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오른다리 재활훈련을 하다가
등허리도 결리고 힘들어서
부시시 일어나서
이런 글을 씁니다.

생각해 보면,
나부터 스스로 "돈이 없다"는 생각을
퍽 오랫동안 했구나 싶고,
이런 생각을 마음에서 내려놓은 지
얼마 안 되었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돈이 없다는 거짓말


  사람들이 흔히 하는 거짓말 하나는 “돈이 없다”이다. 참말 돈이 없을까? 아니다. 스스로 “돈이 없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에 돈이 나한테 안 온다.

  돈은 우리 곁에 늘 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이 돈을 내 주머니에 끌어들이지 않을 뿐이다.

  돈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생각을 해야 할 테지. 어느 만한 돈이 나한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할 적에 ‘내가 바라는 돈이 터무니없이 많다’라든지 ‘내가 꿈꾸는 돈이 그야말로 안 들어올 듯하다’ 따위 생각은 터럭만큼도 품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이 터럭만큼이라도 있으면, 이 터럭만 한 생각대로 이루어진다.

  오롯이 마음을 모아서 돈을 생각해야 하고, 이 생각을 늘 가슴에 품어야 한다.

  돈을 써야 할 일이 있어서 돈을 모아야 한다면, 돈이 될 만한 일을 할 수 있다. 누군가한테서 빌릴 수 있다. 복권에 뽑힐 수 있다. 집이나 땅이나 자가용 따위를 팔 수 있고, 내 옷가지나 책이나 컴퓨터나 무엇이든 몽땅 들고 나와서 벼룩시장에 내다팔 수 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 “돈이 없다”고 말한다면 무슨 보람이 있을까.

  “돈이 없다”는 거짓말하고 비슷하게 “집안일을 할 줄 모른다”라든지 “아기를 볼 줄 모른다”라든지 “똥기저귀를 갈 줄 모른다”라든지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라든지 “어떤 것을 못 먹는다”라든지, 수많은 거짓말이 있다. 이런 생각이 왜 거짓말인가 하면, 나 스스로 이런 생각을 가슴속에 품으면서 ‘없어!’나 ‘못 해!’가 한결같이 이루어지도록 옭아매기 때문이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더더욱 “돈이 없다” 같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바로 오늘 배워도 좋을 테지. 그러나 이듬해에 배워도 되고, 세 해나 열 해 뒤에 배워도 된다. 언제라도 배우면 된다. 바로 오늘부터 배우는 사람이 가장 잘 배우지 않는다. “수업료가 없다”면서 오늘 어떤 수업을 못 듣는대서 못 배우지 않고, “수업료가 있는” 사람이 오늘부터 배운대서 나보다 더 잘 배우지 않는다. 마음이 서야 비로소 배우고,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배운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배울 수 없다.

  거저로 나누어 주는 책은 없다. 도서관에 가면 거저로 빌릴 수 있으나, 책방에 꽂힌 책은 돈을 치러서 사야 한다. 도서관에 꽂힌 책도 ‘세금(여느 때에 우리가 낸 돈)’으로 장만해서 갖추는 책이다. 책 한 권을 읽어서 배우려 할 적에는 책값을 치른다. 여러 사람이 움직여서 강의를 하고 훈련을 알려준다면, 이러한 배움길에 드는 배움삯(수업료)은 마땅히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다. 책을 읽고 싶다면 책값을 마련해야 하듯이, 아니면 도서관에 가야 하듯이, 아니면 누군가한테 책을 선물해 달라고 해야 하듯이, 어떤 배움길에 접어들고 싶으면 배움삯을 신나게 모아야 한다. 또는 집이나 땅이나 자가용이나 컴퓨터 따위를 팔자. 팔 것이 없다고? 그러면 내 몸에 걸친 옷조각이라도 팔자. 팔 것이 없다는 말은 언제나 거짓말이다.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일자리는 일꾼이 으레 모자라기 마련이다. 몸을 많이 쓰는 일을 하면서 배움삯을 모을 수 있다. 카드를 긁어서라도 배움삯을 댄 뒤, 카드빚을 신나게 갚아도 된다.

