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바닥에 주저앉기



  지하철 바닥에 주저앉는다. 오른무릎이 많이 나아서 제법 걸어다닐 수는 있으나, 한 자리에 가만히 서기는 아직 힘들다. 더군다나 좀 걸어다녔으면 앉아서 다리를 펴고 쉬어야 하는데, 시외버스에서 내린 뒤 지하철을 타고 움직이는 사이에 다리를 쉴 만한 데가 안 보인다. 지하철에서도 빈자리는 안 보인다. 이리하여 나는 거리끼지 않고 털푸덕 주저앉는다. 오른무릎을 아껴야 하니까.


  지하철 바닥에 주저앉아서 무릎을 살살 어루만진다. 고마워, 사랑해, 그리고 나를 너그러이 봐주렴. 네가 많이 나아 주어서 이렇게 바깥마실을 다니네. 일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씩씩하게 걸을 수 있기를 빌어. 시골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날마다 새롭게 거듭날 수 있기를 빌어. 4348.9.1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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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청소부는 언제나 즐겁다



  영화 〈메리 포핀스〉는 참 자주 다시 본다. 아이들이 다시 보고 싶다는 말을 틈틈이 하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노래를 화면과 함께 다시 보고 싶어서 참 자주 틀곤 한다. 처음에는 노래 한두 가지만 들을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끝까지 달리고야 만다.


  오늘은 〈메리 포핀스〉를 다시 보면서 “굴뚝청소부는 가장 행복한 직업”이라고 하는 ‘버트’ 대사를 눈여겨본다. 버트는 ‘뱅크스’ 씨네 굴뚝을 뚫으면서 아이들한테 ‘굴뚝’이라는 곳은 “그림자 반 빛 반이 있는 세계”라는 말을 들려주는데, ‘그림자’라기보다는 ‘어둠’이나 ‘고요’로 번역하면 한결 잘 어울리겠다고 느낀다. 버트는 굴뚝에 낀 검댕을 모두 털어서 뚫으면 아주 멋지고 놀라운 곳으로 나간다고 말하는데, 어둡고(고요하고) 밝은(빛나는) 흐름이 함께 어우러진 곳을 빠져나가서 만나는 새로운 누리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러한 삶을 늘 겪으면서 돈까지 버는 굴뚝청소부는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고 아이들한테 노래하고 춤추면서 말한다.


  아이들하고 춤노래에 빠져들어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해 본다. 아직 오른무릎이 낫지 않아 춤을 못 추지만, 굴뚝청소부들이 잔뜩 모여서 즐기는 신나는 춤을 나도 아이들하고 추고 싶다.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일, 참말 언제나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일을 해야 기쁜 삶이 될 테니까.


  오늘날 사람들 삶이 즐겁거나 기쁘지 않다면, 노래하거나 춤추지 못하는 채 ‘실적을 맞추기만 해야 하는 일’에 얽매여야 하기 때문이리라 싶다. 노래하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통령이나 공무원이 노래하면서 일할까? 의사나 변호사가 일하다가 노래를 할까? 가게 일꾼은 어떠한가? 전문 댄서가 아니라, 여느 사람으로서 춤추면서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


  먼 옛날부터 지구별 모든 숲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면서 일했다. 웃고 이야기하면서 일했다. 현대 물질문명 사회가 된 뒤부터 사람들은 일터에서 노래와 춤을 빼앗긴다. 아니, 스스로 노래와 춤을 버린 채 일을 한다. 따로 노래방이라는 곳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 몸을 뒤흔들고 소리를 빽빽 내지르기만 한다. 노래나 춤이 아니라 ‘악’을 쓴다.


