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는 눈빛 94. 무엇을 찍어서 보여줄까



  사진에 찍힌 모습은 두고두고 남습니다. 한 해가 흐르고 열 해가 흘러도, 사진에 찍힌 모습은 고스란히 남습니다. 사진에 찍힌 사람이 나이가 들거나 이 땅을 떠나도, 사진에 찍힌 모습은 그대로 남습니다. 뜻하지 않게 찍힌 모습이건, 일부러 찍힌 모습이건, 사진에 찍힌 모습은 앞으로 언제까지나 남습니다.


  무엇을 남기고 싶어서 찍는 사진일까요. 누구를 남기고 싶기에 찍는 사진일까요. 어떤 이야기를 남겨서 열 해나 스무 해나 서른 해 뒤에 살아갈 사람한테 보여주려는 사진일까요. 어떤 삶을 남겨서 백 해나 이백 해나 삼백 해 뒤에 태어나 살아갈 사람한테 물려주려는 사진일까요.


  오늘 이곳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은 이삿짐 사이에 섞여 사라질 수 있습니다. 어제 이곳에서 찍은 사진 한장은 이웃나라 일본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터지면서 그대로 몽땅 사라지듯이 참말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찍고 잊은 사진 한 장은 앞으로 쉰 해나 백 해 뒤에 갑작스레 나타나 새롭게 읽힐 수 있습니다. 어제 이곳에서 찍고 잃어버린 사진 한 장은 앞으로 서른 해나 이백 해 뒤에 어디에선가 뜻밖에 나타나 새삼스레 읽힐 수 있습니다.


  열 해 앞서 어느 사진전시회에 걸린 사진은 오늘 어떤 뜻을 보여줄까요. 스무 해 앞서 어느 사진전시회에 걸린 사진은 오늘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서른 해 앞서 어느 사진전시회에 걸린 사진은 오늘 어떤 삶을 밝힐까요.


  작품으로 찍든 예술로 찍든, 작품도 예술도 아닌 즐겁게 찍는 사진이든, 앞으로 서른 해쯤 뒤에 어떻게 읽힐 만하거나 어떤 이야기를 남길 만한 사진인지 가만히 돌아봅니다. 내가 나를 찍는 사진이든, 내가 우리 집 아이들을 찍는 사진이든, 내가 이웃과 동무를 찍는 사진이든, 내가 내 어버이를 찍는 사진이든, 내가 꽃이나 나무를 찍는 사진이든, 이 사진은 앞으로 어떤 숨결을 담을 만한지 곰곰이 헤아립니다.


  사진이 제값을 하려면 꾸준하게 다시 읽힐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이 제빛을 밝히려면 한결같이 새로운 이야기로 읽힐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 찍은 뒤 잊거나 잃을 만한 사진이라면 처음부터 안 찍어도 됩니다. 한 번 찍은 뒤 마음에 안 남거나 가슴에 못 새기는 사진이라면 처음부터 굳이 안 찍어도 됩니다. 4347.11.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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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93. 왜 너를 찍는가



  씨앗 한 톨이 바람에 날려 퍼집니다. 마을 할매가 이녁 밭자락에 상추를 심으니, 상추가 무럭무럭 자란 뒤 씨앗을 맺습니다. 마을 할매는 이듬해에 다시 심을 상추씨를 건사하는데, 이 사이에 상추씨 몇 톨이 바람을 타고 곳곳으로 퍼집니다. 마을논 도랑 귀퉁이에 늦가을 상추풀이 한 포기 돋습니다. 아무도 이곳에 상추를 안 심었으나, 바람이 상추씨를 심어 주었습니다.


  씨앗 한 톨이 새똥과 섞여 떨어집니다. 새들은 먹이를 찾아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닙니다. 애벌레를 찾고 나무열매를 찾습니다. 애벌레는 새한테 고마운 먹이가 되고, 나무열매는 새한테 반가운 밥이 됩니다. 나무열매를 냠냠 먹은 새는 이리저리 즐겁게 날다가 똥을 뽀직 눕니다. 똥에 섞인 씨앗은 하늘을 가르며 떨어집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된 길바닥에 떨어지면 다시 태어나지 못하지만,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된 길바닥에 떨어지더라도 때마침 비가 내려 씨앗을 흙땅으로 옮겨 주면, 씨앗 한 톨은 기쁘게 땅에 깃들어 뿌리를 내립니다. 새로운 나무가 자랄 수 있습니다.