  “돈이 없다”는 거짓말은 이제 내려놓고, “내가 배울 마음이 아직 없다”는 참말을 해야 한다. 나한테 “배울 마음이 있다”면 돈은 대수롭지 않다. 맨몸으로 ‘배움터(수업을 하는 곳)’까지 걸어가서, 강의실 벽에 귀를 대고 들으면서라도 배우면 된다. 미국에서 수업을 하면 미국까지 헤엄쳐서 건너간다든지, 배를 몰래 타고 간다든지 어떻게든 수를 내면 된다. 마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하지만,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다 못 한다. 4348.9.5.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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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무릎이 깨진 책읽기



  자전거를 달려서 면소재지에 있는 우체국에 갈 적에 으레 논둑길을 달린다. 자동차 달리는 큰길은 재미없어서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논둑길을 달릴 적에 오르막길이 하나 있는데, 이 오르막에 늘 논물이 흐른다. 논물이 늘 흐르는 논둑길을 자전거로 달리다 보면 논흙하고 논물이 확 튄다. 아이들은 논흙이랑 논물이 튈 적에 눈에도 들어가니까 그리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논흙이랑 논물이 덜 튈 만한 자리를 골라서 자전거를 달리는데 그만 그 자리에 뭔가 물컹한 것이 있어서 자전거가 미끄러졌다. 아차 할 적에는 벌써 내 자전거가 손잡이가 옆으로 휙 돌아가서 넘어지려 했고, 이때에 나는 샛자전거와 수레에 앉은 아이들이 놀라거나 다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이러면서 뒤로 충격이 덜 가거나 안 가도록 넘어졌는데, 이렇게 넘어지느라 무릎이 몹시 깨지고 팔꿈치가 제법 벗겨졌으며 이래저래 몸 여러 곳이 다쳤다.


  넘어지면서 자전거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이렇게 해야 자전거가 옆으로 뒤틀리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 논둑길에서 아이들이 논에 처박히지 않는다. 앞으로 더 미끄러지지 않고 내 몸으로 자전거를 세운 다음에 뒤를 돌아본다. 큰아이가 바닥에 ‘콩’ 찧어서 팔꿈치가 살짝 부은 듯하다. 큰아이는 아프다고 울먹이려고 하다가 아버지 다리에 철철 흐르는 피를 보고는 ‘아프다’는 말이 쏙 들어간다.


  나는 자전거에서 몸을 빼야 하니 억지로 일어섰다. 오른몸을 던져서 자전거가 더 미끄러지지 않도록 막았구나 싶다. 오른몸은 그야말로 너덜너덜하다. 그래도 반바지가 두꺼웠기에 오른몸은 덜 다쳤다. 다만, 오른무릎이 많이 다쳤다. 가까스로 서 보는데 끙 하는 외마디소리가 날 뿐 어찌할 길이 없다. 한동안 구부정하게 서서 숨을 가누니 작은아이가 “아버지 다리에 피가!” 하고 외친다. 내 다리를 내려다보니 참말 피가 줄줄줄 흐른다. 길바닥에도 핏물이 방울진다. 큰아이는 고맙게도 옷만 버렸다. 큰아이더러 집으로 가서 새옷으로 갈아입으라 하고 마른천 한 장만 갖다 달라고 이른 뒤, 절뚝절뚝 걸어서 마을 어귀 빨래터로 갔다.


  몇 해 만일까. 2005년을 마지막으로 길바닥에서 구르며 어깨마 무릎이 갈려서 다친 일이 더 없지 싶다. 2010년에도 한 차례 있었지. 큰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다녀오는데, 어쩐 일인지 마을 어귀 한쪽 길바닥이 움푹 패였고, 바로 이 자리에 자전거 바퀴가 빠지면서 붕 하늘을 난 적이 있다.


