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97 : 회사원이 읽는 책 - 저녁부터 밤까지

 서울에서 여느 회사원과 마찬가지로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길에 책을 한 권이나 두 권쯤 마저 읽습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전철길에서는 얇은 책은 한 권 반쯤 읽고, 조금 두툼하면, 아침에 2/3쯤 읽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마저 다 읽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저 다 읽고 나서 새로운 책을 가방에서 꺼내지 못합니다. 처음 집에서 길을 나설 때에는 맨 첫 역에서 타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맨 첫 역이 아니기도 하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전철을 탈 때에는 책을 펼치기 어려울 만큼 오징어떡이 되기 일쑤입니다. 이런 전철에서 책을 읽자고 하는 사람이 미쳤거나 바보이거나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렇지만 여섯 시나 여섯 시 반에 칼퇴근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퍽 드물지만, 오징어떡이 되는 가운데에도 끝끝내 책을 펼쳐 읽는 책사랑꾼을 한두 사람씩 꼭 보곤 합니다. 거의 모두 지치고 고단해서 곯아떨어져 있는데, 또는 집으로 돌아가서 만날 사람하고 수다를 떠느라 바쁜데.

 칼퇴근을 했어도 서울에서 좀더 머물며 사람을 만나고 느즈막하게 전철을 타면, 퇴근 물결에서 벗어난 까닭에 조금 널널합니다(그래도 미어터지기는 비슷비슷). 술 몇 잔을 걸쳤으면 해롱거리는 가운데 책을 펼칩니다. 둘레에 저처럼 해롱거리면서 손잡이를 붙잡고 기우뚱거리거나 용케 자리를 얻어 앉아 고개를 푹 숙이거나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찍 돌아가나 늦게 돌아가나 책 한 번 손에 쥘 만한 틈을 내기란 더없이 빠듯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읽으며 금세 다 읽어치운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호미,2009)이라는 책 끄트머리 빈자리에 몇 마디 끄적입니다. ‘책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틈을 내고 힘을 내고 돈을 내어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말미를 주고 집을 주고 돈을 주어도 책을 안 읽는다. 그 말미와 집과 돈으로 다른 놀음놀이에 젖어든다.’

 다 읽은 책은 집어넣고 새로 읽을 책을 꺼내고 싶으나, 급행전철이 부천과 송내와 부평과 동암과 주안까지 지나지 않고서는 꽉 끼고 밀리고 눌린 틈에서 꼼짝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 읽은 책을 다시 펼치며 밑줄 그은 대목을 곱씹습니다. “십오 년 동안 한결같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 12시 일본 대사관 앞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상설 퍼포먼스로 인식되는 측면도 있다 …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슈로서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 언론도 더는 이 문제를 돌아보지 않는다(236쪽).”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겨 봅니다. ‘사람들은 꼭 책을 읽어야 하나? 이렇게 고단하고 지치도록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책을 꼭 쥐어 주어야 하나? 책을 쥐어 준다면 무슨 책을 왜 쥐어 주나? 우리는 왜 우리 스스로 책하고 멀어지도록 살아가나? 우리한테 책이 있어 무엇이 좋고, 우리한테 책이 없어 무엇이 나쁠까? 오늘날 우리들은 한결같이 더 돈을 많이 주는 일터를 바랄 뿐, 돈을 덜 주더라도 책 한 권 읽을 겨를을 넉넉히 내어주는 일터를 안 바라고 있지 않나? 내 몸과 마음을 사랑스레 돌보고 아끼는 길은 어느 누구도 안 가르칠 뿐더러, 우리 스스로 찾아 배울 뜻이 없지 않는가?’ (4342.8.2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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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96 : 회사원이 읽는 책 - 아침부터 낮까지