  조그마한 생각 하나를 키웁니다. 아직 조그맣고 조그마한 생각 하나를 돌봅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길을 생각 하나로 키웁니다. 이제부터 이루려는 꿈을 생각 하나로 키웁니다.


  생각은 무럭무럭 자랍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씨앗과 같은 생각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자꾸자꾸 자라는 생각은 떡잎을 내놓고 줄기를 올리듯이 차츰차츰 아름다운 모양새가 됩니다. 꾸준히 자라는 생각은 뿌리를 튼튼히 내리듯이 알차고 올찹니다. 어느덧 생각은 커다란 무지개처럼 되고, 이러한 생각은 내 삶자락을 곱게 보듬습니다.


  사랑스러운 이웃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습니다. 어여쁜 아이들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습니다. 살가운 동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습니다. 작은 들꽃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습니다. 푸르게 우거진 숲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습니다. 자동차물결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골목집 꽃그릇을 쓰다듬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아픈 이웃과 웃는 이웃하고 어깨를 겯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어디에서나 생각을 키우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생각이란, 내가 오늘 이곳에서 찍는 사진 한 장이 씨앗처럼 씩씩하게 드리워 아름드리 나무로 자랄 수 있기를 바라는 생각입니다. 이 사진 한 장을 바탕으로 내 삶과 네 삶을 모두 즐겁게 어루만지고 싶은 꿈을 키우려는 생각입니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일까요. 나는 내 넋이고, 너는 네 넋입니다. 나는 내 숨결이고, 너는 네 숨결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이웃이요, 사람과 나무와 풀 사이도 이웃입니다. 어른과 아이 사이도 동무요, 사람과 새와 풀벌레 사이도 동무입니다. 이 지구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목숨은 서로 너와 나라는 금이 따로 없이 너나들이입니다. 내가 왜 너를 찍을까요. 너는 내 다른 모습이요, 너는 내 다른 숨결이며, 너는 내 다른 넋이고, 너는 내 다른 사랑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찍습니다. 4347.11.2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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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92. 보고 그리듯이 보고 찍다



  본 것이 있기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본 것이 없으면 글을 못 쓰고 그림을 못 그립니다. 본 것이 있기에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본 것이 없으면 사진을 못 찍습니다.


  본 것이 있기에 이야기가 자랍니다. 본 것이 없으면 서로 나눌 이야기가 없습니다. 들은 것이 있어도 얼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들은 것만으로는 사진을 못 찍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눈으로 바라보면서 눈으로 찍어서 눈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면서 하루를 엽니다. 나는 내가 사는 곳에서 하루를 열고, 이웃은 이웃이 사는 곳에서 하루를 엽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기에 다 다른 고장에서 살고, 다 다른 집에서 삽니다. 그런데, 다 다른 우리가 다 같은 집에서 산다면, 하루를 열 적에 어떤 마음이 될까요. 고장은 다르지만 모두 똑같은 아파트에서 하루를 연다면, 고장은 다르되 모두 똑같은 일터(회사나 공장이나 학교)로 모두 똑같은 자가용을 몰면서 모두 똑같이 길이 막히는 아침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어떤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열까요.


  아침에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켜는 사람은 모두 똑같은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아침에 신문을 펴는 사람은 모두 똑같은 생각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다 다른 사람이지만, 아침마다 모두 똑같은 마음에 똑같은 생각에 똑같은 틀에 갇힙니다. 아침마다 다르게 찾아오는 햇살이나 바람이나 구름이나 풀내음을 느끼지 않고, 아침마다 으레 똑같은 바깥 이야기(라디오·텔레비전·신문·인터넷)에 휩쓸립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같은 마음과 생각과 이야기가 되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같은 눈길이나 눈썰미가 되면, 우리는 무엇을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리며 사진으로 찍을까 궁금합니다.


  씨앗 한 톨을 심으면 날마다 새롭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들풀 한 포기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아도 날마다 새로운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도 날마다 모양새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다 다른 넋이나 마음을 잃고 다 같은 굴레나 쳇바퀴나 틀에 갇힌다면,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헤아려 어떤 것을 사진으로 찍을까요.