  무릎이 크게 깨져서 걷기조차 어려우니 몸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면서 도무지 생각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 한 가지가 새롭게 있다. 몸이 참으로 많이 아파서 옴쭉달싹을 하지 못하고 곁님이 생채기를 달래 주어야 하고, 설거지도 밥차림도 모두 곁님한테 맡기고 보니, 내 마음이 오히려 여러모로 부드러워진다. 참으로 많이 아파서 잠자리에 누울 수 없어서 어쩌지 못하고 깨어서 멀뚱멀뚱 있는데, 아픈 몸이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자꾸자꾸 돌아본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는 일도 퍽 오랜만이다. 오늘 밤만 아프고 아침에는 씩씩하게 일어나자고 꿈을 꾸자. 4348.9.2.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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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에서



  풀밭에 앉는다. 풀밭이 있으니 풀밭에 앉는다고 할 수 있고, 풀밭을 찾아서 한참 걷다가 풀밭에 앉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풀밭에 앉을 적하고, 아스팔트 길바닥에 앉을 적하고 다르다. 나무걸상에 앉을 적하고 시멘트걸상이나 쇠붙이걸상에 앉을 적하고 다르다. 마룻바닥에 앉을 적하고 시멘트바닥에 앉을 적이 다르고, 나무책상을 끼고 앉을 적하고 플라스틱책상을 끼고 앉을 적이 다르다.


  풀밭은 흙이 있는 곳이다.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바닥이라면 자동차가 다니는 곳이다. 풀밭은 온갖 목숨이 자라는 곳이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는 모든 목숨을 짓밟은 곳이다. 나는 사람이라는 목숨이요, 밥이라는 목숨을 먹으면서 살기에,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이 아닌, 흙바닥이나 풀밭에 앉으려 한다. 맨발로 풀밭에 앉고, 맨손으로 풀포기를 쓰다듬고 싶다.


  책이라고 하는 물건은 공장에서 찍으나, 책이 될 종이는 숲에서 자란다. 숲이 나무를 키우고, 숲에서 모든 밥이 나오며, 숲 둘레에서 삶자리를 이룬다.


  풀내음을 맡으며 마음을 쉰다. 풀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연다. 풀빛을 바라보며 마음이 고요하다. 풀결을 느끼며 책마다 다르게 흐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책은 책꽂이에 꽂되, 책을 쥔 사람들은 누구나 호젓하게 풀밭에 앉아서 책을 펼칠 수 있기를 꿈꾼다. 책을 펼치면서 놀다가, 책을 내려놓고 풀밭에서 뒹굴 수 있기를 꿈꾼다. 4348.8.30.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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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책’은 어떻게 읽는가



  ‘새로 나오는 책’이 있다. 한자말로는 ‘신간’이라고 한다. 한국말로 짧게 적자면 ‘새책’이다. ‘새책’이라고 할 적에는 새로 나오는 책을 가리키기도 하고, 아직 아무도 사들이지 않아서 깨끗한 채 있는 책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면, 이 새책, 곧 ‘새로 나오는 책’을 읽을 적에 “새로운 책을 읽는다”고 할 수 있을까? 새로 나오는 책을 읽어야 새로운 이야기를 얻거나 느끼거나 배울 수 있을까?


  새로 나오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오래된 이야기’이기 일쑤이다. 아무리 짧아도 몇 달 앞서 쓴 이야기이고, 몇 달 앞서 마무리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몇 해 앞서부터 쓴 이야기이기 마련이다. 어떤 책은 수십 해 앞서 쓴 이야기요, 어떤 책은 수백 해나 수천 해가 흐른 이야기이다.


  참말 ‘새책’이나 ‘새로 나오는 책’이나 ‘새로운 책’이란 무엇인가? 간기에 찍힌 날을 보면서 ‘새’책이라고 할 수 없다. 책을 손에 쥐는 사람이 어떤 몸짓이나 매무새인가에 따라서 ‘새’책인지 아닌지 갈린다. 스스로 새롭게 마음을 품으면서 새롭게 눈을 뜨지 않고서야 ‘새’책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새롭게 삶을 가꾸면서 새롭게 꿈을 키우는 넋이 아니고서야 ‘새로운’ 책이 되지 않는다.