  우리는 걸레를 빨고 밥을 지으면서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춤출 수 있어야 한다. 길을 걸으면서 노래하고, 버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춤출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 비로소 삶이다. 4348.9.9.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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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로 (즐겁게) 먹기



  꿈나라로 접어들면 아픈 몸을 잊는다. 꿈속에서 나는 어디도 아픈 데가 없다. 꿈길 어딘가를 걷는데 문득 어떤 목소리가 울리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얘야, 먹을 때에는 두 가지가 있단다.” “두 가지요?” “언제나 두 가지란다. 하나는 웃고 노래하며 먹기이고, 다른 하나는 고요히 꿈꾸며 먹기이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다르게 먹는 사람도 많던데요?” “이를테면?” “성을 내면서 먹거나 마구 먹거나 거칠게 먹거나 바보처럼 먹거나 흘리면서 먹거나 …….” “얘야, 나는 ‘두 가지로만 먹는다’고 말했다. 내가 말한 ‘두 가지’가 아니면, 그때에는 먹는 몸짓이 아니란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퍼뜩 잠에서 깬다. 잠에서 깨고 나서 한참 눈을 감고서 생각에 잠긴다. 꿈에서 들린 목소리가 누구 목소리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은 언제나처럼 하나도 안 들고, 참말 왜 ‘두 가지 먹기’만 있는가 하는 대목이 궁금했다. 얼추 한 시간 즈음 ‘두 가지 먹기’를 생각해 보니, 참말 이 두 가지가 아니면 ‘먹는다’고 할 수 없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래서 “두 가지로 (즐겁게) 먹기”처럼 말해야겠구나 싶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로만 먹지만, 이렇게만 말할 적에 못 알아들으면 사이에 ‘즐겁게’라는 꾸밈말을 넣어야지 싶다.


  아이들은 작은 사탕 한 알을 먹어도 환하게 웃으면서 노래한다. 어른들은 콩 한 알을 나누어 먹어도 거룩하게 두 손을 모아서 차분하고 고요하게 가슴으로 꿈을 그린다. ‘두 가지 먹기’란 아이답게 먹는 몸짓하고 어른답게 먹는 몸짓이라고 할 만하다. ‘아이’와 ‘어른’은 나이로 가르는 잣대가 아니니, 나이가 많아도 아이답게 먹을 수 있다. 다만, 아이더러 어른답게 먹으라고 한다면 좀 안 어울린다. 아이는 아이답게 먹을 뿐이지만, 어른은 어른답게 먹을 뿐 아니라 때때로 아이답게 먹으면서 삶을 새로 짓는다.


  무엇보다도 ‘먹을 때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 뜻은, 이 두 가지 몸짓으로 먹지 않으면 어떤 밥을 먹더라도 몸에 이바지를 하지 않기 때문이지 싶다. 아이답지도 어른답지도 않은 몸짓이라면 영양성분을 몸에 집어넣어 목숨을 조금 더 이을는지 모르나, 새로운 삶이 되는 꿈을 짓는 생각이 피어나는 몸짓은 조금도 아니다. 이른바 진수성찬을 차리더라도 웃음이나 노래나 이야기가 없는 밥상이라면 밥맛이 돌 수 없다. 감옥에 갇힌 몸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웃고 노래하며 꿈꾸는 몸짓이라면 콩깻묵을 반 그릇만 받아서 먹어도 언제나 배부를 수 있다.


  사람은 ‘먹으려고 살지’ 않는다. 사람은 ‘살려고 먹는’다. 다만, 살려고 먹되, ‘왜 사는가?’ 하는 대목을 생각해야 한다. 왜 사는가 하면, 목숨을 이으려고 살지 않는다. 꿈을 그려서 이 꿈을 이루려는 뜻으로 산다. 꿈을 그리지 않거나 꿈을 이루려는 뜻이 없는 삶이라면 삶이 아닌 ‘산 주검’일 뿐이다.


  밥 한 그릇이란 ‘몸을 얻어서 삶을 짓는 넋’인 우리들이 하루하루 새롭게 맞이하면서 기쁘게 열도록 도와주는 자그마한 기운이라고 할 만하다. 마음에 담은 생각을 몸이 받아들여서 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조그마한 바람이라고 할까. 4348.9.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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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못 읽어도



  다친 자리가 찬찬히 아물고 고름이 터지면서 마음이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아파서 쩔쩔매거나 넋을 잃고 끙끙거릴 적에는 ‘다 나아서 아이들하고 노는 모습’만 마음속에 그리는데, 이동안 아이들은 저희끼리 잘 놀고, 저희끼리 책도 잘 본다.