 며칠 앞서부터 한글학회에 일을 나오고 있습니다. 한글학회는 서울 종로구 새문안길에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 볼 수 있는 길이지만, 자전거로 인천과 서울을 오가면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아기하고 씨름할 기운은 바닥이 나기 때문에 전철을 타기로 합니다.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용산과 새문안길 사이를 오가도 괜찮으나,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전철에 자전거를 싣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가득가득 타는 사람들만으로도 넘치니, 자전거가 아니라 바퀴걸상이나 아기수레 또한 들어갈 구멍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철칸 한쪽 구석에 기대어 서고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한손에는 책을 듭니다. 사진쟁이 전민조 님이 엮은 《사진 이야기》(눈빛,2007)를 읽습니다. 인천에서 떠나는 전철은 서울과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고, 이내 꾹꾹 눌러담듯 서 있는 사람은 서로서로 밀고 밀치면서 에어컨 돌아가는 전철은 후덥지근합니다. 문득, 이 전철이 1990년대에는 선풍기가 탈탈 돌아가며 ‘인천에서 서울 가는 급행’이 없었다는 생각이 납니다. 또한 1980년대에는 선풍기조차 제대로 없거나 망가져 있기 일쑤였다는 생각이 납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여기에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앞둔 이날까지 죽 돌아보고 헤아려 보건대, 전철로 오가며 책을 손에 쥔 사람은 나날이 줄어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리고, 예나 이제나 ‘전철을 타면서 책을 읽는 한국사람은 참 적다’는 이야기를 누구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는 것에 멋있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사진도 멋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그런 사진을 추구했던 내 모습이 사진의 노예로 보일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74쪽/최광호).”는 대목을 밑줄을 그으며 읽습니다. 이 대목에 밑줄을 긋는데 제 앞쪽으로 어느 아가씨가 불쑥 끼어들더니 신문을 쫙 펼치며 읽습니다. 신문 끄트머리가 제 얼굴에 닿을락 말락 합니다. 제 뒤에 서 있던 아저씨가 아주 큰 소리로 재채기를 합니다. 틀림없이 입에 손을 안 대고 재채기를 했다고 느낍니다.

 전철은 어느덧 신도림역에 닿으면서 거의 모든 손님이 내립니다. 신도림역에서 내린 절반쯤은 강웃마을로 갈 테며, 다른 절반쯤은 강아랫마을로 갈 테지요. 집에서 나와 전철역에 처음 들어설 때부터 아직까지도 손에 책을 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만 보입니다. 사람이 오징어떡처럼 눌리는 전철에서는 손에 책을 쥔 사람을 더더욱 볼 수 없었습니다.

 숨막히는 전철칸에서 시달리다가 서대문역에서 내려 걷습니다. 광화문역에서 내리면 조금 덜 걷지만, 몇 걸음 더 걷더라도 아침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천천히 팔월 기운을 느끼고 싶습니다. 몇 분쯤 하느작하느작 거닐면서, 사람 걷는 길을 뚝 끊고 지붕 없이 새로 만든 ‘자전거 주차장’ 어설픈 모습을 봅니다. 울퉁불퉁한 거님길을 느끼고, 밝고 가벼운 차림인 아가씨와 까만 양복 차림인 아저씨를 숱하게 스칩니다. 낮밥때가 되니 온 길거리에 사람들로 그득하고 퍽 많은 사람 손에는 커피잔이 쥐어져 있습니다. 회사원은 새벽바람으로 일어나 낮밥을 먹을 때까지 책을 손에 쥘 겨를이 몇 분이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4342.8.1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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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94 : 읽고 싶은 책

 자전거책에 글 하나 쓰신 어느 분이 책을 서로 바꾸어 읽자고 연락해 옵니다. 제가 쓴 책을 보내고, 그분 글이 담긴 책을 받습니다. 여러 사람이 다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르게 살면서 자전거를 만나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모두 다른 사람이지만 ‘자전거를 좋아한다’거나 ‘자전거를 즐겁게 탄다’는 대목에서는 한동아리입습니다. 다만, 한 가지 대목에서 아쉽다고 느끼기에, 책을 펼치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글을 쓴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에 있지만, 모두 ‘서울이라는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도시에서 흙이나 자연하고는 동떨어진 일손’을 붙잡고 있습니다. 젊은 분들이기에 더 빠르게 달리는 예쁘거나 잘 빠진 자전거한테 눈길을 두는지 모르지만, 좀 나이든 분들이 지난날 짐자전거와 얽힌 옛생각을 늘어놓듯 오늘날 사람으로서 오늘날 사랑받는 자전거와 얽힌 ‘추억’에 갇혀 있습니다.

 오랜만에 《블랙 잭》(데즈카 오사무)이라는 만화책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 또한 저 나름대로 제 ‘추억’에 사로잡히면서 책을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좋아하는 책을 찾아서 읽고 새기고 받아들인다 할 텐데, 저부터 좀더 옳거나 바르거나 아름다운 책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제 옛생각에 사로잡힌 채 제자리걸음을 하듯 고인 물과 같이 책을 만나지 않느냐 싶습니다.