  공장(인쇄소)에서 찍어서 나오는 책이 ‘새로운 것’이 되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엮어서 내놓는 책이 ‘새로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책방에서 책꽂이에 꽂아 놓고 보여주는 책이 ‘새로운 사랑’이 되지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려고 하는 눈길이랑 마음길이랑 손길로 책 하나를 마주하면서 제 삶길을 기쁘게 걸어가려고 할 때에 비로소 ‘모든 새로운’ 숨결이 된다.


  올해에 나온 영화를 보아야 새롭지 않다. 지난해나 그러께에 나온 영화를 보면 안 새로울까? 열 해나 스무 해 앞서 나온 영화를 오늘 보면 ‘낡은’ 이야기를 마주하는 셈일까? 책도 영화도 강의도 학교도 모두 똑같다. 어떤 것을 놓고 이야기를 하든, 내가 스스로 새로움을 가슴에 품는 기쁜 마음일 때에 ‘새로움’을 누리는 사람이 된다. 4348.8.30.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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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5-08-30 07:54   좋아요 0 | URL
깊이 공감합니다~ ^ ^

숲노래 2015-08-30 08:4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바람을 타고 살아갈 새로운 나비



  알에서 처음 태어나고, 애벌레로 살다가, 번데기를 벗어나, 아주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숨결이 바로 나비이다. 우리 집 굵은 후박나무 줄기를 붙잡은 나비는 이제부터 바람을 타고 살겠지.


  나비도 새도 풀벌레도 바람을 타면서 난다. 그냥 날지 않는다. 날개만 있다고 해서 날 수 있지 않다. 비행기나 헬리콥터에 기름을 넣는대서 하늘을 날지 않는다. 비행기나 헬리콥터도 기름을 태워서 하늘로 떠올랐을 적에는 바람을 살펴서 고이 타야 한다.


  사람은 왜 하늘을 못 날까? 아주 마땅한 노릇이지만, 바람을 모르기 때문이다. 새는 어떻게 하늘을 날까? 날개가 있기에 날지는 않는다. 바람을 알고, 바람을 읽으며, 바람을 사랑하고, 바람하고 놀기 때문이다. 하늘을 훨훨 나는 새는 쉬잖고 날갯짓을 하지 않는다. 한번 바람을 타면 그대로 날개를 곧게 뻗으면서 바람하고 하나가 된다. 글라이더로 하늘을 날 수 있는 까닭도, 글라이더라는 날개를 손에 쥔 사람이 바람을 읽고 알며 사랑하려고 할 뿐 아니라, 바람이랑 놀려고 하기 때문이다.


  헤엄을 치는 사람과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물을 읽고 물을 알며 물을 사랑하여 물하고 노는 사람은 헤엄을 친다. 물을 안 읽거나 못 읽고, 안 알려 하며, 사랑하지 않는데, 게다가 물이랑 몰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헤엄을 칠까?


  책은 누가 읽는가? 책을 알려고 할 뿐 아니라, 사랑하고, 한마음이 되면서, 놀려고 할 적에 비로소 읽는다. 사랑은 누가 하는가? 오직 사랑을 알려고 하면서, 사랑을 마음으로 읽고, 사랑으로 사랑하면서, 사랑으로 삶을 기쁘게 놀려고 할 때에 사랑을 한다. 4348.8.27.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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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2015-08-27 16:34   좋아요 0 | URL
멋지시네요
자연을 관찰하시는 여유도 가지고 계시고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숲노래 2015-08-27 19:48   좋아요 0 | URL
옛날에는 누구나 자연과 함께 살았는데
요새는 거의 모두 자연과 동떨어져서 살아요.
저희는 시골에서 자연하고 늘 함께 지내니
언제나 마주하면서 고맙게 삶을 배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