  아픔이 가셔도 책을 집기는 어렵다. 큰숨을 몰아쉬면서 몸이 어떠한가를 살핀다. 게다가 아픔이 가신 뒤에는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주어야 한다. 아픔이 가셨다고 해서 느긋할 수 없고, 아프지 않은 동안 바지런히 밥을 지어서 밥상에 놓아야 한다. 이러고 나서 다시 쓰러져야 한다.


  함께 마실을 다닐 적에 아이들은 “가방 무거워.” 한 마디로 가방을 모두 아버지한테 맡긴다. 나는 아이들 짐이랑 장난감까지 짊어지면서 싱글빙글 땀을 흘린다. 홀가분한 아이들은 마음껏 웃고 논다. 책순이는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기도 한다. 그래, 너희 아버지는 책도 못 읽고 놀지 못하더라도 다 괜찮고 즐겁지. 너희 모습을 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너희가 놀거나 책을 읽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책을 느끼거나 읽기도 한다. 4348.9.6.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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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지는 몸을 느끼기



  몸이 아플 적마다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대목인데, 밥 생각이 하나도 안 난다. 아이들이 밥을 먹든 능금이나 복숭아를 먹든 쳐다보지도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먹고픈 마음이 하나도 안 든다. 밥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국 간은 볼 수 있고 밥은 지을 수 있다. 나흘째 아무것도 안 먹지만 몸이 힘들지 않다. 그냥 몸이 가벼워지는구나 하고 느낀다.


  자전거 사고가 난 지 나흘이 되는 오늘은 드디어 두 다리로 선다. 어제까지 두 다리로 서고팠지만 어제는 두 다리로 서지 못했고, 오늘 비로소 선다. 그리고 몇 발짝 뗄 수 있다. 다만, 설 수 있고 조금 걸을 수 있다고 해서 부엌 청소도 하고 밥도 끓여서 아이들한테 먹이니, 몸이 많이 힘들었는지 더 서지도 걷지도 못한다. 폭삭 주저앉는다.


  나는 단식이나 금식을 해 본 적이 없고, 하려는 생각도 없다. 그러나, 몸이 아플 적에는 늘 아무것도 입에 안 댄다. 나중에 이웃님한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숲짐승도 몸이 아프면 밥은커녕 물조차 입에 안 댄다고 했다. 몸이 아플 적에 괜히 밥을 몸에 넣으면 소화기관이 움직이고 내장도 움직이면서 ‘몸 스스로 아픈 곳을 고치려는 흐름’이 끊긴다고 할까. 그러니까, 몸이 아픈 동안에는 소화기관은 조용히 잠든다. 이러면서 모든 신경이 ‘아픈 곳’에 모인다. 우리 몸은 아픈 곳을 스스로 다스려서 새롭게 깨어나도록 고칠 수 있다.


  재활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어젯밤 내내 잠을 안 자면서 다리를 펴고 굽히기를 했다. 잠도 안 왔다. 나중에 다리가 나아서 서거나 걸을 수 있을 적에 다리가 엇갈리거나 구부정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몸을 바닥에 반듯하게 누이고 아주 천천히 오른다리를 들어서 펴고 접고 내리고 펴고 접고 하는 몸짓만 했다. 걸음걸이가 어떠한가를 생각하면서 반듯한 매무새를 오른다리가 새롭게 아로새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몸이 새롭게 거듭난다면, 마음도 새롭게 거듭나야겠지. 거듭나는 몸처럼 마음도 즐겁게 거듭나서 한결 씩씩하면서 예쁘게 삶을 짓는 길을 생각하자. 월요일에는 아이들과 읍내마실을 가든지 자전거로 면소재지 놀이터를 가든지 하고 싶다. 반드시 이 꿈을 이루고 말리라. 4348.9.5.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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