 받은 책을 덮고, 잠자는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일거리 때문에 읽어야 해서 책상맡에 쌓아 놓은 책을 가만히 쓰다듬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당신들 스스로 하고픈 일이나 꿈꾸던 일이 아니라, 코앞에 닥친 먹고사는 일 때문에 버겁고 빠듯해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책을 못 읽는다고 하는데, 책과 함께 살아간다는 저부터 제가 느끼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책으로는 다가서지 못하는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구나 제 좁은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아끼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며, 좋아하며 즐기는 일을 찾고, 훌륭하면서 올곧은 책을 손에 쥐는 삶이란, 어떻게 보면 꿈같은 노릇이거나 이루지 못할 하늘나라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식구들 먹여살리고 내 앞가림을 하고 내 얼굴값과 이름값을 지키자면, 정작 내 넋과 얼을 알뜰히 추스를 겨를이 없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읽고 싶은 책’에서는 멀어지고 ‘읽기 싫어도 읽을밖에 없는 책’을 읽도록 길들여 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며칠 앞서 《적과 흑》 1950년대 옮김판을 오랜만에 들추었습니다. 스탕달 님 이 옛 작품을 읽고 싶어서, 헌책방에서 퍽 묵은 옮김판을 찾아내어 갖추었는데, 아직 첫 쪽조차 못 넘깁니다. 다른 숱한 책에 치여 자꾸 뒤로 밀립니다. 북녘에서 옮겨낸 적이 있는 ‘아리요시 사와코’ 소설 또한 장만하기는 했어도 못 넘기고 있으며, 김석범 님 소설 하나 또한 어렵사리 얻어 놓았으나 못 펼치고 있습니다. 혼자 살 때에는 밥을 먹으면서도 읽고, 집에서 보리술 홀짝이면서도 읽은 책들이지만, 세 식구가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에는 어떠한 책조차 뒤적이기 힘듭니다. 따지고 보면, 책이란 이야기요 삶이라, 다른 이 얘기나 삶을 엿보지 말고 내 삶을 들여다보고 읽어도 넉넉하니까 책이 없어도 되는지 모르는데, 식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워도 되는데, 얌전히 꽂힌 책을 떠올릴 때면 눈물이 흐릅니다. (4342.7.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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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95 : 읽고 나서 다시 읽는 책

 지난 2007년에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 뒤 올 유월부터 두 번째 살림집으로 삼으며 지내고 있는 인천 중구 내동 골목집 2층 씻는방에서는 창밖으로 복숭아나무가 가까이 보입니다. 창문 밖으로 손을 뻗으면 나날이 익어 가는 푸른 열매를 쥘 수 있습니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열매가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나중에 알맞게 다 익은 다음 제가 슬그머니 따서 먹어도 괜찮을까 헤아려 봅니다. 동네에서 살아가는 새들이 쪼아먹게 두어야 할까 싶기도 한데, 손 닿는 대로 마꾸 따지 않고, 꼭 한두 알만 따먹으면 괜찮지 않으랴 생각해 봅니다.

 지난 밤부터 새벽과 아침에 걸쳐 제대로 잠들지 못하며 찡찡대던 아기가 낮나절부터 새근새근 잠들어 주었기에 모처럼 마루에 나앉아 부채질을 하며 책을 펼칩니다. 지난달부터 조금씩 읽다가 지난주에 다 읽은 책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훑습니다. 나라안에서 한비야 님이 세계여행과 세계빈민구호 일을 하면서 이름값이 높다면, 이 책을 쓴 ‘소노 아야코’ 님은 일찍이 1950년대부터 비정부기구 일을 하면서 온누리 가난한 나라를 돕는 데에 힘을 보태면서 이름값이 높습니다. 저는 예전에 《계로록》이라는 책을 읽으며 ‘소노 아야코’라는 이름을 알았는데, 나중에 다른 책을 더 읽다 보니, 숱한 소설을 쓰는 가운데 가난한 나라 돕기를 오랫동안 해 왔음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참에 나온 책은 이제까지 쓴 책하고 사뭇 다르게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 하고 스스로 묻는데, “숲은 반딧불이가 내뿜는 빛으로 넘쳐나고 사람은 반딧불이의 빛을 헤치면서 걸어간다고 했다. 나는 그처럼 청정한 공기를 아프리카의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었다. 한 번도 사람의 폐와 장은 물론 자동차 엔진에도 들어간 적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깨끗하고 강렬한 생기로 가득 찬 공기였다. 공업의 발전과 반딧불이의 서식은 양립할 수 없다는 원칙을 나는 카메룬과 방글라데시에서 알았다(78쪽).”는 이야기처럼, 당신은 ‘온누리 돈과 물질이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도록 하려’고 가난한 사람 돕는 일을 스스로 맡아서 해 왔다고 밝힙니다. 당신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이 나아가는 마지막 자리는 ‘반딧불이가 일본에서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데에 있고, 이렇게 이루어지자면 미국뿐 아니라 일본도 한국도 유럽도 인도도 한결같이 무기를 녹여 낫과 쟁기로 바꾸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책을 덮고 능금 한 알을 먹습니다. 어제 서울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능금을 한 봉지 안겨 주었습니다. 우리가 손님한테 먹을거리를 차려 주어야 할 판에 거꾸로 얻어먹습니다. 집에서 옆지기하고 능금을 먹는데, 한 알을 그냥 먹을 때에는 깡지까지 먹기 힘듭니다. 그러나, 칼로 반을 쪼개어 먹을 때에는 씨앗까지 오독오독 깨물어 깡지 하나 안 남기고 다 먹습니다. 왜 이렇게 다를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예전부터 늘 이렇습니다. 판이 끊어져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는 《내가 만난 여자 그리고 남자》(오숙희,1991)를 다시금 펼쳐 보려고 하는데, 잘 자던 아기가 어느새 깨어나 방긋 웃더니 엄마와 아빠 있는 데로 아장아장 걸어옵니다. “나는 어머니들에게 말하고 싶다. 딸로 하여금 같은 여성으로서 배신감을 느끼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끔 생각해 보시라고(74쪽).”라는 대목까지 훑고는 책을 덮고 아기를 덥석 안습니다. (4342.8.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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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89 : 선생님이 읽는 책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어른을 두고 ‘스승’과 ‘교사’와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낳아 기른 어버이를 가리키는 한자말 ‘부모’ 뒤에 ‘-님’을 붙여 높이듯, 우리를 가르치는 분을 가리키는 한자말 ‘선생’ 뒤에도 ‘-님’을 붙여 높입니다. 가만히 보면, 토박이말 ‘스승’과 ‘어버이’ 뒤에는 ‘-님’을 안 붙입니다. ‘스승님’이라고 말하는 분이 있으나, 따로 ‘-님’을 붙이지 않아도, 이 낱말 그대로 높이고 받드는 느낌을 나타냅니다. 지난날 여느 사람을 내리누르던 힘이 대단했던 ‘임금’한테 ‘임금님!’ 하면서 고개를 숙였지만, 오늘날 ‘선생님’은 사뭇 다릅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자리가 높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한편, 어렵고 힘들고 걱정되는 일이기 때문에 이처럼 말하는구나 싶습니다.

