서 방을 치운다. 한쪽 벽을 아주 말끔하게까지는 아니나, 벽을 통째로 쓸 수 있을 만큼 비운다. 방바닥을 새롭게 훔친다. 이러는 동안 작은아이부터 낮잠을 깬다. 저녁을 차리는 동안 마루를 치워 주렴 하고 바란다. 아이들은 고맙게 마루를 치워 준다. 저녁밥을 다 지어서 밥상을 차린 뒤, ‘방 치우기’를 마무리짓는다.


  자, 이제부터 큰아이하고 벽에다 흰종이를 붙인 뒤 ‘ㄱㄴㄷ’에 따라서 한 쪽씩 ‘어린이가 삶을 사랑하면서 익힐 말’을 하나씩 적으려 한다. 말풀이하고 보기글은 큰아이하고 함께 새롭게 지을 생각이다. 이리하여, 아마 한국에서는 처음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없었지 싶은데, ‘여덟 살 어린이’가 ‘사전 편집자’ 노릇을 함께 하는 책을 오늘부터 쓰기로 한다. 4348.8.24.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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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24 21:51   좋아요 0 | URL
언제나 첫째보다 둘째가 더 큰 혜택 보는 거 같습니다. ^^

숲노래 2015-08-24 21:59   좋아요 0 | URL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어요.
큰아이한테는 그야말로
입에 침이 다 마르도록 날마다 몇 시간씩 책을 읽어 주었는데,
작은아이는 큰아이가 읽어 주는 목소리를 듣거든요 ^^;;;;;;

저마다 다른 사랑을 받고
저도 저마다 다른 사랑을 새롭게 지을 수 있어서
늘 고맙습니다 ^^
 

‘가해자’가 읊는 책읽기



  ‘가해자’인 사람은 스스로 ‘가해자’라고 생각하지 않기 일쑤입니다. 아니, 스스로 ‘가해자’인 줄 모릅니다. 이러면서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맞을 만하니 맞지.”라든지 “네가 멍청하니까 맞지.”라든지 “네가 하는 짓이 미우니 맞지.”처럼.


  ‘피해자’가 “맞을 만하니 맞는다”고 말하는 이들은, “때릴 만하니 때린다”고 하면서 이웃을 괴롭히는 ‘가해자’가 되지요. 이러면서, 이들 가해자는 “피해자도 똑같이 잘못했다”고 읊기 마련입니다. “맞을 만하니 맞는다”고 하는 “똑같이 잘못한 사람”이라는 굴레를 얼결에 뒤집어씁니다.


  피해자인 사람은 무엇을 했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해자 혼자서 가해를 하고 핑계를 댈 뿐입니다. 피해자인 사람은 “때리지 마. 아파.” 하고 외치지만, ‘가해자’인 사람은 “난 안 아프게 때렸는데? 그게 뭐가 아파? 그건 때린 것도 아냐.” 하고 비아냥거립니다.


  가해자는 가해자 스스로 한 일이 ‘폭력’인 줄 하나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이기 때문에, 가해자는 언제나 폭력을 휘두릅니다. 그리고, 이 폭력으로 피해자를 수없이 만들어서 괴롭히는데, 끝없는 폭력은 그야말로 끝없는 폭력일 뿐이라서, 이 가해자는 나중에 나이가 많이 들어 늙은이가 되면, 그동안 가해자인 그대가 했듯이 다른 가해자한테서 학대를 받는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아무 말이나 함부로 안 하겠지요. 사랑하는 사이라면 오직 사랑만 말하겠지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아닌 막말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른다고 느낍니다. 쓸쓸합니다. 사랑을 모르니 폭력을 휘두릅니다. 데이트폭력이든 언어폭력이든 주먹이나 발길질이나 몽둥이 따위를 휘두르는 폭력이든, 모든 폭력은 언제나 폭력일 뿐입니다.


  사랑은 폭력을 쓰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으로 맞이하면서 흐를 뿐입니다. 폭력은 언제나 폭력을 씁니다. 오직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폭력만 알기에 ‘가해자 스스로 휘두르는 폭력’이 가해자 스스로까지 망가뜨리는 줄 모르면서 끝없이 폭력으로 줄달음질을 칩니다.


  피해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피해자는 오직 하나 사랑을 해야 합니다. “내가 너한테 맞았으니, 나는 딴 힘없는 놈을 찾아서 때려서 이 성풀이를 해야지!” 하고 생각해서는 똑같은 가해자가 될 뿐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한테 거의 아뭇소리를 안 하고서 그저 얻어맞기만 하는 까닭은 아무것도 몰라서 그러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해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니 그저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 짓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해자는 나중에 법에 걸려서 옥살이를 하더라도 “가해자로 저지른 폭력”을 못 깨닫기 일쑤입니다. 참으로 쓸쓸합니다.