  내 사진을 찍으려면 내 삶을 보아야 합니다. 내 사진을 이루려면 내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내 사진을 누리려면 내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내 삶이 아직 없다면, 내 삶을 아직 못 찾거나 못 느낀다면, 내 삶을 아직 못 깨닫거나 모른다면, 아직 내 사진도 내 그림도 내 글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4347.11.2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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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91. 네가 바라보며 아끼기에



  우리 집 아이들이 늘 바라보면서 아끼는 작고 노란 꽃이 있습니다. 마당 한쪽에서 자라는 이 꽃은 늘 바라보아 주는 눈길이 있어 싱그럽게 피고 집니다. 늘 생각하고 늘 떠올리며 늘 그리는 숨결이 가까이에 있으니 해사하게 피고 집니다.


  온누리 모든 꽃은 우리가 바라보고 생각하며 아끼기에 피고 집니다. 우리가 바라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아끼지 않는다면, 온누리 꽃들은 피지도 못하고 지지도 못합니다. 꽃이 피어나자면 씨앗을 날려야 하고, 땅에 뿌리내려야 하며, 해와 바람과 비를 먹어야 하지만, 이에 앞서 저희를 헤아리는 숨결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아기는 사랑으로 태어납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비로소 아기가 태어납니다. 가시내와 사내가 있어야 태어나는 아기가 아니라, 사랑이 서로 만나서 찬찬히 어우러질 때에 비로소 아기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따사로운 눈길이 있어야 하고, 살가운 손길이 있어야 하며, 푸른 숨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태어나는 목숨은 없습니다. 그냥 자랄 수 있는 목숨은 없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면서 기쁘게 웃는 마음이 있기에 비로소 새 목숨이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사진이 태어나는 자리를 생각합니다. 사진기가 있기에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진을 생각하는 따스한 사람이 있기에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을 그리는 착한 사람이 있기에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을 지으려는 꿈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 있기에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기에 사진이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바라보고 생각할 때에 사진 한 장 얻습니다. 내가 손수 아끼고 사랑할 때에 사진 한 장 빚습니다. 내가 기쁨으로 마주하면서 가꿀 때에 사진 한 장 이룹니다.


  사진을 찍기 앞서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내가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동안 마음을 추스릅니다. 오늘 이곳에서 사진기를 쥔 내 손길에 따라 사진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4347.11.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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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90. 두 손에 꼭 쥐는



  서리가 내린 늦가을 이른 아침에 네 살 아이가 밥그릇을 두 손으로 꼭 쥐며 섭니다. 아버지가 훑는 까마중알을 밥그릇으로 받습니다. 네 살 아이는 손이 시리다고 하면서도 밥그릇을 건네지 않습니다. 끝까지 제 두 손으로 꼭 쥐어 까마중알을 받아서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아이는 두 손에 주전부리를 쥡니다. 아이는 두 손에 밥그릇을 쥡니다. 아이는 두 손에 뒷밭을 쥡니다. 아이는 두 손에 풀내음을 쥡니다. 아이는 두 손에 햇살을 쥡니다. 아이는 두 손에 기쁨을 쥡니다. 아이는 두 손에 아침을 쥡니다. 아이는 두 손에 찬바람을 쥐고, 재미난 놀이와 즐거운 사랑을 쥡니다.


  밥 한 그릇에 무엇이 있을까요. 밥 한 그릇에 웃음이 있습니다. 밥 두 그릇에 무엇이 있을까. 밥 두 그릇에 노래가 있습니다. 밥 세 그릇에 무엇이 있을까요. 밥 세 그릇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밥 네 그릇에 무엇이 있을까요. 밥 네 그릇에 사랑이 있습니다. 밥 다섯 그릇에 무엇이 있을까요. 밥 다섯 그릇에 삶이 있습니다.


  네 살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열네 살이 될 테고, 스물네 살이 됩니다. 서른네 살이 되고 마흔네 살이 됩니다. 앞으로 이 아이는 두 손에 사진기를 쥘 수 있습니다. 어린 날 밥그릇을 쥐고, 풀포기를 쥐며, 꽃송이를 쥐고, 자전거 손잡이를 쥐던 아이는, 사진기를 쥘 적에 그동안 온몸과 온마음으로 담은 웃음과 노래와 이야기와 사랑과 삶을 고스란히 녹여서 사진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습니다. 4347.11.1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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