 대입시험을 앞둔 고등학교 아이들이 스스로 ‘책읽기 모임’을 꾸려 ‘느낌 나누기’를 했던 발자취를 그러모은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삼인,2009)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이들은 깊은 뜻이나 생각이 없이, ‘대입시험에서 논술 잘 치르자’면서 책읽기 모임을 꾸렸고, 저마다 책을 읽은 느낌을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아이들 하나하나를 살피면 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무리에 듭니다. 아이들이 쓴 글을 읽으니 ‘공부 잘하고 책 좀 읽는 티’를 내겠다며 부러 어려운 말을 골라 쓴 대목이 곧잘 보입니다.

 제가 이 아이들 나이였을 때를 떠올립니다. 저라고 이 아이들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저는 많이 모자라고 어줍잖다고 느끼지만, 그때에는 더 모자라고 어줍잖았으며, 제 둘레에 ‘책 좀 읽는’ 동무이든 어른이든 보이지 않았기에 우쭐거리거나 잘난 척해 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은 ‘낡은’ 말인 듯 생각하면서, 익었으니 고개 빳빳해야 하는 양 꼴값을 떨었습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시절 3년을 보내면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은 다 안다 … 나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제대로 된 ‘생각하기’의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130, 141쪽)

 논술 준비를 한다지만, 학교 안쪽에서 선생들이 이끌어 배우는 책읽기 모임 느낌 나누기가 아닌, 아이들 스스로 모임을 꾸리고 저마다 읽을 책을 생각했다는 일은 퍽 놀랄 만합니다. 우리 나라로서는 혁명일 수 있습니다. 비록 접시물에서 이루려는 혁명이지만.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다치고, 선생님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생각없는 바보로 자라도 괜찮을까요. 선생님들 스스로 아이들을 바보로 키우고 가르쳐도 되는가요. 아이들 스스로 ‘우린 생각할 까닭 없이 시험만 잘 쳐서 대학 가면 그만이야’ 하도록 내모는 당신들한테 ‘선생님’이라는 거룩한 이름이 알맞습니까. 달삯 잘 나오고 연금 넉넉하고 방학 길고 심심풀이로 손발운동(체벌) 하는 월급쟁이로만 있고자 하는 분들한테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그나마 ‘교사’라는 이름이 어울리나요. 교재가 아닌 ‘참다운 좋은 책’을 읽는 스승길을 걷는 분이 있기는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고등학생이 대학교에 가지는 않으며, 모두 다 대학교에 갈 까닭은 없음을 되새기면서, 아이들한테 생각힘을 북돋우고 당신 스스로도 생각날개를 펼치려는 ‘선생님 노릇’을 계급장 떼면서 해 보고자 소매 걷어붙이는 분은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4342.6.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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