  그러나, 오직 사랑을 가슴에 담으면서 사랑을 생각하려 합니다. 사랑을 생각할 때에 그저 사랑이 흐르면서, 언제나 사랑이 되는 삶으로 하루를 여니까요. 사랑을 생각하면 참말 환하고 맑은 꽃이 내 둘레에서 피어나서 방긋방긋 웃으며 노래를 불러 줍니다. 4348.8.2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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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8-22 21:11   좋아요 0 | URL
이 글은 서재이웃님이 <7층>이라는 책을 읽으시고서,
그 책에서 나오는 ˝폭력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를 풀어놓으셨기에
나도 그 책과 글에 공감하면서
폭력이란 무엇이고,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돌아보면서 썼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엉뚱하게 퍼 가서 왜곡하는 분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모든 작가는 ‘작가’이기 앞서 ‘사람’입니다



  모든 작가는 작가라는 이름이기 앞서 사람입니다. 독자도 독자라는 이름이기 앞서 사람입니다. 작가이든 독자이든 똑같이 아름다운 사람이며, 이 지구별에서 저마다 제 보금자리를 가꾸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작가는 작가라는 이름이 붙더라도 언제나 사람이고, 독자도 독자라는 이름을 쓰더라도 언제나 사람입니다.


  나는 두멧시골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사는 어버이로 살면서 한국말사전을 엮는 일을 합니다. 내가 책을 여러 권 내놓았기에 나를 두고 ‘작가’라고 하는 분이 있고, 때로는 ‘작가 선생님’이라고 하는 분이 있으나, 나는 언제나 이런저런 이름에 앞서 ‘아이들 어버이’요 ‘시골사람(시골 아재)’입니다. 아이들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작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는 누구나 나를 두고 ‘아재!’나 ‘아재요!’ 하고 부릅니다.


  작가이든 독자이든 누구나 밥을 먹고 똥오줌을 누며 잠을 잡니다. 작가이든 독자이든 누구나 꿈을 꾸고 노래를 부르며 웃거나 웁니다. 작가는 독자를 비아냥거리거나 이기죽거릴 까닭이 없습니다. 독자도 작가를 비아냥거리거나 이기죽거릴 까닭이 없습니다. 작가 사이에서도, 독자 사이에서도, 그리고 작가도 독자도 아닌 ‘사람 사이’에서도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밭을 돌보는 사람이 밭에 심은 남새에 뜨거운 물이나 따뜻한 물을 붓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한테는 그저 미지근한 물이라도 풀이나 남새한테는 너무 뜨거워서, 미지근하거나 따뜻한 물을 맞는 풀이나 남새는 그만 시들어서 죽습니다. 사람한테는 아무것이 아니라지만 풀과 남새한테는 다르지요. 어른들은 아이를 가볍게 툭 쳤다고 하지만, 아이는 그만 나가떨어집니다. 계단에서 어른이 아이를 툭 쳤다가는 그만 아이는 계단에서 데구르르 구르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솜주먹’으로 때린다고 해서 ‘때리기(폭력)’가 아닐 수 있을까요? 지난날 군대와 고문실에서는 수건으로 나무작대기를 둘둘 감아서 후려치곤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겉으로는 멍이 들지 않으나 속으로는 곯으면서 뼈가 욱씬거리도록 아픕니다. ‘때린 사람 잣대’로 ‘때리지 않았다(폭력이 아니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작가라는 이름이 붙는다고 해서 비아냥이나 이죽거림을 들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작가’라고 부르면서 일부러 비아냥이나 이죽거림을 할 까닭도 없습니다. 4348.8.2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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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 인형



  보름쯤 앞서 인천마실을 하면서 아이들이 ‘아톰 인형’을 하나씩 얻었다. 그런데 어제 마룻바닥을 굴러다니는 아톰 인형을 보니 팔이랑 다리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이들이 갖고 놀면서 팔이랑 다리랑 머리를 자꾸 떼어서 굴리면 이를 다시 찾아내어 붙이는데, 잃고 찾고를 되풀이하다가 끝끝내 팔이나 다리나 머리를 잃은 아톰 인형이 여럿이다. 새로 얻은 아톰 인형조차 팔다리를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어디에다 빼 놓았니? 자꾸 빼지 말고 곱게 갖고 놀 수는 없니? 4348.8.7.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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